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19

미국의 간선제와 땅의 힘

미국의 간선제는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훨씬 더 근본적인 요소가 자리잡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미국의 '힘'이 어디서 나오느냐, 이 원초적인 문제 말이다.

미국의 '힘'은 어디에 있을까? 제도라던가, 기축통화인 달러라던가, 군사력이라던가,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 그런데 그 중 가장 근본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자리잡은 땅덩이에 있다. 캐나다나 멕시코가 미쳐 날뛰지 않는 한, 미국은 태평양과 대서양을 좌우에 두고 있어 육로로 침공이 불가능한 나라다.

어디 그뿐인가. 미국의 내륙은 미시시피강이라는 굵직한 강줄기 덕분에 산업화의 초기부터 해양 운송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가령 중국이나 러시아 같은 여느 내륙 국가와는 다른 여건이라는 말이다. 한술 더 떠서, 19세기에 세계 최초의 통상적인 유전이 개발된 곳도 미국인데, 21세기는 셰일가스의 사우디아라비아가 되어 있다.

석유만 나오면 말을 안 한다. 우라늄도 충분하다. 우라늄만 있는가? 미국의 중서부 평원 지대는, 물론 지금은 많이 황폐화되긴 했으나, 여전히 세계 대다수의 사람과 가축을 먹여살리는 천혜의 곡창지대다. 미국은 철도 있고 밀도 있고 석유도 있고, 우라늄도 있는 그런 나라라는 것이다.

여기서 잠시 일본에 대해 생각해보자. 일본의 인구는 미국의 절반 정도다. 그렇다고 일본이 지금 갑자기 인구가 두 배로 늘어난다 해서 미국과 같은 국력을 가질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일본에는 (충분히 쓸만한 양의 많은) 철도 없고, 밀도 없고, 인구 전체를 부양할만한 농업 생산이 불가능하며, 석유는 당연히 없다. 그래서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을 이길 수 없었다.

미국의 힘은, 톡 까놓고 말해, 미국의 땅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땅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미국 동부 서부 해안에 사는 리버럴듯이 비웃듯이 지껄여대는 'Flyover States'다. 캘리포니아만 떼어놓고 보면 세계 7위의 경제 대국이라고? 캘리포니아가 미합중국에서 분리 독립하면 아무도 캘리포니아를 진지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미국의 힘은 동부와 서부에 모여 사는 인구와, '건너뛰는 땅'에 있는 그 무지막지한 천연자원의 결합체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미국을 경험했거나, 미국에서 공부했거나, 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미국의 리버럴, 리버럴이 아니어도 메인스트림의 시각에 자신을 투영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미국이 미국이라는 사실이 너무도 당연하기 때문에, 그들이 사는 나라가 초강대국으로 군림하는 원초적인 이유를 그리 진지하게 고민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그래도 된다. 미국인이니까. 하지만 우리는 그러면 안 된다. 미국인이 아니니까. 미국이 왜 미국인지, 왜 그런 힘을 가진 초강대국이 군림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 원인을 잘못 분석하면 '인구 14억을 넘는 중국이 인구 3.5억인 미국을 능가하는 것은 당연하다' 같은 허튼소리나 내뱉게 된다.

미국은 미국의 사람과 제도와 땅이다. 특히 마지막 요소가 정말 무서운 것이다. 그 점을 다들 잘 이해하면, 2020년의 국제정세에 대해 좀 더 좋은 논의가 가능해질 것이다.

2020-02-17

인공 작물과 천연 바이러스

우리는 흔히 유전자 조작 식품, 즉 GMO가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자연에서 수렵 채집한 식품들은 안전하다고 여긴다.

실상은 그와 정 반대다. 지금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COVID-19'(한국명 '코로나-19') 바이러스만 봐도 그렇다. 인공은 안전하다. 반대로 자연은 위험하다. '코로나-19'의 위험에 대해 곰곰히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그 역설을 이해할 수 있다.

'코로나-19'는 왜 위험한가? 코로나 바이러스의 다양한 변종 중 인류가 최초로 경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이라는 거대한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인간이 경험한 적 없는 바이러스이기 때문에 위험한 것이다.

만약 '코로나-19'가 일각의 낭설처럼 중국의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면, 오히려 지금처럼 위험하지는 않았을 수도 있다. 실험실에서 만들어졌다는 말은 우리, 인간이, 그 세부 내역을 알고 있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코로나-19'에 대해 거의 모른다. 아예 모르는 수준은 아니지만, 일반적인 독감 등 우리에게 친숙한 바이러스 뿐 아니라, 다른 코로나 바이러스와 비교해도 우리의 지식은 일천하다.

여기서 '모른다'는 말은 실험실의 과학자의 눈으로 볼 때 모른다는 뜻도 되고, 인류의 면역계가 그에 적응하지 못했다는 뜻도 된다. 전자의 지식 부족으로 인해 백신을 만들 수 없고, 후자의 지식 부족으로 인해 백신이 없는 상태에서 신체가 자체적인 면역력으로 극복해내지도 못한다.

한마디로, 우리는 '코로나-19' 앞에, 무방비 상태다. 마치 서유럽의 뱃사람들이 천연두 바이러스를 퍼뜨렸을 때의 북아메리카 원주민과도 같은 상황인 것이다.

우리가 '코로나-19'에 대해 모르는 것은 그것이 방금 '자연'에서 왔기 때문이다. 우리가 원래 모르던 곳에서 온 모르는 바이러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위험하다. 자연은 원래 그런 곳이다. 미지의 위험이 가득 도사리고 있는 곳.

논의를 한 단계 더 끌어올려보자. 소위 '백신 거부 운동'을 벌이는 사람들이 말하는 '자연적인 면역력'이라는 것은 얼마나 허황된 것인가. 자연은 우리가 면역을 가지고 있지 않은 바이러스를, 이렇듯 잔뜩 가지고 있다. 다만 우리는 운 좋게도 아직 그런 것을 만나지 않았을 뿐이다.

<농담입니다>그러니, '백신 거부 운동' 벌이는 이들을 지금이라도 일본 앞바다에 떠있는 크루즈 선에 태워주면 어떨까. 그들이 바라는 '백신 없는 세상'은 바로 그곳이니 말이다.</농담입니다>

인간은 인간이 만든 환경 속에서 번창해왔다. 도시를 포함해, 유형 무형의 시설과 제도, 관습과 규율 속에서 호모 사피엔스라는 일개 생물종은 우리가 아는 '인간'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GMO라 불리는, 다들 짐짓 공포의 대상으로 삼는 작물 역시, 인간이 수만년에 걸쳐 다른 종의 DNA에 간섭해온 역사를 더 짧고 효율적인 방식으로 바꾼 것 뿐이다.

그런 건 위험하지 않다. 하지만 인간이 익숙하지 않은, 접해보지 않은 날것의 '자연'과 만나는 일은, 여전히 위험하다. '코로나-19'의 위험이 아직 다잡히지 않았고, 공포가 날뛰고 있는 와중에, 한 마디 덧붙여 보았다.

2020-02-12

박완서 (1)

박완서의 소설 "서글픈 순방"의 한 대목. 화자인 새댁은 적금 50만원에 문간방 전세금 40만원을 합쳐 90만원이라는 거금을 손에 넣었다. 그걸로 어디 변두리에 땅을 사고 움막을 지어 살면서, 벽돌이니 뭐니 하는 걸 하나씩 사모아 집을 짓자고 계획한다.

1975년에 발표된 소설에 묘사된 그 무렵의 주택 사정도 놀랍거니와, 더 놀라운 것은 '움막살이'를 대수롭지 않은 선택지 중 하나로 받아들이는 그 태연함이다. 1970년대의 어느 계층에게 움막살이는 인생이 폭싹 망해야만 택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미래를 위해 참고 견딜 수 있는 어떤 디딤돌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대한민국의 20세기 중후반 고도성장기를 바라보는 시선이 때로 너무 의아할 때가 있다. 그 무렵에는 모두 행복했고, 모두에게 꿈이 있었고, 모두에게 공정한 기회가 주어진 것인 양 말하는 그 물결 속에서 소외감을 느낀다. 1983년에 태어나 90년대에 자란 내 기억만 보더라도, 우리의 20세기는 전혀 그런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시 박완서를 펼쳐보자. 영동고속도로 현장에 취직한 조카를 만나러 간 여성의 이야기인 "카메라와 워커"를 통해 그 시절로 돌아가볼 수 있다. 화자는 조카를 '임시직' 신세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회사 윗사람에게 '와이로'를 찔러주어야 하나 노심초사한다. 고도성장기에는 마치 비정규직이라는 게 없었던 것처럼, 일자리가 지천에 널려있고 청년의 꿈이 공정하게 펼쳐질 수 있었던 것처럼, 2020년 대한민국이 흠뻑 빠진 가짜 노스탤지어에 찬물을 끼얹는다.

내 짧은 견문의 한계일 수도 있고, 고도성장기의 단물을 받아먹었다는 어떤 집단 속에서 내가 성장기를 보내지 못한 탓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내가 커온 세상은, 요즘 사람들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떠올리는 '쑥쑥 크던, 모두가 절로 부자가 되던' 그런 곳이 아니었다. 오히려 박완서의 단편들 중 툭툭 등장하는 묘사들 속에서 나는 대한민국의 20세기를 실감나게 재회한다.

아무튼 중요한 건 20세기의 한국이 그렇게 공정한 곳도 아니었고, 모두에게 잘 살 기회를 열어주고 있던 유토피아는 더더욱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 많던 싱아를 먹던 사람들은 따로 있었고,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배고팠다. 심지어 그 시대를 나보다 오래 살았던 40대, 50대, 60대들 사이에서도 '옛날에는 우리나라가 살기 좋았다', '취업하기 좋았다' 같은 소리가 마치 사실인 양 오가는 모습을 의아하게 여기던 차에, 새삼스레 박완서를 읽다가 한 마디 적어본다.

2020-02-03

"모든 사회적 불평등은 길게 보면 수입의 불평등이다."

안도현이라는 사람이 '강남 건물주가 되고 싶은 욕망'을 옹호했다고 한다. 그는 스스로를 민주주의자라고 내세우는 인물이다. 어쩌면 그는 '강남 건물주가 되고픈 것은 경제에 대한 것이고 민주주의는 정치와 관련된 것이니 뭐가 문제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버트런드 러셀이 1945년에 쓴 책에서 잘 지적하고 있다시피, 부동산을 통해 지대수익을 올리려는 욕망을 정당화하려는 사람은 결국 민주주의를 배반하게 되어 있다. 바로 이런 식으로. "세습 귀족은 토지가 부를 획득하는 거의 유일한 원천인 곳을 제외하면 권력을 오래 유지할 수가 없다. 모든 사회적 불평등은 길게 보면 수입의 불평등이다." 버트런드 러셀, 서상복 옮김, 『러셀 서양철학사』(서울: 을유문화사, 2019), 전면개정판, 266쪽.

이 대목에서 생각을 좀 더 이어볼 수 있다. 토지가 부를 획득하는 거의 유일한 원천인 상태를 파괴하는 것, 즉 산업혁명을 일으키고 경제성장을 하는 것은, 세습 귀족을 파괴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일 수 있을 것이다. 고상한 도련님들이 '개나 소나 사업하는' 분위기에 현혹되어 집안 재산을 들어먹는 일이 자주 벌어지는 사회는, 그렇지 않은 사회보다, 민주적인 사회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그렇게 세습 귀족을 파괴하고 돈을 번 자본가들은 추후 지대추구에 몰두하며 세습 귀족의 자리를 대체하려 들 것이다. 그것을 막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 국가가 해야 할 일 아닐까? 다시 말해, 자본주의의 활기를 유지하면서, '쌓인 부'가 언제나 새롭게 파괴되고 또 다시 생성될 수 있는 무대를 제공하는 것.

나는 자본주의가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봉건적 압제를 파괴하는 무기로서 작동할 때, 오직 그럴 때에만 지지한다. 사회를 고착시키고 사람들을 주저앉혀 종속시키고자 하는 권력의 의지와 맞서는 도구가 될 때, 그럴 때에만 자본주의를 옹호한다. 돈 가진 자가 건물 사놓고 떵떵거리며 타인에게 모멸을 주는 것이 '정상'으로 여겨지는, 저 강남좌파들의 '민주주의'에, 나는 절대 찬성할 수 없다.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며 자본주의 또한 아니기 때문이다.

2020-01-31

<반일 종족주의>, 이영훈 외, 2019.

<반일 종족주의>는 실증주의적인 책이 아니다. 이영훈 교수, 혹은 그와 뜻을 함께하여 <반일 종족주의>라는 단행본 및 그 단행본의 토대가 된 연속강연에 참여한 사람들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이 책은 대단히 이념적이다.

여기서 나는 '이념적'을 '나쁘다'의 동의어로, '실증적'을 '좋다'의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지 않다. <반일 종족주의>가 이념적인 책이라는 내 주장은, 말 그대로 이 책이 사실관계 그 자체를 넘어서는 어떤 이념적 차원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뜻이다.

이영훈 본인 스스로가 경제적 사료를 통해 한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지평을 개척한 인물이다. 책에 참여한 다른 학자들 역시 각자의 분야에서 쟁쟁한 입지를 지니고 있는 인물들이다. 이런 이들의 면면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반일 민족주의>는 오직 사실만을 통해 한국 현대사를 둘러싼 온갖 '거짓말'과 싸우는 책일 뿐인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반일 종족주의>는 그렇게 단순한 책이 아니다. 이 책에 참여한 다른 이들의 생각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대표 저자인 이영훈은 조선왕조의 몰락부터 대한민국의 건국과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모종의 거대 서사를 기획하고 있다. '반일 종족주의'는 그 거대 서사 속에서 가장 강력하고 음험한 적을 지칭하기 위해 그가 공들여 만들어낸 개념이다.

이영훈의 이러한 기획이 드러나는 것은 1부를 지나 2부의 가장 중요한 대목인 20장에 이르러서이다. 그곳에서 그는 서구의 민족주의가 근대국가의 형성에 기여한 바를 되짚으며, 따라서 서구의 민족주의는 한국의 민족주의와 달리 개인주의의 자양분일 수 있다는 논변을 편다.

이영훈의 구상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페르낭 브로델의 '장기지속'과 '심성'을 경유하여, 한반도 거주민은 단 한 번도 철저히 뿌리뽑히지 않은 '장기지속의 심성'인 샤머니즘에 사로잡혀 있다는 아주 강한 주장을 펼친다. 일본에 대한 무조건적인 적개심은 그러한 샤머니즘의 원인이며 동시에 그 샤머니즘으로 인해 더욱 강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민족주의의 저변에는 장기지속의 심성으로서 샤머니즘이 흐르고 있습니다. 문명 이전의, 야만의 상단上段에 놓인 종족 또는 부족의 종교로서 샤머니즘입니다. 그것이 문명시대 이후에도 길게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20세기에 성립한 한국의 민족주의는 종족주의 특질을 강하게 띱니다. 한국의 민족은 자유로운 개인의 공동체와 거리가 멉니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종족주의 신학이 만들어 낸 전체주의 권위이자 폭력입니다. 종족주의 세계는 외부에 비해 폐쇄적이며 이웃에 대해 적대적입니다. 이에 한국의 민족주의는 본질적으로 반일 종족주의입니다.[251쪽]

물론 이정도의 주장을 우리는 여기저기서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이건 좌우를 넘어서는 문제다. 우파 버전이 '반일 종족주의'라면, 좌파 버전은 '한국은 아직 탈근대를 거론할 수 있을만큼 근대화하지 못했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이 주장은 사실 우리에게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다. 다만 이영훈이 그 '반일 종족주의'의 사례로 위안부와 징용 문제를 구체적으로 짚고 넘어갔기에 논란이 커졌을 따름이다.

그러나 친숙한 주장을 편다 해서 친숙하게 넘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정치적 성향이 어찌됐건, '한반도의 전근대성'에 대해 막연하고도 추상적인 인상비평을 내놓은 후 그냥 까먹어버린다. 반면 이영훈은 나름의 (실증적?) 근거와 (페르낭 브로델이라는 빅 네임을 경유한) 이론적 틀을 제시하고 있다.

이영훈의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이러한 논의 전개를 좀 더 진지하게 상대할 필요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단순한 사실의 조합이 아니라, 그 사실을 모으고 하나의 서사로 만들어내는 세계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정치, 특히 2010년대 말부터 2020년대 지금까지의 정치적 과정의 전개에 있어서 일본을 적개시하는 민족주의가 정부에 의해 증폭되는 과정은 크게 우려스럽다. 이영훈은 한국에서 '위안부' 문제 중 국군위안부는 완전히 잊혀지고 오직 일본군 위안부만 거론되는 상황은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데, 이와 같은 지적은 비 NL 계열의 여성운동가들도 자주 해왔던 것으로서 유의미하다. 즉, 구체적인 사실관계만 놓고 볼 때 <반일 종족주의>는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내용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차원에서 나름 유의미한 점이 없지 않다.

문제는 <반일 종족주의>가 다소, 혹은 상당히, 정직하지 못한 책이라는 데 있다. 이영훈은 자신이 오직 사료에 입각해 사료만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 책은 특정한, 그리고 저자가 좀 뚝딱 만들어낸 듯한 인상을 주는 역사철학에 근간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 역사철학은 일종의 뒤틀린 자학사관이며, 전도된 탈식민주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영훈은 한국에 근대성을 이식한 일본의 영향, 미국의 힘,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예견하고 온갖 오명을 뒤집어쓰며 독립국가를 만들어내신 이승만 대통령의 찬란한 능력을 예찬하고자, 그 반대편의 악역이라 할 수 있는 한반도 거주민들의 토속성을 물신화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왜 물신화인가? 왜냐하면 어느 나라 어느 시대 어느 상황을 보더라도, 모든 인간 사회는 이영훈이 지적하는 정도의 야만성, 원시성, 주술성, 토속성을 두루 가지고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세계 최강대국 미국에서는 배울만큼 배운 고학력 리버럴들이 자식들에게 백신 접종을 하지 않겠다며 시위를 하고, 스위스에서는 모스크를 폐쇄하는 '민주적 주민투표'를 거행한다. 우리가 잘 모르면서 모범국가의 사례로 꼽는 북유럽 국가들 또한 그 내막을 보면 비슷하다.

모든 국가는 각자 물려받은 '장기지속의 심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오늘날처럼 SNS를 통해 포퓰리스트들이 활개치는 시절이 오면 그것은 다양한 외양을 띠고 수면 위로 떠오른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내가 한국인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한국의 민족주의는 그것을 활용하고자 하는 국가 권력과 결탁하여 더욱 심각한 모습을 종종 드러내는 듯 보인다. 그 사실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이영훈은 그러한 '장기지속의 심성'을, 마치 환빠들이 단군의 후예를 몰아낸 중국 한족 묘사하듯 바라본다. 이는 그다지 학문적으로 엄밀성을 갖추지 못한 역사철학으로 수렴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반일 종족주의>에 대해 진정으로 토론해야 할 여지는 바로 그곳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영훈과 그의 동료들이 지적하는 내용 중 사실관계에 부합하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들이 전반적으로 제시하고자 하는 역사관, 특히 이승만이 저지른 공과 중 과오를 굳이 덮어놓거나 축소하려 하는 경향 등에 맞서기 위해서라면 더욱 그렇다. 그것이야말로 이영훈이 말하는 '반일 종족주의' 내지는 '장기지속의 심성'으로부터 벗어나는, 올바르면서도 가장 빠른 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