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21

이낙연發 ‘가짜뉴스’와의 전쟁, 그렇다면 김어준은?

 [노정태의 뷰파인더㉒] 세계 20위권 후진국으로의 퇴행

● ‘가짜뉴스 처벌법’ 통과시킨 17개국 명단
● 與 윤영찬 ‘최대 3배 징벌적 손해배상’ 법안
● 러시아, 말레이시아 관련 규제 연상
● 말레이시아, 與 선거 패배 후 법 폐지
● 독일 최악의 수 ‘네트워크 집행법’
● 韓, 전기통신사업법 등 있어 별도 법 불필요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월 3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이 자리에서 이 대표는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악의적 보도와 가짜뉴스는 사회의 혼란과 불신을 확산시키는 반사회적 범죄”라고 말했다. [안철민 동아일보 기자]
푸에르토리코, 볼리비아, 브라질, 알제리, 보스니아, 헝가리, 루마니아, 요르단, 아제르바이잔, 아랍에미리트(UAE),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태국, 베트남, 캄보디아, 필리핀, 러시아. 2020년 3월부터 10월까지 ‘가짜뉴스 처벌법’을 통과시킨 17개국의 명단이다. IPI(국제언론인협회·International Press Institute)의 자료에 기반해 영국 ‘이코노미스트’가 지난 2월 13일 보도한 내용이다. 

2007년 집권 이후 독재를 하고 있으며, 올해 예정된 총선은 야당 없이 치르려 하는 니카라과의 다니엘 오르테가 정권 역시 202010월 이후 비슷한 취지의 ‘가짜뉴스 처벌법’을 제정한 바 있다. 정부가 ‘쿠데타 세력’이나 ‘테러리스트’로 규정한 인물은 선거에 출마하지 못하게 하겠다며 으름장을 놓고 있기도 하다. ‘가짜뉴스 처벌법’은 독재를 지속하기 위한 이중 삼중의 안전판인 셈이다. 

형식적인 자치권을 보장받고 있는 홍콩 역시 ‘가짜뉴스 처벌법’ 제정을 눈앞에 두고 있다.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는 가짜 정보를 제작 전파하는 인터넷 정보서비스업체를 대상으로 한화 약 1700만 원에서 1억7000만 원까지 벌금을 부과할 수 있으며, 그러한 정보 유포에 책임이 있는 개인 역시 수백에서 수천만 원에 달하는 벌금의 대상으로 삼는 법이다. 

가짜뉴스를 잡겠다며 독재의 칼을 뽑아드는 권력. 불행히도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2월 3일,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악의적 보도와 가짜뉴스는 사회의 혼란과 불신을 확산시키는 반사회적 범죄”라며 2월 임시국회에서 관련 법안을 처리하겠노라고 천명했다.

최대 3배의 징벌적 손해배상
민주당 의원들이 발의한 법안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언론사가 정정보도할 경우 최초 보도와 같은 시간, 분량, 크기로 보도하도록 강제하는 법안(김영호 대표발의). 인터넷 뉴스 내용이 진실하지 않거나 사생활을 침해한다면 피해자가 기사 차단을 청구할 수 있는 법안(신현영 대표발의). 인터넷 이용자가 고의로 거짓, 불법 정보를 생산하거나 유통해서 손해를 입히면 최대 3배의 징벌적 손해배상을 하도록 하는 법안(윤영찬 대표발의). 포털 댓글로 중대한 침해를 받은 피해자가 해당 게시판 운영을 중단하도록 요청할 수 있게 하는 법안(양기대 대표발의). 7년 이하의 징역에 해당하는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죄 가중처벌을 방송에도 적용하는 법안(이원욱 대표발의).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윤영찬 의원이 대표 발의한 최대 3배의 징벌적 손해배상이다. 여당은 이 징벌적 손해배상의 대상을 더 넓히고자 한다. 인터넷 이용자를 넘어 언론 전체에 확대 적용할 수 있기를 원하고 있다. 그런 법을 2월 중 처리하겠다는 게 대한민국 여당의 당론이다. 

이런 반론이 있을 수 있다. “민주당에서 내놓은 ‘가짜뉴스 처벌법’은 사실 그리 나쁘지 않다.” “가짜뉴스가 심각한 문제라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걸 바로잡기 위한 조치라면 일종의 필요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물론 그런 반론은 엉터리다. 앞서 언급한 2020년의 ‘가짜뉴스 처벌법’ 외에도, 러시아 의회는 2019년 3월 별도의 ‘인터넷 규제법’을 통과시킨 바 있다. 그 내용을 뜯어보면 민주당이 추진하는 ‘가짜뉴스 처벌법’과 다를 게 없다. 

누군가가 인터넷에서 “공공질서를 파괴할 수 있는 가짜정보”를 유통할 경우 최대 40만 루블, 한화로 약 6000만 원의 벌금을 물릴 수 있게끔 하는 것이 러시아 ‘인터넷 규제법’의 근간을 이룬다. 또 당국이 부정확한 정보를 삭제하라는 지시를 내렸을 때 삭제하지 않을 경우 해당 웹사이트를 차단할 수 있는 권리 또한 정부에 주어진다. ‘윤영찬 법안’과 ‘양기대 법안’을 섞어놓은 모양새다. 

말레이시아에도 비슷한 법이 있었다. 2018년 4월, 총선을 한 달 앞둔 미묘한 시점에 시행된 말레이시아의 ‘가짜뉴스 처벌법’에 따르면, 가짜뉴스를 유포하거나 작성할 경우 징역 6년 혹은 한화 약 1억3500만 원의 벌금형에 처해질 수 있었다. 당시 말레이시아 정계는 국영 투자기업 1MDB와 관련된 비리 문제로 떠들썩한 상황이었다. 나집 라작 전 총리와 측근들이 그 회사를 통해 45억 달러(한화 약 4조9840억 원)를 받아 챙겼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총선을 한 달 앞둔 시점에 ‘가짜뉴스 처벌법’을 만들고, 총리의 비리 문제에 대해서는 “정부가 확인해주지 않은 뉴스는 가짜뉴스”라고 엄포했다. 

이렇듯 ‘가짜뉴스 처벌법’을 만들고 실행하는 국가 중 우리가 흔히 말하는 ‘민주주의 선진국’은 단 한 곳도 없다. 민주당은 한국의 민주주의를 대체 어디로 끌고 가려는 것일까. 요즘 일각에서는 ‘우리도 이제 눈 떠보니 선진국에 살게 되었다’는 식의 담론이 유행하는데, 실상은 ‘눈 떠보니 도로 독재국가에 살게 되었다’로 귀결되고 있는 건 아닐까.

‘미스터 가짜뉴스’의 시대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왼쪽)과 부인 멜라니아 여사가 1월 20일 미국 메릴랜드주 앤드루스 공군기지에서 플로리다주로 떠나는 머린원에 탑승하기 전 마지막 환송행사를 열었다. [AP 뉴시스]
전 세계적으로 ‘가짜뉴스 처벌법’이라는 이름의 반민주적 언론 탄압 법안이 기승을 부리게 된 이유를 살펴보자.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시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확산이 큰 영향을 미쳤다. 코로나에 대한 가짜뉴스 확산을 막겠다는 명분을 들이대지 않는 독재국가는 단 하나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다. 

그런데 한국은 이미 그 어떤 나라와 비교해도 막강하기 짝이 없는 감염병 예방법을 갖고 있다. 가짜뉴스와 관련한 유언비어 처벌만을 명분으로 새로운 법을 만들기가 쉽지 않다. 질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 영장 없이 국민의 동선(動線)을 추적하고 신용카드 및 온갖 개인 정보까지 확인할 수 있는 상황이니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코로나19보다 조금 더 이른 시점까지 눈길을 돌려볼 필요가 있다. 민주당이 집권하고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대승을 거두었던 2018년부터 ‘가짜뉴스와의 전쟁’은 시작되고 있었다. 전임 이해찬 대표 시절부터 민주당은 허위조작정보대책특별위원회를 구성해 각종 법안을 준비해왔다. 당내에 ‘가짜뉴스 신고센터’를 만들어 운영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민사회의 반응은 그리 뜨겁지 않았다. 표현의 자유를 억압할 뿐 아니라 언론의 감시 기능을 마비시킨다는 비판 앞에 제대로 된 답변을 내놓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애초에 가짜뉴스라는 말을 유행시킨 사람이 누구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201611월부터 2021년 1월까지 전 세계를 발칵 뒤집어놓은 그 남자, 전 미국 대통령인 도널드 트럼프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는 자신에게 비판적인 보도를 내놓는 언론을 상대로 가짜뉴스라는 손가락질을 서슴지 않았다. 

물론 우리는 트럼프 자신이야말로 가짜뉴스의 가장 큰 원천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코로나19와 관련된 것만 몇 개 적어 봐도 그렇다. 그는 처음에 코로나 바이러스의 세계적 유행 자체가 가짜뉴스라고 했다가, 미국까지 퍼져오자 마스크를 쓰면 옮지 않는다는 말이 가짜뉴스라고 하더니, 사람들이 병에 걸리고 피해가 발생하자 말라리아 치료제인 하이드록시클로로퀸이 특효약이라고 떠벌이다가, 심지어 자외선을 쬐면서 소독제를 인체에 주사하면 코로나가 낫는다는 소리까지 했던 인물이다. 가짜뉴스를 의인화하면 도널드 트럼프가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다. 

문제는 ‘미스터 가짜뉴스’가 미국 대통령이었다는 것이다. 가짜뉴스라는 단어 자체가 일종의 글로벌 유행어처럼 변해버렸다. 한국 뿐 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가 마찬가지였다. 언론의 자유라는, 민주주의의 가장 신성한 가치를 무시하는 인물이 미국 대통령의 자리에 앉는 그 순간부터, 전 세계의 언론 자유와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 퇴행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트럼프에 뺨 맞고 트위터에 화풀이’
그 와중에 독일이 최악의 수를 두었다. 2018년 1월 1일, 독일 연방 의회는 ‘소셜 네트워크에서의 법집행 개선을 위한 법’, 일명 ‘네트워크 집행법(NetzDG)’을 시행하기에 이르렀다. 위법 소지가 있는 게시물이 공개될 경우, 소셜네트워크 사업자 등에게 그 게시물을 방치하지 말아야 할 의무를 부과하는 게 골자다. 

독일의 ‘네트워크 집행법’은 이후 제정된 수많은 ‘가짜뉴스 금지법’의 모델이 됐다. ‘그것 봐라. 세계 최고의 민주주의 선진국 중 하나인 독일에서도 인터넷과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한 가짜뉴스의 범람을 경계하고 법으로 처벌한다. 그러니 우리도 비슷한 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식으로, 독재자들에게 좋은 핑계를 제공해준 셈이다. 

‘네트워크 집행법’은 200만 명 이상의 이용자를 보유한 SNS가 대상이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 훼손, 테러 선동, 범죄 단체 모집, 종교 비방, 아동 포르노 등 21개 위법행위와 관련된 게시물에 대해 신고가 들어올 경우 SNS 사업자가 게시물을 검토하고 당사자에게 신고 사실을 통보하며 삭제 등의 처리를 하도록 하는 법이다. 만약 그러한 처리 시스템을 갖추지 않을 경우 최대 5000만 유로(한화 650억 원 상당)의 벌금이 부과될 수 있다. 

이미 말했듯 이 법안은 당시 독일인들이 가지고 있던 민주주의의 상식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독일 내에서도 졸속 입법이라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법이 제정될 수 있었던 건, 트위터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온갖 혐오발언을 쏟아내던 트럼프에게 독일 뿐 아니라 전 세계가 진저리를 치던 분위기의 영향이 컸다. 독일 내부의 사정도 만만치 않았다. 극우 세력 및 정당이 급부상하고 있었기에 뭔가 ‘특별한 수’를 써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었다. 

조금 더 적나라하게 들어가 보자. 이런 법이 만들어질 수 있던 배경에는 ‘트럼프에게 뺨 맞고 트위터에 화풀이하는’ 심리가 작동했다고 볼 수도 있다.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가 2017년 4월 ‘경향신문’에 기고한 ‘독일 ‘가짜뉴스 처벌법’ 바로알기’라는 칼럼에서 지적하다시피 트위터, 페이스북, 유튜브, 인스타그램 등 독일인들이 쓰는 주요 SNS는 모두 미국 회사였다. “독일 법원이 ‘범죄적 내용’을 삭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500만유로의 벌금을 물리더라도 고통 받을 독일 사업자는 거의 없”었다. 

이유가 뭐가 됐건 독일은 선을 넘었다. 그러자 ‘독일이 하니까 우리도 괜찮다’며 세계의 온갖 독재 국가들이 ‘가짜뉴스 처벌법’을 들이대기 시작했다.

자칭 ‘보수 유튜버’와 김어준 사이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 활동 시절인 지난 20111222일 당시 김용민, 주진우, 김어준, 정봉주 씨(왼쪽부터). [양회성 동아일보 기자]
불행히도 동아시아에서 가장 수준 높은 민주국가라는 대한민국 역시 그런 분위기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한국은 세계 그 어느 나라보다 초고속인터넷을 빨리 도입한 IT(정보기술) 선진국이다. 이에 전기통신사업법 등 관련 법제를 이미 다 구비해두었고, 독일의 ‘네트워크 집행법’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법을 만들 필요조차 없었지만, 집권 여당인 민주당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칭 ‘보수 유튜버’라는 사람들이 사회적 물의를 빚을 때마다 화가 나고 짜증이 치민다. 나만 그런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자들을 처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대한민국이 ‘가짜뉴스 처벌법’ 만들기 경쟁에서 세계 20위권의 후진국으로 퇴행하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다. 이미 우리에게는 그런 이들을 제재할 수 있는 다양한 법적, 제도적 장치가 충분하다. 

좀 더 근본적인 문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체 왜 자칭 보수 유튜버들이 이렇게 기승을 부리는 걸까? 가짜뉴스를 팔아서 한 몫 벌고 심지어 여당 정치인들이 고개를 조아리는 권력자가 된 성공 사례가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는 없을까? 

방송인 김어준이 만들었던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를 떠올려보자. 이명박의 혼외자식설부터 해서, 입에 담기도 민망한 온갖 혐오발언과 인신공격을 퍼부으면서도 “이건 유머다, 소설이다”라는 식으로 면피해왔던 그들의 행태는 어떠했던가. 그것은 오늘날 세계 각국의 극우 유튜버나 SNS 선동꾼들이 하는 짓과 다를 바 없었다. 

김어준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민주당이 선거에서 패배하자 부정개표설을 퍼뜨리고, 그런 내용을 담아 영화를 만들겠다며 후원금을 받았다. 세월호가 침몰하자 그것을 어떤 어마어마한 음모에 의한 ‘사건’으로 포장하면서 유족과 대중의 마음을 들쑤셨다. 자신만이 밝힐 수 있는 어떤 진실이 있는 것처럼 꾸며 영화를 제작하겠다고 돈을 긁어모았다. 가짜뉴스를 만들고 유포하는 것을 몇 년에 걸쳐 직업으로 삼아왔던 셈이다. 

그런 짓을 하던 김어준이 합당한 대가를 치르기는커녕 정권이 바뀌자 승승장구하고 있다. 대체 이 나라에서 무슨 가짜뉴스를 처벌한다는 것인가? 선거를 앞두고 ‘가짜뉴스 처벌법’을 통과시키겠다는 이낙연과 민주당은 대한민국을 얼마나 망가뜨려야 속이 시원하겠는가?

말레이시아의 경이로운 상식
앞서 ‘가짜뉴스 처벌법’을 만든 온갖 나라의 사례 중 말레이시아는 모범적인 경우로 기억되어야 한다. 선거를 앞두고 부랴부랴 법을 만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선에서 여당이 패배했기 때문이다. 정권이 바뀌자 라작 총리와 측근들이 1MDB를 통해 저지른 비리가 백일하에 드러났다. 

놀랍게도, 혹은 전혀 놀랍지 않게도, 권력이 막으려던 ‘가짜뉴스’야말로 진실을 담고 있었다. 여당이 된 야당은 라작 총리와 측근들에 대한 수사 및 처벌을 단행하면서 동시에 ‘가짜뉴스 금지법’을 폐지했다. 그런 법은 언제든 권력에 의해 악용될 수 있다. 자신들의 선의를 믿으라고 국민에게 강요하는 대신, 올바른 제도를 만드는 쪽을 택한 것이다. 너무도 당연하고 합리적이지만 때로는 상식이 경이롭게 느껴진다. 

결국 유권자가 진실을 택해야 한다. 그래야 세상이 바뀐다. 가짜뉴스를 처벌한다는 명분하에 진실을 찍어 누르는 세상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가짜뉴스로 이득을 보는 자에게 불이익을 주는 선례를 만들어 나감으로써, 현존하는 법과 제도를 통해 가짜뉴스의 폐단을 최소화하는 자유민주주의의 왕도를 택할 것인가. 우리에게도 아직 선택의 기회는 남아 있다.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basil8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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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조국·추미애 홀린 ‘브라질판 강남좌파’ 다큐

 [노정태의 뷰파인더㉖] 넷플릭스 ‘위기의 민주주의’ 아전인수 격 해석한 여권

● 윤석열 겨냥한 듯 보이는 조국의 소감문
● 골자는 ‘브라질 기득권의 룰라·지우마 탄압’
● 단순명료한 선악 구도에 할리우드도 열광
● 룰라·노동당에 편향적 작품이라 비판 소지
● 실제는 중도가 단일 대오로 군부 권력 뺏어
● 反美 브라질 상류층의 내로남불 서사
● 한국 586 세대와 같은 일종의 ‘역사왜곡’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전 브라질 대통령이 3월 10일(현지시간) 최대 도시 상파울루의 금속노조 본부에서 연설하고 있다. 그는 이틀 전 부패 유죄 판결에 대한 대법원의 무효 결정을 얻어내 정치적 재기를 노리고 있다. 그가 내년 대선에 출마해 자이르 보우소나루 현 대통령과 맞붙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상파울루=AP 뉴시스]
지난 3월 3일,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페이스북에 짤막한 게시물이 올라왔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위기의 민주주의(The Edge of Democracy)’에 대한 소감문이었다. 그리 길지 않을 뿐 아니라 왜곡해 비판한다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문장 전체를 인용해보도록 하겠다.

“일전 이 공간에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위기의 민주주의(The Edge of Democracy)’를 소개한 적이 있다. 

이 다큐멘터리는 브라질에서 룰라 대통령이 어떻게 구속되는지, 후임자 지우마 대통령이 어떻게 탄핵되는지를 생생히 보여준다. 여기서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이 세르지우 모루 연방 판사(한국의 검사와 유사한 역할)의 “세차(洗車) 작전” 수사였다. 이 수사와 기소로 룰라-지우마 두 대통령이 이끌던 ‘노동당’(PT) 정부가 무너지고 난 후 극우파 정치인인 자이르 보우소나루 대통령이 집권을 한다. 

그런데 모루는 보오소나루 대통령에 의하여 법무부 장관으로 발탁된다. 이후 모루는 보우소나루 대통령과의 불화로 사임하였고, 현재는 2022년 대선 출마를 고려하고 있다.”

文이 보우소나루?
3월 3일이라는 시점을 놓고 보면 이 글로 ‘저격’하는 상대가 누구인지는 분명하다. 문재인 정권의 적폐청산 수사를 진두지휘해 검찰총장까지 수직상승했지만, 문 대통령과 갈등하다 사퇴하고 정계 진출 여지를 남긴 윤석열 전 검찰총장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곰곰히 생각하면 이상하다. 윤석열을 모루에 비유한다면, 그가 지휘한 수사와 공판으로 유죄 선고를 받고 감옥에 간 박근혜 전 대통령이 룰라 또는 지우마가 될 테니 말이다. 윤석열에게 ‘보은 인사’를 했지만 갈등을 빚은 문 대통령은 그렇다면 한국의 보우소나루라는 말인가? 

잘못된 인용이 나온 게 조국 혼자만의 탓은 아니다.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 역시 ‘룰라는 우리 편, 모루는 저쪽 편’이라는 식의 관점으로 ‘위기의 민주주의’를 보고 페이스북에 감상문을 게재한 바 있다. 이재명 경기지사도 비슷한 관점으로 작품을 봤다. 지난해 1211일 김어준의 팟캐스트 ‘다스뵈이다’ 143회가 제공한 ‘연성 쿠데타’ 논리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윤석열을 모루에 빗대는 것은 누워서 침 뱉기요 도끼로 제 발등 찍는 꼴이다. 그것은 앞서 지적한 바와 같다. 이제 좀 더 본격적인 이야기를 해보자. 대체 브라질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위기의 민주주의’는 그 사건을 어떤 식으로 해석하여 전달하고 있을까. 우리가 진짜 배울 수 있고 배워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놀라우리만치 부실한 서사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위기의 민주주의(The Edge of Democracy)’. [넷플릭스 홈페이지]
‘위기의 민주주의’는 2시간짜리 장편 다큐멘터리영화지만 그 내용은 간단하다. 조 전 장관이 요약한 그대로다. 선한 의지를 가진 불굴의 노동운동가 룰라와 그 정치적 후계자인 지우마를 브라질의 부패한 기득권층이 정치적으로 암살했다는 것이다. 

브라질 정치의 구조상 부정부패는 늘 있어왔고 단번에 뿌리 뽑히지 않았다. 빈곤층과 유색인종으로 대표되는 브라질 민중을 위해 노동당 정부는 대대적인 복지 정책을 추구했다. 은행과 산업 자본가들은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룰라는 워낙 인기가 많았고 그의 재임 기간 동안 경기가 좋았기 때문에 건드리지 못했지만 지우마는 공략 가능한 대상이었다. 고문을 이겨낸 민주 투사이며 경제학자였지만 정치적 스킨십이 부족했고, 입장이 다르면 주변인까지 적으로 돌릴 만큼 정치적으로 서툴렀기 때문이다. 브라질의 기득권은 지우마가 직접 뇌물을 받았다는 증거도 제시하지 못한 채, 몇몇 회계 처리를 분명히 하지 않았다는 사소한 빌미를 잡아 탄핵했다. 브라질 국회의 과반수가 이런 저런 비리에 얽혀 있음에도 적반하장 격으로 탄핵이 벌어졌다. 

이 단순 명료한 선악 구도는 미국을 통해 세계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뉴욕타임스’ ‘뉴요커’ ‘가디언’ 등 영향력 있는 매체와 할리우드의 스타 제작자, 감독, 배우들이 열렬한 지지를 보냈다. ‘위기의 민주주의’는 2020년 오스카상에서 장편 다큐멘터리 분야 후보로 노미네이트되는 영광을 누리기까지 했다. 

이 원고를 쓰기 위해 필자도 ‘위기의 민주주의’를 봤다. 기본적으로 촬영이 잘 된 작품이다. 브라질 행정수도인 브라질리아는 현대 건축의 아이콘인 르 코르뷔지에의 아이디어에 기반해 만들어진 계획도시다. 모든 길이 곧고 길쭉하며 건물은 크고 시원시원하게 깔끔한 선으로 이뤄져 있다. 다큐멘터리는 그 전경을 다양한 각도에 담아 브라질 정치와 현대사를 훑어나간다. 눈 호강은 확실히 시켜준다. 

하지만 내용은 놀라우리만치 부실하다. 너무도 일방적이고 편향적이다. 노동당 정권이 왜 몰락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충분한 설명을 제공해주지 않는다. 감독이자 제작자이며 내레이터인 페트라 코스타 자신부터 브라질 현대사의 모순을 그대로 끌어안고 있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자기 성찰 대신 손쉽게 지목할 수 있는 적을 비난하는 데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생각도 지울 수 없다. 그 모든 맥락을 놓고 보면 ‘위기의 민주주의’에 쏟아진 할리우드의 찬사마저도 문득 불편하게 느껴진다. 

우선 브라질 정치를 살펴보자. 브라질은 민주국가였지만 1964년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킨 후 긴 암흑기를 겪었다. 1984년 거세진 민주화 요구에 군부가 한 발 물러났다. 1985년 민정이양 총선이 치러진 것이다. 하지만 군부는 대통령 직선제까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선거인단이 대통령을 뽑기로 결정했다. 자신들의 남은 영향력을 발휘해 대통령 자리는 지킬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었다.

‘자본주의=군부독재=언론=기득권’ 단순 도식
2020년 2월 3일 추미애 당시 법무장관이 경기 정부과천청사 법무부에서 법무검찰개혁위원회와 상견례 겸 간담회를 하고 있다. 뒤로 조국 전 장관 등 역대 장관들의 얼굴이 새겨진 동판이 보인다. [양회성 동아일보 기자]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상황은 완전히 달랐다. 브라질민주운동당(PMDB)이 제1당의 자리를 차지했다. 브라질민주운동당은 중도 성향의 정치 세력이었다. 룰라가 만들고 이끌던 노동당(PT)은 제2당으로 급성장했다. 중도와 좌파가 1당과 2당이 돼버린 상황에서 군부의 정당인 국가혁신동맹(ARENA)은 맥을 추지 못했다. 1985년 군부 출신의 마지막 대통령 주앙 피게이레두가 사임하고 새로운 선거가 치러졌을 때, 간선제였음에도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것은 브라질민주운동당의 탄크레두 네베스였다. 하지만 네베스는 선거 직후 의식을 잃었고 부통령이던 조제 사르네이가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이후 브라질에서는 행정부와 입법부 모두 군정종식 및 민정이양의 길을 걸었다. 그 후 직선제 개헌을 통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위기의 민주주의’가 룰라 및 노동당에 편향적인 작품이라고 비판받을 소지가 여기에 있다. 브라질 정치에 대해 사전 지식이 없는 상태로 오직 ‘위기의 민주주의’만 본 대다수 해외 시청자들은 브라질 민주화 운동을 룰라와 노동당, 공산주의 세력이 다 한 것처럼 오해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는 공산주의와 거리를 둔 중도세력이 단일 대오를 형성해 군부로부터 권력을 빼앗아온 것이다. 

그런 맥락은 의도적으로 생략됐다. 페트라 코스타는 2002년 룰라가 대선에 당선되기까지 연거푸 고배를 마시는 모습을 방송 인터뷰로 보여준다. 룰라가 강경한 반(反)시장주의 태도를 보일 때는 졌지만, 시장의 힘에 굴복하는 모습을 보이자 이겼다는 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즉 그는 ‘시장’을 곧 ‘기득권’으로, 또한 ‘군부’와 거의 동일한 무엇인가처럼 다룬다. ‘자본주의=군부독재=언론=기득권’이라는 단순한 도식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치 유일한 민주화 운동가인 룰라가 민정이양 후에도 살아남은 군부 세력과의 선거에서, 시장과 경제를 장악하고 있는 기득권에 밀려난 양상처럼 보인다.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룰라와 대선에서 맞붙은 것도, 그리고 룰라를 계속해서 이겨온 것도, 마찬가지로 ‘민주 정당’이었다. 하지만 ‘위기의 민주주의’에서 브라질의 중도 정치 세력은 룰라와 연정을 했다가 뒤통수를 친 배신자쯤으로만 묘사될 뿐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마치 한국의 ‘강남좌파’ 혹은 ‘586 세대’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1987년 민주화에 586 세대가 아무 기여를 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들의 영향력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처럼 크지 않았다. 동교동계와 상도동계로 대표되는 양김 세력이 건재했고, 미국을 비롯한 외국의 도움이 있었기에 중국 천안문 사태와 같은 비극을 피하고 민주주의를 쟁취할 수 있었다. 

한국의 586 세대는 오직 자신들의 힘만으로 민주화를 이룬 것처럼 역사를 해석한다. 또 그런 세계관을 유포한다. 마찬가지로 ‘위기의 민주주의’를 만든 페트라 코스타 역시 룰라와 노동당을 중심에 놓고 일종의 ‘역사왜곡’을 하고 있다.

‘브라만 좌파’의 카메라
브라질의 민주주의는 룰라 혼자 이루어낸 게 아니다. 룰라와 노동당이 다른 정치 세력과 마찬가지로 비리 혐의로 무너진 것은 민정이양 이후 브라질 정치의 고질적인 패턴일 뿐이다. 최초의 직선제 대통령인 페르난두 콜로르 지 멜루부터가 그랬다. 비리 혐의로 탄핵을 당했다. 군정 종식 이후 자신들이 뽑은 최초의 직선제 대통령이다. 그 소중한 직선제 대통령을 탄핵했다. 브라질은 축구만 잘 하는 게 아니라 탄핵도 잘 하는 나라다. 소수 정당에 워낙 유리한 선거 제도를 갖고 있다 보니 집권 여당이 의회를 장악하기 어려운 제도적 이유 때문이다. 

코스타는 멜루의 탄핵에 대해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그런 침묵을 ‘멜루 탄핵’에 대한 긍정으로 받아들여보자. 그렇다면 ‘위기의 민주주의’는 브라질 민주주의가 멜루를 당선시키고 탄핵시킬 때까지만 해도 ‘정상’이었다가, 룰라를 비리 혐의로 수사하고 지우마를 탄핵하자 갑자기 ‘위기’에 빠졌다는 이야기가 돼버린다.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소리다. 브라질 사람 중 특정 계층의 어처구니 없을 만큼 당당한 자기중심적 태도가 이 작품의 바닥에 깔려 있다. 

‘위기의 민주주의’는 노동당 엘리트와 밀접한 관계를 지닌 브라질판 ‘강남좌파’의 자기중심적인 현대사 해석에 기반하고 있는 작품이다. 노동당으로 대표되는 브라질의 좌파, 그 중에서도 노동당 창당 이후 제도권 정치를 택한 좌파를 중심으로 삼고 있다. 그러면서 이들이 아닌 나머지 모든 세력을 민주주의에 반대하는 어떤 존재로 표상하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성립할 수 없는 서사다. 이는 한국 ‘강남좌파’들의 민주화 서사와도 일맥상통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해보자. 페트라 코스타는 한국의 강남좌파와는 차원이 다른 대단한 가문 배경과 재산을 갖고 있다. 토마 피케티의 용어를 빌자면 ‘브라만 좌파’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그의 어머니는 중산층 집안 출신의 대졸자였다. 할아버지는 행정수도 (비록 건설 단계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브라질리아의 기획자 후보로 거론될만한 거대 건축업자였다. 아버지는 미국의 베트남전 반대 시위를 보고 감명 받아 미국 유학을 갔던 엘리트였다. 

페트라 어머니의 모습을 담은 과거 필름 영상을 보며 그 가문의 계급적 지위를 느끼는 건 어렵지 않다. 평범한 브라질 사람들이 빈곤에 시달리던 1980년대, 부부는 일상적으로 8mm 필름 카메라를 꺼내들고 다양한 영상을 찍고 있던 것이다. 

페트라는 그 계급의 브라질 상류층이 대체로 그렇듯 해외로 유학을 떠났다. 런던정경대(LSE)에서 학위를 따고 뉴욕 맨해튼에서 영화에 빠져들었다. ‘위기의 민주주의’를 통해 우리는 국민 대다수가 빈곤층인 가운데 ‘글로벌 리버럴 엘리트’로 살아가는 제3세계 특권층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 이것은 뉴욕에 사는 미국 리버럴의 시각으로 브라질을 바라보는 작품이다. 브라질 여성이 직접 출연해 포르투갈어로 내레이션을 했다고 해서 그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모종의 ‘내로남불’ 서사
패트라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노동당을 지지하는 브라질인이다. 당연히 반미주의자다. 하지만 그들은 당연하다는 듯 딸을 영국으로 유학 보냈고, 그 딸은 미국에서 가장 생활비가 비싼 맨해튼에 살다가 브라질로 돌아왔다. 그 뒤 브라질의 포퓰리스트 정권을 비난하기 위해 브라질 전체의 민주주의를 도매금으로 비난하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세계 영화인’들의 찬사를 받았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보우소나루 정권을 통해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을 비난하고 싶은 미국 영화인들의 가려운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줬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종의 ‘서사적 착취’ 아닌가. 

대부분의 경우 회계 부정과 조작은 더 큰 범죄를 알리는 신호다. 현대 민주주의 국가는 종이와 디지털 공문서에 적혀 있는 글과 숫자를 믿을 수 없다면 성립할 수조차 없다. 하지만 페트라는 지우마에게 씌워진 연방 정부 회계 부정을 ‘사소한 일’로 치부하고 있다. ‘브라질에서 부정부패란 늘 있어왔고 피할 수 없는 일’이라는 어머니의 말을 통해 얼버무리고 있지만, ‘위기의 민주주의’가 모종의 ‘내로남불’ 서사라는 사실은 달라질 수가 없다. 

이 영화를 바라보고 수용하는 국내의 시청자들을 보면 우려는 더 커진다. 정경심 동양대 교수의 입시 부정 및 공문서 위조, 윤미향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연루된 회계 부정 혐의에 애써 눈을 감는 이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들이 한국의 중산층이나 서민보다 브라질의 ‘브라만 좌파’와 더욱 정서적으로 가깝다는 걸 보여주는 징후라 할 수 있다. 생계 문제에서 자유로운,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더욱 ‘약자와 빈민을 위한 정치적 변혁’에 매진하는, 그러면서도 자신의 이득은 알차게 챙기는 그런 부류에게 ‘위기의 민주주의’는 큰 호소력을 발휘하고 있는 듯하다. 

좌파 포퓰리스트 룰라가 사라진 자리를 우파 포퓰리스트 보우소나루가 차지하면서 브라질 민주주의는 진정한 위기에 빠졌다. 룰라 정권 ‘인사이더’ 사이에서 내부 감시와 비판 기능이 마비된 탓이 크다. 바꿔 말하면 ‘내로남불’이다. ‘위기의 민주주의’를 보지 말자고, 혹은 나쁜 영화라고 말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이 작품을 우리의 ‘민주주의 교과서’로 여겨서는 안 된다. 영화의 내용 뿐 아니라 제작 과정 및 소비되는 방식 자체가 거대한 반면교사라고 봐야 한다.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basil83@gmail.com

2021-03-20

나무 심는 영웅인줄 알았는데 뭉개버리네… 이것이 ‘국토 농단’

 [아무튼, 주말-노정태의 시사哲]
소설 ‘나무를 심은 사람'과
LH사태로 본 ‘공유지의 비극'

1913년, ‘나’는 프로방스 지방을 거쳐 알프스 산맥 속을 걷고 있었다. 라벤더만 듬성듬성 핀 삭막한 황무지가 끝없이 이어졌다. 수통에는 물 한 방울 남아있지 않았다. 마을 흔적은 있었지만 인적을 찾기 어려웠다. 절망감이 커져갈 즈음 늙은 양치기를 만났다.

아내와 아들을 잃고 세상과 동떨어져 살던 고독한 양치기는 식사 후 테이블에 앉아 도토리를 쏟아놓고 고르기 시작했다. 다음 날 그는 좋은 도토리를 자루째 물에 푹 담갔다가 꺼내 들고 나갔다. 그러고는 지팡이로 땅에 구멍을 뚫고 도토리를 심기 시작했다. 그 늙은 양치기, 엘제아르 부피에는 홀로 황무지와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일러스트=안병현
부피에는 진심으로 그 일에 매진했다. 어린 가지와 잎사귀를 뜯어 먹어 나무가 자라는 데 방해가 되자 양을 팔아버리고 대신 벌을 치기 시작할 정도였다. ‘나’는 종종 그 산을 찾아갔다. 1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는 그 수십 년 동안 부피에는 꿋꿋하게 나무를 심었다. 숲이 자리를 잡자 말라붙었던 개울에 물이 흐르고 곤충과 동물이 찾아오면서 결국 사람들이 살기 좋은 곳으로 거듭났다.

프랑스 작가 장 지오노의 1953년 작 <나무를 심은 사람> 내용이다. 캐나다의 애니메이터 프레더릭 백이 1987년 동명 애니메이션으로 오스카상을 받으면서 세상에 더욱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 영향을 받은 수많은 이가 세계 곳곳에서 나무를 심고 황량한 땅을 푸른 숲으로 되돌리고 있다.

그래서 그럴까. <나무를 심은 사람>을 실화로 생각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고 한다. 그렇지는 않다. 장 지오노의 경험에 기반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픽션이다. 그런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치밀하게 잘 짜인 작품이다. 우리는 <나무를 심은 사람>을 통해 오늘날 정치학, 경제학, 사회철학 등의 필수 개념으로 자리 잡은 ‘공유지의 비극(tragedy of commons)’을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공유지의 비극은 미국의 생태학자 개릿 하딘이 1968년 ‘사이언스'에 발표한 논문 제목이다. 숲, 어장, 혹은 깨끗한 공기처럼 누구나 이용할 수 있지만 무한하지는 않은 자원을 떠올려보자. 내가 먼저 물고기를 잡지 않으면 남이 잡는다. 어부들 사이에서 경쟁이 붙는다. 그런데 그 어장을 개인이나 국가가 관리하지 않는다면 아무나 와서 물고기를 잡을 것이다. 결국 수많은 이가 경쟁적으로 자원을 채취하여 공유지는 망가지고 만다.

<나무를 심은 사람>은 이 과정을 정확히 묘사하고 있다. 황무지 주민들은 숯을 구워 도시에 팔았다. 극심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며 경쟁적으로 나무를 베었다. 화자인 ‘나’는 숲의 파괴에 대해 부피에와 대화를 나눈다. “난 그의 땅이냐고 물었다. 아니라고 했다. 주인을 아느냐고 물었다. 모른다고 했다. 아마도 공유지거나, 주인이 있는데 그냥 버려두고 있는 땅 같다고 했다.”

부피에는 누구 것인지도 모르는 땅을 되살리기 위해 인생을 바쳤다. 그 조용한 헌신은 보답을 받았다. 숲이 저절로 살아났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자연에 경의를 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1933년 산에서 불을 피우지 못하게 했고, 1935년에는 정부 조사단이 숯 굽는 일을 금지했다. ‘나’는 감탄한다. “숲은 국회의원들에게조차도 마법을 걸었던 것이다.”

천연자원을 보호하고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노력과 국가의 관리가 필요하다. 제도경제학자 엘리너 오스트롬은 한발 더 나아가, 시장 대 국가의 대립 구도를 넘어 공동체의 힘으로 공유지의 비극을 극복할 수 있다는 관점을 제시해 2009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는 시장뿐 아니라 공동체의 역량마저도 국가의 투명한 행정과 공정한 법 집행의 영향을 받는다. 공유지의 비극이 벌어지지 않게 하는 건 결국 국가 몫이다. <나무를 심은 사람> 속 프랑스 정부가 되살아난 숲을 보호하기 위해 여러 정책을 시행한 것처럼 말이다.

현실의 대한민국은 정반대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3기 신도시 개발 정보를 입수한 LH 직원 및 고위 공직자들은 그 땅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허겁지겁 매입했다. 더 많은 보상금을 타내기 위해 값비싼 묘목을 빽빽하게 심었다. 나무가 자라기는커녕 다 말라 죽어버릴 테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차피 뽑아버리기 위해 심는 나무에 지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이 사건을 진정 해결하고 싶다면 검찰 개혁이니 검수완박이니 허튼소리 집어치우고 검찰에 수사권을 돌려주어야 한다. 형사소송법과 검찰청법 시행령만 개정하면 당장이라도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정부는 자체 조사를 운운하며 시간을 끌고 있다. 여당은 공허한 특검 논의로 물타기를 시도한다. 공유지의 비극이 발생하지 않으려면 정당한 소유권과 올바른 공권력이 필수적이지만, 그들은 정반대 방향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윗물이 탁한데 아랫물이 맑을 수는 없는 법. 문재인 대통령은 퇴임 후 사저를 짓기 위해 농지를 구입하면서 ‘영농 계획서’를 제출했다. 그 땅에 농사를 짓겠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계획대로 농사를 지어야 한다. 정 숙소가 필요하다면 비닐하우스에서 자든가 해야 한다. 교양과 상식을 지닌 사람이라면 불법이 아니어도 하지 않을 일을 대통령이 버젓이 저지르고 있다. 그러면서 국민을 향해 ‘부동산 적폐 청산’을 외친다. 누가 누구를 적폐로 모는가. 누가 누구를 청산한단 말인가.

<나무를 심은 사람>은 고독한 영웅의 조용한 투쟁을 감동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에게 투표한 국민들 역시 그런 기대를 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당선 이후 태양광과 풍력발전소를 늘리겠다며 산을 깎고 나무를 뽑아왔다. 농지 구입을 의아하게 여기는 국민들을 향해 ‘좀스럽다’고 쏘아붙였다. ‘나무를 심는 사람’이 아니라 ‘나무를 뽑는 사람’인 것이다.

공유지의 비극을 일으킨 알프스의 화전민처럼, 신도시 개발 계획 정보를 입수한 LH 직원 및 정부 고위층은 경쟁적으로 게걸스럽게 땅을 집어삼켰다. 이것은 ‘국토 농단’이다. 알프스의 숲이 저절로 살아나지 않았듯 부패한 권력이 알아서 반성하는 일은 없다. 우리 스스로 정치판의 잡초들을 뽑아내고 건강한 도토리를 심어 나가야 한다.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2021-03-14

文 대통령이 더 빨리 백신을 맞아야 하는 이유

 OECD 10개 경제대국 중 韓·日 국가수반만 백신 안 맞아 [노정태의 뷰파인더㉕]

● 접종 참관 대통령·‘모의접종’ 경남지사
19세기 말부터 백신은 늘 정치적
● 일제, 식민지 조선에서 강제 접종 실패
● 조선인, 민심 동요 탓 위생업무 非협조
● 이승만 정권이 일제보다 두창 예방 잘 해낸 비결
● ‘강제 않는 설득’이 백신 접종 출발
● 접종 시기마저 정치적으로 이용하나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왼쪽에서 두번째)이 2월 26일 서울 마포구 보건소를 방문, 재활시설 종사자인 김윤태 의사(푸르메 넥슨어린이 재활병원)가 아스트라제네카(AZ) 백신을 접종받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시사 상식 퀴즈. 다음 중 2021년 3월 14일 현재 코로나19 백신을 맞은 사람은? ① 문재인 대통령 ② 김경수 경상남도지사 ③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 ④ 권영진 대구시장 ⑤ 없다. 

정답은 5번이다. 유명 정치인 중 코로나19 백신을 맞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문재인 대통령은 1호 접종자가 화이자 백신을 맞을 때 옆에서 ‘참관’했다. 김경수 지사는 ‘모의 접종’에 참여했다. 백신을 실제로 맞은 게 아니라, 옷 위로 주사기를 놓고 주사 맞는 시늉을 하며 사진을 찍었다. 대통령을 비롯해 여권 고위층 그 누구도 백신을 직접 맞으며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야권 정치인 및 지자체장들이 ‘나라도 백신 맞는 모습을 국민에게 보여주겠다’고 손을 들고 나서기 시작했다. 안철수 대표가 2월 22일 “정부가 허락한다면 정치인으로서, 또 의료인의 한 사람으로서 먼저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맞을 용의가 있다”고 나선 게 시초다. 국민의힘 소속 권영진 대구시장 역시 백신을 맞겠다고 자청했다. 권 시장의 접종은 3월 8일로 예정돼 있었다. 같은 날 박성수 송파구청장, 3월 10일에는 서정협 서울시장 권한대행도 백신을 맞겠노라고 공언했다.

한반도 역사상 ‘1호 백신 접종자’
코로나19 백신 접종이 시작된 지난 2월 26일. 서울 마포구 보건소에서 의료진이 접종에 사용할 아스트라제네카(AZ) 백신을 준비하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모두 질병관리청에 의해 가로막히고 말았다. 3월 7일 저녁, ‘지자체장은 백신 우선접종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공문을 보낸 것이다. 표면적 이유는 백신 수급이 제한된 만큼 현장대응 업무를 수행하는 인력까지만 우선 접종 대상에 포함한다는 것이었지만,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석연치 않은 게 사실이다. 야권 서울시장 후보나 야당 소속 지자체장이 대통령보다 먼저 백신을 맞는다면 대통령의 위신이 땅에 떨어질 것을 우려하지 않았나 싶다. 

야당과 언론의 비난이 거세지자 청와대와 여당은 전가의 보도를 꺼내들었다. ‘백신을 정쟁의 도구로 삼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정치적으로 악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야말로 정치적 발언이다. 처음 이 땅에 예방접종이라는 현대 의학이 들어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백신은 단 한 번도 정치적이지 않은 적이 없다. 그 맥락을 온전히 파악해야 오늘날의 코로나 백신 정국을 이해할 수 있다. 

지석영은 1879년 두창(천연두) 대유행 당시 조카딸을 잃었다. 그는 고향 충주를 떠나 부산에 있던 일본 해군 소속 제생의원에서 일본인 의사에게서 우두술을 익혔다. 그 뒤 우두의 원료 및 종두침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기술을 배웠고 재료도 갖고 있으니 이제 접종을 해야 할 때. 하지만 주변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그의 장인도 우두를 ‘일본인이 조선인을 죽이기 위해 만든 위험한 약’ 취급했다. 하지만 지석영은 장인을 설득했고 1897년 말 두 살 난 처남에게 우두를 접종해 성공을 거두었다. 한반도 역사상 ‘1호 백신 접종자’는 지석영의 처남이요, ‘1호 백신 접종 참관자’는 지석영의 장인이었던 셈이다. 

당시 지석영이 느꼈던 환희는 1931년 1월 25일자 ‘매일신보’에 생생히 기록돼 있다. 

“평생을 통해 볼 때 과거에 (급제)했을 때와 귀양살이에서 풀려나왔을 때가 크나큰 기쁨이었는데 그때(처남의 팔뚝에 우두 자국이 완연히 나타나는 것을 보았을 때)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니었지요.” 

지석영은 고향에서 40여 명에게 추가로 우두 시술을 했다. 이후 한성으로 돌아와 1880년 3월부터 우두국을 개설하고 교육 및 접종 사업에 몰두했다. 일본을 방문하고 돌아온 그해 10월부터는 우두국을 종두장으로 확대 개편해 본격적인 우두 접종 사업을 펼쳤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1882년 7월 임오군란이 터졌다. 개화파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 구식 군인 뿐 아니라 ‘개화’에 위세가 눌렸던 온갖 세력이 목청을 높이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무당도 있었다. 무당에게 우두 접종은 자신들의 생계를 위협하는 적이기도 했다. 

우두 접종으로 천연두가 사라진다고 해보자. 혹은 완전히 박멸되지 않더라도 그 질병에 대한 사람들의 미신적인 공포가 사라지고 그저 ‘질병’의 하나로 취급하게 된다고 해보자. 이는 천연두를 ‘손님’이라 부르며 마마배송굿이나 손님굿 등을 통해 돈을 벌어왔던 무당들의 비즈니스 모델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이다. 

난리 통이었으니 범인이 정확히 누군지 특정하기는 어렵겠지만, 무속인들에게 직접 불을 지르거나 대중을 부추길만한 동기가 있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지석영은 난리가 끝난 후 화재로 사라진 종두장을 복구했고 체계적인 교육 및 접종 사업을 계속해 나갔다.

일제의 강제 접종이 실패한 이유
여러 난관에도 지석영을 중심으로 한 조선의 종두의들은 최선을 다해 결과를 만들고 있었던 셈이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도 일본은 1895년 반포된 종두규칙을 인정했고, 기존 조선 인력을 활용해 우두를 접종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대한제국 역시 종두 접종을 강제하고 있었으나 행정 역량의 한계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반면 일제는 강제 접종을 실행에 옮겼다. 이는 일본의 식민지였던 대만의 경험을 반복하는 일이기도 했다. 일제의 우두 정책은 효과적이었다. 적어도 초기에는 그랬다. 1913년 총독부는 “두창은 거의 절멸에 가까이 갔다”고 평가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1919년 이후 갑자기 두창 환자가 폭증했다. 1919년에는 2140명의 환자와 700명의 사망자가 나오더니, 1920년에는 1만1532명의 환자와 3614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1915~1917년까지 발생한 환자와 사망자가 각각 50명 이하, 10명 이하였던 점을 생각하면 말 그대로 ‘창궐’했다. 한번 되살아난 두창은 일제강점기가 끝나도록 잡히지 않았다. 1930년을 넘기며 두창 환자는 다시 1000명을 넘었고, 1942년에도 1600명의 환자가 발생했다고 기록돼 있다. 

박윤재 경희대 사학과 교수는 2012년 ‘의사학(醫史學)’에 발표한 ‘조선총독부의 우두정책과 두창의 지속’이라는 논문에서 일제강점기 두창 예방접종 정책의 실패를 되짚는다. 총독부는 조선인들의 위생 의식을 탓했다. 두창으로 집안 식구가 사망하면 시체를 나무 위에 걸어둔다거나, 심지어 시신을 집안에 오랫동안 두고 친척들이 모여 밥을 먹기도 한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런 참담한 의식 수준은 조선의 지식인들이 남긴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식민지 조선인들은 두창 예방을 위해 개를 잡아먹거나, 개의 피를 문간에 흘려놓거나, 마마신을 속이기 위해 절구에 쓰는 방아를 시체인 양 꾸며 거꾸로 두고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조선보다 일찍 일본의 식민지가 된 대만에서는 20세기 들어 사실상 두창이 사라졌다. 그러니 일제는 한반도에서 자신들의 실패를 더더욱 용납할 수 없었다. 그들이 택한 방법은 그저 더 많은 강제력을 투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3·1 운동 이후 본격적으로 싹튼 민족의식이 종두법 보급을 가로막았다. 박윤재 교수는 논문에서 “3·1운동의 목표가 식민 지배에 대한 반대였던 만큼 조선인들도 경찰의 위생업무에 협조하지 않았다. 민심은 명백히 동요하고 있었다”고 썼다. 

결국 식민지배가 끝나도록 일제는 조선에서 두창의 ‘집단면역’에 도달하지 못했다. 논문에 따르면 “1920년 통계에 따르면, 두창 환자 중 규정된 제2기 종두까지 완료한 사람은 63.8%에 지나지 않는다.……1930년대 통계에 따르면, 총독부의 행정력이 가장 깊숙이 침투한 경성부조차 접종 예정자 중 70%의 사람만이 춘추 정기 종두에 참여할 뿐이었다. 성공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검두(檢痘)에 오는 사람은 그 중 다시 반이었다.” 

식민지 조선인들이 두창의 위험성을 몰랐을 리는 없다. 적절한 예방접종을 통해 그것을 막을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고작 16년 후, 1961년 이래 국내에 두창 환자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미군정을 거쳐 대한민국이 탄생하고 난 후 의무접종을 시행하자 다들 순순히 예방접종을 받았다. 덕분에 수월히 집단면역에 도달했다.

행정 역량 이전에 ‘강제 않는 설득’
지난해 1221일(현지시간) 조 바이든 당시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델라웨어주 뉴어크에 있는 크리스티애나 병원에서 화이자의 코로나19 백신을 접종받고 있다. 그의 접종 모습은 TV로 생중계됐다. [AP=뉴시스]
두창 백신의 도입과 보급의 역사를 통해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첫째, 백신을 통한 집단면역 형성과 전염병 퇴치는 ‘직관적’으로 이해 가능한 영역이 아니다. 상당수 혹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정서적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둘째, 무턱대고 강제만 하는 방역 정책은 성공을 거두기 어렵다. 식민지를 다스리던 조선총독부도 해내지 못했다. 

셋째, 가장 중요한 대목. 필요에 대한 설득이 사회적으로 충분히 이루어진다면 백신 접종과 집단면역은 의외로 수월하게 달성될 수 있다. 일제보다 행정 역량이 부족했다고 볼 수 있는 미군정 및 이승만 정권이었지만 두창 예방만큼은 일제보다 외려 더 잘 해냈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관건은 ‘강제하지 않는 설득’의 방법론이다. 실질적으로는 강제라 해도, 받아들이는 이가 반감을 느껴 비이성적 선택을 하지 않게끔 하는, 그런 설득을 해낼 수 있어야 한다. 특히 백신처럼 본능적으로 거부감과 공포를 자아낼 수 있는 대상이라면 더욱 섬세하면서도 대범한 접근법이 필요하다. 훌륭한 정치적 설득력이 요구되는 셈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문재인 대통령의 행보에 의문을 표할 수밖에 없다. 대체 왜 그는 ‘1호 백신 접종자’가 되지 않았는가? 왜 남이 백신 맞는 것을 멀뚱히 지켜보는 장면을 연출했는가? ‘1호 백신 접종자’의 자리는 의료진에 양보할지라도 최대한 빨리 백신 맞는 모습을 국민에게 보여줬어야 하지 않을까? 여당 정치인들이 ‘대통령을 모르모트로 만들 셈이냐’ 따위 망언을 내뱉을 때 말리는 시늉이라도 했어야 하지 않을까? 

65세 이상이니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맞을 수는 없고 화이자 백신은 더욱 물량이 부족하니 현장 인력과 고위험군에게 먼저 투여해야 한다는 변명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백신을 처음 개발한 미국과 영국에서도 백신의 초기 물량은 부족했다. 미국을 제외한 그 어떤 나라도 완전히 넉넉한 물량을 확보하고 있지는 못한 상황이다. 

하지만 선진국은, 선진국일수록, 대통령이나 여왕 혹은 총리 같은 사회지도층이 먼저 팔뚝을 걷어붙이고 백신을 맞았다. 그런 모습을 대중에게 공개했다. 올해로 78세인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취임식을 하기도 전에 당선인 신분으로 백신을 맞았다. 그래야 백신 거부 세력의 불만을 잠재울 수 있다는 점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현 시점에서 문 대통령이 화이자 백신을 맞는 것은 결코 ‘귀중한 물량을 낭비하는 일’이 아니다. 정 반대다. 평범한 의료인 한 사람이 맞는 것보다 대통령이 맞는 게 열 배, 백배는 더 중요하다. ‘백신은 안전하다’, 더 나아가 ‘백신을 맞는 것이 우리 모두를 코로나로부터 지키는 길이다’라는 메시지를 대중에게 퍼뜨리고 설득하기 위한 최우선 과제이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과 청와대의 참모진은 무슨 생각일까. 대통령 본인은 안 맞으면서 남에게 백신 맞으라고 권하는 장면을 연출하는 게 대중에게 불러일으킬 의심과 공포에 대해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은 것 아닌가? 아니면, 혹시나 해서 한 사람의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물어보고 싶은데, 문 대통령은 백신을 맞는 게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안티백서(Anti Vaxxer: 백신 음모론자)’인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이며 세계 10대 경제 강국인 만큼 대한민국을 떳떳하게 ‘선진국’이라고 불러보자. 선진국 중 대통령이나 총리 등 국가수반이 백신 맞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은 나라는 딱 세 곳 밖에 없다.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이던 시절의 미국, 스가 요시히데 총리의 일본, 그리고 대한민국이다. 트럼프는 퇴임했으니 논외로 한다면, 문 대통령이 이 사안에 대해서만큼은 일본에 대한 경쟁심을 불태우지 않는 건 의아한 일이다. 

대통령이나 그에 준하는 국가수반이 앞장서서 백신을 맞지 않는 나라들의 명단을 선진국 너머로 확장해서 채워보면 어떨까. 독자 여러분의 머릿속에 예상 가능한 나라들이 스쳐 지나갈 것이다. 그렇다. 중국, 러시아, 브라질 등 독재자 혹은 포퓰리스트가 집권하고 있는 나라에서는 ‘백신 솔선수범’이 벌어지지 않았다.

국가수반이 백신 맞지 않은 국가
포퓰리스트로 악명 높은 브라질의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백신을 안 맞는 차원을 넘어 적극적으로 음모론을 퍼뜨리고 백신의 효능을 부정하며 ‘안티백서’ 노릇을 하고 있다. 중국 시진핑 주석 또한 백신을 맞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최근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 찍힌 사진이 있긴 하나, 백신을 맞았다고 홍보하지도 않았으므로, “맞지 않았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라고 3월5일 ‘블룸버그’가 보도했다. 

러시아의 푸틴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홍보 소재로 삼는 푸틴이지만 ‘나는 남자답게 백신을 맞았다’며 인증샷을 올리지는 않았다. 그러니 러시아의 자랑, 국내에서도 위탁생산 중인 ‘스푸트니크 V’ 백신을 푸틴은 맞지 않았다고 봐도 큰 무리가 없다. 중국과 러시아가 세계 각국을 상대로 ‘백신 세일즈’를 하고 있다는 점을 놓고 보면 실로 황당한 일이다. 

지난 3월 4일, 청와대는 “문 대통령은 기꺼이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접종받겠다는 입장”이라고 밝혔다. 다만 접종 시기는 밝히지 않았는데, 6월에 열릴 G7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늦어도 4월 초에는 첫 번째 접종을 해야 한다는 관측이 우세하다. 

선진국 국가수반의 선례를 따르자면 문 대통령은 진작 백신을 맞았어야 했다. 그런데도 여태 접종을 미루고 있는 것은 여러모로 석연치 않다. 대통령의 백신접종 시기마저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떨치기 힘들다. 4월 7일 재·보궐선거를 코앞에 두고 백신을 접종하기 위해 아껴두고 있는 건 아닐까? 

백신은 과학과 본능의 싸움이다. 모든 싸움은 곧 정치다. 따라서 과학은 탈정치적일 수 없다. 본능을 이겨내고 과학을 택하는 그 자체가 정치적 결단이기 때문이다. 다만 2021년 현재는 충분히 많은 사람이 본능이 아닌 과학을 택하고 있기에 그 정치적 갈등이 눈에 띄지 않을 뿐이다. 

2021년 대한민국에는 백신을 둘러싼 수많은 정치 쟁점이 있다. 대체 왜 다른 선진국과 달리 한국은 매우 적은 양의 화이자 백신을, 그것도 개발도상국을 위한 모금 프로그램인 코백스를 통해 도입해야 했는가? 무슨 근거 혹은 목적으로 아스트라제네카에 백신 정책을 ‘올인’했을까? 당장은 진실을 알 길이 없다. 

더 중요한 건 이후의 행보다. 백신 논란을 방치하고 있는 문 대통령의 행태가 백신에 대한 국민적 불안과 공포를 키운다는 지적도 있다. 실제로 그렇다면, 이 또한 정치적 선택이다. 그런데 이것은 백신 도입에 차질을 빚은 것과는 차원이 다른 정치적 악행이다. 우리 사회의 정치적 갈등을 19세기 말 구한말에서나 있었던 ‘의학이냐 무속이냐’, ‘과학이냐 미신이냐’ 차원으로 퇴행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이 뒷짐 지고 ‘참관’하는 동안 백신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갈등은 깊숙이 곪아가고 있다. 국민 사이에 특히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에 대한 공포가 퍼져가고 있다. 친문 지식인과 누리꾼들은 그런 여론을 비난하고 매도하기 바쁘다. 마치 일제강점기 총독부 관리와 경찰 및 일제에 복무한 지식인들이 조선인들을 상대로 백신의 효능을 강압적으로 ‘계몽’했던 풍경이 연상된다고 하면 과도한 표현일까. 

필자는 과학주의자이며 이성주의자다. 아직 젊고 의료인도 아니니 한참 순위가 밀리겠지만 내 차례가 온다면 가리지 않고 백신을 맞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대통령은 백신을 맞지 않으면서, 친문 정치인과 지식인, 누리꾼만 목청을 높여가며 반대 세력을 매도하는 정치적 풍경에도 단호히 반대한다. 이건 감히 말하건대 최악의 정치다. 

백신에 대한 불안을 드러내는 이들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어서는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 백신을 거부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거부할 수 있다는 안도감을 줘야 한다. 다만 좀 더 영향력 있는 이들이 솔선수범해 효능과 이익을 보여줌으로써 대중을 자연스럽게 백신과 친숙해지도록 유도해야 한다. 일단 분위기가 백신에 우호적인 방향으로 형성되고 나면 극소수의 불안과 공포 역시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다. 반대로 일제가 식민지 조선을 상대로 그랬듯 강압과 폭력을 동원하면 오히려 의심과 반감이 커져 목표 달성이 어려워진다.

“누가 즐거이 접종 받겠는가”
이것은 방금 떠올린 이상주의적 몽상이 아니다. 세계 최초로 종두법을 개발한 에드워드 제너의 조국 영국에서 백신 거부권을 보장하면서 제시한 논리다. 1898년의 일이다. 지석영이 조선 최초로 종두법을 시행한 때가 1879년이었다는 점을 떠올려보자. 백신을 거부할 권리에 대한 담론은 백신 보급과 불가분의 관계다. 과학은 근대의 산물이며 근대는 개인이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근간으로 삼는 만큼 당연한 일이다. 

그 점을 지석영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강압적인 종두법 시행에 대해 우려를 드러낸 바 있다. 박윤재 교수의 논문을 마지막으로 인용해보도록 하겠다. 

“한국 우두법의 아버지로 칭송받는 지석영은 1908년 강제적인 우두 접종을 비판했다. 피접종자의 입장에서 볼 때 낯선 이방인이 갑자기 종두인허원이라 칭하며 강제로 우두를 접종하고자 할 때 누가 즐거이 접종을 받겠느냐는 비판이었다. 이 비판은 우두법에 대한 불신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설명과 설득이 필요했음을 알려준다. 하지만 총독부가 조선인들과 함께 우두를 불신하게 된 원인들에 대해 논의했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그런 논의가 공개되지는 않았다.” 

국민 스스로 백신의 필요성을 깨닫고, 인식하며, 부작용이 있더라도 함께 위험을 감당하는 집단면역의 길. 결국은 그 길이 옳다. 일제 36년간 달성하지 못했던 두창 박멸을 해방된 조국에서는 그 절반도 안 되는 시간에 이룰 수 있었던 비결이기도 하다. 민주주의가 독재를 이길 수 있는 원동력인 자발성의 힘을 일깨워야 한다는 말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백신을 맞아야 한다. 가능한 한 빨리 공개적으로 접종받아야 한다. 백신이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약간의 부작용이 있더라도 참아낼 가치가 있는 우리 모두의 싸움이라는 것을, 국민에게 보여줘야 한다. 민주국가의 대통령과 독재국가의 지도자를 나누는 갈림길 위에 그가 서 있다. 문 대통령이 과학과 민주주의의 편에 서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basil83@gmail.com

2021-03-07

공항 만들어 메가시티 구축? 여당의 주술행위

 [노정태의 뷰파인더㉔] 차라리 지방거점 국립대에 28兆 퍼붓자

●文 “부·울·경, 동북아 8대 대도시권 도약”
●일본의 97개 공항이 과연 경제 살렸나
●반도체 등 항공 화물 수요도 수도권에
●일단 짓고 나면 수요 발생? 일종의 신앙
●보스턴 증명하듯 도시경쟁력 핵심은 대학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2월 25일 부산신항 다목적부두에 있는 해양대 실습선 선상에서 열린 ‘동남권 메가시티 구축 전략 보고’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부산·울산·경남은 오늘 힘찬 비상을 위해 뜻을 모았습니다. 동남권의 역량을 결집하여 수도권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동북아 8대 대도시권으로 도약하는 메가시티 구축전략을 수립했습니다. 2040년까지 인구 1000만 명, 경제 규모 490조 원의 초광역 도시권 구축이 목표입니다.”

2월 25일 부산신항 다목적 부두에 있는 해양대 실습선 선상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한 발언이다. 오거돈 전 부산시장의 성추행과 사퇴로 인한 보궐선거를 앞두고 있는 가운데, 여당은 가덕도 신공항 건설 카드를 꺼내들었다. 문 대통령은 그 움직임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직접 부산을 찾은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 수도권에 인구의 절반, 산업과 경제의 절반 이상이 모여 있는 나라다. 수도권 집중을 막자는 대의에 원론적으로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수도에만 자원이 집중된 나라는 그만큼 큰 빈부격차와 자원 불균형을 피할 수 없고, 이는 대외 경쟁력 뿐 아니라 국내 정치의 안정성마저도 해치는 요인이 될 테니 말이다.

하지만 쌍수 들고 환영하기에는 어딘가 석연치 않다. 대통령이 저 시점에 저곳에서 저런 발언을 했다는 것 자체가 선거개입이라는 걸 논외로 하더라도 그렇다. 가덕도 신공항 건설을 옹호하기 위해 동남권 메가시티가 필요하다는 사람은 많지만, 정작 이런 수많은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듣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대체 메가시티라는 게 무엇인가. 인구 800만의 광역권을 1000만으로 만들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신공항 건설은 메가시티를 이루기 위해 필수불가결한가. 혹은 도움이 되는가. 공항이 아니라면 무엇을 통해 어떻게 자족적인 경제권으로 기능하는 메가시티를 이룰 수 있는가.

8459억 달러 vs 2965억 달러
2월 26일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가덕도신공항 건설을 위한 특별법안(대안)이 통과되고 있다. [안철민 동아일보 기자]
메가시티에 대한 엄밀하고 통일된 개념 정의는 없지만 그 내용은 대체로 대동소이하다. 유엔 경제사회국(United Nations Department of Economic and Social Affairs)이 2018년 발행한 ‘세계 도시화 전망’(World Urbanization Prospects) 보고서에 따르면, 메가시티(megacity)란 1000만 명 이상의 거주자를 지닌 광역 도시권을 뜻한다. 하나의 도시가 1000만 이상의 인구를 갖지 못하더라도 단일 생활권을 구성하는 여러 도시가 한데 어울려 있다면 메가시티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사실 서울과 수도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서울시의 집계에 따르면 서울은 1988년 인구 1029만 명을 기록하며 ‘1000만 도시’가 되었지만, 2020년 말 현재 총인구 9911088명으로 내려앉았기 때문이다. 서울만 따로 떼어놓고 본다면 인구 1000만이 안 되므로 메가시티라고 부를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서울’은 서울특별시 그 이상의 존재다. 인천, 부천, 과천, 성남, 의정부 등 인근 광역시를 모두 자신의 생활권으로 포괄하고 있다. 인천과 경기 전체를 포괄하는 개념인 ‘수도권’은 201912월 현재 그 외 모든 지역보다 인구가 많은 곳이 됐다. 앞으로도 그 추세는 쉽게 바뀌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수도권은 대단한 글로벌 도시다. 소위 ‘국뽕’을 빨면서 하는 소리가 아니다. 2015년 1월 22일 브루킹스연구소에서 발표한 ‘글로벌 메트로 모니터’(Global Metro Monitor)에 따르면, 구매력평가 기준(PPP) 국내총생산(GDP)을 놓고 볼 때 2014년 한국의 수도권은 8459600만 달러(한화 약 9518980억 원)로 도쿄, 뉴욕, LA의 뒤를 이어 세계 4위에 올라 있었다. 인구로 따져도 2460만 명으로 세계 5위다. 한국인 뿐 아니라 세계인이 서울 수도권으로 모여들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면 문제의 동남권은 어떨까. 같은 자료를 검토해보자. 브루킹스연구소는 부산과 울산을 하나의 도시 단위로 놓고 통계를 제공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2014년 현재 부산-울산의 구매력평가 기준(PPP) GDP29651000만 달러(한화 약 3336627억 원)로 세계 36위, 인구는 7681200명으로 세계 49위에 머물고 있다. 경상남도 전체의 인구를 합하더라도 2021년 현재 800만 명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일단 짓고 본’ 日 공항들의 실태
그러니 우리는 “동남권의 역량을 결집하여 수도권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동북아 8대 대도시권으로 도약하는 메가시티 구축전략”이 뭔지,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을 들어야 할 것 같다. 경제력으로 세계 4위권인 메가시티 수도권과 어깨를 나란히 하려면 적어도 세계 10위권에는 올라야 한다. 획기적일 뿐 아니라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한 경제 성장 전략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겠다.

인구를 놓고 보면 더욱 갈 길이 멀다. 2040년까지 인구 1000만을 달성하려면 앞으로 19년 안에 200만 명의 순유입이 이루어져야 한다. 모든 가정에서 아이를 열심히 낳는 것과 별도로, 국내에서 이사를 오건 해외에서 이민을 오건 많은 인구가 유입되고 또 정착해야 인구 1000만의 동남권 메가시티를 구축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또한 대단히 획기적인 인구 정책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실현 불가능한 목표에 가깝다.

경제와 인구의 성장을 위해서는 해당 지역의 밝은 미래가 필요하다. 사람들은 더 많은 돈을 벌고 풍요롭게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과 기대가 있을 때 삶의 터전을 옮기는 모험을 감행한다. 내 자식이 나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을 때 좀 더 기꺼이 아이를 낳는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한국의 낮은 출산율은 대한민국이 지금은 풍요로워도 그 구성원들에게는 희망을 주고 있지 못하다는 뜻으로 해석 가능하다.

19년 만에 인구 200만 명 순증가, 즉 현재 800만인 인구가 25% 늘어난다는 것은 고도 성장기에나 있을법한 엄청난 사건이다. 동남권 메가시티 플랜이 제대로 작동하고 성공을 거둔다면 온 나라에 긍정적인 선례가 될 테다. 대체 어떻게 해야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까? 필자가 어떤 정답을 알고 있을 리 만무하다. 그저 조심스러운 제안을 해볼 수 있을 뿐인데, 그에 대해서는 조금 뒤에 논하기로 하자.

일단은 분명한 오답에 대해 말해야겠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도 모두 알고 계실 것이다. 실은 문 대통령이나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 혹은 성추행으로 사퇴한 오거돈 전 부산시장 역시 잘 알고 있다. 가덕도에 28조 원을 들여 신공항을 짓는 것은 동남권 메가시티를 이루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말이다.

한국에서 개점휴업 상태로 방치되고 있는 여러 공항의 실패 사례를 또 거론하지는 말기로 하자. 그보다 더 극적이고 확실한 교훈을 주는 사례가 바다 건너 일본에 충분히 많으니 말이다. 일본에는 총 97개의 공항이 있고, 그 중 54개가 지방관리 공항이며, 그 중 상당수가 1990년대 버블 붕괴 이후 지역경제를 살린다는 취지하에 ‘일단 짓고 본’ 공항이다. 그래서 일본 경제가 살아났던가.

‘카고 컬트’ 이어나가는 족장
2월 26일 가덕도신공항 건설을 위한 특별법안(대안)이 통과된 직후 더불어민주당 지도부와 부산시장 후보들이 참석한 가운데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여기서 변성완 후보, 박인영 후보, 이낙연 대표, 김태년 원내대표, 김영춘 후보(왼쪽부터)가 박수를 치고 있다. [안철민 동아일보 기자]
가덕도 신공항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논리는 대략 이런 식이다. 세계적인 거점 항구인 부산항과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도록 부산항에 가까운 거점 공항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동남권의 주민들에게는 인천공항을 거치지 않고 단번에 해외로 나가고픈 숙원이 있었다는 말 역시 빠지지 않는다.

두 논리 모두 현실과는 거리가 있다. 항공 운송은 선박에 비해 비용이 높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산업 차원에서 움직이는 항공 화물은 그 종류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가장 대표적인 항공 화물이 바로 반도체인데, 모두가 알다시피 삼성전자의 공장은 평택에 있고 SK하이닉스의 공장은 이천에 있다. 둘 다 경기도, 즉 수도권이며 인천공항으로 향한다. 공항이 있지만 화물이 없으면 무슨 소용인가?

가덕도 신공항을 통해 해외로 곧장 나가고픈 간절한 소망은 이해한다. 허나 해외 노선이라는 게 이쪽에서 공항을 만들기만 한다고 당장 생기는 대상이 아니다. 항공사가 노선을 개설해야 한다. 외국 항공사들이 인구 2000만에 전국 방방곡곡으로 교통이 원활한 수도권을 두고, 인구 800만에 구매력평가 GDP로 세계 36위인 동남권에 별도로 직항 루트를 개설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공항이 있어도 취항하는 노선이 없다면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세계로 통하는 노선’을 뚫을 권리는 외국 항공사에게 있다. 180석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민주당이 미국 항공사에 ‘가덕도에 취항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가덕도 신공항을 어떻게든 옹호하려는 이들은 공항을 만들면 수요가 생길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게 창출된 수요가 동남권 메가시티 창출에 결정적인 기여를 할 것이라는 희망사항을 장밋빛으로 포장하는 사람들을 뉴스 댓글이나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 종종 보게 된다.

그런 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내 머릿속에는 ‘카고 컬트’(Cargo Cult)라는 개념이 스쳐 지나간다. ‘화물 숭배’라 번역할 수 있다. 뉴기니와 인근 멜라네시아 각지에 사는 원주민들이 믿게 된 토착 신앙이다. 오지 중의 오지였던 그곳에도 19세기 후반부터 서구인들이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전쟁이 시작되자 거점으로 삼은 섬에 배와 비행기로 필요한 물자를 투하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 과정에서 현지인들 역시 그들이 상상조차 해본 적 없었던 온갖 문명의 풍요와 편리를 맛보았다. 문제는 전쟁이 끝난 후 벌어졌다. 더 이상은 비행기가 오지 않았다. 하늘에서 ‘카고’가 오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러자 현지인들은 비행기를 신의 사자로, 하늘에서 내려오는 ‘카고’를 신의 선물로 이해하는 자생적 신앙 체계를 만들어 나갔다.

카고 컬트는 점점 정교화되었다. 백인들이 비행장을 만들고 관제탑을 세워 비행기를 착륙시키는 것을 본 일부 현지인들은 나무와 수수깡 등으로 가짜 비행기, 활주로, 관제탑 등을 만들었다. 심지어 항공관제사의 손놀림을 흉내 내며 ‘카고’의 도래를 기원하는 주술 행위를 하기도 했다. 물론 그런다고 비행기가 다시 날아와 ‘카고’를 주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알만한 지식인들이 희망사항과 현실을 뒤섞어가며 가덕도 신공항에 경제성이 있다는 둥, 일단 24시간 운항 가능한 국제공항이 생기면 부‧울‧경 메가시티가 탄생할 거라는 둥, 혹세무민하는 모습을 보는 건 참기 어려운 일이다. 그들은 마치 이제 전쟁이 끝났고 백인들이 와서 ‘카고’를 내려놓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카고 컬트를 이어나가는 족장이나 샤먼과 다를 바 없다.

보스턴과 실리콘밸리가 주는 교훈
부산을 비롯한 동남권의 현지 주민들이 가덕도 신공항에 찬성하는 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 땅이 오거돈 전 시장의 친인척 땅이건 말건, 실제로 공항이 지어진 후 해외 노선이 열리건 말건, 일단 대규모 토목 공사를 하는 것만으로도 지역 경제에 활기가 돌게 되리라는 기대를 품는 것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주민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지역 경제를 살릴 수 있는 해법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해법이 있을까? 필자가 도시 정책 및 산업 정책 등의 전문가는 아니기에 타인의 식견을 빌려올 수밖에 없다.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인 에드워드 글레이저의 ‘도시의 승리’를 펼쳐보자.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미국의 제조업은 쇠퇴했다. 그 과정에서 도시 간 명암이 갈렸다. 보스턴은 법률, 금융, 생체의학 연구 등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며 경제적으로 부활했다. 디트로이트는 지금껏 침체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교육, 특히 연구 중심 거점 대학의 유무가 가장 큰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 보스턴에는 하버드대를 비롯해 세계 유수의 대학들이 여럿 자리 잡고 있는 반면, 디트로이트는 그렇지 않다. 입학 순위가 높은 미시간대가 인근에 있긴 하나, 미시간대는 엄밀히 말해 디트로이트 시내가 아닌 미시간 주 앤아버에 있으며 별개의 생활권과 경제권을 구성한다. 디트로이트에는 ‘자동차 산업의 하버드’가 없었고, 그것이 두 도시의 명암을 갈랐다.

좀 더 확실한 사례로 스탠퍼드대와 실리콘밸리의 관계를 떠올려보자. 스탠퍼드대는 애플 본사까지 고작 2km, 구글 본사까지는 8km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스탠퍼드대에서 쏟아진 고급 인재들은 자신들이 대학에 다니던 바로 그 도시에서 일자리를 구하고 생활을 꾸려나간다. 현대 산업 사회에서 노동과 대학 교육은 불가분의 관계다. 대학을 빼놓고는 도시의 경제와 미래를 논할 수 없는 셈이다.

동남권 뿐 아니라 서남권에서도 마찬가지다. 수도권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또 다른 메가시티가 가능하려면 미래 유망 산업과 연계된 대학 교육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해법은 요즘 흔히 ‘지거국’이라 부르는 지방거점국립대에서 찾아야 한다. 대학 교육과 지역 경제 및 국가 산업 전략을 하나의 테이블에 올려놓고 고민해야 할 문제인 것이다.

28兆, 지방거점 국립대에 퍼붓는다면
동남권 메가시티 문제는 단지 한 지역의 토목공사 차원으로 축소되어서는 안 된다. 지역 균형 발전의 핵심은 각 지역마다 미래의 가능성을 보이는 산업을 보유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오늘날의 산업은 대학 교육과 함께 가게 되어 있다. 그러니 우리는 결국 국립대 개편과 개혁에 대해서까지 논의해야만 한다. 지방마다 거점이 되는 국립대는 국가가 직접 통제할 수 있으며, 대체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기에 지역 주민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지리적으로도 시내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지거국’(지방거점 국립대)이 살아야 각 지방이, 더 나아가 대한민국이 산다.

나는 동남권 메가시티 구상에 대해 찬성한다. 어쩌면 김경수 경남지사나 문재인 대통령보다도 더, 진심으로 찬성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28조원을 바다에 퍼붓는 것에 회의적일 뿐이다. 충분한 논의와 고민을 거쳐 그 돈을 각 지역의 거점이 되는 대학에 퍼붓는다면, 어쩌면 우리는 훨씬 나은 미래에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동남권 메가시티 논의가 보다 건설적인 해법에 도달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basil8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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