[노정태의 뷰파인더⑮] 박범계 첫 임무, 尹 향한 공세 아닌 방역
●세기의 피고인 에르네스토 미란다
●인권의 역사는 범죄자 인권 보호의 역사
●경멸할만한 자의 인권도 똑같이 보호
●現정권 고위층 권리만 보호하나
●秋, 尹 공격할 사이 교정시설 난장판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서울 송파구 동부구치소에서 대규모 코로나19 집단감염이 발생한 가운데, 지난해 12월 29일 한 수용자가 “살려주세요”라고 쓴 문구를 취재진에게 보여주고 있다. [뉴스1] |
그 유명한 ‘미란다 원칙’이다. 경찰이 범인을 체포할 때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밝혀야 하고, 진술을 거부할 수 있으며,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수 있다는 내용 등을 알려줘야 한다.
‘미란다’는 누구일까. 때는 1963년 3월. 당시 21세이던 에르네스토 미란다(Ernesto Miranda)는 18세 소녀를 납치하고 강간한 혐의로 체포돼 있었다. 2시간여 심문을 거친 끝에 죄를 자백했다. 그는 “자백이 임의로 위협이나 면책의 약속 없이 내가 하는 진술이 나에게 불리하게 이용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나의 법적 권리들을 충분히 알고서 취해졌다”는 내용이 담긴 진술서에 서명했다.
재판이 시작되자 미란다의 태도가 달라졌다. 미국 연방수정헌법에 규정된 피의자의 권리를 제대로 고지 받지 못한 채 체포되고 심문받아 자백했으니 무효라고 주장했다. 사실이었다. 경찰은 미란다에게 연방수정헌법 제6조에 따라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지 않았다. 미란다는 변호인의 도움을 받지 못한 채 진술서에 서명했다.
애리조나 주법원은 진술서의 증거 능력을 인정했다. 절차상 하자가 있었지만 내용은 사실에 부합하며, 진술서에 적힌 내용을 보고 최종적으로 서명했으니 결국 동의한 것이라는 논리였다. 그렇게 내려진 단기 20년 장기 30년의 징역형을 애리조나 주 대법원도 확정지었다.
적잖은 분들이 이미 알고 계실 이야기다. 미란다는 결백한 양심수도, 존경받을만한 인권변호사나 법조인도 아니었다. 그 혐의가 명백한 강력범죄자였다. 하지만 오늘날 미란다 원칙은 인권 보호의 역사에 빛나는 한 이정표가 됐다. ‘나쁜 놈’의 인권도 존중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운 현대 문명의 상징이 됐다.
우리는 흔히 ‘인권 보호’라는 말을 들으면 ‘보호할 가치가 있는’ 인권의 보호를 떠올린다. 착한 사람, 선량한 시민을 지키는 게 인권 보호라고 말이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인권의 역사는 언제나 범죄자 인권 보호의 역사였다.
1215년, 영국 귀족들은 존 왕에게 흔히 ‘마그나 카르타’라고 부르는 문서에 서명하도록 강요했다. 국왕의 권리를 법적으로 제한했고, 국왕이 귀족의 재산을 침해하거나 귀족을 처벌하려 할 때 여러 제약을 부과하는 게 골자였다. 귀족들은 범죄를 저지르고 처벌을 받아야 할 상황이 왔을 때도 대비했다. 마그나 카르타 제39조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있다.
“자유민은 같은 신분의 사람들에 의한 적법한 판결이나 법의 정당한 절차에 의하지 않고서는 체포되거나 구금되지 아니하며, 재산과 법익을 박탈당하지 아니하고, 추방되지 아니하며, 또한 기타 방법으로 침해당하지 아니한다. 왕은 이에 뜻을 두지 아니하며, 이를 명하지도 아니한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민’은 지체 높은 귀족이나 왕족만을 뜻하는 표현이다. 귀족들은 자신들이 보기에 ‘정당한’ 절차에 따라 스스로를 재판하겠다는 이야기다. 애초 귀족들은 자신들의 권리만을 지킬 생각이었다. 이에 왕의 권력으로부터 독립된 법정을 요구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귀족뿐 아니라 중산층의 힘도 커졌다. 귀족들이 왕에게 자신들의 권리를 법으로 요구할 수 있다면, 중산층과 평민들도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는 것 아니겠는가.
1628년 의회는 찰스 1세에게 권리청원(Petition of Rights)을 들이밀었다. 신체의 자유, 조세법률주의 등 중요한 인권 개념이 더욱 넓게 확장됐다. 이후 1689년 12월 권리장전(Bill of Rights)이 제정됐다. 영국은 사상 최초의 입헌군주제 국가로 자리매김했다. 이는 중산층과 시민이 자유롭고 창의적인 경제 활동을 할 수 있는 정치적 바탕이 됐다. 영국은 이렇게 근대의 길을 개척해 나갔다.
코로나19 집단감염이 늘어나면서 방역 및 교정당국이 서울동부구치소 직원과 수용자를 대상으로 4차 전수조사를 하기로 한 지난해 12월 30일 서울 송파구 동부구치소에서 직원들이 대화하고 있다. [뉴스1] |
이러한 주장은 몇 가지 공통적 전제를 가지고 있다. ‘왕권이 강화되고 신하, 귀족 등의 권리는 축소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범죄자의 인권을 지키기 위한 법과 제도 및 관습은 개혁의 걸림돌이다.’ ‘‘조국 근대화’를 위해서는 인권 타령은 잠시 접어두고 더 중요하고 숭고한 임무를 달성하기 위해 온 나라가 힘을 모아야 한다.’ 박정희가 주창한 ‘한국식 민주주의’에 가까운 세계관이다.
실제 역사는 그런 식으로 전개되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모든 인권의 토대에는 영국의 귀족들이 왕을 협박해 서명하도록 만든 문서가 자리 잡고 있다. 귀족들은 자신들이 범죄를 저지르고 체포당할 그날에 대비해, 왕이 자신들을 ‘제대로’ 수사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온갖 법적 장치들을 넣었다.
그런 것들이 정교화 되고, 축적되며, 중산층과 일반 시민에게까지 확산된 과정이 인권의 역사다. 인권의 보호 범위는 계속 넓어졌다. 지체 높은 귀족, 존경할만한 중산층뿐 아니라, 미란다처럼 여성을 납치하고 강간한 강력범죄자까지 법에 의해 엄격한 보호를 받게 됐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미란다의 범죄를 옹호하지 않았다. ‘법에 정해진 절차에 따라 체포, 수사, 재판받을 권리’라는 추상적 가치는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원칙을 수호했다. 사회가 가장 경멸할만한 자의 인권마저도, 가장 존경받고 사랑받는 이의 인권과 같은 기준에서 보호받아야 한다. 실로 당연해 보이지만 준수하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은 현대 법치국가의 근본 원리다.
한국 역시 미흡하게나마 같은 방향으로 진보해왔다. 경찰이 피의자를 때리고 윽박지르며 수사하는 일을 당연하게 여긴 게 그리 먼 과거의 일이 아니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묘사된 ‘가학수사’는 희화화된 측면이 있을지언정 과장된 이야기는 아니다. 영화로 만들기 위해 일부러 수위를 낮추었다고 봐야 한다.
1987년 직선제 개헌 역시 같은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다. 경찰의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수사로 인해 서울대 언어학과 학생 박종철이 사망했다. 그 후 경찰은 더 이상 같은 방식으로 피의자를 심문하지 못하게 됐다. 세상이 뒤집히면서 얻어낸 건 대통령을 직접 뽑을 권리뿐만이 아니었다.
구치소와 교도소 재소자들의 인권 역시 점차 개선됐다. 신영복의 책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잘 묘사돼 있다시피 한국의 수용 시설은 인격적 대우와는 무관한 곳이었다. 한국사회는 민주화 이후에서야 재소자의 인권을 챙기기 시작했다.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자 교도관이 재소자에게 반말을 하지 않는 오늘날의 기준이 확립됐다.
대한민국은 분명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보수 정권과 진보 정권이 손바꿈을 하면서도 그와 같은 경향은 꾸준히 유지됐다. 하지만 최근의 몇몇 사건을 보고 있노라면 우려스럽다. 가장 취약한 계층과 계급, 비록 범죄를 저질렀지만 보호받아야 할 인간의 권리가 아닌, 오직 현 정권 고위층의 권리만을 보호하는 듯한 경향이 관찰되기 때문이다.
지난해 12월 31일 이용구 법무부 차관이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교정시설 코로나19 집단감염 현황 및 대책 브리핑’을 열고 “서울동부구치소 코로나19 확진자 집단감염 발생과 관련해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드려 진심으로 송구하다는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뉴스1] |
조국·정경심 부부의 재판 과정 또한 우리가 민주화 이후 경험해온 현실과는 사뭇 달랐다.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는 이른바 ‘잡범’들의 인권은 보호하되 ‘범털’들은 검찰 수사 및 언론 취재 등을 통해 그 치부를 밝혀 여론의 심판을 받게 하는 쪽으로 진화해왔다. 물론 그 과정에서 잡음이 터져 나오고 때로는 비극적 결말이 나타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시민사회가 정치 권력을 통제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은 달랐다. 피의자로서 자신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검찰청 포토라인에 서지 않았고 비공개로 출석해 8시간에 걸친 조사를 받으면서 진술거부권을 행사했다. 진술거부권은 헌법으로 보장된 피의자의 권리지만 대부분의 경우 잘 사용하지 않는다. 형량이 높아질 수도 있고 구속영장 청구 사유로 활용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는 2017년 3월 22일 오전 9시 7분, 조국이 쓴 트윗에서 잘 묘사하고 있는 바와 같다. “피의자 박근혜, 첩첩히 쌓인 증거에도 불구하고 ‘모른다’와 ‘아니다’로 일관했다. 구속영장 청구할 수밖에 없다. 검찰, 정무적 판단하지 마라.”
피의자의 진술거부권은 정상적인 법치국가라면 보장되는 권리다. 그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미란다 원칙’이 그러한 권리를 사회적으로 가장 소외된 계층에게도 적용해야 한다고 선언하는 것과 달리, ‘조란다 원칙’은 그저 조국 본인 및 현 정권 관계자들의 인권만을 챙기는 얌체 짓에 지나지 않는 듯하다.
1966년으로 되돌아가보자. 미란다는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다시 재판정에 섰다. 저지른 범죄가 엄연히 있으니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의 자백을 증거로 쓸 수는 없게 됐지만, 많은 범죄자가 그렇듯 그는 자신의 범행을 여기저기 떠벌이고 다녔다. 미란다와 동거하던 여성이 증인으로 나섰다. 이번에는 유죄 판결을 받아낼 수 있었다.
그 후 1972년 가석방된 미란다는 1976년 칼에 찔려 죽었다. 술집에서 카드놀이를 하다가 시비가 붙었는데 사태가 커졌다. 미란다를 살해한 혐의를 받은 용의자는 미란다 원칙을 내세워 묵비권을 행사했다. 경찰은 그의 범행을 입증하지 못했고, 결국 그는 석방됐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형사 피의자, 수형시설 수감자의 인권을 보호하는 것은 그들이 저지른 죄를 눈감아준다는 말과 전혀 다르다. 정확하고 적법한 절차를 통해 범죄를 수사하고 재판해 처벌해야 사회의 정의가 바로 선다.
드러날 범죄는 드러나고, 처벌받을 자는 처벌받게 돼 있다는 점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미란다 원칙에 의해 풀려났다 해서 미란다의 범죄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새로운 증거를 통해 결국은 처벌받았으니 말이다.
경찰은 이용구 법무부 차관의 주취 폭행,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범죄 의혹 등의 사안에서 여당 및 집권 세력에 대한 봐주기 수사를 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앞서 검토했듯 피의자의 인권을 존중하며 수사하는 것과, 피의자의 범죄를 덮어주려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이미 현 정권에서 법치주의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있는데, 더 이상의 퇴행이 벌어져서는 안 되겠다.
인권은 모두에게 평등하다. 가장 약한 자들, 더 나아가 다른 이에게 범죄를 저지르고 자유를 박탈당한 이들의 인권 역시 우리의 인권과 동등한 잣대로 보호받아야 한다. 박범계 법무부 장관 후보자는 윤석열 총장에 대한 부질없는 정치적 공세를 삼가고, 동부구치소를 비롯한 수형 시설의 코로나19 방역 상황부터 먼저 챙겨야 한다. 진보가 정권을 잡았는데 사회 전체의 인권이 나아지지 않는다면 이보다 더 큰 비극이 어디 있겠는가.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basil8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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