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초의 자본주의는 혁신적 이념
● 공화당 트럼프의 反세계화 기치
●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의 복지국가
● 존 듀이는 복지에 ‘파시즘’ 우려
● ‘진보’ 등에 칼 꽂은 여성주의2021년 7월 2일 당시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서울 마포구 박정희 기념재단을 방문해 전시물을 둘러보고 있다. [윤석열 캠프 제공] |
“국민의힘과 정치철학이 같다.”
지난해 6월
29일
대선 출마를 선언한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기자들에게 꺼낸 말이다. 이날 윤석열은 “인류 역사를 봐도 자유가 보장된 도시는 번영을
이루고 강했다”며 자유에 대한 신념을 밝혔다. “민주주의는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고 국가 헌법도 개인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점에서 한계를 갖고 멈춰서야 하는 지점이 있는 것이지 다수결이면 다 된다는 철학에는 동의할 수 없다”는 부연 설명이
뒤따랐다.
보수의 철학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우리가 흔히 기대할 답변도 이와 같다. 자유와 평등을 대립하는 가치로 놓고
자유에 더 큰 비중을 둔다거나, 시장 경제와 사회 복지 중 전자를 중시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 분단국가여서 북한
문제를 빼놓을 수 없기도 하다. 진보로 분류되는 정치 세력은 북한과 대화를, 보수 진영은 군사력에서 북한을 압도해 평화를 누리는
것을 우선 과제로 삼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관점이 ‘틀렸다’고 볼 수는 없다.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보더라도
그렇다. 보수로 분류되는 정치 세력은 자유시장과 경쟁, 군사적으로는 강경한 태도를 선호한다. 페미니즘을 비롯한 성(性) 정치와
문화적 측면에서는 전통의 가치를 옹호한다. 반면 진보 세력은 시장의 실패를 국가가 나서서 해결해야 한다는 태도를 견지하고 군비
축소를 주장하며 페미니즘에 우호적인 경향을 보인다.
물론 이렇게만 바라보는 것을 전적으로 옳다고 하기도 어렵다.
역사적 관점뿐 아니라 현재적 의미를 놓고 보더라도 그렇다. 예컨대 자유시장경제를 추구하는 것은 보수가 아니라 진보의 가치에 부합할
수 있다. 사회복지 역시 진보 진영의 전유물로 보기 어렵다. 자본주의와 사유재산권, 제국주의, 종교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
심지어 페미니즘 같은 주제도 마찬가지다. 시대와 상황과 맥락에 따라 이러한 철학적 주제는 진보의 도구가 되기도 했고 보수의 무기로
작동하기도 했다.
2021년 6월 29일 당시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서울 서초구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에서 대선출마 기자회견을 마친 뒤 취재진의 질문을 받고 있다. 이날 그는 국민의힘 입당 여부를 묻는 질문에 “국민의힘과 정치철학이 같다”고 답했다. [사진공동취재단] |
몽테스키외의 낙관
자본주의는 진보 이념일까 보수 이념일까.
20세기 중후반을 넘어
21세기를 사는 이들이라면 ‘보수의 이념’이라고 생각하게 마련이다. 오늘날 자본주의란 노동력을 착취하고 자연을 파괴하는 기업들이 무제한적 이윤을 추구하는 것으로 치부되고 있다.
17세기
후반에는 그렇지 않았다. 당시 유럽, 그 중에서도 최고 선진국이던 프랑스는 절대 왕정 시대였다. 임금의 변덕에 따라 손바닥
뒤집듯 경제 정책이 달라졌고 혼란이 발생했다. 다른 유럽 국가 사정도 비슷했다. 왕이나 군주는 충동적이고 감정적인 이유로 전쟁을
벌이며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자의적 세금을 걷고 무절제하며 방탕한 사치에 빠지기 일쑤였다.
그러한 맥락 속에서
자본주의, 그 중에서도 핵심인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합리적 경제인’이라는 개념은 당대의 식자층에게 바람직하고 유익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군주가 경제적 이해관계의 제약을 받아 충동적, 자의적, 돌발적 행동을 하지 못하거나 적어도 자제한다면 국가 구성원
전체가 예측 가능한 삶을 살며 더 큰 풍요와 평화를 누릴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이 퍼져나갔다.
당대를 풍미한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에 대한 낙관적 사고는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의 한 문장에 잘 축약돼 있다.
“정념이 사람들에게 악인이 될 생각을 불어넣는데도,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이 이익인 상황에 있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다행스러운 일이다.”
몽테스키외, 그와 동시대인이던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자 제임스 스튜어트 등에게 있어 자본주의란 우리를 혼돈과 폭력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일종의 해독제로 여겨진 셈이다. 요컨대 태초의 자본주의는 ‘진보적 이념’이다.
자본주의를 진보 이념으로 여기는 관점은 뒷 세대인 애덤 스미스의 시대부터 비판과 회의에 직면했다.
19세기에 이르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유행하면서 완전히 뒤바뀐 처지에 놓이게 된다(더 자세한 논의를 원하는 독자는 엘버트
O. 허시먼 지음, 노정태 옮김, ‘정념과 이해관계’(후마니타스 펴냄)를 참고할 수 있다).
오늘날 자본주의, 특히 국경 없는 자유 시장을 바라보는 관점을 생각해보자. 영국의 브렉시트(
Brexit),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잘 보여주고 있다시피, 오늘날의 ‘보수’ 정치는 자본주의의 필연적 귀결인 세계화에 부정적
태도를 취한다. 반대로 미국의 민주당이나 영국의 노동당은 국경을 넘어 상품과 노동력이 자유롭게 오가게 함으로써 기업 이윤의
극대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자본주의적 입장을 견지한다. 현재 지배적 자본주의 시스템에 ‘보수’가 반대하고 ‘진보’가 찬성하는 이상한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브렉시트나 트럼프에 대해 찬반 논의를 벌이는 것은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여기서는 다만
자본주의는 보수,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는 진보 같은 식의 단편적 사고방식이 갖는 한계를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할 따름이다. 그와 같은
경직된 사고방식에 갇혀 있는 한 보수에게도 진보에게도 밝은 정치적 미래는 오지 않는다.
복지 강화로 이어진 박정희의 결단
그
어떤 이념도 그 자체만으로는 진보적이거나 보수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진보성과 보수성을 이념의 속성으로 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시대와 상황의 맥락에 따라 어떠한 이념이 진보적으로 혹은 보수적으로 작용할 뿐이다. 우리는 심지어 이와 같은 역설을
‘복지국가’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국가에 의해 주도되는 사회 복지는 진보의 이념인가, 보수의 이념인가. 이
주제에 해박한 독자라면 독일의 철혈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이름을 떠올릴 것이다. 노동자의 양로금이나 건강, 의료 보험제도
같은 복지 제도를 세계에서 가장 먼저 시행한 사람이 바로 비스마르크다.
그는 어떤 기준을 놓고 보더라도 진보적 인물이
아니다. 독일 제국의 영광을 꿈꾸었고, 민주주의에 반대했으며, 통일된 독일의 군사력을 극대화하는 것을 지상 과제로 삼았다.
오히려 그런 비스마르크였기에 복지 제도의 필요성을 일찌감치 간파하고 특유의 추진력으로 밀고 나갔다.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말 그대로
‘강한 군인들’이 필요하며, 튼튼한 군인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잘 먹고 잘 자라난 아이들과 의료 체계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보수주의자가 오히려 시장질서가 아닌 국가 주도의 복지 체계를 강화하는 역설은 우리도 경험한 바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결단으로 마련된 현행 의료보험 체계가 그렇다.
1970년대
대한민국은 영국처럼 국가가 엄청난 규모의 공공의료 체계를 운영할만한 여유가 없었지만 북한과의 군사적 대치 상황에서 국민의 건강을
지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그래서 박정희는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의료를 어떤 면에서 보자면
‘사회주의적’으로 바꿔버렸다. 온 국민을 국가가 운영하는 단일한 의료보험에 가입시킨 후, 병원은 일부 비보험 항목을 제외하면 오직
그 의료보험을 통해서만 돈을 받도록 강제한 것이다.
다양한 방면에서 논란이 있는 주제다. 한국의 의료보험은 환자의
의료 접근성을 폭넓게 확보하는 동시에 의사들에게도 일정하게 치료 대상과 항목에 있어 자유를 보장했다. 공공성을 강화하면서도 병원에
대해 온전히 통제 일변도의 정책을 펴지는 않은 셈이다. 그런 면에서 다른 나라에서도 참고와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성공 사례가 돼
있다. 즉 사회복지와 의료보험 같은 주제에서 보수와 진보는 무 자르듯 나뉘지 않는다. 변증법적으로 서로 자리를 바꿔가며
움직인다.
국가 주도 복지에 대해 ‘파시즘’이라는 날 선 비판을 한 철학자도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진보적인 실용주의
철학자로 알려진 존 듀이다. 듀이가 볼 때 국가 중심의 복지 체계는 파시즘과 다를 바 없다. 국가가 국민을 복지의 대상으로 삼기
위해서는 모든 정보를 독점하고, 국민의 필요를 파악해 그것을 다시 국가가 나눠주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아무리 선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한들 국가의 힘이 그렇게까지 강해지는 것은 듀이가 볼 때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듀이 스스로는 사회 진보와 교육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았지만 국가가 복지를 독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 셈이다.
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 한국의
군인 출신 대통령 박정희 같은 보수주의자는 온 국민을 대상으로 한 의료보험과 사회 복지를 구상하고 실행했다. 반면 미국의
대표적인 진보 철학자 듀이는 국가가 국민의 삶을 책임진다는 식의 복지를 ‘국가 사회주의(
state socialism)’라
부르며 비판적 태도를 견지했다. 그는 자유롭고 개방적인 교육의 가치를 역설하며 여성의 정치적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해온
당대에 손꼽히는 ‘남성 페미니스트’ 중 한 사람이다. 하지만 국가가 복지를 이유로 개인의 삶에 과도하게 간섭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페미니즘은 한쪽의 전유물 아니다
여성 참정권 운동가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자서전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를 썼다. [현실문화 제공] |
페미니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시각을 적용해볼 수 있다. 특히 오늘날 한국에서 페미니즘은 진보 진영의 전유물로 여겨진다. 물론 대체로 틀린
말은 아니지만 페미니즘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상황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페미니즘은 그 출발부터 보수와 진보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정치적 의제로서 영역을 키워왔기 때문이다.
20세기
초 영국. 당시 여당은 자유당이었다. 상대적으로 개혁적이고 온건하며 사회 변화를 추구하는 정당이었다. 제1야당은 보수당으로,
여성 참정권 운동에 당연히 우호적이지 않았다. 그 속에서 여성 참정권 운동가였던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고민에 빠졌다. 자유당은
언제나 말로는 여성 참정권을 옹호한다고 하지만, 언제 투표권을 줄 것이냐고 물어보면 늘 ‘나중에’라는 답만 했기 때문이다.
팽크허스트가
볼 때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이 약속을 어기는 자유당을 심판하지 않고 ‘비판적지지’만 하고 있는 한 그 ‘나중에’는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었다. 자유당으로서는 여성 참정권을 보장하느니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의 에너지만 쏙 빨아먹은 후 야당인 보수당 핑계를 대며
참정권을 주지 않는 게 더 이득일 테니 말이다. 한국에서도 출간된 팽크허스트의 자서전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를 인용해보자.
“자유당은 여성이 투표권을 혹시 얻게 된다 해도 자유당을 통해야만 하는데, 자유당을 공공연히 적으로 돌리는 여성들에게 투표권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며 비난했다.”
마침
보궐선거로 의석 하나가 기로에 놓였고, 그 의석을 자유당이 보수당에 빼앗기면 여야가 바뀔 상황이었다. 그런 중요한 선거에서
팽크허스트는 자유당 낙선운동에 돌입했다. ‘보수당으로 정권이 바뀌는 한이 있더라도 상관없다, 여성 참정권 운동의 정치적 파괴력을
보여주는 것이 먼저다’라고 여긴 셈이다. 서프라제트(선거권을 쟁취하려는 여성들) 운동은 교양 있는 중산층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었고 그 중 대부분은 자유당 지지자였기에 팽크허스트의 방향 전환은 내부에서 만만찮은 저항에 부딪혔다.
팽크허스트는
물러서지 않았다. 서프라제트는 자유당 낙선운동을 가열차게 전개해 나갔다. 실제로 자유당은 선거에서 졌고 보수당이 집권했지만 세상은
자유당의 협박처럼 굴러가지 않았다.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의 정치적 파괴력이 입증됐기에, 오히려 여성 참정권 논의는 이전보다 훨씬
신속하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앞선 뷰파인더 칼럼(윤석열과 보수여, ‘이대남 다 걸기’ 초강수 아닌 惡手)에서
말했던 것과 연장선상에 있는 논의다. 페미니즘을 ‘진보의 전유물’로 보는 발상은 역사적으로 옳지 않고 정치적으로도 현명하지
못하다. 페미니스트들 역시 특정 진영과 정치적 입장을 반드시 함께해야 한다는 강박 혹은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다.
여성주의는 ‘진보’의 등에 칼을 꽂고 ‘보수’의 손을 들어주면서 비로소 독자적인 정치적 의제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윤석열과 자유시장주의
‘주당
52시간
노동제를 철폐해야 한다.’ ‘가난한 사람이라면 품질이 떨어지는 식품을 사서 먹을 수도 있게 해야 한다.’ 정치 초년생 윤석열을
곤란하게 했던 문제의 발언들이다. 언론에서 축소, 과장, 왜곡한 측면도 있을 것이지만 우리는 이 각각의 발언을 관통하는 맥락을
더듬어볼 수 있다. 보수 진영에서 당연하게 여기는 경제, 사회, 정치철학적 태도를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대선후보가
된 윤석열이 위와 같은 발언을 공식 석상에서 한 것은 그의 내면에 자유시장주의에 대한 신념이 확고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보수정당인 국민의힘의 대선후보로서 윤석열이 적합한 인물인지 근심하던 기존 지지층에는 퍽 안심이 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중도층의
눈에는 그렇지 못했다. ‘보수주의=자유시장’이라는 공식에 함몰돼 현재 우리가 겪는 시장의 실패와 부작용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못 본
척 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하는 목소리가 제기됐다.
그러한 우려에는 근거가 없는 게 아니었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2011년 서울시의회를 통과한 무상급식 조례안에 반대하며 주민투표를 시행했다가 투표율
33.3%를
넘기지 못해 자진사퇴한 사례를 떠올려보자. 세련된 이미지에 걸맞게 서울시 행정을 처리해나가던 그가 ‘부잣집 아이들에게도 밥 주는
무상급식에 반대한다’며 주민투표라는 초강수로 맞섰다. 그러자 상당수의 서울시민은 냉소를 넘어 분노했다. 심지어 당시 한나라당(현
국민의힘)의 지지층마저 이탈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평일에 기꺼이 시간을 내 투표소에 갈 만큼 한가한 시민은 그리 많지
않았다. ‘보수주의=복지 반대’라는 단편적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교조적 태도를 보인 오세훈의 정치적 악수(惡手)는 ‘안철수 현상’과
맞물려 서울시장 박원순을 낳았고, 이후 서울시를 기반으로 민주당은 정권 탈환에 성공했다.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요,
사회복지는 사회복지다. 진보의 페미니즘이 있다면 보수의 페미니즘도 있다. 진보의 철학, 보수의 철학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이번
선거는 어떤 결과가 나오건 정치권의 지각변동을 불러올 것이다. 그 과정에서 국민의 삶을 위해 유익한 대안을 내놓는 정치 세력과
이념을 갖게 되기를 희망한다.
노정태● 1983년 출생●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