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6-30

외신 기자들은 무슨 신문을 볼까

주말 내내 집회에 참석해서 체력이 바닥난 상태다. 요즘 정신적으로도 소모가 심해서 길고 차분한 글을 쓰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그냥 아주 간단하게, 사실 하나만 지적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CNN에서 촛불시위에 대해 보도한 기사를 보고 적지 않은 이들이 분노하고 있는 것 같다. '조중동 못지 않다'는 식의 불만이 들려온다. 하지만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CNN이 '미국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미국 매체여서가 아니다(뉴스코프 사장 루퍼트 머독은 호주 출신이다).

외신에서 다루는 한국 소식이 '조중동 프레임'에 갇혀 있는 것은, 한국에 상주하는 외신 특파원들이 매일같이 중앙일보를 보기 때문이다. 이건 거의 논리적 필연에 가까울 정도로 확실하다. 외신 기자가 International Herald Tribune을 구독하지 않을 리가 없는데, 거기에 매일같이 Joongang Daily, 즉 영문판 중앙일보가 딸려온다는 점을 상기해본다면 그렇다. 외신기자들의 아침은 중앙일보로 시작되는 것이다.

국내에서 그 내용을 지적하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만큼, 같은 내용을 번역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영문판 중앙일보의 내용은 한국어판보다 훨씬 더 '쩐다'. 영어를 잘 못해서 그렇게 번역을 하는 건지, 아니면 너무 잘 해서 미묘한 뉘앙스를 이상한 방향으로 살려내고야 마는 건지 알 수가 없지만, 아무튼 사실이 그렇다. 한국에 상주하는 외신 기자들은, 한국어판 중앙일보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은 Joongang Daily의 정기구독자다.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는 한, 우리는 언제나 외신 보도에 대해 십중팔구 실망하지 않을 수 없다.

한겨레에서 영문판 서비스를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 파급력은 아무래도 Joongang Daily에 미칠 수가 없다. 그러다보니 한국인들이 기대하는 수준의 '공정 보도'가 외신을 통해 나오는 것은 사실상 거의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외신 기자가 맞았다더라', '외국인이 맞았다더라' 같은 유언비어에 휩쓸려, 타자의 시선을 힐끗거리는 일은 이번 사태를 해결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확실히 해두어야 한다.

댓글 5개:

  1. 중앙일보 기자와 통화를 했습니다. 1면기사를 보고요. 1면에서 시위대를 둘러싸고 경찰에 폭력을 가하는 사진과 기사가 1면첫문단에 묘사가 되있다, 그리고 경찰이 다친 경우는 인터뷰등 자세히 묘사를 하고 시위대가 다친경우는 '대책위의 주장'으로 축소시켰다, 중앙일보가 관보인가.라고 따졌습니다. 그랬더니 돌아오는 대답은 간결하더군요.
    "경찰의 공권력에 의한 법집행은 당연한 것이고 그것이 불법시위이고 그들은 시민이 아니라 폭력시위대이기 때문에 당연한것이다." 이게 언론인의 입에서 과연 나올 수 있는지에 망연해하고 어떻게 이들의 기사가 이런식으로 나올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폭력을 휘두르지 않은 사람에게도 무수히 많은 경찰의 폭력이 있었다.'라는 말에는 '그럼 고소를 하라. 그래서 승소를 하면 실어주겠다'라고 하더군요. 네, 이 정도입니다. 웹2.0시대다 뭐다 하지만.. 이런 언론들이 있는데 어떻게 세상이 변할 수 있을까 싶네요. 씁쓸함이 아침부터 오래남습니다.

    답글삭제
  2. 웹 2.0이라는 말은 정말이지 구역질나는 상투어구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미디어가 활동하고 있다고 해도 아직 '권위'는 기존의 미디어에 실려 있는 현실을 도외시한채, 그저 대중들의 귀에 달콤한 소리만 나열하는 거죠. 그런 식의 태도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중앙일보는 운좋게도 남대문에 위치하고 있어서 이번 촛불시위에서 봉변을 면했지만, 조선이나 동아보다 나을 게 없는 그런 신문입니다. 언론 문제에 대해서도 '조중동 찌라시'라는 한줄짜리 구호를 넘어서는 그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답글삭제
  3. 중앙데일리였나.. lawless district, riot이라는 표현을 쓰더군. 누가보면 여기가 서울이 아니라 바그다드인줄 알겠어. 네 말대로 AP 에이전시 같은 곳은 그 단어를 그대로 반복하고 말야. 그리고 얼마 전 보니 외신기자협회 회장하고 명박이도 잘 지내는 사이같고. 정말 구역질나는구나...

    똑같은 외신이면서도 가디언지 같은 곳 보도는 여전히 rally며 demonstration이란 표현을 유지하고 있고 명바기의 공기업 사유화같은 정책도 알려주고 있음. 난 아무리 외신기자들이 중앙데일리를 봐도, CNN이 미언론이란 것도 영향을 미친다고 봐.. 일반화시키기 그렇지만 미국애들 시각은 보통 심각하게 더 편협하고 (정말로),CNN은 거의 그 나라판 조중동. (머독은 미국진출 목적으로 미국시민권을 딴 정도니 친미적이진 않지만, 뼛 속까지 친기업적. 근데 미국에선 두개는 어차피 거의 비슷한 소리.)

    답글삭제
  4. 한국 외신기자들이 직접 취재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는 걸 다들 좀 알아줬으면 하는 바램이야. 국제 뉴스를 다루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을 좀 해줬으면 싶은 거지. 한국 특파원들은 한국을 열심히 취재해야 할 이유가 별로 없잖아. 그러니 국내 주요 일간지에서 내는 영문 기사를 그대로 받아 쓰는 경우가 적지 않은 거고. 그나마 연합뉴스의 최상훈 기자가 공정한 보도를 하고 있지.

    가디언은 최근에 보기 시작했는데 정말 훌륭하더라. 웹사이트에 들어가면 너무 정보가 많아서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야. 화면 구성이나 그 외 디자인적인 측면도 뉴욕타임즈를 가볍게 능가하는 것 같고.

    CNN이 미국 언론이라는 사실 자체를 도외시할 수야 없겠지만, 난 너무도 많은 한국 사람들이 '이건 미국의 음모'라고 생각하는 식의 사고방식에 젖어있는게 맘에 안 들어. 그러니 미국의 '의도' 따위는 변수에 두지 않고 사태를 해석하기 위해 노력하겠음. 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그리고 CNN을 두고 미국판 조중동이라고 하면 폭스 뉴스가 섭섭해하지 않을까.하하.

    답글삭제
  5. 재미있는 사실은 조중동의 프레임 안에 벗어나지 않는 대부분의 외신 기자들이 사실은 한국인들이라는 점입니다..

    답글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