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노정태의 시사哲]
조지 오웰의 ‘1984’로 본 ‘CCTV 의무화법’의 위험성
윈스턴 스미스는 무미건조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건 그가 하급 당원으로서 개성 없는 일을 하고 있어서만은 아니었다. 한때 ‘영국’이라고 불렸던 오세아니아의 어딘가에 살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오세아니아의 곳곳에는 지도자 ‘빅 브러더’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어느 각도에서 보더라도 빅 브러더의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고 느끼도록 만들어진 정교한 그림이다. 게다가 모든 곳에 ‘텔레스크린’이 설치되어 있다. 24시간 쉴 새 없이 정권 홍보 방송을 내보내는 텔레비전이지만, 동시에 마이크와 카메라가 내장되어 있어 모든 이의 대화와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시스템이다.
고전 반열에 오른 명작이 흔히 그렇듯이 조지 오웰의 <1984> 역시 몇몇 장면이나 구절로만 기억되고 있다. 우리는 좀 더 깊은 고민을 해보도록 하자. <1984>에서 묘사하는 디스토피아의 작동 구조를 완전히 이해하려면 약간 공부가 필요하다. 공리주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이 제안한 감옥인 ‘파놉티콘’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일러스트=안병현
마치 도넛처럼 중앙이 비어 있는 원형 건물을 떠올려보자. 건물은 총 6층이며 층마다 감방이 늘어서 있다. 원형
건물 가운데에는 감시탑이 서 있다. 죄수들의 감방은 철창으로 막혀 있지만 시야를 가리는 요소가 없다. 반면 감시탑 창문에는 발이
드리워져 있다. 간수는 죄수의 일거수일투족을 단번에 볼 수 있지만 죄수는 자신이 감시당하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구조다. 벤담은
이런 감옥을 고안하고는 그리스어로 ‘모든’을 뜻하는 ‘pan’과 ‘보다’라는 뜻의 ‘opticon’을 합쳐 ‘파놉티콘(panopticon)’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다들 알다시피 벤담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공리주의 철학자. 그런 사람이 왜 이런 비인간적 감옥을 고안했을까? 18세기
말 상황을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산업 혁명으로 고향을 떠나온 낯선 이들이 도시에 모여 살게 되었다. 인권 개념이 확장되면서
사람 몸을 훼손하거나 때리는 식의 처벌은 선호되지 않았다. 그 결과 전례 없이 수형자가 늘어났고 이는 또 다른 문제를 낳았다.
범죄자를 처벌, 교화, 재교육할 새로운 방안이 절실했다.
파놉티콘은 그런 상황에 대응하고자 고안한 시스템이었다.
벤담의 설명을 들어보자. “끊임없이 감독관의 감시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은 나쁜 일을 할 능력과 그러한 것을 하고 싶어 하는 생각
대부분을 사실상 없애버린다.” 감시당하는 사람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리게 하는 완전한 지배 장치, 그것이 바로
파놉티콘이다.
조지 오웰로 돌아가 보자. 1984년
4월 4일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어느 날, 윈스턴은 펜을 들었다.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게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짓은 그 자체로 ‘사상죄’에 해당했다. 그 이유를 독자 여러분도 이제 짐작하실 수 있을 것이다. 텔레스크린 혹은
파놉티콘의 감시를 ‘의식’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일기에 무엇을 썼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권력은 국민이 자신의 시선에서 벗어나는 것
자체를 응징하려 든다.
과연 소설에서만 벌어지는 일일까. 우리는 방방곡곡 CCTV가 설치된 세상에 살고 있다. 범죄 예방을 위한 공공 장소 CCTV의 필요성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살을 째고 피를 쏟으며 목숨이 오가는 곳인 수술실 내부에도 CCTV를 설치해야 한다는 더불어민주당의 여론 몰이를 보면, 인권도 프라이버시도 윤리적 감수성도 모두 잃어버린 게 아닌가 싶다.
세계적으로 전례가 없는 이런 입법 시도에 국제사회는 할 말을 잃었다. 세계의사회(WMA) 데이비드 바브 회장은 지난 22일
의사협회에 보낸 영상에서 “이 법안은 ‘조지 오웰’적 성격이 짙어 전체주의 국가의 사고에 가깝다”며 법안을 폐기할 것을
요청했다. 대리 수술이나 성폭력 등 의료진의 일탈 행위를 막기 위해서라면 엄격한 규약을 확립하고 동료 간 리뷰를 강화하는 등,
효과가 검증된 다른 방법이 있다. CCTV는 그런 목적 달성에 부적합하다.
반면
부작용만은 확실하다. 전신 마취 수술은 응급 상황에 대비해 대개 완전 탈의 상태로 진행한다. 환자는 자신의 나신과 수술 과정
등을 담은 전자 기록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정상적 방식으로는 검색도 접근도 어려운 ‘다크웹’에는 아동, 시신, 동물 등에게
성욕을 품는 자들이 찍은 온갖 끔찍한 영상이 돌아다닌다. ‘한국 수술실 영상’들은 다크웹의 핫 아이템으로 거래될 것이다. 돈과
관심을 노리는 유튜버의 먹잇감이 될 수도 있고, 개인적 협박 수단으로 악용될 여지도 충분하다.
유출자를 엄벌하면 되는 것 아닐까? 잡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사후약방문이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한 의사를 불신하면서 CCTV 영상 관리 업체는 어떻게 신뢰할 수 있을까. 해킹 위험도 있다. 원자력, 잠수함 등 기밀 등급 높은 자료도 털린다. 수술실 CCTV 영상이 무사할 거라고 믿는 건 허황된 꿈이다. 일단 찍은 영상은 유출될 수 있다고 봐야 한다.
여성
연예인 등 대중의 선정적 관심이 쏠리는 사람의 수술 영상이라면 위험은 더욱 커진다. 안보 사항이라 할 수 있는 대통령이나 고위급
인사의 의료 정보 역시 마찬가지다. 문재인 대통령이 퇴임 후 수술을 받는 영상이 다크웹에서 거래되는 장면을 상상해보라. 외국인,
특히 무슬림 여성들의 의료 관광 수요는 기대할 수조차 없다. 전 세계 어느 나라도, 심지어 중국마저도 수술실 내 CCTV를 의무화하지 않는 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1984>는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윈스턴의 저항은 실패로 끝난다. 사상 경찰에 체포된 그는 2+2=4가 아니라 5라고 대답하라고 강요당하며
세뇌된다. 결국 오세아니아의 대다수 국민처럼 진심으로 빅 브러더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감시탑의 시선으로 스스로를 바라보는
파놉티콘의 죄수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CCTV는
감시 도구이며 인권침해 수단이다. 의료인에 대한 불만의 해법이 될 수 없다. 일부 정치인이 대중의 불안과 분노를 부추겨 국민
스스로 파놉티콘으로 걸어 들어가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건 정말 나쁜 정치다. 파놉티콘의 죄수가 아닌 시민 한 사람으로서, 나는
반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