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26

수술실에 CCTV 달자고? 현대판 ‘파놉티콘’에 스스로 들어갈 텐가

[아무튼, 주말] [노정태의 시사哲]
조지 오웰의 ‘1984’로 본 ‘CCTV 의무화법’의 위험성

 

윈스턴 스미스는 무미건조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건 그가 하급 당원으로서 개성 없는 일을 하고 있어서만은 아니었다. 한때 ‘영국’이라고 불렸던 오세아니아의 어딘가에 살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오세아니아의 곳곳에는 지도자 ‘빅 브러더’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어느 각도에서 보더라도 빅 브러더의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고 느끼도록 만들어진 정교한 그림이다. 게다가 모든 곳에 ‘텔레스크린’이 설치되어 있다. 24시간 쉴 새 없이 정권 홍보 방송을 내보내는 텔레비전이지만, 동시에 마이크와 카메라가 내장되어 있어 모든 이의 대화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시스템이다.

고전 반열에 오른 명작이 흔히 그렇듯이 조지 오웰의 <1984> 역시 몇몇 장면이나 구절로만 기억되고 있다. 우리는 좀 더 깊은 고민을 해보도록 하자. <1984>에서 묘사하는 디스토피아의 작동 구조를 완전히 이해하려면 약간 공부가 필요하다. 공리주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이 제안한 감옥인 ‘파놉티콘’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일러스트=안병현
 

마치 도넛처럼 중앙이 비어 있는 원형 건물을 떠올려보자. 건물은 총 6층이며 층마다 감방이 늘어서 있다. 원형 건물 가운데에는 감시탑이 서 있다. 죄수들의 감방은 철창으로 막혀 있지만 시야를 가리는 요소가 없다. 반면 감시탑 창문에는 발이 드리워져 있다. 간수는 죄수의 일거수일투족을 단번에 볼 수 있지만 죄수는 자신이 감시당하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구조다. 벤담은 이런 감옥을 고안하고는 그리스어로 ‘모든’을 뜻하는 ‘pan’과 ‘보다’라는 뜻의 ‘opticon’을 합쳐 ‘파놉티콘(panopticon)’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다들 알다시피 벤담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공리주의 철학자. 그런 사람이 왜 이런 비인간적 감옥을 고안했을까? 18세기 말 상황을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산업 혁명으로 고향을 떠나온 낯선 이들이 도시에 모여 살게 되었다. 인권 개념이 확장되면서 사람 몸을 훼손하거나 때리는 식의 처벌은 선호되지 않았다. 그 결과 전례 없이 수형자가 늘어났고 이는 또 다른 문제를 낳았다. 범죄자를 처벌, 교화, 재교육할 새로운 방안이 절실했다.

파놉티콘은 그런 상황에 대응하고자 고안한 시스템이었다. 벤담의 설명을 들어보자. “끊임없이 감독관의 감시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은 나쁜 일을 할 능력과 그러한 것을 하고 싶어 하는 생각 대부분을 사실상 없애버린다.” 감시당하는 사람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리게 하는 완전한 지배 장치, 그것이 바로 파놉티콘이다.

조지 오웰로 돌아가 보자. 1984년 4월 4일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어느 날, 윈스턴은 펜을 들었다.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게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짓은 그 자체로 ‘사상죄’에 해당했다. 그 이유를 독자 여러분도 이제 짐작하실 수 있을 것이다. 텔레스크린 혹은 파놉티콘의 감시를 ‘의식’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일기에 무엇을 썼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권력은 국민이 자신의 시선에서 벗어나는 것 자체를 응징하려 든다.

과연 소설에서만 벌어지는 일일까. 우리는 방방곡곡 CCTV가 설치된 세상에 살고 있다. 범죄 예방을 위한 공공 장소 CCTV의 필요성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살을 째고 피를 쏟으며 목숨이 오가는 곳인 수술실 내부에도 CCTV를 설치해야 한다는 더불어민주당의 여론 몰이를 보면, 인권도 프라이버시도 윤리적 감수성도 모두 잃어버린 게 아닌가 싶다.

세계적으로 전례가 없는 이런 입법 시도에 국제사회는 할 말을 잃었다. 세계의사회(WMA) 데이비드 바브 회장은 지난 22일 의사협회에 보낸 영상에서 “이 법안은 ‘조지 오웰’적 성격이 짙어 전체주의 국가의 사고에 가깝다”며 법안을 폐기할 것을 요청했다. 대리 수술이나 성폭력 등 의료진의 일탈 행위를 막기 위해서라면 엄격한 규약을 확립하고 동료 간 리뷰를 강화하는 등, 효과가 검증된 다른 방법이 있다. CCTV는 그런 목적 달성에 부적합하다.

반면 부작용만은 확실하다. 전신 마취 수술은 응급 상황에 대비해 대개 완전 탈의 상태로 진행한다. 환자는 자신의 나신과 수술 과정 등을 담은 전자 기록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정상적 방식으로는 검색도 접근도 어려운 ‘다크웹’에는 아동, 시신, 동물 등에게 성욕을 품는 자들이 찍은 온갖 끔찍한 영상이 돌아다닌다. ‘한국 수술실 영상’들은 다크웹의 핫 아이템으로 거래될 것이다. 돈과 관심을 노리는 유튜버의 먹잇감이 될 수도 있고, 개인적 협박 수단으로 악용될 여지도 충분하다.

유출자를 엄벌하면 되는 것 아닐까? 잡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사후약방문이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한 의사를 불신하면서 CCTV 영상 관리 업체는 어떻게 신뢰할 수 있을까. 해킹 위험도 있다. 원자력, 잠수함 등 기밀 등급 높은 자료도 털린다. 수술실 CCTV 영상이 무사할 거라고 믿는 건 허황된 꿈이다. 일단 찍은 영상은 유출될 수 있다고 봐야 한다.

여성 연예인 등 대중의 선정적 관심이 쏠리는 사람의 수술 영상이라면 위험은 더욱 커진다. 안보 사항이라 할 수 있는 대통령이나 고위급 인사의 의료 정보 역시 마찬가지다. 문재인 대통령이 퇴임 후 수술을 받는 영상이 다크웹에서 거래되는 장면을 상상해보라. 외국인, 특히 무슬림 여성들의 의료 관광 수요는 기대할 수조차 없다. 전 세계 어느 나라도, 심지어 중국마저도 수술실 내 CCTV를 의무화하지 않는 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1984>는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윈스턴의 저항은 실패로 끝난다. 사상 경찰에 체포된 그는 2+2=4가 아니라 5라고 대답하라고 강요당하며 세뇌된다. 결국 오세아니아의 대다수 국민처럼 진심으로 빅 브러더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감시탑의 시선으로 스스로를 바라보는 파놉티콘의 죄수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CCTV는 감시 도구이며 인권침해 수단이다. 의료인에 대한 불만의 해법이 될 수 없다. 일부 정치인이 대중의 불안과 분노를 부추겨 국민 스스로 파놉티콘으로 걸어 들어가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건 정말 나쁜 정치다. 파놉티콘의 죄수가 아닌 시민 한 사람으로서, 나는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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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22

과거제 변질을 보라… 능력주의도 결국 신분제

뜨거운 감자 ‘이준석 현상’… 공정한 경쟁, 이렇게 본다
능력주의(meritocracy)가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헌정사상 최초의 30대 제1야당 대표가 된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능력주의와 공정한 경쟁을 앞세우고 선거 공천에 자격시험을 도입하겠다는 등의 계획을 밝혔습니다. 능력주의는 개인의 능력에 따라 사회적 지위와 권력이 주어지는 사회를 추구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상 기존의 계급사회를 유지하고 기득권을 지키려고 고안된 통치 기술이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뜨거운 감자가 된 능력주의를 주제로 세 필자의 긴급 지상 논쟁을 싣습니다.

①최진석(찬성): 가짜 표창장이 公正인가

②노정태(반대): 자칫하면 新계급사회 된다

③임명묵(제3의 의견): 20대에게 ‘공정한 경쟁’은 찬반, 그 이상

/일러스트=양진경
 

 영화 ‘자산어보'의 한 장면. 흑산도에서 물고기를 잡아서 먹고사는 창대(변요한)는 나주 사는 장 진사(김의성)의 사생아. 매일 뜻도 모르는 성리학 경전을 달달 외운다. 과거에 합격하여 아버지의 인정을 받고 싶기 때문이다.

유배 온 정약전(설경구)을 만나 물고기에 대해 가르쳐주는 대신 글공부를 한 창대는 드디어 그 능력을 인정받아 과거를 보고 심지어 소과에 합격한다. 생원이 된 것이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대과 시험에서는 떨어지고 만다. 나주 목사는 창대를 위로하며 과거 시험의 진실을 알려준다. 대과는 글 솜씨가 아니라 집안의 힘으로 붙는 시험이라는 것이다.

능력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착각이 있다. 조선의 길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능력주의를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조선은 능력주의 사회였다. 유명무실한 과거제를 앞세워 신분 차별을 정당화하고 성리학 경전이나 달달 외우던 그 모습이야말로 능력주의의 폐단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능력주의’는 영국의 사회학자 마이클 영이 1958년 펴낸 책 ‘능력주의(The Rise of Meritocracy)’에서 만들어낸 개념이다. 책은 2034년을 배경으로 한다. ‘마이클 영’이라는 사회학자가 쓴 논문의 형식을 띠고 있다. 1860년 영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보통교육이 시작된 후, 몇 번의 역사적 변곡점을 거치며 노골적인 계급사회였던 영국이 능력주의를 내세운 위선적인 계급사회로 바뀌는 과정을 풍자하는 책이다.

저자는 능력주의의 장점과 단점을 모두 짚고 있다고 스스로 설명한다. 하지만 비판의 무게 추는 단점으로 쏠려 있다. ‘능력주의'의 서문을 읽어보자. “나는 능력주의가 얼마나 자만에 빠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려 했고, 책을 썼다고 간주되는 저자를 포함해서 스스로 능력주의 체제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오만을 드러내려고 했다.”

능력주의가 사실상 신분제로 고착되는 과정은 복잡하지 않다. 개인의 타고난 소질과 노력을 합쳐 ‘능력’이라는 하나의 단위로 만들고 그에 따라 사회적 역할을 나누다 보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결과다. 처음 한두 번은 말 그대로 ‘공정한 경쟁’이 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능이나 근성 등 소위 ‘공부머리’ 역시 유전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다. 공부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과 여건 역시 모두에게 평등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능력주의는 능력주의에 적합한 이들을 선별하고, 그들끼리 맺어지며 재생산하게 함으로써 결국 ‘능력주의자들을 위한 신분제’가 되고 만다.

그래도 음서(고관 자제를 시험 없이 관리로 채용하는 방식)보다는 과거가 낫지 않을까? 물론 그렇다. 음서제의 모순을 극복하고자 나온 것이 과거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때로는 능력주의가 더 나쁠 수도 있다. 음서제가 옳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반면, 과거제는 그 자체가 실력을 입증하는 방식으로 여겨지기에, 집권 세력에게 도덕적 정당성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능력주의 사회의 지배 계층은 훨씬 더 공고하게 군림한다.

조선의 경우가 그랬다. 좋은 집안에서 똑똑한 머리를 가지고 태어난 지배 계층이 사람됨의 도리가 담겨 있는 책을 달달 외워 과거에 합격까지 하니 백성들은 반기를 들 수가 없었다. 권력이 된 능력주의는 조선을 망국의 길로 인도했다.

해법은 무엇일까? 답은 조정에서 치르는 과거 시험에 있지 않을 것이다. ‘자산어보'로 돌아가보자. 정약전은 인간의 평등과 구원을 믿는 ‘서학쟁이’다. 서양 배에서 떨어뜨린 지구본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탄식을 내뱉는다. 그렇다. 우리는 먼 바다를 향해 돛을 펼쳐야 한다. 넓은 세상에서 수많은 사람과 같은 눈높이에서 제 실력을 드러내고 평가받아야 한다. 능력주의를 넘어서, 법 앞의 평등을 전제로 한 글로벌 자유시장주의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노정태]

2021-06-20

비극에 탐닉하는 사회, 활개 치는 ‘방구석 코난’

[노정태의 뷰파인더㊴] 광주 건물 붕괴에서 故손 모씨 사건까지

● 쓰러진 에릭센과 BBC의 영상
● ‘꼭 내 눈으로 봐야겠다’는 대중
CCTV를 통해 ‘진실’ 엿보다?
● 경각심 없는 블랙박스 방송
● 수술실 CCTV 설치? 환자 인권은…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5월 28일 고(故) 손 모 씨 사건과 관련해 서울 반포한강공원 수상택시 승강장 인근에서 수색 작업이 진행되는 가운데, “CCTV는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문구가 보인다. [뉴스1]

 

6월 13일 고양종합운동장에서 열린 2022 카타르월드컵 아시아지역 2차 예선 3차전. 레바논을 상대로 손흥민 선수가 골을 넣었다. 상대의 파울로 얻어낸 페널티킥을 침착하게 처리했다. 역전골을 성공시킨 손흥민은 카메라를 향해 달려가며 손가락으로 ‘23’을 만들었다. 그리고 무언가 말하며 카메라에 키스를 했다. 시청자들은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곧 이유를 알게 됐다. 크리스티안 에릭센을 위한 세레모니였다.

에릭센은 영국 프리미어리그 토트넘 홋스퍼에서 손흥민과 함께 뛴 적 있는 덴마크의 국가대표 축구선수다. 그는 6월 13일(한국시간) 열린 2020 유럽축구챔피언십(유로 2020) D조 1차전 덴마크 대 핀란드 경기에 출전했다. 그런데 전반 42분 무렵 다른 선수와의 충돌 없이 갑자기 쓰러졌다. 경기장의 모든 사람들이 충격에 빠졌다. 의료진이 달려와 응급처치를 하는 가운데 동료 선수들이 에릭센을 둘러싸고 벽을 쳤다. 환자의 모습을 방송 카메라나 관중이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중계 카메라 역시 처음에는 (카메라맨의 ‘본능’에 따라) 쓰러진 에릭센의 얼굴을 클로즈업했으나, 곧 경기장의 원경과 관중석의 모습이 송출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BBC 스포츠를 비롯한 유럽의 몇몇 방송사들은 지탄을 받았다. 에릭센이 쓰러진 직후 모습이 다소 노출됐을 뿐 아니라, 그의 아내가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도 방송을 통해 나갔기 때문이었다. BBC 스포츠 해설위원 게리 리네커는 “중계 화면은 대회 주최 측인 유럽축구연맹(UEFA)에서 송출한 장면이고 BBC는 통제할 수 없었다”고 변명했지만, 대중의 분노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볼 권리’와 상식선
프로 스포츠는 대중에게 볼거리를 제공하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이다. 손흥민이나 에릭센 같은 축구선수가 천문학적인 연봉을 받는 이유는 단지 그들이 탁월한 축구 실력을 갖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들의 플레이를 보고 즐기는 수많은 팬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릭센의 모습을 촬영해 ‘알 권리’를 충족시켜 달라”고 요구한 시청자는 없다. 외려 시청자는 에릭센이 쓰러진 모습을 클로즈업하고 이 장면을 여과 없이 내보냈다는 점을 이유로 유럽축구연맹과 각국 방송사를 비난했다. 즉 시청자에게는 ‘볼 권리’가 있지만 그 권리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오늘날에 걸맞은 상식과 감수성을 근거로 절충점을 찾아야 한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중 지금까지 논의된 내용에 반대할 분은 아마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이런 ‘상식’이 막상 우리 현실에서는 잘 적용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지난 4월 25일 발생한 고(故) 손 모 씨의 사망 사건을 떠올려보자. 논의해야 할 점이 많지만, 특히 ‘진실’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패턴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경찰의 발표를 믿지 못한다는 태도를 유지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CCTV가 왜 없느냐”, 혹은 “CCTV 영상을 무편집본으로 공개하라”고 목청을 높였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고인이 익사한 지점에는 CCTV가 설치돼 있지 않았다. 존재하지 않는 CCTV 영상을 공개할 수 없다.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더욱 당연한 사실이 있다. 설령 그런 영상이 존재한다 한들 경찰이 그것을 아무에게나 보라고 공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손 씨가 익사한 현장의 CCTV 영상이 존재한다고 가정해보자. 그 영상은 누군가가 사고로 죽은 모습, 혹은 (일각에서 꾸준히 음모론을 제기하는 것처럼)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일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사람 죽는 모습이 담긴 영상’이라는 소리다. “경찰은 진실을 공개하라”는 이들은, 그러므로 “경찰은 사람이 죽는 모습이 담긴 영상을 대중에게 공개하라”고 말하고 있다는 뜻이다.

잠시 멈춰서 이 상황을 제3자의 눈으로 보자. 누군가가 죽기 직전, 혹은 죽는 그 장면을, 대중이 ‘꼭 내 눈으로 봐야겠다’고 요구하고 있는 상황. 뭔가 심각하게 잘못된 것 아닌가?

우리 사회는 CCTV를 통해 ‘진실’을 엿보는 행위에 대해 너무 무감각해졌다. 그러한 행동이 이상하다는 것을 지적하는 목소리 자체가 거의 없다. 오히려 정 반대로, 다양한 사건 사고 현장을 담은 CCTV나 차량용 블랙박스 영상이 흔하게 돌아다니고 있다.

CCTV와 블랙박스 영상의 놀이터
몇 년 전, 특히 남자들이 많이 모인 온라인 커뮤니티 사이트에서는 여성 보행자나 자전거 운전자 등이 무단횡단을 하다 차에 치이는 모습을 담은 차량용 블랙박스 영상이 자주 올라오곤 했다. 그런 영상에는 흔히 여성의 성기를 뜻하는 단어와, 종종 로드킬(야생동물 찻길사고)을 야기하는 ‘고라니’를 합친 비하 용어가 첨부됐다. 현실에서 벌어진 일을 찍은 영상 속의 폭력을 무감각하게 돌려보면서 그 위에 여성혐오까지 끼얹고 있던 셈이다.

온라인에서 유통되는 것은 여성 보행자들이 차에 치이는 모습만이 아니었다. 다양한 교통사고 현장을 담은 모습이 여러 방식으로 촬영되고, 때로는 편집돼 온라인을 통해 퍼져나갔다. ‘폭력에의 탐닉’은 많은 경우 여성혐오와 공생 관계를 이뤘다. 여자가 차에 치이면 ‘X라니’, 여자가 차를 몰다가 사고를 내면 ‘김여사’라고 손가락질하는 식이었다.

정상적인 사회라면 차량용 블랙박스 영상이 유출되고 유통되는 데 대해 진작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상황이 정 반대로 흘러갔다. 공적 논의의 기준을 세워야 할 공중파 방송이, 차량용 블랙박스 영상을 모아놓고 방송하는 별개의 프로그램까지 만들었다. 지금도 매주 방송되고 있는 SBS의 ‘맨 인 블랙박스’ 얘기다.

이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라는 곳이 있지 않은가? 교통사고가 나는 상황을 찍은 블랙박스 영상으로 공중파 방송을 만들어 내보내는 프로그램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방심위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방심위가 ‘맨 인 블랙박스’를 제지할 수 없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런 식의 잣대를 들이대면 남아날 방송이 없기 때문이다. 얼마 전 광주에서 벌어진 재건축 현장 건물 붕괴 참사에 대한 언론 보도만 해도 그렇다.

사고 당일, 다음날, 그 다음날까지 사고 당시의 모습이 수도 없이 뉴스로 보도됐다. 건물이 풀썩 쓰러지는 광경, 자동차가 깔리는 모습, 간신히 사고를 피한 차량의 블랙박스 같은 것이 아무런 제지 없이 노출됐다.

이미 남들이 그런 영상을 찾아서 시청률과 조회 수를 끌어올리고 있다면, 다른 언론사는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는 노릇이다. 정부 역시 특정 언론이 사건 현장의 CCTV나 블랙박스를 공개하는 것을 막지 않는데, 다른 언론에 대해서만 제지를 가할 수도 없다. 이렇게 한국의 미디어는 여과 없이 쏟아지는 CCTV와 블랙박스 영상의 놀이터가 되고 말았다.

이런 상황이 바람직하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사실에 대한 보도는 언론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자 사회적 책무다. 하지만 사건 사고 현장의 모습을 쉴 새 없이 경쟁적으로 취재하고 공개하는 것은 언론의 바람직한 사회적 기능에 부합하는 일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언론은 사실을 전달하는 차원을 넘어 사회적 사안을 해석하고 이에 대해 논의하는 기준을 제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6월 10일 광주 동구 학동 재개발지역 건물 붕괴 사고 현장에서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과 경찰, 소방서가 합동으로 현장 감식을 하고 있다. [박영철 동아일보 기자]
불필요하게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광주 재건축 현장 건물 붕괴 영상을 온 국민이 되풀이해서 보는 게 과연 이 시점에 무슨 도움이 되는가? 건축 현장에서 벌어지는 안전 문제에 대한 심각성을 되새기게 해주는가? 왜 그 현장에서 그런 사고가 벌어졌는지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가? 사고 현장의 부상자를 구조하는데 일말의 도움이라도 될까? 전혀 그렇지 않다.

이런 식의 보도 행태가 성행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그런 영상을 가져다 써야 조회 수가 늘기 때문이다. 불필요하게 자극적이고 선정적이며,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지도 않는 온갖 ‘유출 영상’에 우리가 중독돼 있는 탓이기도 하다. 언론이 나쁜 대중을 만든다고 할 수도 있고, 언론 소비자가 언론을 그러한 방향으로 유도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쯤에서 최근 현안으로 넘어와 보자. 수술실 내 CCTV 설치 의무화 법안을 두고 논란이 커지고 있다. 여론조사를 해보면 80% 이상의 국민이 찬성한다는 뜻을 밝히고 있는 반면,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에서는 과반수의 동의를 얻지 못해 법안이 계류 중인 상태다.

수술실 내 CCTV 설치에 대한 찬반론을 깊게 들어가는 것은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그보다는 좀 더 본질적인 문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 우리는 이토록 ‘몰래 찍는’ 데 익숙해졌는가. 왜 우리는 교통사고 현장, 기타 사고 장면, 범죄 현장 등 통상적으로 보기 어렵고 보지 말아야 한다고 여겨지는 것에 대해 당연하다는 듯 ‘볼 권리’를 요구하는가.

환자를 보호한다는 명분하에 수술실 내 CCTV 설치를 의무화하면 환자 인권 보호에 도움이 될까. 지금까지 이 글을 읽어온 분이라면 짐작할 수 있다시피, 나는 그러한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편이다. 오히려 ‘충격 수술실 CCTV 영상’ 따위가 수없이 돌아다니며 더 많은 환자의 인권이 유린될 위험을 생각해봐야 한다.

수술실로 간 ‘방구석 코난’
찍어놓은 영상은 언제 어떤 식으로건 유출될 수 있다. CCTV 영상을 돌려보고 품평하는 일에 아무런 죄책감이나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서로의 인권을 짓밟을 여지가 생긴다. 의료진을 ‘잠재적 범죄자’로 보고 CCTV를 설치할 경우, 의료진은 CCTV에 익숙해지고 그 중 위험성이 높은 ‘예비 범죄자’는 CCTV를 피해 어떻게든 범죄를 저지를 방법을 모색할 테다. 마취된 채 알몸으로 수술을 대기하는 환자는 CCTV의 시선을 피할 길이 없다.

전국 방방곡곡에는 CCTV와 차량용 블랙박스가 차고 넘친다. 대한민국은 어느새 ‘방구석 코난’ 혹은 ‘네티즌 수사대’의 놀이터가 되고 말았다. 수술실 내 CCTV 의무화 법안은 ‘방구석 코난’을 수술실에 들여놓겠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들 함께 생각해봤으면 하는 문제다. 우리에게 인권이란 대체 무엇인가?

#광주참사 #손모씨사건 #수술실CCTV #신동아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basil83@gmail.com

2021-06-16

나의 첫 프로그래밍(?)

정확히 말하면 elisp(emacs lisp) 코드 다섯 줄(주석 제외)에 불과하지만, 나름 성취라고 할 수 있으므로, 기록 삼아 올려둡니다.

코드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defun new-file-with-date-time ()
  "날짜-시간 표기된 새 파일 만들기"
  (interactive)
  (find-file (format-time-string "~/Dropbox/txt/%y%m%d-%H%M%S.txt")))
(global-set-key (kbd "C-c C-n") 'new-file-with-date-time)
;; 날짜 시간 표기법은 이 링크를 참고 https://www.gnu.org/software/emacs/manual/html_node/elisp/Time-Parsing.html

이게 뭐 하는 거냐. 제가 글 쓸 때 쓰는 emacs라는 텍스트 에디터가 있습니다. 1976년에 만들어진, 저보다 나이가 많은 소프트웨어입니다.

구시대의 유물답게 emacs는 수많은 세팅을 자기 손으로 직접 해야 합니다. 그 단점은 반대로, 본인이 원하면 기존에 없던 기능을 써서 넣을 수도 있다는 뜻이 됩니다.

저 코드는 이런 뜻입니다. 이맥스에서 어떤 파일을 편집중이건, ctrl-c ctrl-n 을 입력하면, 210616-203308.txt 같은 이름의 새 파일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즉 저는 언제나 어느 상황에서나, '지금 이 순간'을 파일명으로 삼은 텍스트 파일을 만들고, 내용을 입력한 후, 저장할 수 있습니다. 저장 경로는 제가 텍스트 파일을 모아두는 드롭박스 내 txt 폴더.

이 '자체 확장 기능'은 세 가지 기능을 제공합니다. 1)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내용을 빨리 적어놓기 2) 메모에 고유 식별자(날짜-시간) 부여하기 3) 모바일에서도 접근 가능하게 하기(드롭박스라서 자동 싱크)

저는 프로그래밍을 따로 배워본 적이 없습니다. 단지 영어로 어떻게 어떻게 구글 검색을 좀 해보면 남들이 쓴 코드를 찾아볼 수 있고, 그걸 붙여넣어 실험해보다 보면 작동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거죠.

그런 식이다보니, 솔직히 저 코드에서 (interactive)가 왜 들어가야 하는지 그 이유는 아직도 이해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뭐, 아무렴 어떻습니까. 제가 원하는 기능을 스스로 구현해냈으니, 그거면 된 거죠.

이런 글을 왜 쓰나 싶지만, 자랑? 기록? 뭐가 됐건 그냥 올려봅니다.

(참고로 제가 이준석의 '엑셀 시험' 어쩌구를 보고 콧방귀를 뀐 이유도 이런 겁니다. 저는 learning curve가 굉장히 가파른 고대 유물 소프트웨어를 즐겨 쓰는 사람이고, 심지어 간단한 스크립트도 짭니다. 하지만 이게 저의 '글쟁이'로서의 '능력'과 상관 있나요? 없습니다. 좋은 글쟁이는 글을 제 시간에 읽기 좋게 쓰는 사람이면 충분합니다. HWP에서 원고지 매수 확인하는 기능만 알아도 충분합니다. 이제 다시, 일하러 가야죠.)

모두에게 줘야 공정인가… 이준석 대표에게 ‘공정’을 묻는다

[朝鮮칼럼 The Column] 이 대표, 노인 기초연금 소득 하위 70%에만 주고
상위 30%에는 안 준다며 불공정한 제도라고 지적
없는자의 몫 줄여서라도 모두에게 줘야 공정인가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15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당 대변인 공개오디션 관련 회의에 참석하고 있다./뉴시스
 

덕담부터 건네자. 이준석 신임 국민의힘 대표의 당선과 취임을 축하한다. 이전에도 30대 당대표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국민의힘은 신생 군소 정당이 아니다. 원내 102석을 지닌 제1 야당이다. 36세 당대표는 실로 이례적 사건이며 탁월한 성취다.

그러나 영화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명대사처럼, 위대한 힘에는 위대한 책임이 따르는 법. ‘이준석 현상’이 종전 정치 문법에 지각변동을 불러오고 있는 지금, 우리는 새로운 정치가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갈지 진지하게 논의해야 한다. 이준석의 정치적 관점, 특히 ‘공정’에 대한 입장을 철저히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노인 빈곤 문제를 생각해보자. 최근 들어 대한민국이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며 축포를 터뜨리고 ‘국뽕’을 즐기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하지만 노인 빈곤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한국은 다른 OECD 가입국과 같은 층위에서 논하기 민망한 수준이다.

보건복지부가 펴낸 ’2019 자살 예방 백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65세 이상 노인 자살률은 2015년 기준 10만명당 58.6명이었다. OECD 평균인 18.8명을 훌쩍 뛰어넘고, 38.7명으로 2위인 슬로베니아와도 격차가 크다.

왜 그럴까? 경제적 어려움 때문이다. 자살을 생각해본 적 있는 65세 이상 노인 가운데 27.7%가 생활비 문제를 꼽았다. 가난은 사람을 병들게 하고 움츠러들게 만든다. 말 그대로 돈이 없어서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 노인이 OECD 평균의 약 세 배에 가까운 나라인 것이다.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것은 노년층 내 빈부 격차가 심각하기 때문이다. 중위 소득을 100으로 봤을 때 소득이 50%에 미치지 못하는 상태를 ‘상대적 빈곤’이라 한다. 2014년 현재 우리나라 노인들의 상대 빈곤율은 48.8%에 달한다. 절반에 가까운 노인들이 통계적으로 빈곤층에 해당한다는 뜻이다. 개인주의와 경쟁의 나라인 미국조차 노인 상대 빈곤율은 같은 해 기준 21%에 불과하다. 12.1%인 OECD 평균과는 비교하는 것 자체가 민망한 수준이다.

이런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노령연금을 마련해야 할 필요성이 오래전부터 제기되어 왔다. 이명박 정부는 기초노령연금을 도입했고, 박근혜 정부는 ‘기초연금’이라 이름을 바꾼 후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금액을 10만원에서 20만원으로 올렸다.

이쯤에서 이준석 대표가 2019년 펴낸 ‘공정한 경쟁’을 펼쳐 볼 필요가 있다. 이준석 대표는 현재 기초연금에 대해 부정적 입장이다. 소득 하위 70%만을 대상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불공정’하다는 것이다. 책을 직접 인용해본다.

“그것은 공정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노령연금의 경우 소득 상위 30퍼센트는 연금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불만을 토로합니다. 저는 그들의 불만이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노령연금의 경우 지급하는 금액을 낮추더라도 노인 인구 전체에 지급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것이 원래 연금의 취지에도 맞습니다.”

‘공정’한 논의를 위해 밝히자면, 기초연금 제도에는 결함이 있다. 기초연금 수급액을 소득으로 파악하기 때문이다. 기초생활수급 노인 40만명은 기초연금을 받으면 그만큼 생계 급여가 깎인다. 생계 급여를 산정하는 가구의 소득 인정액에서 기초연금액을 빼는 것이 근본적 해법이지만, 그 경우 연 1조6000억원가량 추가 재원이 필요하다. 문재인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준석 대표가 기초연금을 ‘불공정’하다 말하는 것은 하위 70% 중에서도 가장 힘든 이에게 더 많은 지원이 돌아가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기초연금이 없어도 생활과 생존에 지장을 받으리라 보기 어려운 상위 30%가 돈을 못 받기 때문에 불공정하다는 것이다. 노인 인구 10만명당 58.6명이 자살하는 나라에서, 하위 70%에게 돌아갈 몫을 깎아서라도, 상위 30%의 불만을 달래야 한다는 소리다. 이준석 대표가 말하는 ‘공정’은 누구를 위한 어떤 공정일까.

나는 이준석 대표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같은 세대의 일원이다. 위 세대가 하듯이 ‘이준석 현상’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볼 수만은 없다. 그런 시각이야말로 그를 한 사람의 ‘청년’이나 ‘유망주’로 묶어두고 무시하는 처사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진지한 태도로 토론을 시작해보자. 없는 자의 몫을 빼앗아 있는 자에게 주는 것을 ‘공정’이라고 할 수 있는가?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2021-06-13

‘검수완박’ 文정권이 軍에는 사법독립 촉구? 표리부동!

 [노정태의 뷰파인더㊳] 헌병 동원하고 맹견 풀어 ‘예비군 윤석열’ 사냥

● 삼권분립 작동 않는 평시 軍법정
● 장군의 지위는 말 그대로 ‘왕’
● ‘中과 대립’ 대만도 평시 軍법정 폐지
● “독립적 재판” 文 일성, 진심일까
● 검찰을 軍검찰처럼 만드는 박범계案
● 공수처의 ‘자연인 윤석열’ 수사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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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계 법무부 장관과 김오수 검찰총장이 6월 3일 서울 서초구 고등검찰청에서 만나고 있다. [송은석 동아일보 기자]
평시 군사법정을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날로 높아지고 있다. 지난 5월 18일 발생한 공군 A 중사의 사망 때문이다.

A 중사는 같은 부대 내의 상급자로부터 성폭력을 당했다. 그는 성폭력을 당할 당시 녹음을 해두었고, 자신의 거절 의사를 분명히 밝혔으며, 지체 없이 상부에 보고했다. 심지어 성폭력이 발생한 차량은 가해자의 후임인 제3자가 몰고 있었다. 증인까지 있는 사건이었다. 공군 제20전투비행단은 사건 해결에 있어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가해자를 처벌하고 자신과 다른 곳에 배치해달라는 A 중사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상급자인 B 준위는 최대한 ‘좋게좋게’ 넘어가고자 했다. 피해자를 불러 저녁식사를 하며 달래려 들었다. 가해자인 장모 중사가 조사와 동시에 제5공중기동비행단으로 이동조치 된 날짜는 3월 17일. 사건 발생 후 보름이나 지난 시점이었다.

상담 프로그램도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A 중사는 4월 15일, 제20전투비행단 성고충상담관에게 ‘자살하고 싶다’는 내용의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하지만 성폭력상담소가 4월 30일 내린 결론은 전혀 달랐다. “자살 징후 없었으며 상태가 호전됐다.”

군내에서 법적인 조력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발생할 경우를 대비해 군은 국선변호사 제도를 운영 중이다. 공군 법무실 소속 군법무관이 국선변호사로 선임됐다. 하지만 그 변호사는 직무유기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의 행태를 보였다. 국선변호사 제도가 있긴 하지만 유명무실했다는 뜻이다.

피해자는 성폭력을 겪었다는 사실만큼이나 자신이 믿고 의지했던 군에 대한 배신감으로 인해 큰 충격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사건 초기 국선변호사를 믿고 별도의 법적 대응을 취하지 않았다. 본인의 지휘계통을 따라 사건을 보고하고 문제를 제기했던 것이다.

하지만 공군은 A 중사를 버렸다. 사건을 드러내고 수사하기는커녕, 다른 부대로 전출해달라는 A 중사의 요청마저도 마지못해 들어줬다. 새로운 부대 역시 A 중사를 배척했다. A 중사는 연인과 혼인신고를 한 그날 스스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비극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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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 선택을 한 공군 A 중사를 성추행한 혐의를 받고 있는 장모 중사가 6월 2일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서울 용산구 국방부 보통군사법원으로 압송되고 있다. 장 중사는 이날 구속영장이 발부돼 미결수용실에 구속 수감됐다. [국방부 제공]
이런 비극이 벌어지게 된 이유를 한두 가지로 압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군 특유의 폐쇄적 집단주의 같은 문화적 요인이 적잖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히 드러나는 제도적 문제가 있다. 평시 군사법정이 바로 그것이다.

A 중사 사건은 부대 내의 인맥과 관계를 고려하는 군사법정의 문제와 떼어놓고 생각하기 어렵다. 가해자는 8월에 전역할 예정이었다. 이에 군 검찰이 가해자의 전역만 기다리면서 시간 끌기로 일관했다는 의혹에 휩싸여있다. 가해자를 구속 수사하는 등 ‘눈에 띄는’ 행보를 취하면 부대 내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다는 이유만으로 해당 부대가 비난을 받을 수 있다. 특히 코로나 시국에 회식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것의 사건 은폐의 핵심 원인 아니었을까.

평시에도 군사법정은 군인 사이의 사건을 관할한다. 현행 체제에서 장군의 지위는 ‘왕’과 같다. 삼권분립은 작동하지 않는다. 군 검찰이 소속되는 보통군검찰부, 군 판사가 소속되는 보통군사법원 모두 편제상 군단급 부대의 휘하 조직이다. 군 검사는 수사 감독 및 기소 등의 재판 과정에서, 군 판사는 판결 과정에서 모두 지휘관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구조다.

게다가 군 지휘관은 법조인 자격이 없는 일반 장교를 재판관으로 참여하도록 지시할 수 있다. 심판관 제도 때문이다. 이 또한 군 내부의 특수성 등을 이유로 지금껏 용인돼왔다. 이와 같은 구조에서는 군 지휘자의 뜻을 거스르는 수사와 기소 등이 쉽사리 이루어지기 어렵다. 설령 재판까지 간다 해도 군 지휘자가 ‘꽂아 넣은’ 다른 군인이 판사 노릇을 할 개연성도 있다.

그나마 이게 ‘개선된’ 형태다. 2017년부터 시행중인 현행 군사법원법에 따르면, 사단급 이하 부대에서는 보통군사법원을 가질 수 없다. 그 전까지는 사단장, 즉 ‘투 스타’(2성급 장군)들도, 자신의 부대에서 조선시대의 왕과 다를 바 없는 권력을 지녔다. 여차하면 아무나 감옥에 넣고, 또 감옥에서 꺼낼 수 있었다는 뜻이다.

형식적으로 볼 때 대한민국은 여전히 북한과 전쟁 상태다. 휴전 상태일 뿐 종전 협정을 하지 않았다. 일각의 터무니없는 낙관적 태도와 달리 북한은 여전히 우리에게 군사적 위협을 가하고 있다. 하지만 북한보다 훨씬 강한 중국과 대립하고 있는 대만조차도 2018년 평시 군사법정을 폐지했다.

민주공화국은 법치국가다. 군대는 치외법권이 아니다. 삼권분립이 작동하지 않는 곳은 있어서는 안 된다. 이는 지난 6월 6일 A 중사의 빈소를 찾아 조문한 후 문재인 대통령이 내놓은 입장이기도 하다. 그는 A 중사의 부모에게 “국가가 지켜주지 못해 죄송하다”는 뜻을 전했다. 청와대로 돌아온 후에는 박경미 대변인을 통해 “최근 군과 관련해 국민이 분노한 사건은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며 “군 사법 독립성과 군 장병이 독립적으로 재판받을 권리를 보장하는” 군사법원법 개정안의 조속한 국회 처리를 요구했다.

이토록 집요한 내로남불
이 사안에 있어서만큼은 문 대통령의 입장에 동의한다. 사법의 독립성은 신성한 것이다. 군 장병 뿐 아니라 모든 국민에게 있어서 마찬가지다. 독립적인 재판부에 의해 재판받을 권리는 인권의 최후 보루와도 같다.하지만 어딘가 석연치 않다. 문 대통령의 진심이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독립적인 사법부, 권력의 외압으로부터 자유로운 검찰, 신속하고 정확하게 수사하는 경찰 등은 군인에게만 필요한 게 아니다. 사회가 사법 영역에서 법치주의와 민주주의를 확립한 뒤 같은 기준을 군에 요구해야 설득력을 지닌다.

문 대통령은 완전히 반대 방향의 행보를 고집하고 있다. 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임명한 김오수 검찰총장과 박범계 법무장관이 빚고 있는 마찰만 해도 그렇다. 법무부는 ‘검찰직제개편안’을 통해 검찰의 독립적 수사권을 사실상 완전히 박탈하려 하고 있는 반면, 현 정권에서 임명한 (아마도) 마지막 검찰총장인 김오수는 모든 이의 예상을 뒤엎고 반대의 뜻을 밝히고 있는 상황이다.

검찰직제개편안의 내용을 살펴보자. 이미 검경수사권 조정으로 인해 검찰은 부패, 공직, 경제, 선거, 방위사업, 대형 참사의 6대 범죄를 제외한 다른 범죄에 대해서는 인지수사를 개시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한 상태다. 그런데 박범계의 ‘직제개편안’은 그마저도 수사하려면 법무부의 승인을 받을 것을 요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어느 국가건 행정부가 수사권과 기소권을 정치적 목적으로 휘두르기 시작하면 법치주의는 남아날 수 없다. 그래서 미국은 지역별 검찰총장을 선거로 뽑는다. 독일이나 프랑스 등 대륙법계 국가는 나름의 방식으로 법무장관이 검찰총장 및 검사들의 사건 기소와 공소에 개입할 수 없도록 차단한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법무장관은 구체적인 사건에 대하여는 검찰총장만 지휘 감독한다’는 검찰청법 제8조가 바로 그 안전판이다. 저런 장치가 없다면 대한민국 검찰청은 일개 사단장이 쥐락펴락하던 군 검찰과 다를 바 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박범계가 요구하는 직제개편안이 바로 그런 내용을 담고 있다. 대한민국 검사들에게 독립적인 헌법기관의 지위를 포기하고, 법무장관의 충견이 되라는 소리다. 각 지청은 ‘총장의 요청에 따라 장관의 승인을 받아야’ 수사를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륙법과 영미법을 떠나 법치국가라면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의 퇴행이다.

반복해보자. 현재 박범계 법무장관이 요구하는 검찰직제개편안은 검찰을 송두리째 군 검찰과 같은 권력의 개로 만들겠다는 소리다. 검찰총장을 통해 장관의 승인을 받아야만 검사가 수사를 할 수 있다는 건, 사단장의 승인을 받아 군 검찰이 수사하고 기소하던 2017년 이전의 군사법정 체제와 다를 바 없다.

군 검사와 군 판사를 군대의 권력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것. 군사 문제와 무관한 군인의 일반 범죄에 대해서라면 그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올바른 방향이다. 그런데 왜 문재인 정권은 동시에 검사와 판사를 청와대의 권력에 굴복시키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쓰는가? 사법개혁, 검찰개혁에 있어서까지 이토록 집요한 내로남불의 길을 걸어야 할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

정훈교육 듣는 예비군을 수사?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가 윤석열 전 검찰총장을 수사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6월 10일 보도되면석 국민은 더 큰 충격에 빠졌다. 공수처는 6월 4일 윤 전 총장을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등 혐의로 입건하고 수사3부(최석규 부장검사)에 배당했다고 한다. 일단 윤 전 총장은 ‘공직자’가 아니다. 대체 무슨 근거로 공수처가 수사에 착수했는지 의아할 뿐이다. 설령 그가 공직에 있을 당시 벌어졌던 사안이라 해도 ‘공직자’ 범죄 수사를 목적으로 하는 기구가 자연인 윤석열에게 칼을 들이대는 것은 상식의 선에서 납득 불가능하다.

공수처라는 조직의 태생과 방향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땅에 법치주의가 도입된 후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법치주의를 능멸하는 제도가 생긴 적은 없었다. 현재 공수처는 여당이 독단적으로 법을 바꿔 대통령이 야당의 뜻과 무관하게 처장을 임명할 수 있도록 설계돼 있다. 공직자를 대상으로 수사권과 기소권을 모두 갖는다. 공수처를 통제할 수 있는 상위 기구는 존재하지 않는다. 군 사법제도와 비교하자면 ‘사단장 직속 헌병+검찰’ 조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군대 이야기로 시작했으니 군대 비유로 끝내보도록 하자. 군인 및 군 경험자들은 고위 장성들을 흔히 ‘똥별’이라 부르며 조롱한다. 문 대통령은 그들의 수사권, 기소권, 사법권을 빼앗는 개혁을 하고 있다. 개혁에 원론적으로 반대할 사람은 아마 ‘똥별’을 제외하면 없을 것이다. 군인이 ‘제복 입은 시민’으로서 온전히 대우받을 때 우리의 국방력도 질적으로 나아진다.

공직에서 물러난 윤석열은 평범한 시민일 뿐이다. 모자 거꾸로 쓰고 정훈교육 듣는 예비군 신세다. 그런데 문재인 정권은 헌병을 동원하고 맹견을 풀어 한낱 예비군을 잡으려 든다. 그러면서 동시에 군사법원의 개혁을 요구한다. 이런 표리부동한 이중성이야말로 이번 정권의 본질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문 대통령의 현재 모습은 그가 개혁하겠다는 ‘똥별’들과 너무도 닮아 있다.

#여군사망 #군사법정 #공수처 #윤석열 #신동아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basil83@gmail.com

이준석의 페미니즘 공격이 별 일 아니라는 이들을 위한 사고실험

성별 외 다른 변수를 제외하기 위해, '나경투'라는 정치인이 있다고 해보자.

나경투는 1986년생 여성으로, 자신이 태어나고 자랐지만 국민의힘 지지층이 많지 않은 서울의 모 지역구에서 세 번 국회의원에 출마하고 세 번 낙선했다. 하지만 말솜씨가 좋고 방송 감각이 있어서 다양한 예능에 출연하며 대중적 인지도를 높였다. 하버드 대학교도 나왔다고 하고, 뭐 기타등등 다 이준석과 동급이다.

나경투는 2021년 국민의힘 당대표 경선에 출마했다. 나경투는 전통적인 국민의힘 지지층인 교회 다니는 중장년 표심을 자극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나경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심지어 당대표가 어찌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님에도, 경선 과정에서 열변을 토했다.

  • 대한민국 그 어디에서도 퀴퍼 금지
  • 군형법상 계간죄(남자 동성애 처벌) 폐지 결사 반대
  • 기타등등 상상할 수 있는 다양한 성소수자 혐오

나경투의 선거 전략은 제대로 먹혀들었다. 진중곤 같은 논객들이 달려들어 페이스북에서 논전을 벌였지만 그것이 오히려 노이즈 마케팅이 되고 말았다. 나경투는 자신의 성소수자 혐오를 공정이라던가, '안물안궁의 권리'라던가, 아무튼 뭔가 대충 그럴싸한 담론과 버무려 포장했다.

그리하여 진보 보수 양쪽으로부터 나경투의 혐오 선동은 사실상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았다. 그는 원래부터 성소수자에게 적대적인 한국의 여론 지형상 여론조사에서도 높은 수치를 받고, 그 여세를 몰아 당심을 자기 것으로 끌어들여, 당대표가 되었다.

여기서 질문을 던져보자. 여러분은 나경투가 단지 '30대'라는 이유만으로, 다른 모든 결함에도 불구하고, 지지받아 마땅한 정치인이라고 생각하는가?

여러분은 나경투가 공공연하게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발언을 하고 혐오 선동을 하여 자신의 지지층을 형성한 것을 두고, "이건 어쩌면 나경투라는 인물에게 어떤 문제가 있느냐는 두번째 고민거리일지도 모른다는 증거처럼 보인다"는 식으로 말하는 칼럼을 떠올릴 수 있는가?

심지어 그 칼럼이 한국의 자칭 진보 진영의 기관지와도 같은 한겨레에 실릴 수 있다고, 그런 가능성을, 상상조차 할 수 있는가?

이준석은 남자 나경투다. 나경투는 여자 이준석이다. 당신이 나경투에게 반대한다면 이준석에게도 반대해야 한다. 게다가 가상의 사례인 나경투와 달리 이준석은 리얼이다. 나는 사람들이 왜들 이렇게 평온하게, 심지어 즐겁게, 박수치고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아니, 실은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너무도, 너무도 역겹다.

'조국의 시간'에 열광하는 앵무새들.. 이제 그만 자아도취서 깨어나길

[노정태의 시사哲]
나르키소스 신화로 본 악성 자아도취의 비극

강의 신 케피소스는 물의 요정 리리오페를 겁탈했다. 그렇게 태어난 나르키소스는 “소년 같기도 하고 성인 남자 같기도 한” 아름다운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다들 홀딱 반해 탄식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늘 냉담한 나르키소스는 모든 이의 구애를 뿌리칠 뿐이었다.

일러스트=안병현

헤라 여신의 시종인 요정 에코도 거절당했다. 에코는 원래 수다쟁이였지만 헤라의 저주를 받았다. 자기 말을 못 하고 남의 말을 반복해야만 했다. 그러니 가슴이 찢어졌을 것이다. 나르키소스가 야멸차게 내뱉은 말을 자기 입으로 되풀이해야 했으니 말이다. “저리 꺼져. 네 품에 안기느니 죽는 게 나아.”

상심한 에코는 목소리와 뼈만 남았다. 그 뼈마저도 돌로 변해버렸다. 그 사연을 접한 이들이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에게 청했다. “그도 이렇게 사랑하다가 사랑하는 것을 얻지 못하게 하소서!” 네메시스 역시 나르키소스에게 ‘차인’ 전력이 있는 터라, 일사천리로 청원은 접수되었다. 물에 비친 자기 모습에 반해버린 나르키소스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물가에서 죽어버리고 만다. 고대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가 <변신 이야기>에 기록한 나르키소스 신화다.

나르키소스는 수선화가 되었다. 에코는 메아리가 되어 지금도 남이 한 말을 따라 하고 있다. 이 비극적 이야기는 수많은 이에게 영감을 주었다.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정신분석학자이자 사회철학자인 에리히 프롬이 대표적이다.

프롬은 <인간의 마음>에서 악(惡)을 탐구한다. 그가 볼 때 악의 본질은 다음 세 가지로 구성된다. 죽음에 대한 사랑(네크로필리아), 자아도취(나르시시즘), 근친상간. 프롬은 이 중 상대적으로 가장 무난해 보이는 자아도취야말로 악의 근원이라고 지목한다. 왜 그럴까?

사실 자아도취 그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다. 인간 정신의 작동 방식 중 하나일 뿐이다. 태어난 직후의 아기를 생각해보자. 나와 세상을 구별할 능력이 없다. 그럴 필요도 없다. 내가 울면 젖을 주고 달래준다. 모두가 나를 보며 웃어준다. 나는 곧 세상과 동일하므로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모두 나르시시스트였다고 할 수 있다.

성장한다는 것은 그런 자아도취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나’의 바깥에도 세상이 있고, 그 세상은 나와 같지 않다. 내 맘대로 되지 않는 일이 늘 벌어진다.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이렇듯 ‘나’를 넘어서는 객관적 ‘세계’를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 말과 같다.

자아도취에 빠진 사람은 세상에 나를 맞추는 대신 나에게 세상을 맞추려 든다. 그런 태도는 때로 창조력의 원천이 된다. 가령 스티브 잡스가 그렇다. 잡스는 대단히 자기중심적이었고 남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일삼았다. 동료들은 잡스가 ‘현실 왜곡장’을 펼친다고 농담 삼아 빈정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리더십과 비전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스마트폰 세상은 오지 않았거나 퍽 다른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반면 히틀러는 어떨까. 히틀러는 자신을 영웅으로 생각했다. ‘순수한 아리안 민족’의 영광을 부활시킬 사람이라고 믿었다. 그는 자아도취에서 깨지 않기 위해 다른 이들까지 그의 망상 속으로 끌어들였다. 히틀러의 개인적 자아도취는 독일 전체의 집단적 자아도취로 확장됐고, 그 속에서 유대인 학살이라는 엄청난 악행이 벌어지고 말았다.

프롬은 종양을 진단할 때 쓰는 의학적 용어를 빌려, 자아도취를 양성(benign)과 악성(malign)으로 구분한다. 생명에 대한 사랑, 범인류적 차원으로 나아가는 개방적 태도, 그런 것이 함께할 때 자아도취는 긍정적 에너지로 승화될 수 있다. 반면 죽음과 고통을 찬미하며 가족이나 부족, 민족 같은 폐쇄적 혈통에 집착할 때 자아도취는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개인적 자아도취가 집단적 자아도취로 커지면 그 여파는 개인을 넘어설 수도 있다.

한국 사회는 자아도취의 폭풍에 시달리는 중이다. 지난달 출간한 조국 전 법무장관의 책 <조국의 시간> 때문이다. 제목부터 범상치 않다. 자기 자신을 3인칭으로 기술하고 있다. 요즘은 연예인 에세이도 이런 식으로 제목을 붙이지 않는 편이다. 그런 자의식에 독자들이 부담을 느낀다는 판단 때문이다.

저자의 말을 몇 구절 읽어보자. “제가 누구를 만났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 자체로 상대를 곤란하게 만들 수도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유폐 상태였다고 토로한다.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돈다고 믿는 것. 전형적 자아도취 증상이다. “이유 불문하고 국론 분열을 초래한 점에 대해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그 ‘이유’가 문제인데, 자신에게 불리한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는 소리. 나르시시스트는 불리하면 이런 식으로 논점 일탈을 한다. 압권은 이 대목. “가족의 피에 펜을 찍어 써 내려가는 심정이었습니다.” 이토록 비장한 표현에서 우리는 일본 사무라이들이 선호하는 죽음의 미학을 엿볼 수 있다. 조국의 자아도취는 양성보다 악성에 가까운 듯하다.

문제는 이 자아도취가 개인적 차원을 넘어 사회적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것이다. 청와대에서 근무하며 고액 사모펀드에 가입할 재산도 인맥도 없는 사람들, 자기 자식을 인턴으로 꽂아 넣고 입시 특혜를 안겨줄 능력도 없는 평범한 사람들, 그런 이들이 <조국의 시간>을 구입하여 인증샷을 올리며 ‘우리가 조국이다’라고 외친다. 자신의 현실을 잊기 위해 우상(idol)에 자아를 투영하는 팬클럽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모두 자아도취에 빠져 있는 작은 나르시시스트였다. 어른이 된다는 건 그런 자기중심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남들처럼 공부하고 일하고 법을 지키며 사는 것이다. 이 평범한 진리를 조국과 그의 팬클럽만 모르는 것 같다. 마트에서 나뒹굴며 소리 지르는 어린이처럼 ‘무죄판결 내 거야’라며 떼를 쓰고 있으니 말이다.

조국을 SNS에 비친 자기 모습에 넋이 나간 나르키소스라 한다면, 그의 주장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이들은 그에게 반한 에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신화와 달리 현실은 꼭 비극으로 끝날 필요가 없다. 그들 스스로는 진지한 비극의 주인공 행세를 하겠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는 엉터리 희극일 뿐. 조국과 그의 팬들 모두 자아도취에서 벗어나 조금이라도 성숙한 존재가 되시기를 희망한다.

2021-06-12

'시험'을 줄이고 '테스트'를 늘리자

일본어를 공부하며 알게 된 사실. 외래어를 있는 그대로 갖다 쓰는 일본어에서 '시험'[試験(しけん)]과 '테스트'는 다른 단어입니다.

'시험'은 대학교 입학을 결정한다거나, 뭐 그런 것들. '사회적 관문'의 기능을 하는 제도를 '시험'이라고 합니다.

반면 '테스트'는 좀 더 가볍고 자주 보는 것들. 공부를 잘 했는지, 진도를 따라오고 있는지, 등을 평가하기 위해 보는 것들이 '테스트'입니다.

일본어에서 '시험'과 '테스트'의 관계는 뭐랄까, '문'[門(もん)]과 '도아'의 관계와 유사하다고 할 수도 있겠죠. 우리는 서양식 주택에 달린 문도 모두 '문'이라고 부르지만, 일본인들에게 '문'이란 전통가옥에 붙어있는 것들이고, 대부분의 서구식 건물의 출입구를 막아주는 판자 같은 건 '도아'라고 부르니까요.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무엇이냐. Meritocracy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험'이라는 단어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누군가의 실력을 키우고, 공정하게 평가하며, 학습효과를 높이는 방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테스트'입니다. 테스트를 자주 해야 합니다. 그래야 제 실력을 가늠할 수 있고, 평가도 공정하게 이루어지고, 공부도 잘 됩니다.

반면 '시험' 한 방으로 인생을 좌우하는 시스템은 어떻습니까. 물론 음서제에 비하면야 '공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시험을 준비하고, 시행하고, 실패에 대응하는 등 모든 방향에서 결국 가진 자에게 유리하게 흘러갑니다. 시행횟수가 반복될수록 그렇죠.

'시험'이 그렇게나 공정한 제도라면, 멸망하기 전까지 과거제도를 굴렸던 조선이 왜 그런 나라가 되었는지 설명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다시 '시험'과 '테스트'의 구분으로 돌아와봅니다. 한국은 예나 지금이나 시험 중심의 나라입니다. 이건 더 설명할 필요가 없겠죠.

문제는 오늘날 '능력주의' 내지는 '공정에의 요구'라는 이름 하에, '시험주의'를 강화하자는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헌대 시험주의는 그 성격상 테스트, 특히 많은 테스트와 공존하기 어렵습니다. 잦은 테스트를 통해 계속 스트레스를 받고 본래의 밑천이 다 드러나는 것은 '능력주의' 혹은 '시험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미래가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자신들이 잘 보았던, 혹은 잘 볼 가능성이 있다고 여기는 '시험'을 통과한 후, 그 성적에 따라 본인이 불공정한 제도의 수혜자가 되기를 바랄 뿐이죠.

'테스트' 중심의 사회는 단지 자본가나 세습 자산가 뿐 아니라 대기업 정규직에게도 그다지 유리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가진 안정적 직장과 연봉에 걸맞는 생산성을 내고 있는지 계속 평가받고 수시로 위치가 변경된다는 뜻이니까요.

하지만 이제 한국은 고도성장기를 지난지 오래이므로, 유연안정성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유연안정성의 길이란 곧 '시험주의'에서 벗어나 '테스트주의'로 나간다는 말과 같습니다.

몇 번을 반복해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능력주의'라는 말에 여러분이 지니고 있는 막연한 환상을 끼얹는 일을 그만두세요. '능력주의'는 엄연히 정의와 용례가 있는 단어입니다. 그것은 '시험주의'입니다.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테스트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테스트주의'입니다.

2021-06-11

'음서제 대 과거제'라는 가짜 논쟁

이준석 당선과 그에 뒤따르는 논의에 끼어들면서 느끼는 게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 '실력 안 되는데 빽/연줄/기타등등으로 끼어드는 놈들'에 대한 분노가 정말 크다는 것입니다. 저 또한 그런 감정에는 공감합니다.

하지만 논의가 '음서제 대 과거제' 수준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둘 다 결국에는 '윗분'과 '아랫것'들을 구분하는 걸 전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역동적이면서도 약자를 포용하고 받아들이는 자본주의 사회를 원합니다. 그것은 음서냐 과거냐를 넘어서, 일단 모든 사람은 기본적으로 평등하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음서제로 '양반'되냐 과거제로 '양반'되냐, 이 갈등은 '양반과 노비의 구분'이라는, 전근대적 세계관을 바탕에 깔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근대적인 세계를 원합니다. 매 순간 모든 이들이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지 않으면 안 되는, 하지만 낙오자를 버리지는 않는, 그런 세상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2021년. 우리 모두 근대인이 됩시다.

2021-06-09

엑셀과 능력주의 (feat. 이준석)

국회의원에 출마하려면 엑셀쯤은 할 줄 알아야 한다. 누군가 이런 주장을 한다고 해보자. 이 말 자체는 그냥 그러려니 할 수 있는 소리다. 엑셀을 참 사랑하는 사람이구나, 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능력주의'를 들먹인다면 문제는 퍽 달라진다. 엑셀 사용 능력을 '시험'봐서 평가하겠다는 것은 정치와 상관 없다.

한국에서, 특히 보수 쪽 지지 성향이 있는 분들은 '능력주의'라는 말을 원래 의미와 다르게 이해하고 있다. 누군가의 진정한 능력을 파악하여 그에 따라 공정한 대우를 해주는 것이 능력주의라고 뇌피셜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능력주의(meritocracy)는, 사실 좀 더 한국어 맥락에 부합하게 옮기자면, '시험주의'에 가깝다. 어떤 시험을 통해 능력(을 펼칠 수 있는 잠재력)을 평가한 후, 그에 따라 사회적 계층을 할당하자는 소리다. 

 

마이클 영의 책 Meritocracy가 바로 그런 식으로 돌아가는 디스토피아 사회를 그린 SF 소설이고, 능력주의(Meritocracy)라는 말은 마이클 영이 저 책을 쓰면서 만든 말이다. 마이클 영은 2002년에 죽었는데, 그 전에 <가디언>에 본인의 뜻을 밝힌 칼럼을 기고하기도 했다.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에는 너무도 최신 용어라는 소리다.

역설적이게도 현재 한국에서 능력주의의 본래 의미를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 이준석이다. 선거로 뽑혀야 마땅한 정치인을, 시험 봐서 뽑자고 하면 너무 과격하니까, 출마 자격을 평가할 때 시험을 보자. 시험홀릭, 입시제도가 낳은 괴물, 뭐 그런 단어들이 떠오르는 발상이다.

물론 그런 주장은 현실과 거리가 멀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오세훈 서울시장을 떠올려보자. 

오세훈은 파일명 뒤에 붙는 v(version의 v)가 무슨 뜻인지도 몰라서 VIP의 V라고 했다가 전국민의 조롱거리가 되었었다. 하지만 경선에서 승리했고, 심지어 선거 본선에서도 이겼다.

정치인이 컴퓨터를 잘 알아야 한다고? 컴퓨터 잘 못 쓰는 사람들은 출마도 못 하게, 시험 봐서 떨어뜨리자고? 이준석은 지금 오세훈을 '멕이는' 건가?

정치인에게 필요한 능력은 딱 세 가지다. 내가 봐도 참 아름답고 기가 막힌 정리인데, 아무튼 이렇다.

  1. 다른 사람을 내 편으로 끌어들이는 매력
  2. 내게 모인 사람들의 능력, 인성, 충성심을 파악하는 안목
  3. 아니다 싶은 사람을 내치고, 대립각을 세울 줄 아는 투쟁력

이 모든 것은 컴퓨터 사용 능력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심지어 글을 몰라도 된다. 무슨 미친 소리냐고 하겠지만, 좀 극단적인 예시이긴 한데, 샤를마뉴 대제 같은 경우가 그렇다. 그는 문맹이었다. 하지만 프랑크 왕국을 확장하는데는 아무 무리가 없었다. 징기스칸도 아마 문맹이었던 것 같은데, 아니면 말고. 현대의 정치인이라고 뭐가 다를까. 믿음직한 참모가 글 읽고 표 볼 줄 알면, 정치인 본인은 문맹이어도 정치를 할 수 있다.

이준석에게는 3의 능력이 있다. 그건 분명하다. 하지만 1이 없다. 매우 심각하다. 그러니까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에서 세 번 출마해서 세 번 떨어진 것 아닌가. 안타까운 일이다. 당대표가 된다면, 그래서 인지도가 높아진다면, 좀 나아지려나.

나는 컴퓨터라는 도구를 좋아하는 편이다. 내가 필요한 분야는 일부러 배우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모든 방향에서 컴퓨터를 잘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하물며 정치라는, 호모 사피엔스가 농경 생활을 시작하기 전부터 해왔던 그런 영역에서는, 엑셀이 아니라 매력이 본질이다.

사람들이 능력주의를 운운하면서 자꾸 '내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능력주의'를 거론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능력주의는 엄연히 존재하는 사회학적, 철학적 개념이다. 그리고 그것은, 한국어로 정확히 옮기자면, '시험주의'에 더 가깝다. 이준석은 능력주의자인데, 좀 더 잘 번역해보자면, 시험주의자라는 소리다. 

나는 진정한 능력주의(라는 게 있다면, 그게 뭔지는 몰라도)에는 찬성한다. 하지만 시험주의는, 글쎄. 잘 모르겠다. 시험 보는 재주라면 나도 딱히 부족하다고 느끼지는 않지만, 2021년의 대한민국이 시험주의 사회로 돌아가는 것은 사회의 긍정적 변화를 방해하는 일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2021-06-07

이준석의 '공정'은 가난한 노인이 더 가난해지는 것

신동아 칼럼에 넣으려다가 분량이 부족해서 뺀 대목이 있다. 이렇게까지 반응이 좋을 줄 알았다면 편집부와 논의해서 분량을 늘리고 같이 넣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이준석은 기초연금(65세 이상 노인들이 받는 연금)의 수급자가 소득 하위 70%라는 점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 왜 소득 상위 30%는 기초연금을 못 받느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예의 '공정'을 꺼내든다. 

기초연금이 무엇인가. 노인 빈곤율 OECD 1위 국가에서, 산업화 세대 빈곤 노인들이 말 그대로 굶어죽지 말라고 만든 연금이다. 그나마도 없으면 노인 자살률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오를 것이다.

 

하지만 이준석은 주장한다. 그것은 '공정하지 않다'고. 심지어 가난한 노인들이 매달 받는 기초연금액이 줄어드는 한이 있어도, 소득 상위 30%까지 다 받아야 공정한 거라고.


아직도 이준석이 말하는 '공정' 타령을 옹호하는 분들을 보면 진심으로 의아하다. 여러분은 이준석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살펴보기나 하고 지지하는 것인가?

> 청년수당이나 노령연금에 대해 기본적으로 반대 의견입니다. 그런 수당과 연금은 특정 계층에만 혜택을 줍니다. 그것은 공정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노령연금의 경우 소득 상위 30퍼센트는 연금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불만을 토로합니다. 저는 그들의 불만이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노령연금의 경우 지급하는 금액을 낮추더라도 노인 인구 전체에 지급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것이 원래 연금의 취지에도 맞습니다. 저는 국민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것에는 찬성합니다. 기본소득은 국민 전체가 그 대상이니까요. 그런 경우 현재 진행되고 있는 수당은 기본소득 틀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사안입니다. 저는 국민 전체에 지급하는 기본수당일 경우에는 아예 공정성 시비가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봅니다. 다만 그 금액을 현재 얼마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국민경제에 직접적인 압박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좀 더 깊은 토론과 고민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공정한 경쟁》 中)

이준석이 말하는대로 '공정'하게 기초연금을 뜯어고치면, 안그래도 심각한 노인 자살은 더욱 심해질 수밖에 없다. 이건 정상적인 공감 능력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면 함부로 내뱉을 말이 아니지 않은가?


 

코로나 터진 후 대기업 공기업 공무원들은 소득에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다. 반면 자영업자들은 개박살이 났다. 하지만 대기업 공기업 다니거나 공무원인 대깨문들은 '누가 무슨 피해를 입었는지 어떻게 증명하냐, 그것은 공정하지 않다'라며, 재난지원금을 1인당 10만원씩 쪼개서 뿌리는 게 '공정'하다고 주장했고,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켰다.

기초연금에 대해 이준석이 하는 말과 똑같다. 실질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가야 할 돈을, '공정'을 앞세워, 이미 충분히 가진 자들이 빼앗아 먹겠다는 소리.

2021-06-06

[신동아] '공부 잘한' 이준석에게 드리운 짙은 그림자

* 일러두기: 이 칼럼에서 다루려다 분량 관계상 뺀 내용이 있다. 이준석의 '공정' 담론은 청년층 뿐 아니라 노년층에게도 해로운 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 내용은 다음을 참고할 것: "이준석의 '공정'은 가난한 노인이 더 가난해지는 것"

'공부 잘한' 이준석에게 드리운 짙은 그림자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입력 2021. 06. 06. 10:01 수정 2021. 06. 06. 12:54

기사 도구 모음

[노정태의 뷰파인더㊲] 자비심 없는 '공정한 경쟁'

● 성취와 능력 부각하는 세계관
● 우연과 행운에는 말을 아끼다
● 자신이 얻은 기회는 당연하다?
● 약자와 소외된 자에 대한 공감 부족
● ‘완벽하게 공정한 경쟁’은 없다
● 부풀어 오른 자의식과 포퓰리스트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국민의힘 당대표 선거에 출마한 이준석 전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 최고위원이 5월 30일 광주 서구 치평동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열린 국민의힘 제1차 전당대회 광주·전북·전남·제주 합동 연설회에서 정견을 발표하고 있다. [박영철 동아일보 기자]
필자는 1983년생이다. 20대부터 소위 '청년 논객'으로 살아왔다. 30대가 거의 끝나가는 지금까지도 그놈의 '청년' 딱지가 떨어지지 않는다. 나이를 안 먹어서가 아니라, 우리 세대에 힘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준석 전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 최고위원이 단지 젊다는, 동년배라는 이유만으로 그에게 박수를 치며 지지의 뜻을 보내고 싶은 마음은 없다. 생각해볼 게 많기 때문이다.

‘공정한 경쟁'의 세계관

이준석이라는 이름을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하면 네 권의 책이 나온다. 출간 순서대로 나열해보자. 2011년 12월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으로 정치에 첫 발을 디딘 후 2012년에 출간한 '어린놈이 정치를?'이 첫 번째 책이다. 같은 해 '거침없이 배우는 LINQ'라는 컴퓨터 서적을 번역 출간한 그는, 한동안 방송 및 정치 활동에 전념하다가 2018년 소설가 손아람과의 대담집인 '그 의견에는 동의합니다'를 펴냈다.

이 글에서는 그의 가장 최근작인 '공정한 경쟁'을 통해 그의 세계관, 그 중에서도 '공정 담론'을 집중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공정한 경쟁'에는 "대한민국 보수의 가치와 미래를 묻다"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그 제목과 부제 모두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이준석은 진지하게 '산업화 세대 이후의 보수'를 고민하고 있다. '여는 글'의 한 대목이다.

"이 책은 젊은 세대가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의 엉덩이 밑에 깔린 존재가 아닌 독립적인 아젠다를 가지고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설령 산업화 세대나 민주화 세대의 구성원이라 해도, 후속 세대가 자신만의 길을 모색한다는 말을 할 때, 나쁘다고 하거나 반박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듯하다. 그렇다면 이준석이 생각하는 새로운 아젠다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아젠다는 '공정 사회'로 보고 있다. 젊은 세대가 원하는 공정의 가치를 지금의 집권 세력은 잘못 해석하고 있고, 공정과 평등의 가치를 실현하는 방식에 있어서 허덕이고 있다."

‘공정' 담론은 2019년과 2020년의 서점가를 뜨겁게 달군 주제였다. 가령 인천국제공항공사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등을 놓고 열띤 토론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무렵 출간된 이준석의 책이 공정을 화두로 삼고 있다는 점은 그다지 놀랄 일은 아니다.

하지만 '공정한 경쟁'은 정치인이 펴낸 그렇고 그런 책이 아니다. 어디서도 트집 잡히지 않도록 하나마나한 소리를 두루뭉술하게 돌려서 말하고 있지 않다. 좋게 말하면 인상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황당한 대목이 여럿 등장한다. 심지어 본인도 그러한 내용이 논란의 대상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철학자 마이클 센델이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잘 지적하고 있다시피 공정성을 앞세운 능력주의 담론은 현 체제 속에서 경쟁에 이긴 사람이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한 담론으로 악용될 수 있다. 이것은 극복하기 어려운 내재적 약점이다.

그래서 능력주의의 옹호자들은 대부분 비슷한 방식으로 논지를 전개해 나간다. 가령 이런 식이다. 내가 지금껏 거둔 성공은 스스로의 노력만으로 얻어낸 것이 아니다. 물론 나는 힘들게 노력했지만, 나처럼 좋은 여건을 가지고 태어나지 못한 이들이 많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들의 처지에 대해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할지라도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늘 노력중이다. 능력주의가 제대로 발휘되는 공정한 사회를 지키기 위해 나는 최선을 다할 것이다.

이준석의 특이점은 바로 이 지점에서 나온다. 그는 다른 능력주의자들과는 달리, 이런 식으로 입에 발린 겸양의 발언 같은 걸 내뱉지 않는다. 그런 '정치적 발언'을 전혀 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본인이 거둔 그 모든 성취가 온전히 자신의 능력과 노력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공정한 경쟁'의 곳곳에서 그런 생각을 감추지 않고 정직하게 드러낸다.

노력과 우연, 행운의 중첩 작용

2012년 2월 7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가운데)과 이준석 비대위원(오른쪽)이 비대위 회의에 앞서 대화하고 있다. 왼쪽은 김종인 비대위원. [동아DB]
이준석은 '박근혜 키드'로서 정치 인생을 시작했다. 20대의 나이에 집권여당 비상대책위원이 되는 벼락출세를 맛봤다. 덕분에 일찌감치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 지역구에서는 연이어 낙선했지만 방송가의 눈에 들어 예능인으로서 전국적인 지명도를 쌓았다.

그 과정에 이준석 본인의 노력도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하지만 오직 100%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진 결과라고 말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여러 가지의 우연과 행운이 중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일각에서 말하듯 유승민 전 의원과 이준석의 아버지가 서로 돈독한 친분이 있는 사이라면, 그러한 요소 역시 이준석이라는 사람의 출세를 논함에 있어서 빠져서는 안 될 일이다. 하지만 그저 자신의 '공정 철학'을 설파할 뿐, 이 모든 우연과 행운에 대해 이준석은 말을 아끼고 있다.

이준석은 카메라 앞에서 말을 잘 하는 젊은 정치인이다. 그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자질 중 하나다. 하지만 세상에 말 잘 하고 정치에 뜻을 가진 사람들은 많다. 그 중 누가 카메라 앞에 설 수 있는가. 그것은 거의 전적으로 외부의 힘에 의해 결정된다. 노력을 하기 위한 무대 자체가 '유승민 친구 아들 이준석'이 아닌 수많은 정치지망생들에게는 잘 주어지지 않는다. 이준석 스스로도 그 점을 잘 알고 있다. 본인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바를 보면 분명히 그렇다.

"가령 정당을 대표해 토론에 나가려면 우선 직위가 있어야 해요. 그런데 젊은 사람들은 그런 직위를 받아 본 적이 없거든요. 직위를 받아 다른 정치인들과 토론을 해본 젊은 사람은 제가 거의 유일하고요. 저는 제가 비대위원으로 출발했기 때문에 토론에 나가면 상대로 김부겸 의원, 노회찬 의원 등이 나왔어요. 제 입장에서는 아주 고급의 대련, 훈련 기회를 얻은 셈이죠."

일반적으로 이 정도 이야기를 꺼내면, 적어도 가식적으로라도 겸양의 말이 뒤따른다. '그런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는 게 참 행운이죠. 그래서 젊은 정치인들에게 더 많은 기회가 제공돼야 합니다' 같은 식으로 말이다.

이준석은 다르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결론은 '내가 잘났다, 내가 노력했다'로 마무리된다. 방금 인용한 문단은 이렇게 끝나고 있다. "방송 토론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아요. 공부를 많이 하고 들어가도 준비한 것과 전혀 다른 질문이 나와 당황하는 경우도 있고요. 저는 그 과정을 처음부터 잘 소화한 편이었어요."

이렇게 한껏 뽐을 낸 후 이준석이 내리는 결론은 다음과 같다. 이 대목에 따로 제목을 붙인다면 '청년정치 사다리 걷어차기'가 어떨까 싶다.
"청년정치도 마찬가지입니다. 청년이란 이름으로 기득권에 특별한 혜택을 받을 생각을 하면 안 된다고 봐요. (중략) 저는 어렵더라도 기존 질서에 기대지 않고, 제 실력으로 청년정치를 실현시킬 생각입니다."

"엘리트주의 감수하겠다"

나는 지금 일부 대목을 부풀려 이준석의 생각을 왜곡하고 있는 게 아니다. 이준석은 정말로 이렇게 생각한다. 그는 경쟁, 특히 자신이 인생의 승리를 거둔 입시 경쟁을 '공정한 경쟁'의 표본으로 여긴다. 본인의 중학교 시절에 대한 이준석의 회고담이다.

"중학생에 불과한 아이들 700명이 등수를 두고 다투었어요. 좀 잔인한 측면도 있지만 저는 그 시절의 공부가 내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생각하면 완벽하게 공정한 경쟁이었고요."

우리 정치권, 특히 엘리트 중심의 보수 정당에는 공부를 잘 한 사람이 참 많다. 그들 중 상당수, 아니 대다수는 자신의 '공부 머리'에 대한 자부심을 품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중 그 누구도, 적어도 내가 아는 한, 본인이 승리를 거둔 입시 과정을 '완벽하게 공정한 경쟁'이라는 식으로 말하지는 않았다. 혹시 그런 경우를 본 적 있다면 제보 부탁드린다.

이준석은 이런 사람인 것이다. 내가 이긴 경쟁을 두고 '완벽하게 공정한 경쟁'이라고 말하면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 책이 나올 때까지 몇 차례나 교정지를 봤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런 표현을 그대로 대중 앞에 내보내는 사람. 몇 페이지 더 넘기면 "저를 '엘리트주의'라고 비난한다고 해도 기꺼이 감수하겠습니다"라는 말이 나온다. 그가 빛나는 재능과 좋은 여건에도 불구하고 '0선 중진'에 머물러 있는 이유를 왠지 알 것 같지 않은가?

‘공정한 경쟁'에는 좋은 내용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이준석이 나름의 전문성을 지니고 있는 교육 분야에서 그렇다. 학령인구가 줄고 있으므로 고등학교를 모두 기숙학교로 바꾸는 아이디어가 대표적이다. 학생들이 모두 기숙사 생활을 하면 사교육이 원천 봉쇄될 뿐 아니라 가정환경 때문에 겪게 될 위화감도 줄어든다. 특히 인구가 급격히 줄어드는 농어촌 지역의 경우 몇 개 학교를 통합해 기숙사로 운영하면 교육적 가치와 효율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여성 문제에 있어서도 '정답'을 말할 때가 있다. 교육 문제를 다루는 5장에서 그는 한국 사회가 여성 인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여성의 사회 진출을 더욱 장려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취지다. 고학력 여성들이 경력 단절을 겪고 직업 시장에서 이탈할 것을 우려해 결혼과 출산을 미루면서 저출산이 심화된다는 면을 놓고 볼 때, 이러한 현실 인식은 정확하다.

약자와 패배자에 대한 자비심

하지만 거기까지다. '정치평론가'로서 이준석이 내놓는 올바른 담론은, '정치인' 이준석의 부풀어 오른 자의식과 호승심(好勝心) 앞에서 힘을 잃어버린다. 그는 자신이 언제나 공정하게 경쟁하고 있으며, 자신의 능력으로 이긴다고 생각한다. 약자와 패배자에 대한 공감과 자비심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페미니즘을 타자화하며 당대표 선거에서 돌풍을 일으키는 행보는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앞으로도 그 경향성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

국민은 젊고 합리적이며 유쾌한 보수 정치를 원한다. 지금껏 진보 진영이 독점해온 정치적 의제를 다각도에서 검토하고 갱신하는 것 또한 보수 정치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은 약자, 소외된 자, 애초부터 발언권을 얻지 못한 자들에 대한 연민을 전제로 해야 한다. 내가 이긴 경쟁이 세상에서 가장 공정한 경쟁이었다는 이준석과 그에게 환호하는 이들을 보며 (마음 한 구석의) 우려를 감출 수 없는 이유다.

#이준석 #공정한경쟁 #2030 #청년정치 #신동아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basil83@gmail.com

2021-06-05

요리할 돈이 없어서 배달음식을 먹는 사람들

상파울루, 브라질. 2011년 2월 뉴스. 피자 배달점이 늘어나고 있다. 왜일까? 

도시 빈민 인구가 늘어나고 있는데, 그들에게 부엌이 없기 때문.

 '가난한 사람이 핸드폰은 있다고? 그런데 가스비를 낼 돈이 없다고?' 같은 소리들. 얼마나 근시안적인가.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시각인가. '요리를 할 돈이 없어서 배달음식을 먹는다' 같은 '비논리적' 현상이야말로 현실에 더 가깝다.

Food is also one of the few pleasures available to the poorest. In the favelas (slums) of São Paulo, the largest city in South America, takeaway pizza parlours are proliferating because many families, who often do not have proper kitchens, now order a pizza at home to celebrate special occasions.
"The 9 billion-people question", The Economist, Feb 24th 2011, Special Repo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