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가 미국에 핵을 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물론 우리, 대한민국에는 핵탄두가 없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원자력 발전소 건설 기술이 있다. 한국형 신형 원전 모델인 APR-1400은 지난 10월 유럽사업자요건 인증을 받았고, 그보다 앞서 지난 6월에는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NRC)의 설계 인증 심사를 사실상 통과"했으니 말이다.
우리에게는 미국에서도, 유럽에서도, 안전성을 검증받은 원전 설계 기술이 있고, 설계도에 맞춰 실제로 원전을 만들어낼 기술과 인력 또한 확보되어 있다. 그러므로 여건만 갖춰진다면 양국 우호의 상징으로 보다 저렴한 가격에 원전을 '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정부에는 우리가 가진 강점을 살리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 오히려 원자력 발전을 말려죽이고 싶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러니 우리가 미국에 핵을 '쏘는' 상상은 한낱 망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소위 '환경주의자'들이 입에 달고 사는 말마따나, 우리는 다른 미래를 상상해볼 필요가 있다.
2.
2017년 11월 5일 현재, 미국령 푸에르토리코는 대규모 정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초대형 허리케인 마리아(Maria)와 어마(Irma)가 발전소가 밀집한 섬의 남동부를 강타하면서 주요 송전망을 망가뜨렸기 때문이다. 10월 23일 복스(Vox)에서 보도한 바에 따르면, 푸에르토리코 본섬의 79퍼센트가 아직 정전 상태에 놓여 있다.
푸에르토리코 대정전 사태는 엄밀히 말해 발전소가 아니라 송전망이 망가져 벌어진 일이다. 하지만 왜 송전망이 망가졌는지 따져본다면, 푸에르토리코의 경제가 몰락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한때 잘나갔던 푸에르토리코 경제가 주저앉게 된 이유의 한복판에는 잘못된 에너지 정책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탈원전 논쟁의 한복판에서 푸에르토리코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푸에르토리코는 본디 스페인의 식민지로 개발되었지만 미국-스페인 전쟁의 결과 스페인이 물러나게 되었고, 1952년 새 헌법을 통해 미국의 자치령으로 편입되었다. 2012년 주민투표를 통해 미국의 51번째 주로 편입될 것을 결정했지만 미국의 연방의회에서 거쳐야 할 절차가 많은 탓에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령'이지만 '미국'은 아니다.
그 섬의 역사는 섬 전체에 전기를 공급해온 푸에르토리코 에너지국(Puerto Rico Electric Power Authority (PREPA))의 역사와도 같다고 이코노미스트는 전하고 있다. 1941년 설립된 푸에르토리코 에너지국은 1970년대, 푸에르토리코의 호경기 속에서 함께 호황을 누렸다. 제약업체를 필두로 한 미국의 기업들이 세제 혜택을 노리고 푸에르토리코에 대거 공장을 건설했던 것이다. 지금도 몇몇 의약품들은 잘 살펴보면 "Made in Puerto Rico"라고 원산지 표시가 되어 있다.
그러나 좋은 시절은 잠깐이었다. 1996년 클린턴 정부가 푸에르토리코의 세제 혜택을 없애면서 많은 공장들이 섬을 떠났다. 그와 함께 경제가 고꾸라지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PREPA와 푸에르토리코 자치정부의 어리석은 결정이 큰 역할을 했다. 첫째, 애초부터 정부와 지자체는 요금을 내지 않고 전기를 쓰고 있었다. 둘째, 경제가 위기에 몰리자 석유 의존도를 줄이겠다며 태양광과 천연가스 발전에 돈을 쏟아부었다(“The story of Puerto Rico’s power grid is the story of Puerto Rico”. The Economist. 2017년 10월 21일 접속. https://www.economist.com/news/united-states/21730432-even-hurricane-maria-hit-it-was-mess-story-puerto-ricos-power-grid). 셋째, 기저발전으로서 제 역할을 해줄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진작에 포기한 상태였다.
3.
2016년 기준 푸에르토리코의 발전원 비중을 알아보자. 미국에너지정보청에 따르면 47%가 석유, 34%가 천연가스, 17%가 석탄, 2%가 신재생에너지다. 199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많은 돈을 투자했지만 신재생에너지의 비중은 2%에 지나지 않으며, 사실상 가격이 함께 오르내리는 석유와 천연가스가 총 발전량의 80% 가량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Puerto Rico - Territory Energy Profile Overview - U.S. Energy Information Administration (EIA)”. 2017년 10월 21일 접속. https://www.eia.gov/state/?sid=RQ).
애초부터 유가의 등락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전력 구조를 가지고 있었던 푸에르토리코는 90년대 말부터 2008년까지 이어진 유가의 고공행진 속에서 경제적으로 만신창이가 되어갔다. 경제위기 이후 폭락했던 유가는 이제서야 슬슬 고개를 들고 있는데, 그동안 유가가 낮은 상황에서도 푸에르토리코의 에너지 가격은 미국 내에서 하와이 다음으로 높았다. 그런데 하와이의 경우 관광산업이라는 믿을 구석이 있는 반면 푸에르토리코에는 그런 게 없다.
경제적으로 워낙 낙후되어 있는 탓에 전력망의 품질이 형편없다. 전력망의 품질이 형편없는 탓에 지금과 같은 대정전이 아니어도 자꾸 전기가 끊기고 공장의 생산 비용이 높아진다. 인프라가 엉터리인 탓에 경제가 절름거리고, 경제가 힘차게 달려나가지 못하니 인프라 확충이 늦어진다. 악순환이다. 앞서 인용한 Vox의 기사에서 FiveThirtyEight의 자료를 인용한 바에 따르면, 푸에르토리코 발전소 설비의 연식 중위값은 44년이다. 일반적인 산업국가 발전 설비 연식의 중위값이 18년인 것에 비하면 굉장히 높은 수준이다. 낡은 전력 인프라에 의존해 간신히 돌아가던 경제가 초대형 태풍을 만나 좌초한 것이다.
4.
푸에르토리코는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PREPA는 발전원 중 석유의 비중을 줄이고자 천연가스와 태양광 발전의 비중을 높이기로 결정했다. 기업들이 문을 닫고 떠나는 와중이었다. 세제 혜택이 사라진 마당에, 전기요금이라도 더 저렴하게 공급해야 한다는 생각을 왜 그들은 하지 않았던 것일까? 영어권에서 나온 관련 기사들을 찾아 읽어보아도 뚜렷한 이유를 알 수는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충분히 짐작 가능한 사실이 있다. 굳이 태양광과 가스 발전을 늘리려 드는 그러한 움직임이 '친환경'으로 포장되었으리라는 점 말이다. 산업과 경제의 기초 체력이 갖춰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PREPA는 '안정적인 전력 공급원'이 아니라 '깨끗한 에너지'에 돈을 쏟아부었다. 물론 태양광 발전기와 풍력 발전기, 가스 발전기가 푸에르토리코의 대정전을 불러온 직접 원인은 아니다. 하지만 더 저렴한 발전원이 존재했다면 상황이 달랐을 것이라는 것 역시 분명하다.
지금도 푸에르토리코에는 풍력 발전기가 존재한다. 심지어 태풍을 맞은 상태에서도 건재하게, 전혀 고장나지 않은 발전기가 남아있었다(지멘스의 놀라운 기술력이여!). 하지만 발전기를 운용하는 이들은 망연자실하게 돌지 않는 풍력 터빈을 바라만 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왜냐하면 풍력 발전기를 최초로 구동하기 위해서는 외부 전력원이 필요한데, 바로 그 외부 전력원을 확보하는 것이 현 시점에서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문자 그대로 '태평양 앞바다가 사이다여도 컵이 없어서 못 마시는' 꼴이다(Dreazen, Yochi. “Darkness: life in Puerto Rico without electricity”. Vox, 2017년 10월 23일 접속. https://www.vox.com/2017/10/23/16501164/puerto-rico-hurricane-maria-power-water-sewage-trump).
5.
푸에르토리코에 건설되어 있던 태양광 발전 판넬이 태풍을 맞아 파괴된 모습.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라고 하던가. 일론 머스크는 푸에르토리코의 대정전 소식을 접하자 그것을 자신의 태양광 발전 사업의 홍보 기회로 삼았다. 푸에르토리코 전역에 솔라시티(Solar City) 발전기를 설치하여 전력 공급 문제를 해결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을 하고 나섰던 것이다.
나는 일론 머스크의 그러한 제안이 비현실적일 뿐 아니라 비윤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설령 그가 멋진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공개한 것처럼, 솔라시티에서 만드는 태양광 발전기 내장형 타일을 시공하여 테슬라 자동차 한 대를 굴리고 집안 전체에서 쓰고 남을만큼의 전기를 생산할 수 있다 해도, 푸에르토리코의 문제의 핵심은 그게 아니기 때문이다.
전기는 집에서 스마트폰을 충전하고 음악을 듣고 TV를 볼 때에만 필요한 게 아니다. 화장실에서 변기 물을 내리면 등받이 쪽의 물탱크에 새로운 물이 차오른다. 그런데 수도가 정상 작동하려면 (고대 로마나 에도 시대의 일본처럼 지형의 고저차를 이용하지 않는 한) 당연히 어딘가에서 전기를 이용해 수압을 만들어내고 있어야 한다. 도시가스를 연료로 사용하는 보일러가 작동하기 위해서도 전기가 필요하다. 그야말로 인프라 중의 인프라인 셈이다. 그런데 일론 머스크는 그러한 재앙을, 미국 서부에 거주하는 고소득층을 위한 제품의 홍보 기회로 활용하고 있다.
푸에르토리코에는 집집마다 옥상에 깔려서 각 가정의 소비를 충족시켜주는 전기만 필요한 게 아니다. 섬의 인프라 전체를 작동시켜줄, 절대 꺼지지 않는, 어지간한 자연재해에도 굴하지 않는 든든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러니까, 원자력 말이다.
6.
1959년. BONUS(BOiling NUclear Superheat reactor)라는 이름의 프로젝트가 추진되었다. BWR이라는 실험적 기법을 채택한 원자력 발전 시스템이다. 푸에르토리코 측에서는 평범한 상업용 원자력 발전소를 원했으나, 애석하게도 아주 작은 용량의 시험적 설비가 도입되었던 것이다. 푸에르토리코 섬의 서쪽 끝인 린꼰(Rincon)에 부지를 마련하고 1963년 완공을 목표로 공사가 시작되었다.
프로젝트를 추진하던 General Nuclear Engineering Corporation (GNEC)이 이리저리 인수합병되는 과정을 거치며 건설은 지체되고 비용이 상승했다. 결국 예정보다 한 해 늦은 1964년 4월에 첫 시동을 했고 1965년 9월에서야 최대 출력을 뽑아내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결국 발전소는 1968년 폐쇄되었고, 오늘날은 원자로의 건물을 재활용하여 박물관으로 이용하고 있다.
푸에르토리코인들이 원자력 발전소를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웨스팅하우스를 통해 평범한, 검증된, 583메가와트의 발전소를 건설하고자 했다. 1970년 시작된 새로운 원자력 발전소 건설 프로젝트는 실제로 진행되는 것 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결국 1978년 완전히 폐기되었고, 이후 오늘날까지 푸에르토리코는 '핵발전소 없는 안전하고 평화로운 섬'이 되어있다(“Nuclear Energy for Puerto Rico | ANS Nuclear Cafe”. 2017년 10월 22일 접속. http://ansnuclearcafe.org/2016/04/14/nuclear-energy-for-puerto-rico/).
7.
역사에 만약은 없다고 하지만, 1970년의 프로젝트가 정상적으로 추진되었다면, 푸에르토리코의 운명은 지금과 다른 길을 걸었을 것이다. 미 연방 정부의 세제 혜택 철회에도 견딜 수 있을만큼 안정적인 산업 기반을 확보하고 경제력을 다졌더라면 그토록 낙후한 발전 및 송전 설비에 의존하고 있지 않았을테니 말이다. 푸에르토리코의 대정전은 경제적 실패의 문제고, 그 경제적 실패의 밑바탕에는 잘못된 에너지 정책이 깔려 있는 셈이다.
그 실패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원자력을 도입해야 할 시점을 놓쳤다. 둘째, 석유의 비중을 줄이고자 택한 것이 천연가스와 태양광이었다. 말하자면 후라이팬 바깥으로 뛰어서 불 속으로 뛰어든 셈이다. 그런데 두 번째 실패에는, 어쩌면, 지금 우리가 향하고 있는 또 다른 에너지 정책 실패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클린턴 정권과 함께 불어닥친 미국 내 탈원전 열풍에 푸에르토리코의 에너지 정책이 영향을 받았던 것은 아닐까?
지금도 미국의 담론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수많은 IT 기업들이 푸에르토리코를 소재로 자기 회사의 기발한 기술을 뽐낸다. 일론 머스크 뿐만이 아니다. 구글은 거대한 기구를 띄워서 푸에르토리코에 무료 와이파이를 제공하겠다고 하고 있고, 페이스북은 모금 운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24시간 돌아가는 신뢰할만한 기저발전이 없다면 현대 문명은 유지될 수 없는데 말이다.
8.
관련 뉴스를 아무리 찾아보아도, 그 누구도 푸에르토리코에 원자력 발전소를 지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감히 입에 올리고 있지는 않다. 물론 원자력 발전소는 건설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고, 설비를 운영하는데 필요한 기술 자체가 굉장히 고난이도이며, 여타의 발전소보다 훨씬 건설 비용이 크다. 당장 전기가 안 돌아서 수돗물이 나오지 않는 섬을 두고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한국인들은, 잘 알고 있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경제이고, 경제는 인프라가 확충되어 있지 않으면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푸에르토리코와 마찬가지로 한국도 실질적으로는 섬과 다를 바 없는 환경이다. 마치 우리처럼, 그들에게도 원자력이 필요하다. 설령 폭풍우와 기상 악화로 석탄이나 석유 혹은 가스를 실은 배가 입항하지 못하는 일이 있어도 꿋꿋하게 작동하는, 한 번 연료를 보급하면 1년 정도는 거뜬한, 그런 원자력 발전소 말이다.
만약 한국이 석유 47%, 천연가스 34% 등의 에너지 믹스를 가지고 있다면 지금 우리의 경제적 처지는 어땠을까? 두 차례의 오일 쇼크를 견디고, 2008년 경제위기 이전까지의 고유가 상황을 감당해낼 수 있었을까?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을 이루는 것이 가능하기나 했을까?
9.
11월 7일,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의 방한이 예정되어 있다. 트럼프의 아시아 순방에서 가장 중요한 의제는 뭐니뭐니해도 북핵이다. 북한이 핵탄두를 소형화하고 ICBM에 장착하여 발사 실험까지 성공하는 순간, 그것이 미국 본토에 떨어지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으므로, 미국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위험을 제거하려 들 것이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과 청와대의 참모들이 절대 인정하려 들지 않는 사실이 있다. 북한이 아니라 대한민국 역시 미국에 핵을 '쏠' 능력이 있다는 것 말이다. 다만 그들의 핵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무기에 지나지 않지만, 우리의 핵은 완성된 기술이며 평화적으로 활용되는 발전소라는 차이가 있다.
한국은 미국에 원전을 수출할 수 있을만한 기술력을 인정받은 나라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리고 미국령 푸에르토리코에는 안정적인 전력 공급을 원하는 300만 이상의 (미국 대통령 투표권은 없는) 미국 시민들이 살고 있다. 북한이 아니라 우리도 미국에 핵을 '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상상, 아니 망상에 가깝다. 현 정권의 탈핵 기조 때문만은 아니다. 미국 내의 여론과 푸에르토리코 주민들의 의사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담대한 계획'이라는 것이 문제의 본질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상상을 멈출 수 없다. 만약 문재인 대통령이 원자력의 유용함과 안전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다면? 그래서 한국에 온 트럼프 미 대통령에게 '깜짝 놀랄 제안'을 던진다면? 그렇게 우리가 가진 기술로 미국령 푸에르토리코의 밤을 밝힐 수 있게 된다면?
적어도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나은 곳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미래를 상상하며 긴 글을 한 편 써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