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1-10

헤겔의 법철학 강요에 대한 예전 노트

한윤형의 블로그이러한 게시물이 올라왔다. 진보누리 누리카페에 올렸던 기억이 난다. 당시는 플라톤의 《국가》를 열심히 읽던 시절이기도 했고, 동시에 이런저런 '사유'를 하고 있다고 스스로 착각하고 있던 때이기도 하다. 아무튼 그 글에서 등장하는 '빛의 비유'의 근원을 알고 싶으신 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니 그냥 솔직히 말하면 옛날에 쓴 기록을 왠지 공개해보고 싶어서, 관련된 노트를 옮겨 적어 게재한다. 자신이 몇 페이지에서 글을 인용하고 있는지에 대한 언급도 없고, 자기 생각과 저자의 생각을 마구 뒤섞에서 독서 노트를 작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성실했던 것 같긴 하지만 좌충우돌하던 시절이었다. 해당 게시물은 내 블로그로 옮겨졌다.

법철학 강요

2002. 12.12. 18:38

* 헤겔에게 '개념'은 자기발광체이다.

* 헤겔과 칸트에게 '이성'이라는 것은 빛의 이미지를 진하게 지닌다. 헤겔만 놓고 보면, 즉자적인 것은 스스로를 이성의 빛으로 비춘다는 뜻이고, 대자적인 것은 다른 이성의 빛이 반사되어 비춰진다는 뜻이다. 하긴 계몽 자체가 enlighten 이니.

"현존재와 개념, 육체와 영혼 - 이 일치성이 이념이다."

"의지는 어떤 특수한 방법의 사유이다. 즉, 사유가 자기를 현존재로 번역하는 방법, 자기에게 현존재를 주려고 하는 충동으로서의 사유인 것이다."

"(α) 의지는 자아의 전혀 무엇이라고도 정해져 있지 않은 순수한 무규정성, 즉 오로지 자기의 속에 반절하는 순수한 자기반성이라는 요소를 내포한다.
"(β) 자아는 또한 구별이 없는 무규정성으로부터 구별 세우기에의 이행이고 규정하는 것에의, 그리하여 어떤 규정된 자세를 내용과 대상으로서 정립하는 것에의 이행이다. - 그리고 이 내용은 자연에 의해 주어진 것으로서이든 정신의 개념에서 비롯된 것으로서이든 상관없다.
"(γ) 의지는 이 (α)와 (β)의 양 계기의 일체성이다. 말하자면 특수성이 그 속에 절반(折返)되고 이 일에 의해 보편성으로 환원된 자세, 즉 개별성인 것이다."

* "자아는 이렇듯 자기 자신을 어떠한 규정된 것으로서 정립하는 것에 의해 현존재 일반 속에 들어간다. - 이것이 자아의 유한성 혹은 특수화라는 절대적 계기이다."

* "개념의 운동원리는 보편적인 것이 특수화된 온갖 자세를 단지 해소할 뿐만 아니라 산출하기도 하는 것으로서, 나는 이를 「변증법」이라고 부른다."

* 현존재와 개념의 인과성, 즉, 지금 한창 논의되고 있는 심물논변의 문제가 여기서도 고스란히 발견된다. 맑스는 현존재와 개념의 인과성에서, 헤겔이 잠정적으로 개념의 손을 들어준 것에 반발한 것 같다.

* 자신을 비추는 개념 - 거울 두 장을 마주보게 하여 그 안에서 빛이 무한반사하는 장면을 상상할 것.

* 개념도 서사의 지배를 받고, 현존재로서의 육체도 서사의 지배를 받는다.

* 이성과 서사의 차이 - 이성은 인간의 도구인데 [반해] 서사는 인간의 환경(nature)이다. 인간이 서사대로 행한다고 할 때, 본성을 따라 들판을 질주하는 야생마의 자유분방함을 연상해서는 안된다. 이성의 손전등을 인간이 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서사의 태양이 인간의 대지 위에 떠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더 자유롭다.

2008-01-07

2008년 1월 7일

FP의 편집 마감이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다. 내일 밤까지 2차 교정을 마무리짓고 미국에 파일을 보내서 토요일까지 출판 승낙이 오게 하고 싶다. 일하기는 싫고 월급은 받고 싶은 이 모순된 심리상태를 극복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한다.

사무실에서 나와 잠시 친구와 차를 마신 후 그를 집에 데려다주러 갔다가 겪은 일에 대하여. 아파트 주민이 '너희들 여기서 나가'라고 소리지르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다. 마치 아파트 앞뜰이 자신의 정원이라도 되는 양 말하는 것이 아닌가(1층에 사니까 자신이 그런 소리 할 수 있다고 우겼지만, 8층에 산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것과는 별개로 그냥 말 자체가 말이 안 된다). 목소리를 높이면 동네 사람들이 깨니까, 나름대로 조용하게 아주머니 집에 들어가시라고 권유를 했는데, 남편이라는 자가 나와서 시위하는 것을 보고 더욱 기가 막혔다. 그 치들을 곱게 들여보내고, 분노하고 있던 그를 달랜 후 집으로 향했다.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잠시 통화를 한 후, 역에서 집까지 걸어오는 길에 발레리 줄레조의 《아파트 공화국》의 내용을 곱씹었다. 이 책이 애초의 기대만큼의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지 못한 것은, 한국인들이 왜 아파트를 이렇게까지 선호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역사적 해석에 다소 무리가 있었을 뿐 아니라, 지금 불어닥치고 있는 아파트 열풍이 가지고 있는 사회심리적인 성격에 대한 고찰이 전무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겪은 사례에서 알 수 있다시피, 가진 것이라고는 달랑 아파트 한 채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희망이요 빛이며 구원으로 향하는 유일한 사다리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의 '영역'을 현관 밖으로, 심지어는 단지 전부로 확장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그렇기에 '더 넓은 평수' 혹은 '더 높은 층수'에 사는 누군가에게 야코가 죽는 일을 죽기보다 싫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심리를 좀 더 해설하자면 다음과 같다. 만약 모든 아파트 단지에 사는 사람들이 그 단지 전체를 자신의 영역으로 간주하고 있다고 쳐보자. 그렇다면 아파트 단지는, 주민의 숫자를 n이라고 할 때 n만큼의 행위자가 동시에 영역으로 삼고 있는 전쟁터인데, 이는 최악의 경우 (n+1)!/2, 즉 {(n+1)*n*(n-1)*(n-2)* . . . 1}/2 만큼의 갈등이 발생할 수 있다는 뜻이다(아파트 단지에서 싸움이 괜히 많이 나는 게 아니다. 이렇듯 수학적으로도 증명 가능하지 않은가).

따라서 자신이 어떤 아파트의 주민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지면 가질수록 정서는 황폐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아파트에 산다는 사실이 자랑인 사람은 그것 외에는 별다른 자랑거리나 즐길거리가 없는 사람이므로, 있는 재산을 다 털어서 아파트 한 채 사놓고 버티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한국사회는 정서적으로 각박해지고 문화적으로 천박해지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그 수렁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은 아파트 가격이 올라 더 높은 평수와 층수로 올라가는 것 뿐이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볼 때, 아파트 가격이 오르면 나 말고도 수천 명의 사람들이 같은 이득을 누리게 되므로, 자신의 상대적인 지위가 적어도 그 단지 내에서 올라갈 수는 없다. 대치동 은마아파트에 살고 있다면, 물론 다른 듣보잡 아파트에 사는 사람에 비하면야 떼돈을 번 것이지만, 자신보다 더 큰 평수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더 큰 이익을 보는 사람과 스스로를 견주어본다면 배고픔보다 더욱 지독한 배아픔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단 하나의 주택만을 가지고 있는 자가 그것의 가격 상승을 통해 상대적 박탈감을 이겨낸다는 것은,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불가능하다. 문제는, 역시 다들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이론과 논리의 바깥에 설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는 것이다.

다시 FP로 돌아와보자. 교정을 위해 원고를 읽고 또 읽는다. 번역도 하는데, 하면서 나의 한국어 어휘가 그다지 풍부하지 않다는 것을 절감한다. 양놈들이라고 다들 잘나서 그러는 건 아니고 유의어사전, 말하자면 Thesaurus가 있기 때문에 그 도움을 받는데, 한국어에서 그러한 종류의 것은 오직 《비슷한말 반대말 사전》뿐이다. 그나마 어휘가 한자어 중심으로 짜여져 있고 표제어가 그리 많지 않다. 일단 알라딘 보관함에 넣었는데 언제 구입하게 될지는 잘 모르겠다. 사전과 관련해서는 이 마이리스트가 괜찮은 것 같다.

자기 전에 조금이라도 운동을 하고 또 교정지를 훑어야겠다. 돈이 너무 없던 시절 늘 염원하던 그 물건, 캐틀벨을 드디어 집에 들여놓았다. 오늘 오전에는 트레이너 레벨 캡악력기도 왔는데, 다섯 번을 넘기면 그때부터 힘이 달린다. 한 손에 스무 개씩 쉬지 않고 할 수 있게 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스트레스를 풀 겸 좀 더 하다가 자야겠다.

2008-01-04

2008년 1월 3일

1월 3일에 읽은 것들에 대해 적어놓을 것들이 있었는데, 밤에 딴짓하느라 그러지 못했다. 하루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올려놓는다.

회사로 오가는 지하철에서 로마서를 7장부터 끝까지 다 읽었다. "율법과 죄와 죽음"이라는 소제목으로 편집되어 있는 7장 7절 이하가 로마서의 절정이라고 생각한다. 이 대목에서 사도 바오로가 보여주는 내적인 반성, 철저하고도 치밀한 고찰, 광기어린 죄의식에의 몰입과 그것을 신앙심으로 극복하며 육체에 죄를 떠넘기기까지의 과정은, 몇 권의 책으로 주석을 붙여도 모자랄만큼 문제적이다. 모든 프로테스탄트 신학이 로마서의 독해에서 출발했다는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다.

7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율법이 죄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없었다면 나는 죄를 몰랐을 것입니다. 율법에서 “탐내서는 안 된다.”고 하지 않았으면 나는 탐욕을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8 이 계명을 빌미로 죄가 내 안에 온갖 탐욕을 일으켜 놓았습니다. 사실 율법과 상관이 없을 경우 죄는 죽은 것입니다.
9 전에는 내가 율법과 상관없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계명이 들어오자 죄는 살아나고
10 나는 죽었습니다. 그래서 생명으로 이끌어야 하는 계명이 나에게는 죽음으로 이끄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11 죄가 계명을 빌미로 나를 속이고 또 그것으로 나를 죽인 것입니다.
12 그러나 율법은 거룩합니다. 계명도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입니다.
13 그렇다면 그 선한 것이 나에게는 죽음이 되었다는 말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가 그 선한 것을 통하여 나에게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죄가 죄로 드러나게, 죄가 계명을 통하여 철저히 죄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14 우리가 알고 있듯이 율법은 영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육적인 존재, 죄의 종으로 팔린 몸입니다.
15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
16 그런데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한다면, 이는 율법이 좋다는 사실을 내가 인정하는 것입니다.
17 그렇다면 이제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죄입니다.
18 사실 내 안에, 곧 내 육 안에 선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음을 나는 압니다.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
19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20 그래서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하면, 그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은 죄입니다.
21 여기에서 나는 법칙을 발견합니다. 내가 좋은 것을 하기를 바라는데도 악이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22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23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24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나 자신이 이성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섬기지만, 육으로는 죄의 법을 섬깁니다.


FP 편집 마감이 끝나지 않았지만, 《드라마틱》에서 맡긴 포커스 원고가 더 급했다. 〈이 바보야, 진짜 경제가 문제야? - 서울 아빠들의 경제 인질극과 신 지역주의〉라는 제목으로,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만든 서울 유권자들의 '경제주의'에 대해 비판하는 글을 썼다. 제목이 어떻게 바뀔지는 알 수 없지만, 오늘 이 시간까지 내용에 대한 언급이 없는 걸 보면 그대로 통과될 모양이다. 전문을 공개할 수는 없고, 주요 단락과 문장을 인용한 후, 기사에서 못다한 내용을 설명하도록 하겠다.

. . . 요컨대 이명박의 대통령 당선을 마땅찮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개발독재 경제성장 이데올로기에 휘둘리는 어리석은 대중들이 한국에 존재하고 있고, 그들이 이명박에게 몰표를 주었다고 가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아니 그 전에 게으른 생각이다. 선거결과를 논하고 그 이유를 탐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역별 득표율과 그 현황을 짚어보는 일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이번 선거에서 그에게 몰표를 몰아준 집단은 경상도에 사는 6~70대 노인들이 아닌, 서울에 사는 4~50대 남성들이다. . .

. . . 전국에 꾸준히 아파트를 짓고 분양가를 높이는 정책은, 사실상 서울시민 중 집 가진 사람들만을 위한, 또 하나의 지역주의이다. . .

. . . 앞으로도 인구가 늘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는 강원도 태백시에도 십층이 넘는 아파트가 여러 단지 건설되고 있다. 대체 거기 누가 들어가서 살 것인가? 분양되지 않아 결국 버려지게 되는 폐건물들은 그 자체로서 범죄의 온상이 되며 주변 환경에 악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서울에 살고 있는 은찬이 아빠에게 그것이 대체 무슨 상관인가? 우리 아들 학원비 내느라 허리가 휘는 와중이니, 일단 내 집값부터 확실하게 올리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 . .

. . . 문제는 이들의 지역주의가, 기존의 그것과는 다르게,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을 발전시키기는커녕 그 속에서 주식이나 펀드나 아파트로 크게 한탕 친 다음 해외로 이민을 가겠다는 투전꾼 같은 발상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 잠시 등장한 서울 사는 은찬이 아빠의 경우를 다시 한 번 떠올려보자. ‘기러기아빠’니 뭐니 하는 미사여구로 자신들의 행위를 포장하고 있지만,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자녀가 대한민국 내에서 상위 계층에 올라갈 수 있도록, 혹은 대한민국을 떠나버릴 수 있는 기반을 갖출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러한 삐뚤어진 교육열을 올리고 있다. . .

. . . 지역주의의 시대가 끝났다고 함부로 단언하는 것이 위험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경제’를 테마로 놓고 움직이는 거의 모든 담론들은, 단언하건대 서울 시민들의 이기적 지역주의를 포장하기 위한 사탕발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 .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라고 서울의 중산층들이 자신들의 이기적 지역주의를 둘러댈 때, ‘그것은 경제가 아니야’라고 말해야만 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나는 영남과 호남의 대립으로 상징되는 구 지역주의가 아예 종식되었다는 말을 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현재처럼 조직되지 않은 다수의 유권자가 자신들의 특수한 계급적 이익을 위해 일치단결한 서울 중산층들에게 휘말리는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표방하는 '경제'라는 구호가 그다지 경제적이지도 않으며 본질적으로는 새로운 층위에서 지역주의를 재편성하고 있을 뿐이라는 전선을 그어야 할 필요가 분명히 있다.

구 지역주의를, 서울 내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엘리트간의 헤게모니 싸움이 그들의 고향이자 정치적 기반이 되는 지역으로 확장되어 벌어진 현상이었다고 정의해보자. 노무현의 민주당 분당과 대연정 제안 등은 모두 그 본질을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사건이었는데, 그것을 그런 식으로 까발리고 나자 아직까지 계급정치가 제대로 확립되어 있지 못한 대한민국의 정치적 균형추가 모두 엉클어졌고, 그 빈틈을 놓치지 않은 이명박은 국민의 3분의 1의 지지만을 얻고도 정동영을 민주화 이후 최대 득표차로 압도하기에 이르렀다.

사람들이 계급정치의 개념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하고, 또한 노동자 계급을 대변해야 할 당이 북한의 정치적 엘리트의 논조를 따르는 일파에게 점거당한 시점에서, 서울과 그 외 지역간의 격차를 설명하기 위한 최선의 개념틀은 결국 지역주의가 아닐까 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 가급적이면 25일 이후 《드라마틱》 2월호가 나온 후 그것을 사 보시고 심도 깊은 비판을 해주시면 참 좋겠다.

지난달 월급을 받자마자 알라딘에서 책들을 주문하였는데, 그 중에는 토마스 프리드먼의 《The World Is Flat: Further Updated and Expended | Release 3.0》이 포함되어 있다. 어제 저녁에 회사에서 나가기 전, 자신이 페이퍼백 에디션을 왜 또 내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Introduction을 읽었다. 아주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 인간은 2005년 4월에 초판을 내고, 다음해 4월에는 재판을 내고, 그 이듬해 4월에 또 재판을 냈다. 그것을 시치미 뚝 떼고 Release 3.0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대체 이런 짓을 왜 하느냐라는 질문에 그는, 세상이 워낙 빨리 바뀌고 있고 출판업계의 속도도 그에 발맞추어 빨라졌기 때문에, 즉 해야 하고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설명한다. 매해마다 새로운 판을 내면 판매 수익을 더 높일 수 있다는 말은 전혀 하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법대 교수들이 괜히 교과서 판갈이를 하면서, '변화하는 우리 법의 속도에 발맞추어'라고 둘러대는 것을 연상케 한다.

토마스 프리드먼의 최근 칼럼을 보면 신선한 발상과 내용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지만, 아무튼 그는 정말 쉽고 명료한 문장을 구사하는 훌륭한 저널리스트이다. 내가 이 책을 산 이유가 두 가지인데 그 중 전자도 바로 그 문장 때문이다. 후자는 이 책이, 아무리 여기저기서 까이고 있다고 한들 세계화 시대의 아젠다를 설정한 몇 개의 주요 도서임에 분명하기 때문인데, 아직 본격적으로 내용을 읽기 시작한 것은 아니므로 그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언급하기로 한다.

2008-01-03

르네상스맨이 되지 말자

다양한 분야에 대해 식견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를 지니는 '르네상스맨'이라는 단어는, 그리하여 결국 생활에 여유가 있고 자신의 지위를 위협받지 않을만한 교수들이 이 분야 저 분야에 잡다한 도서를 내면서 스스로에게 붙이는 훈장처럼 변해버리고 말았다. 가령 알라딘에서 저자 이름을 클릭하면 총 60권의 다종다양한 도서가 뜨는 영남대 법학과의 박홍규 교수는 자신을 '르네상스맨'이라 칭하는데 전혀 주저함이 없다. 유명한 라드부르흐주의자인 서울대 법학과의 최종고 교수는 법상징학 등에 관한 연구를 하고, 《괴테와 다산, 통하다》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유독 법대 교수들만이 지적되고 있는 것 같은데, 이외에도 많은 저자들이 다양한 방면으로 외도를 하며 르네상스적인 분위기를 만끽하고 있다.

'르네상스맨'들의 열의 자체를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어차피 수만권의 책이 쏟아지고 있는 현실이고, 특히 한국은 OECD 국가 중 출판물에서 번역서가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높은 나라인 만큼, 한국어로 직접 글을 쓰는 필자의 수는 늘어날수록 좋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르네상스맨'이라는 단어가 유한계급의 지적유희를 치장하는 용도로만 사용되는 것은 옳지 않다.

르네상스 시대를 특징짓는 인물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떠올리는 지금의 문화 풍토를 나는 지적하고 싶다. 자신을 '르네상스맨'이라 칭하는 그 이면에는 바로 그렇게, 다재다능한 천재가 되고 싶다는 욕망이 너무도 노골적으로 포진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르네상스 시대의 진정한 가치는, 그동안 묻혀있었던 그리스 철학의 원전을 직접 탐색하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그 전까지 스콜라 철학자들은 그렇게 아리스토텔레스를 인용하면서도 아랍어 중역본을 보는 일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 이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면서 비잔틴 제국이 간직하고 있던 그리스어 원전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고, 이는 근대 철학이 고대 철학을 극복하는데 있어 가장 기초적이고도 본질적인 바탕이 되었다.

르네상스 시대를 근대의 예비 단계이자, 동시에 인류 문명 사상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시대가 되게끔 한 원동력은 바로 그러한 원전을 향한 탐구에 있었다. 물론, 앞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천재가 되고 싶은 기분에 취해있는 저자들을 굳이 뭐라고 해야 할 이유는 없다. 다만 나는 그들의 욕망이 한국 지성계의 어떤 경향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을 우선 지적하고 싶다. 동시에 그들의 그러한 다방면적인 저술 행위가, '너 전공이 뭐야?'라는 질문으로 대변될 수 있는 한국 학계의 '박사학위주의'를 깨뜨리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 또한 문제삼을만 하다. 르네상스 시대의 르네상스맨들이 결국 부유한 가문에 고용되어 있는 기능인일 뿐이었듯이, 현대 한국의 '르네상스맨'들은 학계의 관성을 타파하기보다는 자신의 지위를 위태롭게 하지 않는 선에서 그냥 이런 저런 책들을 내고 있을 뿐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2008-01-01

2008년 1월 1일

맨큐 블로그의 인용을 보고 데이비드 브룩스의 칼럼을 읽은 다음, 거기서 언급된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베니티 페어 11월호 기사를 정독했다. 녹색당을 지지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청년이 자신의 글에 큰 영향을 받아 이라크전에 참전하고 전사하였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후, 그 유가족을 찾아가 죽은 아들을 보내는 마지막 가족 행사에 참석하는 내용인데, 읽어볼 가치가 있다. 자신의 임무가 "세상을 구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평범하고 건실하지만 천상 군인으로서 어울리는 용기를 지니고 있었던 한 미국 청년이 남겨놓은 글의 파편들을 읽고 있노라면, 다짜고짜 미군들은 다들 저질이고 꼴통이며 저학력자들이라는 식의 편견을 지니고 있는 것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인가를 새삼 느끼게 된다.

경향신문은 연초부터 최장집 인터뷰를 거하게 했다. 나는 1월 1일자를 가판에서 구입하였는데, 1면 하단에 최장집과 이명박 두 사람의 사진을 대칭되게 배치한 그 편집 센스에 감탄하고야 말았다. 지난 블로그에서 추천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맥락에서 이 글을 권하고 싶다. 민주화 그 자체를 추구해야 할 가치로 놓는 그의 정치관은 본질적으로 보수적일 수밖에 없으며, 특히 '민주주의'라는 레토릭을 대부분의 정치 세력이 분할하여 점유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여 볼 때 그것이 실천적으로 반드시 옳은 결과를 낳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여전히 최장집은 한국 사회에서 정치적인 사안에 대해 가장 명료한 발언을 내놓는 사람이므로, 그의 글을 읽는 것은 지적 노동에 종사하는 모든 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덧붙이자면, 최장집도 민주노동당 분당에 대해 유보적이거나 다소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괄호 치고 아주 작게 껄껄껄 이라고 쓰는 기능이 내 블로그에 있다면 좋겠다.

레이몬드 카버의 소설집 《대성당》의 단편 중 하나인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을 읽었다. 새해 첫날 아침 겪은 개인적인 일로 매우 심기가 불편하던 참에, 좋은 위로를 받으며 감동적인 소설을 접하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두 가지 모두 고마웠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지하철에서 사도행전을 읽었다. 16장에서 주목할만한 부분들을 발견했다. 내용이 옳더라도 이런 식으로 떠벌이는 것은 타인을 언짢게 한다.

16 우리가 기도처로 갈 때에 점 귀신 들린 하녀 하나를 만났는데, 그는 점을 쳐서 주인들에게 큰 돈벌이를 해 주고 있었다.
17 그 여자가 바오로와 우리를 쫓아오면서,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종으로서 지금 여러분에게 구원의 길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18 여러 날을 두고 그렇게 하는 바람에 언짢아진 바오로가 돌아서서 그 귀신에게,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에게 명령하니 그 여자에게서 나가라." 하고 일렀다. 그러자 그 순간에 귀신이 나갔다.


또한 27절에서 31절 사이의 내용에 주목해보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라는 말이 한국 사회에서 대단히 잘못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식당마다 걸려있는 저 문구는 한국 기독교의 기복신앙적 성격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으로 비판받고 있으나, 여기서 간수가 말하는 바는 체포당하여 처형되지 않고 가족의 안전과 생계를 지켜낼 수 있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구원'에 더욱 가깝다. 적어도 내게는 이 대목이 당시의 초대 교회가 사회로부터 배제되고 도망자의 위치에 처하게 될 이에게 피난처를 제공할 수 있었다는 뜻으로 읽힌다. 어차피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로마 시민임을 항변하면 탈옥 소동을 무위로 돌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테니 말이다.

25 자정 무렵에 바오로와 실라스는 하느님께 찬미가를 부르며 기도하고, 다른 수인들은 거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26 그런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 감옥의 기초가 뒤흔들렸다. 그리고 즉시 문들이 모두 열리고 사슬이 다 풀렸다.
27 잠에서 깨어난 간수는 감옥 문들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고 하였다. 수인들이 달아났으려니 생각하였던 것이다.
28 그때에 바오로가 큰 소리로, "자신을 해치지 마시오. 우리가 다 여기에 있소." 하고 말하였다.
29 그러자 간수가 횃불을 달라고 하여 안으로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면서 바오로와 실라스 앞에 엎드렸다.
30 그리고 그들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두 분 선생님, 제가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31 그들이 대답하였다.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
32 그리고 간수와 그 집의 모든 사람에게 주님의 말씀을 들려주었다.
33 간수는 그날 밤 그 시간에 그들을 데리고 가서 상처를 씻어 주고, 그 자리에서 그와 온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
34 이어서 그들을 자기 집 안으로 데려다가 음식을 대접하고, 하느님을 믿게 된 것을 온 집안과 더불어 기뻐하였다.
35 날이 밝자 행정관들은 시종들을 보내어, "그 사람들을 풀어 주어라." 하고 말하였다.
36 그래서 간수가 바오로에게 그 말을 전하였다. "행정관들이 여러분을 풀어 드리라고 시종들을 보냈습니다. 그러니 이제 나오셔서 평안히 가십시오."
37 그때에 바오로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로마 시민인 우리를 재판도 하지 않은 채 공공연히 매질하고 감옥에 가두었다가 이제 슬그머니 내보내겠다는 말입니까? 안 됩니다. 그들이 직접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합니다."
38 그 시종들이 이 말을 전하자, 행정관들은 바오로와 실라스가 로마 시민이라는 말을 듣고 불안해하며,
39 그들에게 가서 사과하고는, 그들을 데리고 나가 그 도시에서 떠나 달라고 요청하였다.

40 이렇게 그들은 감옥에서 나와, 리디아의 집으로 가서 형제들을 만나 격려해 주고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