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26

노무현의 라면, 윤석열의 김치찌개는 경호 대상인가

노무현의 라면, 윤석열의 김치찌개는 경호 대상인가

[노정태의 뷰파인더] 대통령 위에 있는 경호처

● 尹 스텐팬 계란말이의 운명
● 구중궁궐에서 외로웠던 盧
● 무소불위 차지철이 빚은 실패史
● 민주화 이후에도 ‘밀착권력’
● 뻔한 무속 공세나 펴는 민주당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3월 23일 서울 종로구 통의동 집무실 앞에 설치된 프레스다방을 찾아 취재진과 즉석 차담회를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윤석열의 스텐팬 계란말이.’ 대선 과정에서 방송을 통해 공개된 후 많은 이를 놀라게 한 ‘사건’이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취미 겸 특기는 다름 아닌 요리. 오랜 세월 독신으로 살면서 술을 즐겨온 중년 남자답지 않게, 그는 본인과 배우자 김건희 코바나컨텐츠 대표의 식사를 직접 준비해왔다. 깊은 맛이 나도록 끓인 김치찌개에 각 잡힌 계란말이. 누가 봐도 소주 안주 같지만 공깃밥을 놓으니 그럴듯한 가정식 정찬이 됐다. 윤석열을 지지하지 않던 사람들도 감탄한 ‘윤식당’이다.

3월 23일, 서울 종로구 통의동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사무실. 윤석열은 임시로 마련된 기자실에서 잠깐 티타임을 가졌다. 요즘도 ‘혼밥’ 안 하느냐는 질문에 “아침은 혼자 먹지만 개들이 먹던 걸 달라고 해서 나눠준다”고 답한 윤석열은, 서울 용산에 대통령실이 열리면 구내식당을 이용해 김치찌개를 대량 조리해 기자들에게 대접하겠다는 약속도 했다. 물론 그 많은 양을 손수 할 수는 없을 테고, 말하자면 본인이 조리장이 돼 감독한다는 뜻이겠지만, ‘윤식당’을 재개장하겠다는 의지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그는 후보 시절에도 직접 만든 음식을 시민에게 대접하는 콘셉트의 유튜브 콘텐츠 ‘석열이형네 밥집’을 공개한 바 있다.

만약 윤석열이 통상적인 경로를 밟아 청와대에 들어갔다면 어땠을까. 다른 건 몰라도 한 가지만큼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윤식당’ 재개장은 불가능하다. 아니, 당분간 폐업이다. 윤석열의 스텐팬은 5년간 계란말이뿐 아니라 그 어떤 요리도 하지 못한 채 잠들어 있어야 한다. 대통령의 업무가 과중하고 바빠서가 아니다. 대통령과 그 가족은 취사를 위해 불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요리는 고사하고 라면조차 끓이지 못한다.

어째서일까. 법으로 금지돼 있는가. 그렇지는 않다. 단, 대통령경호처의 경호 규칙에 위반된다. 경호처는 대통령과 가족이 불을 쓰지 못하게 한다. 이유는 늘 그렇다시피 ‘대통령 경호 목적’이다. 대체로 열 살 정도면 자기 손으로 라면을 끓이기 시작하는 것이 한국인의 인생이지만, 국가 권력의 최고 정점에 오른 사람과 그 가족은 ‘위험하다’는 이유로 냄비에 물 붓고 불 켜는 단순한 행동조차 하면 안 된다. 오늘은 바로 이 문제, 경호와 민주주의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경호실에 사정했지요, 한번만 봐달라고…”
20031119일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부인 권양숙 여사의 배웅을 받으며 관저를 나서고 있다. [동아DB]
대통령보다 위에 있는 대통령 경호 규칙. 꼬리가 개를 흔드는 것 같지만, 이는 하루 이틀 된 일이 아니다. 심지어 군인 출신 대통령 전두환도 그랬다. ‘신동아’ 2007년 5월호에 실린 ‘전직 경호원들이 털어놓은 대통령 경호 비화’의 내용에 따르면, 당시 대통령 관사는 호텔 객실처럼 취사시설을 갖추지 않았다. 대통령 가족은 검식관이 마치 조선시대 기미상궁처럼 검식을 마친 음식만 먹을 수 있었다. 그러니 요리사와 검식관이 퇴근하고 난 후에는 무엇도 먹을 수 없어서, 전두환의 자녀들은 하교하자마자 청와대로 와야 했지만 밤에는 라면조차 먹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는 민주화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자타가 공인하는 ‘서민 대통령’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일화. 그는 라면 마니아였다. 출출해도 라면, 심심해도 라면, 해외에 나가서도 라면을 먹었다. 200610월도 그랬다. 경북 김천에 갔다가 대통령 전용 KTX 열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 그는 수행참모들에게 ‘특별 메뉴’가 준비돼 있다며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나온 음식은 라면. 실망하는 이들에게 대통령은 이런 설명을 들려줬다.

​​“달리는 열차에서 먹는 라면 맛이 어떻습니까? 맛있지요? 대통령 빽 아니면 이런 맛 볼 수 없어요! 오늘따라 라면이 먹고 싶어서…. 서울 올라올 때에는 열차에서 저녁식사로 라면 먹을 수 없냐고 물었더니, 경호실에서 안 된대요. 그래서 사정했지요. 한번만 봐달라고….”

경호실에 따르면 달리는 열차에서 컵라면 정도는 괜찮지만 우리가 흔히 먹는, 냄비에 면을 넣고 삶는 라면은 안 된다. 안전 문제 상 매우 위험하다는 것이 그 이유다.

독자 여러분은 이 설명이 납득이 되시는가. 물론 열차에서 부탄가스 등 직접 불을 사용하면 위험할 수 있다. 하지만 대통령이 식사를 하는 공간은 조리를 하는 공간과 떨어져 있다. 불꽃이 발생하지 않는 전열 조리기구를 사용해 라면을 끓인다면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은 더욱 희박하다. 설마, 누군가 대통령에게 뜨거운 라면을 끼얹는 테러를 저지를까봐 안 된다는 걸까.

실제로 경호처는 대통령과 그 가족이 요리를 하지 못하도록 막아왔다. 노무현 스스로가 그러한 처사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내 손으로 라면 하나 못 끓여먹는 게 말이 되느냐는 것이었다. 그런 불만을 필자는 여러 경로를 통해 전해들은 바 있다.

물론 최근 한 전직 청와대 요리사는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노무현이 주말이나 일과 시간 후 자기 손으로 라면을 끓여 먹었다고 이야기했다. 어쩌면 임기 말에 이르러 경호처가 다소 느슨한 태도를 취한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자기 손으로 편하게 라면 하나 끓여먹지 못했던 노무현은 큰 불만을 느꼈고, 이는 분명한 사실로 남아 있다. 마치 구중궁궐에 갇혀 있던 ‘마지막 황제’의 푸이처럼, 그는 외로웠을 것이다.

비서 노릇까지 겸하는 경호원?
대통령을 쥐락펴락하는 대통령경호처의 힘. 이 권력의 기원은 우리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바와 같다. 대한민국은 북한과의 전쟁을 통해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나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휴전 이후에도 북한과 지속적으로 대치했고, 북한은 여러 방향으로 대한민국 대통령의 목숨을 노렸다.

육영수 여사의 시해로 마무리된 문세광의 1974년 광복절 저격을 놓고는 그 배후에 대해 논란이 있다. 하지만 김신조 일당이 휴전선을 넘어 북한산을 타고 넘어왔던 사건이라거나, 전두환을 노리고 벌어졌던 아웅산 테러 사건 등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북한이 일종의 비정규전투를 통해 대한민국 대통령을 살해하려 든 것이다. 군인 출신 대통령들이 자신의 심복을 경호실에 앉히고 일종의 호위부대 격으로 굴리면서 경호실이 권력기관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전혀 놀랍지 않은 일이다.

문제는 민주화 이후다. 북한으로부터의 직접적 위협이 크게 줄어든 후에도 경호실의 권한과 역할은 줄어들지 않았다. 박정희 유신독재 시절의 차지철 경호실장처럼 대놓고 권력을 휘두르는 경호실장이 나오는 세상이 끝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앞서 말한 ‘라면 끓이기’의 사례처럼, 대통령경호처는 대통령을 경호한다는 명목 하에 대통령의 동선과 행동을 미시적으로 통제하는 일종의 ‘밀착권력’으로 변모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앞서 인용한 ‘신동아’ 기사를 조금 더 읽어보자. 한 전직 경호원은 한국과 미국의 경호 시스템 차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미국 경호원은 오로지 경호만 합니다. 우리나라 경호원은 비서(의전) 노릇을 겸하거든요. 가령 대통령이 악수하지 말아야 할 사람과 악수를 하려 하면 경호원이 대통령의 손을 터치할 수 있어요. 하지만 미국은 절대 안 됩니다. 말 그대로 경호만 하는 거죠.”

이 말에서 우리는 세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2007년 당시, 한국의 대통령 경호원은 ‘대통령이 악수해야 할 사람’과 ‘악수하면 안 될 사람’을 판단할 권한을 갖고 있었다. 둘째, 대통령이 ‘악수하지 말아야 할 사람’과 악수하려 할 경우, 경호원은 그 엉뚱한 사람 대신 대통령을 제재할 수도 있었다. 셋째, 전 세계 모든 민주국가가 표준으로 삼고 있는 미국에서도 대통령을 이런 식으로 경호하지는 않는다.

세 번째 측면이 특히 의미심장하다. 미국은 지금까지 총 46명의 대통령을 선출했는데 그 중 4명이 암살당한 나라다. 누군가 미국 대통령이 되면 일하다가 비명횡사할 가능성이 8.69%나 된다. 최전방 전선에 투입된 군인이 아닌 다음에야 경험하기 힘든 사망률이다. 그런 미국에서조차 경호원이 대통령의 손을 터치 못 하는데, 한국에서는 왜 가능한가.

경호 목적으로 대통령과 가족이 요리를 못 하게 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퇴근 후 마트에 들러 장을 보는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의 모습을 보며 많은 이들이 부러워했다. 반면 우리나라 대통령은 자기 손으로 식칼도 못 잡고 가스레인지도 못 켠다. 대통령경호처가 ‘대통령을 지킨다’는 명분하에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대통령과 그 가족이 먹는 음식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대통령과 국가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는 명분하에, 대통령 가족을 과잉보호하며 ‘가스라이팅’하는 것 같은 인상마저 주지 않는가.

지난해 1229일 윤석열 당시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직접 만든 음식을 시민에게 대접하는 콘셉트의 유튜브 콘텐츠 ‘석열이형네 밥집’을 공개한 바 있다. [국민의힘]
용산 시대의 ‘윤식당’
오해를 피하기 위해 분명히 말해두자. 나는 한국인이다. 우리의 대통령이 안전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런 극단적인 경호 시스템이 과연 대통령에게 유익한지 의문을 표할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벌어진 일을 놓고 보면 그렇지 않다.

경호실장 차지철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가운데 대통령 박정희는 현실감각을 잃어갔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총을 뽑아 쏠 때 차지철은 박정희뿐 아니라 자기 자신조차 지키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최악의 경호 실패 사례는, 대통령 경호실의 힘이 약해서가 아니라 너무 강해서 벌어진 것이다.

단 하루도 청와대에 들어갈 수 없다는 윤석열을 두고 뻔한 무속 공세나 펴는 더불어민주당과 그 지지층의 태도를 보면 더욱 한심하다. 일부 민주당 지지자들이 ‘도사가 청와대에 가지 말라고 해서 안 가는 것 아니냐’는 식상한 흑색선전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현실은 정반대다. 최순실 사건을 보면 분명하다. 소중하게 끌어안아야 할 무속인 혹은 비선실세가 있다면 청와대로 들어가는 편이 낫다. 대통령경호처를 설득해서 그 비선 실세가 원할 때 ‘프리패스’로 청와대에 들락거리게 해주면 아무도 모른다. 지난 정권 시기에 벌어졌던 대통령경호처의 방만한 행태는 결국 박근혜의 몰락으로 이어지고 말았으니, 이 또한 대통령 경호 실패 사례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박정희 시절과 마찬가지로 경호실의 힘이 약해서가 아니라 너무 강해서, 문고리 권력의 일부로 작동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아주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 받는 자가 동일한 것이다. 그렇다면 누군가 대통령 됐다고 가스레인지에 불도 못 켜게 하는 식으로 ‘탈인간화’하는 경호 체제는 민주주의적이지 않다. 대통령은 많은 국민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지만, 그래도 국민 중 한 사람일 뿐이다. 대통령이 야근하다 1층 매점으로 내려와 직원들과 함께 전자레인지에 삼각김밥 돌려서 컵라면을 곁들여 먹으며 일해도 전혀 위화감이 없어야 진정한 민주주의다. 용산 시대의 개막과 함께 ‘윤식당’이 성공리에 재개장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노정태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2022-03-22

인수위에 여성가족부 포함시켜야

2017년 대선 당시의 일. 홍준표 후보의 자서전에서 '돼지발정제' 운운했던 대목의 논란이 커지자, 다른 후보들이 일제히 비난했다.

그 중 가장 수위가 셌던 사람은 안철수. '나는 홍준표 후보와 대화하지 않겠소'라고 TV 토론에서 선언했다.

수세에 몰려 있던 홍준표는 안철수의 그런 대응에서 활로를 찾았다. '안 후보님? 정말 나랑 이야기 안 할 거에요? 응?' 이러면서 어린아이 놀리듯 가지고 놀았고, 오히려 안철수가 외통수에 몰렸다.

여성가족부를 대하는 인수위의 모습을 보며 문득 그 무렵 생각이 든다.

여성가족부는 신뢰를 잃었다. '피해호소인' 운운하는 모습을 보며 등을 돌린 여성들도 많다.

하지만 여성가족부가 진행하던 사업 중에는 여성들에게 필수적인 것이 많다. '여성부'가 아닌 '가족부'로서 집행하던 예산도 상당하다.

그런 것들을 합리적으로 재구성, 재편성해야 한다. 또 어제 오늘 거론되고 있는 여성가족부 홈페이지 예산 등 석연찮은 대목을 확인하고 교정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그러려면 당연히 인수위 테이블에는 여성가족부 자리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여성가족부를 해체하기 위해서라도 여성가족부를 불러야 하지 않나?

'여성가족부 해체'라고 썼으니 인수위 단계에서 아예 포함도 안 시킨다! 이런 태도가, '나는 홍준표 너님과는 토론 안해!' 해버리던 2017년 안철수의 미숙한 태도와 무엇이 다른지, 생각해볼 일이다.

지난번에도 말했듯 이런 태도를 취하면 대외적으로 '안티페미 행정부'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게 된다. 그러면 외국인들이 우리나라를 어떻게 보게 될까? '석유 대신 반도체가 나오는 사우디' 정도로 취급당할 것이다. 나라망신이다.

윤석열 당선인과 안철수 인수위원장, 그 외 관계자들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한다.

2022-03-21

'광화문 시대'와 작별을 고하고 싶다

"결국 미 대사관은 이 논란이 본격화되기 전에 마련해 뒸던 정동 옛 경기여고 자리로 옮기기로 결정한다. 미국은 90년 을지로에 있던 미 문화원과 1만5117㎡에 이르는 경기여고 땅을 맞바꾸기로 서울시와 합의한 상태였다. 이 부지는 미 대사관저와 바로 맞닿아 있어 대사관과 함께 직원 숙소까지 지을 수 있는 안성맞춤의 땅이었던 것이다. 이에 미국은 포스트모더니즘 건축가로 유명한 마이클 그레이브스에게 의뢰해 지하 2층, 지상 15층짜리 대사관 설계까지 마친다.

하지만 만사 쉬운 일은 없는 법.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순조로워 보였던 대사관 이전 계획은 돌연 암초를 만났다. 대사관을 지으려던 경기여고 자리가 역사적 유적지로 밝혀진 까닭이다. 조사 결과 문제의 땅에는 1933년까지 조선시대 역대 임금의 어진(御眞·임금의 초상)을 모셨던 선원전(璿源殿)과 왕과 왕비의 혼백을 모신 흥덕전(興德殿) 등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시민단체들은 “조선시대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공간 위에 외국 대사관을 짓는다는 건 있을 수 없다”며 강력하게 반대했다. 결국 미 대사관은 “한국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경기여고 이전 계획을 포기한다”고 2003년 공식 발표하기에 이른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1741863

경기여고는 순종이 어명으로 만든 학교임. 조선 왕실에서 '야 너네 이 땅 써라'해서 그 땅 위에 지었음. (사진 속 빨간 동그라미)

그러니까 어떤 면에서 보면, 경기여고 자체가 가장 중요하고 또 유의미한 '조선시대의 유산'이었는데, 경기여고는 그 땅 버리고 강남으로 훌훌 갔음.

그런데 그 자리에 미국이 대사관 좀 지으려고 하니까 뭔 일이 벌어지냐? 위에 인용된 칼럼에서 잘 이야기하고 있죠. 애초에 그 자리에 있었는지 없었는지 알바 아니었던 유물 나왔다고 '시민단체'들이 들고 일어남.

결국 미국 대사관은 대사관저와 딱 붙여서 멋들어지게 지어보려던 건물 계획 다 포기하고, 용산 미군기지 옆으로 가려고 했는데, 미군기지 이전에 차질이 생기면서 광화문 한복판에 뒈지게 낡은 건물에서 영원히 살고 있음.

그래서 그 경기여고 땅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직도 그냥 허허벌판임(2030년대까지 '선원전터 복원'을 한다는데 그게 문화재로서 유의미함? 그렇게 믿을 사람은 유홍준 말고 아무도 없음).

이게 뭐야? 뭐하는 짓이야? 아무도 모름. 문화재를 지키자! 하면서 그 땅 기꺼이 쓸 유일한 소비자를 쫓아내놓고, 그냥 비워두고 있음. 이런 비합리적인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단 하나, 미국이 싫어서. 혹은,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갑자기 이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 청와대에서 벗어나 용산으로 간다는 결정의 문화사적 의의를 짚어보기 위함.

대통령이 청와대를 버린다? 이건 청와대만의 문제가 아님. '광화문 시대'에 종지부를 찍는다는 의미도 됨.

'광화문 시대'란 무엇인가? 김영삼이 중앙청을 박살내면서 시작된 시대. 민족주의적 감성이 모든 합리와 이성과 계획의 상위 개념으로 날뛰고, 그 누구도 그것을 감히 말리지 못했던 시대. 문화재청 같은 일개 '청'이 민족의 제사장 행세를 하며 나라를 쥐락펴락했던 시대.

일본과 전쟁을 해서 독립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역사 바로세우기'라는 명목 하에 역사 왜곡을 하는 게 옳은 일처럼 여겨졌던 시대.

'민족정기'를 세우고 '자존심'을 되찾기 위해 억지 부리고 악다구니 쓰는 게 뭐 좋은 일처럼 여겨졌던 시대.

이제 좀 새로운 세상에 살아보고 싶다는 소리. 그 뭐 광화문의 함성이니 종로의 정취니 피맛골의 그리운 풍경이니, 다 그냥 '즐기는 문화'의 범위로 넘기고, 우리는 갑시다 미래로.

청와대에 남으면 윤석열도 결국 ‘왕’이 된다

청와대에 남으면 윤석열도 결국 ‘왕’이 된다

[노정태의 뷰파인더] 대통령 집무실 옮겨야 하는 까닭

● 풍수 언급한 건 승효상·유홍준
YS·DJ·盧도 광화문으로 이전 구상
● ‘시민과의 만남’은 집무실 목적 아냐
● 文은 ‘창성동 청와대’ 속사정 알까


현재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청와대 전경. [김동주 동아일보 기자]
미신과 풍수에 따라 청와대를 옮기려 한 정권. 어떤 정권이었을까? 문재인 정권이다. 공식적인 기록에 따르면 그렇다. 201710월, 건축가 승효상은 청와대 ‘상춘포럼’에서 “청와대 터가 풍수상 문제가 되니 옮겨야 한다”고 했다. 친(親)민주당계 인사인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19대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가 승리한 뒤 ‘광화문대통령시대위원회’ 위원장이 돼 청와대 이전을 논의하다가, 2019년 1월 4일 공약 파기를 발표했다. “청와대 주요 기능을 대체할 부지를 광화문 인근에서 찾을 수 없다”면서도 “풍수상 불길한 점을 생각할 적에 옮겨야 한다”는 점을 덧붙였다.

퇴임을 앞둔 문재인 정부를 먼저 비판하면서 글을 시작하는 이유가 있다. ‘윤석열 무속 논란’의 백해무익한 면을 지적하기 위해서다. 민주당 지지자들이 ‘윤석열 무속 논란’을 진지하게 거론하는 모습을 보면 어이가 없다. 방귀 뀐 자가 성 낸다는 속담이 떠오를 지경이다.

대통령 집무실 이전은 하루 이틀 된 논의가 아니다.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 당시 민주자유당 후보는 광화문 청사에 집무실을 마련하겠다고 공약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청와대는 여러 건물로 이루어진 시설이다. 1990년 춘추관 및 관저, 1991년 본관이 완공됐다. 그러니까 김영삼은 콘크리트가 속까지 다 굳지도 않았을 시점에 이사를 가네 마네 했던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 노무현 전 대통령도 당선 직후 광화문 청사로 집무실을 옮기는 방안을 논의했으나 실행하지는 못했다.

청와대에서 나와 새로운 집무실을 마련하고자 한 것은 문재인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청와대 용산 이전’이라는 이슈를 ‘윤석열 무속 논란’으로 묻어버리는 것은 옳지 않다. 수많은 대통령 당선인이 청와대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가 뭘까?

사람 만나면서 피해야 하는 대통령의 모순
2019년 1월 4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유홍준 당시 ‘광화문대통령시대위원회’ 위원장이 브리핑을 하고 있다. 이날 유 위원장은 “청와대 주요 기능을 대체할 부지를 광화문 인근에서 찾을 수 없다”면서도 “풍수상 불길한 점을 생각할 적에 옮겨야 한다”는 점을 덧붙였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직접적으로 ‘풍수’를 거론했던 문재인 정권을 빼고 나면, 대부분 정권이 탈(脫) 청와대를 외친 이유는 비슷하다. ‘국민과의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청와대가 경복궁 뒤편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보니 국민들로부터 멀어지고 민심의 동향으로부터 어두워져, 결국 전직 대통령이 구속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등 비극이 이어지고 있다는 소리다.

얼핏 들으면 그럴듯하다. 그런데 그런 이유라면 대통령이 스타벅스 같은 커피숍에서 노트북 펴놓고 일하는 건 어떨까? 아니면 지하철 노선 세 개가 지나가는 서울고속버스터미널 건물로 청와대를 옮기는 건 어떨까?

말만 들어도 헛웃음이 날 것이다. 그렇다. ‘시민과의 만남’은 대통령 집무 공간의 목적이 아니고, 그것을 이유로 대통령 집무 공간을 옮겨서도 안 된다. 완전히 경호를 포기하지 않는 한 대통령이 ‘일반 시민’과의 접근성을 높이는 것은 가능하지 않고, 사실 바람직하지도 않다. 대중적 접근성은 새로운 대통령 집무 공간 선택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소리다.

괜한 말장난을 하겠다는 게 아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대통령의 집무 공간을 옮겨야 한다는 쪽이다. 현재 대안으로 제시된 용산 국방부 안을 지지하는 편이다. 하지만 그 이유가 무엇인지 정확히 해볼 필요가 있기에 하는 이야기다. ‘대통령이 국민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라면, 용산 뿐 아니라 어디로 이전해도 부족하고, 또 부적절하다.

대통령이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은 그 정의상 ‘국민 속’에 있으면 안 된다. 대통령도 불편하고 국민도 불편하다. 그러나 동시에 대통령은 ‘사람’과의 접촉을 최대한 늘려야 한다. ‘문고리 권력’을 만들지 말아야 하고, 그러니 ‘인의 장막’에도 갇혀서는 안 된다.

대통령은 사람을 피해야 한다. 하지만 사람을 만나야 한다. 모순이다. 그런데 대부분 선진국은 어렵지 않게, 짧게는 수십 년에서 길게는 수백 년에 걸쳐 잘 해나가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또 반대로, 왜 대한민국 대통령은 계속 같은 방식으로 실패했을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청와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좀 더 진지하게 던져볼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에는 청와대가 사실상 두 개
우리는 흔히 ‘청와대’라고 하면 사진에서 본 파란 기와 건물을 떠올린다. 하지만 정치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그 건물은 청와대 본관으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잘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을 것이다. 청와대 건물은 그것만이 아니다. 청와대에 부속해 있는 건물 중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은 총 12곳. 그 중에는 ‘위민관’에서 ‘여민관’으로 이름이 바뀐 비서실도 포함돼 있는데, 그 건물만 해도 세 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통령의 집무실은 관저에 마련돼 있다. 반면 대통령의 비서들은 비서실에 있다. 그 거리만 해도 500m인데 보안상의 이유로 중간에 또 한 차례 검문을 받아야 한다. ‘문고리 권력’이 안 생길 수가 없는 구조다. 그런 불편을 해소하고자 문재인 대통령은 집권 초기 여민관 내에 집무실을 마련해 출근하면서 정부종합청사로 집무실을 완전히 옮길 계획이라 밝혔지만 결국에는 청와대에 머물고 말았다.

위에서 언급한 모든 청와대의 부속 건물 주소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1번지, 우편번호 03048. 여기까지는 흔히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에는 ‘청와대’가 하나 더 있다. 서울 종로구 창성동 67번지. 네이버·카카오 지도로 보면 건물 모양만 그려져 있을 뿐 뭐 하는 곳인지 설명조차 나와 있지 않은 곳. 딱히 명칭도 없는 그곳은 흔히 ‘청와대 부속청사’, ‘창성동 별관’ 등으로 통한다. 지난 2018년과 2019년, 사상 초유의 청와대 압수수색을 하네 마네 할 때 뉴스에 등장했던 바로 그곳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대한민국에는 청와대가 적어도 두 개 있다. 건물이 아니라 부지를 단위로 놓고 보더라도 그렇다. 서울 종로구 세종로 1번지, 우리가 아는 청와대. 서울 종로구 창성동 67번지, 가끔 뉴스에 나오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식하지도 언급하지도 않는 ‘창성동 청와대’.

여기서 또 한 가지 생각해봐야 할 문제가 있다. ‘청와대’와 ‘대통령’은 동의어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권위주의의 잔재가 남아 있는 사회에 살고 있다. 누군가 대통령이 되면, 특히 정치권 사람들은 그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지도 않는다. 심지어 ‘BH’라느니 ‘VIP’라느니 하는 식으로 부르는 이상한 관습이 21세기 대한민국에 여전히 횡행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니 본인은 대통령이 아닌데 청와대에 한 다리 걸친 사람들만 신이 난다. 한껏 부풀어 오른 자아를 뽐내며 호가호위할 수 있다. 우리가 지난 정부와 지지난 정부, 아니 1987년 민주화 이후 경험해온 수많은 측근 비리와 판단 착오, 인사 실패 등을 떠올려보자. 모두 같은 패턴이다. ‘청와대’가 어떤 판단을 내리고 결정한다. 그런데 ‘대통령’은 모른다. 권력의 단맛은 청와대가 누리고, 그 책임은 대통령이 뒤집어쓴다.

청와대의 구조를 가장 악용한 건 박근혜 전 대통령의 경우겠지만, 문재인이라고 해서 나을 건 없다. 단적으로 물어보자. 문재인은 과연 ‘창성동 청와대’에서 벌어지는 일을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조직 장악이 가능하기나 했을까? 현재 청와대는 하나가 아니다. 건물이 나뉘어 있는 것을 넘어 별도의 부지까지 사용한다. 이러한 이중구조는 대통령이 된 사람에게 득이 될까, 아니면 청와대에서 일하거나 들락거리는 대통령이 아닌 사람들에게 좋을까?

민주국가 행정수반은 ‘오피스’에 있다
현재의 건물 및 인력 배치 구조상, 대통령은 청와대에 들어가는 순간 ‘청와대’에 잡아먹힌다. 분명 대통령의 부하 직원이라고 돼있는데, 자신의 부하들을 한 곳에 모아놓고 보기도 어렵고, 누가 누구를 어떻게 통제하는지 불시에 질문할 수도 없다. 옥상옥 위의 옥상옥으로 이어지는 한없는 계단식 구조 속에 대통령은 마치 구중궁궐의 왕처럼 고립된다.

이 문제는 대통령이 아무리 시내 번화가에서 근무한다 한들 풀리는 것이 아니다. 대통령이 ‘청와대’와의 접촉면을 늘려 조직을 장악할 수 있어야 해결된다. 대통령 본인이 모든 직원을 다 파악하고, 그러한 바탕 위에서 일할 수 있어야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대통령 집무실의 공간은 비좁아야 하고 사람들끼리 서로 부대껴야 한다. A가 B와 ‘썸’을 타고 있고, C와 D가 서로 암투를 벌이고 있으며, E와 F는 공직을 벗어던지고 벤처기업을 차리고 싶어 한다는 등, 온갖 잡다한 대화가 오가는 사무실의 분위기. 그 속에 대통령이 있어야 한다. 그들의 미묘한 분위기를 파악하고 아니다 싶으면 제3자를 붙잡고 물어볼 수도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인의 장막’을 치고 싶어 하는 권력의 불나방들이 권모술수를 부릴 수 없게 된다.

1948년 첫 대통령 선거 이후 지금까지 모든 대통령은 ‘궁궐’에 있었다. 궁궐이 궁궐인 한 그 궁궐이 어디에 있건 대통령은 성공하기 어렵다. 해법은 대통령 집무실이 궁궐이 아니게 만드는 것이다. 대통령이 수많은 직원들과 부대끼며 일하는 미국의 백악관처럼, ‘오피스’로 만들어야 한다.

대통령의 일은 다른 모든 지식노동자와 마찬가지로 결국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이루어져야 마땅하다. 미국의 백악관, 영국의 다우닝가 10번지, 독일의 연방총리관저 ‘분데스칸츨러암트(Bundeskanzleramt)’ 모두 복닥거리는 사무실이다. 민주국가의 행정수반은 그런 곳에서, 마치 국민이 그렇듯, 다른 사람들과 부대끼며 일해야 한다. ‘제왕적 대통령’의 해답은 ‘일하는 대통령’인 것이다.

청와대는 애초에 ‘오피스’로 만들어진 시설이 아니다. 그 설계부터가 궁궐이다. 거대한 부지의 입구에 마치 양반댁 행랑채처럼 비서동을 배치하고, 가장 깊숙한 곳에 사저와 본관을 뒀다. 민주국가 대한민국의 최고 의사 결정 기관이지만 끔찍하리만치 봉건적이다. 분명 민주주의 국가인데 5년마다 한 번씩 선거로 왕을 뽑은 후 새 왕이 뽑히면 지난 왕의 목을 치는 ‘87년 체제’의 비극은 바로 그런 구조적 모순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다.

3월 17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인근 아파트에서 내려다본 국방부 앞 전경.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대통령 집무실을 청와대에서 국방부 신청사로 옮기는 것을 유력하게 검토하고 있다. [신원건 동아일보 기자]
87년 체제’와 ‘궁궐’
청와대를 재활용하면 되는 것이 아니냐는 반론이 있겠지만 그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세 동으로 이루어진 여민관과 창성동 별관, 그리고 대통령 관저의 업무 공간을 모두 포괄할 수 있는 단일 건물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몇 년이 필요하다. 누군가는 과감히 청와대에서 뛰쳐나와 새로운 공간에서 다른 방식으로 일하는 대통령의 선례를 만들어야 한다.

87년 체제’의 모순을 끝내기 위해서는 대통령을 ‘궁궐’에서 끌어내야 한다. 다행히 용산 국방부 청사에는 헬기 이착륙장, 지하 벙커, 그 외 필요 시설이 이미 갖춰져 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오피스’행을 지지한다.


노정태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2022-03-19

‘이대녀’들의 응징투표가 남긴 교훈… “정치는 공감과 연민으로 하는 것”

‘이대녀’들의 응징투표가 남긴 교훈… “정치는 공감과 연민으로 하는 것”

[아무튼, 주말]
[노정태의 시사哲]
판타지 로맨스 ‘왓 위민 원트’와
대한민국 남녀갈등 해법은?

멋진 남자, 하지만 나쁜 남자. 잘나가는 광고맨 닉 마셜(멜 깁슨)은 마초에 바람둥이다. 이혼한 전처가 재혼하고, 딸이 아빠를 경멸한다는 것만 빼면 아무 문제없던 닉의 인생에 급제동이 걸린다. 닉의 회사가 경쟁사의 달시 맥과이어(헬렌 헌트)를 채용하더니, 닉이 노리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자리에 앉힌 것이다. 술, 담배, 자동차 광고만 신경 쓰면 그만이던 시절은 갔다. 400억달러 규모로 커진 여성 광고 시장을 두고 싸워야 한다. 남성 우월주의자 닉의 인생이 암초에 부딪혔다. ‘여자들이 원하는 것, 그게 대체 뭐지?’

일러스트=유현호

술에 취한 채 매니큐어를 바르고 다리의 털을 뜯어내며 팬티스타킹을 신어보던 닉. 갑자기 집에 찾아온 딸 때문에 당황했다가, 그만 헤어드라이어를 켠 채 욕조에 빠지고 만다. 빠지직!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다음 날 정신을 차려보니 뭔가 이상하다. 여자들의 속마음이 들린다. 더 끔찍한 건 여자들의 ‘본심’이 자기가 생각했던 것과는 퍽 다르다는 것이다. 웃는 얼굴로 닉의 야한 농담도 받아주던 가정부는 닉을 경멸하고, 택시를 잡아주던 아파트 수위는 속으로 닉을 성희롱하고 있다.

영화 ‘왓 위민 원트’의 내용이다. 제목에 쓰여 있듯 남자는 여자의 마음을 모른다는 것이 주제지만, 좀 더 크게 볼 수도 있다. 공감(empathy)과 연민(sympathy)이라는 철학적 주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두 개념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공감은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는 것이다. 푸틴의 전쟁으로 인해 EPL팀 첼시의 구단주 아브라모비치는 재산이 동결되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푸틴 정권과 함께 호의호식했던 아브라모비치를 비난하는 사람일지라도, 갑자기 재산을 잃게 생긴 심정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것이 바로 공감이다.

연민은 좀 더 직접적이고 감성적이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추위에 떠는 길 잃은 개를 볼 때, 전쟁의 포화에 휘말린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소식을 접할 때, 때 이른 부고를 접하고 장례식장에서 유족에게 위로의 말을 전할 때, 우리는 당사자의 감정을 마치 내 것인 양 ‘느낀다’. 공감보다 훨씬 직접적이고 육체적이기까지 한 감정의 전염, 그것이 바로 연민인 것이다.

공감은 독일 낭만주의 시대부터 출현한 개념이다. 반면 연민은 18세기 영국에서 철학적으로 주목받았다. 대체 인간은 왜 도덕적으로 행동하는가? 경험주의 철학자들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데이비드 흄이 볼 때 우리의 도덕은 한낱 관습에 불과했다. 그러나 세상의 도덕률이 갑자기 잔인하고 포악하게 변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서로에게 연민을 느끼며 아끼고 배려하는 감성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애덤 스미스는 그런 관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 <국부론>의 핵심 원리다. ‘보이지 않는 손’, 말하자면 이기주의의 법칙이다. 하지만 현실 속의 사람들은 서로에게 연민을 느끼고 배려한다. <국부론>보다 먼저 펴낸 <도덕감정론>의 핵심 주제 중 하나다. “우리가 타인의 슬픔을 보고 종종 슬픔을 느끼게 되는 것은,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아무런 예를 들 필요도 없을 만큼 명백한 사실이다.” 연민은 도덕의 토대가 된다. 서로 공유하는 도덕이 있어야 사회가 성립하고 자본주의 또한 가능해진다.

공감과 연민은 서로 다르고 서로를 보완한다. ‘왓 위민 원트’로 돌아가 보자. 닉에게는 여자들의 속마음이 들린다. 공감 능력이 0에서 100으로 솟구친 셈이다. 처음에는 괴로웠지만 이내 그 잠재력을 깨달았다. 직장에서 승승장구하고 여자를 쉽게 유혹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머리로만 이해하고 접근하는 닉에게 딸은 넌더리를 낸다. 딸의 감정을 ‘이해’하고 반응했을 뿐 인간적인 교감을 하고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공감과 연민의 힘을 모두 되찾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우리의 현실은 어떨까. 진정한 공감과 연민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이해하는 척이라도 해주면 안 될까. 지난 대선 과정을 떠올려 보자. 국민의힘은 여론조사에서 큰 폭으로 앞서고 있었지만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박빙이었다. 3월 8일 여성의날을 하루 앞둔 7일,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여성들은 온라인에서 단합하는 것 같아도 오프라인 표심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도발적 발언을 한 것이 원인 중 하나다. 이재명을 지지하는 20대 여성 표가 일주일 전 여론조사에 비해 약 20%p 뛰어올랐다. 기권하거나 정의당을 찍었을 ‘이대녀’들이 더불어민주당을 찍어서 ‘응징 투표’를 한 것이다.

선거를 앞둔 정치인이 특정 유권자 집단을 비하하면 큰 대가를 치르게 마련이다. 정동영 전 장관의 ‘노인 투표 발언’, 유시민 전 장관의 ‘나이를 먹으면 뇌가 썩는다’ 발언을 떠올려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지난 서울시장 재보궐선거에서 박영선 후보가 ‘20대는 역사적 경험치가 낮다’는 발언을 했다가 응징 투표를 당한 것을 보고도 배운 게 없단 말인가. 공감도 연민도 없는 발언으로 특정 집단을 비하하는 것은 정치적 자살 행위다. 선거가 휘청거리는 것은 물론이고 발언자 본인의 정치 인생에도 두고두고 족쇄가 된다.

이번 대선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청년층 내에서 성별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정치의 역할은 그것을 이용하는 게 아니라 넘어서는 것이다. 그런데 선거 막판에 남녀 갈등에 휘발유를 끼얹는 소리를 해버렸으니,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른 것은 당연한 일. 정치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분석이 아니라 공감과 연민으로 하는 것이다. 애덤 스미스도 알던 사실을 21세기 사람들이 왜 모르는 걸까.

닉은 여자들의 마음을 읽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이제는 더 이상 땅 짚고 헤엄치듯 여자들이 원하는 것을 알아낼 수 없다. 닉에게 애정을 느낀 달시의 입장에서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 어제까지만 해도 솔메이트처럼 내 마음을 짚어내던 이 남자가 오늘은 바보 같은 소리를 하며 버벅거린다. 두 사람은 차분하게 대화하고, 오해를 풀고, 사과하고, 용서하며 서로를 향해 나아간다. ‘왓 위민 원트’는 판타지 로맨스 코미디 영화지만 공감과 연민의 힘은 진짜다. 대한민국의 남녀 갈등 역시 결국은 해피엔딩으로 이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