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문가들--말하자면 학계에 있지 않은 분들 혹은 다른 학문분야에 있는 분들--은 이따금 나에게 역사가는 역사를 쓸 때 어떻게 작업하느냐고 묻는다. 역사가는 뚜렷이 구분되는 두 가지 단계나 기간으로 나누어 작업한다는 것이 가장 상식적인 생각인 것 같다. 우선 역사가는 자신의 사료들을 읽고 그의 노트를 사실들로 채우는 데에 오랜 준비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나서 이 일이 끝난 다음에는 사료들을 치워놓고 노트를 꺼내 든 채 처음부터 끝까지 책을 쓴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나에게는 납득이 가지 않으며 그럴듯해 보이지도 않는다. 내 경우에는, 주요한 사료라고 생각되는 것들 중에서 몇 가지를 읽기 시작하자마자 너무나 좀이 쑤셔--반드시 처음부터가 아니더라도, 어디부터이든 상관없이--쓰기 시작한다. 그런 후에는 읽기와 쓰기가 동시에 진행된다. 읽기를 계속하는 동안 쓰기는 추가되고 삭제되며 재구성되고 취소된다. 읽기는 쓰기에 의해서 인도되고 지시되며 풍부해진다: 쓰면 쓸수록 나는 내가 찾고 있는 것을 더 많이 알게 되고, 내가 찾고 있는 것의 의미와 연관성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어떤 역사가들은 아마도, 마치 어떤 사람이 장기판과 말이 없어도 머릿속에서 장기를 두듯이, 펜이나 종이나 타이프 등을 사용하지 않고서도 이 준비단계의 글쓰기를 모두 머릿속에서 할 것이다: 이는 내가 부러워하는, 하지만 흉내낼 수 없는 재능이다. 그러나 나는 역사가라는 이름에 값하는 모든 역사가에게는 경제학자가 '투입(input)'과 '산출(output)'이라고 부르는 그 두 과정이 동시에 진행되며, 실제로 그 두 과정은 단일한 과정의 부분들이라고 확신한다. 만일 그것들을 분리시키거나 어느 하나를 다른 하나보다 우월한 것으로 삼으려고 한다면, 여러분은 두 가지 이단론들 중의 어느 하나에 빠지게 된다. 여러분은 의미나 중요성을 무시하는 가위와 풀의 역사를 쓰거나 아니면 선전문이나 역사소설을 쓰게 될 것이며, 역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런 부류의 글쓰기를 치장하려고 과거의 사실을 이용하게 될 것이다.
E. H. 카, 김택현 옮김, 『역사란 무엇인가』(서울: 까치, 2015), 개역판, 44-45쪽.
이 글에서 E. H. 카의 목적은 '사실'의 수집에 집착하는 랑케 식의 역사관을 비판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맥락에 이미 식상해버린 오늘날의 독자, 즉 나는, 순수하게 '작업 방법론'의 측면에서 이 대목을 재미있게 읽었다.
자료를 한도 끝도 없이 모으고, 참고문헌 목록을 영원히 갱신하고, 스스로의 논리를 (완성을 위한 텍스트가 아닌 간단한 메모나 그조차도 없는 망상의 형태로) 반박하고 또 반박하는 등의 행동은, 심지어 석사 논문같은 간단한 관문을 통과할 때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글을 쓰고 있다, 작업을 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를 즐기려는 게 아니라면, 일단 쓰기 시작해야 한다. E. H. 카의 말처럼 '좀이 쑤시기' 시작하는 그 시점부터 말이다.
이러한 방법론은, 내 경험에 비추어보아도, 상식적이다. "대부분의 작가와 달리 최초의 구상안에서 빗겨나는 경우가 거의 없었던 스스로의 신념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모든 자료들을 다 모은 후, 읽고, 일일히 손으로 베낀 후, 그것들을 편집하고 원고로 쓰면서 다시 베껴썼다는 토니 주트의 글쓰기 방법론과 비교해보면 더욱 그렇다.
세상에는 아주 드물게 이미 완성된 글을 그저 '쓰는' 사람이 존재한다. E. H. 카는 짐짓 겸손한 태도로 본인이 그러한 경우에 속하지 않음을 밝히며, 그 과정에서 '가위와 풀'(오늘날의 표현대로 하자면 '복붙')로 대변되는 랑케의 역사관에 반대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