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9-10

기륭전자의 '88만원 세대'들

[판]기륭전자의 '88만원 세대'들 (경향신문, 2008년 9월 11일자)

. . . 그렇게 시작된 파업이 3년을 넘겼다. 그 유명한 ‘기륭전자 파업’의 전개 과정이 이렇다. 100일에 가까운 기간 동안 단식을 했던 두 명의 여성 노동자들이 효소까지 끊고 버티다가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지금도 싸움은 계속되고 있다. 광화문에서 시작된 촛불이 구로공단으로까지 향해, 내가 한 줌의 죄책감을 덜어보기 위해 현장에 들렀던 날, 사람들은 문화제를 마친 후 영화 '안녕? 허 대짜 수짜님!'을 보고 있었다.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간부 허대수는 처남에게 묻는다. "비정규직 내가 만들었냐?"

'88만원 세대' 문제에 대해서도 결국은 같은 대답이 돌아온다. '누가 그러게 공무원 시험 보랬냐?' 혹은, '중소기업 가서 열심히 일하면 되잖아!' 하지만 이곳은 가내수공업 중소기업의 제품이 우주왕복선 부품으로 팔리는 나라 일본이 아니다. 여기는 공채의 왕국 대한민국이다. 당신의 첫 직장이 당신의 인생 전부를 좌우한다. . .


지면 관계상 누락된 문장을 이곳에 올려놓는다. 한결 이해가 쉬워질 것이다. 한 달 넘도록 생각하고 있던 주제를, 원고지 10여매 안에 박아넣는다는 것은 정말이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기서 못다한 이야기들을 풀어놓을 기회가 또 있으리라 믿는다.

노파심에 강조하자면, 나는 지금 '20대가 세상에서 제일 불쌍해'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그따위 소리를 하기 위해 꼴랑 한 번 가보고 기륭전자를 팔아먹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잔인한 세상 속에서, '어린이' 취급당하며 근 30여년을 살아가는 이들이 비굴해지지 않는다면, 또 그만큼 서로에게 잔인해지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 아니겠냐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나 자신과 내 또래에 대해 그리 큰 기대를 걸지는 못한다. 하지만 절망을 가장한 매도를 하는 이들을 더욱 참아낼 수 없다. 그정도 이야기만이라도 꼭 하고 싶었다.

2008-09-04

구글 크롬

구글 크롬을 사용해 보았다. 확실히 빠르긴 빠르다. 별도의 탭이 움직이는 방식도 마음에 든다. 하지만 구글 특유의 미니멀리즘이 지나치게 밀어붙여져 있다는 인상도 강하다. 가령 트리 형식의 즐겨찾기 관리가 대단히 불편한 것은, 적지 않은 수의 인터넷 사용자에게 장점이 아닌 단점으로 보일 가능성이 더 크다.

하지만 파이어폭스를 처음 사용하던 시점부터 가지고 있던, 탭이 브라우저 창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느껴지던 답답함은 많이 해소된 듯하다. 일각에서 지적하는 바와 같이 크롬은 브라우저에 탭이 종속된 형식이 아니라, 탭의 뭉터기로 브라우저를 제시하고 있다. 그 결과 별도의 탭을 '바로가기' 형식으로 바탕화면이나 시작버튼 등에 배치할 수 있는데, 이건 그야말로 구글 닥스 바로가기 만들라는 뜻이고 너무 속이 뻔히 보이지만 창의력 대장이긴 하다.

하지만 나는 당장 구글 크롬으로 갈아탈 수 없는데 그 이유는 딱 두 가지이다. 파이어폭스의 마우스 제스처 기능이야 포기하라면 포기할 수 있다. 그러나 Sage-Too와 조테로만큼은 버릴 수 없다. 세이지를 써온 사람은 다른 리더기로 갈아탈 수가 없다. 특히 블로그를 볼 때 유용하다. 별도의 RSS 창에서 리더로 읽어온 내용만 조금 보여주는 여타 RSS 리더기와는 달리, 세이지를 쓰면 바로 그 웹 화면을 불러와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블로그를 걸어놓고 보면 본문 뿐 아니라 리플까지 한번에 다 보인다.

그러나 조테로만큼은 절대 안 된다. 대부분의 뉴스를 웹을 통해 접하는 처지에서, 뉴스 클리핑할 때 조테로만큼 좋은 툴을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했다. 특히 이코노미스트나 뉴욕타임즈 등은 조테로에 저장할 수 있는 형식을 따로 제공해주기 때문에, 클릭 한 번이면 저자 이름과 게시 날짜 등 주석 달때 필요한 정보가 모두 브라우저 안에 저장된다. 이게 없으면 두 달 전에 힐끗 훑어본 기사를 인용해서 외고에 써먹거나 하는 일이 몇 배는 힘들어질 것이다.

아직까지는 진지하게 논문을 쓴 적이 없기 때문에 본연의 학술 도구로 조테로를 사용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기사를 쓰는 차원에서도 조테로는 매우 유용하다. 맥의 데본씽크같이 진짜 헤비한 툴을 고려하지 않는 한, 조테로를 대체할 그 무언가를 찾을 수는 없다. 특히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웹을 통해 꾸준히 기사를 읽고 그걸 정리하는 것이 일과의 큰 부분인 나로서는 말이다.

브라우저 자체만 놓고 보면, 당연한 말이지만 더 늦게 나왔고 더 많은 기술과 자본이 투여된 크롬이 낫다. 하지만 파이어폭스의 수많은 확장 기능 중, 특히 조테로가 너무도 유용하다. 이건 가급적 더 많은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을 정도다.

가령 나는 지난 8월 26일 이코노미스트 온라인 에디션에서 이런 내용을 알게 되었다. 1912년까지는 권총 결투가 올림픽 종목이었다. 줄다리기도 올림픽 종목이었는데, 1920년 폐지되었다.1) 이따위 정보를 따로 적어두고 보관하는 일은 대단히 대단히 어렵다. 하지만 나는 서핑을 하다가 낄낄 웃은 다음, 주소창 옆에 뜬 아이콘 하나를 클릭했다. 그 결과 내 브라우저에 해당 기사의 서지 정보와 내용이 저장되었고, 나는 지금 그걸 보면서 이 내용을 쳤다. 각주 1에 해당하는 서지 정보는 드래그 앤 드롭으로 자동 입력된 것이다.

1. “Olympic sports: Shoot the pigeon,” The Economist, August 2008, http://www.economist.com/daily/chartgallery/displaystory.cfm?story_id=11991176&fsrc=rss.

갑자기 무슨 구글 안티가 되고자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아니다. 정보를 효과적으로 다루기 위한 더 좋은 툴이 나와있기 때문에, 무작정 대세에 시승하여 크롬으로 갈아타는 대신, 자신에게 꼭 필요한 기능이 어디에 어떻게 있는지 알아보는 시간을 갖자는 거다. 우석훈 박사의 블로그에서 마이니치 신문 영어판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낼름 내 즐겨찾기에 넣은 일이 최근 있었는데, 바로 그렇게, 서로 알고 있는 좋은 것을 조금씩이나마 나눠 갖는 자세가 필요하다고도 생각한다. 구글 크롬 사용기로 시작해서 조테로 홍보로 끝난 리뷰는 여기까지.

2008-08-31

나는 저들과 다르게

독일 신학자 마르틴 니묄러가 썼다는 이 시가 요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한겨레 21의 파시즘 특집 기사에서도 인용되었고, 그 외 많은 수의 네티즌들이 이 시를 읽으며 성찰의 시간을 갖고 있는 듯하다.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나치는 우선 공산당을 숙청했다. 나는 공산당원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유대인을 숙청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노동조합원을 숙청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가톨릭교도를 숙청했다. 나는 개신교도였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나에게 왔다. 그 순간에 이르자, 나서줄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이 시를 볼 때마다, 혹은 이 시를 인용하면서 자신이 사회적 약자들과 '연대'하지 못하고 있음을 짐짓 자책하는 이들을 볼 때마다, 루카의 복음서에 나오는 이 대목이 떠오른다.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
18: 9 예수님께서는 또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11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12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13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1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물론 두 인용문의 상황이 1:1로 일치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나는 저들과 다르다'라는 인식만큼은 양자가 공유하고 있고, 나는 바로 그것이 문제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비정규직이 아니라서 비정규직과 연대하지 않았고, 그 결과 경제 공황의 파고가 내게도 닥쳐왔다'라는 길고 긴 반성문을 되풀이하고 있는 한, 그것은 결코 복음서에서 말하는 참회가 아닐 것이다.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연대'가 아니라, 차라리 '태도 변경'이다.

혹자는 이렇게 반박할지도 모른다. 앞의 시에 나오는 '공산당원, 유대인, 노동조합원, 가톨릭 신자'들은 진짜 죄인이 아니라 단지 사회적 분위기로 인해 몰린 사람들에 불과하지만, '강도,불의를 저지르는 자, 간음을 하는 자'는 말 그대로 범죄자가 아니냐고. 하지만 지금 세상의 법은 이랜드 파업 노동자들에게 손해배상 청구를 하고 있고, 기륭전자의 단식투쟁을 업무방해라는 형법의 조항으로 처벌하려 든다.

나는 착하고 안전하며 법을 지키고 세금을 내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대접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이 통하지 않는 시대에 우리는 지금 살고 있다. 비정규직과의 연대가 필요했는데, 라는 후회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시를 읽으며 정신적인 위안을 찾는 것부터가 잘못된 일일 수 있다. 대체 저 시를 읽으면서 감동했다는 이들은 누구길래 '비정규직 노동자, 노동조합 구성원, 촛불시위 참여자, 한우 축산 농부'가 아니었지만 침묵했고 그 결과 '내 차례가 왔다'고 말하고 있는지, 나는 그게 정말 궁금하다.

무슨 몰아의 경지에서 온 국민이 노동운동에 뛰어들자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다만 '나는 저들과 다르지만,' 이라는 전제를 계속 손에 쥐고 놓지 않는 그 담론적 태도가 실질적으로 의미할 수밖에 없는 바를 잠시라도 되짚어보자는 것이다. 탄압받는 소수자와 자신이 다르다는 것을 계속 강조하는 것 자체가, 소수자를 소수자의 영역에 가두어놓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실질적 다수자가 담론적 소수자로 전락해있는 현재의 모순된 상황을 고착화하는 일이다. 우리가 비정규직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은, 858만명이 858만명의 몫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 아닌가?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해 필요한 것은, 차이를 강조하면서 마지못해 맺고 있는 '연대'가 아니라, '남들은 이렇고 저렇고'를 따지지 않고 내 안에서부터 출발하는 '태도 변경'일 것이다.

2008-08-28

멍청하면 안전하다

멍청하면 안전하다


걱정 마라
당신은 위험하지 않다
당신은 매우 안전하다
멍청하니까

이것은 만고의 진리다
멍청하면 안전하다
그들에게 당신은
놓아 기르는 호주산 청정육이다
안심하고 축제나 즐겨라

멍청하지 않으면 위험하다
위험한 물건을 소지하고 있지 않아도
위험한 행동을 하고 있지 않아도
그들에겐 당신이 위험하고
당신에게도 그들이 위험하다

하지만 안심하시라
멍청하면 안전하니까
모래톱에 머리를 처박은
타조새끼마냥
당신은 안전할 수밖에 없으니까.


(08. 08.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