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8-14

마감과 납기

《판타스틱》 9월호에 실릴 원고 두 편을 모두 털어냈다. 그 외에도 이번 달에는 흔히 말하는 '외고'를 많이 맡아서 정신이 없었다. 그 와중에 떠오른 생각 하나를, 집에 가기 전에 후딱 적어놓는다.

사람들은 흔히 '마감'이라는 단어에 대해 모종의 환상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실제로 마감이 존재하지 않는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 혹은 아직 사회생활을 해보지 않은 20대 초중반의 경우가 특히 그렇다. 간혹가다 정말 컨텐츠를 생산하면서도 '마감'이라는 단어를 말랑하게 사용하는 경우를 목격할 수 있긴 한데, 그것도 결국 후자에 포함되는 것이므로 이쯤에서 논의를 진전시켜 보도록 하자.

특히 만화가의 마감에 대해 여러 가지 판타지가 존재한다. 만화가가 마감을 맞추기 위해 며칠 밤을 새고, 편집자에게 오는 전화를 이런 저런 방식으로 교묘하게 회피하고, 그래도 결국에는 어찌 어찌 일자를 맞춰서 원고를 보낸 후 '하얗게 불타버리는' 그런 장면들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연상할 수 있다. 만화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자란 젊은 세대들의 경우, 앞서 말한 것처럼 본격적인 사회 생활을 해보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에, '마감'에 대한 판타지에 더 쉽게 휩쓸리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마감은 만화가들이 편집후기에 그려놓는 것처럼, 남에게 쉽사리 징징거리면서 자기 일을 한 없이 미루고, 창조적인 생각이 안 떠오른다는 핑계를 대며 술이나 퍼마시고, '빈 문서 1' 앞에서 한없이 한숨을 내쉬는 그런 것이 아니다. 마감일은 그저 그때까지 원고가 넘어가야 다음 공정 진행에 차질이 없음을 나타내는 최후의 데드라인일 뿐이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음 공정'이다. 글쓰는 이가, 혹은 만화를 그리는 이가 원고를 생산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출판 산업의 큰 맥락에서 원 재료를 생산하는 것에 불과하다. 물론 그 원고 안에 세계를 벌벌 떨게 할 놀라운 무언가가 담겨있을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만들어지는 순간에 그것은 다른 수십억의 원고와 전혀 다를 바 없는 '1차 재료'일 뿐이다. 그것을 받아서 편집, 즉 가공하고, 디자인 과정을 거쳐 필름 출력, 인쇄하는 모든 공정을 거쳐야 비로소 책이 나온다.

자본가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려 하지 말고, 자본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자. 출판 산업의 차원에서 보면, 내가 쓰고 있는 글은 이 광대한 산업을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일 뿐이다. 그것은 당연히 재가공되고, 편집되며, 디자인 과정에서 눈 베리는 무언가로 전락할 수도 있고, 제책 과정의 실수로 앞뒤 순서가 뒤바뀔 수도 있다. 광부가 광산에서 캐낸 원광석이 장신구가 될 수도 있고 자동차가 될 수도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글은 인간 정신의 산물이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유통되는 글은 모듬살이하는 인간들의 사회적 산물이다.

마감의 고통을 토로하는 천편일률적인 말은 이제 그만 나와야 한다. 글 쓰는 이는 그저 납기에 맞춰 1차 생산물을 뽑아내는 것일 뿐이다. 편집자가 바라는 대로 투덕투덕 아무렇게나 써서 줘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글에 담기는 극도로 내면적이고 사밀한 그 무언가를 구태여 '마감의 고통'으로 치환시키지 말자는 뜻이다. 글은 정신의 산물이지만 원고는 산업의 일부분이다. '마감'이라는 닳고 닳은 단어 대신 '납기'라는 단어를 넣어보면 그 차이가 피부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20대 문제에 대해 사고하면서 가장 절실하게 느껴지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나'를 한가운데 놓고 생각하지 말고, 내가 어떤 산업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짚어보는 그런 종류의 객관화가 필요하다. 보름 넘게 품고 있던 원고를 털어낸 후 잠시 든 생각이다.

성조기와 태극기

이명박의 태극기 사건 이후, 조지 부시도 성조기를 거꾸로 들었다며 '유유상종' 같은 말이 나돌았다. 이명박이나 부시나 똑같은 놈들이다, 이런 식의 비아냥이 인터넷 공간을 잠시 휩쓸었던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사진을 놓고 보면 그 둘의 '실수'는 전혀 같은 차원의 것이 아니다. 순수한 의미에서 '멍청함'은 오직 부시만의 것이고, 이명박의 실수는 멍청해서가 아니라 무관심해서 벌어진 것이다.



사진=한겨레


두 사람의 사진을 나란히 놓고 확인해보자. 부시는 성조기의 좌우를 혼동해서 들고 있다가, 딸이 지적하자 얼른 바꿨다. 그것은 그가 카메라에 찍힐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자기가 보기에 올바른 방향으로 성조기를 들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건 똘똘하지 못한 초등학생이 거리에 서 있는 사람들을 놀리겠다는 심산 하에, 버스 좌석에 앉아 하얗게 김이 서린 차창에 '바보'라고 똑바로 써놓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바보'라는 글자를 상대가 읽을 수 있도록 좌우를 바꿔야 한다는 상식적인 결론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부시의 멍청한 짓에는 이처럼 천진난만한 구석이 있다.

하지만 이명박의 경우는 차원이 다르다. 국기의 상하가 바뀌었다는 것은 그가 태극기를 손에 받아 휘두르기까지 단 한 번도 그것을 거들떠보지 않았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성조기를 펄럭이는 부시의 해맑은 바보짓과 비교해볼 때, 이명박의 거꾸로 된 태극기는 다소 섬뜩한 인상까지 준다. 부시에게 애국심을 기대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지만, 이명박에게 그럴 수는 없을 것만 같다. 단언하건대, 멍청한 대통령보다 더 나쁜 것은 무관심한 대통령이다.

2008-08-13

작은 언론, 큰 언론

[세상 그리고 사람]“20대 문제는 모든 세대의 문제… 20대만 욕하지 말라” ‘포린 폴리시’ 한국어판 편집장 노정태(경향신문, 2008년 8월 14일자 섹션 4면)

최근 경향신문의 김후남 기자님을 통해 지면을 얻고 또 인터뷰까지 하게 되면서, 언론에 대해 이런 저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2시간 40분 넘게 손동우 사회부 부국장님과 마주앉아 별별 이야기를 다 했는데, 그 중 꺼내지 못한 게 있다면 이런 것이다. 대한민국의 일간지, 즉 메이저 출판 매체가 취약한 이유 중 하나는, 그것을 뒷받침해줄 튼튼한 전문지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관계의 오류 등을 화끈하게 질타하면서 정정해줄 그런 전문 매체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한국의 출판 매체 시장에 다양한 전문지가 강인하게 뿌리내리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이 언론에서 '정보'가 아닌 '내 편'을 찾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것은 드라마 전문 매체인 드라마틱에서 일할 때 특히 강렬하게 느꼈던 것이다. 사람들은 드라마라는 매체 자체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그 한 편의 드라마의 팬인 내 편을 들어줄 그런 매체를 원한다. 사실 촛불 정국에서 경향신문과 한겨레의 구독자가 늘어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촛불 시민'들은 '우리 편'이 되어줄 그런 신문을 원했지, 종합 일간지답게 사회의 다양한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해주는 신뢰할만한 언론을 원한 게 아니다.

작은 언론들이 많이 등장할 수 있어야 큰 언론들도 제 기능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작은 언론들의 생존을 위해서는, 큰 언론들 또한 조화로운 언론 생태계를 구성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어야 한다. 그 중 가장 중요하면서도 기본적인 것은, 인터뷰에 언급된 것처럼, 사실과 의견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언론 문화를 정착시켜 나가는 것이다. 나는 그래서 원론적으로는, 경향신문이 미국 축산농민협회의 의견 광고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전략적으로 현재의 분위기를 감안해볼 때 그런 광고 제의를 거절한 것은 당연하며 또한 잘 한 일이라고 본다. 문제는 이 두 선택지의 간극을 좁힐 수 있는 방안을 과연 어떻게 찾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FP 9/10월호 제작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아직 커버 타이틀 등을 공개할 수는 없는데, 이번호 타이틀은 지난호보다 훨씬 '핫'하다. 앞서 나는 작은 언론과 큰 언론을 구분지으면서, 전문지를 작은 언론으로, 종합 일간지를 큰 언론으로 대강 분류했다. 하지만 미디어가 발달한 나라일수록 그런 구분은 희미해진다. Foreign Policy와 Foreign Affairs는 모두 외교 전문지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이 두 매체를 '작은 언론'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궁극적으로는 '작은 언론'과 '큰 언론'의 경계선 또한 지금과는 다른 차원에서 그어져야 할 일이다. 물론 나는 FP 한국어판이 한국 내에서도 '큰 언론'이 되기를 바란다.



근 세 시간을 떠들고도, 인터뷰를 읽어보니 덧붙이고 싶은 말이 생겨서 후기를 적어보았다. 방문자들께서는 인터뷰에 대한 코멘트를 이 게시물에 달아주시기 바랍니다.

2008-08-08

금리 인상과 주택 버블 붕괴

경제에 대해 잘 아는 편이 아니다, 라는 말을 하기도 민망할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지만, 한국은행의 금리 인상과 더불어 벌어지게 될 일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예상이 가능하다. 비록 이코노미스트는 이번 호의 Economic Focus에서(이 코너 정말 최고다. '경제학적 사고'가 뭔지 알고 싶다면 이걸 꼭 읽어야 한다) "Home Truths"라는 기사를 통해 '주택 가격의 하락이 반드시 전체 경제에 나쁜 일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는 논지를 펼쳤지만, 한국의 경우는 문제가 조금 더 심각하기 때문이다.

금리를 인상하면 당연히 매달 붙는 이자가 높아진다. 그런데 현재 한국의 중산층, 1주택 소유하고 있고 그 주택을 담보삼아 대출을 받고 있는 사람들은, 이자 부담이 가속화되면 가속화될수록 소비를 줄이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한국은행의 금리 인상은 곧 소비 위축으로 이어진다. 이 상황에서 주택 가격의 거품이 빠지면, 그나마 그 중산층들의 유일한 자산인 주택의 가치가 줄어들기 때문에, 재산은 줄었는데 빚은 늘어나버린 이중고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애초에 주택 가격이 너무 비싸기 때문에, 앞서 언급한 이코노미스트 기사에서 나온, '지금까지 집을 사지 못하고 있던 젊은이들이 이익을 보고' 같은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현재 집값이 아무리 떨어져도 나는 집을 못 산다. 이건 대부분의 20대에게 공통되는 현상이며, 30대로 올라가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현재 한국의 젊은 층은 불안정한 고용의 첫번째 피해자가 될 사람들이다. 학자금 대출 금리가 말도 못하게 올랐다는 것은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주택 가격 버블이 빠진 후의 한국 경제는, 현재의 금리 인상과 맞물려, 정말 우려된다.

2008-08-07

대화와 소통과 자치공간



오늘자 경향신문에 실린 칼럼, "겁먹은 20대와 '쇼크 독트린'"은 기본적으로 나오미 클라인의 '쇼크 독트린'에서 출발하고 있다. '쇼크 독트린'은 비단 20대에 대해서만 적용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가장 가까운 예로, 서울 시내 한복판에 컨테이너 박스로 장벽을 쳐버리는 그것 또한, 일종의 '충격 요법'인 셈이다. 방패로 땅을 찍고 구호를 외치면서 달려드는 전경들 또한 시민들의 공포심을 자극하기 위한 기제이다.

20대들이 '정보'와 '소통'으로 '쇼크 독트린'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대화와 사색을 위한 공간과 시간이 마련되어야 한다. 하지만 기업들이 세워주는 으리으리한 건물에는 자치공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과거의 대학생과 현재의 대학생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차이 중 하나가 바로 그것이다. 그들에게는 최소한의 자치공간이 있었지만, 지금의 대학생들에게는 몸을 누이고 책을 읽고 토론할 수 있는 한 뼘의 공간이 없다. 예전에는 세미나실에 모여서 그냥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지만, 지금은 스타벅스에서 4800원짜리 까페라떼를 주문하거나 토즈 등 공간을 빌려주는 업체를 이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서도, 또 돈이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다.




* "겁먹은 20대와 '쇼크 독트린'"(경향신문, 2008년 8월 7일)에 대한 코멘트를 이 게시물에 남겨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