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8-09

[별별시선]조선왕조 대 대한민국

광복 70주년을 앞두고 있는 이 시점에 질문을 하나 던져보자. 과연 세상의 모든 나쁜 것들은 다 ‘일제 잔재’이며, ‘우리 고유의 것’들은 모두 옳았는가? 역사학자 도면회 교수는 바로 그러한 통념에 도전했다. <한국 근대 형사재판제도사>를 인용해본다. “예를 들어 기존 연구 성과에서는 식민지 무단통치의 상징적 사례로 조선인에게만 태형을 실시했다는 사실을 지적해왔다. 심지어는 태형이 갑오개혁기에 폐지되었다가 일제 통치하에서 부활했다고 서술한 개설서나 교과서도 많다.”

‘일제시대’에 대한 이미지가 대체로 이런 식이다. 악은 일본에서 왔고, 설령 일제가 ‘우리’에게 뭔가 좋은 것을 선사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더 많은 수탈을 하기 위한 투자였으므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는 식의 사고방식 말이다. 하지만 조선과 대한제국은, 망국으로 치닫고 있던 그 시점, 문제가 많은 나라였다. “태형은 갑오개혁기에 폐지되기는커녕 중앙과 지방에서 법적 한도를 넘어 인명 살상에 이를 만큼 남용”되었으며, 그에 따라 일본은 “한국인들이 오랫동안 학정에 시달려 왔으므로 국정을 개선하면 한국인의 민심도 쉽게 수렴할 수 있고, 이를 통해 한국인들의 일본에 대한 저항을 잠재울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 것이다.

애석하게도 그들의 예상은 옳았다. 관군이 무너지고 있을 때 의병이 일어나 전세를 역전시켰던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은 이미 아득한 옛일이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대한제국의 황제와 고위 관료, 한때 2만여명에 달했던 한국군은 어찌하여 총 한 방 제대로 쏘지도 못한 채 권력을 빼앗기거나 무장해제를 당했단 말인가? 국가의 멸망을 앞에 두고 어찌하여 양반 유생층 일부만이 의병 투쟁에 나섰을까? 전국적 항쟁은 왜 일어나지 않았을까?” 조선의 뒤를 이은 대한제국의 백성들에게, 그 나라는 목숨을 걸고 지킬 가치가 없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조선왕조는 그렇게 몰락했다.

그리고 대한민국이 태어났다. 대한민국은 출발부터 조선왕조와는 단호히 선을 그었다. 헌법 전문을 펼쳐보자.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는 나라다. 물론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는 고조선부터 대한제국까지의 모든 과거가 포함되겠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이 민주공화국은 조선왕조가 아니라 그 지배층이 지켜주지 못한 망국의 백성들의 저항에서 시작한 나라인 것이다.

광복을 맞이한 지 벌써 70년이 다 되어서 그런지, 대한민국을 부수고 조선왕조를 건설하려는 이상한 움직임이 눈에 띈다. 종로도서관과 서울시립어린이도서관을 철거하고 사직단을 ‘복원’하겠다는 발상만큼이나, 태릉선수촌을 헐고 태릉과 의릉을 ‘복원’한다는 계획은, 조선왕조가 아닌 대한민국의 국민인 내게 모욕적으로 느껴진다. 망한 왕조의 귀신 모시는 자리가 민주공화국의 시민들이 이용하는 도서관이나 그 시민들을 대신해 국제무대에 서기 위해 훈련했던 운동선수들의 피땀 어린 공간을 밀어낼 수 있다는 발상이 과연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이러한 퇴행적인 문화재 ‘복원’ 시도는 오늘날 대한민국이 처해 있는 정체성의 위기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듯하다. 대한민국의 가치라 믿었던 것들이 부정당하고, 대신 조선왕조 시대에나 통용되었을 법한 사고방식이 복귀하고 있는 것이다. 헌법 제11조는 법 앞에서의 평등을 선포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는 대대적인 8·15 특사가 이루어질 것이며 ‘경제인’에 대한 사면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고한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이 말이 이토록 공허하게 들릴 수가 없다.

“황제의 전제권이 확립된 이후에는 사면 조칙이 더욱 빈번하게 반포되어 재판기관의 존재를 무색하게 할 정도가 되었다.” 대한제국이 그랬다. 대한민국은 망국의 역사를 되풀이하려는 듯하다. 경제적 격차는 신분제의 부활처럼 무겁다. 젊은이들은 ‘헬조센’에서 탈출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기 시작했다. 지옥을 뜻하는 ‘헬’과 조선의 일본식 발음 ‘조센’을 합친 말이다. 해방 70년, 조선왕조를 이겨내지 못하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다.


입력 : 2015.08.09 21:26:38 수정 : 2015.08.09 21:28:05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8092126385&code=990100#csidx647113877f821889e0a27d5af591661

2015-07-31

[북리뷰] 한국이 싫어서 떠나는 우리들에게

한국이 싫어서
장강명, 민음사, 1만3천원.


문득 떠올려보면, 장강명 이전에 황지우가, '한국을 뜨고 싶다'는 욕망을 문학으로 포착해냈다. 영화 시작 전 애국가가 울려퍼지는 극장에서 "우리도 우리들끼리 / 낄낄대면서 / 깔쭉대면서 /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 한 세상 떼어 메고 /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싶지만, 행만 바뀐 채 곧장 이어지는 문장으로 현실이 엄습한다. "하는데 대한 사람 / 길이 보전하세로 /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 주저앉는다" 황지우의 절창 '새들도 새상을 뜨는구나'의 뒷부분이다.

기자 출신의 젊은 소설가 장강명의 <한국이 싫어서>도 비슷한 정서의 화자를 주인공으로 삼는다. 하지만 이제는 극장에서 애국가가 나오는 세상이 아니기에,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당하는 나라가 아니기에, "주저앉는다" 외의 다른 선택지가 가능해졌다. 한국이 싫어서, 한국을 떠나고자 마음먹고 실행에 옮기는 '계나'라는 이름의 여성이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왜 한국을 떠났느냐. 두 마디로 요약하면 '한국이 싫어서'지. 세 마디로 줄이면 '여기서는 못 살겠어서.' 무턱대고 욕하진 말아 줘. 내가 태어난 나라라도 싫어할 수는 있는 거잖아. 그게 뭐 그렇게 잘못됐어? 내가 지금 "한국 사람들을 죽이자. 대사관에 불을 지르자."고 선동하는 게 아니잖아? 무슨 불매운동을 벌이자는 것도 아니고, 하다못해 태극기 한 장 태우지 않아. 미국이 싫다는 미국 사람이나 일본이 부끄럽다는 일본 사람에게는 '개념 있다'며 고개 끄덕일 사람 꽤 되지 않나?(11쪽)

모든 사람들이 한번쯤은 입에 담아봤을 바로 그 말, '에이, 이놈의 나라에서 더는 못 살아'를 적나라하게 제목에 담아냈다는 것만으로 이 책은 발간 즉시 화제작이 되었다. '한국이 싫어서' 떠나고 싶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어쩔 수 없이 뭉개고 살고 있다는 것, 그것은 대한민국의 공공연한 비밀이었던 것이다. <한국이 싫어서>는 계나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 화자의 입을 통해, 한국이 싫어서 이민을 꿈꿨지만, 정말 한국이 싫어서라기보다는 삶에서의 작은 행복을 찾고 싶어서 한국을 떠나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직선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한국이 싫어서>는 2015년 최고의 문제작이다.

하지만 박수를 몇 번 치고 책장을 덮기엔 아쉬움과 의문점을 남기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떨치지 못한 질문은 이것이다. 작가는 남자인데, 왜 '한국이 싫어서' 이 나라를 떠나는 1인칭 화자는 여성으로 설정되어 있는가? 한국을 굳이 떠나야만 하느냐고 묻는 남자친구에게 계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어차피 난 여기서도 2등 시민이야. 강남 출신이고 집도 잘 살고 남자인 너는 결코 이해 못해."

그렇다. 한국은 한국인들이 사는 나라지만, 그 표준적인 '한국인'은 어디까지나 부모 모두 한국인인 남성일 뿐이다. 실제로 많은 여성들이 해외 여행을 통해, 한국 사회로부터 벗어나는 해방감을 느낀다. 똑같은 일을 해도 남성 대 여성의 평균 임금은 100대 62다. 여성의 노동은 남자의 그것에 비해 절반을 겨우 넘기는 평가를 받는다는 뜻이다. 세계 그 어디에도 완벽한 성평등이 구현된 나라는 없지만, 한국은 유독 심하게 여성에게 가혹하다.

여기서 작중 화자를 여성으로 설정하고 1인칭 서술을 한 장강명의 선택은 양면적 효과를 낳는다. 일단 그는 '드러나지 않았던 목소리'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해냈고, 그 자체만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여성형 1인칭 화자의 내면을 서술되어 있는 탓에, 작가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주인공 계나의 판단과 선택은 사회 통념적 비난을 돌파해낼 수 없다. 이 책은 '요즘 젊은이들'을 손쉽게 비난하는 사람들의 의식 세계를 뒤엎지 못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젊은 여자'의 목소리에 애초부터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은 해외 여행을 가기도 하고 이민을 떠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으로부터, 한국 사람으로부터,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한국이 싫어서> 이후, 더 많은 문학적 도전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해본다.


2015-07-16

[북리뷰] 요리하는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

날것의 인생 매혹의 요리사
후안 모레노, 미라크 탈리에르초, 반비, 2만원.

바야흐로 쉐프 전성시대다. TV만 틀면 칼 든 남자들이 흰 옷을 입고 요리를 하고 있다. 누구는 유학파라는 둥, 누구는 국내에서 공부했지만 그에 못지 않은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둥, 심심찮게 그들의 배경까지도 엿들을 수 있는 세상이다. 하지만 요리라는 것이 과연 쉐프만의 전유물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지금도 수많은 이들이 다양한 장소와 맥락 속에서 요리를 한다. 우리가 요리를 하고 음식을 먹는 것은 숨을 쉬는 것만큼이나 생존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리사들 가운데에는 독특한, 어쩌면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한 사연을 겪은 이들이 있을 것이다. <슈피겔>의 기자 후안 모레노가 사진작가 미르코 탈리에르초와 수다를 떨던 중 떠올린 아이디어도 바로 그것이었다.

"미르코와 나는 독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가장 흥미로운 요리사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우리가 내건 단 하나의 조건은 독자들이 따라 할 수 있는 각자의 최고 요리와 함께 각자의 사연을 들려달라는 것이었다. 음식의 질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이야기의 질이다.(12쪽)"

그렇게 수집된 17명의 요리사들이 보여주는 사연들은 하나같이 비범하고, 때로는 충격적이며, 어떤 경우에는 슬픔을 안겨준다. 삼촌의 식당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삼촌이 마피아의 거물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오히려 인기를 끌었고, 지금은 빌 클린턴이나 마돈나도 예약을 하지 못할만큼 잘나가는 뉴욕의 이탈리안 레스토랑 '라오스'의 쉐프인 프랭크 펠레그리노의 경우는 그저 재미있고 유쾌하다.

하지만 우간다의 독재자 이디 아민의 전속 요리사였던 오돈테 오데라의 이야기는, 그저 인터뷰를 통해 전해듣고 있을 뿐인데도 다소 섬뜩한 인상을 남긴다. 그 반대편에는 시위 현장마다 찾아다니며 '배가 고프면 투쟁도 없다'고 사람들을 독려하고 음식을 만들어 제공하는 밤 카트 같은 사람도 있고, 사라예보 내전에서 군인으로서 싸우다가 탈출하여 요리사의 길을 걷고 있는 니하드 마멜레지야의 사연도 존재한다. 요컨대, '요리사'라는 단 하나의 범주를 제외하고 나면,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이 더 많을 사람들의 이야기가 한 권의 책에 묶여 있는 것이다.

저자의 말은 단호하다. "레시피가 들어 있지만 이 책은 요리책이 아니다. 스타 요리사의 이야기가 있지만 스타에 대한 책도 아니다. 음식 이야기가 계속 나오지만 음식에 관한 책도 아니다. 이것은 오직 요리사에 관한 책이다."(13쪽) 그 요리사의 범주는 대단히 탄력적이며, 그만큼 많은 삶의 모습이 포착된다. 나이로비의 쓰레기 집하장에서 살아가면서 그 속에서 살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상대로 식당을 운영하는 여성이라던가, 텍사스 교도소에서 그 자신도 죄수의 신분으로 200명이 넘는 사형수에게 최후의 만찬을 차려주었던 남성 등,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뛰어넘는 모습이 <날것의 인생 매혹의 요리사>에 담겨 있다.

이 책을 직접 읽어보는 것은 독자의 몫으로 남기기로 하고, 여기서 우리의 현실을 돌이켜보자. 그렇게 TV만 틀면 누군가가 요리를 하거나 그것을 먹는 모습이 등장하고 있건만, 그 모든 요리사들은 '쉐프' 아니면 '엄마'로 양분되는 듯하다. 폼나는 흰 옷을 입고 멋진 태도로 고급스러운 요리를 만들어주는 남자들이 '쉐프'로 불리고 있는 동안, 일상을 지탱시켜주는, 시지프스의 바위 굴리기처럼 끝나지 않는 노동으로서의 '집밥' 차리기는 그저 엄마라는 이름의 여성의 몫일 뿐인 것처럼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요리가 인간의 삶에서 필수불가결한 본질적 요소라면, 그 요리의 양태 역시 다양할 수밖에 없고, 요리를 하는 사람인 요리사 역시 그저 두 가지 범주로만 쪼개질 수는 없다. 후안 모레노와 미르코 탈리에르초가 '다른 그 무엇도 아닌 요리사'에 집중하여 포착해낸 17개의 삶은, 도무지 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우리의 식문화와 그 식문화를 바라보는 비평적 시각을, 문득 부끄럽게 만든다. 먹방의 시대, 천편일률적인 '쉐프'들의 모습을 보는 게 지겨워진 이들에게, <날것의 인생 매혹의 요리사>를 권하고 싶다.



2015-07-15

미각의 제국, 엄마라는 식민지

1.

나는 황교익이 내게 "자유기레기"라는 폭언을 퍼붓기 전부터 그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가 '수요미식회'에 출연하기도 전의 일이다. <미각의 제국>이 나왔을 때 그 책을 읽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 책을 꺼내놓고 뒤적거리며, 최근의 논란에 대해 한 마디 덧붙여본다.

황교익의 칼럼 "‘백주부’ 백종원에 열광? 맞벌이엄마 사랑 결핍 때문"(문화일보, 2015년 7월 12일)을 읽고, 나는 경향신문에 "엄마 없는 하늘 아래"(경향신문, 2015년 7월 13일)라는 제목의 칼럼을 썼다. 나는 황교익의 칼럼이 '어머니즘'에 몰입한 나머지, 그가 집중적으로 거론하는 '맞벌이 여성'들에게 무심하고 잔인한 말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물론 내 칼럼에는 그 내용만 들어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런데 황교익은, 인터넷에 기사가 올라온지 고작 한 시간 가량 지난 시점에서, "말하지 않은 것도 말하였다 하는가"라는 제목의 블로그 게시물을 올렸다. 자신의 칼럼은 '맞벌이라는 현상이 있었고 그로 인해 80-90년대생들이 '엄마가 해주는 집밥'을 못 먹고 자랐다는 사실을 직시했을 뿐, 여성들에게 죄책감을 부추긴 바 없다'고 반론했다.

그 과정에서 "글 읽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기레기", "자유기레기" 같은 표현이 등장하였는데, 그러한 표현은 어떤 면에서 부차적인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자신이 여성차별적인 내용을 생각하고 또 글로 표현했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황교익은 7월 12일자 칼럼에서 맞벌이 여성들의 죄책감을 건드린 게 맞다. 그 내용은 지난 블로그 게시물 "말한 것도 말하지 않았다 하는가"에서 상세하게 다루었으므로, 오늘은 좀 더 넓고 본질적인 이야기를 해보자.


2.

"맛있는 음식은 이 세상 어머니의 수와 같다"는 말을 들었다. ①어머니가 자식에게 먹이는 음식만큼 사랑과 정성이 들어간 음식은 이 세상에 없다는 말일 것이다. ②어머니의 음식에 대한 이런 애착은 어머니가 부재했을 때 비로소 드러난다. 바로 곁에서 매일 먹을 때는 모른다는 말이다. ③아내의 음식도 그럴 것이다.(94쪽, 원문자와 강조는 인용자)

<미각의 제국>의 서른한번째 항목 "아내"에서 인용한 대목이다. 바로 이런 사고방식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다. 과연 그럴까?

①에 대해 우선 생각해보자. 저 문장은 사실의 기술이라기보다는 어떤 이상적 상태를 표현한 것으로 보이므로, '세상 모든 어머니가 자식에게 정성스럽게 맛있는 요리를 해주지는 않는다' 같은 사례 나열식 반박을 하지는 않겠다. 황교익의 칼럼이 SNS에 등장한 후 '어렸을 때 우리 엄마가 나한테 해준 맛없고 이상한 음식'을 토로하는 작은 축제가 벌어졌었다는 사실만 기록해 두기로 한다.

①의 본질적인 문제는 그것이 개념상 여성일 수밖에 없는 '어머니'에 대한 성차별적 발언이라는 데 있다. 성차별이라고? 저것은 어머니의 음식과 사랑을 찬양하는 말 아닌가? 그렇다. 하지만 그것도 성차별이다. '적대적 성차별'이 아닌 '호의적 성차별'이란 말이다.







어머니나 부인의 역할, 특히 가사 노동에 대해 과도하리만치 상찬을 쏟아붓는 것은, 위에서 인용된 트윗에서 말하는 바 "호의적 성차별"에 속한다. 가사 노동은 여자(라기보다 어머니+아내지만 그 외의 여성들은 존재 자체가 거론되고 있지 않다)의 몫, 그 밖의 것은 남자의 몫, 이렇게 세상을 나누어보고 있다는 것 자체가 성차별적임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물론 황교익이라는 한 사람의 가정 생활에 대해서는 내가 아는 바가 없고, 직접적으로 간섭할 바도 아니며, 이 글 또한 그의 개인사에 대한 어떠한 예단과 평가도 담고 있지 않음을 명백히 해둔다(오해를 피하기 위해 밑줄까지 그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설령 남편이 가계 수입의 전부를 벌어오는 경우라 하더라도, 자녀 양육과 가사 노동에서 일정 부분을 분담하는 것은 현대적이고 평등한 가정을 이루는 기본이다.

'성차별'이라는 말이 과도한가? 표준국어대사전은 차별을 "둘 이상의 대상을 각각 등급이나 수준 따위의 차이를 두어서 구별함"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여성을 낮춰보는 것 만큼이나, 불필요하게 '숭배'하는 것 역시, 차별의 개념 정의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일이다.

아내가 단지 내 미각만 조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조정하고 있다는 것을 서서히 깨닫고 있다. 어머니가 어린 나를 그렇게 하였던 것처럼 아내가 그러고 있는 것이다. 음식을 해서 먹인다는 것은 곧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일이다. 이것은 가장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사랑의 행위이다. 아내가 내 삶의 조정자 노릇을 할 수 있는 권위는 이 사랑이 부여한 것이다.(95쪽)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나는 지금 황교익이라는 사람의 개인적 삶에 대해 그 어떤 예측이나 평가도 하고 있지 않다(다시 한 번 강조하기 위해 또 밑줄을 그었다. 이 게시물은 그의 책에 담긴 내용의 '담론적 차원'에 대한 평가지, 저자의 '삶'에 대한 언급이 아니다). 다만 지금까지 수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이렇듯 '가사노동하는 어머니-아내'를 신성시하는 목소리 그 자체가 여성 억압의 근원이었음을 지적해왔다는 역사적 사실만큼은 절대 양보할 수 없다.

가사 노동을 여성에게 모두 떠맡기고 그것을 '숭고한 어머니의 사랑'으로 칭송하는 남자들의 모습은, 마치 아이티에서 노동하는 노예들을 바라보는 고갱의 감상적 시선을 연상시킨다. 혹은, 기왕 황교익이 일제 식민지 시절을 언급하였으니, '조선의 미'를 예찬하던 일본 지배층의 아련한 눈빛과도 유사하다 할 수 있겠다. 당연히 그러한 노동은, 수혜자의 입장에서 볼 때, 전원적 풍경의 일부로 감상의 대상이 된다. 자신이 하는 고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3.

게다가 이러한 전근대적 '어머니-모유-집밥-사랑'의 물신적 숭배, 이른바 '어머니즘'은, 황교익 본인의 과학적 음식 세계와 전혀 상응하지 않는다. 나는 그의 책 <미각의 제국>을 재미있게 읽은 독자 중 한 사람이지만, 도저히 의문을 지울 수 없다.

지금도 수많은 '어머니'들은 이상한 요리를 하고 있다. 그냥 이상한 요리를 하는 수준을 넘어, 의학적으로 전혀 검증되지 않은 온갖 '효능'에 혹하고, 그러면서도 '설탕 두 숟가락 대신 매실청 세 숟가락 넣기' 같은 비과학적, 비효율적 레시피가 한국인의 밥상을 점령하고 있다.

말하자면 오늘날 한국인의 밥상을 가장 망치고 있는 프로그램은 '여섯시 내고향'이나 '생생정보통'이지 '집밥 백선생'이 아니라는 뜻이다. '여섯시 내고향'을 보자. 모든 식재료를 고추장에 버무리고 튀김옷을 입혀서 '탕수'로 만들어버린다. '생생정보통'이나 'VJ 특공대'에서 나오는 온갖 '맛집'들은 또 어떤가. 이 문제는 대한민국에서 황교익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어머니'들이, 과연 이러한 정보에 면역력을 가지고 있는가? 많은 경우 그렇지 못하다. 황교익 본인의 삶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대한민국 국민들의 '집밥'은 바로 저런 TV 프로그램에 휩쓸리고 있다.

요리에 관심 있는 시청자들이 왜 백종원의 '차라리 설탕을 넣어라'에 열광했는지 황교익도 알고 있지만, 부정하고 싶은 것 아닌가? 황교익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이상적인 '집밥' 말고, 현실의 '집밥'은 어차피 지금도 설탕투성이다. 단지 '설탕을 먹는다'는 죄책감을 덜기 위해 '매실청' 같은, 음식의 향을 더욱 망가뜨리는 변종 식재료를 투입하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황교익의 '어머니즘'은, 황교익 자신이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를, 더욱 악화시킨다. '한식 레시피가 전반적으로 너무 달다'는 황교익의 비판은 타당하다. 그런데 그렇게 불러일으켜진 죄책감 앞에서, 대중들, 특히 '집밥'의 '조정자' 역할을 하는 많은 주부들은, 설탕을 안 넣고 대신 다른 첨가물을 투입하여 단맛을 벌충한다. 그게 '어머니의 사랑'이다. 단맛이 부족해서 맛없게 느껴지는 집밥을 해주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몸에 안 좋은 설탕을 먹이고 싶지는 않아서, 설탕 범벅인 매실청으로 단맛을 내는, 그런 모순된 사랑 말이다.

황교익 본인이 원하는 '한식의 레시피 변화'를 이끌고 싶다면, '어머니의 밥은 무조건 옳다' 같은 전근대적 도그마를 깨뜨려야만 하는 것이다. 현실의 '어머니'들이 해주는 '집밥'은, 황교익의 이상 세계의 그것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구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4.

황교익이 꿈꾸는 '미각의 제국'은 '어머니'라는 식민지가 없으면 실현되지 않는다. 그 '어머니'는 일단 모유 수유를 해야 하고, 자식에게 '집밥'의 맛을 가르치기 위해 출산 후 무려 6년이나 육아 휴직을 하는 그런 어머니이다. 요컨대 돈은 돈대로 벌어오고, 밥은 밥대로 다 차려야 황교익이 말하는 '어머니'가 될 수 있다.

"국가는 엄마가 자신의 품에서 자식을 온전히 키울 때까지, 적어도 6세까지, 경제적으로 완벽히 보장해주어야 한다"는 황교익의 육아 관련 정책 제안은, 앞서 말한 '호의적 성차별'의 예시로서 완벽하다.

제아무리 숭고하다고 미사여구를 덧붙인다 한들, 그런 시각이 성차별적이라는 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세상에나, 6년의 육아휴직이라니, 멀쩡히 사회 속에서 한 사람의 몫을 하는 여성보다 미취학아동의 '집밥' 입맛이 그렇게나 더 소중한가?

엄마가 "자신의 품"에서 자식을 "온전히" 키우려면, 일을 쉬는 수밖에 없다. 애 하나 낳으면 6년간 "경제적으로 완벽히" 보장해주어야 하는데, 세상에 그 어떤 기업이 미쳤다고 여성 사원을 뽑겠는가? 그 경제적 부담을 모두 국가가 진다면, 국가는 모든 여성들이 취업을 애초에 못 하도록 막으려 들 것이다. 재정적 부담이 엄청날 테니 말이다. 게다가 그 6년 동안 남자들은 승진하고 직업적으로 숙련도를 높인다. 저런 세상에서 여성은 모두 집에서 애 키우다가 애들이 다 자라면, 비숙련노동 허드렛일이나 할 수밖에 없다.

'어머니즘'은, 그 대변인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선량하고 순박하며 자연스러운 발상이 아니다. 오랜 역사적 맥락 속에 굳어져버린 차별적 성 역할관이 투영된 인습적 사고다. 나는 황교익이 부디 '어머니즘'을 극복하고, 변화된 현실과 개선된 대중적 인식 속에서, 그가 원하는 바람직한 식탁을 구현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덧붙임)

집밥은 그냥 집에서 먹는 밥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우리가 늘 밥을 해먹는 그곳이 바로 집이다. 그 집밥이 꼭 '어머니'와 연결될 필요는 없다. 개인적인 체험을 되짚어봐도 그렇다. 논산훈련소에서 내가 가장 먹고 싶었던 것은 내가 만든 파스타였다. 냉장고에 있는 아무 재료나 되는대로 썰어 넣고 볶아서, 대충 끓인 면에 대충 볶아 만든, 그런 얼렁뚱땅 파스타. 그게 나의 집밥인 것이다. '자신만의 집밥'을 가진 남성들이 더 늘어나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

2015-07-13

말한 것도 말하지 않았다 하는가

황교익의 칼럼 "‘백주부’ 백종원에 열광? 맞벌이엄마 사랑 결핍 때문"(문화일보, 2015년 7월 12일)을 텍스트 에디터에 퍼놓은 후, Ctrl-F를 눌렀다. 제목까지 포함해, 이 글에는 "엄마"가 총 30회 등장한다. "엄마"는 두 글자로 된 단어니, 총 60글자가 '엄마'를 표현하는 데 할애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저자 이름을 빼고, 제목을 포함하여, 본문 전체가 띄어쓰기 포함 2664자라고 나오니, 문제의 칼럼에는 "엄마"가 약 2.25퍼센트 함유되어 있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까지 신문 지면에 오른 칼럼 중 '엄마 함유율'로는 최고 수준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아빠"는 어떨까?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혹시나 싶어 "아버지", "파파", "부친" 등을 검색해봐도 마찬가지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황교익의 칼럼 "‘백주부’ 백종원에 열광? 맞벌이엄마 사랑 결핍 때문"에는 "엄마"가 30번 나올 때, "아빠"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텍스트에 대한 수량적 분석까지 하는 이유는, 7월 12일 밤 10시 51분에 올라온 이 블로그 게시물 때문이다. 황교익은 자신의 블로그에서 "말하지 않은 것도 말하였다 하는가"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그 내용은 내 칼럼 "엄마 없는 하늘 아래"에 대한 비판인데, 심지어 내가 기사를 읽기도 전에 읽고 비판 게시물을 썼다는 점도 놀랍지만, 더 충격적인 것은 그 내용이다.

황교익의 말이다.

'맞벌이를 했다, 그들은 아이들을 제대로 먹이기 힘들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만으로 죄책감을 부추긴다고 지레짐작을 하고 있다.

그러면, 그때의 그 상황을 누구든 말하면 안 되는 것인가.

맞벌이는 언급하면 안 되는 금기의 영역인가.

짐작을 넘어 나더러 무심하고 잔인하다는 억측의 말까지 붙인다.

그런데 정작 그의 칼럼을 좀 더 읽어보면, 맞벌이하느라 자녀들에게 밥을 해먹이지 못한 엄마들의 죄책감을 자극하고 있다는 게, 너무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황교익은 자신이 쓴 칼럼을 끝까지 읽어보긴 한 것인가?

‘백종원 엄마’의 음식을 두고 내가 “맛없다” 했으니 화가 날 만도 할 것이다. 이럴 바에야, 진짜 엄마한테 진짜 엄마 손맛을 배우면 어떨까. 엄마도 그때에 맞벌이하느라 사랑을 듬뿍 주지 못한 것에 마음 한구석이 늘 짠할 것이다.(강조는 인용자)

이 마지막 문장이 '죄책감 찌르기'가 아니면 대체 무엇인가?

앞서 우리가 꼼꼼하게 세어보았다시피 황교익의 7월 10일 칼럼에는 '아빠'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집밥을 제대로 먹어보지 못했다는 것은 중대한 삶의 기회를 빼앗긴 것처럼 묘사된다. 게다가, 거의 모든 칼럼니스트들이 가장 힘을 주는 마지막 문장에서, "엄마"는 "마음 한구석이 늘 짠할 것"이라고까지 한다. 다시 한 번 묻자. 이게 죄책감 강요가 아니면 뭔가?

왜 황교익은, 자신이 한 말을 두고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가?

물론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이 '엄마'에게, 또 '여성'에게, 나쁜 소리를 하고 있는 게 아니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기 때문에, 누군가 자신이 맞벌이 여성에게 "무심하고 잔인하다"고 비판하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것이 사실인 것을.

그는 블로그 본문에 "이 정도면 기레기이다"라고 내뱉은 것으로도 성이 안 풀렸는지, "#자유기레기인가"라는 태그까지 붙였다. 물론 음식에 대한 전문성에서 내가 황교익과 비교할 대상이 못 되는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내가 한 말을 하지 않았다고 우기거나, 우기면서 타인에게 인신공격을 하지는 않는다.

사실 진짜 문제는 황교익이 덧붙인 내용에 담겨 있다.

참고로 육아 관련 정책에 대해 내 의견을 밝히겠다.

이 내용은 오래 전부터 여러 강연과 방송에서 말한 적이 있어 아는 이들이 많다.

"국가는 엄마가 자신의 품에서 자식을 온전히 키울 때까지, 적어도 6세까지, 경제적으로 완벽히 보장해주어야 한다"이다.

이 정책은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 아이들의 권리'까지 감안하여 궁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소리를 하는지, 전혀 모른다. 이런 정책을 현실 속에서 실행한다면, 그는 차우세스크와 맞먹는 독재자로 역사에 이름을 아로새길 수 있을 것이다. 황교익의 '어머니즘'이 얼마나 현실 정합성이 없을 뿐 아니라 전근대적인지에 대해서는 새로운 글을 통해 이야기해보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