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정태의 뷰파인더-51] 통행료 면제 논란과 '트러스트'
● 자본주의는 ‘돈 놓고 돈 먹기’
● 이 단순명료한 상식 통하지 않는 사람
● ‘공공성’ 내세워 파주, 일산, 김포 주민 자극
●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李에게 할 말
● 선거 홍보 위해 탕진되는 ‘신뢰’라는 공공재
● 권력자가 손바닥 뒤집듯 엎어버린다면…
● 정부는 공공선에 복무해야(GSGGood)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그러나 '돈 놓고 돈 먹기'가 반드시 나쁘다고 볼 수는 없다. '돈 놓고 돈 먹기'에도 나름의 윤리가 있다. 남의 돈을 먹기 위해서는 우선 내 돈을 걸어야 한다는 기본 원리가 그것이다. '이게 뭐가 윤리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잘 생각해 보자. 세상에는 자기 돈을 걸지도 않고 남의 돈을 먹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다. 푼돈을 걸어놓고 목돈을 내놓으라고 우기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본인이 잘못된 베팅을 해놓고 손실이 발생하면 남이 물어줘야 한다는 식으로 나오는 이들은 또 어떤가.
이런 모든 경우를 감안해 보면, '돈 놓고 돈 먹기'는 자연 법칙 같은 게 아니다. 수익을 얻기 위해서는 투자를 해야 하며, 투자를 하는 것은 본인의 판단에 따르는 것으로 그 책임 역시 스스로 져야 한다는 선언이라고 볼 수 있다. 자본주의를 떠받치는 '투자의 윤리'인 셈이다.
위험을 부담하는 자가 수익을 향유한다. 투자의 원리요, 자본주의 근간이 되는 원칙이다. 투자를 통해 돈을 버는 것 자체를 경원시하던 과거와 달리 요즘은 젊은이들도 주식이나 가상화폐 등 다양한 방면으로 투자를 하고 수익을 올리거나 손실을 경험하는 세상이다. '돈 놓고 돈 먹기'가 꼭 나쁜 말은 아니라는 점을 더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600원 통행료 공략한 대권주자
그렇다면 일산대교는 국민연금의 소유인가. 그렇지는 않다. 국민연금은 경기도에 일산대교를 기부채납했다. 다만 2038년까지 30년간 유료로 일산대교를 운영하며 통행비를 받겠다는 협약을 체결한 상태다. 경기도가 소유하고 있는 교량을 국민연금이 소유한 일산대교(주)가 빌려, 통행 요금을 받아 관리하고 운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국민연금이 일산대교(주)를 인수했던 2009년으로 돌아가 보자. 당시 일산대교(주)는 매년 100억 원씩 적자를 내고 있었다. 다리를 이용하는 인구가 많지 않았던 탓이다. 상황이 달라진 것은 일산, 김포, 파주의 인구가 늘어난 다음, 더 정확히 말하면 김포신도시에 입주가 시작된 이후다. 그럼에도 2009년부터 2017년까지는 적자를 면치 못했고, 2017년에 이르러서야 순이익을 내기 시작했다. 지난해에는 294억 원의 매출에 순이익 43억 원을 올렸다.
9월 현재 일산대교의 통행료는 경차 600원, 소형(1종) 1200원, 중형(2, 3종) 1800원, 대형(4, 5종) 2400원이다. 이를 과도한 요금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여타 민자도로나 다리의 통행료 뿐 아니라, 서울 남산 1, 3호 터널에 책정된 혼잡통행료(2000원) 등과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매일 혹은 자주 일산대교를 이용하는 운전자 처지에서는 무료로 이용 가능한 다른 한강 다리와 달리, 푼돈이나마 돈을 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다. 이재명은 바로 그런 심리를 공략하고 있는 것이다.
"해 먹어도 적당히 해 먹었어야지요"
이재명은 일산대교(주)의 사업자 운영권을 회수하고 공익처분을 내리겠다는 입장이다. 지난 2월부터 운을 떼기 시작하더니 9월에 발표하고 10월부터 전격적으로 시행하겠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산대교(주)를 소유하고 있는 국민연금으로서는 당연히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이며 법적 대응을 예고하고 있다. 하지만 민간투자법 제47조에 따른 공익처분은 주무관청이 청문 등의 절차를 거쳐 확정하면 곧장 효력을 갖는다. 경기도와 국민연금 사이에 치열한 법적 다툼을 예상할 수밖에 없다.경기도 측의 입장은 이렇다. 국민연금은 일산대교(주)에 후순위채권을 설정했다. 쉽게 말해 돈을 빌려줬다는 뜻이다. 자신이 소유한 회사에 돈을 빌려주는 이유는 이자를 받기 위해서다. 일산대교 통행료가 얼마가 걷히건 정해진 이자를 가져간다. 그러니 국민연금이 그 이자율을 낮추면 일산대교 통행료도 낮아질 수 있다. 하지만 국민연금은 연금 수익률을 지키기 위해 자회사를 상대로 한 돈놀이를 계속한다.
이재명이 페이스북에 올린 게시물에서 한 대목을 인용해 보자.
"국민연금공단은 일산대교(주) 단독주주인 동시에 자기대출 형태로 자금차입을 제공한 투자자입니다. 국민연금공단은 출자지분 100% 인수 이후 2회에 걸쳐 통행료 인상을 했을 뿐만 아니라 선순위 차입금은 8%, 후순위 차입금은 최대 20%를 적용해 이자를 받고 있습니다."
이후 이재명은 트위터에서 좀 더 과격한 표현으로 자신의 뜻을 밝혔다.
"해 먹어도 적당히 해 먹었어야지요. 이자율 20%? 악덕사채업자입니까?"
이러한 표현을 통해 그가 노리는 바는 분명하다. 파주, 일산, 김포 주민들의 분노를 자극하는 것이다. 물론 경기도의 방침대로 공익처분이 시행된다면 국민연금은 예상치 못한 손실을 입게 된다. 국민연금은 온 국민이 낸 돈으로 만든 기금이다. 온 국민이 손해를 본다는 뜻이다. 하지만 2500억 원의 투자금과 향후 기대되는 이익은 국민연금이 투자하고 있는 900조 이상의 기금 가운데 일부에 지나지 않으므로, 그 손해가 국민에게 당장 실감될 것이라 보기는 어렵다. 그러니 이재명은 페이스북을 통해 이와 같이 당당하게 선포할 수 있던 것이다.
"도로는 국가 기간시설로 엄연한 공공재입니다. 사기업일지라도 불합리한 운영으로 정부와 국민에게 과도한 부담을 지운다면 시정해야 합니다. 하물며 국민연금으로 운영하는 국민연금공단의 사업은 수익성과 공공성을 함께 고려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권력 입맛 따라 계약서도 무시되는 나라
도로는 국가 기간시설로서 공공재인가? 그렇다. 사기업일지라도 영업 과정에서 공공의 이익을 해친다면 정부가 나서서 어떤 식으로건 조율할 필요가 있는가? 그 또한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재명의 발언과 공익처분에 선뜻 동의하기는 어렵다. 우리 사회에 필요한 '공공재'는 도로 뿐만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공공재가 바로 '신뢰'다.우리에게 '역사의 종말'로 잘 알려진 미국의 정치철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또 다른 명저 '트러스트'에서 바로 그 '신뢰'에 주목했다.
"경제적 현실을 검토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교훈은 한 국가의 복지와 경쟁력은 하나의 지배적인 문화적 특성, 즉 한 사회가 고유하게 지니고 있는 신뢰의 수준에 의해 결정된다."
여기서 후쿠야마가 법과 제도 등 '딱딱한' 요소가 아닌 문화라는 '부드러운' 요소에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이른바 선진국 반열에 오른 나라들은 대체로 유사한 법과 제도를 지니고 있다. 일단 세계적으로 법은 독일과 프랑스에서 발전한 대륙법, 영미권에서 발전한 보통법(common law)으로 나뉜다. 각국은 입법 과정에서 외국의 사례를 참고하고 연구하기에, 결국 세계 각국의 법은 세월이 흐를수록 유사한 방향으로 발전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같은 법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 법이 운영되는 양태는 동일하지 않다. 사회적 덕목(social virtues), 그 중에서도 신뢰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럴싸한 법을 만들어 놓았다 해도 국민이 지키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법을 지키는 사람, 계약을 곧이곧대로 이행하는 사람이 손해라는 인식이 한번 퍼져 자리 잡고 나면 그것을 되돌리기란 매우 어렵다. 하물며 법과 계약을 지키지 않는 주체가 일개 국민이 아닌 정부라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정치권력의 입맛에 따라 하루아침에 정책이 뒤집힌다거나, 정치권의 풍향에 따라 사업의 행방이 휘둘릴 수밖에 없다면, 그런 나라에서 정상적으로 사업을 운영하기란 불가능하거나 매우 어려워진다. 기업가는 정치권에 연줄을 대고 뇌물을 바치며 '정치 리스크'를 피하려 할 것이다. 그렇게 발생하는 비효율은 결국 소비자, 더 나아가 국가 전체의 비용으로 전가되고 만다. 그러므로 사회적 신뢰가 낮은 사회는 다른 요소가 아무리 유리하더라도 높은 수준의 풍요를 누릴 수 없다.
국민연금이 폭리를 취하고 있다는 이재명의 주장은 신빙성이 낮아 보인다. 설령 국민연금이 과도하게 높은 통행료를 받고 있다 해도 기습적 공익처분이 만들어내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민자 사업이란 정부에 돈이 없거나 해당 민자 도로 등에 수익성이 부족해 착수하지 못할 때 민간에서 자금을 동원해 공사를 하고 특정 기간 동안 수익을 얻을 수 있도록 보장하는 계약 형태다. 그것을 하루아침에 중앙 정부나 지자체에서 손바닥 뒤집듯 엎어버릴 수 있다면, 앞으로는 과연 누가 정부를 믿고 민자 사업에 뛰어들 수 있을까? 일산대교라는 공공재의 가치보다 훨씬 큰, 정부에 대한 신뢰라는 공공재가, 이재명의 대선 홍보를 위해 탕진되고 있다.
무시되는 사용수익권과 'GSGG'
자본주의는 '돈 놓고 돈 먹는' 시스템이다. 삐딱하게 보자면 '사람보다 돈이 앞서는 세상'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돈 놓고 돈 먹는 세상이 돌아가기 위해서는 그만한 신뢰가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한다. 내가 건 판돈이 얼마인지 정확히 기록·기억하며, 기대 수익을 평가하고, 성공하건 실패하건 본인의 책임으로 투자하는 이성적인 개인주의적 세계관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이재명이 '공공성'을 앞세워 주장하는 내용을 보면서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정치권력을 가진 사람이 '공공성'이라는 말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세상은 좋은 세상이 아니다. 권력자가 '이것은 공공재'라고 지목하는 순간 합법적으로 체결된 계약이나 사용수익권이 아무렇지 않게 무시되는 나라는 결코 좋은 나라라고 볼 수 없다. 정부는 다른 그 어떤 공공재보다 우선하여, 정부에 대한 신뢰를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재명 캠프에 속해 있는 김승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한 말마따나, 정부는 공공선에 복무해야 한다(Government Serves General Good)는 말이다.
#이재명 #일산대교 #민자사업 #기부채납 #신동아
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basil8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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