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7-15

요즘 근황

1. 《Foreign Policy》 마감이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다. 오늘 저녁에 최종적인 교정을 보고, 미국에서 파일에 대한 승인이 떨어지기를 기다려야 한다. 업무 스케줄이 진행되기 시작하면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다. 18일이 발행일이니, 주말을 보내며 편집자의 말을 블로그에 올릴 생각이다.


2. 미국에서 인디맥이 파산했고, 프레리맥이랑 뭐더라, 아무튼 두 개의 거대한 금융회사가 휘청거리고 있다. 이 소식을 일요일 밤에 전해들은 나는, 월요일이 되자마자 냉큼 펀드를 환매했다. 그리고 오늘 주가를 확인하면서, 뚝뚝 떨어지고 있군 ㅋㅋㅋ 이러고 있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환매 신청이 어제 들어간거고 기준가가 적용되는 시점은 내일이었나 그렇다. 알고도 당하는 기분이다. 망했다, 망했어.

대체 왜 하루씩이나 반응 속도에 차이가 날까? 외국인들이 한국 주식을 대량 매도하기 위해 뭔가 필요한 절차라도 있나? 사실 주식을 직접 사고 팔아본 적이 없어서, 매도 매수 신청과 실제 거래 사이에 시간차가 있는지 없는지도 잘 모른다. 아무튼 하루씩이나 반응이 늦었다는 그게 놀랍고, 또 실제로 효과가 눈에 보일 정도로 도드라지는 것이 더욱 놀랍다.

계속 붙들고 버텨볼까 말까 고민이 많았는데, 앞서 말한 것처럼 일단 팔기로 했다. 어차피 팔아서 쓸 일이 있는 돈이기도 했다. 원유 가격이 떨어질 턱이 없고, 미국의 경제 위기가 쉽게 해결될 리도 만무하다. 크루그먼이 3월에 경고한 바대로, 어설프게 베어스턴스를 막아주고 해결했다고 자축했다가 지금 더 심한 꼴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나는 그런 뉴스를 대강 다 접해서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게 '내 돈'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명료하게 인식하지는 못하고 있었다는데 있다. 글로벌 이코노미 시대에 사는 대가를 비싸게 치른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글로벌 이코노미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체감하는 대가를 비싸게 치른다.

아무튼 사회에 갓 발을 디딘 젊은이답게, 건실한 적금으로 회귀하기로 했다.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실제로는 손해라는 말을 듣고 기분이 나쁜 편이, 적립식펀드에 넣었다가 그 액수마저 깎이는 꼴을 보는 것보다는 낫다. 경기가 회복될만한 징조가 보이면 그때부터 다시 다른 투자 방법을 모색해야지.


3. 늘 하고 있었지만, 오늘 경향신문을 보면서 확실히 든 생각. 경향신문은 신문이 아니다. 다른 일간지들과는 확연히 다른 방향을 지향하고 있는 집단이다. 금강산 피격 사건 같은 핫한 이슈 대신,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특집을 전면에 떡하니 박아버리는 것은 보통 배짱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러니까 경향이지 싶다가도, 이런 경향을 안 보니까 한국이 이모양이지 싶기도 하다. 어지간한 시사 주간지를 보는 것보다 값이 싼 것은 물론이고, 장기적인 안목에도 큰 도움이 된다.

이러한 방식은 결과적으로 인터넷 시대의 언론으로 생존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당장 뜨는 뉴스를 가장 빨리 찾아볼 수 있는 방법은 인터넷에 접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시대에서는 어제 뉴스를 편집해서 인쇄물로 보는 것도, 느리다. 일간지는 주간지에 비해 빠른 매체가 아니다. 다만 그 모든 인쇄매체들은 인터넷에 비하면 느릴 뿐이다. 한국의 다른 매체들도 경향처럼, 어떻게 트랜드를 따라잡을까 고민하지 말고, 어떻게 무게감 있게 느려질까를 고민하기를 바란다. 그게 인쇄매체가 택할 수 있는 생존 전략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짚어본다.


4. 개인적으로 쓰기로 약속한 글도 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지난주와 이번주는 거의 폭풍이 몰아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7월 10일 커트라인에 맞춰 기말 레포트를 제출했다는 사실을, 지금 생각해도 믿을 수가 없다. 그게 고작 닷새 전 일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 20일은 산 것 같다.


5. 촛불집회에 대해 할 말이 많고, 두 편의 글로 나눌 수 있는 초고를 7월 9일에 써갈겨놓았지만, 지금 당장은 머리에 여유가 없어서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 시민들의 자발성과 역동성을 찬양하는 이들을 비아냥거리기 위해, 너무도 많은 것을 쉽게 내다 버리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이지 안타깝고 딱하다. 그나마 지금은 그 찬양자들도 집에 들어간 상황 아닌가. 담론의 질서를 재편해야 할 시점은 바로 지금이다. 쉽지는 않겠지만 그게 최선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마감을 마무리지으면서 다시 현장에 나가봐야지.

2008-07-03

기사 두 개

"25살 동갑내가 스타 논객 3인방… 노정태·한윤형·김현진 '글발' 비결"(주간한국, 2008년 7월 3일)


"촛불의 길을 묻다 (좌담 전문)
[인권오름-민중언론참세상 공동기획 좌담 (1)] -김현진, 노정태, 미류, 완군, 한윤형
"(인권오름, 2008년 6월 18일)



...앞으로는 사진 찍을 때 절대 웃지 말아야지.



그냥 넘어가긴 약간 서운하니, 인권오름 좌담 자리에서 내놓았던 이야기 중 일부를 옮겨놓는다.

노정태 : 에너지를 광장에서 활용하는 방식을 찾아야겠는데, 가투로는 뭘 얻을 수 없고, 주민소환제로 한나라당을 흔든다는 발상인데 사람들은 광장 그 자체를 좋아하는 거지 이 사람들이 오세훈을 소환해서 짜르자고 그렇게 결의가 모아질까. 정치의 실력이 필요한 건데 지금 가능한 후보가 없다. FTA 반대 함부로 내놓으면 노무현 찬성론자들로부터 그렇고. 한나라당과 민주당 사이에서 물타기 하자니 민주당은 주저앉는 거고. 진보신당은 의석도 없다보니 운동단체 취급받잖아. 진보신당은 진중권당이 됐지.

지금 비전이 없다. 유가 뛰고 있고, 유류세 인하 이야기하지만, 전혀 해결 안 되는 거다. 디젤을 바이오디젤로 바꾸고 고유가 시달리지 않도록 하겠다, 일자리 창출 같은 이런 미래를 제시해야 하는데 그 누구도 이걸 못한다. 시청자이자 소비자는 스스로 유권자로 생각하는데, 유권자로서의 정치적 소비 대상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는 거다. 최장집 교수 이야기처럼 한국 대의제가 너무 대통령 집중제이고 위임민주주의인 건 맞지만 제도를 굴릴 수 있는 인간의 문제를 제도 자체로 화해서 어설프게 개헌 이야기로 가는 건 위험한 거다.



노정태 : 제도적인 차원보다 기술적인 차원의 접근이 필요한데, 민의의 지지를 받는 사람이 나와가지고 슬그머니, 사립대 50% 재정을 정부가 감당하니까 대학을 공영화하자 얘기할 수 있을 텐데 안 한다. 대중들이 반대한다는 이유도 있지만 그렇게 해서 자신이 무사할 수 있을 만한 정치적 동력을 누가 실어줄 수 없다. 지금 이렇게 막연한 변화의 에너지가 있을 때, 잘 체계화된 사민주의적인 구상이든 어떤 거든 총체적인 것이 주어지고 수렴되어야 하는데 그런 정도로 교활한 인간이 아무도 없다. 없다고 한탄만 하고 끝날 수 없는 게, 실제로 없으니까 이게 큰 문제다. 광장에 시민이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지치지 않고 버티는 거. 버티면서 쇠고기 반대에 나온 사람한테 민영화 문제, 철도 문제 있다고 이야기하는 거, 광장에 천막 치고 있는 사람과 동대문 상인들 이야기를 일반 사람들에게 전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인 것 같다. 비정규직 유인물 나눠준다. 작은 변화 꾀하는 거다. 이게 중요하다.


정말이지 그 작은 변화들이, 매우 중요하다.

촛불을 내려놓을 수 없는 이유

'촛불시위는 지금이 물러나야 할 때'라는 식의 주장이 적지 않고, 특히 '촛불시위는 노동조합의 하투와 연대해야 하고, 촛불은 내려야 한다'는 말이 있다. 2071님의 블로그에서 그런 주장이 끊임없이 생산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건 '연대'라는 단어를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사례가 아닐까 한다. 촛불을 내리고 집에 들어가 앉아있는 시민들이 대체 무슨 수로 노동조합과 '연대'한단 말인지? 방구석에 앉아 마음으로 연대하는 것 말고는 딱히 방법다운 방법이 없다. 상식적으로 볼 때 그런 행동은 그냥 이것 저것 다 포기하고 집에 가서 씻고 자는 거지, '연대'가 아니다.

내가 뭔가 놓친 게 있나 싶어서 "夏鬪後援論 使用說明書(하투후원론 사용설명서)"를 다시 한 번 읽어봤는데, '촛불을 내리고 하투와 연대'라는 주장만 있을 뿐 대체 그 연대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 특히 왜 연대를 하는데 꼭 촛불을 내려야만 하는지에 대한 논증은 딱히 찾아볼 수 없다. 최장집 학파가 주장하는 바대로, 나도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는데, 현재 한국의 정당정치가 마비되어 있고 그로 인해 시민들이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기 위해 거리로 뛰쳐나오는 것이 사실이라면, 너무도 당연하게, 촛불을 내리고 집으로 들어가는 순간 시민들의 정치적 의사 표현은 전부 묻혀버린다. 나는 저 글을 쓰신 분이 대체 '연대'라는 단어의 구체적인 내용을 어떻게 구성하고 있는지, 그게 너무 궁금하다.

노동조합의 전면적인 파업과 그로 인한 실질적인 압박 없이는 촛불집회의 성공 가능성을 내다볼 수 없다는 말을 나는 이 시위가 굵어지던 시점부터 꾸준히 제시한 바 있다. 그것의 실천을 위해서라도 시민들은 계속 촛불시위에 나와야 한다는 말도 했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자면, 노동조합에서 만든 유인물 등을 시청 광장에서 한 뭉테기씩 가져와 다른 시민들에게 뿌리는 활동을 제안한 바 있고, 나 자신이 직접 그렇게 해왔다. 헌데 이 모든 일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일단 광장에 시민들이 꾸준히 나와줘야 한다. 인터넷 게시판이나 블로고스피어처럼 인식론적 필터링이 강하게 작용하는 곳에서는 앞서 말한 방법론이 전혀 먹혀들지 않기 때문이다.

정의구현사제단의 등장을 놓고 새삼스럽게 다시 한 번 '탈정치'를 개탄하는 목소리에 대해서도 불만이 없잖아 있는데, 그에 대해서는 좀 더 긴 설명이 필요하므로 오늘 밤에 하지는 않겠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지금 이 판이 깨지면 안 된다는 것이다. '질긴 놈이 이긴다'라는 말을 나는 본디 매우 싫어하고, 그것은 그것이 신부님들의 입에서 나왔다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6월 30일부터 7월 5일까지 촛불시위의 제1의 목표는 그 자체의 생존이지, '탈정치에 함몰된 대중들을 그 늪에서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적어도 지금 당장은) 달성 가능한 목표가 결코 아니다.

《아나바시스》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크세노폰의 선거 홍보용 기행문, 전쟁 참전 기록문, 아무튼 그런 건데, 거기서 그와 그리스 군대는 페르시아 군대에게 포위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페르시아인들은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 그러면 우리는 너희들을 친구로 대하리라"고 주장한다. 그리스인들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무기를 버리지 않겠다. 만약 우리가 너희들의 친구가 된다면, 무기를 내려놓았을 때보다 무기를 들고 있을 때 더 유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너희들이 우리와 친구가 되지 못한다면, 우리의 손에 무기가 들려있지 않을 때 우리는 너희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기를 내려놓지 않겠다."

그리고 그리스인들은 (크세노폰에 따르면, 크세노폰의 간지나는 지휘 하에) 최소한의 피해만을 입으며 무사히 탈출하여 바닷가에 도착한다. 2071님의 블로그에서 본 "솔직히 촛불시위는 승산이 없다"라는 글에 대해서도 같은 맥락에서 대답을 돌려줄 수 있을 것이다. 촛불이 무기라면, 한 줌의 도덕적 우월함이 무기라면, 무사히 탈출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그것을 절대 내려놓을 수 없다. 전경들이 왁 하고 닥쳐오는 순간에, 피해를 최소화하며 탈출하기 위해서는 절대 뒤로 황급히 물러나서는 안 된다는 것과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사람들이 더 현명해졌으면 좋겠다. 그게 너무 과도한 기대라면, 최소한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면서 말했으면 좋겠다. 지금 촛불을 내리면 죽도 밥도 안 된다. 종교단체가 '지도부' 역할을 하는 것이 눈에 거슬리다는 사람들이 종종 눈에 띄는데, 그건 최대한 '탈정치적'이고자 노력했던 대책회의가 풍비박산나면서 빚어지는 필연적인 현상이다.

대책회의의 확성차가 살아있던 당시에는 모든 시민들이 다 '나는 지도부가 없는 게 좋아'라고 했다고 생각하나? 눈에 불을 켜고 대책회의와 싸우고 스스로 길을 뚫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10분의 1도 되지 않았다. 그건 대책회의 차량에 시비를 걸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안다. 웅성웅성 달려와서 '그래도 지휘부가 있어야 하지 않냐'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은(대책회의에서 일부러 심어놓은 듯한 사람들을 제외해도 그렇다), 정말이지 겪어본 사람이나 아는 거란 말이다.

촛불을 내리면 시민들은 더 할 수 있는 게 없다. 이게 우리의 적나라한 현실이다. 제발 이걸 좀 인정하고 나서 다음의 대책을 생각하건 말건 하자. 무기를 내려놓으면 우리에게 남은 길은 노예가 되는 것 뿐이다. 정당정치가 마비되어 있는 현실 속에서, 정당정치가 우리를 구원해줄 거라고 기대하면서 촛불을 내리는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노동조합과의 연대를 위해 노동조합과의 연대에서 가장 유용할 수 있는 무기를 내려놓는다는게 앞뒤가 맞는 소리이긴 한가? 나는 그런 의견에 반대한다. 크세노폰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2008-07-02

사제단의 등장, 정교분리 원칙, 그 외

1. 고립으로부터의 해방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개입은 그야말로 '칼같은 타이밍'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만약 하루나 이틀 늦었더라면 시위대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고립되고 있다는 시민들의 불안감은, 내가 "고립과 연대"를 통해 드러낸 바와 같이, 거의 정점으로 치닫고 있었다. 지난 주 토요일, 그 피의 밤이 지난 후 사람들은 '이대로 해봐야 달라질 것이 없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일부 극렬 분자들이 외치는 '비폭력'의 허망함을 모든 시민들이 학습하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수업료 치고는 너무도 비싼 값을 치르고 있었던 것이다.

사제단의 미사 이후 많은 것이 달라졌다. 경향, 프레시안, 한겨레 등에서 적절하게 지적하는 바와 같이, 수많은 시민들이 사제단과 함께 자신감을 되찾았다. 모든 과격 행위자가 궁지에 몰린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궁지에 몰린 이들은 필연적으로 과격해진다. "우리는 촛불시위대가 아니다! 우리는 생존권을 위해 이 자리에 섰다!"라고 외치던, 6월 10일 버스를 부수고 있던 몇 명의 사람들을 내가 탓할 수 없던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그리고 6월 29일까지, 시민들은 조중동을 비웃으면서도 조중동의 프레임에 갇히고 있었다. 나는 그 고립을 해소하기 위해 오직 '연대'를 제안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사제단은 다르다. 한 사람의 가톨릭 신자로서 말하자면, 적어도 교회라는 제도 하에서 나는 한 마리의 양이고 그들은 선한 목자를 대신하는 목동들이다. 너무도 적절한 시점에,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긴 적은 없다'는 요한복음의 구절과 함께 나타나준 그분들께는 그 어떤 말로 감사를 드려도 모자랄 지경이다. 나는 시위대가 점점 더 고립되고, 경찰의 진압 강도는 그에 제곱하여 강해지며, 따라서 큰 인명 사고가 날 수밖에 없는 시나리오로 흘러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될 때마다 두려웠다. 누군가가 죽거나 크게 다칠 수 있고, 그게 나일 수도 있다는 것보다 더욱 두려운 것은, 수많은 한국인들이 마치 고 김선일 씨 사건 당시 그러하였듯이 무리에서 낙오되어 쓸쓸하게 희생당한 이에게 아무 공감을 하지 못하는 모습을 살아서 또 보게 되지나 않을까, 그런 것이었다.

사제단은 시위대에게 다시 한 번 '비폭력'을 요구했다. 그것은 (현재 아고라의 네티즌들은 '전경 가족, 여자친구'로 간주하고 있는) '비폭력주의자'들의 그것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다.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비폭력을 요구하는 목자들은, 스스로 단식투쟁에 나서고 있다. 비폭력 불복종에 동참하자는 목소리는 무리와 함께하고 있을 때 비로소 힘을 얻게 된다. 심지어 예수조차 자신이 제자들로부터 떠나야 하던 그 운명의 밤, 제자들에게 칼을 차라고 명령한 바 있다.

35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내가 너희를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없이 보냈을 때, 너희에게 부족한 것이 있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3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러나 이제는 돈주머니가 있는 사람은 그것을 챙기고 여행 보따리도 그렇게 하여라. 그리고 칼이 없는 이는 겉옷을 팔아서 칼을 사라. 37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경에 기록된 것이 나에게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는 무법자들 가운데 하나로 헤아려졌다.’는 말씀이다. 과연 나에 관하여 기록된 일이 이루어지려고 한다.” 38 그들이 “주님, 보십시오. 여기에 칼 두 자루가 있습니다.” 하자, 그분께서 그들에게 “그것이면 넉넉하다.” 하고 말씀하셨다. (루카 22, 35-38)


물론 아고라에는 천지 분간하지 못하고 까불거리는 인간들이 더 많다. 하지만 사수대를 조직해야 한다는 식의 목소리가 현장에서도 적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실로 우리는 무법자로 헤아려지고 있었고, 칼 두 자루를 차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제단이 촛불을 들었다. 그들이 촛불에게 요구하는 바는 바로 다음과 같다. 이것은 아직 예수가 적극적으로 활동하던 시절, 이스라엘의 곳곳에 사도들을 파견하며 했던 말이다.

3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4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5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루카 10, 3-5)


수많은 사람들이 엄청난 안도감을 느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이제 우리는 고립에서 풀려났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연대의식을 회복하고, 내일부터 벌어질 민주노총의 총파업에 적극 연대함은 물론이거니와, 여타 비정규직 노동자들과도 어깨를 나란히 할 각오를 다져야 한다. 부산항에서 미국산 쇠고기 컨테이너 박스의 반출을 막던 민주노총 조합원 10여명이 연행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사람들이 너무 적다. 비록 대대적이고 즉각적인 총파업이 이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노동계는 분명 촛불과 연대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2. 정교분리에 관하여

여기서 나는 한 가지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보니 '사제단의 정치행위는 헌법상의 정교분리 원칙에 어긋난다'는 둥, '개신교 단체들의 시위에는 혀를 차던 사람들이 사제단을 보면서는 환호하고 있다'는 둥, 자신이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하는 모습이 다소 눈에 띈다. 방금 말한 것처럼 이건 전부 헌법상의 정교분리 원칙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하는 소리에 불과하다. 일단 조문부터 살펴보자.

대한민국 헌법 제20조

1.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
2.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


제20조의 구조를 일별해보면 알 수 있다시피, 헌법상의 정교분리 원칙은 어디까지나 종교의 자유라는 대원칙하에서 성립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라는 원칙이 우선 있고, 그것을 위해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 이러한 헌법상의 조문만으로 '그러므로 정의구현사제단의 정치행위는 위헌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헌법의 본래 취지와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종교집단이 현실 문제에 전혀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라는 구절을 해석한다면, 교회가 사회 정의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음을 천명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은 세계 대부분의 국가에서 배척당해야 마땅하다. 혹은 그 반대로, 대한민국 헌법이 정교분리의 원칙을 내세우고 있지만 기독교 관련 정당들이 난립하고 있는 현재의 상황은 헌법적 원리가 지켜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에 대해 살펴보자. 그런 식이라면 독일 또한 정교분리의 원칙이 땅에 떨어진 나라가 될 것이다. 헬무트 콜이 수상 노릇을 하면서 독일 통일을 이끌어낸 정당의 이름이 '기독민주당'이라는 점을 상기해본다면 분명히 그렇다.

정교분리의 원칙은 종교 집단이 절대 정치의 문제에 개입할 수 없다는 뜻도 아니고, 그 반대로 정치 단체가 종교적인 원리를 스스로의 행동 강령으로 삼을 수 없다는 뜻도 아니다. 다만 그것은 제도화된 거대 종교가 국가의 통치에 직접적으로 개입함으로써 개인이 종교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특히 '국교'라는 제도를 통해 억압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소극적인 원칙에 불과하다. 물론 극단적인 경우, 라기보다는 대부분의 이슬람 국가에서처럼 '종교 위원회'가 국사를 좌지우지하는 상황 또한 상상해볼 수 있지만, 그것은 애초부터 우리가 헌법을 만들 때 고려할만한 대상이 아니었으므로 여기서는 논할 필요가 없다.

시위에 참석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한 줄기 단비와도 같은 사제단의 참여를, '정교분리'라는 단어까지 꺼내가며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사람들을 보면 참으로 만감이 교차한다. 그렇게까지 '쿨'하고 싶을까. 우리가 일부 개신교 목사들의 정치적 발언을 문제삼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기 때문이지, 그들이 종교인이기 때문이어서가 아니다. 장로가 아니라 아예 목사가 대통령이 된다 해도, 그가 국민들에게 국교를 강요하지 않는 한(대한민국을 신에게 봉헌하는 따위의 문제는 따로 고려해봐야 하겠지만) 그것은 정교분리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다.


3.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 생각이

기왕 루카 복음서를 펼쳐들었으니,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 중 하나를 인용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짓는 편이 낫겠다. 아기 예수를 본 시메온이라는 의인은, 이스라엘을 구원할 그리스도인 예수를 찬미한 후 아기 어머니 마리아를 바라보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던진다.

34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35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루카 2, 34-35)


할 일도 많고, 먹고 싶은 것도 많고, 놀고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집회에 나가지만, 이명박 정권이 뒤집힐 가능성이 점점 줄어드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도리어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 고립되고 있다는 불안감만이 엄습해오던 것이 최근의 풍경이었다. 더욱 피곤한 것은 앞서 비판한 것과 같은 '쿨게이'들이다. 그들은 그저 자신의 '특별함'을 과시하기 위해 사려깊지 못한 말을 툭툭 던지지만, 막상 그것을 듣고 있는 사람들은 몇 배의 정신적 피로를 느낄 수밖에 없다.

내가 무슨 짓을 하건, 무슨 말을 하건 세상은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회의주의가 나를 유혹할 때마다, 루카 복음서의 저 구절을 생각하곤 한다. 부러 과격한 어조로 자칭 마초들을 논박하던 때부터 지금까지 늘 그랬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토론을 통해 상대방을 설득할 수 없다. 시위를 통해 이명박을 광장으로 끌어내고, 그가 국민들의 뜻을 받아들이게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심지어는 시민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나뉘고, 다투고, 결국은 너덜너덜한 가슴을 안고 집에 돌아가게 된다.

하지만 그 모든 일들을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성 루카라고 불리는 복음서의 기자(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 속에서 도리어 한 줄기의 희망을 보았다. 2008년 7월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손에 남아있는 것도, 결국 그 한 가닥의 빛이다. 물론 어둠이 빛을 이긴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2008-06-30

외신 기자들은 무슨 신문을 볼까

주말 내내 집회에 참석해서 체력이 바닥난 상태다. 요즘 정신적으로도 소모가 심해서 길고 차분한 글을 쓰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그냥 아주 간단하게, 사실 하나만 지적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CNN에서 촛불시위에 대해 보도한 기사를 보고 적지 않은 이들이 분노하고 있는 것 같다. '조중동 못지 않다'는 식의 불만이 들려온다. 하지만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CNN이 '미국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미국 매체여서가 아니다(뉴스코프 사장 루퍼트 머독은 호주 출신이다).

외신에서 다루는 한국 소식이 '조중동 프레임'에 갇혀 있는 것은, 한국에 상주하는 외신 특파원들이 매일같이 중앙일보를 보기 때문이다. 이건 거의 논리적 필연에 가까울 정도로 확실하다. 외신 기자가 International Herald Tribune을 구독하지 않을 리가 없는데, 거기에 매일같이 Joongang Daily, 즉 영문판 중앙일보가 딸려온다는 점을 상기해본다면 그렇다. 외신기자들의 아침은 중앙일보로 시작되는 것이다.

국내에서 그 내용을 지적하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만큼, 같은 내용을 번역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영문판 중앙일보의 내용은 한국어판보다 훨씬 더 '쩐다'. 영어를 잘 못해서 그렇게 번역을 하는 건지, 아니면 너무 잘 해서 미묘한 뉘앙스를 이상한 방향으로 살려내고야 마는 건지 알 수가 없지만, 아무튼 사실이 그렇다. 한국에 상주하는 외신 기자들은, 한국어판 중앙일보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은 Joongang Daily의 정기구독자다.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는 한, 우리는 언제나 외신 보도에 대해 십중팔구 실망하지 않을 수 없다.

한겨레에서 영문판 서비스를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 파급력은 아무래도 Joongang Daily에 미칠 수가 없다. 그러다보니 한국인들이 기대하는 수준의 '공정 보도'가 외신을 통해 나오는 것은 사실상 거의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외신 기자가 맞았다더라', '외국인이 맞았다더라' 같은 유언비어에 휩쓸려, 타자의 시선을 힐끗거리는 일은 이번 사태를 해결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확실히 해두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