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에 출마하려면 엑셀쯤은 할 줄 알아야 한다. 누군가 이런 주장을 한다고 해보자. 이 말 자체는 그냥 그러려니 할 수 있는 소리다. 엑셀을 참 사랑하는 사람이구나, 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능력주의'를 들먹인다면 문제는 퍽 달라진다. 엑셀 사용 능력을 '시험'봐서 평가하겠다는 것은 정치와 상관 없다.
한국에서, 특히 보수 쪽 지지 성향이 있는 분들은 '능력주의'라는 말을 원래 의미와 다르게 이해하고 있다. 누군가의 진정한 능력을 파악하여 그에 따라 공정한 대우를 해주는 것이 능력주의라고 뇌피셜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능력주의(meritocracy)는, 사실 좀 더 한국어 맥락에 부합하게 옮기자면, '시험주의'에 가깝다. 어떤 시험을 통해 능력(을 펼칠 수 있는 잠재력)을 평가한 후, 그에 따라 사회적 계층을 할당하자는 소리다.
마이클 영의 책 Meritocracy가 바로 그런 식으로 돌아가는 디스토피아 사회를 그린 SF 소설이고, 능력주의(Meritocracy)라는 말은 마이클 영이 저 책을 쓰면서 만든 말이다. 마이클 영은 2002년에 죽었는데, 그 전에 <가디언>에 본인의 뜻을 밝힌 칼럼을 기고하기도 했다.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에는 너무도 최신 용어라는 소리다.
역설적이게도 현재 한국에서 능력주의의 본래 의미를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 이준석이다. 선거로 뽑혀야 마땅한 정치인을, 시험 봐서 뽑자고 하면 너무 과격하니까, 출마 자격을 평가할 때 시험을 보자. 시험홀릭, 입시제도가 낳은 괴물, 뭐 그런 단어들이 떠오르는 발상이다.
물론 그런 주장은 현실과 거리가 멀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오세훈 서울시장을 떠올려보자.
오세훈은 파일명 뒤에 붙는 v(version의 v)가 무슨 뜻인지도 몰라서 VIP의 V라고 했다가 전국민의 조롱거리가 되었었다. 하지만 경선에서 승리했고, 심지어 선거 본선에서도 이겼다.
정치인이 컴퓨터를 잘 알아야 한다고? 컴퓨터 잘 못 쓰는 사람들은 출마도 못 하게, 시험 봐서 떨어뜨리자고? 이준석은 지금 오세훈을 '멕이는' 건가?
정치인에게 필요한 능력은 딱 세 가지다. 내가 봐도 참 아름답고 기가 막힌 정리인데, 아무튼 이렇다.
다른 사람을 내 편으로 끌어들이는 매력
내게 모인 사람들의 능력, 인성, 충성심을 파악하는 안목
아니다 싶은 사람을 내치고, 대립각을 세울 줄 아는 투쟁력
이 모든 것은 컴퓨터 사용 능력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심지어 글을 몰라도 된다. 무슨 미친 소리냐고 하겠지만, 좀 극단적인 예시이긴 한데, 샤를마뉴 대제 같은 경우가 그렇다. 그는 문맹이었다. 하지만 프랑크 왕국을 확장하는데는 아무 무리가 없었다. 징기스칸도 아마 문맹이었던 것 같은데, 아니면 말고. 현대의 정치인이라고 뭐가 다를까. 믿음직한 참모가 글 읽고 표 볼 줄 알면, 정치인 본인은 문맹이어도 정치를 할 수 있다.
이준석에게는 3의 능력이 있다. 그건 분명하다. 하지만 1이 없다. 매우 심각하다. 그러니까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에서 세 번 출마해서 세 번 떨어진 것 아닌가. 안타까운 일이다. 당대표가 된다면, 그래서 인지도가 높아진다면, 좀 나아지려나.
나는 컴퓨터라는 도구를 좋아하는 편이다. 내가 필요한 분야는 일부러 배우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모든 방향에서 컴퓨터를 잘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하물며 정치라는, 호모 사피엔스가 농경 생활을 시작하기 전부터 해왔던 그런 영역에서는, 엑셀이 아니라 매력이 본질이다.
사람들이 능력주의를 운운하면서 자꾸 '내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능력주의'를 거론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능력주의는 엄연히 존재하는 사회학적, 철학적 개념이다. 그리고 그것은, 한국어로 정확히 옮기자면, '시험주의'에 더 가깝다. 이준석은 능력주의자인데, 좀 더 잘 번역해보자면, 시험주의자라는 소리다.
나는 진정한 능력주의(라는 게 있다면, 그게 뭔지는 몰라도)에는 찬성한다. 하지만 시험주의는, 글쎄. 잘 모르겠다. 시험 보는 재주라면 나도 딱히 부족하다고 느끼지는 않지만, 2021년의 대한민국이 시험주의 사회로 돌아가는 것은 사회의 긍정적 변화를 방해하는 일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신동아 칼럼에 넣으려다가 분량이 부족해서 뺀 대목이 있다. 이렇게까지 반응이 좋을 줄 알았다면 편집부와 논의해서 분량을 늘리고 같이 넣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이준석은 기초연금(65세 이상 노인들이 받는 연금)의 수급자가 소득 하위 70%라는 점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 왜 소득 상위 30%는 기초연금을 못 받느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예의 '공정'을 꺼내든다.
기초연금이 무엇인가. 노인 빈곤율 OECD 1위 국가에서, 산업화 세대 빈곤 노인들이 말 그대로 굶어죽지 말라고 만든 연금이다. 그나마도 없으면 노인 자살률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오를 것이다.
하지만 이준석은 주장한다. 그것은 '공정하지 않다'고. 심지어 가난한 노인들이 매달 받는 기초연금액이 줄어드는 한이 있어도, 소득 상위 30%까지 다 받아야 공정한 거라고.
아직도 이준석이 말하는 '공정' 타령을 옹호하는 분들을 보면 진심으로 의아하다. 여러분은 이준석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살펴보기나 하고 지지하는 것인가?
> 청년수당이나 노령연금에 대해 기본적으로 반대 의견입니다. 그런 수당과 연금은 특정 계층에만 혜택을 줍니다. 그것은 공정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노령연금의 경우 소득 상위 30퍼센트는 연금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불만을 토로합니다. 저는 그들의 불만이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노령연금의 경우 지급하는 금액을 낮추더라도 노인 인구 전체에 지급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것이 원래 연금의 취지에도 맞습니다. 저는 국민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것에는 찬성합니다. 기본소득은 국민 전체가 그 대상이니까요. 그런 경우 현재 진행되고 있는 수당은 기본소득 틀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사안입니다. 저는 국민 전체에 지급하는 기본수당일 경우에는 아예 공정성 시비가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봅니다. 다만 그 금액을 현재 얼마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국민경제에 직접적인 압박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좀 더 깊은 토론과 고민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공정한 경쟁》 中)
이준석이 말하는대로 '공정'하게 기초연금을 뜯어고치면, 안그래도 심각한 노인 자살은 더욱 심해질 수밖에 없다. 이건 정상적인 공감 능력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면 함부로 내뱉을 말이 아니지 않은가?
코로나 터진 후 대기업 공기업 공무원들은 소득에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다. 반면 자영업자들은 개박살이 났다. 하지만 대기업 공기업 다니거나 공무원인 대깨문들은 '누가 무슨 피해를 입었는지 어떻게 증명하냐, 그것은 공정하지 않다'라며, 재난지원금을 1인당 10만원씩 쪼개서 뿌리는 게 '공정'하다고 주장했고,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켰다.
기초연금에 대해 이준석이 하는 말과 똑같다. 실질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가야 할 돈을, '공정'을 앞세워, 이미 충분히 가진 자들이 빼앗아 먹겠다는 소리.
● 성취와 능력 부각하는 세계관 ● 우연과 행운에는 말을 아끼다 ● 자신이 얻은 기회는 당연하다? ● 약자와 소외된 자에 대한 공감 부족 ● ‘완벽하게 공정한 경쟁’은 없다 ● 부풀어 오른 자의식과 포퓰리스트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필자는 1983년생이다. 20대부터 소위 '청년 논객'으로 살아왔다. 30대가 거의 끝나가는 지금까지도 그놈의
'청년' 딱지가 떨어지지 않는다. 나이를 안 먹어서가 아니라, 우리 세대에 힘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준석 전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 최고위원이 단지 젊다는, 동년배라는 이유만으로 그에게 박수를 치며 지지의 뜻을 보내고 싶은 마음은 없다. 생각해볼 게 많기 때문이다.
‘공정한 경쟁'의 세계관
이준석이라는 이름을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하면 네 권의 책이 나온다.
출간 순서대로 나열해보자. 2011년 12월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으로 정치에 첫 발을 디딘 후 2012년에 출간한 '어린놈이
정치를?'이 첫 번째 책이다. 같은 해 '거침없이 배우는 LINQ'라는 컴퓨터 서적을 번역 출간한 그는, 한동안 방송 및 정치
활동에 전념하다가 2018년 소설가 손아람과의 대담집인 '그 의견에는 동의합니다'를 펴냈다.
이 글에서는 그의 가장
최근작인 '공정한 경쟁'을 통해 그의 세계관, 그 중에서도 '공정 담론'을 집중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공정한 경쟁'에는
"대한민국 보수의 가치와 미래를 묻다"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그 제목과 부제 모두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이준석은 진지하게
'산업화 세대 이후의 보수'를 고민하고 있다. '여는 글'의 한 대목이다.
"이 책은 젊은 세대가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의 엉덩이 밑에 깔린 존재가 아닌 독립적인 아젠다를 가지고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설령 산업화 세대나 민주화 세대의 구성원이라 해도, 후속 세대가 자신만의 길을 모색한다는 말을 할 때, 나쁘다고 하거나 반박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듯하다. 그렇다면 이준석이 생각하는 새로운 아젠다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아젠다는 '공정 사회'로 보고 있다. 젊은 세대가 원하는 공정의 가치를 지금의 집권 세력은 잘못 해석하고 있고, 공정과 평등의 가치를 실현하는 방식에 있어서 허덕이고 있다."
‘공정' 담론은 2019년과
2020년의 서점가를 뜨겁게 달군 주제였다. 가령 인천국제공항공사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등을 놓고 열띤 토론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무렵 출간된 이준석의 책이 공정을 화두로 삼고 있다는 점은 그다지 놀랄 일은 아니다.
하지만 '공정한 경쟁'은
정치인이 펴낸 그렇고 그런 책이 아니다. 어디서도 트집 잡히지 않도록 하나마나한 소리를 두루뭉술하게 돌려서 말하고 있지 않다.
좋게 말하면 인상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황당한 대목이 여럿 등장한다. 심지어 본인도 그러한 내용이 논란의 대상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철학자 마이클 센델이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잘 지적하고 있다시피 공정성을 앞세운 능력주의 담론은 현 체제 속에서 경쟁에 이긴 사람이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한 담론으로 악용될 수 있다. 이것은 극복하기 어려운 내재적 약점이다.
그래서 능력주의의 옹호자들은
대부분 비슷한 방식으로 논지를 전개해 나간다. 가령 이런 식이다. 내가 지금껏 거둔 성공은 스스로의 노력만으로 얻어낸 것이
아니다. 물론 나는 힘들게 노력했지만, 나처럼 좋은 여건을 가지고 태어나지 못한 이들이 많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들의
처지에 대해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할지라도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늘 노력중이다. 능력주의가 제대로 발휘되는 공정한 사회를 지키기
위해 나는 최선을 다할 것이다.
이준석의 특이점은 바로 이
지점에서 나온다. 그는 다른 능력주의자들과는 달리, 이런 식으로 입에 발린 겸양의 발언 같은 걸 내뱉지 않는다. 그런 '정치적
발언'을 전혀 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본인이 거둔 그 모든 성취가 온전히 자신의 능력과 노력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공정한 경쟁'의 곳곳에서 그런 생각을 감추지 않고 정직하게 드러낸다.
노력과 우연, 행운의 중첩 작용
이준석은 '박근혜 키드'로서 정치 인생을 시작했다. 20대의 나이에 집권여당 비상대책위원이 되는 벼락출세를
맛봤다. 덕분에 일찌감치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 지역구에서는 연이어 낙선했지만 방송가의 눈에 들어 예능인으로서 전국적인 지명도를
쌓았다.
그 과정에 이준석 본인의
노력도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하지만 오직 100%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진 결과라고 말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여러 가지의 우연과
행운이 중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일각에서 말하듯 유승민 전 의원과 이준석의 아버지가 서로 돈독한 친분이 있는 사이라면, 그러한
요소 역시 이준석이라는 사람의 출세를 논함에 있어서 빠져서는 안 될 일이다. 하지만 그저 자신의 '공정 철학'을 설파할 뿐, 이
모든 우연과 행운에 대해 이준석은 말을 아끼고 있다.
이준석은 카메라 앞에서 말을 잘
하는 젊은 정치인이다. 그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자질 중 하나다. 하지만 세상에 말 잘 하고 정치에 뜻을 가진
사람들은 많다. 그 중 누가 카메라 앞에 설 수 있는가. 그것은 거의 전적으로 외부의 힘에 의해 결정된다. 노력을 하기 위한 무대
자체가 '유승민 친구 아들 이준석'이 아닌 수많은 정치지망생들에게는 잘 주어지지 않는다. 이준석 스스로도 그 점을 잘 알고
있다. 본인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바를 보면 분명히 그렇다.
"가령 정당을 대표해 토론에
나가려면 우선 직위가 있어야 해요. 그런데 젊은 사람들은 그런 직위를 받아 본 적이 없거든요. 직위를 받아 다른 정치인들과 토론을
해본 젊은 사람은 제가 거의 유일하고요. 저는 제가 비대위원으로 출발했기 때문에 토론에 나가면 상대로 김부겸 의원, 노회찬 의원
등이 나왔어요. 제 입장에서는 아주 고급의 대련, 훈련 기회를 얻은 셈이죠."
일반적으로 이 정도 이야기를 꺼내면, 적어도 가식적으로라도 겸양의 말이 뒤따른다. '그런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는 게 참 행운이죠. 그래서 젊은 정치인들에게 더 많은 기회가 제공돼야 합니다' 같은 식으로 말이다.
이준석은 다르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결론은 '내가 잘났다, 내가 노력했다'로 마무리된다. 방금 인용한 문단은
이렇게 끝나고 있다. "방송 토론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아요. 공부를 많이 하고 들어가도 준비한 것과 전혀 다른 질문이 나와
당황하는 경우도 있고요. 저는 그 과정을 처음부터 잘 소화한 편이었어요."
이렇게 한껏 뽐을 낸 후 이준석이 내리는 결론은 다음과 같다. 이 대목에 따로 제목을 붙인다면 '청년정치 사다리 걷어차기'가 어떨까 싶다. "청년정치도 마찬가지입니다. 청년이란 이름으로 기득권에 특별한 혜택을 받을 생각을 하면 안 된다고 봐요. (중략) 저는 어렵더라도 기존 질서에 기대지 않고, 제 실력으로 청년정치를 실현시킬 생각입니다."
"엘리트주의 감수하겠다"
나는 지금 일부 대목을 부풀려 이준석의 생각을 왜곡하고 있는 게
아니다. 이준석은 정말로 이렇게 생각한다. 그는 경쟁, 특히 자신이 인생의 승리를 거둔 입시 경쟁을 '공정한 경쟁'의 표본으로
여긴다. 본인의 중학교 시절에 대한 이준석의 회고담이다.
"중학생에 불과한 아이들 700명이 등수를 두고 다투었어요. 좀 잔인한 측면도 있지만 저는 그 시절의 공부가 내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생각하면 완벽하게 공정한 경쟁이었고요."
우리 정치권, 특히 엘리트
중심의 보수 정당에는 공부를 잘 한 사람이 참 많다. 그들 중 상당수, 아니 대다수는 자신의 '공부 머리'에 대한 자부심을 품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중 그 누구도, 적어도 내가 아는 한, 본인이 승리를 거둔 입시 과정을 '완벽하게 공정한 경쟁'이라는
식으로 말하지는 않았다. 혹시 그런 경우를 본 적 있다면 제보 부탁드린다.
이준석은 이런 사람인 것이다.
내가 이긴 경쟁을 두고 '완벽하게 공정한 경쟁'이라고 말하면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 책이 나올 때까지 몇 차례나
교정지를 봤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런 표현을 그대로 대중 앞에 내보내는 사람. 몇 페이지 더 넘기면 "저를
'엘리트주의'라고 비난한다고 해도 기꺼이 감수하겠습니다"라는 말이 나온다. 그가 빛나는 재능과 좋은 여건에도 불구하고 '0선
중진'에 머물러 있는 이유를 왠지 알 것 같지 않은가?
‘공정한 경쟁'에는 좋은
내용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이준석이 나름의 전문성을 지니고 있는 교육 분야에서 그렇다. 학령인구가 줄고 있으므로 고등학교를 모두
기숙학교로 바꾸는 아이디어가 대표적이다. 학생들이 모두 기숙사 생활을 하면 사교육이 원천 봉쇄될 뿐 아니라 가정환경 때문에 겪게 될
위화감도 줄어든다. 특히 인구가 급격히 줄어드는 농어촌 지역의 경우 몇 개 학교를 통합해 기숙사로 운영하면 교육적 가치와 효율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여성 문제에 있어서도
'정답'을 말할 때가 있다. 교육 문제를 다루는 5장에서 그는 한국 사회가 여성 인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여성의 사회 진출을 더욱 장려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취지다. 고학력 여성들이 경력 단절을 겪고 직업 시장에서
이탈할 것을 우려해 결혼과 출산을 미루면서 저출산이 심화된다는 면을 놓고 볼 때, 이러한 현실 인식은 정확하다.
약자와 패배자에 대한 자비심
하지만 거기까지다. '정치평론가'로서 이준석이 내놓는 올바른
담론은, '정치인' 이준석의 부풀어 오른 자의식과 호승심(好勝心) 앞에서 힘을 잃어버린다. 그는 자신이 언제나 공정하게 경쟁하고
있으며, 자신의 능력으로 이긴다고 생각한다. 약자와 패배자에 대한 공감과 자비심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페미니즘을
타자화하며 당대표 선거에서 돌풍을 일으키는 행보는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앞으로도 그 경향성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
국민은 젊고 합리적이며 유쾌한
보수 정치를 원한다. 지금껏 진보 진영이 독점해온 정치적 의제를 다각도에서 검토하고 갱신하는 것 또한 보수 정치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은 약자, 소외된 자, 애초부터 발언권을 얻지 못한 자들에 대한 연민을 전제로 해야 한다. 내가 이긴
경쟁이 세상에서 가장 공정한 경쟁이었다는 이준석과 그에게 환호하는 이들을 보며 (마음 한 구석의) 우려를 감출 수 없는 이유다.
#이준석 #공정한경쟁 #2030 #청년정치 #신동아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가난한 사람이 핸드폰은 있다고? 그런데 가스비를 낼 돈이 없다고?' 같은 소리들. 얼마나 근시안적인가.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시각인가. '요리를 할 돈이 없어서 배달음식을 먹는다' 같은 '비논리적' 현상이야말로 현실에 더 가깝다.
Food is also one of the few pleasures available to the poorest. In the favelas (slums) of São Paulo, the largest city in South America, takeaway pizza parlours are proliferating because many families, who often do not have proper kitchens, now order a pizza at home to celebrate special occasions. "The 9 billion-people question", The Economist, Feb 24th 2011, Special Report.
1636년 12월 14일,
청나라 군대가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향했다.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려다 발이 묶여 남한산성에서 농성하게 되었다. 갇힌 조선은 성
안에서 자기들끼리 싸우기 시작했다. 항복하여 백성의 피해를 줄이고 왕실의 안녕을 도모하자는 주화파와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키며
농성하고 역전의 기회를 노려야 한다는 주전파가 대립한 것이다.
김훈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남한산성>은 그 광경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주화파의 대표인 최명길(이병헌 분)은 말한다. “죽음은 견딜 수
없고 치욕은 견딜 수 있사옵니다.” 일단 살아남아야 하니 자존심을 버리고 고개를 숙이자는 입장이다. 반면 김상헌(김윤석 분)은
임금이 오랑캐에게 굽혀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신은 차라리 가벼운 죽음으로 죽음보다 더 무거운 삶을 지탱하려 하옵니다.”
막강한 적의 군대가 남한산성을
겹겹이 포위하고 있는 상황에서 ‘목숨을 걸고 일전을 벌이면 이길 수 있다’는 말은 그저 허황될 뿐. 게다가 우리는 역사의 흐름을
알고 있다. 병자호란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명나라는 내부의 갈등과 반란을 다스리지 못해 무너졌다. 천하의 패권은 청나라로
넘어갔다. 그 격동기에 조선은 새로운 흐름에 올라타는 대신 기존의 낡은 세계관 속에 스스로를 묶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남한산성>은 일방적으로 주전파를 비난하는 작품이 아니다. 그 시대 사람들의 눈높이에서 각자의 논리를 충실하게 재현하는
미덕을 보여준다. 당시는 국운이 쇠했을지언정 아직 명나라가 중원을 지배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조선왕조는 명나라 황제를 정점으로
피라미드처럼 내려오는 유교적 위계질서를 통치 근거로 삼았다. 갑자기 사대의 대상을 바꾸는 것은 스스로의 집권 정당성을 부정하는
행위일 수 있다. 그런 맥락을 놓고 보자면 김상헌의 주전론에는 나름의 이념적 근거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의 국제정치학
용어를 빌려 설명하자면, 최명길은 현실주의를 대변하고 있던 반면, 김상헌은 자유주의를 표방한 셈이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된
학문 분야로 정착한 국제정치학은 크게 세 가지의 학문적 패러다임으로 작동한다. 국가와 국제 관계를 힘(power)으로 바라보고
설명하는 현실주의(realism). 국가 간의 공동 이익 창출과 상호 협력에 주목하며, 특히 ‘제도’를 통해 상호 견제가
가능하다고 보는 자유주의(liberalism). 국제 관계뿐 아니라 각국의 내부 동역학까지 고려하며 다양한 맥락을 따지는
구성주의(constructivism)가 그것이다. 여기서는 현실주의와 자유주의의 대립에 집중해보도록 하자.
현실주의를 대표하는 학자는
케네스 월츠, 존 미어샤이머 등이 있다. 이들의 입장은 서로 다르지만 전제 몇 개를 공유한다. 국가는 스스로를 지키고 보호해야
한다. 언제 침략당할지 모른다는 불안을 늘 안고 있다. 국제 관계를 설명하는 유일한 요소는 결국 힘이다. 국제사회에 정의(正義)란
없다. 억울하고 분해도 약자는 강자의 뜻을 따라야 한다. 병자호란의 위기 속에서 최명길이 택한 입장이기도 하다.
반면 조셉 나이, 로버트
코헤인 등으로 대표되는 자유주의자들은 생각이 다르다. 물론 국제 관계는 힘으로 작동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국가들은 공동의
이익을 위해 협력할 수 있다. 문화와 가치를 공유한다면 그러한 협력은 더욱 쉽게 이루어질 수 있다. 국가 간 합의를 통해 제도를
구축하여 장기적인 공존 공영을 꾀하는 일도 불가능하지 않다. 명나라와의 사대 관계를 일종의 국제기구로 바라본다면 이는 김상헌을
비롯한 주전파의 세계관과 어느 정도 맞닿아 있는 셈이다. 유교의 종주국인 명나라가 아닌 청나라를 향해서는 사대를 할 수 없다는
입장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 가능하다.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보자.
명·청 교체기에 오늘날을 곧장 대입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미국은 마치 명나라처럼 저물어가는 제국이며, 중국은 청나라처럼
떠오르고 있으니, 처신 똑바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2020년 총수출액 중 중국에 대한 수출 비율은 25.8%로 1위를 차지했다.
중국에서 무역 보복을 할 수 있으니 중국의 심기를 거스르는 행보는 자제해야 한다는 것이 21세기 주화론자들의 주장이다.
이는 현실과 거리가 있다.
우리가 중국에 수출하는 물량의 절반 이상은 소재·부품이다. 특히 반도체의 비율이 높다. 중국에서는 한국이 싫어도 수입할 수밖에
없는 필수 요소인 것이다. 상대가 무역 보복을 할까 두려워 할 말을 못 한다는 변명도 옹색하기 짝이 없다. 중국에 대한 수출
비율이 32%에 달할 정도지만 중국의 반발을 무릅쓰고 쿼드에 가입한 호주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미국은 명실상부한 세계
최강국이다. 한미 동맹을 공고하게 다져나가는 것은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한국과 미국은 정치,
경제, 문화 면에서 핵심적인 가치를 공유한다. 동북아시아에서 민주주의, 시장경제, 대중문화를 모두 갖춘 나라는 일본을 제외하면
한국뿐이다.
이번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한국전쟁 참전 용사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그 노병의 삶이 조용히 웅변하는 진실을 보라. 미국은 강자고
한국은 약자다. 하지만 한미 관계는 오직 힘의 논리만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다. 서로를 돕기 위해 피 흘리고 싸운 혈맹이다.
현실주의가 아닌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우리의 우방이 누구인지는 더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온 국민이 다 아는 사실을
부정하는 이들이 정치권에는 더러 있는 듯하다. 더불어민주당 소병훈 의원이 페이스북과 트위터에 올린 내용만 봐도 그렇다. “문
대통령 귀국 길에 주요 수행원 중 한 사람은 중국에 들러 회담과 관련해서 설명을 해줬으면 좋겠네요.”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이 이런
발언을 공개적으로 내뱉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 우리가 중국의 속국인가?
현실의 힘에 굴복할 것인가,
기존의 신념에 충실할 것인가. <남한산성>이 던지는 질문이다. 하지만 지금 이 시대는 그때와 같지 않다. 현실주의적으로
힘을 추종하건, 자유주의적으로 가치와 제도에 신뢰를 보내건, 우리가 갈 길은 정해져 있다. 그 사실을 끝내 부정하고자 하는
자들을 흔히 사대주의자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