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8-31

나는 저들과 다르게

독일 신학자 마르틴 니묄러가 썼다는 이 시가 요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한겨레 21의 파시즘 특집 기사에서도 인용되었고, 그 외 많은 수의 네티즌들이 이 시를 읽으며 성찰의 시간을 갖고 있는 듯하다.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나치는 우선 공산당을 숙청했다. 나는 공산당원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유대인을 숙청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노동조합원을 숙청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가톨릭교도를 숙청했다. 나는 개신교도였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나에게 왔다. 그 순간에 이르자, 나서줄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이 시를 볼 때마다, 혹은 이 시를 인용하면서 자신이 사회적 약자들과 '연대'하지 못하고 있음을 짐짓 자책하는 이들을 볼 때마다, 루카의 복음서에 나오는 이 대목이 떠오른다.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
18: 9 예수님께서는 또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11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12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13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1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물론 두 인용문의 상황이 1:1로 일치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나는 저들과 다르다'라는 인식만큼은 양자가 공유하고 있고, 나는 바로 그것이 문제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비정규직이 아니라서 비정규직과 연대하지 않았고, 그 결과 경제 공황의 파고가 내게도 닥쳐왔다'라는 길고 긴 반성문을 되풀이하고 있는 한, 그것은 결코 복음서에서 말하는 참회가 아닐 것이다.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연대'가 아니라, 차라리 '태도 변경'이다.

혹자는 이렇게 반박할지도 모른다. 앞의 시에 나오는 '공산당원, 유대인, 노동조합원, 가톨릭 신자'들은 진짜 죄인이 아니라 단지 사회적 분위기로 인해 몰린 사람들에 불과하지만, '강도,불의를 저지르는 자, 간음을 하는 자'는 말 그대로 범죄자가 아니냐고. 하지만 지금 세상의 법은 이랜드 파업 노동자들에게 손해배상 청구를 하고 있고, 기륭전자의 단식투쟁을 업무방해라는 형법의 조항으로 처벌하려 든다.

나는 착하고 안전하며 법을 지키고 세금을 내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대접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이 통하지 않는 시대에 우리는 지금 살고 있다. 비정규직과의 연대가 필요했는데, 라는 후회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시를 읽으며 정신적인 위안을 찾는 것부터가 잘못된 일일 수 있다. 대체 저 시를 읽으면서 감동했다는 이들은 누구길래 '비정규직 노동자, 노동조합 구성원, 촛불시위 참여자, 한우 축산 농부'가 아니었지만 침묵했고 그 결과 '내 차례가 왔다'고 말하고 있는지, 나는 그게 정말 궁금하다.

무슨 몰아의 경지에서 온 국민이 노동운동에 뛰어들자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다만 '나는 저들과 다르지만,' 이라는 전제를 계속 손에 쥐고 놓지 않는 그 담론적 태도가 실질적으로 의미할 수밖에 없는 바를 잠시라도 되짚어보자는 것이다. 탄압받는 소수자와 자신이 다르다는 것을 계속 강조하는 것 자체가, 소수자를 소수자의 영역에 가두어놓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실질적 다수자가 담론적 소수자로 전락해있는 현재의 모순된 상황을 고착화하는 일이다. 우리가 비정규직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은, 858만명이 858만명의 몫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 아닌가?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해 필요한 것은, 차이를 강조하면서 마지못해 맺고 있는 '연대'가 아니라, '남들은 이렇고 저렇고'를 따지지 않고 내 안에서부터 출발하는 '태도 변경'일 것이다.

댓글 13개:

  1. 훌륭한 지적이라고 봅니다. 연대가 무슨 약자들에게 은혜를 내려주는 것도 아니고... 수십년간 계속되어온 정치권의 분리지배정책이 어느정도 깊숙히 뿌리박힌 성과가 아닐까 합니다.

    답글삭제
  2. 생각의 변화가 역시 중요하네요. 그만큼 어렵기도 하고요. 저 자신을 돌아봐야 할 것 같아요. 추석이 다가오는데 즐거운 일보다는 걱정이 더 많네요. 그래도 힘내야겠지요! 이번 글도 잘 읽었습니다:)

    답글삭제
  3. erte/ 더 큰 문제는 사람들이 자신의 태도가 어떤 의미로 다가갈지에 대해 거의 고민하지 않는다는 거겠죠. 그 이유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현상만을 놓고 보면 그렇습니다. 감사합니다.


    지나가던 이/ 생각의 변화와 더불어 실천적인 지점을 확보할 수 있도록, 태도 그 자체를 변경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가 될지에 대해서는 좀 더 연구해봐야 하겠고요.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답글삭제
  4. 글쎄요..제게 위의 인용된 시는 결국 내가 '그들'과 다른 사람이 아니라 같은 사람이었음을 뒤늦게 자성하는 내용으로 받아들여 집니다.

    다시말하면 "탄압의 순간에 자신이 남과 다르다는 착각속에 그들과 같이 '연대'하지 않았음을 성찰하고, 다시는 똑같은 일을 반복하지 말아야 겠다."라는 의미로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선 요즘 세태에 적절한 인용이라고 보여집니다. 닳고 닳은 내용이라도 말이죠..

    답글삭제
  5. 익명/ 문제는 그 '반성'이 '나는 ...를 하지 않았고, 나는 ...를 하지 않았고'같은 형식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거죠. 여기서 저는 방점을 '나는 ...가 아니다'라는 어구를 되풀이하는 그 무의식에 찍고 있습니다.

    마치 이건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이라는 전제를 꾸준히 달면서 여성운동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말하는 남자 운동권들을 보는 것과 같다고 할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요즘 시대, 혹은 너무도 인문적인 향취가 없는 한국 사회에서 이나마도 사람들이 많이 읽는 것이 긍정적일 수 있다는 말씀에는 동의합니다. 좋은 리플 감사합니다.


    익명/ Yeah

    답글삭제
  6. 이마에 차갑게 와 닿는 바람이 더욱 허탈하고 허무해지는 것은 추석을 앞두고 미국산 소고기를 찾는 수요가 늘고 있고 한우의 현지 가격이 추락한 것에 비해 소비자가는 변동이 없어 이를 부추기는 꼴이 되고 있다는 사실. 풍전등화. 현실(경제사정)과 이성이 정면으로 부딪힌다는 것. 부도덕한 현실일지라도 그것이 현실 즉 생과 맞닿아 있음으로 인해 도덕이 부질없는 듯 되어버리는 것. 미국산 소고기를 먹는다는 것이 부도덕한 직접적인 일은 아닐지라도 그것에 연류된 많은 사안들을 다 뭉개버릴 수 있다는 것에서 슬픈 명절이 될 것 같습니다. 그래도 가족과 함께하는 행복한 명절되시길..

    답글삭제
  7. 추석을 앞두고, 일단 사람들이 고기 선물을 해야 하니 미국산 쇠고기 판매가 늘 수밖에 없겠죠. 지금 중요한 건 더는 쇠고기를 물고 늘어지지 않고, 다만 경제 실책과 정부에 대한 신뢰 하락으로 논점을 전환하는 게 아닐까 합니다.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말이죠. 좋은 명절 되시기 바랍니다.

    답글삭제
  8. 묘하군요. 저는 노정태님의 글들에서 계속하여 "나는 저들과 다르지만"의 주문이 읽힙니다만.

    각설하고, 무슨 얘기를 하시려는 건지는 알겠는데, 주제도 사용된 단어의 맥락적 의미도 명백히 다른 두 텍스트에서 단지 "나는 ...가 아니다"라는 반복되는 문장구조에만 집중해 접속사를 생략한 채 두 텍스트를 억지로 동치시켜버리는 것이 과연 합당할까요? 노정태님의 논법을 따르면, 결국 "우리는 모두 비정규직이다"라던가 "우리는 모두 여성이다" 식의 외침이 대안이 된다고 봐야 하는 겁니까? 이건 질문입니다.

    답글삭제
  9. 접속사인지 문장부사인지 부사어미인지는 알아서 혜량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문법용어엔 약해서요. 저는 '...이므로' '...이지만' 등등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답글삭제
  10. 저는 저 시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즐겨 인용하며 정신적 위안을 얻는 '안전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소박한 성찰이 의외로 치명적인 해악을 낳을 수 있다는 거죠.

    "우리는 모두 비정규직이다"라는 너무도 소박한 선언이 대안이라고, 제가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마르틴 니묄러의 시를 줄창 인용하며 양심의 가책을 달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면, 그것은 그다지 바람직한 현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답글삭제
  11. 글쎄요. 제가 관찰한 바로는 저 시가 인용되는 맥락은 자신이 연대하지 않는/못하는 것을 자위하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참여를 독려, 요청하는 사람이 "지금 연대 안 하면 결국 당신이나 내 차례가 온다"는 경고의 맥락으로 더 많이 사용되는 것 같던데요. 지금뿐 아니라 과거에도 항상 그랬죠. 전 저 시를 인용하는 사람에게서 "지금 내 차례가 왔다"는 통탄보다는 "앞으로 내 차례가 될 것이다"라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오히려 더 읽힙니다만.
    저 시를 다시 외며 연대를 다짐하고 성찰하는 사람들에게 굳이 까칠한 시선을 날릴 필요가 있을까요. 그것이 "나는 이미 연대했지롱"이라는 자랑과 과시가 아닌 한 말입니다. 뭔가 "지금의 연대"가 미래에 대한 보험을 들어놨냐 아니냐로 얘기되는 맥락이 저는 더 경악스럽고 노정태님의 이 글도 그 파라다임 안에 있는 것 같아 유감입니다만.

    답글삭제
  12. 저 시가 사람들의 '참여'를 독려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 참여가 모종의 근본적인 '태도 변경'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다음은 내 차례일 것'이라는 공포심에 기대고 있다는 것을 문제삼고 있는 거죠. 한국 사회가 망하기 전까지, 심지어 망한 후에도 그 피해를 입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사회적 변화는 바로 그런 이들의 변화마저도 포함해야 하는 것이겠고요.

    저 시를 읽고 분연히 떨쳐 일어나 집회에 참여할 수 있고, 그것은 매우 아름다운 실천입니다. 하지만 시위 속에 속해보면, 단지 '연대'와 '이타심', 그리고 이명박에 대한 증오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수많은 문제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죠. 그 다음부터는 저 시에 기대어 사유할 수 없음을 곧 깨닫게 됩니다.

    저 스스로도 어떤 답을 내어드릴 만한 주제가 되지 않습니다만, 적어도 제 경험상으로는 저 시에 담겨 있는 성찰과 정서적 고뇌만으로는 미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좋은 견해 감사합니다.

    답글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