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21

아프간의 비극? 대한민국은 우리 손으로 지키고 만들어온 세계사의 기적

 

[아무튼, 주말] [노정태의 시사哲]
영화 '300′과 자유를 위한 항전
탈레반의 카불 장악이 준 교훈

흙과 물. 페르시아에서 온 사신의 요구는 명확했다. 크세르크세스 황제에게 복종하는 뜻으로 스파르타의 흙과 물을 바쳐라. 그러면 영원한 번영과 평화를 제공할 것이다. 거절한다면? 황제의 군대는 땅을 뒤덮고 강물을 모두 마셔버릴 정도로 많다. 그에게 저항하는 것은 그저 미친 짓일 뿐이다.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는 생각이 달랐다. 페르시아 황제의 사신을 우물로 걷어차며 레오니다스는 외친다. ‘미친 짓? 여긴 스파르타야!’ 그는 결사대 300인을 이끌고 좁은 길목을 막아선 후 처절한 싸움을 시작한다. 제2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중 테르모필레 전투를 소재로 한 영화 <300>의 내용이다.

일러스트=유현호

<300>은 이라크 전쟁이 한창이던 2006년 말 크리스마스 시즌에 개봉한 작품이다. ‘자유’를 지키기 위해 목숨 걸고 싸우는 근육질 전사들의 마초적 함성으로 가득 차 있다. 마치 원작 그래픽 노블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과잉된 연출 역시 ‘고상한’ 취향과는 거리가 멀다. 영화 평론가와 지식인들은 제대로 비판조차 하지 않고 비아냥거리기 일쑤였다.

그런데 그중 다른 의견을 제시한 사람이 있었다. 오늘날 매우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철학자 중 한 사람인 슬라보예 지젝이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2007년 Lacan.com에 기고한 ‘진정한 할리우드 좌파(The True Hollywood Left)’라는 글에서 지젝은 <300>에 대한 독창적 해석을 펼쳤다. <300>은 야만적 약소국이 문명적 강대국과 맞서 싸우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스파르타가 야만인이라고? 우리 편 주인공은 무조건 선하고 좋은 것이어야 한다는 선입견을 내려놓고 보면, 맞는 말이다. 스파르타는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신체검사를 하여 기형이거나 발육 상태가 좋지 않으면 내다 버려 죽게 한다. 그 유명한 ‘스파르타식 교육’을 통해 아이를 일곱 살 때부터 인간 병기로 길러낸다. 아이들은 남을 때리고, 속이고, 훔치고, 심지어 죽여서라도 자기 목숨을 지켜야 한다. 성인이 된 후에도 집단생활을 하고, 검소한 삶을 강요받으며, 음악과 시와 예술을 즐기지 못한다. 자유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병영국가인 것이다.

반면 페르시아는 어떨까? “나는 관대하다.” 크세르크세스가 레오니다스에게 항복을 권유하며 하는 말이다. 온갖 부와 풍요가 넘쳐흐를 뿐 아니라 스파르타와 달리 ‘다양성’을 존중하기까지 한다. 지젝의 해석에 따르면 그렇다. “다양한 인종, 레즈비언과 게이, 장애인 등 모두가 뒤엉켜 난교를 벌이는 크세르크세스의 궁전은 일종의 다문화주의 라이프스타일의 낙원처럼 묘사되어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영화 <300>을 보며 스파르타를 미국에, 페르시아를 이라크에 대입하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지젝에 따르면 그렇다. 대신 우리는 <300>을 보며 자유와 규율이 지니는 역설적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 자유를 지키기 위해 자유를 포기하고 규율을 따를 수도 있고, 규율을 내던진 채 자유만 탐닉하다 보면 자유를 잃을 수도 있는 부조리에 대해 따져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진정한 자유란 딸기 맛 아이스크림과 초콜릿 맛 아이스크림을 두고 고민하는 안락한 선택의 자유가 아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치며 싸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자유는 엄격한 규율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사회계약론>을 쓴 장 자크 루소라든가, 프랑스 혁명 당시 가장 격렬한 평등주의를 주장했던 자코뱅 당원들은 아테네가 아닌 스파르타를 그들의 이상향으로 삼고 있었다. 자유를 위한 복종을 동경했기 때문이다. <300>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편안함과 자유를 포기한 전사들이 그리스 전체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영웅담이다. 얼핏 보면 모순처럼 보이는 진실을 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광복절을 축하하고 있던 8월 15일, 지구 반대편에서 믿기 힘든 소식이 들려왔다.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이 탈레반에게 순식간에 함락된 것이다. 미군 철수가 시작된 지 3개월 만의 일이었다. 일부 용맹한 이가 없지 않았으나 대다수 아프간 정부군은 변변한 저항조차 하지 않은 채 물자, 예산, 장비 등에서 뒤떨어진 탈레반에게 백기를 들고 말았다.

탈레반은 극단적 이슬람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그들의 야만적 인권유린 행태는 21세기가 아니라 19세기 기준으로도 용납하기 어려운 것이다. 문명 세계의 일원으로서 우리는 마땅히 카불 함락을 슬퍼하며 한국 대사관 현지 직원 등 위기에 빠진 이들, 특히 여성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렇게만 이야기하고 넘어갈 수는 없다. <300>을 통해 확인한 자유의 역설 때문이다. 탈레반이 마치 스파르타 결사대처럼 싸우는 동안 아프간 정부군은 크세르크세스의 노예 부대처럼 마지못해 싸우는 시늉만 하고 있었다.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미국이라는 ‘관대한 제국’의 영향권 안에서 자유와 문명을 누리면서도,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일갈했다시피 그 자유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우려 들지 않았다. 미군이 떠난 후 카불이 함락되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 아니었을까.

자유는 남이 대신 지켜줄 수 없다. 베트남 전쟁에 이어 다시 한번 확인되는 잔인한 진리다. 반면 우리는 북한의 기습 남침을 당한 후 순식간에 낙동강까지 밀려났지만 전선을 사수한 후 반격하여 국토를 되찾았다. 김일성과 박헌영의 기대와 달리 대한민국 국민들이 자유민주주의를 선택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치열하게 싸웠기 때문이다.

그 처참했던 세계 최빈국은 오늘날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으로 우뚝 서 있다. 우리는 스파르타처럼 싸우고 일해서 아테네 같은 풍요와 문화와 민주주의를 이루어낸 것이다. 시대착오적인 일부 좌파는 대한민국을 ‘미제의 식민지’라고 비하해왔지만 그들은 틀렸다. 아프가니스탄의 비극이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대한민국은 우리 손으로 지키고 만들어온 세계사의 기적이다.

<300>의 결말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스파르타군은 무려 사흘이나 버텼지만 결국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다. 그동안 전열을 갖춘 그리스인들은 스스로 무기를 들고 싸워 페르시아를 격퇴한다. 진정한 동맹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연이어 전해지는 아프가니스탄의 비극 앞에서 스스로 묻게 되는 질문이다. 우리는 페르시아의 노예인가, 아니면 그리스의 자유인인가?

2021-08-15

광복절에 생각한다, 최재형家의 애국가 4절 제창을

 

[노정태의 뷰파인더㊻] MZ세대가 이해하는 애국주의

● 애초 논란 될 이유조차 없는 사안
● 자녀·며느리 강요당해? 초점 잘못된 비판
● 美 철학자 로티, 애국이 진보운동 동력
● 애국심 부정해야만 진보? 20세기 유물!
● ‘레드 콤플렉스’와 ‘태극기 콤플렉스’를 넘어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최재형 전 감사원장이 8월 4일 경기 파주시 문발동 미라클스튜디오에서 대선 출마 선언을 하기에 앞서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동아DB]
지난 8월 4일, 최재형 전 감사원장이 대선 출마의 뜻을 밝혔다. 동시에 '중앙일보'를 통해 후보자 본인과 가족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여럿 공개했다. 그의 아버지인 고(故) 최영섭 예비역 해군 대령을 중심으로 한, 요즘 보기 드문 대가족의 단란한 장면들이 주를 이뤘다.

그 중 2019년 명절 모임 사진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사진 속 일가족은 모두 가슴에 손을 얹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했다. 사진 설명을 읽어보자.

"2019년 최재형 전 감사원장 가족이 명절 모임에서 국민의례를 하는 모습. 맨 뒷줄에 서 있는 사람이 최 전 원장. 가족 모임 때는 국민의례를 하고, 애국가를 4절까지 완창하는 게 최 전 원장 가족의 전통이다."

흔한 일 아니나 이해할 수 있는 일

집안마다 독특한 가풍이나 전통이 존재한다. 이 집안은 그것을 남에게 드러냈다. 그에 대해 우리는 어느 정도까지 비판할 수 있을까.

다소 극단적인 사례를 들어 사고실험을 해볼 수 있다. 입만 열면 반일(反日)을 외치지만 실은 뼛속까지 친일파이고 '토착왜구'인 한 대학 교수가 있다면 어떨까. 그 교수는 매년 명절마다 욱일기를 걸어놓고 가족과 함께 기미가요를 제창한다. 통상적인 한국인의 감수성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지만, 그런 행위를 비난하거나 금지할 수는 없다. 다른 문화와 관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 그것은 자유민주주의의 가치 중 하나인 '똘레랑스(관용)'의 핵심이다. '김일성 만세'를 불러도 잡혀가지 않을 자유를 주장하는 진보주의자라면 더욱 그렇다.

최재형 가족의 '애국가 4절 행사' 또한 마찬가지다. 어떤 집안의 전통이라는 면에서 이는 애초에 논란이 될 이유조차 없는 사안이다. "참 독특한 가풍을 지녔구나"라고 말하고 지나가는 것 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어떤 집은 명절에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다른 집은 기도를 하거나 혹은 불공을 바친다. 이런 사례를 논란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듯 최재형 가족의 사례도 논란거리가 될 수 없다. 가족 모임에서 국민의례와 애국가 제창을 하는 게 흔한 일이 아니지만, 한국전쟁 영웅인 최영섭 대령의 영향을 고려하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자녀와 며느리가 강요당하는 것 같고 불쌍하다는 의견은 초점이 잘못된 비판이다. 며느리의 경우부터 생각해보자. 현행 민법상 미성년자의 혼인이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대부분은 성인이 된 후 본인의 의사에 따라 결혼을 한다. 스스로 판단하고 결혼했을 여성들을 '피해자'로 단정 짓는 것은 온당치 않은 일이다.

아이들은 어떨까. 부모님이 독실한 종교인이어서 태어나자마자 '모태 신앙'을 갖게 된 경우와 비교할 수 있다. 성장하면서 부모와 다른 가치관, 종교, 취향을 갖게 돼 갈등할 수 있고 그것은 개인과 가족의 불행이다. 하지만 어떤 종교나 전통이 존재한다는 것, 누군가는 태어나면서 자신의 선택과 무관하게 어떤 전통의 일부가 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선악을 논할 일이 아니다. 우리의 삶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허공의 백지 속에 그려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논의는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8월 5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오간 대화를 살펴보자. 진행자는 "좋게 보면 애국적이고, 안 좋게 보면 너무 국가주의, 전체주의를 강조하는 분 아니냐는 비판도 있다"며 부정적인 입장을 제시했다. 그러자 최재형은 "국가주의, 전체주의는 아니다"라며 "나라 사랑하는 것하고 전체주의하고는 다른 말 아닌가"라고 반박했다. 요컨대 '애국가 4절 행사' 논란이 애국주의 논쟁으로까지 비화해버린 셈이다.

최재형 전 감사원장이 8월 5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무명용사의 묘역에 참배를 하고 있다. [동아DB]

미국 진보가 책 한권에 충격 받은 까닭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보수 정치는 애국주의와 친화적이다. 그렇다면 진보는 애국주의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미국의 철학자 리처드 로티가 '우리나라 이룩하기'(Archieving Our Country: 국내에는 '미국 만들기'로 번역)를 통해 던진 질문이다. 그는 좀 더 건실한 진보 운동을 위해서는 애국주의를 무조건 배척해서는 안 되고,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내용의 강의를 통해 미국 진보 진영에 큰 충격을 줬다. 이 강의 내용을 바탕으로 1998년 펴낸 책이 '우리나라 이룩하기'다.

미국이 최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었지만 패권까지는 틀어쥐지는 못했던 1차 세계대전 무렵. 당시 미국 진보의 주류는 혁신주의(progressivism) 운동이었다. 혁신주의는 애국주의와 서로 마찰을 일으키지 않았다. 미국이 다른 나라보다 더 진보적인 나라가 될 수 있고 그래야 한다는 애국적 열정이 진보 운동의 주요 동력이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며 미국이 소련과 함께 세계를 양분하게 됐다. 이후 베트남 전쟁을 거치면서 미국의 진보주의는 크게 달라진다. 미국에 대한 자부심, 애정, 열광 등을 일체 허용하지 않는 분위기가 진보의 주류 담론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문화 상대주의와 정치적 올바름 등의 새로운 가치 체계가 애국주의의 자리를 대신 채워나갔다.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이러한 흐름은 계속됐다. 진보주의자라면 자신의 국가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올바른 일이라는 사고방식이 미국에서 시작해 세계 각지로 퍼져나갔다.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국 진보'의 얼개는 대체로 이 무렵 형성됐다. 특히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유입된 프랑스의 후기 구조주의 철학과 비판 이론을 통해 국가와 애국심 뿐 아니라 성별, 문화, 관습, 종교, 전통 등 기존의 모든 가치를 '해체'하는 것이 유행했다. 이에 미국 뿐 아니라 전 세계의 진보는 거대 담론을 잃어버렸다.

로티가 볼 때 그러한 지적 조류는 위험천만했다. 로티는 미국에 대한 자부심을 잊고 '해체'에만 몰두하는 이들을 '문화적 좌파'로 지칭한 후, 문화적 좌파의 득세를 이겨내고 이전 시대의 건강한 애국주의를 회복할 때 진보가 되살아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애국주의

로티의 논리는 간결했다. 미국의 좌파가 미국을 더 나은 나라로 만들고자 한다면 다른 나라보다 미국의 사정에 대해 더 관심을 갖고 열성적으로 달려들어야 한다. 관심과 개입은 이성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감정적이고 정서적인 애착을 필요로 한다. 미국을 더 나은 나라로 만들고자 하는 좌파가 미국에 대한 일체의 자부심을 부정하는 것은 모순이다. 미국의 좌파는 미국의 우파만큼이나 미국을 사랑해야 한다.

다들 막연히 생각하고 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던 이 단순명료한 주장의 여파는 매우 컸다. 미국의 지성계가 일대 충격에 빠졌다. 그 중 가장 적극적으로 반응한 사람은 시카고대 로스쿨에서 법철학을 가르치고 있던 마사 너스바움이었다. 너스바움은 '애국주의와 세계시민주의'라는 글을 통해 "민주적 시민권이나 국가적 시민권보다는 세계 시민권을 시민 교육에 중심으로" 두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애국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밝힌 셈이다.

너스바움의 글은 적잖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에 대한 반론이 '보스턴 리뷰'에 쏟아져 들어왔다. 벤저민 바버, 힐러리 퍼트넘, 찰스 테일러, 마이클 왈저 등 각 분야를 대표하는 지성인들이 참여한 가운데, 그 논쟁은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 애국주의와 세계시민주의의 한계 논쟁'(삼인, 2003)이라는 한 권의 책이 되었다.

그 중 정치철학의 거장인 찰스 테일러의 비판을 주목할 만하다. 그는 세계시민주의가 애국주의나 국가주의의 해악을 막는데 긍정적인 기여를 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결국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애국주의의 힘에 기댈 수밖에 없다는 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애국주의와 세계시민주의 둘 다 필요하다. 왜냐하면 근대 민주주의 국가는 자율적으로 운영되고, 지극히 많은 것을 요구하는 공동 사업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구성원들에게 대단히 많은 것을 요구하고, 전체 인류보다는 같은 나라 사람들에게 더 큰 연대 책임을 요구한다. 강력한 공통의 귀속 의식 없이는 이 사업에 성공할 수 없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 세계의 민주주의에 대한 대안을 고려할 때, 우리가 이 사업에서 실패하면, 그것은 인류를 위하는 것이 아니다."

1990년대는 미국 중심의 애국주의에서 벗어나 코스모폴리탄이 되자는 주장, 즉 세계시민주의가 미국 사회 주류 담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무렵이다.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까지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자본주의의 승리가 가시화되면서 그러한 경향은 더욱 힘을 얻었다. 좌파가 문화의 영역에서 애국주의를 부정하고 있었다면, 우파는 시장 경제의 영역에서 코스모폴리탄의 길을 걸었다. 자국 중심주의를 버리고 글로벌 시장과 자유로운 노동력의 이동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20세기 유물 탈피한 MZ세대

이후의 역사가 어떻게 진행됐는지 2021년을 살아가는 우리는 잘 알고 있다. 2016년 영국에서는 브렉시트(Brexit·영국의 EU 탈퇴) 운동이 일어났고, 같은 해 미국에서는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는 세계시민주의를 표방하며 문화적으로는 좌파, 경제적으로는 우파의 길을 걸어온 글로벌 엘리트를 향해 세계화로부터 소외된 이들이 반격을 가한 결과다. 게다가 그 후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면서 세계 시민의 정체성을 지닌 엘리트가 국경 없는 세상을 마음껏 즐기던 시대는 영원히 역사의 뒤안길로 넘어간 듯하다.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대한민국은 온 국민이 오후 6시마다 국기하강식을 하기 위해 길을 걷다 멈춰 서야 했던 나라다. 최재형의 가족 모임에서 애국가를 4절까지 제창하는 모습이 '올드'해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애국심을 원천봉쇄하고 부정해야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믿음 또한 20세기의 유물일 뿐이다.

곧 우리 사회의 주역이 될 MZ세대는 '레드 콤플렉스'뿐 아니라 586세대와 X세대가 공유하는 '태극기 콤플렉스'로부터도 자유로운 세대다. 맹목적인 애국심에 대한 경계는 늘 필요하겠지만, 애국심의 존재와 가치를 완전히 도외시할 수는 없다. 더 나은 세계시민이 되기 위해서라도 더 나은 애국주의를 고민해야 한다.

#최재형 #애국주의 #세계시민주의 #신동아


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basil83@gmail.com

2021-08-08

음주운전자의 대선출마는 자유다..그런데 이재명은?

 

[노정태의 뷰파인더㊺] 사이다 같은 '화끈한' 개혁보다 중요한 것

● 이재명 2004년에 낸 벌금 150만 원
● 前 대변인이 촉발한 ‘음주운전 정국’
● ‘한 번의 실수’라 해도 괜찮은 범죄인가
● 반부패지수 높은 나라, 교통사고율 낮은 이유
● 한국인은 기회 되면 술 마시고 운전?
● 8월 4일 李 “이 자리를 빌어서 사과”
● 음주 후엔 운전대 잡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이재명 경기지사가 8월 2일 대전시청에서 열린 경기도-대전광역시 지속가능 발전을 위한 정책협약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뉴스1]
음주운전이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의 화두로 떠올랐다. 이재명 경기지사를 둘러싼 논란 때문이다. 후보가 스스로 제출한 범죄경력증명원에 따르면 이 지사는 2004년에 음주운전으로 150만 원 벌금형을 선고받은 바 있다. 문제는 당시 음주운전자 초범에게 내려지는 형량이 벌금 70만 원 내지 80만 원이었다는 데 있다. 이에 이 지사가 재범이었기 때문에 150만원 형을 선고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물론 이 지사는 반박했다. 그는 8월 3일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오래전부터 벌금 액수와 상관없이 모든 전과를 공천심사 때 제출했다"고 말했다.

사실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이 음주운전 논란으로 빠져든 단초는 아이러니하게도 이재명 캠프 소속이던 박진영 민주당 상근대변인이 제공했다. 그는 8월 1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윤석열 전 검찰총장을 겨냥해 "이준석과의 치맥, 부산에서 백주 대낮 낮술에 이어서 이번에는 같은 가롯 유다과(科)의 군상(금태섭 전 의원을 지칭)끼리 만나서 소주를 드셨다"라며 "그냥 술꾼으로 살든가"라고 적었다.

그러자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술꾼으로 살라니? 윤 후보가 음주운전이라도 했나"라고 맞받아쳤는데, 그 결과 음주운전이 정치권을 뜨겁게 달구는 주제로 떠오르고 말았다.

그러다가 이 지사 본인 뿐 아니라 박진영 전 대변인, 이재명 캠프의 조정식 총괄본부장 등의 음주운전 전과도 확인된 상태. 무더운 여름날 느닷없이 '음주운전 정국'으로 세상이 시끄러운 상황이다.

더불어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들이 8월 4일 서울 마포구 YTN 사옥에서 열린 본경선 2차 TV토론회를 앞두고 서로 손을 맞잡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정세균 이낙연 추미애 김두관 이재명 박용진 후보. [안철민 동아일보 기자]

음주운전은 대체 왜 나쁜가?

이 사안을 단순한 해프닝으로 취급하면 안 된다. 이것은 고작 벌금 100만 원 내외의 범죄에 대한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 법치주의, 더 나아가 근대 문명이 무엇인지 질문하지 않고 넘어가서는 안 될 중요한 사안이다. 어떤 후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따지기에 앞서 우리는 좀 더 직접적이고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음주운전은 대체 왜 나쁜가?

대부분은 이런 질문을 받으면 당황해서 제대로 답변을 못하기 마련이다. 사실 나도 그랬다. 새삼스럽게 조명을 받은 박진영의 7월 15일자 페이스북 게시물을 보고 할 말을 잃었던 것이다. 그는 음주운전이 나쁜 일이라는 점을 인정한다면서도 "힘든 하루를 마치고 소주 한 잔 하고픈 유혹과 몇 만원의 대리비도 아끼고 싶은 마음"을 운운하며, 음주운전을 하다 적발된 사람들을 옹호했다. "한 번의 실수를 천형처럼 낙인찍겠다는 겁니까?"

물론 그가 음주운전 자체를 범죄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이재명 지사나 본인이 다른 범죄를 저질러서 형사처벌을 받은 바 있다면 이런 식으로 옹호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한 번의 실수'라고 말해도 괜찮은 범죄, 그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보다는 처벌받은 사실을 이용하여 정치 공세를 펴는 게 부당하다고 항변할 수 있는 범죄. 박진영 전 대변인은 음주운전을 사소한 일로 여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음주운전을 단호하게 반대하는 분들은 깜짝 놀랄 일이겠지만, 여전히 세상에는 음주운전을 비난할 일이 아니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없지 않다. 가볍게 한 잔 했을 뿐이고 집까지 천천히 안전운전을 해서 그 어떤 사고도 일으키지 않았다면 그런 음주운전을 단속해서 처벌하는 데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거다. 요컨대 음주운전은 '피해자 없는 범죄'로 끝날 가능성이 높으므로, 물론 당장 있는 법을 없애자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지금처럼 심하게 비난하고 몰아붙이지는 말아야 한다는 주장을 떠올려볼 수 있다.

이런 주장에 반론을 펴는 것은 생각보다 그리 쉽지 않다. 우리가 '상식'으로 여기는 사안들이 대체로 그렇다. 우리는 상식을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니 막상 '왜'라는 질문을 받게 되면 당황한다. 음주운전은 나쁘다. 왜 나쁜가? 그 질문에 답을 해보도록 하자.

‘한 뿌리' 네덜란드와 벨기에가 다른 대목

네덜란드와 벨기에는 원래 하나였지만 스페인과의 독립전쟁을 거치며 두 나라로 나뉘었다. 지금도 많은 제도와 관습을 공유하고 있다. 한국처럼 자동차가 우측통행을 하며 교통법과 제한속도 및 혈중알코올농도 제한 수치도 유사하다. 1인당 GDP(국내총생산)도 거의 차이가 없을 지경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벨기에의 교통사고 사망률은 네덜란드보다 두 배나 높다. 왜일까?

미국의 심리·과학 저널리스트 톰 밴더빌트의 책 '트래픽'에 따르면, 그 원인은 뜻밖의 지점에서 찾을 수 있다. 국제투명성기구의 반부패지수(CPI)를 보면, 네덜란드는 2006년 현재 세계 9위인 반면, 벨기에는 그보다 훨씬 낮은 세계 20위에 머물고 있다. 여러모로 거의 판박이라 할 수 있는 두 나라지만 반부패지수, 다시 말해 법과 정부에 대한 사회적 신뢰의 수준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는 셈이다. 그 차이가 교통사고 사망자 차이로 이어지는 논리를 밴더빌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교통사고 사망률이나 추돌 사고 비율이 높은 벨기에는 실제로 반부패지수나 국민의 교통법 준수 지수가 네덜란드보다 낮다. 벨기에의 하셀트대 경제학자인 로드 버릭은 교통법규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를 조사한 결과 벨기에 사람이 교통법규에 대해 일종의 저항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한다. 예를 들어 벨기에 국민은 네덜란드 국민보다 안전벨트 착용, 최저 속도제한, 음주운전(네덜란드보다 음주운전이 많다) 등 관련 법규에 대해 더 큰 적대감을 갖고 있다는 얘기다."

국가가 부패한, 혹은 부패했다고 믿는 나라일수록 사람들은 법을 믿고 따르지 않는다. 교통법규를 준수하지 않고 적대심을 갖고 때로는 일부러 교통법규를 어기기도 한다. 그 결과 더 많은 교통사고와 사망자, 부상자가 나오며, 이는 교통법규에 대한 사회적 불신을 더욱 부추기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요컨대 불신의 악순환에 빠져 있는 셈이다.

반면 핀란드, 노르웨이, 뉴질랜드, 스웨덴, 싱가포르 등 반부패지수에서 늘 '모범생'으로 꼽히는 나라들이 있다. 이 나라들의 교통사고 통계가 어떨지 독자 여러분도 어렵지 않게 짐작하실 수 있을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로 꼽힌다. 심지어 스웨덴은 교통사고 사망률이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임에도 불구하고 아예 교통사고 사망자를 '0'으로 만들기 위해 정책을 수립하며 추진한다. 반부패지수, 더 나아가 사회적 신뢰와 교통사고 사이에는 우연이라 보기 힘든 상관관계가 존재한다.

특히 핀란드의 사례가 주목할 만하다. 낮은 부패지수, 그리고 사회적 신뢰를 바탕으로 교통법규에 있어 인상적인 제도를 도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많은 독자 분들에게도 친숙할 소득 비례 벌금이 바로 그것이다. 과속 범칙금이 부자들에게는 그저 푼돈에 지나지 않으며 가난한 이들에게는 큰 부담을 준다는 것이 확인되자, 소득에 비례해 과속 벌금을 매기는 제도를 도입했고 지금도 유지중이다. 그런 제도를 떠올리고 국민적 합의 하에 입법했다는 점은 많은 뜻을 함의한다. 핀란드의 정치는 부패하지 않았고, 국민은 그런 국가와 제도를 신뢰하므로, 소득 비례 벌금제에도 기꺼이 찬성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후진국형 범죄'가 잔존하는 나라

대한민국의 현황은 어떨까. 2020년 현재 대한민국의 반부패지수 순위는 33위. 네덜란드나 핀란드는 고사하고 벨기에(2020년 현재 13위)보다 스무 계단이나 낮다.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비교해서 검토했던 방식을 연장해본다면, 한국인은 네덜란드인을 넘어 벨기에인보다도 교통법규를 불신하고 있으리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안전벨트를 매지 않고, 최저 속도제한을 무시하거나 요령껏 피하면서, 기회가 된다면 음주운전도 할 것이며, 벌금형을 선고받은 후에도 그 사실을 크게 부끄럽지 않게 여길 테다.

이재명 캠프에서 나온 음주운전 관련 논란과 추문은 이와 같은 추론에 설득력을 더해주고 있다. 물론 박진영 전 대변인의 말처럼 누군가가 범죄를 저질렀다고 해서 공무담임권을 원천적으로 박탈할 수는 없다. 음주운전이 아니라 그 어떤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라 해도, 법에 정해진 바에 따라 죗값을 치렀다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마땅하다. 음주운전 전과가 있다 해서 이재명 지사가 대선에 출마하지 말아야 한다는 법은 없다.

하지만 그가 지난 4월 페이스북을 통해 '재산비례벌금제'를 도입하자고 했던 것을 떠올려보면 의아한 기분이 든다. 이 지사는 재벌이나 부유층 등 재산이 많은 사람들에게 더 많은 벌금을 걷어야 한다며 핀란드를 예로 들었다. 윤희숙 국민의힘 의원이 "핀란드는 재산이 아니라 소득에 비례하여 벌금을 낸다"고 지적하고 논쟁이 이어지면서 이 지사의 주장은 힘을 잃었지만, 이 시점에서 보면 더 중요한 대목은 따로 있다. 핀란드는 국민 스스로가 음주운전에 관대하지 않은 나라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경제 규모로만 따지면 이미 세계 10위권의 선진국 반열에 올라 있는 나라다. 기존의 제도를 부수고 새로 만드는 식의 '화끈한' 개혁보다, 법과 질서와 정치에 대한 사회적 신뢰를 공고히 다져나가는 게 더욱 필요하고 절실한 단계에 이르렀다. 우리가 네덜란드나 벨기에 같은 서유럽, 혹은 핀란드 같은 북유럽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경쟁하려면, 이제는 GDP보다 반부패지수 같은 다른 지표에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음주운전 같은 '후진국형 범죄'는 우리 사회에 더는 설 곳이 없어야 마땅하다.

그 간단한 원칙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 글은 이재명 지사가 대선 후보로 나설 자격이 아예 없다는 식의 단정적 주장을 위해 쓴 게 아니다. 이 지사는 8월 4일 민주당 대선경선 2차 TV 토론회에서 자신의 음주운전 경력을 문제 삼는 경쟁자들의 지적에 "이 자리를 빌어서 이 점에 대해서는 사과 말씀을 드린다"고 했다. 허나 후보 본인 뿐 아니라 그의 캠프, 더 나아가 정치권에 포진한 수많은 음주운전자들도 해명과 사과가 필요하다. 술을 마시면 운전대를 잡지 말아야 한다는 그 간단한 원칙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이 법을 만들고 행정 권력을 휘두르며 국민을 억압하는 꼴을, 유권자는 더 이상 참아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재명 #음주운전 #반부패지수 #신동아


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basil8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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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07

루머의 루머의 루머.. '쥴리 벽화'는 폭력적인 여성혐오다

 

[노정태의 시사哲]
[아무튼 주말] 캐스 선스타인 책 '루머'로 본 쥴리 벽화의 진실과 거짓
일러스트=유현호

리버티 고등학교의 공기는 무겁다. 일주일 전 해나 베이커가 자살했기 때문이다. 클레이 젠슨은 더욱 울적하다. 해나를 짝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는 자책과 우울에 시달리던 클레이의 집 현관 앞에 이상한 소포가 배달된다. 주소도 보낸 사람의 이름도 써있지 않은 꾸러미의 내용물은 일곱 개의 카세트테이프. 여섯 개는 양면으로, 마지막은 한 면만 녹음되어 총 13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안녕, 해나야. 해나 베이커. 나야. 라이브에 스테레오지.” 어리둥절한 채 플레이 버튼을 누른 클레이는 기절초풍하고 만다. 자살한 해나가 남긴 음성 유언인 것이다. “간식 갖고 와서 앉아. 내 인생 얘기를 해줄 테니까. 더 자세히 말하면 내 인생이 왜 끝난 건지를. 네가 이 테이프를 듣고 있다면 너도 그 원인 중 하나야.” 13면의 테이프, 13명의 원인 제공자. 해나의 목소리와 클레이의 시선을 통해 시청자는 사건의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루머의 루머의 루머>의 내용이다.

가장 먼저 지목되는 첫 번째 원인 제공자는 저스틴 폴리. 단짝 친구가 전학간 후 적적해져 있던 해나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한 운동부 남학생이다. 두 사람의 풋사랑은 아름다웠다. 심야의 데이트를 하며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오던 해나의 속옷을 저스틴이 핸드폰 카메라로 찍고, 그 영상을 운동부 친구들에게 보여줬다가, 결국 전교생에게 퍼져버리기 전까지는 그랬다. 해나는 순식간에 ‘걸레’로 낙인찍혔다. 거짓 소문, 루머의 늪에 사로잡힌 채 헤어날 수 없게 된 것이다.

루머란 무엇인가? 우리에게 <넛지>로 잘 알려진 베스트셀러 저자이자 하버드 로스쿨 교수인 캐스 선스타인의 책 <루머>에서 가장 좋은 설명을 찾아볼 수 있다. 선스타인에 따르면 루머는 “사람과 집단, 사건, 단체와 관련해 진실이라고 입증되지 않은 사실을 주장하는 것을 말한다.”

단순한 거짓말과 루머는 어떻게 다를까? 누군가 ‘어젯밤에 호랑이가 와서 우리집 소를 물어갔다’고 주장하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거짓말쟁이는 가짜 증거를 제시하거나 그럴듯한 설명을 꾸며낸다. 반면 루머꾼은 사실 여부에 대한 직접적인 해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저 ‘남들이 그렇게 말한다, 믿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삼는 거짓말쟁이다. ‘삼인성호’(三人成虎)라는 고사성어를 떠올리면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스스로를 속이는 거짓말, 그것이 바로 루머인 셈이다.

그래서 루머는 이미 같은 믿음을 지니고 있는 동질적인 집단 속에서 쉽게 확산되는 경향이 있다. 한 번 퍼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선스타인은 그런 특징을 ‘사회적 폭포효과(social cascades)’라 부른다. 또한 루머는 같은 생각을 지니는 집단 내에서 확산되기에 점점 더 극단화되는 경향이 있다. 이를 ‘집단 극단화(group polarization)’라 할 수 있다. 사회적 폭포효과와 집단 극단화가 맞물리면 그 해악은 때로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아폴로 탐사선의 달 착륙이 조작된 허위라거나, 코로나 백신은 사람들에게 마이크로칩을 심기 위한 빌 게이츠의 음모라거나, 힐러리 클린턴과 프란치스코 교황이 아동 성매매 혐의로 FBI에 체포되었다는 따위의 허황된 루머를 믿는 사람들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서로의 잘못된 믿음을 근거로 삼으며 더욱 똘똘 뭉치는 것이다. 정치적 양극화를 조장하고 그것을 통해 편가르기를 하며 이득을 보는 사람들, ‘가짜 뉴스 공장’을 운영하는 자들이, 루머를 적극적으로 생산하고 유포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부인 김건희 코바나컨텐츠 대표를 향한 악의적인 루머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알베르토 자코메티 한국특별전’, ‘마크 로스코 전’ 등 대형 전시를 기획하고 흥행시킨 성공한 문화사업가이며 전시기획자다. 또한 대학원에 다니는 등 다양한 활동을 했으며 그 이력은 공개적으로 검증 가능하다. 그런데 그가 ‘쥴리’라는 예명으로 유흥업소에서 일했다는 황당무계한 루머가 어째서 이렇게 널리 퍼질 수 있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정치적 양극화 때문이다. 가장 유력한 야당 후보의 아내를 둘러싼 추문이 퍼지면 퍼질수록 윤석열의 지지율이 떨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그런 루머를 퍼뜨리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들의 집단적 신념 체계는 사실 여부와 무관하다. 나쁜 소문을 퍼뜨리고 이미지를 깎아내리는 것이 목적일 뿐이다. 그러한 사회적 폭포효과와 집단 극단화가 맞물려 결국 ‘쥴리 벽화’ 사건까지 벌어지고 말았다. 최근 몇 년 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폭력적 여성혐오다. 그쯤 되자 여론도 그 루머꾼들에게 등을 돌리고 있다. 우리 국민의 인권 의식과 건전한 양식이 그런 광경을 용납하는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다고 믿고 싶다.

리버티 고등학교의 사정은 달랐다. 루머에 잠식당했다. <루머의 루머의 루머>로 돌아와 보자. 아무도 해나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저 심심풀이용 가십으로 소비하고 진실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결국 해나는 테이프에 남긴 마지막 육성을 통해 가까스로 호소할 수 있었다. “나에 대한 얘기를 하도 많이 들어서 어떤 얘기가 제일 인기가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뭐가 제일 인기 없는지는 알아. 진실이지. 진실이 늘 제일 재미있거나 최고나 최악은 아니거든. 진실은 그 중간이지. 하지만 진실을 알고 기억해줘야지.”

<루머>는 적대적 루머에 시달리던 오바마 정권을 옹호하기 위해 쓰여진 책이다. 그러다보니 선스타인은 진보적인 법학자임에도 불구하고 ‘표현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시장’에만 매달릴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해로운 루머에 대해서는 일정 수준의 위축효과를 줄 수 있도록 법적인 제재를 가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한국은 미국보다 명예훼손과 관련된 처벌 조항이 잘 마련된 나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보다 바람직하며 근본적인 해법은 수용자 집단의 건전한 양식에 달려 있다. 우리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몇 달 후 국민 스스로가 상식적이며 현명한 판단을 내린다면 악의적인 루머꾼들을 공론장에서 몰아낼 수 있을 것이다.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2021-08-01

'징역 2년? 김경수·드루킹 판결은 잘못됐다!'

 

[노정태의 뷰파인더㊹] 선거 댓글 8000만 개 조작이 '고작' 업무방해죄라니..

● 역대급 호화 변호인단도 힘 못 쓴 까닭
● 막강한 대원칙 ‘위법수집증거 배제’
● 드루킹 “완성도 98%”에 김경수는 “고맙다”
● 업무방해죄 초범(初犯) 대접, 합당한가?
● 신종 선거범죄 맞선 새로운 입법 필요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드루킹 댓글조작’ 사건으로 대법원에서 징역 2년이 확정된 김경수 전 경남지사 7월 26일 경남 창원시 마산구 창원교도소 앞에서 재수감 입장을 밝힌 후 고개 숙여 인사하고 있다. [뉴스1]
"이 증거, 법원에서 쓸 수 있겠어?"

미국 드라마, 그 중 범죄 수사물을 즐겨 보는 분이라면 친숙한 대사다. 흔한 공식에 따르면 이럴 때 행동하는 다혈질 형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백을 얻어내거나 증거를 수집하려 든다. 그의 파트너인 냉정하고 이성적인 형사는 바로 저런 대사를 내뱉는다.

물론 현실은 드라마가 아니다. 여기는 미국이 아니라 한국이기도 하다. 하지만 근대 형사사법제도의 본질은 만국 공통이다. 최소한의 사법 정의와 상식이 작동한다면 반드시 지켜져야 할 원칙이 있다. 수사기관은 법을 어겨서는 안 된다. 법을 어겨가며 수집한 증거를 바탕으로 국민을 처벌해서는 안 된다.

CSI 요원들이 현장에서 긴장하는 이유

이 원칙은 2007년 법 개정을 통해 국내 형사소송법에도 명문으로 규정됐다. 물론 그 전에도 위법수집증거는 증거로 사용되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었으나, 그 원칙을 한층 더 확고히 하기 위해 아예 법으로 못 박았다. 조문은 단 한 문장으로, 다음과 같다.

"형사소송법 제308조의2(위법수집증거의 배제) 적법한 절차에 따르지 아니하고 수집한 증거는 증거로 할 수 없다."

이 원칙은 실로 막강하다. 대법원은 적법한 절차에 따르지 않고 수집한 증거 뿐 아니라, 그 증거로부터 나온 2차 증거까지도 증거 능력을 부여하지 않는 원칙을 세우고 있다. 2007년 11월 15일 선고한 2007도3061 전원합의체 판결의 다수의견에 따르면, "수사기관의 위법한 압수수색을 억제하고 재발을 방지하는 가장 효과적이고 확실한 대응책은 이를 통하여 수집한 증거는 물론 이를 기초로 하여 획득한 2차적 증거를 유죄 인정의 증거로 삼을 수 없도록 하는 것이다."

위법수집증거배제원칙은 이렇듯 확실하고 강력한 원칙이다. 검찰이 내세우는 증거 중 하나만 허물어뜨려도 유죄를 무죄로 바꿀 수 있다. CSI 요원들이 현장에서 증거를 수집할 때 극도로 긴장감을 유지하는 것은 그러므로 당연한 일이다. 피의자와 변호인은 수사기관이 수집한 증거가 위법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덤벼들 테니 말이다.

김경수 전 경남지사, 한명숙 전 국무총리,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하 존칭 생략) 등, 법에 의해 처벌을 받았거나 현재 기소돼 있는 인사들이 연이어 재판 결과를 부정하는 모습을 보면 개탄을 넘어 우려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거기 있다. 그들은 힘없이 경찰에 의해 강요된 자백을 하고 부당한 판결을 받을만한 인물이 아니다. 한국에서 가장 탁월한 변호인단을 꾸려 스스로를 보호할 능력이 충분한 이들이다. 믿음은 자유지만 법정은 증거와 법률에 의해 판결을 내리는 곳이다.

한명숙과 마찬가지로, 김경수는 유죄다. 특히 김경수가 징역 2년형을 선고받은 사건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자. 이 사안은 단지 여당과 그 지지층이 사법 질서를 부정하고 있다는 쪽으로만 논의할 일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더 깊고 본질적인 문제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초호화 변호인단도 동의한 증거

김경수를 변호하기 위해 상고심에 참여한 변호인단은 총 14명. 그 중에서 8명이 전직 판사, 즉 전관이다. 특히 그 중 이상훈 변호사는 대법관 출신으로 현재 '김앤장' 소속이다. 그 동생인 이광범 변호사는 엘케이비앤파트너스(LKB)의 대표 변호사다. 1심과 2심은 대형 로펌 태평양 소속 변호인단이 도맡아왔다.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역대급' 변호인단이다.

과연 이 화려한 변호인단이 위법하게 수집된 증거를 놓쳤을까. 상식적으로 그럴 가능성은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즉, 다음은 허익범 특검팀과 재판부 뿐 아니라 김경수의 초호화 변호인단도 모두 동의하거나,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던 사실이다.

1. '드루킹'이라는 아이디를 사용하는 친노·친문 성향의 파워블로거 김동원은 매크로 조작 프로그램을 이용해 네이버 뉴스 기사 댓글을 조작하였는데, 그것은 업무방해에 해당한다.

2. 김경수는 드루킹이 '킹크랩'이라 불리는 댓글 조작 매크로를 시연하는 현장에 방문했다.

3. 김경수는 드루킹과 메신저 앱 텔레그램을 이용해 댓글 조작에 대해 의사소통했다.

드루킹은 이미 매크로를 이용한 댓글조작으로 인해 업무방해 혐의로 구속된 상태다. 그러므로 드루킹과 김경수가 댓글조작의 공범인지 여부가 관건이 된다. 김경수의 초호화 변호인단도 그 지점에 초점을 맞췄다. 드루킹이 저지른 범죄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으므로 드루킹과 김경수 사이의 연결 고리를 끊어서 김경수를 구하고자 한 것이다.

물론 부질없는 시도였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텔레그램 대화의 내용 때문이다. 그 대화는 적법하게 증거로 수집됐다. 김경수와 드루킹이 공범이라는 사실을 의문의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김경수는 법정에서 증언했다. "킹크랩이라는 댓글 순위 조작 프로그램에 대해 들은 적도, 시연을 본 적도 없습니다."

하지만 드루킹이 김경수에게 "킹크랩 완성도는 98%입니다"라는 메시지를 보낼 때, 김경수는 "고맙습니다"라고 답했다. 김경수 본인이 먼저 뉴스 기사의 URL을 보낸 후, 그것을 드루킹이 받아 '처리하겠습니다', '전달하겠습니다'라고 답한 경우도 11차례나 된다. 댓글 조작과 관련하여 지시를 내리고 받는 사이라는 것을 증명하는데 부족함이 없는 증거들이다. 이렇게 2017년 대선은 댓글 조작으로 얼룩지고 있었다.

드루킹의 '업적'과 김경수의 형량

‘드루킹 댓글조작’ 사건 수사와 공소유지를 맡아온 허익범 특별검사가 7월 21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김경수 전 경남지사에 대한 대법원 판결과 관련해 입장을 밝히고 있다. [뉴스1]
여기서 독자들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의문이 지나갈 것이다. 드루킹 일당은 킹크랩을 이용해 무려 8000만 개가 넘는 댓글을 달아가며 여론을 조작했다. 김경수는 그 과정에서 공모 공동정범으로 참여했다. 그들의 댓글 조작 작업으로 혜택을 본 사람은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후보, 지금의 대통령이다. 민주주의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선거를 이런 식으로 망쳐놓은 사람들이 어째서 징역 2년밖에 선고받지 않는가.

김경수가 징역 2년형을 선고받은 이유는 간단하다. 그의 죄목이 '고작' 업무방해이기 때문이다. 앞서 우리는 드루킹이 업무방해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고, 드루킹과 김경수가 공범임이 확인됐다고 했다. 그러므로 김경수 역시 업무방해죄로 처벌을 받는 것이다.

업무방해죄의 형량은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500만 원 이하의 벌금이다. 게다가 김경수는 초범이다. 집행유예 없는 징역 2년의 실형은 여타 업무방해죄의 초범들과 비교해볼 때 형량이 낮다고 단정 지어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 사안을 고작 업무방해죄로 의율(擬律)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가.

김경수는 업무방해죄 뿐 아니라 선거법 위반 혐의로도 기소됐다. 그가 2018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드루킹의 측근에게 일본 센다이 총영사 자리를 제안한 것은 법이 정한 수당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선거운동에 대해 대가를 지불해서는 안 된다는, 공직선거법 135조 위반이라고 특검은 판단했다.

1심 재판부는 이 점에 대해서도 특검의 손을 들어줬다.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된 것이다. 하지만 2심에서 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해 법원의 입장이 달라졌다. 김경수와 드루킹 측이 센다이 총영사 자리를 놓고 모종의 거래를 한 점은 사실이나, 그 거래가 당시 후보가 정해지지도 않았던 2018년 지방선거에 대한 내용임을 단정할 수 없으므로, 공직선거법 135조 위반으로 볼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사실 드루킹이 '업적'을 세운 건 2017년 대선 때의 일이다. 그런데 왜 특검은 2018년 지방선거를 두고 공직선거법 위반을 따져야 했을까? 선거법의 공소시효가 6개월뿐이기 때문이다. 특검이 출범할 때는 이미 2017년 대선 당시 벌어진 온라인 여론 조작과 그에 따른 매관매직을 벌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특검은 반쪽짜리 기소를 할 수밖에 없었고, 대법원은 공직선거법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렸다. 잘못된 행위가 벌어졌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법으로 처벌할 수는 없던 셈이다.

‘촌탁(忖度)금지법'을 요구한다

대한민국은 이런 나라다. 8000만 개가 넘는 댓글을 매크로 조작으로 퍼부어서 대선 결과에 영향을 미쳐도 고작 '업무방해'로 처벌할 수밖에 없는 나라. 그 댓글 조작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온 국민이 다 알고 있다. 2017년 대선 당시 김경수는 대통령 후보 문재인의 비서실장이었다. 고작 업무방해로 처벌할 수밖에 없지만, 그것이 범죄임이 명명백백하게 드러났다면, 당연히 이득을 보는 최종 수혜자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지 않을까.

애석하게도 현재의 법체계상 그것은 불가능하다. 김경수의 초호화 변호인단의 변호 전략을 떠올려보자. 김경수와 드루킹이 공범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 공범 관계를 부정하는 것이 그들의 변호 전략이었다. 직접적으로 메시지가 오갔고 그것이 적법한 압수수색을 통해 확보됐기 때문에 그 공범 관계는 입증이 가능했다.

반면 문재인과 김경수의 2017년 대화를 오늘날 우리가 다시 손에 넣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설령 입수했다 한들 문재인이 직접 '내 선거를 위해 인터넷 여론을 조작하라'고 지시했거나, 김경수가 댓글 조작을 하고 보고하며 문재인이 승인하는 내용의 대화를 찾아 그들의 공범 관계를 확인하는 일은 사실상 매우 어렵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본다면 그렇다. 충성스러운 김경수가 문재인을 보호하기 위해 '알아서' 했을 테니 말이다.

이렇듯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위해 '알아서' 처리하는 것을 일본어로 '손타쿠(忖度·촌탁)'라 부른다.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범죄의 공모와 실행은 법으로 처벌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 공범으로 엮을 수 있을만한 요소가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허익범 특검의 수사가 김경수보다 '윗선'으로 향하지 못한 이유도 결국 이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약칭 '청탁금지법'을 가진 나라다. 공직자 뿐 아니라 언론인, 심지어 교사도 대가성 여부와 무관하게 특정 액수 이상의 금품을 받지 못하도록 법이 정하고 있다. 이렇게 엄격한 원리를 법으로 정해놓은 나라에서 청탁보다 더 해로운 '촌탁'은 처벌의 사각지대에 내버려둔 셈인데,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청탁금지법'보다 더 필요하고 시급한 법은 '촌탁금지법'이다.

김경수-드루킹 사건의 판결은 더 분명한 죄목으로 더 큰 형량을 받았어야 마땅하다고 본다. 김경수에게 고작 2년형이 내려진 것, 그 윗선으로 처벌의 칼날이 올라가지 못한 것은, 모두 잘못된 일이다.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선거 범죄에 맞서는 새로운 입법이 절실하다. 촌탁금지법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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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basil8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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