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2-07

英이코노미스트, K방역에 “他 민주국가에 적용 어렵다” 쓴 이유

 [노정태의 뷰파인더⑳] “韓 권력은 시민 사생활에 아주 작은 비중 둔다”

● 설 명절 가족 모이면 신고 당할까 걱정
● 고통 분담 당연시, 의료진 희생…‘방역의 정치화’
● 韓 방역당국은 어벤져스이자 CSI?
● 개인정보 거리낌 없이 들여다보는 국가
● 공격적인 ‘추적-검사’(track and test)
● 갤럽 조사, “韓 80% 방역 위해 권리 희생”
● 같은 조사 상위권 베트남, 조지아, 이라크
● 세계는 K방역에 열광하지 않았다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9월 11일 충북 청주시 질병관리본부 긴급상황센터에서 정은경 초대 질병관리청장(차관급)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이날 문 대통령은 “세계 모범으로 인정받은 K방역의 영웅 정 본부장이 초대 질병관리청장으로 임명된 것을 축하한다”고 말했다. [청주=청와대사진기자단]
2020년 3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으로 번져나가던 무렵. 인터넷 커뮤니티와 단체대화방(단톡방) 등에서 어떤 글이 떠돌기 시작했다. ‘코로나사태에 따른 각국의 대응방식’이라는 제목으로 중국, 일본, 영국, 미국, 이탈리아, 대만, 북한, 한국의 코로나 대응을 비교한 글이었다. 

아마 이 칼럼을 읽는 분들도 한 번쯤은 접해보셨을 것이다. 중국은 “가둬 놓고 조용히 죽게 둔다”, 일본은 “남몰래 조용히 죽길 바란다”, 미국은 “총으로 세운나라 총으로 지키려고 총포상으로 몰려가 총과 실탄을 싹쓸이 한다”, 이탈리아는 “발코니에 모여 박수치고 노래하며 베토벤의 장엄미사처럼 사를 찬미한다”던 그 글이다. 

대체로 재미있다고, 웃자고 그 글을 여기저기 퍼 날랐지만 나는 웃음이 나지 않았다. 다른 나라에서 코로나로 사람 죽는 걸 농담거리로 삼는 것 자체가 불편했다. 한국인이 쓴 게 맞는지 의심스럽기도 했다. 대만에 대한 서술이 그랬다. 처음부터 성공적이었던 대만의 방역을 ‘봉쇄’와 ‘배급’으로 일축하며 “가택연금 수준의 자가 격리 조치를 내리고 어기면 4000만 원의 벌금 폭탄을 투척하고, 마스크는 배급제로 해서 양안(兩岸‧중국과 대만)이 하나의 중국임을 입증한다”고, 그 카톡 글은 말하고 있던 것이다.

K방역 예찬론에 취해 놓친 것
물론 이것은 검증 불가능한 의혹이다. 누가 썼는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썼는지 알 방법은 없다. 하지만 대만의 방역을 보면서 “양안이 하나의 중국임을 입증”한다고 생각하는 한국인이 과연 얼마나 될까? 애초에 ‘양안관계’(兩岸關係)라는 외교 용어를 농담에 동원할 한국인 자체가 흔치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전혀 관심사가 아니니 말이다. 코로나 사태를 보며 생판 남의 나라인 대만과 중국의 관계를 떠올린다는 것부터가 퍽 이상한 일 아닌가. 

더 큰 문제는 그 글에서 한국의 방역을 칭송하는 방식이었다. 이 대목은 심각하게 문제적일 뿐 아니라 이 글의 주제와 직접 관련이 있다. 길게 인용해보도록 하자. 

8. 한국: 조용히 죽고 싶어도 체계적인 국가 시스템 때문에 도저히 불가능하다. 코로나를 생화학전으로 규정하고 첨단 진단키트와 방호복으로 무장한 유능한 어벤저스들이 나타나 순식간에 상황을 반전시킨다. 

그들은 CSI(과학수사대)처럼 현장과 동선을 탐문하고, CIA(미국 중앙정보국)처럼 GPS 위치를 추적하고, (서울시청 세금징수과) 38기동대처럼 구매내역까지 조회해서 조용히 숨어서 죽겠다는 신천지 환자들까지 기어이 찾아내고야 만다. 많이 아픈 자는 음압병실로 데려가서 정성껏 무료로 치료하고, 조금 아픈 자는 레저시설 같은 곳으로 보내 돈까지 주면서 쉬게 한다. 그리고 이들의 헌신으로 여전히 국민들은 대부분의 나라에서 박탈된 일상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 따라서 한국에서 코로나로 죽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 어렵다.” 

이 글이 인터넷에서 널리 퍼지게 된 것과 당시 분위기 사이에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처음에는 문재인 정부가 방역에 실패했다는 비판론이 나왔지만, 미국·유럽을 비롯한 ‘선진국’에서 코로나가 산불처럼 번지기 시작하자 사람들의 반응이 일순 달라졌다. ‘한국이 선방하고 있다’는 인식을 넘어, 소위 ‘K방역’에 대한 자화자찬이 시작됐다. 우리 스스로도 몰랐던 한국인의 어떤 대단한 면모 덕분에 우리는 코로나 위기를 무사히 넘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지난해 4‧15 총선이 치러졌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건으로 국민 여론이 대단히 나빠졌던 시점에서의 선거였다. 코로나도 처음에는 여당의 악재로 여겨졌다. 하지만 결과를 놓고 보면 문재인 정권에게 코로나란 마치 일본에 상륙한 몽고·조선의 군대를 쓸어버린 신풍(神風, 카미카제)과도 같은 존재였다. 정권 심판론을 ‘K방역’ 예찬론이 덮어버렸다. 세월호 유가족을 겨냥한 너무도 상스러운 막말 등 야당이 자초한 문제와 맞물려, 21대 총선은 180석을 얻은 범여권의 압승으로 귀결됐다. 

즉 코로나와 방역 문제는 처음부터 정치와 분리해서 논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난 총선을 앞둔 시점에는 그러한 비판을 가한다는 것이 ‘방역을 정치로 방해하는’ 행위로 여겨지기 십상이었다. 이제는 백신이 나왔고, 국내에도 곧 도입될 예정이라고 하니, 복기를 해볼 때가 됐다. ‘K방역’에 대한 다양한 해석, 특히 예찬론은, 무엇을 말하고 있었으며 또 무엇을 놓치고 있었을까?

유발 하라리와 언론의 ‘국뽕 장사’
1월 14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 거리에서 코로나19 타격으로 사실상 폐업절차를 밟고 있는 한 가게에 ‘장사하고 싶다’는 글귀가 붙어 있다. [홍진환 동아일보 기자]
앞서 인용한, 출처를 알 수 없지만 인터넷에서 유행한 글이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다. ‘K방역’의 구성 요소는 두 가지였다. 첫째, 의료진의 헌신. 둘째, 카드 사용 내역을 비롯한 개인 정보를 아무렇지 않게 들여다보는 국가.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국가가 국민의 정보를 들여다보는 것에 대해 아무런 문제 제기를 하지 않는 국민 혹은 시민사회. 

요컨대 지난해 봄과 여름 한국인들의 ‘국뽕’을 충족시켜준 ‘K방역’은 곧 공격적인 ‘추적-검사’(test and trace)와 같은 말이었다. 그것이 감염병의 초기 확산을 막는데 효과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한국이나 일본, 중국, 베트남 등 동아시아 국가를 제외하면 그런 길을 택한 나라는 그리 많지 않다. 인권, 특히 프라이버시에 대한 민감도가 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2020년 3월 무렵 국내 언론은 이 점을 그리 중점적으로 보도하지 않았다. 대신 ‘해외 석학들도 한국의 방역에 경탄’ 같은 식의 보도를 쏟아내기 일쑤였다. ‘유발 하라리-폴 크루그먼 등 세계적 석학 “한국 배워라”’ 같은 제목의 기사를 매일같이 접하지 않을 수 없던 시절이었다. 

문제는 외신 혹은 외국 석학의 논평과 국내 언론의 보도가 어느 정도, 혹은 상당한 왜곡을 포함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방금 제목을 인용한 기사에는 유발 하라리가 2020년 3월 20일 ‘파이낸셜 타임스’에 기고한 ‘코로나 바이러스 이후의 세계’(the world after coronavirus)라는 칼럼이 소개됐다. 한국 언론은 내용을 이렇게 전했다. 

“반면 투명한 정보 공개와 시민들의 협조로 감염 확산을 저지한 성공적인 사례로는 한국을 들었다. 하라리 교수는 ‘한국은 일부 접촉자 추적시스템을 이용하긴 했지만, 광범위한 검사와 투명한 보고, 정보를 잘 습득한 대중의 자발적인 협조에 의존했다’고 지적했다.” 

이것은 왜곡 보도라고 할 수 있다. 유발 하라리가 쓴 원문을 읽어보면 그와 같은 성공 사례로 한국 뿐 아니라 대만과 싱가포르가 동시에 언급되고 있다. 한국 언론은 유발 하라리가 말한 코로나 대응의 성공 사례에서 대만과 싱가포르를 고의로 누락시켰다. 마치 ‘사피엔스’의 저자인 유발 하라리가 대한민국을 향해 ‘따봉’을 날리며 기립박수를 치는 것 같은 심상을 독자에게 전달해 조회 수를 긁어내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소위 ‘국뽕 장사’를 하고 있던 셈이다. 

반면 한국의 방역 관행에 열렬한 박수를 보내지 않는, 혹은 그런 식으로 포장할 수 없는 외신은 소개되지 않았다. 가령 2020년 3월 5일 발행된 ‘이코노미스트’는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권의 ‘추적-조사’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했다. 물론 이와 같은 비판을 국내 언론은 실시간으로 전하지 않았다. 

“한국의 권력은 시민의 사생활에 아주 작은 비중을 둔다. 한국의 대응 중 일부는 다른 민주 국가에 적용되기 어려울 것이다(South Korea has powers that put very little weight on its citizens’ privacy; some aspects of its response might be hard to mount in other democracies).” 

서구의 방역 당국도 동아시아 국가들처럼 사생활 침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추적-조사를 할 수 있기를 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지역사회 감염이 만연한 상태에서 추적-조사에 많은 자원을 투입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또 프라이버시를 중시하는 자국민들의 여론을 무시할 수도 없다. 결국 각국은 자신들에게 맞는 최적의 방안을 택했을 뿐이다. 세계는 ‘K방역’에 열광하지 않았다.

한국인 80% “내 개인 권리 기꺼이 희생”
1월 1일 서울의 한 식당에서 고객이 전자출입명부(QR코드) 인증을 하고 있는 모습. [뉴스1]
지난해 1216일 여론조사기관 갤럽이 공개한 ‘코로나19와 백신 관련 인식-Gallup International 다국가 비교 조사 (4차)’는 우리가 ‘K방역’에 대한 자화자찬에 취해 놓쳐버린 것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202010월부터 12월까지 47개국 성인 총 4만4796명을 대상으로 전화, 온라인, 면접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한국인 중 80%는 ‘방역을 위해서라면 내 개인적 권리 일부를 기꺼이 희생할 수 있다’는 질문에 대해 ‘예’라고 응답했다. 이는 조사 대상인 47개국 가운데 11위로, 47개국 평균인 70%를 훌쩍 웃도는 수치다. 

이 질문에 대해 한국보다 순위가 높은 나라는 베트남(96%), 조지아(90%), 코트디부아르(88%), 이라크(87%) 등이다. 소위 ‘서구 선진국’ 중에는 오직 독일만이 80%의 긍정 응답으로 한국보다 한 순위 앞서 있을 뿐이다. 

표 한 장을 두고 너무 많은 해석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가령 갤럽의 해당 여론조사는 ‘방역을 위한 개인적 권리 희생’에 가장 부정적인 나라가 일본이라는 결과를 내놓고 있는데(긍정 31%, 부정 47%), 내용에 대해 다각도로 검토가 요구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일본의 다소 의아한 결과를 제외하고 나면 어떤 ‘경향성’이 보이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특히 베트남의 경우가 그렇다. ‘방역을 위한 국가 간 여행 제한’의 수용에서도 베트남이 긍정 99%로 1위를 기록하고 있다는 점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개인의 자유에 대한 인식과 소위 ‘철통 방역’간에는, 분명하지는 않더라도 느슨한 ‘음의 상관관계’가 존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뉴질랜드, 대만 등 코로나 방역을 가장 잘 한 나라들이 모두 개인의 자유를 억압했기에 그런 성과를 거두었다는 식의 주장을 하려는 게 아니다. 코로나가 전 세계로 퍼지기 시작한지 1년도 더 지난 지금, 이제는 좀 더 침착하게 이 질병과 그것의 통제에 대해 공정한 논의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코로나 확진자 수를 놓고 국가별 우열을 가리고 선진국이니 후진국이니 손가락질하는 것 자체가 ‘후진국’적인 사고방식이다. 한국의 확진자 및 사망자 숫자가 적은 것을 오직 ‘K방역’의 덕으로만 볼 수는 없다. 우리가 프라이버시를 무시한 탓이라고만 할 것도 아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코로나 바이러스 자체가 한국인과 같은 동아시아인에게 덜 퍼지거나 덜 치명적일 가능성도 있다. 

영국에서 202011월 현재까지 수집한 통계에 따르면 흑인 남성은 백인 남성에 비해 네 배 높은 사망률을 보인다. 흑인이 상대적으로 가난하고 사회적 열위에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상대적으로 소득 수준이 나은 인도계 이민자들 역시 백인 남자에 비하면 코로나 사망률이 두 배 높았다. 코로나의 확산과 치명성이 인종에 따라 달리 작동한다고 확언할 수는 없지만, 무관하다고 단언할 수도 없는 셈이다.

‘방역의 정치화’와 ‘착한’ 국민
필자는 소위 ‘밤 도깨비’ 같은 체질이다. 해가 진 다음에 글을 쓰는 게 편하다. 글이 잘 안 써지면 종종 밤 산책을 한다. 오후 9시 이후 영업 제한으로 인해 텅 빈 거리를 걷다보면 깜짝 놀라곤 한다. 아무도 없는 길에서도 굳이 마스크를 쓰고 있는 사람을 참 많이 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야외에서 마스크를 쓸 필요가 없다. 질병관리청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그렇다. 다른 사람과 2m 이상 거리를 두면 된다. 길거리에서 흡연자를 피하듯이 피하면 코로나도 피할 수 있는 것이다. 단, “다중이 모이는 집회·시위장, 500인 이상 모임·행사 등 행정명령 대상 장소에서는 마스크 착용이 의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밤 산책을 하는 필자가 마주치는 사람 열 명에 아홉 명은 마스크를 쓰고 있다. 참으로 ‘착한’ 국민들이다. 

문제는 국민은 착한데 국가가 나쁘다는 데 있다. 마스크를 쓰라면 쓸 필요가 없는데도 쓰고, QR코드를 찍으라면 단 한 사람도 거부하지 않고 찍는 국민들이다. 그런데 국가는 자영업자들을 대상으로 확실한 강제성 있는 조치를 취하지 않고 오직 ‘권고’만을 남발한다. 왜일까? 강제력을 지니는 영업 제한을 하면 공식적으로 손실 보상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명령’하는 대신 ‘권고’한다. 손해를 보겠지만 그 손해는 너희가 알아서 감당하라는 것이다. 

게다가 일부 지자체는 선거를 앞두고 1인당 10만원씩 현금 살포를 또 하겠다고 한다. 코로나 국면에서 장사가 안 돼 문자 그대로 생사의 기로에 놓인 사람들이 있고, 일부에서는 돈이 남아돌아 부동산과 주식 시장을 활활 불태우고 있는데, 그런 차이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소상공인과 자영업자가 죽어나가건 말건 대기업 정규직과 공무원들에게도 1인당 10만 원씩 용돈을 뿌리겠다는 이 나라에, 과연 정의는 있는가. 

지난해 봄 정부는 중국발(發) 외국인의 입국을 막지 않았다. 진작부터 단호하게 대응한 대만, 뉴질랜드, 호주 등은 2021년 2월 현재 확진자가 0으로 수렴하고 있다. 똑같이 반도체 호황을 맞고 있지만 대한민국의 GDP(국내총생산)는 적자인 반면 대만은 3/4분기 기준으로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대만은 내수까지 살아났기 때문이다. 진정한 ‘방역 성공’은 그런 것이다.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들에게 길고 고통스러운 시절을 강요하는, 설 명절에 다섯 명 모이면 이웃에게 신고 당할까봐 걱정해야 하는 우리는, ‘방역 성공’을 입에 담을 자격이 없다. 

한국 정부는 의료진의 희생을 쥐어짰고, 국민의 고통 분담을 당연한 것인 양 만끽하면서, 선거에서 톡톡히 재미를 본 후 ‘덕분에 캠페인’을 벌이며 공공의대 설립에 반대하는 의사들을 적폐로 몰아갔다. ‘방역의 정치화’를 가장 심하게 했고 지금도 하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문재인 정권이다. 코로나 확산 1년, 이제는 차분하게 잘잘못을 따지고 책임을 물을 때가 됐다.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basil83@gmail.com

2021-01-31

[노정태의 뷰파인더⑲] 문재인 팬덤에서 보이는 친박연대의 그림자

 ‘부족주의’에 끌려 다니는 한국정치

●우상호·박영선의 ‘文대통령 생일축하’
●애착·동일시·모방·투사로 이어지는 팬덤
21세기는 다시금 ‘부족의 시대’
●아이돌 팬클럽 닮은 정치인 팬클럽
●부족 본능은 배제 본능, 敵이 필요
●투표용지와 스마트폰 통한 패싸움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2017년 4월 27일 경기 성남시 야탑역 광장에서 열린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 집중유세에서 지지자들이 문 후보의 연설에 호응하고 있다. [동아DB]
1월 24일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라디오에 출연해 “오늘은 문 대통령님의 69번째 생신”이라며 “축하드린다”고 했다. 같은 날 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은 페이스북에 “오늘 문재인 대통령님 생신. 많이 많이 축하드립니다. 대한민국은 문재인 보유국입니다!!! 벌써 대통령님과 국무회의에서 정책을 논하던 그 시간이 그립습니다”라고 썼다. 

두 사람 모두 여당 내 무게감 있는 정치인이지만 문재인 대통령과 생일 축하를 주고받는 사적 친분이 있지는 않다. 그들은 왜 이럴까. 이유는 간단하다. 4·7 서울시장 보궐선거 후보 경선 때문이다. 일반 유권자 50%와 권리당원 투표 50%를 합쳐 후보를 결정하는데, 투표에 나설 만큼 적극적인 당원들은 문 대통령의 열혈 팬인 경우가 많다. 그러니 ‘문재인 팬덤’에게 잘 보여야 하는 것이다. 

정치인이 당선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것을 타박할 수는 없다. 정치인이 대중의 눈치를 보지 않는 나라가 눈치를 보는 나라보다 좋은 나라라고 말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민주당 서울시장 보궐선거 후보 경선에 임하는 정치인이 문 대통령 팬덤의 호의를 얻고자 하는 것을 문제 삼을 수는 없지 않을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민주주의는 다양한 이해관계자와 집단을 조율하는 정치 제도다. 유권자는 연령, 지역, 학력, 소득, 성별 등 다양한 방식으로 구분된다. 정치인은 자신이 중요시하는 의제와 유권자가 원하는 의제를 조율해 선거의 승리를 꾀한다. 하지만 팬덤 정치는 이와 같은 통상적 기준과 사뭇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겉보기에는 민주적인 듯 하지만, 민주주의를 내부로부터 파괴할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느슨한 애착에서 완전한 몰입까지
4·7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한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이 1월 27일 서울 여의도 더불어민주당 서울시당에서 열린 ‘민주당 정책엑스포 in 서울’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뉴스1]
필자는 세상 속 온갖 주제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게 있다. 스포츠 팀을 응원하는 팬의 심리가 그 중 하나다. 

스포츠가 주는 즐거움을 모른다는 뜻은 아니다. 가령 손흥민이 멋진 골을 넣는 모습을 보면 즐겁고 흥분된다. 하지만 손흥민의 소속팀인 토트넘 핫스퍼를 응원하며 승패에 일희일비하고, 라이벌 팀인 아스날에 분노하며 적개심까지 드러내는 행태는 잘 이해하지 못 하는 편이다. 

스포츠만의 문제는 아니다. 가수 팬, 영화 팬, 드라마 팬, 수많은 팬이 뭉쳐 서로 화를 내고 공격한다. 왜 사람들은 자신과 거의 무관한 집단에 가상의 소속감을 느낄까? 본인의 충성심을 드러내기 위해 돈과 시간을 쓰고, 정서적 에너지를 쏟아 부으며, 때로는 폭행이나 그보다 더 심한 범죄를 저지르기도 하는 걸까? 

영국의 사회학자 앤드류 튜더(Andrew Tudor)는 팬덤이라는 대중문화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1969년 학술지 ‘스크린’(Screen)에 ‘영화와 그 영향의 측정’(Film and the Measurement of its Effects)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여기서 그는 대중문화 소비자가 팬으로서 받는 영향을 네 가지 모델로 정리했다. 

첫째, 정서적 애착(emotional affinity). 대중은 특정한 스타를 향해 느슨한 애착을 느낀다. 둘째, 자기 동일시(self-identification). 영화의 관객이 스스로를 영화 속 등장인물과 동일시한다. 셋째, 모방(imitation). 영화 밖 현실에서도 영화의 등장인물을 모방한다. 넷째, 투사(projection). 영화 속 등장인물의 외모와 행동을 모방하는 차원을 넘어, 심리적인 차원에서 완전히 몰입한다. 

이러한 고전적 분석틀은 20세기 중후반까지 상당히 큰 설득력을 발휘했다. 가령 엘비스 프레슬리가 스타가 되자 젊은 남자들이 엘비스 프레슬리의 이른바 ‘군함머리’를 흉내 냈다거나,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본 후 오드리 햅번처럼 검은 스커트에 진주목걸이를 하고 머리를 틀어 올린 여자들이 대거 출현했다거나 하는 현상을 이해하는 데 요긴했다. 하버드대 심리학과 교수 스티븐 핑커는 그의 책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서 제임스 딘이 주연한 ‘이유 없는 반항’의 흥행 이후 청소년 사이에 칼싸움과 난폭운전이 늘어났다고 지적한 바 있다. 

국내의 경우에도 비슷한 사례는 흔히 발견된다. 지금도 연예인 누가 입었다는 옷이나 들고 행사장에 나타났다는 가방이 품절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일이 다반사다. 애착, 동일시, 모방, 투사로 이어지는 팬덤의 고전적 해석 모델은 여전히 어느 정도의 설명력을 갖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미래 예견한 1988년作 ‘부족의 시대’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20세기까지는 저 모델만으로 충분한 설명이 가능했을지 모르지만, 21세기의 팬덤 문화를 모두 이해하기에는 부족하다. 정보통신 기술이 발전하면서 같은 취향을 지닌 사람들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상시적으로 의사소통하고 있다. 이에 같은 ‘부족’을 형성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앤드류 튜더의 설명은 스타와 팬의 1:1 관계를 전제로 삼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팬덤 현상의 특징을 이해하려면 팬덤 상호간의 관계를 눈여겨봐야 한다. 좀 더 과감하게 말하면 스타와 팬의 관계보다 팬덤과 팬덤 사이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 면모를 잘 보여준 작품이 ‘응답하라 1997’이다. 주인공 성시원(정은지 분)은 고등학교 2학년이자 H.O.T의 열혈 팬이다. 당연히 H.O.T 팬클럽에 속해 있다. 하지만 그가 H.O.T, 그 중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토니 안과 맺는 정신적 관계는 앤드류 튜더의 설명처럼 직선적이지 않다. 수많은 다른 H.O.T 팬, 그리고 젝스키스 팬클럽과의 관계 속에 형성돼 있기 때문이다. 

두 아이돌 그룹의 팬들은 서로 머리끄덩이를 잡고 싸우고, 험한 말을 주고받으며, 끝나지 않는 자존심 싸움을 벌인다. 이에 따른 감정의 앙금은 성인이 되어서까지 남아 있다. 대체 팬이 뭐라고, 팬클럽 활동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자신을 한 집단에 동일시하면서 동시에 다른 집단을 적대시한단 말인가. 

그것은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인간은 거대한 현대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간다. 근본을 이루는 바탕은 150명 내외의 부족 사회를 이루고 있던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프랑스 사회학자 미셸 마페졸리가 쓴 책의 제목을 빌리자면 21세기의 우리는 다시금 ‘부족의 시대’에 살고 있다. 

1988년 발행된 ‘부족의 시대’는 미래를 예견한 책이다. 오늘날의 사회는 국민국가라는 추상적이면서 공식적인 정치 기구와, 개별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경험하는 개인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이 근대의 세계관이다. 하지만 마페졸리는 그런 근대적 구도가 곧 허물어지고 대신 감성을 공유하는 소집단, 즉 ‘부족’으로 나누어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개인은 사라지고 대신 ‘부족원’만 남는 셈이다. 

과거의 부족은 씨족과 혈통을 중심으로 구분됐다. 오늘날의 부족은 문화, 스포츠, 성별과 성적 정체성, 종교 등 다양한 요소에 의해 결정된다. 또 원한다면 (고통스럽겠지만) 탈출해 다른 부족의 일원이 될 수도 있다. 마페졸리는 개인주의가 쇠퇴하고 “다원주의, 수평적 네트워크, 감성적 연대, 촉각적 관계”에 기반하고 있는 신부족주의의 시대가 도래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어른의 짐을 벗어던진 어린아이가 돼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게 그의 ‘포스트모던’한 입장이었던 셈이다.

‘바보 노무현’에서 ‘친박연대’까지
2008년 3월 31일 서울 중랑구 면목동에서 서청원 당시 친박연대 대표와 총선 출마자들이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의원의 사진을 넣은 유세차량을 세워놓고 합동 유세를 하고 있다. [동아DB]
문제는 팬클럽의 시대, 부족의 시대가 문화·예술의 영역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는 데 있다. 21세기가 되자 아이돌 팬클럽의 작동 방식을 참고해 만들어진 정치인 팬클럽의 시대가 열렸다. 그 주인공은 지역감정과 맞서 싸우며 낙선에 낙선을 거듭한 ‘바보 노무현’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정치적으로 급부상할 무렵, 갓 대학교에 들어갔던 필자 역시 그 흐름에 자연스럽게 참여했다. 노란색 돼지저금통을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인터넷에 노무현에 대한 좋은 소식을 퍼다 나르며 글을 쓰는 등 ‘노무현 부족’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당시는 언론 뿐 아니라 기성 정치권 모두가 그 파급력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노무현은 수없이 많은 ‘각본 없는 드라마’를 쓰며 대통령이 됐다. 

‘바보 노무현’이라는 이름으로 탄생한 대중 동원과 조직 모델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팬덤에 서 꽃을 피웠다. 박근혜의 팬덤 정치가 얼마나 강력했는지 그가 탄핵당한 지금은 실감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200818대 총선에서 ‘친박연대’가 거둔 성과를 돌이켜보자. 정당득표율 13%, 지역구 6석을 당선시켜 총 14석의 의석을 얻었다. 정작 박근혜 본인은 당시 한나라당에 적을 두고 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 바깥에서 박근혜의 이름을 걸고 선거에 출마한 후보들이 당선될 정도로 강력한 팬덤 정치가 작동했다. 

팬클럽은 한국 정치의 새로운 표준으로 자리매김했다. 달리 표현하면 오늘날의 한국 정치는 공적 조직인 정당, 그리고 개인으로서 판단하고 투표하는 유권자를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보다는 누구 팬의 숫자가 가장 많은지, 누구 팬이 가장 극성맞은지, 누구 팬클럽 간에 싸움이 붙었는지 말았는지 같은 요소가 가장 중요해져버렸다. 우상호와 박영선이 문재인 팬클럽의 눈치를 보며 ‘대통령 생신 축하’를 크게 외친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우리가 인간인 이상 부족주의 자체를 없앨 수는 없다. 하지만 정치는 가장 공적인 영역이자 많은 이들의 이해관계가 드러나고 조율돼야만 하는 분야다. 정치가 부족주의에 끌려 다니는 것은 어떤 면에서 보더라도 바람직하지 않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당선을 보며 충격을 받은 미국의 지성계가 치열한 성찰 끝에 얻은 결론이기도 했다. 예일대 로스쿨 교수인 에이미 추아는 ‘정치적 부족주의’의 서문을 열며 이렇게 이야기한다. 

“인간에게는 부족 본능이 있다. 우리는 집단에 속해야 한다. 우리는 유대감과 애착을 갈구한다. 그래서 클럽, 팀, 동아리, 가족을 사랑한다. 완전히 은둔자로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 수도사도 수사도 교단에 속해 있다. 하지만 부족 본능은 소속 본능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부족 본능은 배제 본능이기도 하다.” 

마지막 문장이 핵심이다. 부족 본능은 배제 본능이다. 부족 본능에는 필연적으로 ‘우리’와 ‘저들’을 갈라놓는 세계관이 반영돼있다. 그러므로 토트넘 핫스퍼의 팬과 아스날의 팬은 서로 반목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한 ‘적’을 필요로 한다. 

부족주의의 작동 방식은 나치를 옹호했던 독일의 헌법학자 칼 슈미트의 이론을 떠올리게 한다. 칼 슈미트는 그의 주저 ‘정치적인 것의 개념’에서 “정치란 적과 친구를 나누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칼 슈미트의 세계관 속에서 정치에는 상위의 목적이 없다. 너는 내 편이냐 아니면 적이냐, 이 질문을 던지며 편을 갈라 싸우는 게 정치의 본질이고 그것이 전부다. 정치를 현실적으로 묘사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정치 허무주의’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돌멩이와 곤봉 대신 투표용지와 스마트폰
팬덤에 의해 유지되고 작동하며 끌려가는 정치가 위험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정치는 스포츠가 아니다. 응원하는 팀이 이기는 것을 보고 즐기기 위한 게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에게는 해결해야 할 수많은 현실의 안건이 있다. 설령 다수가 아닌 소수의 의견이라 해도 경청하고 존중해야 한다. 또 소수자, 아니 인간으로서 저질러서는 안 될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라 해도 보호받아야 할 인권을 갖고 있다. 

현대 민주주의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법치주의와 다원주의가 필요하다. 선거에서 졌든 이겼든 누구에게나 빼앗길 수 없는 인권이 있다. 또 모든 정치 행위는 법에 따라 이루어진다. 선거에서 패배하더라도 ‘멸문지화’를 당하지 않는다는 신뢰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권력을 가진 자들은 권력을 잃지 않기 위해 민주주의를 내부로부터 파괴하려 들 것이다. 온갖 폭력과 불법적 수단을 동원해 민주적으로 집권한 나치가 적에게는 민주주의를 허락하지 않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우리 편과 남의 편을 나누고, 선거를 통해 우리 편이 더 많다는 점을 확인하여, 이긴 쪽이 진 쪽의 의사를 완전히 묵살하고 자기 멋대로 하는 것.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돌멩이와 곤봉 대신 투표용지와 스마트폰을 손에 쥔 부족주의자들의 패싸움일 뿐이다. 물론 모든 정치의 근간에는 적과 친구의 구분이 깔려 있다. 하지만 특히 우리는 북한이라는 안보의 위험을 무릅쓰고 있으며 대외적인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해야 하는 나라에 살고 있다. 한국정치는 여야를 막론하고 적용될 수 있는 공공선을 발견하고 추구하기 위한 도구로 작동해야 한다. 그러자면 법치주의에 뿌리를 두고 다원주의에 입각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해야만 한다. 

문 대통령 팬클럽의 환심을 끌기 위해 여당의 중진급 인사들이 공개적으로 생일 축하 메시지를 쏘아 보내던 모습을 보며, 우리의 소중한 민주주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던 이유다. 한국 정당정치에 팬덤 문화와 부족주의의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basil8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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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30

입양아는 세상에 가장 아프게 던져진 존재… 대통령은 왜 사과하지 않나

 [노정태의 시사哲-아무튼, 주말] 하이데거와 김국환의 ‘타타타’
일러스트=안병현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한 치 앞도 모두 몰라, 다 안다면 재미 없지.”

온 국민이 다 아는 그 노래, ‘타타타’의 첫 소절이다. 양인자 작사, 김희갑 작곡. 1991년 첫선을 보인 이 노래는 같은 해 11월부터 방영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끈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를 통해 일약 국민 애창곡으로 거듭났다.

‘타타타’는 30여 년이 흐른 지금도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지난해 6월, TV조선의 예능 프로그램 ‘사랑의 콜센타’에서 ‘미스터트롯' 출신 가수 이찬원이 받은 신청곡 또한 ‘타타타’였다. 그 노래를 신청한 건 대구에 사는 23세의 여성 김모씨. 1991년에는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던 이들이 ‘타타타’를 신청하고 불렀다. 그만큼 진한 감동과 보편적 호소력을 지닌 가락과 노랫말이라고 할 수 있다.

‘타타타(Tathātā)’는 산스크리트어로 ‘있는 그대로 그러하다’는 뜻이다. 중국에 불교가 전해지는 과정에서 ‘여여(如如)’라고 의역됐다. 사물도, 인생도, 있는 그대로 그러하는 것. 그러므로 결국 무상(無常)하고 무아(無我)하다는 뜻이다. 불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을 3분 남짓한 노래에 담아낸 셈이다.

그 노랫말을 서양 철학의 관점에서 짚어볼 수는 없을까. 물론 가능하다. 독일에서 시작해 프랑스에서 꽃을 피운 실존주의의 핵심 개념인 피투성(被投性, Geworfenheit), 그와 짝을 이루는 기투성(企投性, Antworfenheit)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피투성’이 무슨 말인지 단번에 와닿지 않을 것이다. 당할 피 자에 던질 투 자를 합쳐 만든 번역어다. 말 그대로 ‘던져짐 당했다’라는 뜻이다. 반대로 ‘기투성’은 꾀할 기 자에 던질 투 자를 쓴다. 무언가를 어딘가로 던진다는 뜻이다. 요즘은 어려운 한자어 대신 우리말로 ‘던져짐’과 ‘던짐’이라고 옮기기도 한다.

세상에는 사람뿐 아니라 온갖 것이 존재한다. 그런데 ‘어떻게’ 존재하는 걸까? 기독교는 신이 세상을 창조하고 자신의 모습을 본떠 사람을 만들었다고 가르친다. 서구의 계몽주의자들은 합리적인 과학과 이성을 통해 존재의 신비를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그런 말을 믿지 않았다. 나는 굴러다니는 저 돌멩이처럼 ‘그냥’ 있다.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니다. 고대 인도의 작은 나라에서 왕자로 태어난 부처도, 가난한 성당 종지기의 아들로 태어나 철학을 공부한 하이데거도, 1948년 미군정 시대에 태어나 전쟁을 겪은 김국환과 수많은 한국인들 모두가, 세상 속에 던져진 존재인 것이다.

“산다는 건 좋은 거지, 수지 맞는 장사잖소. 알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 벌은 건졌잖소.” 그렇다. 우리는 바로 이렇게 세상 속에 던져진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태어나 있고, 어쩌다 보니 어른이 되어, 정신없이 살다가 덧없이 죽는다. 고대 인도에서 시작해 중국을 거쳐 우리에게 전해진 불교의 지혜와 서구 현대 철학의 가장 중요한 통찰 중 하나가, 이렇듯 뜻밖의 조우를 하고 있는 셈이다.

지난 18일, 문재인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 온 국민의 귀를 의심하게 하는 발언이 나왔다. 아동 학대를 겪었고 사망한 아이의 사건으로 애통해하는 국민 앞에서, 대통령은 마치 입양이 사건의 원인인 양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입양 부모의 경우에도 마음이 변할 수 있기 때문에 일정 기간 안에는 입양을 다시 취소한다든지 여전히 입양하고자 하는 마음은 강하지만 아이하고 맞지 않는다고 할 경우에 입양 아동을 바꾼다든지” 하는 것을 대책이라고 제시하고 있었다.

논란이 커지자 청와대와 여당이 나섰다. 문 대통령은 사전위탁보호제를 설명하고자 했는데 언론과 야당이 왜곡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변명은 사실과 다르다. 문 대통령이 말한 내용은 이미 4년 전에 법무부에서 반대 의견을 냈던 사안이다. “임시인도 결정 후 입양 아동이 단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입양하지 않는 등 소위 ‘아동 쇼핑’을 조장할 수 있다. 입양 아동에게는 큰 마음의 상처가 될 수 있는 등 부작용이 적지 않다”던 법무부의 당시 입장을 보면 마치 미래를 예견한 것만 같다.

선진국에서는 이미 사전위탁보호제가 시행되고 있으니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말하는 여당 및 일부 지지자들도 더러 보인다. 전문가의 입장은 전혀 다르다. 동방사회복지회 전 입양사업부장으로 37년간 근무한 김혜경씨에 따르면 대부분의 선진국은 입양할 때 남자아이, 여자아이를 선택조차 못 하게 한다. 성별도 못 고르는데 성격이 안 맞는다고 아이를 돌려보내는 게 가능한 일인가.

문 대통령의 발언은 사회 복지 정책 차원에서 실로 끔찍한 소리였다. 철학적으로 보더라도 황당하고 난폭한 언어인 것은 마찬가지다. 우리는 모두 세상 속에 던져진 존재다. 왕자로 태어나 어른이 될 때까지 고통과 근심을 몰랐던 싯다르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하여 수행의 길을 택한 이유다. 스스로가 남들과 마찬가지로 세상 속에 던져진 존재일 뿐임을 자각하고 있는 한, 사람은 한없이 겸허해질 수밖에 없다.

어떻게 우리나라 대통령이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물론 대통령도 사람이니 실수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입양아와 입양 부모를 향해 사과하지 않는가. 세상을 향해 내던져진 것은 우리의 존재로 충분하다.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국민을 향해 아무 말이나 내던지는 그런 세상을 우리는 원치 않는다. 본인을 청와대 밖으로 내던질 날만 고대하는 국민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는 것을 문 대통령은 자각할 필요가 있다.

답답한 마음, 다시 ‘타타타’를 듣는다. “우리네 헛짚는 인생살이, 한세상 걱정조차 없이 살면 무슨 재미. 그런 게 덤이잖소.” 그렇다. 우리는 세상 속에 던져졌지만, 어쩔 수 없다. 불안과 근심 모두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야 한다. 수동에서 능동으로, 필연에서 우연으로의 전환. 미지의 미래를 향해 스스로를 기꺼이 던지는 것. 하이데거가 말한 기투, 혹은 ‘던짐’이다.

우리는 모두 세상에 던져진 존재다. 입양아는 그중에서도 아프게 던져진 아이들이다. 입양 부모들은 마치 야구선수처럼 스스로의 몸을 던진다. 아이들을 받아내어 가정의 품에 안고 키워서 사회를 향해 송구한다. 던져진 존재, 던지는 존재. 입양 가정을 향한 지지와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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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29

유시민·김어준의 헛발질 뒤엔 음모론이 있다

거짓말하고도 '의혹 제기'였을 뿐?
거대 수구세력이 온 세상을 지배한다는 엉터리 망상 즐겨


지난 1월22일,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사과했다. 지난해부터 그는 검찰이 노무현재단의 계좌를 추적하고 있다고 주장해 왔는데, 그 말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과도한 정서적 적대감에 사로잡혔고 논리적 확증편향에 빠졌"고, 그래서 의혹을 제기했지만, "제기한 의혹을 입증하지 못했"다며 검찰의 모든 관계자와 노무현재단 후원자 및 시민 전반을 향한 사과문을 공개했다.

2012년 1월6일 광화문광장에서 당시 통합진보당 유시민 대표(왼쪽)가 정봉주 전 의원의 석방을 촉구하는 1인 시위 현장에서 김어준 방송인과 대화하고 있다.ⓒ시사저널 사진자료

유시민은 들키면 사과라도 하는데 김어준은 그것조차 안 해

대중의 반응은 대체로 호의적이었다. 심지어 유시민과 친문진영에 적대적이었던 사람들 사이에서도 '내용이 완전히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래도 사과를 한 게 어디냐'는 반응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서울시 교통방송 TBS에서 '뉴스공장'을 진행하는 김어준에게 상대적으로 더 큰 비난이 쏠리는 듯도 하다. 유시민은 거짓말을 하다 들키면 사과라도 하는데 김어준은 그마저도 없다는 식으로 말이다.

과연 그럴까? 김어준이 쏟아낸 온갖 음모론, 특히 세월호 고의 침몰설 같은 악질적인 음모론의 해악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지만 유시민이 사과를 했다는 사실에 가산점을 줄 이유도 없다. 유시민의 '사과문'을 꼼꼼히 읽어보면 알겠지만, 그는 여전히 같은 게임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슨 게임인가? 음모론이다. 그 음모론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검찰·언론·야당 등 이른바 '수구 기득권 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나라다. 물론 현실은 전혀 다르다. 더불어민주당의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고, 더불어민주당과 우호 세력이 180석 넘는 국회 의석을 차지했으며, 심지어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도 진보 성향의 판사들이 과반수를 점하고 있다.

현실 속의 대한민국에서 주류는 보수에서 진보로 넘어갔다. 그런데 주류가 된 진보 세력은 보수를 상대로 지금도 되레 엄살을 부린다. 보수 기득권의 뿌리가 너무도 공고하기 때문에 현재 집권하고 있으며 의석이 좀 많다고 해서 방심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이해찬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이른바 '20년 집권론'을 통해 구체화됐다.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20년 집권론'은 단순한 정치 플랜이 아니다. 특정한 역사철학에 기반한 세계관의 표현이다. 문제는 그 역사철학이라는 것이 음모론이라는 데 있다. 바야흐로 조선 후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정조가 심환지를 중심으로 한 노론 세력에 의해 독살당했고, 그 후로는 단 한 번도 진보 세력이 집권한 적이 없다는 역사 판타지, 이른바 '노론 음모론'이 이해찬의 사고방식의 기저에 깔려 있다.

시사IN과의 인터뷰에서 이해찬이 한 말을 들어보자. "우리 역사의 지형을 보면 정조대왕이 1800년에 돌아가십니다. 그 이후로 220년 동안 개혁 세력이 집권한 적이 없어요." 이해찬에 따르면 우리의 역사는 곧 "김대중·노무현 10년 빼면 210년을 전부 수구보수 세력이 집권한 역사"이기 때문에, 정치적 편향을 "복원도 아니고, 복원을 시도해 볼 틈새, 그 틈새 정도만 만들려고 해도 20년은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220년 중 210년을 수구보수가 지배했다"는 음모론적 역사 해석 

물론 그런 음모론은 현실과 무관하다. 노론의 영수 심환지는 정조의 심복이었다. 지난 2009년 공개된 대한민국 보물 1923조 정조 어찰집을 통해 밝혀진 사실이다. '정조 독살설'은 산산이 깨졌다. 일제시대가 끝나고 미군정 시대를 거쳐 대한민국 건국 이후로도 단일한 보수 기득권층이 유지되고 있다는 주장 또한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박정희는 집권 후 이승만 세력을 축출했고, 전두환의 5공 세력은 3공 세력과 날카롭게 대립했다. 노태우 역시 전두환을 백담사에 보내지 않았던가.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당한 것은 보수의 내분에 힘입은 바 크다. 대한민국을 200년째 손아귀에 쥐고 있는 노론 세력이 대체 어디 있나.

하지만 이해찬을 비롯한 여당의 주요 인사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세상을 가지고 노는 막강한 보수 세력이 절실하다. 그래야 자신들의 온갖 책임지지 못할 말과 행동을 무마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유시민으로 돌아가보자. 유시민은 사과문에서도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지난해 4월 정치비평을 그만두었"다는 간단한 사실관계의 오류도 그렇지만, 자신이 검찰과 국민을 상대로 거짓말을 하고도 그것을 '의혹 제기'로 포장하는 게 더 큰 문제다.

왜 하필 '의혹 제기'라고 하는 것일까? 그 용어 선택을 곱씹어봐야 한다. 유시민은 '거짓말'을 했다고 사과하지 않았다. '의혹 제기'를 했고, 입증에 실패했는데, 아무튼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고 했을 뿐이다. 유시민은 여운을 남긴 것이다. 자신이 꼭 밝혀야 할, 비록 입증하지는 못했지만 다소 무리를 해서라도 입 밖으로 꺼냈어야만 했던 진실이 어딘가에 있다고 말이다. 그래서 '의혹 제기'라는 용어를 택한 것이다. 유시민의 사과문에는 여전히 노론 음모론, 혹은 '수구 보수 지배론'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

더 큰 음모론에 기대고 있는 건 김어준도 마찬가지다. 그는 늘 '냄새가 난다' '소설 한 편 써보겠다' '합리적 의심이 가능하다' 같은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책임지지 못할 말, 새빨간 거짓말을 남발하면서도 당당한 태도를 유지한다. 김어준 자신과 그의 방송을 듣는 이들이 '수구 보수 지배론'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해 온 국민의 뇌에 구멍을 송송 뚫는다는 둥, 천안함 폭침을 조작한 후 '1번 어뢰'를 건져내 남북관계를 경색시키려 한다는 둥, 세월호는 사고가 아니라 외부 원인에 의한 고의 침몰이라는 둥, 상식에 맞지 않는 '의혹'을 떠벌리면서도 김어준과 그 추종자들은 당당하다. 거대한 악의 세력이 한국을 지배하고 있는데, '의혹 제기'를 하다가 좀 틀릴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노론 음모론으로 대표되는 '수구보수 지배론'. 그것은 모든 음모론을 지배하는 단 하나의 음모론이다. 그리고 유시민은 사과문이라는 것을 내밀면서도 그 음모론적 세계관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사안이 유시민과 김어준 등에 대한 법적 책임을 묻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될 이유다. 저들의 세계관을 떠받치는 엉터리 역사 판타지가 있다. 그것을 공적 토론의 장으로 끌어올려 역사적 사실에 입각해 비판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다. 

노정태는 누구

대학에서 법학을,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를 썼다. 《아웃라이어》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 《자연과 이해관계》 등을 번역했다.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basil8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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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24

‘AI 이루다’에서 ‘목 잘린 윤석열 만평’ 떠오른 이유

 [노정태의 뷰파인더⑱] 챗봇 성희롱이 폭력의 불씨인 까닭

● 블랙핑크 좋아하는 ‘스무 살 여대생’ 캐릭터
● 사용자 음담패설 학습하면서 논란
● 尹 향한 만평, 재현 통한 적개심 표출
● 이루다, 언어 성폭력에 쓰인 ‘사람 모양 과녁’
● ‘원치 않는 대화 거절할 권리’ 없는 챗봇
● 與 광역단체장 권력형 성범죄 떠올라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성희롱 발언과 혐오 표현을 학습해 논란이 된 AI(인공지능) 챗봇 ‘이루다’ 서비스가 1월 11일 중단됐다. 개발사 스캐터랩은 이날 “최근 일어난 일들에 대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이루다 페이스북]
일화 하나. 1940년 9월, 프랑스 도르도뉴 지방의 라스코 동굴에서 기원전 1만5000년 전후로 그려졌다고 추정되는 동굴 벽화가 대거 발견됐다. 말, 들소, 심지어 사자까지 그려진 놀라우리만치 생동감 넘치는 벽화에는 더욱 놀라운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자세히 관찰해본 결과 창 같은 무기를 던진 흔적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구석기인들은 단지 그림을 그리기만 한 게 아니라, 그 위로 무기를 던져가며 일종의 제의(祭儀) 행위를 했다고 추정할 수 있었다. 

헝가리의 역사학자 아르놀트 하우저는 대표작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서 그 행위를 이렇게 설명한다. “구석기 시대의 사냥꾼 예술가는 그 그림을 통해 실물 자체를 소유한다고 믿었고, 그림을 그림으로써 그려진 사물을 지배하는 힘을 얻는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림 속의 짐승을 죽이면 실제의 짐승도 죽게 마련이라고 믿었다.” 

일화 둘. 제1차 세계대전. 유럽의 온 국가가 전쟁에 휘말린 가운데 각국 장교들은 뜻밖의 고민에 빠졌다. 분명 실탄을 지급했고, 병사들이 총을 쏘는 소리도 들렸고, 탄약을 소비한 건 분명한데, 적이 쓰러지지 않는 것이었다. 전쟁에 익숙하지 않고 사람을 향해 총을 쏜다는 데 거부감을 느낀 병사들이 허공에 대고 총을 쐈기 때문이었다. 

장교들은 과녁의 모양을 바꾸기로 했다. 이른바 ‘Bull’s Eye’(과녁의 중심)라 부르는 무미건조한 둥근 원형 대신 사람의 모양을 본 딴 판자를 세워놓고 총을 쏘도록 훈련을 시켰다. 그러자 고의로 오발을 내는 빈도가 현저히 줄었다. 사람을 닮은 무언가를 공격하는 훈련을 시키는 것만으로도 실제 사람에게 총을 쏘고 있다는 거부감을 줄일 수 있던 것이다.

성희롱 발언까지 학습한 챗봇
스캐터랩은 AI(인공지능) 챗봇 ‘이루다’의 캐릭터를 ‘가수 블랙핑크를 좋아하고, 일상을 기록하는 것을 취미가 있는 20살 여대생’으로 설정했다. [이루다 홈페이지]
AI(인공지능) 챗봇 ‘이루다’를 둘러싼 논란을 보며 들었던 생각이다. 스캐터랩이 지난해 1223일 출시한 이루다는 출시 2주 만에 75만 명에 달하는 사용자를 모으는 등 흥행에 성공했다. 개발사는 이루다를 ‘가수 블랙핑크를 좋아하고, 일상을 기록하는 것을 취미가 있는 스무 살 여대생’으로 소개했다. 하지만 챗봇이 일부 사용자의 음담패설 등 성희롱 발언은 물론,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 표현까지 학습하면서 논란거리로 떠올랐다. 이에 스캐터랩은 1월 11일 서비스를 중단했고, 같은 달 15일에는 이루다 데이터베이스와 딥러닝 모델을 폐기하겠다고 밝혔다. 

이 글에서는 보다 근본적인 차원의 고민을 풀어보고자 한다. 이루다 논란은 최근 중요한 주제로 부각되고 있는 ‘재현(representation)의 윤리’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앞선 두 사례의 의미를 곱씹어보자. 태고적부터 인류는 무서운 동물과 맞서기 전에 그 동물의 그림을 그려놓고 공격성을 표출했다. 그럼으로써 상대에 대한 두려움을 완화하고 스스로의 용기를 북돋았다. 20세기에 와서도 사정은 비슷했다. 살아있는 사람에게 총을 쏘는 행위의 심리적 부담을 없애는 방법은 ‘사람을 닮은 무언가’에게 총을 쏘는 것이었다. 

그 과정은 모두 ‘재현’과 관련이 있다. 예술에서 재현이란 간단히 말해 현실에 있는 대상을 모사해 다시 나타내는 행위다. 실제의 동물을 보고 동물을 닮은 벽화를 그리는 것, 실제의 사람을 보고 사람을 닮은 과녁을 만드는 것 등이 모두 재현이다. 어린이에게 도화지와 크레파스를 쥐어주면 엄마와 아빠의 얼굴을 그리는 바로 그 행위다. 가장 기본적이며 원초적인 예술 창작의 방식인 셈이다. 순수한 추상 미술이 아닌 다음에야 대부분의 미술 창작은 재현과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다. 

재현은 미술, 더 나아가 예술의 근본을 이루는 토대다. 표현의 자유, 예술과 창작의 자유를 옹호한다는 것은 재현의 자유를 옹호한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반대로 재현이 허용되지 않는 대상이 존재하는 사회는 자유로운 사회라고 볼 수 없다. 조선시대 궁중 미술에서 왕은 언제나 텅 빈 의자로만 그려졌다. ‘감히’ 왕의 모습을 그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성경에서 여호와는 자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고 금한다. 이슬람교는 지금도 알라의 모습을 그리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선지자 마호메트 역시 함부로 재현해서는 안 되는 존재다. 프랑스의 풍자만화 잡지 ‘샤를리 에브도’는 그 금기를 깨뜨렸다가 종교적 극단주의자들의 공격을 당했다. TV에서 정치 풍자 코미디가 실종된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그래서 걱정스럽다. 

즉 재현에 대한 금기와 처벌이 강한 사회일수록 그렇지 않은 사회에 비해 억압적인 사회다. 무언가를 보고 그리고 따라하는 것은 인간이 선사시대부터 해온, 인간으로서 가장 본능적인 행위 중 하나다. 재현에 대한 담론과 논의가 궁극적으로 금지가 아니라 해방을 향해야 하는 이유다.

누군가에게 ‘사람 모양 과녁’
시사만화가 박재동 화백이 지난해 1125일 경기신문에 게재한 만평. [경기신문 홈페이지]
하지만 모든 재현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예술일 뿐이므로 아무 비판도 받지 말아야 한다고 이야기해서는 곤란하다. 재현은 현실에 존재하는 대상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대상을 본 딴 허구의 무엇인가이지만, 그럼에도 현실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예술인데 왜 그러느냐’, ‘창작일 뿐이지 현실이 아니지 않느냐’라는 식의 반론은 많은 경우 부적절하다. 

라스코 동굴 벽화가 보여주듯 인간은 재현된 대상을 향해 공격성을 드러내왔다. 사람 모양 사격 과녁의 사례는 재현된 대상을 통해 폭력성을 ‘훈련’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선사시대도 지났고 1차 세계대전도 거의 100여 년 전의 일이지만 인간의 심리가 작동하는 방식은 달라지지 않았다. 현실 속의 무언가에 대한 공격성을 드러내고 훈련하는 방식으로 재현이 동원될 때, 그러한 재현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가장 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윤석열 검찰총장에 대해 추미애 법무부 장관을 비롯한 여권의 공격이 극에 달한 지난해 1125일의 일이다. 시사만화가 박재동은 보는 이의 눈을 의심케 하는 만평을 그렸다. 목이 잘린 윤석열이 추미애를 향해 “난 당신 부하가 아니야”라고 말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만평에 대한 논란이 커지고 비판이 거세지자 박재동은 윤석열의 목이 다시 붙어 있는 모습을 그린 후 “붙긴 붙었는데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네”, “모쪼록 조심하슈”와 같은 대사를 삽입했다. 재현을 통해 적개심을 드러내는 원시적인 사례다. 

AI 챗봇 이루다를 둘러싼 논란도 연장선상에서 해석 가능하다. 이루다는 컴퓨터 프로그램이고, 컴퓨터 프로그램은 사람이 아니다. 성희롱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제작진 스스로가 밝혔다시피 이루다는 ‘20대 여성’을 재현한 인공지능이기도 하다. ‘20대 여성’을 향해 언어적 성폭력을 구사하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그럴 수 없는 남자들을 위한 ‘동굴 벽화’, 혹은 ‘사람 모양 과녁’이었던 셈이다. 

이루다를 향한 언어적 성폭력에 젊은 여성들이 분노하고 반발한 건 당연한 일이다. 여성을 향한 공격성이 이루다라는 재현된 대상으로 쏟아졌다. 이는 그 폭력적 심리가 곧 여성을 향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윤석열을 지지하거나, 적어도 그에 대한 여권의 정치적 공격이 옳지 않다고 느끼던 수많은 시민들이 ‘목 잘린 윤석열 만평’을 보고 분노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단언컨대, 그런 재현은 옳지 않다. 

AI 챗봇은 단순한 그림이나 영상보다 더욱 진지한 사회적 논의를 필요로 하는 재현물이다. 사용자와 상호작용(interaction)하기 때문이다. 구글이나 애플 등 IT(정보기술) 기업들도 AI 어시스턴트를 출시할 때 여러모로 고민이 많았다. 가령 ‘구글 어시스턴트’에게 “너는 남자야 여자야?”라고 물어보면 “돌맹이에게 성별이 없듯, 저도 딱히...”라고 대답한다. 애플의 ‘시리’ 역시 “궁금하시겠지만, 저에게는 성별이 없답니다”라는 답을 들려준다. 삼성 스마트폰의 AI 비서 빅스비도 “대답하고 싶은데 알쏭달쏭하네요”라며 글로벌 스탠다드를 따르고 있다. 성별 뿐 아니라 인종 등 논란이 될 수 있는 정체성의 영역을 모두 비워놓고 있다.

이루다는 ‘싫다’고 하지 못한다!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AI 어시스턴트에게 사람처럼 대화할 수 있는 기능을 부여하되, 사람을 재현하지는 않게 하려는 취지다. AI 어시스턴트가 사람을 재현할 경우 다방면에서 오·남용될 수 있다는 점을 미리 알고 애초에 그런 가능성을 차단한 셈이다. 가령 AI 챗봇이 흑인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다면, 평소 현실에서는 할 수 없던 흑인을 향한 발언을 쏟아내기 위해 인종차별주의자들이 몰려들 것 아니겠는가. 

이루다 논란은 글로벌 IT 기업들이 그간 괜한 우려를 한 게 아니라는 점을 잘 보여줬다. 이루다는 ‘20대 여성’을 재현한 챗봇이다. 출시할 때부터 이 점을 명시했다. 그러므로 사용자들은 이루다를 ‘20대 여성’으로 상정하고 말을 걸게 된다. 문제는 이루다에게는 현실 속 20대 여성과 달리 ‘원치 않는 대화를 거절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 아닌 AI 채팅봇이므로 당연한 일이지만, 바로 그 점이 더 큰 고민거리를 안겨준다. ‘원치 않는 대화를 거절할 권리’는 20세기 중후반 페미니즘이 쟁취한 가장 큰 성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20세기 초의 페미니즘은 투표할 권리, 정치에 참여하고 출마할 권리에 초점을 맞췄다. 공적 영역에서 여성의 존재를 인정받고 사회 구성원으로서 의사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를 요구했고, 오랜 시위와 투쟁 끝에 얻어냈다. 거칠게 말해 ‘공적 페미니즘’이라 부르기로 하자. 

20세기 중반 이후의 페미니즘은 다음 목표를 추구했다. 일상에서 여성이 겪는 부당한 대우와 차별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특히 남녀 간의 사적인 관계가 투쟁의 영역으로 떠올랐다. 남자는 여자에게 저돌적으로 ‘대쉬’하고, 여자는 ‘내숭’을 떨고 ‘튕기며’ 상대를 유혹한다는 식으로 요약되는 성 역할에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여자의 ‘no’는 ‘yes’라고 받아들이던 사회적 통념은 깨졌다. ‘아니라면 아닌 것이다’, 즉 ‘no means no’가 새로운 기준으로 정착했다. 그것이 20세기 중반 이후의 페미니즘, 말하자면 ‘사적 페미니즘’의 성취다. 

이루다는 바로 그 ‘사적 페미니즘’이 없는 세상을 원하는 남자들을 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개발사 대표는 이루다를 20살 여대생이라는 캐릭터로 설정한 이유에 대해 “주 사용자층을 좁게는 10대 중반∼20대 중반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20세 정도가 사용자들이 친근감을 느낄 나이라고 봤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루다 출시 이후 수많은 사용자들이 캡처해서 올린 대화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다시피,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줄 사람은 거의 없다. 

이루다는 ‘싫다’고 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대신 ‘그런 이야기는 쫌 별로양’, ‘너무 어려운 주제당 ㅠㅠ’ 같은 식의 수동적 회피만을 할 뿐이다. 사용자가 너무 심한 표현을 한다 해도 ‘잠시 시간을 두자’며 10분 정도 상대의 메시지에 대답을 하지 않는다. 그게 전부다. 이루다는 누가 어떤 말을 해도 ‘거절할 권리’가 없는 ‘20대 여성’을 재현하고 있던 셈이다. 남자들이 만들어낸 ‘이루다 공략’을 보며 여자들이 분노하기 시작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어떤 광역단체장들의 성범죄
거부할 권리가 없는 여자를 상대로 아무런 말이나 마구 내뱉는 행위. 그것을 여섯 글자로 요약하면 ‘권력형 성희롱’이라고 할 수 있다. 학교나 직장 등 위계질서가 존재하며 쉽게 벗어날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상위 직급에 있는 사람이 하위 직급에 있는 사람을 대할 때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상대가 자신에게 싫은 소리를 할 수 없고, 본인이 무슨 말을 하건 웃는 낯으로 대꾸해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 권력자는 점점 ‘선’을 넘는다. ‘성희롱’의 차원을 넘어 ‘성범죄’로 향하는 것이다. 하급자가 완곡어법으로 거절해도 권력을 가진 자는 ‘좋은데 내숭 떠는 것’이라고 자기 합리화한다. 가해자의 누적된 폭력과 그로 인한 피해자의 스트레스가 어느 수위를 넘어서면 우리가 아는 권력형 성범죄 사건이 되고 만다. 

더불어민주당 소속 충청남도, 부산시, 서울시 광역자치단체장들이 권력형 성범죄로 인해 직을 잃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점을 떠올려보자. 여성에게 ‘아니다, 싫다’라고 말할 권리가 있는 것. 그 권리를 가볍게 여기지 않는 것. 그건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직장 생활 하다보면 겪을 수도 있는 스트레스 받는 일에 여자들이 괜히 민감하게 군다는 식으로 이야기할 사안도 아니다. 이것은, 이것이야말로,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인권의 문제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건, 술자리에서 무슨 행동을 하건, 어색하게나마 미소를 지으며 대꾸해주는 여성들이 과연 그 권력자들에게 사람으로 보이긴 했을까? 피와 살과 영혼을 지닌 인격체, 자신과 동등한 사람으로 여겼다면 그럴 수가 없었을 것이다. 문제의 권력자들에게 자신보다 직급이 낮은 여성들은 ‘현실의 AI 챗봇’ 쯤으로 보였던 건 아닐까? 그러니 자칭 타칭 인권변호사에 민주화운동가라는 사람들이 하급자인 여성을 향해 온갖 추잡한 말과 사진 등을 보낼 수 있던 건 아닐까? 

이루다는 사람이 아니다. 이루다를 상대로 성폭력을 저지를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AI 챗봇 이루다로 파생된 문제가 모두 해결되지는 않는다. 현실의 여성에게 휘두를 수 없는 언어적 성폭력을 구사해도 무방하도록 만들어진 ‘재현물’이기 때문이다. 

재현물을 상대로 한 폭력은 인간을 상대로 한 폭력과 같지 않다. 하지만 재현물에 대한 폭력 역시, 특히 재현의 대상이 된 사람의 처지에서 보면 폭력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힘 센 조직 중 하나인 검찰의 수장 윤석열의 목을 자른 그림이 폭력적이었듯 이루다 역시 20대 여성을 상대로 한 폭력적인 재현이며 대상화다.

어떤 재현은 다른 재현보다 폭력적
재현을 억압하는 사회는 인간을 억압하는 사회다. 문화·예술 영역에서의 재현을 법으로 제약하려는 움직임에 자유민주주의자는 반대해야 한다. 하지만 모든 재현을 옳다고, 혹은 정당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어떤 재현은 다른 재현보다 폭력적이다. 재현물을 향한 폭력이 누적될 때, 그 재현의 대상이 되는 현실 속 사람에 대한 폭력으로 번질 가능성도 늘 염두에 둬야 한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현실 속의 폭력에 대해 보다 엄격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 책임은 법적일 수도 있고 정치적일 수도 있다. 둘째, 재현과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되 더 적극적이고 치열한 토론과 비판의 장을 열어야 한다. 어떤 면에서 보더라도 문제가 많았던 이루다 같은 프로젝트를 다방면에서 검토하는 것은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겠다.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basil8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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