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1-21
다른 노동자의 피와 땀으로
강유원이 그러고 있다. 그는 자신의 홈페이지의 maunscript라는 메뉴에서 말 그대로 '손으로 쓴 다음 컴퓨터로 옮긴' 원고들을 게재하는데, 문제는 그 중 일부가 이미 책으로 출판된 후에도 다운로드 가능한 형태로 공개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최신 번역작은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인데, 링크가 걸려있다고 해도 굳이 알라딘이나 다른 인터넷 서점에 가서 구매 버튼을 누르지 마시라. 강유원 홈페이지에 가면 원고와 역자 후기가 모두 PDF 파일로 올라와 있다. 당신이 할 일은 그것을 받아서 아크로뱃 리더로 읽은 다음 프린트 버튼을 누르는 것 뿐이다. 그러면 당신은 당신의 소중한 7000원을 절약할 수 있다.
저자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하고 있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고 알 바도 아니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히 해두었으면 한다. '나는 책 팔아서 돈 벌 생각 없다'는 관점으로 그러고 있는 거라면 그따위 발상은 기둥에 묶어서 불로 태워버려야 할 것이다. 책은, 저자에게는 자신의 이념과 사상과 꿈과 희망의 표현이지만, 출판 노동자에게는 피와 땀과 눈물이 서린 노동의 결과물이다. 번역자로서 인세를 포기하고 싶거든 자신의 통장에 들어온 돈을 입맛에 맞는 자선단체에 기부하거나, 빌딩 위에서 흩날리거나, 경찰의 눈을 피해 불태워버리거나 할 것이지, 대체 무슨 근거로 책의 판매에 해가 될 짓을 하면서도 이렇게 태연할 수 있는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책이 안 팔리면 번역자의 수당만 줄어드는가? 그렇지 않다. '저자'라는 카테고리로 묶일 수 있는 이들은 기고나 다른 책의 원고료 등으로 구멍난 수익을 벌충할 수 있다. 하지만 출판 노동자들은 자신이 일하는 출판사에서 만들어낸 책이 잘 나가지 않는다면 말 그대로 손가락이나 빨고 있어야 할 형편이다. 이것은 내가 최근에 본, 타인의 소득을 짓밟는 방법 중 가장 잔인한 것에 속한다. 태안에서 기름 쏟은 것보다도, 어떻게 보면 더 심하다. 그건 그나마, 과실이건 중과실이건 '과실'이지만, 이건 의도가 있지 않는 한 지금까지 이렇게 버티고 있을 수 없는 것이니 말이다. 한국의 인문학 도서 시장은 기껏해야 1500부 미만에서 형성되어 있다. 그런데 지금 강유원 홈페이지에서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의 원고가 실려있는 게시물의 조회수가 1000이 넘는다. 1월 21일 오후 8시 8분 현재 다운로드 수는 810회이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짓거리란 말인가.
문어 제 발 끊어먹기도 이런 경우는 없다. '나는 내 지식을 무료로 공개하는 사람이오'라는 '가오'를 유지하기 위해, 수 명의 출판 노동자들에게 이렇게 위해를 가해도 되는 것일까. 자신의 강의를 녹음해서 파일로 올리는 것, 그와 관련된 강의 자료까지도 정성스럽게 편집해서 올리는 것 등에 대해서 나는 강유원을 매우 높게 평가한다. 한국에서 포드캐스팅을 이렇게 철저하게 추진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이다. 하지만 책과 관련해서는 경우가 완전히 다르다. 과연 '한국의 주어캄프'라는 칭송을 듣고 있는 이론과실천에서는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한국의 주어캄프'의 번역자가 번역 원고를, 책이 나오기도 전에 인터넷에서 뿌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과연 알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가시지 않는다.
나는 그의 정보 공유 정신 자체를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계약'이라는 것이 포함하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적인 윤리를 우선 지키자는 말을 하고 있다. 말라 죽어가고 있는 인문 출판계의 목줄을 이런 식으로 조르는 필자가 더는 없어야 할 것이다. 다른 노동자의 피와 땀으로 '가오'를 잡는 이러한 행태가 더 이상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2008-01-13
2007년 독서 목록
직관수학 : 수학 영재들의 수학 사고법 | 畑村洋太郞 | 2007.01.05 |
스트라디바리우스 | Faber, Toby | 2007.01.08 |
통계를 알면 인생이 달라진다 | 大村平 | 2007.01.08 |
익스트림 프로그래밍 : 변화를 포용하라 / 2판 | Beck, Kent | 2007.01.10 |
사용자 스토리 : 고객 중심의 요구사항 기법 | Cohn, Mike | 2007.01.10 |
대체 뭐가 문제야? : 문제해결에 관한 창의적 사고를 길러주는 6가지 질문 | Gause, Donald C | 2007.01.12 |
컨설팅의 비밀 | Weinberg, Gerald M | 2007.01.12 |
(컬트 브랜드의 탄생)아이팟 : 소비자가 만들어 낸 새로운 문화코드 iPOD | Kahney, Leander | 2007.01.22 |
(벤저민 프랭클린)인생의 발견 | Isaacson, Walter | 2007.01.22 |
거짓말쟁이, 연인, 그리고 영웅 | Quartz, Steven | 2007.01.26 |
제국 : 유럽 변방의 작은 섬나라 영국이 어떻게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을 만들었는가 | Ferguson, Niall | 2007.01.31 |
위기의 노동 : 한국 민주주의의 취약한 사회경제적 기반 | 최장집 | 2007.02.05 |
여러분! 이 뉴스를 어떻게 전해 드려야 할까요? : 황우석 사태 취재파일 | 한학수 | 2007.02.05 |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 | Granin, Daniil Alexandrovich | 2007.02.06 |
사생활의 역사 | Aries, Philippe | 2007.02.09 |
나는 고백한다, 현대의학을 : 불완전한 과학에 대한 한 외과의사의 노트 | Gawande, Atul | 2007.02.14 |
청갈색책 | Wittgenstein, Ludwig | 2007.02.21 |
인간 폐지 | Lewis, Clive Staples | 2007.02.26 |
문화와 가치 | Wittgenstein, Ludwig | 2007.03.08 |
(한국은행의)알기쉬운 경제이야기 . [4] , 일반인을 위한 | 한국은행 . 경제교육센터 . 경제교재편찬위원회 | 2007.03.08 |
제2의 성서 : 아포크리파 : 신약시대 | 이동진 | 2007.03.14 |
니코마코스 윤리학 | Aristotle | 2007.03.15 |
요한복음강해 | 김용옥 | 2007.03.21 |
소품집 | Wittgenstein, Ludwig | 2007.03.21 |
스누피의 글쓰기 완전정복 | Conrad, Barnaby | 2007.04.04 |
연필 | Petroski, Henry | 2007.04.04 |
Old school : a novel / 1st ed | Wolff, Tobias | 2007.04.12 |
토니오 크뢰거 : 토마스 만 단편선 | Mann, Thomas | 2007.04.13 |
우리 시대의 비극론 | Eagleton, Terry | 2007.04.13 |
A series of unfortunate events / 1st ed | Snicket, Lemony | 2007.05.23 |
기생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근대 기생의 탄생과 표상공간 | 이경민 | 2007.06.05 |
마피아의 계보 | 안혁 | 2007.06.05 |
범죄의 현장 : 세계를 놀라게 한 범죄사건을 통해 본 법과학과 과학수사의 모든 것 | Platt, Richard | 2007.06.05 |
연애의 시대 : 1920년대 초반의 문화와 유행 | 권보드래 | 2007.06.20 |
황금광시대: 식민지 시대 한반도를 뒤흔든 투기와 욕망의 인간사 | 전봉관 | 2007.06.20 |
(기생이 쓰는 기생이야기)평양기생 왕수복 : 10대가수 여왕되다 | 신현규 | 2007.06.20 |
꼿가치 피어 매혹케 하라 | 김태수 | 2007.06.20 |
말들의 풍경 : 고종석의 한국어 산책 | 고종석 | 2007.09.06 |
바리에떼 : 문화와 정치의 주변풍경 | 고종석 | 2007.09.13 |
푸코의 맑스: 둣치오 뜨롬바도리와의 대담 | Foucault, Michel | 2007.10.02 |
아픈 아이들의 세대 | 우석훈 | 2007.10.08 |
한미 FTA 폭주를 멈춰라 | 우석훈 | 2007.10.08 |
음식국부론 : 도마 위에 오른 밥상 | 우석훈 | 2007.10.08 |
움베르토 에코의 문학 강의 | Eco, Umberto | 2007.10.11 |
천유로 세대 | Incorvaia, Antonio | 2007.10.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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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토 에코의 문학 강의 | Eco, Umberto | 2007.10.12 |
작은 일기 | Eco, Umberto | 2007.10.15 |
미네르바 성냥갑 . 1-2 | Eco, Umberto | 2007.10.17 |
내몸 사용설명서 | Roizen, Michael | 2007.10.18 |
아파트 공화국 : 프랑스 지리학자가 본 한국의 아파트 | Gelezeau, Valerie | 2007.10.22 |
미네르바 성냥갑 . 1-2 | Eco, Umberto | 2007.10.24 |
직관과 구성 | 승계호 | 2007.11.05 |
비밀요원 | Conrad, Joseph | 2007.11.05 |
달인 : 천 가지 성공에 이르는 단 하나의 길 | Leonard, George Burr | 2007.11.14 |
철학의 개념과 주요문제 | 백종현 | 2007.11.14 |
나는 철학자다: 부르디외의 하이데거론 | Bourdieu, Pierre | 2007.11.19 |
지적 사기 :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은 과학을 어떻게 남용했는가 | Sokal, Alan | 2007.11.21 |
역사론 | Hobsbawm, Eric J. | 2007.11.28 |
블랙 다알리아 | 제임스 엘로이 | |
퀴즈쇼 | 김영하 | |
88만원 세대 | 우석훈 | |
멋진 징조들 | 테리 프레쳇, 닐 게이먼 | |
화차 | 미야베 미유키 | |
용의 이 | 듀나 | |
성자와 학자 | 테리 이글턴 | |
슬럼, 지구를 뒤덮다 | 마이크 데이비스 | |
슬픔의 냄새 | 이충걸 | |
정상적인 바보가 되지 마라 | 크리스토퍼 시 | |
경성기담 | 전봉관 | |
스나크 사냥 | 미야베 미유키 | |
니체, 프로이트, 맑스 이후 | 김상환 | |
샌드위치 위기론은 허구다 | 우석훈 | |
성스러운 테러 | 테리 이글턴 | |
우리 까페나 할까? | 김영혁, 김의식, 임태병, 장민호 | |
5대에 이어진 철 이야기 | 토마스 로터 | |
진단명: 사이코패스 - 우리 주변에 숨어 있는 이상인격자 | 로버트 D. 헤어 | |
한국의 연쇄살인: 희대의 살인마에 대한 범죄수사와 심리분석 | 표창원 | |
화차 | 미야베 미유키 | |
날짜가 적혀 있는 것은 작년과 같이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것들은 구입하여 읽은 책들이다. 독서 목록이므로 순수한 도서만을 범주에 포함시켰고, 따라서 잡지나 신문 기사, 성서 등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사서 읽은 책이 전부 포함되어 있는지 다소 의심스럽지만, 아무튼 총 72권이며 두 번 읽은 책은 목록에서 제외하였는데, 그러한 원칙에 대해서는 나중에 좀 더 설명하겠다.
확실히 작년에 비해 목록의 길이가 짧아졌다. 그 이유는 대략 4월 무렵부터 페이퍼하우스에 출근하며 이런저런 업무를 전전하였기 때문이다. 학교와 회사를 오가다보니 책을 빌리고 읽을 시간적 여유가 많이 줄어들었다. 그렇다면 그만큼 버는 돈을 책 사는 일에 더욱 할당했어야 하지만, 나는 스스로에게 허락한 자료구입비의 상당 부분을, 작년 말까지 대체로 잡지 구입을 위해 썼다. 매주 토요일마다 교보문고로 달려가 《The Economist》를 구입한 후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읽는 것이, 외무고시 수험생으로서 확고한 자각을 지니고 있던 시절 내가 누리던 허영이며 호사였다.
하지만 잡지는, 내가 잡지 만드는 회사에서 일하고 있긴 하지만, 시간의 흐름과 함께 발생하는 정보값의 손실이 상당히 큰 매체이다. 평범한 언어로 말하자면 철 지난 잡지는 사료로서의 가치를 지닐 뿐 그걸 다시 꼼꼼하게 읽고 어쩌고 하는 건 그리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차라리 한 주에 책 한 권을 사는 습관을 들였어야 한다. 이건 지금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겠다. 말 꺼내놓고 보니 대단히 그럴싸하게 느껴지는데, 현재 예산 구조를 확인해본 후 새해 목표에 넣을지 여부를 결정하면 될 것이다(대뜸 '하겠다'고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사서 얻는 할인 효과가 은근히 크기 때문이다. 특히 가격이 2만원을 넘는 물건이라면 더더욱).
책을 사지 않았다는 것은 그것들을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었다는 말과도 같다. 지금까지는 그러한 방식으로 살아왔지만 앞으로는 그러지 말아야겠다. 학부를 졸업하게 된다는 것을 실감하면서 깨달은 사실이 있다. 비록 지금 당장이야 대학원에 진학함으로써 '대학 도서관'을 또 하나 옆구리에 끼고 있을 수 있게 되었지만, 그마저도 졸업하고 나면 내가 읽은 책의 내용을 전부 적어놓지 않는 한 내 머리 속에는 그저 '책에 대한 추억'만이 남아있게 된다. 대학교 저학년 시절 읽었던 책들이 다 그런 식이다. 흥미롭게 바라보았던, 강렬한 인상을 남긴 팩트들은 대체로 기억에 남았지만, 그 책에서 정말 곱씹어야 할 부분들은 내 머리 속에서 지워진지 오래다. '나 그거 읽었소'라고 자랑할 때가 아니면 쓸모가 없다. 올해 도서구입비의 절반은 한 번도 안 읽은 책에, 나머지 절반은 이미 읽었지만 가지고 있지 않은 책을 구입하는 데에 쓰겠다.
표의 끄트머리에 달려있는, 날짜가 적혀있지 않은 책들이 바로 사서 읽은 것들이다. 아니, 다른 사람에게 빌려 읽은 것들이 적지 않으니, 도서관에서 대출받지 않은 것들이라고 하는 편이 정확하겠다. 저것들 중 일부는 언제 읽었는지 그 날짜를 정확하게 추적할 수 있지만, 나는 그 일을 사적인 차원에서 하고 싶으므로 여기서는 그냥 떠오르는 대로 적은 그것을 그대로 첨부한다.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알 수 있겠지만, 가령 《샌드위치 위기론은 허구다》와 《88만원 세대》는 우석훈의 다른 책을 뭉터기로 보던 시절에 읽은 것이다. 그 밖에도 이것저것이 있지만 그건 개별적인 맥락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2007년의 책은 누가 뭐라고 해도 《88만원 세대》였다. 그 책은 지금껏 문제작이었으며 앞으로 적어도 5년간은 문제작일 수밖에 없다. 목록을 다시 확인하다보니 도서관에서 빌려읽기도 했다는 사실이, 즉 중복기재되어있다는 것이 확인되었지만 그것을 굳이 정정하지는 않기로 한다. 이미 읽은 책을 번역하는데 예산의 반을 할당하겠다는 말에서 드러나듯이, 올해부터는 두 번 이상 반복해서 읽은 경우라도 독서 리스트에 포함시킬 계획이기 때문이다(그러고보니 가지고 있는 책의 목록과 책을 읽은 기록 자체는 별도로 관리해야 하는군). 영화를 사랑하는 세 단계에 대한 트뤼포의 말은 무엇보다 책에 대해 적용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아무튼, 매우 늦었지만, 이렇게 2007년의 독서 목록을 결산한다.
추가) 누락된 책 세 권을 목록에 추가한다. 특히 이글턴의 《성스러운 테러》를 아주 인상적으로 읽었다. 이택광 선배에 따르면 이글턴은 퇴임한 후 한 달에 한 권 꼴로 책을 내고 있다고 한다. 노동의 의무로부터 해방된 마르크스주의자가 이루어낼 지적 성취를 기대하게 된다.
추가2) 또 누락된 책 세 권이 있었다. 《진단명: 사이코패스》를 다시 꺼내서 만져봤는데, '윤리적 절대 자유'가 낳는 귀결은 결국 사이코패스가 아닐까 한다. 그들은 모든 규율로부터 '탈주'한다. 소유하기 위해 훔치는 도둑은 바로 그 훔치는 행위를 통해 다이아몬드에 경외심을 표하는 것이라고 체스터튼이 말했다. 사이코패스들에게는 그러한, 존재 그 자체에 대한 최소한의 존경이 없다.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천성적으로, 니체가 말하는 '약탈하는 군인들'처럼 살아갈 뿐이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자세한 이야기를 더 할 수도 있다.
《화차》의 결말은 말 그대로 '쩐다'. 영화 판권이 팔린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그 소설의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일본 대중문학에서 애용하는 '한 줄로 평가하기'가 싫어서 몸서리를 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토리텔링에 빠져들어 끝까지 읽게 되었다. 하층민인 주인공이 아버지의 이름을 사망자 명단에서 찾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있는 모습을 보자, 그대까지 사랑으로 버텨오던 부잣집 도련님은 이별을 통보하고 만다. 잠시 딴소리를 하자면, 일본을 중산층만으로 이루어진 사회라고 말하는 것은, 이런 것들을 종합하여 볼 때 부당한 일인 것 같다. 아무튼 나는 2007년에 두 권의 미야베 미유키 소설을 읽었는데, 인물에 대한 화자의 '한 줄 평가'가 드물거나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는 《스나크 사냥》이 좋았지만, 스토리텔링과 주제의 흡입력 등에서는 아무래도 《화차》의 손을 들어주게 된다. 두 권 모두 한 번쯤 읽어볼만한 소설이다.
2008-01-10
헤겔의 법철학 강요에 대한 예전 노트
법철학 강요
2002. 12.12. 18:38
* 헤겔에게 '개념'은 자기발광체이다.
* 헤겔과 칸트에게 '이성'이라는 것은 빛의 이미지를 진하게 지닌다. 헤겔만 놓고 보면, 즉자적인 것은 스스로를 이성의 빛으로 비춘다는 뜻이고, 대자적인 것은 다른 이성의 빛이 반사되어 비춰진다는 뜻이다. 하긴 계몽 자체가 enlighten 이니.
"현존재와 개념, 육체와 영혼 - 이 일치성이 이념이다."
"의지는 어떤 특수한 방법의 사유이다. 즉, 사유가 자기를 현존재로 번역하는 방법, 자기에게 현존재를 주려고 하는 충동으로서의 사유인 것이다."
"(α) 의지는 자아의 전혀 무엇이라고도 정해져 있지 않은 순수한 무규정성, 즉 오로지 자기의 속에 반절하는 순수한 자기반성이라는 요소를 내포한다.
"(β) 자아는 또한 구별이 없는 무규정성으로부터 구별 세우기에의 이행이고 규정하는 것에의, 그리하여 어떤 규정된 자세를 내용과 대상으로서 정립하는 것에의 이행이다. - 그리고 이 내용은 자연에 의해 주어진 것으로서이든 정신의 개념에서 비롯된 것으로서이든 상관없다.
"(γ) 의지는 이 (α)와 (β)의 양 계기의 일체성이다. 말하자면 특수성이 그 속에 절반(折返)되고 이 일에 의해 보편성으로 환원된 자세, 즉 개별성인 것이다."
* "자아는 이렇듯 자기 자신을 어떠한 규정된 것으로서 정립하는 것에 의해 현존재 일반 속에 들어간다. - 이것이 자아의 유한성 혹은 특수화라는 절대적 계기이다."
* "개념의 운동원리는 보편적인 것이 특수화된 온갖 자세를 단지 해소할 뿐만 아니라 산출하기도 하는 것으로서, 나는 이를 「변증법」이라고 부른다."
* 현존재와 개념의 인과성, 즉, 지금 한창 논의되고 있는 심물논변의 문제가 여기서도 고스란히 발견된다. 맑스는 현존재와 개념의 인과성에서, 헤겔이 잠정적으로 개념의 손을 들어준 것에 반발한 것 같다.
* 자신을 비추는 개념 - 거울 두 장을 마주보게 하여 그 안에서 빛이 무한반사하는 장면을 상상할 것.
* 개념도 서사의 지배를 받고, 현존재로서의 육체도 서사의 지배를 받는다.
* 이성과 서사의 차이 - 이성은 인간의 도구인데 [반해] 서사는 인간의 환경(nature)이다. 인간이 서사대로 행한다고 할 때, 본성을 따라 들판을 질주하는 야생마의 자유분방함을 연상해서는 안된다. 이성의 손전등을 인간이 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서사의 태양이 인간의 대지 위에 떠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더 자유롭다.
2008-01-07
2008년 1월 7일
사무실에서 나와 잠시 친구와 차를 마신 후 그를 집에 데려다주러 갔다가 겪은 일에 대하여. 아파트 주민이 '너희들 여기서 나가'라고 소리지르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다. 마치 아파트 앞뜰이 자신의 정원이라도 되는 양 말하는 것이 아닌가(1층에 사니까 자신이 그런 소리 할 수 있다고 우겼지만, 8층에 산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것과는 별개로 그냥 말 자체가 말이 안 된다). 목소리를 높이면 동네 사람들이 깨니까, 나름대로 조용하게 아주머니 집에 들어가시라고 권유를 했는데, 남편이라는 자가 나와서 시위하는 것을 보고 더욱 기가 막혔다. 그 치들을 곱게 들여보내고, 분노하고 있던 그를 달랜 후 집으로 향했다.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잠시 통화를 한 후, 역에서 집까지 걸어오는 길에 발레리 줄레조의 《아파트 공화국》의 내용을 곱씹었다. 이 책이 애초의 기대만큼의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지 못한 것은, 한국인들이 왜 아파트를 이렇게까지 선호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역사적 해석에 다소 무리가 있었을 뿐 아니라, 지금 불어닥치고 있는 아파트 열풍이 가지고 있는 사회심리적인 성격에 대한 고찰이 전무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겪은 사례에서 알 수 있다시피, 가진 것이라고는 달랑 아파트 한 채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희망이요 빛이며 구원으로 향하는 유일한 사다리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의 '영역'을 현관 밖으로, 심지어는 단지 전부로 확장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그렇기에 '더 넓은 평수' 혹은 '더 높은 층수'에 사는 누군가에게 야코가 죽는 일을 죽기보다 싫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심리를 좀 더 해설하자면 다음과 같다. 만약 모든 아파트 단지에 사는 사람들이 그 단지 전체를 자신의 영역으로 간주하고 있다고 쳐보자. 그렇다면 아파트 단지는, 주민의 숫자를 n이라고 할 때 n만큼의 행위자가 동시에 영역으로 삼고 있는 전쟁터인데, 이는 최악의 경우 (n+1)!/2, 즉 {(n+1)*n*(n-1)*(n-2)* . . . 1}/2 만큼의 갈등이 발생할 수 있다는 뜻이다(아파트 단지에서 싸움이 괜히 많이 나는 게 아니다. 이렇듯 수학적으로도 증명 가능하지 않은가).
따라서 자신이 어떤 아파트의 주민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지면 가질수록 정서는 황폐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아파트에 산다는 사실이 자랑인 사람은 그것 외에는 별다른 자랑거리나 즐길거리가 없는 사람이므로, 있는 재산을 다 털어서 아파트 한 채 사놓고 버티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한국사회는 정서적으로 각박해지고 문화적으로 천박해지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그 수렁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은 아파트 가격이 올라 더 높은 평수와 층수로 올라가는 것 뿐이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볼 때, 아파트 가격이 오르면 나 말고도 수천 명의 사람들이 같은 이득을 누리게 되므로, 자신의 상대적인 지위가 적어도 그 단지 내에서 올라갈 수는 없다. 대치동 은마아파트에 살고 있다면, 물론 다른 듣보잡 아파트에 사는 사람에 비하면야 떼돈을 번 것이지만, 자신보다 더 큰 평수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더 큰 이익을 보는 사람과 스스로를 견주어본다면 배고픔보다 더욱 지독한 배아픔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단 하나의 주택만을 가지고 있는 자가 그것의 가격 상승을 통해 상대적 박탈감을 이겨낸다는 것은,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불가능하다. 문제는, 역시 다들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이론과 논리의 바깥에 설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는 것이다.
다시 FP로 돌아와보자. 교정을 위해 원고를 읽고 또 읽는다. 번역도 하는데, 하면서 나의 한국어 어휘가 그다지 풍부하지 않다는 것을 절감한다. 양놈들이라고 다들 잘나서 그러는 건 아니고 유의어사전, 말하자면 Thesaurus가 있기 때문에 그 도움을 받는데, 한국어에서 그러한 종류의 것은 오직 《비슷한말 반대말 사전》뿐이다. 그나마 어휘가 한자어 중심으로 짜여져 있고 표제어가 그리 많지 않다. 일단 알라딘 보관함에 넣었는데 언제 구입하게 될지는 잘 모르겠다. 사전과 관련해서는 이 마이리스트가 괜찮은 것 같다.
자기 전에 조금이라도 운동을 하고 또 교정지를 훑어야겠다. 돈이 너무 없던 시절 늘 염원하던 그 물건, 캐틀벨을 드디어 집에 들여놓았다. 오늘 오전에는 트레이너 레벨 캡악력기도 왔는데, 다섯 번을 넘기면 그때부터 힘이 달린다. 한 손에 스무 개씩 쉬지 않고 할 수 있게 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스트레스를 풀 겸 좀 더 하다가 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