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1-12

인문학의 사회적 기능

우리의 문화적 코드 속에는, '공자왈 맹자왈' 하듯 학자의 이름을 거론하며 그 권위로 찍어누르고자 하는 행동 유형과, 그것에 반발하는 무조건적인 작동 기제가 동시에 내재되어 있나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그토록 긴 글을 써가며 설명한 내용을 이렇게 한 글자도 이해하지 못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칸트를 빌어 창조론을 과학에서 추방할 수 있"는 이유는 '창조자로서의 신'의 존재가 우리의 경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시 심리학 또한 추방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단언하는 것은 옳지 않다. 심리학의 대상은 인간의 심리 현상이며 그것은 경험 가능한 대상이다.

아이추판다님이 인문학과 과학의 역할 분담에 대해 끝없는 혼돈의 늪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한국 사회의 인문학적 상식 수준이 낮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문학의 저변을 넓혀서 사이비 지식의 범람을 막는다'라는 말의 뜻도 제대로 이해될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

아이추판다님의 계속되는 오해는 인문학을 하나의 큰 덩어리로 놓고, 그것을 과학과 같은 대립선상에 올려놓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인문학은 과학을 '제어'하지 않는다. 사실을 놓고 보자면, 정 반대로 과학을 '보조'하고 있다.

가령 미국의 '창조과학'자들이 곧잘 입증하려 드는 명제 중 하나인 '여호수와 10장에 나오는 태양 멈춤 사건'에 대한 갑론을박에 대해 생각해보자. 지구가 돌다가 멈추면 그 위에 있는 사람들과 온갖 사물들은 접선 방향으로 날아가게 된다. 이것은 과학적 사실이고 그래서 과학도들은 이렇게 반박한다. 하지만 '창조과학'을 연구하는 분들은 온갖 이유를 대가며 그 반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영원한 진리인 성경'에 그렇게 써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이 단 한 권의 책이 아니라는 것, 창세기부터가 적어도 다섯 개 이상의 사본이 특정 시기에 결합하여 만들어진 텍스트라는 것은 이미 르네상스 시절부터 문헌학적 연구를 통해 밝혀지고 있던 사실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상당수의 교회들은 대체로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이지만 인간의 손을 거쳐 기록되었으므로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해왔다.

인문학이 과학을 '보조'할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과학적으로 부인될 수 없는 사실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문학적으로도 부인될 수 없는 사실들이 엄연히 존재한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한반도가 아닌 중국 대륙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 사람이 온갖 '과학적' 증거를 들어 그 사실을 주장할 때, 인문학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런 의견에 대해 인문학적 합리성을 통해 논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질문은 완전히 맥락을 잘못 짚은 것이다. 가령,

또, 인문학으로 창조론에 대응하는 건 현실정치적으로도 별로 바람직한 시도는 아니다. 다윈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칸트라고 딱히 받아들일 것 같지도 않고, 이쪽에서 칸트를 내세우면 저쪽에선 중세철학의 온갖 변신론이나 아니면 다른 상대주의 철학들을 들이댈텐데 이런 끝나지 않을 싸움에 빠져드는 게 과연 '해결책'일까?
"인문학적 제어론 (2)", Null Model, 2008년 11월 11일


여기서 아이추판다님은 인문학이 지닌 다면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동시에 그것들이 서로 비판하고 견제하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사실을 지나치게 간과하고 있다. 오히려 창조론에 과학으로 맞서는 것이야말로 끝이 나지 않는 싸움으로 이어진다.

창조론을 과학으로 입증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목적은, 성경에 '과학적' 권위를 입히고자 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성경에 대해 과학적으로 '반박'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성경이 '과학적' 텍스트라는 의미가 된다. 창조과학자들은 과학자들에게 떡밥을 던지는 저질 블로거와 다를 바 없다. 과학자들의 답변을 통해 그 논쟁이 끝날 가능성은 0으로 수렴한다.

이 경우, 비록 '정답'이 없고 '끝나지 않는 논쟁'만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는 인문학이야말로 이런 무지와 편견에 맞서는 가장 좋은 해법이 될 수 있다. 성경이 하느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쓴 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창세기 1장 내에 존재하는 두 텍스트의 차이를 설명해보라고 하는 것, 백제가 중국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이에게 굴삭기가 때려부수고 있는 산성의 정체를 물어보는 것, 등등의 반성적 고찰이 사회의 상식으로 통용된다고 가정해보자. 물론 그래도 믿고자 하는 사람은 줄기차게 믿겠지만, 그 발언이 가지는 영향력은 지금보다 훨씬 더 줄어들 것이고 그로 인해 끼쳐질 사회적 해악의 감소 또한 노려봄직하다.

'제어론자'와 '견제론자'에게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야 과학에 대한 불필요한 '인문학적' 비판이,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 '인문학적' 논쟁으로 소화될 수 있다. 나는 그들의 발상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황우석이 과학자로서 잘못되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과는 다르다. 과학에 대한 무지에서 그들의 잘못된 의견이 생산되고 있다면, 인문학적 논쟁을 통해 그 무지를 깨우치고 올바른 견해를 수립하게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문학의 역할이다.

마치 인문학이 '야, 너 철학자 칸트가 한 얘기 아냐? 것도 모르냐? ㅋㅋㅋ'라는 식으로 깝죽거리기 위해 존재하는 학문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우선 우리가 속한 문화가 무식한 사람을 천시하는 문화이고, 그것을 십분 활용하는 덜 된 인간들이 있기 때문이지 인문학 자체를 탓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은 황우석이 포토샵으로 연구 성과를 냈다고 해서 모든 과학도들이 포샵질의 달인인 것처럼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

댓글 4개:

  1. 정작 글을 쓰시는 분의 마음이야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보는 저의 입장으로써는 참 재미있었는데 대충 정리가 되는 것 같아 조금 아쉽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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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논쟁이 되기에는 논점이 명확하게 서지 않았나 싶습니다. 저 또한 배경 지식을 설명하면서 다소 정리하였으니 이득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겠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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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현재 한국의 현실에서는 대학에서 과학도들에게 과학철학에 대한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만큼 거의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이 맞는거 아니냐' 식의 도그마가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있는 듯 합니다.
    노정태님 말씀 그대로 인문학과 과학은 서로 보조하면서 가야 할 존재이지 경쟁할 대상은 아니라고 봅니다. 인문학이 과학을 삼키려 든다면 그것은 19C식의 실증주의의 재판밖에 되지 않을 것이며 반대의 경우에는 루카치가 신나게 비난하였고 7-80년대 논쟁이 어느정도 정리된 사회생물학의 재탕이 될 것 같습니다.
    인문학도와 과학도가 서로의 영역에 대해 애정어린 코멘트를 주고 받을 수 있는 토대가 닦이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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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답글이 늦었군요. 저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과학 대 철학' 논쟁이, 과학도들에 대한 과학철학 교육이 부족해서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논쟁에 참여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철학적 기본 상식이 부족하고, 동시에 과학적 지식에 대한 존중과 신뢰가 결여되어 있기에 불필요할 정도로 시끄러운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서로가 서로의 분야를 겸허하게 배워나갈 때 상대방의 영역에 대해 애정어린 코멘트를 주고받을 수 있겠죠. 좋은 리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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