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3-10

품계가 두 단계나 올랐습니다.

방문자 여러분, 기뻐해 주세요.

#72. 주막. 방( 달호 방 ) 낮.

대수, 서장보, 강석기, 셋이서 술 마시고 있다.

서장보는 술잔 기울이며 심기가 불편하다.

강석기는 내색 안 하지만 역시 조금은 불편하고,

두 사람 눈치보고 앉아있는 대수.

서장보 : (약간 술 취한) 솔직히 이게 뭔가? ....노정태랑 이만수가 두 단계나 품계가 올랐는데
아, 우리가 고작 이런 꼴이라니...
그게 말이나 되는가 말이야?
강석기 : 그만하게
자네, 처음부터 승차를 바라고 전할 뫼셨는가?
서장보 : (벌컥) 내가 꼭 뭘 바래서 이러나?
아닌 말루, 그래두 몸 바쳐 충성을 했을 땐
윗전이 좀 알아주길 바라는 게 인지상정 아닌가?
그게 그렇게 틀린 거냐고?

하면서 서장보, 술을 벌컥벌컥 따르는데..

대수 : (말리며) 나으리 취하셨습니다. 그만 하세요
서장보: 대수 너도 좀 말해봐라.
우리야 그렇다쳐도 너는 억울한 게 있을 거 아니냐?
아, 니가 목숨 바쳐 전할 구한 게 어디 한두 번이냐고? 어?
대수 : (당혹스럽다) 나으리......

서장보, 에이..속상한 얼굴로 벌컥벌컥 술을 들이키고..
보면 강석기도 잠자코 술만 마시고 있다.
그런 두 사람 보며 난처한 대수...
MBC 이산 제47부

...이게 지난 주 방영분인데, 이번 주에 참수라도 당하면 낭패.

2008-03-09

지난 일주일

《Foreign Policy》 마감이 몰아쳐서만은 아니다. 글을 빨리 쓰는 사람이 아니라서 그렇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떠오르는 것을 그대로 줄글로 만들지 않는 성격이라서 그런 것이다. 허지웅의 블로그에 올라온 "디 워, 진중권"이라는 글이 "디 워, 진중권, 노정태"라는 제목을 달고 있던 시점에 나는 이미 그것을 보았다. 특별히 허지웅을 비판하는 것은 내 목적이 아니었고, 비평과 저널리즘과 블로그, 대중과 인터넷과 평론가에 대한 생각들이 RTF 형식의 파일로 조각 조각 내 컴퓨터의 하드디스크에 저장되어 있었는데, 마침 한윤형이 '디 워'와 관련된 주변부에 대한 논점 정리를 하였으니 이제 이야기를 할 때가 되었다 싶어서 허지웅에 대한 비판으로 말문을 열었을 뿐이다. 나는 그 주제에 대해 정작 하려던 말을 아직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평범한 저술가는 거칠고 올바르지 못한 표현을 너무 빨리 올바른 것으로 대체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렇게 대체함으로써 그는 그나마 아직 살아있는 작은 식물이었던 최초의 착상을 죽이게 된다. 그리고 이제 그것은 시들고, 더 이상 전혀 아무런 가치도 없다. 이제 우리들은 그것을 쓰레기 더미 위에 던져버릴 수 있다. 반면에, 그 하잖은 작은 식물은 여전히 어떤 유용함을 지니고 있었다.
165,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문화와 가치》, 이영철 옮김, 책세상, 2006.

덜컥 대학원에 들어간 후 실감이 전혀 나지 않았는데, 화요일부터 수업에 들어가면서부터 내가 벌여놓은 일의 무게를 깨닫고 있다. 잘 했다고 생각한다. 단 한 번 강의하는 모습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분은 정말 호학(好學)하는 학자구나 싶은 중견 교수와, 서양철학사에 이어 현대철학사까지 강의하겠노라고 야심찬 계획을 세워놓은 후 학생들에게 길고 긴 참고문헌 목록을 조금씩 던지고 있는 젊은 교수가 함께, 첫 시간부터 애누리 없이 수업을 몰아치고 있다. 알라딘에서 내가 쓴 《Q&A》리뷰를 '금주의 마이리뷰'로 선정해준 덕분에 몇 푼 안 들이고 교재와 그 외 책들을 구입하였다. 말이 나온 김에 구입한 책들의 이름을 나열해보자. 《형이상학》(아리스토텔레스, 이제이북스), 《유럽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에드문드 후설, 한길사), 《존재와 시간》(마르틴 하이데거, 까치), 《고대 그리스, 그리스인들》(H. D. F. 키토, 갈라파고스), 《문인기자 김기림과 1930년대 '활자-도서관'의 꿈》(조영복, 살림),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월터 J. 옹, 문예출판사). 당장 수업에서 언급되고 있기 때문에 급히 읽어야 할 책도 있고, 개인적인 탐구를 위해 다시 음미해봐야 할 것도 있다. 이런 것들이 《임꺽정》의 9, 10권과 함께 회사 책상에 놓여 있다.

살아오면서 언제나 어떤 집단 속에서건 최연소였기 때문에, 남들이 나를 어리다고 하대하는 것에 대해 그리 민감하게 굴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엄연히 업무와 관련된 사항에서까지 그런 대우를 받았거나, 혹은 그렇게 생각하게 될 일을 두어 번 겪고 나니 다소 속이 부대꼈다. 철학과 수업을 듣고 있는 것이 그럴 때 위안이 되었다. 수업에서 듣는 내용도 그렇지만, 아무리 정신적으로 지치게 된다 해도 나는 일을 하고 있는 나 자신에게 더욱 큰 애착을 느낀다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성큼걸이로 사무실에 돌아와 막혀 있던 일들을 해결하곤 했다는 것이다(오해를 피하기 위해 말해두자면, 나는 지금 공부와 일을 대립시키고 있지 않다. '일함'과 '놀고 있음'을 대립시키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취향의 문제인 것이다. 글을 읽을 때에도 그렇다. 나는 개념들이 '놀고 있는' 꼴을 참지 못한다. 비평과 인터넷에서의 담론 형성에 대해 말을 꺼내게 되는 것도 그래서이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진지함에 대한 경박한 주장과 진지한 주장을 구분하지 못하는 곳이 아닐까, 그리하여 나는 일하는 글을 쓰고자 하기에 도리어 노동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을 수 없는 것은 아닐까 하는, 몇 년 묵은 고뇌가 순간적으로나마 되살아난 것도 그래서이다. 하지만 적절한 시점에 위안을 얻은 덕분에 오늘도 명랑하게 산다.

학업과 업무를 병행하는 것은 양립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있다면 실로 그렇다. 정작 문제는 매 순간마다 내가 '해야 하는' 것들이 수도 없이 떠오르기 때문에 발생한다. 해결해야 하며, 해결될 수 있는 문제들이 손 닿는 곳에 넘실거린다. 지금 당장 그 모든 것들을 해낼 수야 없겠지만, 언젠가 그것들이 어떤 식으로건 해결되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하지만 이 낙관주의를 관철시키기 위해 필요한 낙관적인 요소가 부족하다는 데에 생각이 늘 미치면, 나는 모든 것에 손을 대야만 할 것 같은 불안감에 휩싸이게 된다. 세계는 병들어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말대로 철학이 치료라면, 나는 우선 내 팔뚝에 진정제를 주사해야 할 것이다. 《문화와 가치》를 펼쳤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한다. "철학자들끼리의 인사는 이래야 할 것이다: "서둘지 말아요!""(이영철 옮김, 166)

2008-03-01

우리에게 진중권은 무엇인가

1.

이명박 시대의 개막과 더불어 진중권은 프레시안에 연일 칼럼을 게재하고 있다. 기존에 진중권을 마땅찮게 생각하던 이들도, 그가 이명박과 이명박 정부를 비판하는 것만은 즐겁다고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역시 진중권은 개 팰 때 최고야!' 같은 찬사가 줄을 잇는다. 극우파와 싸우는 것이 진중권에게 가장 잘 어울린다는 식의 평가가 그 뒤를 따른다. 하지만 그러한 평가는 진중권이라는, 한국 사회가 두 번 다시 가질 수 없는 독특한 인물의 위의를 지나치게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진중권에 대한 은근한 폄하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식으로 진행된다. '진중권이 하는 말이 꼭 틀린 건 아니지만, 아무튼 어딘가 모르게 은근히 기분이 나쁘고, 그것은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결국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가령 허지웅은 "[디 워]에 대한 짧은 결산"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디 워> 광풍 당시 언론은 이를 영화의 질적 수준에 대한 찬성과 반대 논쟁으로 몰아갔고, 궁극적으로 평론가 대 관객이라는, 실제 존재하지 않지만 발끈하기 딱 좋은 마술적 대결구도를 만들어냈다. 여기에는 입 바른 말 했다가 고생한 진중권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 토론 프로그램에 나가 하필 데우스 엑스 마키나 같은 이야기를 늘어놓은 거다. <디 워>의 영화적 완성도를 정색하고 논하는 건 일종의 넌센스에 가깝다. 이 논쟁은 현상으로 접근해야 의미가 있다.
허지웅, "[디 워]에 대한 짧은 결산", ozzyz review 허지웅의 블로그, http://ozzyz.egloos.com/3611252

여기서 허지웅이 가지고 있는 논점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디 워'의 영화적 완성도를 논하는 것은 넌센스이다. 둘째, 바로 그러한 일을 하면서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는 어려운 단어를 끄집어내 대중들의 심기를 거스른 진중권의 행동은 잘못되었다. 이 각각에 대해 반박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진중권이라는 비평가가 한국 사회에 어떤 의의를 지니는 존재인지에 대해 좀 더 명료한 그림을 얻을 수 있다.

우선 '디 워'의 영화적 완성도를 논하는 것이 넌센스라는 주장을 살펴보자. 이것은 영화평론가로서의 직업적 의무를 포기하겠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는 소리이다. 물론 '디 워'의 영화적 완성도가 대단히 형편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알고 있음'은 그저 그렇거니 하고 짐작하는 정도의 앎일 뿐이지, 왜 그 영화가 잘못되었고 어느 부분이 특히 어떻게 잘못 만들어져 있는지를 다른 이에게 설명하고 그를 설득할 수 있을 정도의 '앎'은 분명히 아닌 것이다. 말을 할 줄 안다는 것은 '석판!'이라고 외침으로써 조수가 석판을 들고 지붕 위에 올라오도록 할 수 있음을 뜻하지, 언어의 사용을 둘러싼 현상에 접근하는 그런 차원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영화 비평을 자신의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라면, '디 워'가 대체 왜 어디서 어떻게 나쁜 작품인지에 대해 다른 이를 설득할 수 있을만한 분석력과 표현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작품 자체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는 것이 평론가의 1차적인 의무 아닌가? 비평가가 자신이 다루는 작품에 대해, 그것의 장점과 단점을 합리적인 언어로 풀어낼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다면, 그는 사실상 극장을 드나드는 수많은 대중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존재일 뿐이다. 자신의 감상을 과장된 수사로 포장하여 진열하는 것은 비평이 아니다. 물론 아름다운 문체와 현란한 수사를 구사하는 비평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비평을 비평이게 하는 것은 작품 그 자체에 대한 진지한 접근과 해석이며, 그것을 포기하는 순간 평론가는 자신의 존재론적 위의를 상실하게 된다.

진중권이 '디 워' 사태에서 유일무이한 '비평가' 였던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디 워'라는 말도 안 되는 영화 앞에서 수많은 영화 평론가들이 입을 다물거나 버벅거리고 있을 때, 진중권은 브라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각오로 그 작품이 가지고 있던 서사적 결여를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는 한 단어로 압축해내는데 성공한 유일한 인물이다. 독일에서 미학을 전공하고 돌아온 사람 답게, 그는 자신이 아는 고전적인 미학 이론에 근거하여 '디 워'라는 작품 자체가 가지고 있는 결함에 치명타를 날렸다. 이것은 허지웅이 말하는 것처럼 '디 워'를 "현상으로 접근"하려 했던 여타 사람들이 보여주지 못한 미덕이다.

비평에 있어서 어떤 사태를 바라볼 때, 그것에 "현상으로 접근" 하는 것은 결국 대상 그 자체를 비평하는 것에 미치지 못한다. 황우석 사태의 핵심에는 사이언스에 게재된 황우석의 논문이 있었고, '디 워' 사태의 핵심에는 쇼박스의 극장에 내걸린 심형래의 영화가 있었다. 황우석 사태가 벌어지고 있을 때에도, 그때에는 진중권 본인을 포함하여, 그 광기에 "현상으로 접근"한 사람들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하지만 정작 그 파문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집요한 탐구와 과학적 검증을 통해 황우석의 논문 그 자체가 날조된 것임을 밝혀낸 MBC PD수첩의 황학수 PD였다. '디 워' 파동도 마찬가지다. 대중이 어쩌고 광기가 어쩌고 떠드는 이들은 많고도 많았다. 하지만 정작 '디빠'들의 파동을 잠재우고 '디까'들에게 이론적인 무기를 제공하여, 중간계의 균형을 50대 50 정도로 바로잡은 이는 '디 워'가 2000년 전부터 구리다고 정평이 났던 극작법인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산물임을 폭로한 진중권이다. 그가 작품 자체에 대한 치명타를 가하지 않았다면, 허지웅 같은 희생자가 아무리 대중의 광기 앞에서 소녀처럼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한들 '디 워' 사태는 곱게 마무리되었을 리 만무하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는 표현이 공중파에 등장한 것은, 허지웅을 포함하여 진중권의 계몽주의를 마뜩찮게 생각하는 이들이 불평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지닌다. 앞서도 잠시 언급하였지만 그 마법의 여덟 글자는 '디 워'의 서사가 엉망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표현할 언어를 찾지 못해 수세에 몰려 있던 디까들에게 천군만마와도 같았다. 대중들이 어려운 말이라면 무턱대고 싫어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대중들은 어려우면서도 자신들이 그 맥락을 파악할 수 없는 말을 싫어한다. 그 용어를 사용하는 '지식 계층'으로부터 소외당하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어려운 용어를 사용한다고 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맥락에서 차분한 설명과 함께 그것을 풀어준다면 대중들은 그것을 선선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바로 그렇다. '디 워'라는 모범적인 텍스트와 함께 그 말을 듣고 보니, 한 방에 쉽게 이해가 되더라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대중들은 생각보다 그리 심하게 멍청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들에게 계몽을 해줄 수 있는 비평가가 진중권 외에는 없었던 것이다.

(보론: '디 워' 사태에서 진중권이 비판받아야 할 지점은 그게 아니다. 그는 '디 워'의 CG를 '그럭저럭 봐줄 만 하다'고 평가함으로써, 디빠들이 딛고 설 수 있는 최소한의 영토를 승인하는 전략적인 패착을 범하였다. 물론 개별적인 오브젝트의 완성도는 나쁘지 않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들을 한 화면 안에 합성하는 과정에서 동일한 프레임 안의 피사체가 지녀야 할 질감을 전혀 살리지 못했다는 것은, 거기서 동원된 CG가 영화를 영화답게 만드는 데 복무하지 못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런 CG는 아무리 따로 떼어놓고 볼 때 그럴싸하다 한들 좋은 CG가 아니다. 하지만 진중권은 고사하고, 전문적으로 영화를 비평하는 이들 중에서 이러한 문제점을 큰 목소리로, 전문가적인 식견과 함께 제시한 이가 과연 있던가?)


2.

이러한 논의를 통해 나는 진중권이라는 비평가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그는 '디 워' 같은 개 쓰레기 영화도 찬찬히 바라보고 자신이 가진 비평적 언어로 해설하려 했다. 진중권은 한국 비평계에 횡횡하던 가짜 규칙을 허물어뜨리고 진짜 논쟁을 시작한 유일한 인물이다. 그는 현실 속의 대상 그 자체에 대한 응시의 끈을 놓치지 않는, 대한민국에서 보기 드문 비평가인 것이다. 문제는 진중권이 지닌 그러한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적다는 데 있다. 이명박 싫어하는 게 자랑이지만 사실 그 지지자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일련의 네티즌들은 진중권을 오직 '극우파 까는 호두까기 인형' 정도로 치부하려 든다. 그런 식으로 진중권을 폄하하는 것이야말로 '평론 혐오'의 한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진중권이 지닌 가치는 그가 쓰는 칼럼이 아닌, 앞서 길게 논한 비평가로서의 자세와 더불어, 그 칼럼의 기반을 형성하고 있는 이론적 틀에 있기 때문이다.

진중권이 몇 편의 글을 통해 넌지시 언급한 후 《호모 코레아니쿠스》에서 본격적으로 한국의 인터넷 문화를 '구술문화'로, 서구의 분위기를 '문자문화'로 평가하는 모습을 보이자, 지식인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졌다. 논거로 댈 게 따로 있지, 무슨 구닥다리 월터 옹 이야기를 꺼내냐는 것이 그 첫 번째였다. 그러한 논의 구조는 지나치게 편리한 의제 설정이라는 식의 비판이 두 번째 조류를 형성하고 있다. 요컨대 '구술문화와 문자문화'라는, 한국 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진중권의 문제 제기는 비평계에서 거의 반향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다. 한윤형이 "지존키워 진중권의 전투일지"에서 연대기순으로 정리해놓은 바와 같이, 진중권은 한국의 인터넷 토론의 역사 그 자체라고 불리워도 무방한 인물이다. 레닌을 빼놓고 러시아 혁명을 논할 수 없듯, 진중권을 빼놓고 인터넷 말싸움을 논할 수도 없다. 그런 그가 한국의 인터넷 문화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표현하였는데, 그것이 여느 사람들이 내놓던 것과는 사뭇 다른 지점을 짚고 있다면, 우리는 한 번쯤은 그의 의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카이사르가 쓴 《갈리아 전기》가 당시 골 족의 풍속을 파악하는 데 가장 중요한 자료라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원조 진빠 한윤형의 말에 따르면 진중권은 실제로 《갈리아 전기》의 문체와 형식을 모방하여 '조독마 원정기'를 쓸까 고민했었다고 한다.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에 대한 논의로 돌아가보자. 가령 이글루스 블로거 찬별은 "영어 교육 잡상"이라는 포스트에서 이오공감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 바 있다.

그러나 이글루스의 반대의견의 상당수는, 같은 사람이 하나의 글 안에서
1) 영어 교육의 필요성 자체를 부정했다가,
2) 영어 공교육의 필요성은 있지만 방법이 틀렸다고 헀다가,
3) 박명이와 인수위는 애초부터 하나같이 ㅄ들이라고 했다가,
기타 등등 상호 모순적 주장을 이것저것 말하는데,
그런 글에 찬성할 수 있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 뿐이다. 모두들 행간만 읽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는 글 내용이 아닌 <이미지> 만을 읽기 때문이다. -_-

찬별, "영어 교육 잡상", 찬별은 초식동물, http://coldstar.egloos.com/3598330, 2008년 1월 30일

글의 내용이 아닌 이미지만을 읽는다는 말은, 진중권이 인터넷 토론을 '목소리 큰 놈이 이기고, 내 편 많은 놈이 이기는 싸움'이라고 평가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성립할 수 있는 관찰이다. 찬별의 관찰과 진중권의 관찰이 지니는 공통점을 이론적인 차원에서 포괄하고 한국 사회가 나아가기 위한 방향을 제시하기 위한 목적을 염두에 둔다면, 인터넷을 포함한 한국의 문화를 '구술문화'로 보는 것은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는 의제 설정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진중권의 구술문화 논의에는 큰 약점이 존재한다. 개항 이후 100년이 넘었음은 물론이거니와, 조선 시대의 문자 문화가 한국에 계승되어 있지 않다고 보기에도 다소 무리가 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과연 지금 이 시점의 대한민국에 왜 문자문화가 이리도 희박한지, 혹은 왜 아직까지도 구술문화가 판치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호모 코레아니쿠스》에서 진중권이 내놓는 대답은 '이게 다 박정희 때문이다'로 요약될 수 있으며 그것은 그 논의에 대한 실망감만을 야기시킬 뿐이다. 설령 그것이 답이라고 해도, 그 책에서 제시된 논증 과정은 너무도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진중권이 쏟아내는 칼럼에서 얼마나 이명박을 '시원하게' 까느냐에만 관심이 있지, 그가 어떤 이론적 바탕 하에서 이명박을 비판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이명박을 비판한다는 점에서는 의견을 같이 하지만, 한국이 구술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한 전근대적인 사회라는 문제의식에는 비판의 칼날을 세울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의 지식인들, 혹은 텍스트를 소비하는 대중들은 진중권을 그저 '극우파 잡는 광대'로만 치부할 뿐이다. 어쩌면 그 광대야말로 진실을 바라보고 있는 유일한 증인일지도 모르는데.


3.

진중권이 지닌, 비평가로서의 성실한 자세는 대중이 아닌 날로 먹는 '칼럼니스트'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디 워'에 대한 값싼 감상을 그대로 내놓기가 면구스러웠던지 자기 자식들을 방패막이 삼고 덤벼들었던 김규항이 그렇고, 분명 본인은 '선빵'을 맞았는데도 자기 대신 대중들과 싸워주는 진중권에게 투덜거리는 허지웅이 그렇다. 앞서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대중들은 평론가의 의견과 함께 제시되는 전문적인 지식을 결코 혐오하지 않는다. "바야흐로, 평론혐오시대"가 도래한 것은 대중들이 어쩌고 저쩌고 해서가 아니라, 평론가들이 대중들이 납득할만한 지적인 권위를 획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나오는 영화평론들을 보면 하나같이, 영화 그 자체에 대한 평론가의 지식과 식견은 온데간데없고, 네티즌들이 리플로 찍 하고 달아놓으면 그만일법한 감상을 거창한 수사로 처발라놓은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 용도로 지젝이니 라캉이니 주디스 버틀러니 등등이 남용되고 있기 때문에 한국 인문학의 자리가 좁아지고 있는 것이다.

진중권이 이루어놓은 업적을 보라. 그는 '디 워'를 두 눈으로 똑똑히 (두 번이나) 보았고, 그 속에서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는 초보적인 미학 이론의 결여를 발견해내어, 그것을 대중에게 가르쳤다. 진중권이 오직 비난만을 당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오산이다. 소녀시대는 벤야민이 말한 대량복제의 산물이고, 반면 원더걸스는 좀 더 전통적인 아이돌에 가깝기 때문에, 나는 그래도 소녀시대가 좀 더 좋다고 적혀있던 '위(僞) 진중권'의 인터뷰를 떠올려보자. 그러한 텍스트가 존재한다는 것은, 진중권이 가진 비평가로서의 권위를 대중들이 시인하고 있음을 방증한다(반면 허지웅은 자신의 블로그에서 원더걸스에 대한 애착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음에도 불구하고, 원더걸스 팬들은 '허지웅도 좋아하는 원더걸스'라는 식으로 소녀시대 팬들과 전쟁을 벌이지는 않는다).

또한 그는 자신이 겪어낸 인터넷과, 그것을 포괄하고 있는 한국 사회의 맥락을 이론적으로 종합하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고 있다.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에 대한 그의 논의를 곱씹으며, 나는 몇 가지 흥미로운 지점을 발견하였고 그것에 대한 추가적인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나는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대한민국에 극히 드물게 존재하는 '진짜 비평가' 진중권의 텍스트를 곰곰히 되짚어보는 노력을 기울였으면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너무도 많은 지식인들을 그저 소비만 해오지 않았던가. 이제는 그들의 목소리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어야 할 시점이다.

일전에 만난 KBS의 안주식 PD는, 향후 5년간 진중권이 어떻게 살아남느냐가 우리 사회를 가늠할 수 있는 시금석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진중권이 이명박 정권의 안기부에 끌려가 주리를 틀리고 고문을 당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프레시안에 올라오는 칼럼들이 보여주는 거친 호흡과 완성되지 못하는 문장 등을 보고 있노라면, 걱정이 앞선다. 자신이 글을 생산하는 사람이라고 착각하지만 그저 약간의 대중을 몰고 다니는 것으로 밥벌이하고 사는 청맹과니들, 그리고 그들에게 호응하면서 그저 글의 '이미지'만을 소비하는 대중들이 결합하여, 진중권과 같은 진정한 비평가들은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열린우리당, 아니 통합민주당은 총선을 의식한 나머지 이명박 정부에 대한 적극적인 항쟁의 뜻을 일찌감치 접어버렸다. 결국 한반도 대운하는, 완성되지 못한다 할지라도 착공은 될 것이고, 남한강과 낙동강의 상류에 사는 모든 생명체는 배를 까뒤집은 채 죽어나갈 것이다. 혀뿌리를 자른 채 콩글리쉬를 더듬거리는 지진아들이 인터넷에서 저글링처럼 뛰어다닐 때, 대상을 비평하는 대신 그저 "현상 차원"에서 논의하는 '글쟁이'들은 서로 못난 글에 추천의 리플을 달고 있을 터이다. 세상은 점점 이상해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에게 진중권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함으로써 그 괴이함에 어쩌면 맞설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앞으로 시대는 더욱 우울하게 흘러갈 것이다. 그래도 꼭지는 돈다.

2008-02-28

블로그와 인터넷 언론의 가능성

물론 한국적 상황에서 '블로고스피어는 언론의 대안이다'라고 말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집단적 아우성이 기존 저널리즘을 전부 대체할 수 있으리라 착각하는 청맹과니들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블로그라는 형식과 그것을 통한 기사 생산이 기존 언론에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간단하게 사실을 요약해서 말하자면, 미국의 경우, 다수의 언론사가 블로그 형식을 활용하여 독특한 컨텐츠를 대중들에게 공개하고 있고, 또 몇몇 유명 블로그는 기존 저널리즘에서 충족시키지 못하던 영역의 컨텐츠를 생산하며 뉴 미디어로 부상하고 있다.

가령 내가 매일 들어가보는 폴 크루그먼의 블로그는, TimeSelect를 무료화함과 동시에 뉴욕타임즈에서 자사가 보유하고 있는 칼럼니스트들에게 일괄적으로 블로그를 제공한 경우에 속한다. 폴 크루그먼은 그 블로그를, 자신이 쓴 칼럼에서 못다한 이야기를 풀어내거나, 칼럼에 사용된 자료들을 독자들에게 직접 제공하는 용도로 활용하고 있다(물론 부시와 오바마를 씹는 용도로도 매우 활발하게 사용하고 있다). 미국 빈곤층에 대한 그의 칼럼인 Poverty Is Poison을 본 후, 거기서 언급된 통계 자료를 직접 읽었을 때 느꼈던 재미의 쏠쏠함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뉴욕타임즈는 자사가 보유하고 있는 칼럼니스트들에게 블로그를 제공함으로써 한 차원 높은 수준의 저널리즘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블로그에서 출발하여 기존 미디어에서도 인정받는 대표적인 사례로 나는 Lifehacker.com을 꼽는다. 라이프해커는 지나 스테파니가 만든 블로그인데, 특히 컴퓨터와 관련하여 일상 생활과 업무에 도움이 되는, 다소 geeky한 프로그램이나 해킹 방법 등을 매일 스무개 남짓 정리해서 올리는 사이트이다. 라이프해커에 들락거리고 있으면 미국인들이 얼마나 '생산성'에 환장하는지, 인간의 행동과 생산성을 기계처럼 묘사하는 일에 얼마나 친숙한지, 뭐 이런 것마저도 확실하게 느낄 수 있다. 아,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아무튼 블로그에서 출발하여 언론으로서의 입지를 굳히고 있는 사이트가 미국에는 없지 않다. 비록 지금은 IT 분야에 주로 한정되고 있지만, 그 영역은 점점 넓어지고 있는 추세이다.

올블로그나 다음 블로거 뉴스와 같은 '블로고스피어'가 언론의 대체물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앞서도 말했지만 확실하다. 그것은 사실로부터 새로운 정보를 캐내는 대신, 기존에 밝혀진 사실에 대한 블로거들의 의견을 집산하는 역할만을 겨우 수행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곳에서 메인 화면에 편집되고 덩달아 조회수를 높이려는 블로거들이 넘쳐나는 만큼, 한국의 인터넷 환경에서는 사실이 아닌 의견만이 넘실거리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의 블로거는 저널리스트가 될 수 없고, 또한 그 차원에서의 '블로그'는 언론을 대체할 수 있을만한 형식이 결코 되지 못한다.

하지만 웹에 게시물을 시계열적으로 업데이트하는 것이 블로그의 가장 원초적인 개념 정의라고 할 때, 그러한 형태는 개인이나 작은 규모의 집단이 매체 혹은 유사 매체를 꾸리기에 가장 적합한 방식이기도 하다. 태터툴즈에 기반하여 하루 2만명 정도의 조회수를 올리고 있는 익스트림무비의 경우를 보면 그렇다. 강유원 홈페이지의 부속물인 그의 서평란 또한, 일종의 서평 매체로서 갖추어야 할 요건을 어느 정도 충족하고 있다. 블로그라는 형식이 개발되기 전, 인터넷에 접속한 사람들이 다들 홈페이지를 만들고 있었을 당시에는 이런 일이 용이하지 않았다. 듀나처럼 매일 웹페이지를 손으로 뜯어고쳐가며 업데이트를 한다고 해도, 블로그가 제공하는 RSS 기능이 없으니 방문자가 매번 찾아오게 만들지 않는 한 조회수를 유지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 모든 정보가 시계열적으로 1열 정렬된다는 것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언론과 네티즌들의 지나친 설레발이 불러일으키는 반감을 꾹 누르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면, 블로그는 개인이 소규모의 언론 활동을 하기에 가장 적합한 웹 표현 방식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언론'으로 기능하는 블로그가 턱없이 부족한 것 또한 사실이다. 나는 그 이유를 블로그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찾는다. 한국에서 통용되는 맥락을 놓고 볼 때 라이프해커나 kk.org/cooltools 따위는 전부 블로그가 아니다. '나의 생각을 표현하는 나만의 공간'이라는 식의 마케팅을 타고 블로그가 확산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한국 네티즌들은 블로그를 통해 자신의 '인간적인 냄새'를 풍기지 않고는 못 견디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지난번에 얼핏 언급하였지만, 오늘은 서평을 쓰고 내일은 영화평을 쓴다. 그리고 일주일 정도 잠수를 하다가 자신의 일상 잡사를 늘어놓거나 생활 속의 사소한 '깨달음'을 마치 엄청난 발견이라도 되는 양 떠벌이는 그런 공간이 우리가 아는 '블로그'가 아닌가.

블로그는 언론의 대안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블로그를 통해 언론의 대안적인 형태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인적 요건이 우선 충족되어야 한다. 한국의 네티즌들은 리플에 대한 엄청난 집착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자신을 향한 모든 리플이 자기 블로그 하나에 집중되기를 바라지, 어떤 특별한 분야에서만큼은 내 글을 이 사이트에 몰아 넣어야지 같은 생각에 그리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영화 평론을 쓰고 싶다면 영화 평론만을 올리는 블로그를 개설하는 편이 낫고, 서평을 꾸준히 쓰고 싶다면 알라딘 서재를 활용하는 편이 제일 낫다. 하지만 그러면 조회수가 떨어지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한 심리를 파악한 알라딘에서는 태터툴즈와 이글루스 등의 블로그에서 직접 서평을 작성하고 알라딘에 링크를 걸 수 있도록 하는 플러그인을 제공함으로써 네티즌들의 참여를 독려하고 있다. 한국 네티즌들의 관심사는 언론 형성이 아니라 리플 섭취인 것이다.

알라딘 서재가 흐지부지 망해버린 이유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추적 가능하다. 알라딘 서재는 서평이나 책과 관련한 이야기를 올리기에 최적화되어 있고, 반대로 일반 블로그로서의 기능은 상당히 미흡한 편이다. 그래서 그 곳에 터를 잡은 최초의 '알라디너'들은, 서평도 올리고 자기 개인사도 올리고 하다가, 그게 뭔가 영 어색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슬금슬금 다른 블로그 환경으로 자리를 옮겼던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아까도 말했듯이 한국 네티즌들이 절대 두 개 이상의 블로그를 유지하려 들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리하여 알라딘 서재는 사양길에 접어들었고, 결국 태터와 이글루스 등에 플러그인을 제공하며 중간적인 해결책을 모색하기에 이른다.

블로그를 통한 언론 형성이 난망한 이유는 기술적인 차원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문화적인 문제에 좀 더 가깝다. 타인의 블로그를 방문하는 사람 또한, 그곳에서 정련된 정보와 세심한 고찰을 읽으면서, 동시에 '주인장의 인간적인 면모'까지 느끼고 싶어하고 그런 것이 없으면 낯설어서 어쩔 줄을 모른다. 사실과 의견을 적절하게 배합하는 것이 저널리즘의 핵심이지만, 그 이전에 우선 사실은 사실대로 의견은 의견대로 명확하게 분리가 되는 것이 논리적 선행 요건이다. 이렇게까지 실컷 씹어놓고 보니 나름대로 훌륭하게 운영되고 있는, 적지 않은 수의 블로그의 이름이 머리에 스쳐지나가지만, 그것들이 온전하게 수용되어 그 블로그의 저자들이 매체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도록 할만한 환경이 조성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결국, 인터넷 언론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은 네티즌 자신들이다. 블로그 사용자의 노출증과 자기 중심성이 극복되고, 블로그를 방문하는 이들 또한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찾기 위해 인터넷을 하고 있다는 목적성을 확고하게 갖추지 못하는 한, 인터넷에서 생산되는 글이 기존 저널리즘을 위협하는 일은 그저 요원할 뿐이다.

2008-02-27

취향 테스트 결과

한윤형의 블로그에서 보고 나도 한 번 해봤다. 일단 결과는...












창의적, 예술적인 아방가르드 취향


당신은 여기 분류된 8개 취향 가운데 가장 예술적 감각이 뛰어납니다.


'전위적'이라는 단어가 당신에겐 어색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경험이나 교육이 아닌, 선천적으로 예술적 오감을 타고 났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선천적인 예술 에너지는 당신을 수준 높은 문화/예술 소비자로 만들어 줍니다. 

자신감과 솔직함은 당신 취향에 중요한 기준입니다. 대중을 의식하면서 쓴 시, 이성에게 잘 보이려고 그린 그림, 카메라 의식하며 하는 연기, 겉멋든 음악... 이런 것들은 경멸의 대상입니다. 서툴고 즉흥적이라도 자신만의 진실함이 있다면 아름답습니다.

이런 취향은 전세계 모든 평론가들이 공유하는 견해이기도 합니다. 당신이 비록 '평론'을 쓰기엔 지식이 부족할지라도 최소한 당신은, 전문 평론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우수한 심미안과 감별력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의 자화상.
고흐는 평생 참으로 많은 자화상을 그렸습니다.
모델을 살 돈이 없던 그는 평생 거울 속의 자신을 모델로 삼았죠.
아무도 바라봐 주지 않았던, 오직 거울 속의 자신만이 바라보던 자화상.
당신의 취향은 이 자화상을 사랑합니다.


좋아하는 것
당신은 어쩌면 괴짜라는 오해를 살 수도 있습니다. 최소한, 당신 취향은 지금까지 주류에 속한 적이 드물었으니까요. 그러나 세속적인 대중을 떠나 고답적인 예술 영역으로 들어온다면 당신은 영락없는 메인스트림입니다. 당신은 격식과 통념에서 벗어난 것들에 흥미를 느낍니다. 그와 동시에 그런 일탈적인 것들이 진실되길 바랍니다. 다음 시에는 바로 그런 진실이 있습니다. 



나,이번 생은 베렸어
다음 세상에선 이렇게 살지 않겠어
이 다음 세상에선 우리 만나지 말자

......

아내가 나가버린 거실
거울 앞에서 이렇게 중얼거리는 사나이가 있다 치자
그는 깨우친 사람이다
삶이란 게 본디, 손만 댔다 하면 중고품이지만
그 닳아빠진 품목들을 베끼고 있는 거울 저쪽에서
낡은 괘종 시계가 오후 2시가 쳤을 때
그는 깨달은 사람이었다


흔적도 없이 지나갈 것


아내가 말했었다 "당신은 이 세상에 안 어울리는 사람이야
당신,이 지독한 뜻을 알기나 해? "
괘종 시계가 두 번을 쳤을 때
울리는 실내:그는 이 삶이 담긴 연약한 막을 또 느꼈다
2미터만 걸어가면 가스벨브가 있고
3미터만 걸어가면 15층 베란다가 있다


지나가기 전에 흔적을 지울 것
괘종 시계가 들어가서 아직도 떨고 있는 거울
에 담긴 30여평의 삶:지나치게 고요한 거울
아내에게 말했었다: "그래,내 삶이 내 맘대로 안 돼"


"거울에 비친 괘종시계" 황지우


저주하는 것
당신은 (아마도) 훈계하거나 훈계받는걸 제일 싫어할 겁니다. 규율, 법, 질서, 사회 정화, 국민 정서 어쩌고 들먹이며 다른 사람의 생각과 취향을 제한하고 옭아 매려는 검열주의자, 엄숙주의자,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을 극도로 싫어합니다. 특히 다른 사람의 작품과 인생을 함부로 가치 판단하고 평가하고 거기에서 억지로 교훈을 찾으려는 행위에 역겨움을 느낄 겁니다.



인용된 황지우의 시가 마음에 든다. 아무튼, 다른 결과는 어떻게 묘사되고 있는지 궁금해서 이것 저것 다 찍어봤는데, 이해할 수 없는 설명이 너무 많다. 가령 키치 예술 취향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딱 어울린다고 하거나, 하이퍼리얼리즘을 "심오하고 추상적인 미술 작품"의 대척점에 놓이는 조류로 언급한다거나, 서정주의 시 '자화상'을 "절제력에 의해 품격을 갖춘 시"라고 평하는 것 등이 전부 그렇다. 이 테스트를 만든 사람들의 취향과 문화에 대한 이해 수준을, 이런 식이니 도저히 신뢰할 수가 없다. 난 그렇게 '아방'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