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정태의 뷰파인더] 그들은 아이젠하워가 아니거늘
● 李 ‘심는다’, 尹 ‘멸치와 콩’
● 새로운 유형의 자기 복제자
● 지지층만 즉각 반응한 ‘챌린지’
● “성향이 원래 그런 사람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1월 8일 서울 동작구 이마트 이수점에서 멸치와 콩을 사고 있다. [국민의힘 중앙선거대책위 제공] |
입에 착 붙는 구호가 선거를 좌우하는 모습은 2016년 미국 대선에서 반복됐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Make America Great Again)’는 구호를 내세운 도널드 트럼프는 거의 모든 이들의 예상을 뒤엎고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을 돌파하더니 미국 대통령직을 꿰찼다. 바야흐로 ‘밈 정치’의 시대가 열렸다.
한국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재명을 뽑는다고요? 노(No), 이재명은 심는 겁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1월 4일 공개한 유튜브 영상에서 한 말이다. 탈모인들의 수요를 노린 ‘소확행’ 공약이라는 설명이 뒤따랐다. 인터넷에서 탈모는 신체 현상이기에 앞서 하나의 밈이다. 즉 ‘이재명은 심는다’는 말이 인터넷에서 화제가 될 것을 의도하고 내놓은 공약으로 봐야 한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는 1월 8일 인스타그램에 이마트에서 장을 보는 모습과 함께 “장보기에 진심인편”이라는 제목의 게시물을 올렸다. 문제는 그 밑에 달린 해시태그다. “#이마트 #달걀 #파 #멸치 #콩 #윤석열” 얼핏 보면 별 것 아닌 듯하지만, 네티즌 반응은 달랐다. ‘멸치’와 ‘콩’의 앞 글자를 따면 ‘멸콩’, 즉 ‘멸공’이 된다는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이튿날 윤 후보 선거대책위원회가 운영하는 ‘AI 윤석열’은 그 논란에 쐐기를 박았다. “오늘은 달걀, 파, 멸치, 콩을 샀다. ‘달파멸콩’, 가족과 함께 하는 좋은 주말 보내세요”라고 말했던 것이다. 이내 ‘멸공 밈’에 정국이 휩쓸려 들어갔다.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인터넷 밈의 흥행이 과연 정치적 성공에 도움이 될까.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직접 출연해 화제가 된 15초 분량의 ‘탈모 공약 동영상’. [유튜브 캡처] |
그가 볼 때 자기 복제를 통해 증식하는 것은 유전자(gene)만이 아니었다. 인간의 문화 속에도 유전자와 유사한 무언가가 둥둥 떠다니고 있다. 누군가가 창발적으로 떠올린 후 다른 이들이 따라함으로써 살아남고 전파되는 새로운 유형의 자기 복제자. 그것이 바로 ‘밈(meme)’이다. 그리스어에서 모방을 뜻하는 어근인 미멤(mimeme)을 적당히 편집해 gene과 운율을 맞춰 만들어낸 신조어다. 즉, ‘밈’ 자체가 일종의 밈인 셈이다. 도킨스의 설명을 들어보자.
“밈의 예에는 곡조, 사상, 표어, 의복의 유행, 단지 만드는 법, 아치 건조법 등이 있다. 유전자가 유전자 풀 내에서 퍼져 나갈 때 정자나 난자를 운반자로 하여 이 몸에서 저 몸으로 뛰어다니는 것과 같이, 밈도 밈 풀 내에서 퍼져 나갈 때에는 넓은 의미로 모방이라 할 수 있는 과정을 거쳐 뇌에서 뇌로 건너다닌다.”
어떤 밈은 그리 널리 퍼지지 못하고 금세 잊힌다. 설령 널리 퍼졌다 해도 그리 오래 살아남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금 가요 차트를 점령한 수많은 유행가가 그렇다. 어떤 노래는 사람, 때로는 국가보다 오래 살아남는다. 애국가라던가, 혹은 대한민국 건국 전부터 사람들에게 불렸던 아리랑 같은 노래를 떠올려보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밈은 ‘생각의 바이러스’라고 할 수 있다. 바이러스는 스스로 생명 활동을 하지 못한다. 허나 유전자를 갖고 있다. 숙주가 될 생명체를 통해 자신의 유전자를 복제하고 퍼뜨린다. 밈 또한 마찬가지다. 인간의 두뇌와 그로 인한 문화가 없다면 밈은 존속할 수 없다. 어떤 밈은 다른 밈보다 전파력이 크고 때로는 수백 수천 년을 살아남는다. 신이나 종교가 대표적이다. 우리가 인터넷을 통해 만들고 퍼뜨리는 밈은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유전자가 서로 경쟁하듯 밈 또한 경쟁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의 두뇌 용량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도킨스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예컨대, 밈의 성공은 사람들이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전하기 위해서 얼마만큼의 시간을 사용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고 가정하자. 그 밈을 전달하려는 것 이외에 사용된 모든 시간은 그 밈의 입장에서 보면 시간 낭비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하여 같은 날 공개되는 수많은 노래, 개봉하는 영화, 방영하는 드라마 등이 우리의 한정된 시간과 집중력을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윤석열 후보와 극적인 재결합을 이룬 후, 국민의힘은 ‘밈 정치’에 큰 힘을 기울이고 있는 듯하다. 이준석 스스로가 ‘멸공 밈’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제동을 걸긴 했지만, 그 외의 메시지를 볼 때 그러한 방향성은 뚜렷해 보인다. ‘여성가족부 폐지’라는 일곱 글자 메시지를 내놓았던 것도 그렇고, 그 후 ‘병사 봉급 월 200만 원’이라는 단문을 제시한 것도 그러하다. 구체적인 내용과 설명을 붙이지 않는다. 대중이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전파할 수 있도록, 아주 짧은 밈으로 승부하는 전략이다.
온라인에서 국민의힘 지지층의 반응은 즉각적이고 우호적이었다. 열렬하게 ‘멸공 챌린지’에 참여하는 이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여성가족부 폐지’ 딱 한 줄에는 40분 만에 1000개가 넘는 댓글이 달렸다. 심상정 정의당 대선후보는 ‘여성가족부 강화’라는 한 줄 메시지를 올리기도 했다. 직접적인 경쟁 상대가 등장할 만큼 윤석열의 밈이 성공했다는 방증이다.
수세에 몰려 있던 윤석열의 선거 운동이 공세로 돌아섰다는 평가도 나온다. 여론조사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1월 10일까지의 조사 내용들을 종합해보면 지지율 역시 반등했거나 하락세를 멈춘 듯하다. 윤석열과 손잡은 이준석의 ‘밈 정치’, 과연 대성공일까.
그렇게 단정 짓기는 어려울 듯하다. 앞서 말했듯 밈은 바이러스와 유사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 모든 바이러스는 전파력이 강할수록 치명도가 약해진다. 독성이 강해 숙주를 빨리 죽이는 바이러스는 널리 퍼질 수가 없는 것이다. 반대로 아무리 독한 바이러스라고 해도 여러 차례 변이를 거치며 전파되다보면 치명률은 줄어들게 된다. 코로나19 바이러스를 떠올려보자. 초기에는 사망률이 매우 높았지만 오미크론은 그렇지 않다. 전파력은 매우 빠르지만 초기 변이에 비해 치명률과 사망률이 많이 약화됐다. 숙주를 타고 옮기는 자기 복제자의 숙명이다.
밈 또한 마찬가지다. 밈은 정신에 퍼져나가는 바이러스다. 원래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동질적 집단 내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는 밈은, 그 외의 집단에 잘 전파되지 않는다. 때로는 반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육체에 전파되는 바이러스와 마찬가지다. 널리 퍼지기 위해서는 그 치명률 혹은 독성을 줄여야 한다.
이준석이 멸공 밈의 확산에 제동을 건 것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 가능하다. 같은 지지자들 내에서 보면 흥겨운 놀이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국민의힘 기존 지지층을 넘어서는 유권자들에게는 그 설득력이 급격하게 떨어진다. 김종인 전 국민의힘 총괄선대위원장이 멸공 챌린지 참여자들을 두고 “성향이 원래 그런 사람들”이라며 부정적인 코멘트를 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선거를 전체 국민을 상대로 해야지 특정 계층만 갖고 선거를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왼쪽)와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1월 3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한국거래소에서 진행된 2022년 증권·파생상품시장 개장식에서 박수를 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
‘탈모 밈’으로 반전을 꾀했던 이재명의 선거운동 역시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일각에서 탈모 치료에 건강보험을 적용하는 방안이 지닌 재정 문제를 지적하자 밈의 정치가 급속히 약화됐다. 윤석열의 밈 정치 역시 마찬가지다. 멸공 논란은 여당과 야당 사이에서 방황하던 중도 표심을 멀어지게 한다. “원래 그런 사람들”끼리 열광하는 분위기가 연출되면 ‘굴러온 돌’들은 어색할 수밖에 없는 이치다. 밈의 정치학이 가지는 한계다. 일종의 ‘인사이더 조크’로 작동하기에 ‘우리 편’과 ‘남의 편’의 경계선을 그어버린다. 몇몇 인터넷 커뮤니티, 특히 남자 유저들이 많은 커뮤니티의 분위기만 따라가다 보면, 오히려 큰 낭패를 볼 수도 있다.
인터넷 밈은 선거 분위기를 띄우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우리 편’끼리 서로 기를 살리는 데 적격이다. 그러나 인터넷 밈에만 의존해서는 선거를 치를 수 없다. 지금부터라도 국민 전체에 소구력을 지니는 대안과 구호를 끌어내고, 유권자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두고 설득해 나가는, 그런 선거를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