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스틱》 9월호에 실릴 원고 두 편을 모두 털어냈다. 그 외에도 이번 달에는 흔히 말하는 '외고'를 많이 맡아서 정신이 없었다. 그 와중에 떠오른 생각 하나를, 집에 가기 전에 후딱 적어놓는다.
사람들은 흔히 '마감'이라는 단어에 대해 모종의 환상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실제로 마감이 존재하지 않는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 혹은 아직 사회생활을 해보지 않은 20대 초중반의 경우가 특히 그렇다. 간혹가다 정말 컨텐츠를 생산하면서도 '마감'이라는 단어를 말랑하게 사용하는 경우를 목격할 수 있긴 한데, 그것도 결국 후자에 포함되는 것이므로 이쯤에서 논의를 진전시켜 보도록 하자.
특히 만화가의 마감에 대해 여러 가지 판타지가 존재한다. 만화가가 마감을 맞추기 위해 며칠 밤을 새고, 편집자에게 오는 전화를 이런 저런 방식으로 교묘하게 회피하고, 그래도 결국에는 어찌 어찌 일자를 맞춰서 원고를 보낸 후 '하얗게 불타버리는' 그런 장면들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연상할 수 있다. 만화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자란 젊은 세대들의 경우, 앞서 말한 것처럼 본격적인 사회 생활을 해보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에, '마감'에 대한 판타지에 더 쉽게 휩쓸리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마감은 만화가들이 편집후기에 그려놓는 것처럼, 남에게 쉽사리 징징거리면서 자기 일을 한 없이 미루고, 창조적인 생각이 안 떠오른다는 핑계를 대며 술이나 퍼마시고, '빈 문서 1' 앞에서 한없이 한숨을 내쉬는 그런 것이 아니다. 마감일은 그저 그때까지 원고가 넘어가야 다음 공정 진행에 차질이 없음을 나타내는 최후의 데드라인일 뿐이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음 공정'이다. 글쓰는 이가, 혹은 만화를 그리는 이가 원고를 생산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출판 산업의 큰 맥락에서 원 재료를 생산하는 것에 불과하다. 물론 그 원고 안에 세계를 벌벌 떨게 할 놀라운 무언가가 담겨있을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만들어지는 순간에 그것은 다른 수십억의 원고와 전혀 다를 바 없는 '1차 재료'일 뿐이다. 그것을 받아서 편집, 즉 가공하고, 디자인 과정을 거쳐 필름 출력, 인쇄하는 모든 공정을 거쳐야 비로소 책이 나온다.
자본가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려 하지 말고, 자본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자. 출판 산업의 차원에서 보면, 내가 쓰고 있는 글은 이 광대한 산업을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일 뿐이다. 그것은 당연히 재가공되고, 편집되며, 디자인 과정에서 눈 베리는 무언가로 전락할 수도 있고, 제책 과정의 실수로 앞뒤 순서가 뒤바뀔 수도 있다. 광부가 광산에서 캐낸 원광석이 장신구가 될 수도 있고 자동차가 될 수도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글은 인간 정신의 산물이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유통되는 글은 모듬살이하는 인간들의 사회적 산물이다.
마감의 고통을 토로하는 천편일률적인 말은 이제 그만 나와야 한다. 글 쓰는 이는 그저 납기에 맞춰 1차 생산물을 뽑아내는 것일 뿐이다. 편집자가 바라는 대로 투덕투덕 아무렇게나 써서 줘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글에 담기는 극도로 내면적이고 사밀한 그 무언가를 구태여 '마감의 고통'으로 치환시키지 말자는 뜻이다. 글은 정신의 산물이지만 원고는 산업의 일부분이다. '마감'이라는 닳고 닳은 단어 대신 '납기'라는 단어를 넣어보면 그 차이가 피부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20대 문제에 대해 사고하면서 가장 절실하게 느껴지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나'를 한가운데 놓고 생각하지 말고, 내가 어떤 산업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짚어보는 그런 종류의 객관화가 필요하다. 보름 넘게 품고 있던 원고를 털어낸 후 잠시 든 생각이다.
흠.. 이미 생각의 구조가 프로페셔널이 되어있으신 듯 합니다. 이쪽 업계도 그 "마감"이라는 말을 달고 사는데, 님만큼도 생각을 못하는 사람들 많지요...
답글삭제주말 내내 정신이 없다가 이제야 리플 다네요. 사실 어떤 분야건 '마감'은 존제하게 마련이죠. 문제는 그게 약간의 창조와 결부된 경우 특히, 그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차원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말해 자신이 어떤 산업의 일부로 일하고 있다는 것을 너무도 쉽게 잊곤 하는 경향이 있다는 거죠.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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