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런 주장이 저에 반대하여 강력히 제기될 때, 저는 마치 전광석화처럼 즉시 명료하게 봅니다 - 제가 생각할 수 있는 어떤 기술도 제가 절대적 가치로 의미하는 것을 기술하기에 좋지 않다는 것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이 혹시 제안할 수 있을지 모르는 모든 유의미한 기술을 그것의 유의미성을 이유로 처음부터 제가 물리치리라는 것을 말입니다. 즉, 저는 이제 이 무의미한 표현들은 제가 아직 올바른 표현들을 발견하지 못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의 무의미성이 바로 그것들의 본질이었기 때문에 무의미했다는 것을 봅니다. 왜냐하면 제가 그것들을 가지고 하기를 원한 것은 그저 세계를 넘어서는 것, 즉 유의미한 언어를 넘어서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저의 모든 경향은, 그리고 제가 믿기로는 윤리학이나 종교에 대해 쓰거나 말하려고 시도해 본 적이 있는 모든 사람의 경향은, 언어의 한계들에로 달려가 부딪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새장 벽에로 이렇게 달려가 부딪치는 것은 완전히, 절대적으로 희망 없는 일입니다. 윤리학이 삶의 궁극적 의미, 절대적 선, 절대적 가치에 관해 무엇인가를 말하려는 욕망으로부터 발생하는 한, 윤리학은 과학일 수 없습니다. 윤리학이 말하는 것은 어떤 뜻에서도 우리의 지식을 늘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 정신 속의 한 경향에 대한 기록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러한 정신을 깊이 존경하지 않을 수 없으며, 죽어도 그것을 비웃지 않을 것입니다. (36쪽)
밑줄 강조는 인용자, 굵은 글씨는 원문에 따름.
2007-03-21
2007-03-15
강유원 게시판의 비극
최근 몇 차례의 삭제와 글쓰기 금지 파동을 겪으며 급격하게 찌질해진 강유원 게시판의 분위기는, 그 운영자가 선택한 삶의 방향으로 인해 어쩌면 필연적으로 도출될 수 밖에 없었던 현상이었을지 모른다. 짧은 문장들로 추려서 말하자면, '회사원 철학자' 강유원의 카리스마가 예전같지 않게 되었고, 그리하여 쇠락의 냄새를 맡은 몇몇 파리들이 꼬여들어 그러한 문제가 불거졌다는 뜻이다. 파리라는 말이 개인적으로는 심할 수도 있지만, 자기만의 '철학'을 줄줄이 늘어놓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시비를 거는 치들을 따로 불러줄 말이 존재하는 것 같지도 않으니 용어를 정정하지는 않겠다.
아무튼 강유원 게시판은 예전같지 않고, 그 배경에는 운영자의 카리스마 쇠퇴가 가장 큰 이유로 자리잡고 있다. 그가 회사에 다니던 시절에는 이렇지 않았다(고 나는 기억한다). 어설프게 '나만의 철학'을 풀어놓으려는 자들에게 강유원은 자신있는 어조로 '공부가 안 되었군,' 이라고 운을 뗄 수 있었고, 그러면 그의 동료들이 나서서 '이러저러한 책들을 먼저 읽어봐라'라고 마무리를 해줬다. 말하자면 그가 어떤 '선생'으로서의 권위를 한껏 누리고 있었다는 뜻인데, 여기서 한가지 이상한 점은 대체 왜 회사에 다니고 있다는 것이 '선생'으로서의 권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느냐 하는 것이다.
가만히 따지고 보면 진실로 그렇다. 강의와 인세 수입(이라는 게 있다면)만으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지금, 그는 굳이 밤잠을 쪼개가며 책을 읽을 필요 없이, 하루를 온전히 투자하여 공부하고 공부하고 또 공부할 수 있다. 책을 들여다보는 양과 가르치는 내용의 질이 정비례까지는 아니어도 대충 비슷하게 따라간다고 가정하면, 그가 공부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남에게 가르쳐주는 것들 또한 양적으로 또 질적으로 풍성해져야 마땅하며, 그러한 변화는 대중에게 철학을 강의하는 그의 '선생'으로서의 입지를 강화시켜야 마땅한 것 아닌가? 헌데 상황은 그 반대다. '회사원 철학자'라는 수식어에서 '회사원'이라는 명사 하나가 떨어져나간 순간, 강유원의 아우라 중 매우 중요하고 커다란 것이 함께 사라져버렸다.
강유원이 회사에 다니고 있었던 것은, 그가 기존 '학계'의 논리에 저항하고 있다는 것, 금전적으로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동시에 뜻했고, 그리하여 그는 '독립된 지식인' 중 하나로 간주될 수 있었다. 나는 지금 이러한 셈법이 부당하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자기 손으로 벌어서 먹고 사는 것은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할 중요한 미덕이며, 직업으로서의 학문을 택하지 않으면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기 위해 그가 벌였던 숱한 고행의 의의를 폄하할 생각도 전혀 없다. 다만 한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회사원 철학자'라는 수식어를 달고 그가 누리고 있던 특수한 아우리가 과연 그 자체로서 한국의 문화적 맥락을 고려하여 볼 때 합당한 것이었나 하는 것이다.
대학에서 돈을 받으며 연구하는 것, 꾸준히 논문을 써 내고 동시대의 학자들을 평가하고 그들의 일부로서 살아가는 것, 아카데미즘의 본질이라면 본질을 구성하는 이러한 요소들을 폄하하는 것이 '회사원 강박사'의 이미지를 구성하는 중요한 부분 중 하나였고, 그렇기에 그는 보란듯이 철학과 무관한 일을 하면서 밥벌이를 해왔다. 간단하게 줄여 말하자면 일종의 '은둔고수' 같은 아우라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회사에 다님으로써 그는 아직도 공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직장인들의 호감을 사는데도 성공했다. 사람은 자신이 도저히 못할 것 같은 일, 다시 말해 질투를 하기에는 너무 어렵거나 그럴 가치가 없어보이는 일을 하는 누군가를 봤을 때에는, 대체로 사심 없는 칭찬을 보내는 법이다. 이 두가지 맥락이 맞물려 강유원은 나름대로 (책을 사서 읽는) 대중들 사이에서 하나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여기서 요점은 그가 철학을 공부한다는 것이 아니다. 철학 공부를 하면서도 학계에 소속되어 있지 않다는 것, 오직 그것만이 대중들에게는 감동이었고 카리스마였고 '포스'의 근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 분위기 자체가 정당한 것일까? 내가 추측하는 바와 같이, 강유원의 책을 구매하던 대중들이 '회사원 철학자'의 이미지를 먼저 소비하고 있었다고 가정해보자. 철학자가 어떤 아이콘으로 자리잡는 건 절대 나쁜 일이 아니지만, 과연 그 '회사원 철학자'라는 딱지는 정당한 것일까?
이 질문은 이렇게 되물어질 될 수 있다. 과연 철학이라는 분야에서는 '은둔고수'가 성립할 수 있는 것일까? 자기들끼리 '빨아주는' 논문을 쓰는 대신, 몇 달이고 몇 년이고 헤겔 원문만을 파고 있다보면, 자본주의 사회를 바라보는 근본적인 시선을 얻을 수 있는 것일까? 강유원이 '내가 공부하는 방법'에서 제시하고 이후 자신의 삶에서 지속적으로 실천해나간 모두스 비벤디modus vivendi에는, 이렇듯 무협지의 내적 논리가 진하게 묻어나있다. 강호 잡사에 물들지 않고 오직 무공 한 길에만 정진하면, 아무도 알아주지 못하더라도 호탕한 웃음 한 번 짓고 스러질 수 있다는, 일종의 자뻑이며 자학인 그런 종류의 존재미학.
다른 부분을 다 접어두더라도, 그런 방식은 근대 학문의 기본 정신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과학이건 철학이건, 그 학문이 대상으로 삼는 데이터(박홍규 식으로 말하자면)에 대해 자유롭게 연구하고 발언하는 것이 근대 학문의 정신이라면, 공부하는 이는 마땅히 다른 학생들 사이에서 그들과 소통해 나가야 한다. 그러나 강유원은 학계에서 떨어져나간 후 홀로 외로이 헤겔을 읽는 길을 택함으로써, '뭔가 센 놈'과 독고다이를 뜨고 싶다는 자신의 말초적인 욕구를 충족시켰을지언정, '공부'를 하고 싶다는 더욱 근원적인 바램은 접어두게 된 것이다.
결국 지금 나는 그가 하는 일이 '공부'가 아닐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있다. 헤겔을 읽어도 토론을 할 수가 없고, 서평을 쓰면 '잘 봤습니다'라는 리플성 트랙백만이 달리는 현실. 강호에서 발을 빼면서 그는 시골 마을에서 검을 가르치며 독야청정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 누구와도 시원한 칼부림을 주고받을 수는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무협지의 세계에서는 혼자 폭포수 옆에서 서른 여섯가지 자세를 잡고 운기조식을 하면 '내공'이 늘어나지만, 그런 일은 현실 속에서 가능하지 않다. 혼자 산 속에서 무공을 연마하던 '고수'들이, 다른 동료들과 투닥거리며 질펀하게 연습을 하던 '스포츠맨'들에게 줄줄이 얻어터지고 깨어져나갔다는 것은 이종격투기 'K-1'의 역사가 처절하게 증명하는 바와 같다.
아무튼 그가 화전을 일구고 있던 동안에는 '강호'와 동떨어져 있다는 사실이 명백했고, 그리하여 '은둔고수'의 품위도 유지될 수 있었다. 문제는 그가 회사를 그만두면서 전업 지식인, 혹은 강사가 되어버렸다는 것이고, 즉 '나 철학자 아니야. 그저 책을 좋아하는 회사원일 뿐이지, 허허허'라는 말을 할 수가 없게 됨으로써 자신이 가지고 있던 포스를 잃어버리자, 여태까지는 범접하지도 못하고 있던 다른 '재야'들이 칼을 빼들고 기회를 노리며 달려들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하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품위가 있는, 적어도 '가오'를 잃어버리지 않는 법은 아는 사람이고, 그 게시판의 분위기를 사랑하는 다른 사용자들의 자발적인 노력에도 힘입어서, 강유원 게시판은 그럭저럭 책에 대해 물어보고 대학원 진학에 대해 상담하며 '철학 공부하면 먹고 살 수 있나요?'라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은 그런 공간으로 남아있기는 하다.
그 균형이 위태롭게 느껴지는 것은, 애초에 강유원이 설정하고 있던 모두스 비벤디가 현실과 맞아떨어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은둔고수'는 허구의 개념이며, 설령 그런 누군가가 존재하고 있다면 이 자본주의 세상은 그런 인재를 반드시 수면 위로 끌어올려내고야 만다. 스타크래프트 연습생들은 모두 인터넷 고수이며, 그중에서도 가장 센 놈만이 남아서 프로가 되는 것이 그 바닥의 생리이듯이 말이다. 헌데 강유원은 그 길을 택했고, 놀랍게도 혹은 당연하게도, 상당한 수의 대중들이 그의 그러한 행보에 갈채와 찬사와 동경의 눈빛을 보냈다.
강유원은, 자신을 지지하던 사람들 중 상당수가, 진정 인문학을 소비하고 있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빨리 깨달았어야 한다. 그들은 다만 현실 속에서 '은둔고수'가 현현하기를 고대하고 있던 뒤틀린 무협지 매니아였을 뿐이다. 헌데 그 이미지는 서사의 논리만을 따지고 보더라도 잘못된 것이어서, 그가 진정 '내공'을 쌓기에 적합한 처지가 되자 자체적인 모순에 의해 허물어지고 말았다. 이 모든 이야기의 대상은 결국 강유원 개인이었지만, 내가 그에 대해 아는 바는 그의 책과 홈페이지와 게시판에서 나온 것 뿐이기에, 글 제목을 '강유원 게시판의 비극'으로 하기로 한다.
아무튼 강유원 게시판은 예전같지 않고, 그 배경에는 운영자의 카리스마 쇠퇴가 가장 큰 이유로 자리잡고 있다. 그가 회사에 다니던 시절에는 이렇지 않았다(고 나는 기억한다). 어설프게 '나만의 철학'을 풀어놓으려는 자들에게 강유원은 자신있는 어조로 '공부가 안 되었군,' 이라고 운을 뗄 수 있었고, 그러면 그의 동료들이 나서서 '이러저러한 책들을 먼저 읽어봐라'라고 마무리를 해줬다. 말하자면 그가 어떤 '선생'으로서의 권위를 한껏 누리고 있었다는 뜻인데, 여기서 한가지 이상한 점은 대체 왜 회사에 다니고 있다는 것이 '선생'으로서의 권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느냐 하는 것이다.
가만히 따지고 보면 진실로 그렇다. 강의와 인세 수입(이라는 게 있다면)만으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지금, 그는 굳이 밤잠을 쪼개가며 책을 읽을 필요 없이, 하루를 온전히 투자하여 공부하고 공부하고 또 공부할 수 있다. 책을 들여다보는 양과 가르치는 내용의 질이 정비례까지는 아니어도 대충 비슷하게 따라간다고 가정하면, 그가 공부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남에게 가르쳐주는 것들 또한 양적으로 또 질적으로 풍성해져야 마땅하며, 그러한 변화는 대중에게 철학을 강의하는 그의 '선생'으로서의 입지를 강화시켜야 마땅한 것 아닌가? 헌데 상황은 그 반대다. '회사원 철학자'라는 수식어에서 '회사원'이라는 명사 하나가 떨어져나간 순간, 강유원의 아우라 중 매우 중요하고 커다란 것이 함께 사라져버렸다.
강유원이 회사에 다니고 있었던 것은, 그가 기존 '학계'의 논리에 저항하고 있다는 것, 금전적으로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동시에 뜻했고, 그리하여 그는 '독립된 지식인' 중 하나로 간주될 수 있었다. 나는 지금 이러한 셈법이 부당하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자기 손으로 벌어서 먹고 사는 것은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할 중요한 미덕이며, 직업으로서의 학문을 택하지 않으면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기 위해 그가 벌였던 숱한 고행의 의의를 폄하할 생각도 전혀 없다. 다만 한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회사원 철학자'라는 수식어를 달고 그가 누리고 있던 특수한 아우리가 과연 그 자체로서 한국의 문화적 맥락을 고려하여 볼 때 합당한 것이었나 하는 것이다.
대학에서 돈을 받으며 연구하는 것, 꾸준히 논문을 써 내고 동시대의 학자들을 평가하고 그들의 일부로서 살아가는 것, 아카데미즘의 본질이라면 본질을 구성하는 이러한 요소들을 폄하하는 것이 '회사원 강박사'의 이미지를 구성하는 중요한 부분 중 하나였고, 그렇기에 그는 보란듯이 철학과 무관한 일을 하면서 밥벌이를 해왔다. 간단하게 줄여 말하자면 일종의 '은둔고수' 같은 아우라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회사에 다님으로써 그는 아직도 공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직장인들의 호감을 사는데도 성공했다. 사람은 자신이 도저히 못할 것 같은 일, 다시 말해 질투를 하기에는 너무 어렵거나 그럴 가치가 없어보이는 일을 하는 누군가를 봤을 때에는, 대체로 사심 없는 칭찬을 보내는 법이다. 이 두가지 맥락이 맞물려 강유원은 나름대로 (책을 사서 읽는) 대중들 사이에서 하나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여기서 요점은 그가 철학을 공부한다는 것이 아니다. 철학 공부를 하면서도 학계에 소속되어 있지 않다는 것, 오직 그것만이 대중들에게는 감동이었고 카리스마였고 '포스'의 근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 분위기 자체가 정당한 것일까? 내가 추측하는 바와 같이, 강유원의 책을 구매하던 대중들이 '회사원 철학자'의 이미지를 먼저 소비하고 있었다고 가정해보자. 철학자가 어떤 아이콘으로 자리잡는 건 절대 나쁜 일이 아니지만, 과연 그 '회사원 철학자'라는 딱지는 정당한 것일까?
이 질문은 이렇게 되물어질 될 수 있다. 과연 철학이라는 분야에서는 '은둔고수'가 성립할 수 있는 것일까? 자기들끼리 '빨아주는' 논문을 쓰는 대신, 몇 달이고 몇 년이고 헤겔 원문만을 파고 있다보면, 자본주의 사회를 바라보는 근본적인 시선을 얻을 수 있는 것일까? 강유원이 '내가 공부하는 방법'에서 제시하고 이후 자신의 삶에서 지속적으로 실천해나간 모두스 비벤디modus vivendi에는, 이렇듯 무협지의 내적 논리가 진하게 묻어나있다. 강호 잡사에 물들지 않고 오직 무공 한 길에만 정진하면, 아무도 알아주지 못하더라도 호탕한 웃음 한 번 짓고 스러질 수 있다는, 일종의 자뻑이며 자학인 그런 종류의 존재미학.
다른 부분을 다 접어두더라도, 그런 방식은 근대 학문의 기본 정신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과학이건 철학이건, 그 학문이 대상으로 삼는 데이터(박홍규 식으로 말하자면)에 대해 자유롭게 연구하고 발언하는 것이 근대 학문의 정신이라면, 공부하는 이는 마땅히 다른 학생들 사이에서 그들과 소통해 나가야 한다. 그러나 강유원은 학계에서 떨어져나간 후 홀로 외로이 헤겔을 읽는 길을 택함으로써, '뭔가 센 놈'과 독고다이를 뜨고 싶다는 자신의 말초적인 욕구를 충족시켰을지언정, '공부'를 하고 싶다는 더욱 근원적인 바램은 접어두게 된 것이다.
결국 지금 나는 그가 하는 일이 '공부'가 아닐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있다. 헤겔을 읽어도 토론을 할 수가 없고, 서평을 쓰면 '잘 봤습니다'라는 리플성 트랙백만이 달리는 현실. 강호에서 발을 빼면서 그는 시골 마을에서 검을 가르치며 독야청정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 누구와도 시원한 칼부림을 주고받을 수는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무협지의 세계에서는 혼자 폭포수 옆에서 서른 여섯가지 자세를 잡고 운기조식을 하면 '내공'이 늘어나지만, 그런 일은 현실 속에서 가능하지 않다. 혼자 산 속에서 무공을 연마하던 '고수'들이, 다른 동료들과 투닥거리며 질펀하게 연습을 하던 '스포츠맨'들에게 줄줄이 얻어터지고 깨어져나갔다는 것은 이종격투기 'K-1'의 역사가 처절하게 증명하는 바와 같다.
아무튼 그가 화전을 일구고 있던 동안에는 '강호'와 동떨어져 있다는 사실이 명백했고, 그리하여 '은둔고수'의 품위도 유지될 수 있었다. 문제는 그가 회사를 그만두면서 전업 지식인, 혹은 강사가 되어버렸다는 것이고, 즉 '나 철학자 아니야. 그저 책을 좋아하는 회사원일 뿐이지, 허허허'라는 말을 할 수가 없게 됨으로써 자신이 가지고 있던 포스를 잃어버리자, 여태까지는 범접하지도 못하고 있던 다른 '재야'들이 칼을 빼들고 기회를 노리며 달려들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하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품위가 있는, 적어도 '가오'를 잃어버리지 않는 법은 아는 사람이고, 그 게시판의 분위기를 사랑하는 다른 사용자들의 자발적인 노력에도 힘입어서, 강유원 게시판은 그럭저럭 책에 대해 물어보고 대학원 진학에 대해 상담하며 '철학 공부하면 먹고 살 수 있나요?'라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은 그런 공간으로 남아있기는 하다.
그 균형이 위태롭게 느껴지는 것은, 애초에 강유원이 설정하고 있던 모두스 비벤디가 현실과 맞아떨어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은둔고수'는 허구의 개념이며, 설령 그런 누군가가 존재하고 있다면 이 자본주의 세상은 그런 인재를 반드시 수면 위로 끌어올려내고야 만다. 스타크래프트 연습생들은 모두 인터넷 고수이며, 그중에서도 가장 센 놈만이 남아서 프로가 되는 것이 그 바닥의 생리이듯이 말이다. 헌데 강유원은 그 길을 택했고, 놀랍게도 혹은 당연하게도, 상당한 수의 대중들이 그의 그러한 행보에 갈채와 찬사와 동경의 눈빛을 보냈다.
강유원은, 자신을 지지하던 사람들 중 상당수가, 진정 인문학을 소비하고 있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빨리 깨달았어야 한다. 그들은 다만 현실 속에서 '은둔고수'가 현현하기를 고대하고 있던 뒤틀린 무협지 매니아였을 뿐이다. 헌데 그 이미지는 서사의 논리만을 따지고 보더라도 잘못된 것이어서, 그가 진정 '내공'을 쌓기에 적합한 처지가 되자 자체적인 모순에 의해 허물어지고 말았다. 이 모든 이야기의 대상은 결국 강유원 개인이었지만, 내가 그에 대해 아는 바는 그의 책과 홈페이지와 게시판에서 나온 것 뿐이기에, 글 제목을 '강유원 게시판의 비극'으로 하기로 한다.
2007-03-12
CNN 더빙 방송에 찬성한다
왜냐하면, '미국인이 되고 싶어 환장한 컴플렉스 덩어리 한국인들이 미국님들의 시각이 이러저러하리라 추측하며 찍어내는 엉터리 국제 뉴스'가 판치는 국내 언론계에 큰 위기이자 활력 요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거면 충분하지 않은가?
2007-03-09
'서민'들과 중산층의 동반 몰락 가능성 - 경향신문, 2007. 03. 09.
저소득 주택대출자 집값 급락땐 ‘직격탄’
입력: 2007년 03월 08일 18:08:40
앞으로 집값이 급락세를 보이면 월평균 소득 150만원 미만의 저소득 가구가 다른 소득 계층에 비해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8일 국민은행 연구소의 ‘2006 주택금융실태조사 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월 평균 소득 150만원 미만 저소득 가구 가운데 월 소득 대비 주택구입자금 대출 상환액 비율(PTI)이 40%를 넘는 가구는 전체의 53.5%로 나타났다. 이는 월평균 150만원을 벌어 60만원 이상을 주택담보대출 원리금을 갚는 데 쓰는 가구가 절반을 넘었다는 뜻이다.
월 평균 소득 150만원 미만인 가구 중에서 PTI가 40%를 넘는 비율은 2002년 15.7%에 불과했으나 2003년 19.0%에서 2005년 39.5%로 높아지는 등 매년 급등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조사 기준일(지난해 10월13일) 이후 주택담보대출 기준금리인 양도성 예금증서(CD) 금리가 연 4.57%에서 4.96%로 0.39%포인트 오른 것을 감안할 때 저소득 가구 부채상환 부담은 가중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국민은행 연구소 관계자는 “월 평균 소득 150만원 미만 가구는 다른 소득계층에 비해 PTI 40%를 넘어선 가구의 비율이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며 “집값 하락으로 담보가치가 떨어지거나 주택담보대출 금리가 추가로 상승하면 월평균 소득 150만원 미만 가구를 중심으로 부채를 감당하지 못하는 사례가 속출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다른 소득계층에서는 PTI가 40%를 넘는 비중이 한 자릿수에 그쳤고, 연도별 증가폭도 크지 않았다.
미국·일본·영국 등에서는 연간소득 대비 부채상환비율을 나타내는 총부채상환비율(DTI)을 35~40%로 규제하고 있다.
국내 시중은행들도 지난 2일부터 투기지역이나 수도권 투기과열지구에서 1억원 넘는 대출을 취급할 때 DTI 40%를 적용하고 있다.
금융감독원 김성화 은행감독국장은 “금융기관의 대출관행을 담보가치에서 대출자의 채무상환 능력 위주로 바꿔나가는 제도가 정착될 수 있도록 감독을 강화해나갈 방침”이라고 말했다.
〈이상주기자 sjlee@kyunghyang.com〉
-PTI-
최근 3년간 금융기관으로부터 주택구입자금을 빌린 가구의 월평균 소득 대비 상환액 비율. 주택담보대출 규제 수단으로 사용되는 총부채상환비율(DTI)이 주택담보대출뿐 아니라 모든 부채를 포함한 개념인 반면 PTI는 주택담보대출 원리금 상환액에만 초점을 맞춘 것이 특징이다.
이 기사에서 시사하는 바에 따르면, 중산층을 지향하는 저소득 계층이 바로 서민인데, 따라서 그들은 노동계급으로서의 연대를 통한 사회복지를 누리지 못하며, 동시에 중산층이 보유하고 있는 자기 자산의 안정성 또한 확보하고 있지 못한 사람들이다. 대체 월소득 150만원이 안 되면서 빚을 내어 집을 살 생각을 할 수 있는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는 뜻이다. 철 없는 소리 함부로 한다고 욕 먹기 딱 좋지만, 정말이지 지금 당장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자 중 일부 극성적인 치들은, 강남 집값을 얼음물 퍼붓듯이 냉각시키면 주택 매매가가 폭락하여 서민층이 내집마련을 하기에는 더 좋은 상황이 형성될 수 있다는 헛소리를 하곤 하는데, 참고로 저 말은 이론상으로는 옳은 소리이긴 하나, 그건 한국 '서민'들이 어떤 행동 패턴을 보이는지에 대한 관찰을 전혀 하지 않고 그저 내뱉는 소리에 불과하니 그저 무시해야 마땅할 터이다.)
입력: 2007년 03월 08일 18:08:40
앞으로 집값이 급락세를 보이면 월평균 소득 150만원 미만의 저소득 가구가 다른 소득 계층에 비해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8일 국민은행 연구소의 ‘2006 주택금융실태조사 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월 평균 소득 150만원 미만 저소득 가구 가운데 월 소득 대비 주택구입자금 대출 상환액 비율(PTI)이 40%를 넘는 가구는 전체의 53.5%로 나타났다. 이는 월평균 150만원을 벌어 60만원 이상을 주택담보대출 원리금을 갚는 데 쓰는 가구가 절반을 넘었다는 뜻이다.
월 평균 소득 150만원 미만인 가구 중에서 PTI가 40%를 넘는 비율은 2002년 15.7%에 불과했으나 2003년 19.0%에서 2005년 39.5%로 높아지는 등 매년 급등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조사 기준일(지난해 10월13일) 이후 주택담보대출 기준금리인 양도성 예금증서(CD) 금리가 연 4.57%에서 4.96%로 0.39%포인트 오른 것을 감안할 때 저소득 가구 부채상환 부담은 가중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국민은행 연구소 관계자는 “월 평균 소득 150만원 미만 가구는 다른 소득계층에 비해 PTI 40%를 넘어선 가구의 비율이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며 “집값 하락으로 담보가치가 떨어지거나 주택담보대출 금리가 추가로 상승하면 월평균 소득 150만원 미만 가구를 중심으로 부채를 감당하지 못하는 사례가 속출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다른 소득계층에서는 PTI가 40%를 넘는 비중이 한 자릿수에 그쳤고, 연도별 증가폭도 크지 않았다.
미국·일본·영국 등에서는 연간소득 대비 부채상환비율을 나타내는 총부채상환비율(DTI)을 35~40%로 규제하고 있다.
국내 시중은행들도 지난 2일부터 투기지역이나 수도권 투기과열지구에서 1억원 넘는 대출을 취급할 때 DTI 40%를 적용하고 있다.
금융감독원 김성화 은행감독국장은 “금융기관의 대출관행을 담보가치에서 대출자의 채무상환 능력 위주로 바꿔나가는 제도가 정착될 수 있도록 감독을 강화해나갈 방침”이라고 말했다.
〈이상주기자 sjlee@kyunghyang.com〉
-PTI-
최근 3년간 금융기관으로부터 주택구입자금을 빌린 가구의 월평균 소득 대비 상환액 비율. 주택담보대출 규제 수단으로 사용되는 총부채상환비율(DTI)이 주택담보대출뿐 아니라 모든 부채를 포함한 개념인 반면 PTI는 주택담보대출 원리금 상환액에만 초점을 맞춘 것이 특징이다.
이 기사에서 시사하는 바에 따르면, 중산층을 지향하는 저소득 계층이 바로 서민인데, 따라서 그들은 노동계급으로서의 연대를 통한 사회복지를 누리지 못하며, 동시에 중산층이 보유하고 있는 자기 자산의 안정성 또한 확보하고 있지 못한 사람들이다. 대체 월소득 150만원이 안 되면서 빚을 내어 집을 살 생각을 할 수 있는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는 뜻이다. 철 없는 소리 함부로 한다고 욕 먹기 딱 좋지만, 정말이지 지금 당장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자 중 일부 극성적인 치들은, 강남 집값을 얼음물 퍼붓듯이 냉각시키면 주택 매매가가 폭락하여 서민층이 내집마련을 하기에는 더 좋은 상황이 형성될 수 있다는 헛소리를 하곤 하는데, 참고로 저 말은 이론상으로는 옳은 소리이긴 하나, 그건 한국 '서민'들이 어떤 행동 패턴을 보이는지에 대한 관찰을 전혀 하지 않고 그저 내뱉는 소리에 불과하니 그저 무시해야 마땅할 터이다.)
2007-03-01
샤워실의 얼간이
통화주의자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은, 거시경제적 효과를 노리는 정부의 경기부양 긴축 정책이 실제 효과를 거두려면 어느 정도의 시차를 감안해야 한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샤워실에서 물을 틀면 처음에는 아무튼 찬 물이 나온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자신이 원하는 온도의 뜨거운 물이 나올때까지 한 발 물러서서 기다릴 것이다. 하지만 샤워실의 얼간이, 즉 정부는, 그 순간 '앗 차가워!' 라며 황급히 뜨거운 물이 나오는 수도꼭지를 필요 이상으로 확 틀어버린다. 다음 순간 그 얼간이는 '으악 뜨거워!' 라며 뜨거운 물 벨브를 꽉 잠그고 얼른 찬물을 튼다. 정책이 실행되는 순간과 그것이 효과를 발휘하는 시점까지는 어느 정도 시차가 존재할 수밖에 없지만, 그 효과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으면 언제나 두 극단 사이에서 오갈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대통령 임기와 국회의원 선거 기간을 맞추자는, 이른바 '4+4년제 원포인트' 개헌론은, 국민을 '샤워실의 얼간이'로 만들어버릴 공산이 크다. 혹자는 이렇게 되물을 수도 있다. 오히려 대통령의 연임이 가능해지니 정책을 장기적으로 수행할 수 있지 않느냐고. 그 반박의 문제점은,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의 주기를 맞춰버리는 것이 어떤 효과를 불러오는지에 대해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다는 데에 있다.
많은 경우 선거는 일종의 분위기를 타고 이루어지기 때문에, 지금 논의되는 '원포인트 개헌'이 이루어질 경우, 대체로 여당은 원내 제1당이 되고 과반수 이상의 의석을 획득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정책을 내키는 대로 수행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비판의 대상이 되면, 여당이 정권을 잃는 것은 물론이고 원내 제1당도 같은 해에 같은 분위기에 휩쓸려 떠내려가게 된다. 그러면 기존의 여당의 정책에 반대하던, 대립각을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강력한 레토릭을 구사하며 정 반대되는 정책을 입안하던 야당이 여당이 되고, 또 원내 제1당이 된다. 그렇게 집권하게 된 정당은 스스로의 입지가 불안하다는 사실을 늘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단기적으로 성과를 거둠으로써 4년 후 선거에서 자랑스럽게 내밀 수 있을만한 정책에 자신들의 자원을 주로 할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4+4년제 원포인트 개헌을 하면, 그 순간부터 모든 정책은 4년 후의 결과에만 초점을 맞추어 입안될 수밖에 없다. 극도로 근시안적이고 불안정한 정국이 반복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이 개헌론은 철저하게 정치 중독자들을 위한 것이다. 선거 한 방에 나라가 뒤흔들리고, 그런 일이 4년 주기로 반복된다고 해보자. 당신이 선거의 맛에 중독된 사람이라면 이 제안을 매력적인 것으로 느낄 것이다. 4년에 한번씩 국가의 운명을 건 큰 싸움이 벌어진다는 것과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즉, 노 대통령 지지자들이 말하는 식의 '참여'를 적어도 4년에 한번씩은 할 수 있게 된다. 물론 그 참여의 개념과 그것이 이루어지는 방식 등은 모두 전혀 건강한 것이 아니다. 국민이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주기가 짧아진다는 점에서 직접민주주의나 참여민주주의의 이상에 부합한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없잖아 있겠지만, 국민의 정치 참여가 선거에 의존하는 정도가 높아질수록, 선거 기간이 아닐 경우 국민들의 정치적 기본권은 백안시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도외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현재 논의되는 '원포인트' 개헌론에 찬성하는 사람은, 자신이 선거철만 되면 지나치게 흥분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래서 빨리 대선 시기가 왔으면 하고 손꼽아 기다리고 있지는 않은지 곰곰히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극도로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을 번갈아 뒤집어써가며 스스로를 대상으로 하는 가학적인, 또 피학적인 쾌감을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문해보자는 말이다. 자신이 중독자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중독 치료의 시작이자 절반이다.
대통령 임기와 국회의원 선거 기간을 맞추자는, 이른바 '4+4년제 원포인트' 개헌론은, 국민을 '샤워실의 얼간이'로 만들어버릴 공산이 크다. 혹자는 이렇게 되물을 수도 있다. 오히려 대통령의 연임이 가능해지니 정책을 장기적으로 수행할 수 있지 않느냐고. 그 반박의 문제점은,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의 주기를 맞춰버리는 것이 어떤 효과를 불러오는지에 대해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다는 데에 있다.
많은 경우 선거는 일종의 분위기를 타고 이루어지기 때문에, 지금 논의되는 '원포인트 개헌'이 이루어질 경우, 대체로 여당은 원내 제1당이 되고 과반수 이상의 의석을 획득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정책을 내키는 대로 수행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비판의 대상이 되면, 여당이 정권을 잃는 것은 물론이고 원내 제1당도 같은 해에 같은 분위기에 휩쓸려 떠내려가게 된다. 그러면 기존의 여당의 정책에 반대하던, 대립각을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강력한 레토릭을 구사하며 정 반대되는 정책을 입안하던 야당이 여당이 되고, 또 원내 제1당이 된다. 그렇게 집권하게 된 정당은 스스로의 입지가 불안하다는 사실을 늘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단기적으로 성과를 거둠으로써 4년 후 선거에서 자랑스럽게 내밀 수 있을만한 정책에 자신들의 자원을 주로 할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4+4년제 원포인트 개헌을 하면, 그 순간부터 모든 정책은 4년 후의 결과에만 초점을 맞추어 입안될 수밖에 없다. 극도로 근시안적이고 불안정한 정국이 반복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이 개헌론은 철저하게 정치 중독자들을 위한 것이다. 선거 한 방에 나라가 뒤흔들리고, 그런 일이 4년 주기로 반복된다고 해보자. 당신이 선거의 맛에 중독된 사람이라면 이 제안을 매력적인 것으로 느낄 것이다. 4년에 한번씩 국가의 운명을 건 큰 싸움이 벌어진다는 것과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즉, 노 대통령 지지자들이 말하는 식의 '참여'를 적어도 4년에 한번씩은 할 수 있게 된다. 물론 그 참여의 개념과 그것이 이루어지는 방식 등은 모두 전혀 건강한 것이 아니다. 국민이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주기가 짧아진다는 점에서 직접민주주의나 참여민주주의의 이상에 부합한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없잖아 있겠지만, 국민의 정치 참여가 선거에 의존하는 정도가 높아질수록, 선거 기간이 아닐 경우 국민들의 정치적 기본권은 백안시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도외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현재 논의되는 '원포인트' 개헌론에 찬성하는 사람은, 자신이 선거철만 되면 지나치게 흥분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래서 빨리 대선 시기가 왔으면 하고 손꼽아 기다리고 있지는 않은지 곰곰히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극도로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을 번갈아 뒤집어써가며 스스로를 대상으로 하는 가학적인, 또 피학적인 쾌감을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문해보자는 말이다. 자신이 중독자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중독 치료의 시작이자 절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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