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4-06

자칭 민주정권의 ‘좀스럽고 민망한’ 권위주의 5년[朝鮮칼럼 The Column]

자칭 민주정권의 ‘좀스럽고 민망한’ 권위주의 5년[朝鮮칼럼 The Column]

국민이 대통령 조롱해도 내버려두는 게 진짜 ‘권위’
시민을 모욕죄로 고소한 文은 비민주적 ‘권위주의’
소위 ‘깨시민’ 덩달아 위세… 尹은 진정한 권위 누리길

 
현지 시각 지난 3월 27일, 미국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폭행 사건이 벌어졌다. 코미디언 크리스 록이 윌 스미스의 아내 제이다 핑킷 스미스의 짧은 머리를 두고 농담을 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처음에는 같이 웃던 윌 스미스, 아내의 눈치를 보더니 갑자기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급기야 무대 위로 올라가 크리스 록의 뺨을 때리고, 자리에 돌아와서도 계속 목청을 높였다. “다시는 내 아내의 이름을 꺼내지 마!”

문재인 대통령이 10일 청와대 춘추관 대브리핑룸에서 취임 4주년 특별연설을 하고 있다./연합뉴스


미국은 ‘조크’에 관대한 문화적 전통을 지닌 나라다. 여기서 말하는 조크란 모두가 적당히 기분 좋게 웃고 넘어가는 무해한 농담이 아니다. 조롱거리가 되는 사람이 감추고자 하는, 혹은 언급하고 싶어 하지 않는 치부를 드러내고 까발리며 조롱하는 것이다. 아카데미상 시상식처럼 권위 있는 자리일수록 그렇다. 당사자가 불쾌해할 뿐 아니라 때로는 듣는 이도 웃어넘기기 어려울 만큼 독한 조크가 난무한다. 연예인들만 조크의 과녁이 되는 것도 아니다. 백악관 공식 행사에 코미디언을 사회자로 부르면 대통령과 영부인을 놀림감으로 삼는다. 미국식 조크에는 성역도 없고 금기도 없다.

2017년 8월 18일 문재인 대통령 취임 100일 청와대 오픈하우스 행사에 참석한 청와대 출입기자단이 경내를 둘러보고 있다. /청와대

 
왜일까? 미국은 자유와 평등의 나라지만 동시에 권위를 존중하기 때문이다. 할리우드, 더 나아가 미국 사회가 권위를 지키는 방식이다. 중세 시대의 왕이나 권력자들이 광대를 옆에 두고 남들이 차마 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지껄이고 농담하도록 내버려둔 것과 같은 원리다. 스타들의 치부를 대놓고 언급하면서, 대통령이나 유명 인사들을 바보로 만들면서, ‘권위주의’의 긴장감을 털어버리고 ‘권위’를 세우는 것이다.

권위주의와 권위는 같은 것 같지만 다르다.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자존심’과 ‘자존감’의 차이를 떠올려볼 수 있다. 권위주의와 자존심은 남들이 알아주고, 인정해주고, 굽실거리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반면 권위와 자존감은 스스로에 대한 확신과 자부심이다.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타인으로부터 존중을 얻는다.

생각해보면 미국만 그런 건 아니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스스로를 ‘보통 사람’이라 부르며 방송과 출판 등에서 대통령을 풍자하는 걸 기꺼이 허용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그를 주인공으로 삼은 농담인 ‘YS 시리즈’까지 나왔지만 단 한 번도 싫은 내색을 비춘 적이 없다. 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 등 그 뒤를 이은 대통령들 역시 모두 마찬가지였다.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권위주의를 내려놓는 것, 국민들이 자신을 비웃고 조롱하도록 내버려두는 것, 그렇게 권위를 확인하는 것과 같았다.

이 공식이 달라진 건 문재인 대통령 이후다. 문재인 정권의 여러 잘못 중, 문화적 영역에서 남긴 가장 큰 해악은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권위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을 만든 것이다. 1983년에 태어나 모든 대통령 선거와 그 후의 분위기를 경험했던 필자로서,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이렇게까지 권위주의가 팽배했던 적은 없었다.

문재인 본인부터가 문제다. “북조선의 개 한국대통령 문재인의 새빨간 정체”라는 문구가 담긴 전단지를 만들고 뿌렸다는 이유로 대통령이 일개 시민을 모욕죄로 고소했다. 현직 대통령이 시민을 고소하는 것은 대한민국뿐 아니라 그 어떤 민주국가에서도 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그야말로 ‘좀스럽고 민망한’ 일이다. 그러나 이 사안을 두고 문재인 본인이 부끄러워했다는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그 후로도 잊을 만하면 ‘격노’를 일삼더니, 퇴임을 앞두고는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라는 제목의 책까지 냈다. 한심하고 우스꽝스러운 권위주의를 의인화하면 바로 이런 캐릭터가 될 듯하다.

대통령 스스로가 이렇다보니 지지자들의 행태는 한층 더 저열해졌다. 자칭 ‘깨어있는 시민’들이 문재인 정권 5년 동안 대감댁 행랑채의 왈짜들처럼 떠세를 부려댔다. 정권을 향한 비판, 풍자, 농담에 대고 “대통령님이 네 친구냐?”며 시비를 걸고 다녔다. 크리스 록의 조크를 듣고 웃다가 제이다 핑킷의 눈치를 보더니 무대에 올라가 뺨을 때린 윌 스미스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는커녕, ‘아무도 웃을 수 없는 나라’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새로운 정부의 출범을 앞두고 있다. 기대와 우려가 엇갈리는 중이다. 새 대통령 윤석열은 자칭 민주정권의 비민주적인 권위주의를 확실히 털어내주기를, 국민 속에서 진정한 권위를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시어머니만 둘…교육 정치판 만든 '교육감 직선제' 없애라 [노정태가 고발한다]

시어머니만 둘…교육 정치판 만든 '교육감 직선제' 없애라 [노정태가 고발한다]

그래픽=김현서

지난달 30일 '서울시 교육감 중도·보수 진영 단일화 기구' 주관 행사가 열렸다. 행사 내용이 곧 단체 이름이었다. 3선에 도전하는 진보 진영 조희연 현 서울시 교육감에 맞설 중도·보수 진영의 단일 후보를 뽑는 경선이 치러졌다. 지난 18대 한나라당(현 국민의힘) 의원을 지낸 조전혁 혁신공정교육위원장이 이날 단일 후보가 됐다. 그런데도 보수 지지자들은 불안해한다. 보수 진영 조영달 서울대 사범대 교수가 단일화에 불참한 탓이다. 만약 조 교수가 출마하면 보수표가 나뉘어 조 교육감이 반사이익을 누릴 가능성이 크다.
오는 6월 1일 치러질 교육감 선거 풍경이다. 늘 해왔으니 그러려니 하지 말고 진지하게 생각해보자. 우리 아이들 교육에 이런 진영 대결 선거가 도움이 될까? 교육감 직선제를 옹호하는 이들은 '그렇다'고 대답할지 모르겠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교육감 직선제 10년은 '교육의 정치화'라는 폐해만 낳았다. 일각에서 직선제 폐지 주장이 고개를 드는 이유다.
직선제 유지론자들은 헌법 제31조 4항을 언급한다. '교육의 자주성ㆍ전문성ㆍ정치적 중립성 및 대학의 자율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고 했으니 교육감은 직접 뽑아야지, 시·도지사가 임명하거나 간선제로 뽑으면 안 된다는 논리다.

그렇다면 지난 교육감 선거를 되짚어보자.
교육의 자주성? 교육감의 등장으로 자주성이 생기기보단 시어머니만 둘(교육부와 교육감)로 늘어났다.
교육의 전문성? 현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 그리고 곽노현 전 서울시 교육감의 전직을 떠올려보자. 초중고 교육 현장과 무관하게 연구하던 대학교수였다. 대학 교육도 교육의 중요한 부분이지만 교육감 업무와는 괴리가 있다.

교육을 정치판 만든 직선제
2017년 9월 청와대 앞에서 함께 시위중인 곽노현·조희연 전·현직 서울시교육감. 두 사람 모두 진보 성향 교수 출신이다. [연합뉴스]
정치적 중립성은 어떨까? 특히 이 부분에서 헛웃음이 난다. 조희연 교육감은 박원순 전 서울시장과 참여연대를 만든 장본인이고, 조전혁 후보는 18대 한나라당 의원이었다. 다른 지자체에서 출마하는 교육감 후보들 역시 정치색이 뚜렷하다. 현재 특정 정당 소속이 아니라는 이유로 '정치적 중립성' 보장 운운하는 건 얄팍한 자기기만이다.
물론 교육의 자주성과 전문성,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하는 건 중요하다. 하지만 그런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 반드시 교육감 직선제를 해야 한다는 주장은 아무 근거가 없다. 오히려 직선제 탓에 교육이 정치 논리에 휘둘리는 걸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이 목격했다. 그 과정에서 학생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교육 전체가 방향을 잃고 표류하는 피해를 봤다.

모든 선거는 기본적으로 고비용 저효율이다. 후보들은 많은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투입해야 한다. 공정하고 투명한 선거 관리를 위해선 별도의 시스템이 필요하다. 유권자의 투표 행위만도 상당한 사회적 비용이 든다. 모든 자리와 정책을 투표로 결정하는 게 반드시 바람직하지도 또 민주적이지도 않다.

사실 전국의 교육감을 한날한시에 동시에 선거로 뽑는 나라는 흔치 않다. 미국은 연방 국가답게 교육 정책 관련 권한은 각 주가 지니고 있다. 25개 주(州)는 주 교육위원회가, 11개 주는 주지사가 교육감을 임명한다. 직선으로 뽑는 주는 14개에 지나지 않는다. 독일 역시 마찬가지다. 각 주 교육장(교육감)은 주 교육부 장관이 임명한다. 영국·프랑스·일본도 마찬가지다. 특히 국가 중심의 교육 전통이 강한 프랑스는 총 30개의 학구장(교육감) 모두를 대통령이 임명한다.
근시안적 교육 정책 쏟아내는 폐해
선진국들은 왜 교육감을 직선제로 뽑지 않을까? 굳이 그래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교육 정책은 그 나라의 가장 중요한 기반이다. 단기적으로는 학생과 학부모의 행복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장기적으로는 국가 경쟁력에 막대한 차이를 불러온다. 교육감 선거 결과에 따라 교육 내용이 달라지는 현 체제에 의문을 표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민주주의 국가이며, 가장 철저하게 지방자치제를 운용하는 미국에서도 교육 정책만큼은 '국가 대계'로 인식해 국가 차원의 전략을 수립하고 전 국민을 대상으로 시행한다.
2007~2010년 미국 워싱턴 D.C. 교육감을 지낸 재미교포 미셸 리(이양희). 교사 출신으로 공교육 개혁에 앞장서 화제가 됐다. 애드리언 펜티(Adrian M. Fenty) 당시 워싱턴 D.C. 시장이 그를 임명했다. [중앙포토]
우리는 정반대다. 교육감의 교육 철학, 더 솔직히 표현하자면 정치적 성향에 따라 특정 방향의 교육을 학생들에게 강요한다. 내 의지와 무관하게 어떤 지역에 사느냐에 따라 다른 교육을 받는다. 이게 '다양성'이 늘어난 걸까? 아니다. 교육감 선거가 만든 불필요한 교육 편차의 폐해를 교육 소비자인 학생들이 감당한다는 소리다.
예를 들어보자. 현재 세계 교육의 화두는 정보교육(computing)이다. 컴퓨터 사용법이 아니라 그 원리를 가르친다. 우리도 그 추세에 발맞춰 2018년부터 정보 과목을 초중고 정규 교과목으로 지정했다. 수업 일수는 교육감의 판단과 자율에 맡겼다. 그 결과, 교육감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편차가 벌어졌다. 대구·세종처럼 정보 과목을 충실히 가르치는 도시도 있었지만 그 외 지역은 등한시한다. 교육감 취향에 정보교육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학생들은 이렇게 손해를 본다. 내 마음에 안 드는 교육감이 선출되었다고 선뜻 이사할 수도 없으니 학생과 학부모 입장에선 교육감 선거로 교육 선택권이 늘어난 건 전혀 없다. 다만 정치적으로 줄 잘 서고, 단일화 잘하고, 선거 잘 치러서 교육감이 된 누군가가 애꿎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교육 실험'을 할 자유만 얻었을 뿐이다.

학생 볼모로 한 교육 실험 옳은가
이는 루터의 종교 개혁 초창기를 연상케 한다. 당시 루터가 말한 '종교의 자유'란 평민들이 알아서 교회를 택할 자유를 뜻하는 게 아니었다. 각 지역의 영주들이 가톨릭에서 벗어나 원하는 교회를 택할 자유를 의미했다. 평민들은 꼼짝없이 자기 영주가 고른 교회에 다녀야 했다. 평민 입장에서 보자면 루터 이전이나 이후나 종교의 자유란 허구에 지나지 않았다. 루터의 종교 개혁 이후 독일과 유럽이 30년 전쟁에 빠져든 것처럼 지금 대한민국도 10년째 교육 전쟁에 휩싸여 있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지난 10년간 사교육은 줄지 않았고 학생들의 삶의 만족도가 높아졌다는 증거도 없다.
교육의 자주성, 전문성, 정치적 중립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대명제에 반대할 사람은 없다. 20세기 내내 유지해왔던 국가 중심의 일률적 교육 체제가 지니고 있던 폐단 역시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교육감 직선제만 정답인 것처럼 주장하는 건 옳지 않다. 교육감은 투표로 뽑을 자리가 아니다. 광역지자체장이 선발하거나, 정치적 중립성을 담지할 수 있는 교육위원회가 임명하는 등 더 나은 해답을 찾아야 한다.

2022-04-02

왜 다를까? 윌 스미스에 분노한 미국인 vs 온정적인 한국인

왜 다를까? 윌 스미스에 분노한 미국인 vs 온정적인 한국인

[노정태의 뷰파인더] 시상식의 웃음거리와 권위주의

● 美 여론조사, 83%가 윌 스미스 비판
● 여자를 ‘보호해야 할 존재’로 묶어둬
●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가부장제 옹호!
● 조크에 관대한 美 문화적 전통, 왜?


배우 윌 스미스(오른쪽)가 3월 27일(현지 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 극장에서 열린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아내에게 과도한 농담을 한 코미디언 크리스 록의 뺨을 후려쳤다. [AP 뉴시스]
3월 27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 극장. 제94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이 한창이었다. 진행자는 유명 코미디언 크리스 록. 록은 여러 참석자를 향해 끊임없이 ‘선 넘는’ 농담을 던졌다. 그러던 중, 누구도 예상치 못한 사건이 발생했다. 가수, 배우, 최근에는 유튜버로 큰 성공을 거둔(4월 2일 현재 구독자 986만 명, 즉 1000만에 가깝다) 윌 스미스가, 무대에 올라 크리스 록의 뺨을 후려친 것이다.

사건의 전모는 이렇다. 록이 제이다 핀켓 스미스의 짧은 머리를 두고 “‘G. I. 제인’ 속편이 기대된다”고 농담한 게 화근이었다. ‘G. I. 제인’은 ‘제인’이라는 여성이 해병대에 입대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작품으로, 데미 무어가 삭발하고 나와 화제를 끈 영화다. 제이다 핀켓 스미스도 그 자리에서 삭발을 하고 있었다. 문제는 제이다가 윌 스미스의 아내였다는 것, 그리고 제이다의 탈모는 일종의 면역성 질환으로 인한 것이라는 데 있다.

아카데미상은 거의 100년 가까운 역사를 지닌다. 당연히 여러 해프닝이 있었지만 참석자가 진행자의 뺨을 때리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카데미상뿐 아니라 세계 방송의 역사를 모두 짚어 봐도 찾아보기 어려운 사건이다.

더 놀라운 일도 있다. 이 사건에 대한 국내 반응이다. 공식 여론조사가 진행된 바 없기에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우나, 인터넷 뉴스에 달린 댓글을 대략 확인해보면 ‘윌 스미스가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크리스 록이 심했다’ ‘내가 윌 스미스의 처지여도 참기 어려웠을 것이다’ 등의 반응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이렇듯 한국에서는 온정적 반응을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으나 미국 현지의 그것과는 동떨어져 있다. 미국 연예 매체인 TMZ가 3월 28일 진행한 온라인 설문조사에 따르면, 스미스가 록의 뺨을 때린 행위에 대해 “록이 맞을 만했다”고 응답한 사람은 전체 134000여명 가운데 17%에 그친 반면, 그러한 행위를 폭행으로 규정하고 비판하는 의견은 83%에 달했다. 가족에 대한 사랑 때문에 폭력을 썼다는 윌 스미스의 해명에 대해서도 오직 15%만이 동조했다.

병 때문에 탈모를 겪고 있는 제이다 스미스를 향한 농담이 설령 지나치다 해도, 그런 농담을 하는 코미디언을 때리는 행위를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가 미국 사회에 두루 퍼져 있다. 반면 한국에서는 사건 발생한 직후 ‘미국인들이 윌 스미스에게 동정적일 것’이라고 예상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실상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생각하는 미국, 미국 문화는, 현실 속의 미국 문화와 전혀 달랐다.

페미니즘으로 폭력을 변호?
배우 윌 스미스(왼쪽)와 그의 아내 제이다 핀켓 스미스가 3월 27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 극장에서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AP 뉴시스]
윌 스미스는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사람을 때렸다. 너 댓살짜리 아이가 해도 혼날 짓인데, 50대 중반의 성인이다. 대체 이런 행동을 어떻게 옹호할 수 있단 말인가?

여성주의적 관점을 둘러대며 ‘여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핑계로 윌 스미스를 옹호하는 사람이 없지 않다. 윌 스미스 본인부터가 그랬다. 그는 이번에 영화 ‘킹 리처드’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테니스의 전설인 윌리엄스 자매를 길러낸 아버지가 주인공인 작품이다. 그는 그런 영화를 찍으며 가족의 가치를 절감했는데, 아내를 조롱하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폭력을 휘둘렀다고 수상 소감에서 스스로에 대한 변명을 했다.

그러한 주장은 페미니즘과 거리가 멀다. 아니, 정반대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내와 자식 등 가족의 구성원을 ‘보호’해야 할 가부장의 의무가 있다며 다른 이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논리다.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가부장제 옹호 발언이다.

이러한 주장은 엉터리일 뿐 아니라 위험하기 짝이 없다. 아내가 집 밖에서 명예를 잃었다는 이유로 폭력을 휘두르는 가부장의 행태를 용납하는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살펴보면 그 위험성을 어렵지 않게 실감할 수 있다. 인도, 파키스탄, 그 외 여러 곳에서 바로 그런 이유로 ‘명예살인’이 벌어진다. 아내나 딸이 외간 남자와 바람이 나거나 연애를 하거나 혹은 눈만 마주쳐도 ‘가문의 명예’가 실추됐다는 이유로 상대방 남자뿐 아니라 가족의 구성원인 여성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자들이 없지 않다. 윌 스미스는 그런 사회의 가부장들과 정확히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전설적인 NBA 선수이며 미국 흑인 사회의 정신적 지주 중 한 사람인 카림 압둘 자바 역시 윌 스미스의 발언을 강경하게 비판했다. 이메일 뉴스레터 서비스 ‘섭스텍’을 통해 3월 29일 공개한 글에서, 압둘 자바는 윌 스미스의 변명을 두고 이렇게 평했다.

“진정 여성을 보호하는 남자들은 1500만 명의 시청자들 앞에서 그런 식으로 거들먹대지 않는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하고 입을 다물고 있다. (...) 여성 보호를 앞세워 자기가 올바른 일을 했다고 말하면서, 윌 스미스는 실제로는 자기 이익을 위해 그 여성들을 착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물론 그 연설은 그저 폭력을 정당화하고 있을 뿐이었다.”

일부 페미니스트의 견해는 다를 수 있다. 국내에도 ‘나쁜 페미니스트’ 등의 책으로 잘 알려진 작가 록산 게이가 대표적이다. 그는 3월 29일 ‘뉴욕타임스’에 ‘제이다 핀켓 스미스는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없다. 우리도 마찬가지다’라는 제목의 칼럼을 기고했다. 윌 스미스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전제를 분명히 한 후, 그는 ‘농담’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을 내걸고 약자를 조롱하는 짓에 대해 비판적으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록산 게이의 말에도 귀담아 들을 점이 있다. 하지만 기분 나쁘다는 이유로 사람을 때리는 것이 용납돼서는 안 된다. 여자를 ‘보호’하기 위해 폭력을 행사하는 남자는, 여자를 ‘보호해야 할 존재’로 묶어놓기 위해 폭력을 행사한다. 가족을 위해 뭐든지 다 할 수 있다는 남자는, 자신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가족’을 유지하기 위해 가족 구성원에게도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 페미니즘, 더 나아가 모든 정치적 진보는 이런 폭력과 선을 긋는 것에서 출발해야 마땅하다.

슈퍼스타라는 어떤 웃음거리
코미디언 크리스 록이 3월 27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 극장에서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다큐멘터리 장편 영화상 시상 전 입담을 펼치고 있다. [AP 뉴시스]
크리스 록은 대체 왜 그런 농담을 한 걸까? 원래부터 ‘정치적 올바름’의 선을 교묘하게 넘나드는 농담을 해왔던 코미디언이지만, 그가 제이다 스미스를 농담거리로 삼은 것은 본인의 스타일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 어떤 코미디언이 사회를 보았더라도 여러 출연자들을 향해 무례하게 느껴질 수 있는 농담을 했을 것이다. 그건 일종의 ‘미국적 전통’이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을 통해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윌 스미스의 집안은 여러모로 복잡한 속사정을 지니고 있다. 두 자녀 모두 스스로의 정체성을 성소수자로 밝힌 바 있으며, 자녀들은 스미스의 아내와 함께 ‘폴리아모리’를 선언한 상태다. 폴리아모리란 가부장적인 일부일처제에 종속되지 않겠다는 뜻으로 한 사람이 여러 사람과 동시에 성관계를 포함한 친밀한 애정 관계를 갖는다는 뜻이다.

제이다 스미스의 폴리아모리는 단지 선언에 머물지 않았다. 제이다는 어떤 남자와 연애했는데, 그는 제이다보다 21세나 어렸을 뿐 아니라, 실은 윌 스미스의 아들인 제이든 스미스의 친구였다. 아들의 친구와 바람이 난 아내. 윌 스미스는 ‘아내의 판단을 존중한다’며 대범한 모습을 연출했는데, 물론 스스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비판받을 일이 아니지만 대중적 시각에서 보면 충분히 농담거리로 삼을만한 일이며, 어김없이 그 또한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입방아에 오르고 말았다.

미국의 연예인과 셀레브리티들은 사실상 무한대에 가까운 자유를 누리며 산다. 하지만 그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파파라치들이 따라붙어 그들의 사생활을 취재하고 팔아먹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아카데미상 시상식 같은 공개 석상에서 혹독하게 조롱당하기 일쑤다. 사생활을 존중하는 미국에서 이게 무슨 일일까? 미국은 자유의 나라 아닌가?

미국 문화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조크에 관대하다는 것이다. 엄격하고 근엄한 자리일수록 농담을 섞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 전통은 미국 영화산업과 대중문화의 큰 축제인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가장 도드라졌다. 지금껏 수많은 코미디언들이 진행자가 되어 무대 위에 올랐다. 지금껏 아카데미 시상식은 늘 그랬다. 그 하루를 위해 굶고 꾸미고 갖춰 입은 영화계의 슈퍼스타들을 두고, 그들의 치부를 한껏 드러내고 까뒤집으며 웃음거리로 삼아왔던 것이다.

이것은 미국 사회가 권위를 존중하지 않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정반대로, 할리우드와 아카데미의 권위가 드높기 때문에 출연자들에게 망신을 주는 농담을 허용하는 것이다. 할리우드 스타들의 삶을 생각해보자. ‘스타’라는 말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시피, 평소에는 저 하늘의 별처럼 고고하게 떠 있는 존재다. 대중은 그들의 삶에 대해 그저 엿보기만 할 뿐 다가갈 수 없다. 스타들은 그런 대중적 관심과 인기를 바탕으로 천문학적 출연료를 받고 상상하기 어려운 라이프 스타일을 즐긴다.

애정과 질투는 동전의 양면이다. 미국인들이 아무리 ‘쿨’하다 해도 이렇듯 공공연한 특권층의 존재는 어딘가 배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아카데미상 시상식 같은 자리를 빌려 한 번쯤 적나라하게 치부를 드러내고 비웃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이는 조선시대에 양반들이 가끔 벌어지는 탈춤을 금하지 않고, 오히려 돈을 줘가며 광대를 불러 춤판을 벌였던 것과 마찬가지다. 말뚝이 탈을 쓴 광대가 양반탈을 쓴 광대를 조롱하고 비웃고 골탕 먹이도록 하는 것은 양반의 권위를 전혀 손상시키지 않는다. 피지배층의 억압된 불만을 해소하면서, 현실 속 신분 차이를 더욱 확실히 느끼게끔 한다. 예외적인 상황에서 ‘권위주의’를 내려놓음으로써 ‘권위’를 공고히 다지는 전형적인 방식이다.

조크 통해 해악 줄이다
권위 그 자체는 사회를 유지하는데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그러나 권위주의는 세상을 경직시킨다. 미국은 이렇게 조크를 통해 권위주의의 해악을 줄이면서 권위에 힘을 실어주는 문화적 전통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제이다 스미스에게 크리스 록이 던진 농담은 분명 과도한 측면이 있다. 또한 한국은 미국과 다른 나라이며, 미국의 모든 것을 쫓아갈 필요는 없다. 하지만 문화와 교양을 중시하며 ‘정치적 올바름’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에서, 왜 이렇게 과격한 농담을 전통으로 유지하는지, 그 의미를 한번쯤 곱씹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노정태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아름다운 작별은 없다… 죽음의 존엄마저 농락한 K방역

아름다운 작별은 없다… 죽음의 존엄마저 농락한 K방역

[아무튼, 주말] [노정태의 시사哲]
대선 직전 방역 고삐 푼 文정권
장례대란으로 고통받는 유족들

첼리스트 다이고(모토키 마사히로)는 악단 해산으로 갑자기 실업자가 됐다. 2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가 남긴 집이 있으니, 생활비가 저렴한 시골에서 어찌어찌 살 수 있겠다는 생각에, 고향인 야마가타로 돌아가기로 했다. 일자리를 구하던 다이고의 눈에 구인 광고 하나가 들어왔다. 연령 제한 없음, 고수익 보장, 실질 노동 시간 짧음. 게다가 정규직이다. 평생 음악만 하고 살았던 그는 이렇게 좋은 말만 쓰여 있는 일자리가 무슨 뜻인지 모른 채 ‘NK 에이전트’의 문을 두드린다. ‘여행의 도우미’라던 그 회사의 일은 납관, 고인의 몸을 닦고 잘 단장하는 것이었다.

한국과 일본의 장례는 매우 다르다. 한 사람이 생을 마치고 떠나는 자리에 다들 모여 시끌벅적하게 떠들고 마시며 고인을 추억하는 것이 한국의 장례 문화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제목처럼 장례식을 ‘축제’로 여겨온 것이다. 그렇다 보니 장례를 치르는 전문 인력을 사회적으로 천시하지 않았다. 오늘날은 국가에서 공인하는 자격증을 가진 전문가로 존중받는다.

일러스트=유현호

반면 일본은 고인을 잘 씻기고 곱게 단장하여 유족과 대면하는 절차를 갖는다. 슬픔과 엄숙이 지배하는 장례식의 분위기 때문인지, 고인을 염하고 화장하는 이들을 천시하는 문화가 여전히 남아 있다. 아내(히로스에 료코)가 질겁하고 사장인 이쿠에이(야마자키 쓰토무)에게 매일 혼나지만, 다이고는 얼결에 갖게 된 직업을 통해 인생의 깊이를 배워나간다. 한 차례 TV를 통해 방영되기도 했던 영화 <굿’바이: Good&Bye>의 내용이다.

우리는 삶의 존엄과 죽음의 존엄을 함께 고민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오늘날 논란이 되는 죽음의 방식은 크게 두 가지, 존엄사와 안락사로 나누어진다. 존엄사는 지난 2009년 5월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9대4로 첫 허용 판결이 나온 후, 10여 년의 논의를 거쳐 2018년부터 법에 따라 시행 중이다. 본인과 가족의 의사에 따라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 서약하면 심폐소생술, 항암제, 수혈 등 몇 종의 제한된 연명 치료를 중단할 수 있다. 소극적인 개념이다.

반면 안락사(Euthanasia)는 보다 적극적이다. 환자의 소생 가능성을 염두에 두긴 하나 그것이 본질은 아니다. 내가 원하는 시점에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내 생을 마감할 권리, 그 또한 양보할 수 없는 인권이라는 철학적 논의를 바닥에 깔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최근 프랑스의 배우 알랭 들롱은 안락사 결정을 밝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사실 그는 여전히 살아 있다. 2019년 뇌졸중 수술을 받은 후 투병 중일 뿐이다. 자신의 존엄을 지키면서 본인의 결정하에 세상을 뜨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존엄사와 안락사의 논의는 다른 차원에서 작동한다. 존엄사는 현대 의학의 연명 치료가 고도로 발달한 탓에 생긴 부수적 현상에 가깝다. 전통적으로 효와 가족을 중시하던 한국에서도 비교적 어렵지 않게 받아들여졌다. 적극적 안락사는 다르다. ‘생명’이 지속되면서 내가 생각하는 아름답고 행복하며 바람직한 ‘삶’을 망가뜨릴 때, ‘삶’을 위해 ‘생명’을 포기할 권리가 개인에게 있다는 발상의 산물이다. 자유와 선택이라는 가치를 최우선에 둔다.

안락사 옹호론은 얼핏 보면 논리적으로 타당해 보인다. 공리주의 철학자 피터 싱어 등 많은 이성주의자들이 소극적인 존엄사를 넘어 적극적 안락사를 옹호하는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하지만 안락사의 허용은 결국 의사의 도움을 받아 고통 없이 자살할 권리를 주는 셈이다. 의사에게 죽음의 서비스를 제공할 권리를 허락한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가 수천 년 넘게 유지해온 가장 기본적인 도덕률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안락사를 둘러싼 논쟁이 쉽게 끝나지 않는 이유다. 나의 존엄한 삶을 위해 내 생명을 스스로 빼앗는 것은 정당한가? 자살을 할 때 의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법과 제도를 마련한다면, 사회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우리는 모두 행복한 삶, 충만한 인생을 살고 싶어 한다는 것. 그 끝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을 수밖에 없기에, ‘좋은 삶’을 완성하는 마지막 단추로서 우리는 ‘좋은 죽음’을 열망한다는 것. 모든 철학과 윤리의 고민이 결국 ‘좋은 죽음이란 무엇인가?’로 향하는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우리의 현실은 어떨까. 문재인 정권은 공교롭게도 대선을 앞두고 방역의 고삐를 풀어버렸다. 고작 수백 명의 확진자가 나와도 온 나라가 꽁꽁 얼어붙게 하던 그들이, 이제는 수십만의 확진자와 함께 매일 수백 명씩 사망자가 쏟아져도 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오히려 4월 2일부로 현행 거리 두기를 중단할 예정이다.

정상적인 국가라면 K방역 홍보 대신 백신 확보부터 했어야 한다. 치료제를 충분히 구비하고,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이들은 최대한 아름답게 유족과 작별할 수 있도록 대비했어야 마땅하다. 현실은 정반대다. 코로나 사망자를 화장 대신 매장해도 된다고 규칙을 바꿔놓고 2개월간 제대로 알리지도 않았다. 이는 3일장이 6일장, 7일장으로 늘어나 고통받은 유족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사망자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너무도 원통하다. 자녀들에게 더 큰 부담을 안겨주는 작별이 될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았을 테니 말이다.

코로나 사망자의 대부분은 고령층이다. 한국·전쟁을 직접 겪었거나 잿더미가 된 조국에서 맨주먹으로 태어난 이들이다. 황무지에서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을 이루어낸 주역들이, 생의 마지막에 아름다운 작별을 할 기회조차 박탈당하고 있다. 문재인 정권은 대체 무슨 권리로 이러는가. 왜 마지막까지 국민의 삶의 존엄을, 심지어 죽음의 존엄까지 농락하는가.

<굿바이>로 돌아와 보자. 익숙지 않은 일을 배우며 힘들어하던 다이고는 어느 날 강물을 거슬러 올라오는 연어를 보고 말한다. “죽기 위해 강을 거스르다니 서글프네요. 어차피 죽을 거면 편하게 죽지.” 어리석은 질문에 이쿠에이가 던지는 현명한 답. “돌아가고 싶겠지, 고향으로!” 다이고의 인생도 마찬가지. 고향으로 돌아와 납관이라는 일본 사회가 천시하는 일을 하며 스스로의 인생을 되찾았다. 태어난 곳에서 미래의 씨앗을 뿌리고 숨을 거두는 삶과 죽음의 존엄을 회복한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2022-03-26

<러시아 아방가르드>전: 정신이 물질을 이기지 못할 때

<러시아 아방가르드>전은 슬픈 전시다. 푸틴이 전쟁을 시작한 후 러시아가 한국을 비우호국으로 지정하면서 4월 중순으로 예정된 전시를 앞당겨 종료하네 마네 하는 맥락 때문만은 아니다.

그런 차원이 아닌 내부 맥락만 놓고 보더라도, <러시아 아방가르드>전은 서글퍼지는 전시다. 물질적 영역, 다시 말해 현실에서의 공허와 빈곤을 정신으로 승화시켜 극복하고자 하던 이들의 발버둥은, 결국 초라한 물질적 형상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해주는 전시이기 때문이다.

 가령 그 유명한 말레비치의 <절대주의>를 보자. 도판이나 화면상의 이미지로 접할 때와 달리, 실물을 보면 인상이 완전히 다르다. 보존 상태가 너무 나쁘기도 하고, 이전에 '물질'적 측면에서 너무 작품이 약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 미술 작품은 실물을 볼 때 이전과는 전혀 다른, 좋은 의미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게 된다. 특히 유화가 그렇다.

그러나 말레비치의 <절대주의>는 그 역사적 의의나 화면상의 이미지에 익숙한 채로 들어가 실물을 보면 실망하게 된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물감, 캔버스, 기타 여러 측면에서, 작품을 통해 '초라함'을 느끼고야 말았던 것이다.

물질적 에너지와 풍요의 과잉이 낳은 정신주의가 아니라, 물질의 세계가 빈곤하고 빈약하다는 것을 절감하며 살 수밖에 없는 변방인들이 울며 겨자먹기로 택하지만 본인은 내가 정말 이걸 원해서 택하고 있다고 자기 기만을 거듭하는, 그런 정신주의랄까.

우리 현대 한국인, 특히 20세기 출생자들은 그 변방성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변방인이 어떤 성취를 이루거나 개인적인 행복을 달성하고자 할 때, 변방적 특질과 줄타기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것을 좌우하는 결정적 요소다.

(그래서 최근 1960-1970년대생들이 '눈떠보니 선진국 이얏호' 꼴값을 떠는 게 우려스러웠으나, 그들 대부분은 민주당 지지자이며, 정권을 뺏겼으니 이제 그들은 다시 헬조선 타령을 할 것이다. 이런 정치 과몰입 또한 변방성의 특징 중 하나다. 그들은 어쩔 수 없는 변방의 인간들이며 영원히 벗어나지 못한다. 평생을 그렇게 살다가 죽을 것이다.)

제대로 설명을 못 하겠는데, 러시아 아방가르드 미술이라는 것은 러시아 문학과 마찬가지인, 그런 맥락을 놓고 보면 잘 이해된다는 뜻이다.

<러시아 아방가르드>전은 좋은 전시라고 생각한다. '아방가르드'가 아니라 '러시아'에 방점을 찍고 보면 분명히 그렇다. 세상을 지배하는 수많은 법칙 중 가장 슬픈 법칙인 '원판 불변의 법칙'을 뼈저리게 가르쳐준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왜 사회주의라는 서구 사상의 뉘앙스 대신 뭔가 토속적이고 구린 느낌 일색인가? <러시아 아방가르드>전 1부에 등장하는 여러 그림들을 보던 나는 왠지 그 뿌리가 결국은 러시아적 향토성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걸 떨쳐내고 좀 어케어케 해보려던 머리 좋고 예민한 자들은 소련이 된 러시아에서 살지 못해 망명하거나(칸딘스키), 소련에서 두 번이나 간첩죄로 체포되는 등 고초를 겪다가 일찍 죽었다(말레비치).


이 전시에서 가장 큰 감명을 준 작품은 따로 있다. 알렉산드르 티실레르가 그린 <장애인들의 시위>다. 야만적인 나라에 사는 이가 그 야만성을 직시할 때 만들어낼 수 있는 어떤 에너지가 있다. <장애인들의 시위>가 각별하게 느껴진 건, 물론 어제 오늘 내가 경험한 어떤 맥락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4월 17일까지 예정되어 있으나 언제 휙 돌아가버릴지 모르는 전시. <러시아 아방가르드>전을 꼭 보시기 바랍니다. 입장료 2만원, 전시기간중 휴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