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1-23
외국의 맥락과 창작물의 독창성
저 마지막 결론 속에 한윤형에게 했던 이야기에 대한 내용도 이미 포함되어 있다. 외국에서 장르 문학을 포함한 창작의 영역이 어느 정도로 발전하고 있는지, 그들이 무엇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그들이 이러저러한 것을 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하지 말아야 한다, 는 말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외국에서 이러저러한 창작품이 나오고 있는 그것 자체가 바로 우리가 속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외국의 맥락을 적어도 대강이라도 알고 따라가고 있지 못하는 한, 우리는 한국 문화의 현재성에 충실할 수조차 없다.
가령 한국의 영화지망생 갑돌이가 '나는 삐까번쩍한 사립 고등학교에 다니는 부유층 여식들을 주인공으로 삼아서, 제인 오스틴의 엠마를 각색한 영화를 찍을 거야'라고 말한다면 그는 당장 '클루리스나 보고 말하자'는 답변을 들을 것이다. 소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중세 유럽풍의, 마법을 최소화 한 세계관을 전제로 한 대규모의 정치 로망을 쓰겠다고 하는 청년의 용기를 북돋워줄 필요는 없다. 우선 마틴의 얼음과 불의 노래를 손에 쥐어주고 나서 이야기를 해보던가 말던가 할 일이니 말이다. 이런 굵직한 작품들의 예를 드는 것이 반칙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진지하게 창작을 시도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시피, 자신이 쓰려고 하는 무언가가 남들이 이미 해놓은 것과 겹치는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그렇지 않고서야 헐리우드에서 시나리오의 중복 여부를 검사하기 위해 그렇게 많은 돈을 퍼붓고 있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나는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를 써, 일단 그게 먼저고 다른 것은 염두에 두지 않았어'라고 한국의 작가들, 특히 소설가들이 이런 소리를 많이 한다. 그것을 전적으로 믿어주는 것만큼 순진한 일이 또 있을까 싶다. 작가들은 어디까지나 독창적이고 또 독창적인 존재이고 싶어하기 때문에, 자신이 누군가에게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혼쾌히 인정할만한 대인배를 찾아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어느 정도 입지를 확보한 거장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인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작가들은 그만큼의 자의식을 구축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많은 경우 '난 나야, 리바이스' 같은 광고 카피를 입에 달고 살 수밖에 없다. 그런 맥락에 휩쓸려 '외국의 맥락을 검토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도 성급한 일인 것으로 여겨진다.
한윤형이 다소 맥락을 잘못 전달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외국의 시시콜콜한 작품까지 죄다 검토한 다음에야 창작이 시작되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지도 않고, 또 어느 정도 무지를 전제하고 들어간 작품들이 좋은 성과를 낼 가능성이 없다는 말을 하고 있지도 않다. 그가 인용하고 내가 인정하는 바와 같이, 인류 보편적인 주제의식은 다양한 각도에서 꾸준한 탐색을 요한다. 하지만 그것을 탐구하는 과정은 결국 자신이 살고 있는 '현재'에 대한 천착이 될 수밖에 없는데, 거기에 '자신이 접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많은 책을 읽음으로써 외국의 맥락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를 간파한다'는 것이 빠지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물론 그렇게 하지 않는 '작가'들이 매우 많다. 판타스틱 편집부에 매일 같이 날아오는 독자 투고만 보더라도, 그러한 '작가'들이 얼마나 많은지는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들 중 90% 이상은 '난 내 이야기를 하고 있어'라는 자의식에 함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그러한 마인드를, 부정적인 뉘앙스를 한껏 담아 '지망생 마인드'라고 부르는데, 이는 그들이 지망생으로 살고 있는 자신에 대한 자기연민에 함몰된 나머지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의 모습을, 또한 자신이 창작하려 하는 장르의 발전을, 전혀 연구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한윤형이 말하는 작가라는 것이, 이러한 '지망생'중 운이 좋고 재주가 좋은 일부를 칭하는 것이라면, 나는 차라리 대한민국에 작가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버리고 싶다.
(한윤형의 블로그에 달린 수동 트랙백)
2008년 1월 22일
수험생활을 잠시 접고 직업의 세계에 몸담으면서 느끼는 바가 많다. 책을 만드는 과정에 참여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매우 많다는 것이 첫번째이다. 그 다음으로 느끼는 것은 출판과 인쇄라는 두 과정에 참여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상호 소통을 거의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두 집단의 지적·문화적 괴리는 가히 놀랍다. 인쇄소 사장이면서 동시에 훌륭한 필자였고 편집자였던 벤자민 프랭클린을 떠올리고 있던 나의 관념이 최근 산산히 부서지고 있다. 책을 물리적으로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그 내용을 거의 읽지 않는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나오는 첫째 아들의 일화는, 그 당시의 신화 중 하나일 뿐이었을까.
원고를 주는 이와 원고를 받는 이 사이에 힘의 불균형이 또한 눈에 띈다. 구체적인 사건을 겪어본 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로 보건대 일부 상식적인 사람들을 제외한 많은 수의 저자들은 출판 노동자들을 그다지 존중하지 않는 것 같고, 또한 출판 노동자들은 저자들의 원고에서 발견되는 무수한 오류를 근거로 그들의 지적 성취를 인정하지 않는 듯하다. 출판 노동자들은 저자들이 되도 않는 자존심이나 세운다고 불평을 토로하고 있고, 반면 저자들은 출판사에서 걸핏하면 인세를 떼어먹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태를 기술하는 것만으로도 진실의 일면이 쉽게 드러난다. 저자들은 '출판사', 즉 자본에게 해야 할 화풀이를 노동자들에게 하는 경우가 많다. 출판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분노와 소외감을 해소하기 위해 저자의 원고의 내용을 폄하하거나 그의 인격적인 부분을 걸고 넘어진다. 약한 개들이 서로 잡아먹고 있는 형국이다.
그래도 우선 한쪽 편을 들고 보자면, 바로 아래 포스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 맥락에서, 한국의 글쟁이들은 자신이 어떤 '산업'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도 쉽게 망각하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말을 먼저 하고 싶다. 마르크스가 살아 돌아와서 자본론을 다시 쓰고 있다고 해도 그렇다. 그의 사상이야 어떻건, 그의 노동은 출판 산업의 일부를 구성하는 저술 작업일 뿐이다. 마감은 지켜져야 하고, 문법과 맞춤법 또한 편집자가 다시 써야 하는 수준으로 엉망진창이어서는 안 된다. 출판 노동자, 혹은 잡지 편집자들이 원고를 다듬는데 괜한 공력을 기울이고 있는 동안, 필자들은 아무튼 자기 개발을 하면서 그들보다 앞선 정보를 취합하며 필자로서의 입지를 지킨다. 뒤치다꺼리 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생각에 완벽한 원고를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다보니 편집자들의 사회적 위치가 턱없이 낮을 수밖에 없다. 일단 잡지로 범위를 좁혀보자. 외국의 경우, 유력 매체의 에디터들은 대부분 두 개 이상의 직업을 유지하고 있다. 말 그대로 '인맥'을 통해 자신이 속한 매체에 원고를 끌어오는 것이 그들이 해야 할 일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여유는 곧 그들이 쓰는 글 자체의 수준 향상으로 이어지고, 따라서 사회에 유통되는 언어의 수준도 덩달아 높아진다. 서로가 서로에게 부담은 덜 지우고 대신 각자의 글 수준을 높이는, 일종의 선순환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물론 그렇지 않다.
매체를 만들고 유지하는 것이 지적이고 우아한 작업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한 한국의 잡지계의 질적 성장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잡지 일을 한다는 것이 자신의 에고를 억누를 수밖에 없는 무언가로 인식되고 있는 현실을 절감하면서, 한국인 필자에게 글을 받을 필요가 없는 《Foreign Policy》니까 내가 기꺼이 하고 있는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작년 하반기부터 20대 필자들을 모아 매체를 굴려보면 어떨까 하는 공상을 조금씩 조금씩 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던 이유도 사실 그런 것 같다. 매체를 운용함으로써 한국어의 흐름에 인상적인 영향을 남기고 싶다는 이상이, 스스로의 에고를 굳이 억누를만큼 내게 강하게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이택광 선배의 추천으로 알게 된 《London Review of Books》는, 아직 실물을 만져보지 않아서 섣불리 판단하기 어렵지만, 훌륭한 매체인 것 같다. 특히 커버가 아주 아름다운데 그에 대해서는 나중에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아무튼 그런 것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낮에 한윤형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던졌는데, 결국 결론은 테리 이글턴 같은 필자가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것으로 맺어졌다. 하지만 설령 있다고 해도 '미래의 테리 이글턴'이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고 소년 소녀들의 보모 노릇을 해야 하는 거라면 그런 일은 정중하게 사양하련다.
그리하여 오늘의 결론. 테리 이글턴은 됐고, 일단 나는 한 주에 한 편 이상의 서평을 쓰겠다. FP 마감에 임박해있다면, 하다못해 그 매체의 기사 내용을 토대로 한 매체 비평이라도 반드시 올리도록 하겠다. 필자를 구하고 비위를 맞추면서 원고를 편집할 궁리를 하고 있느니 그냥 내가 쓰고 말겠다는 것이다. 그것을 꼬박꼬박 알라딘 서재에 올릴 생각인데, 업데이트를 할 때마다 블로그에 공지를 올릴 터이니 방문자분들의 환호성 섞인 리플을 부탁한다. '왜 업데이트가 없느냐'라는 질책도 감사히 받겠다(물론 공지에 써놓은 바와 같이, '별도로 명시되지 않는 삭제 기준'에 어긋나면 지울 수도 있다).
사실 이 포스트처럼 '2008년 모월 모일'이라는 식의 일기를 적어도 사흘에 한 편 정도 올리면서 스쳐 지나가는 기사와 책의 내용들을 정리하고 그 내용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이 올해의 목표 중 하나였는데, 생각해보니 웹에서 읽은 것들에 대한 코멘트에 열을 올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서평을 쓰는 것이 훨씬 생산적인 일일 것 같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책과 서평에 대한 감식안이 쌓이고 그것들을 온당하게 비평하기 위한 지적인 토대를 마련한다면, 먼 훗날 언젠가 LRB 같은 매체를 낼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내일은 정말 지각하면 안 되는 날이다. 자야지.
2008-01-21
다른 노동자의 피와 땀으로
강유원이 그러고 있다. 그는 자신의 홈페이지의 maunscript라는 메뉴에서 말 그대로 '손으로 쓴 다음 컴퓨터로 옮긴' 원고들을 게재하는데, 문제는 그 중 일부가 이미 책으로 출판된 후에도 다운로드 가능한 형태로 공개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최신 번역작은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인데, 링크가 걸려있다고 해도 굳이 알라딘이나 다른 인터넷 서점에 가서 구매 버튼을 누르지 마시라. 강유원 홈페이지에 가면 원고와 역자 후기가 모두 PDF 파일로 올라와 있다. 당신이 할 일은 그것을 받아서 아크로뱃 리더로 읽은 다음 프린트 버튼을 누르는 것 뿐이다. 그러면 당신은 당신의 소중한 7000원을 절약할 수 있다.
저자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하고 있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고 알 바도 아니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히 해두었으면 한다. '나는 책 팔아서 돈 벌 생각 없다'는 관점으로 그러고 있는 거라면 그따위 발상은 기둥에 묶어서 불로 태워버려야 할 것이다. 책은, 저자에게는 자신의 이념과 사상과 꿈과 희망의 표현이지만, 출판 노동자에게는 피와 땀과 눈물이 서린 노동의 결과물이다. 번역자로서 인세를 포기하고 싶거든 자신의 통장에 들어온 돈을 입맛에 맞는 자선단체에 기부하거나, 빌딩 위에서 흩날리거나, 경찰의 눈을 피해 불태워버리거나 할 것이지, 대체 무슨 근거로 책의 판매에 해가 될 짓을 하면서도 이렇게 태연할 수 있는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책이 안 팔리면 번역자의 수당만 줄어드는가? 그렇지 않다. '저자'라는 카테고리로 묶일 수 있는 이들은 기고나 다른 책의 원고료 등으로 구멍난 수익을 벌충할 수 있다. 하지만 출판 노동자들은 자신이 일하는 출판사에서 만들어낸 책이 잘 나가지 않는다면 말 그대로 손가락이나 빨고 있어야 할 형편이다. 이것은 내가 최근에 본, 타인의 소득을 짓밟는 방법 중 가장 잔인한 것에 속한다. 태안에서 기름 쏟은 것보다도, 어떻게 보면 더 심하다. 그건 그나마, 과실이건 중과실이건 '과실'이지만, 이건 의도가 있지 않는 한 지금까지 이렇게 버티고 있을 수 없는 것이니 말이다. 한국의 인문학 도서 시장은 기껏해야 1500부 미만에서 형성되어 있다. 그런데 지금 강유원 홈페이지에서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의 원고가 실려있는 게시물의 조회수가 1000이 넘는다. 1월 21일 오후 8시 8분 현재 다운로드 수는 810회이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짓거리란 말인가.
문어 제 발 끊어먹기도 이런 경우는 없다. '나는 내 지식을 무료로 공개하는 사람이오'라는 '가오'를 유지하기 위해, 수 명의 출판 노동자들에게 이렇게 위해를 가해도 되는 것일까. 자신의 강의를 녹음해서 파일로 올리는 것, 그와 관련된 강의 자료까지도 정성스럽게 편집해서 올리는 것 등에 대해서 나는 강유원을 매우 높게 평가한다. 한국에서 포드캐스팅을 이렇게 철저하게 추진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이다. 하지만 책과 관련해서는 경우가 완전히 다르다. 과연 '한국의 주어캄프'라는 칭송을 듣고 있는 이론과실천에서는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한국의 주어캄프'의 번역자가 번역 원고를, 책이 나오기도 전에 인터넷에서 뿌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과연 알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가시지 않는다.
나는 그의 정보 공유 정신 자체를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계약'이라는 것이 포함하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적인 윤리를 우선 지키자는 말을 하고 있다. 말라 죽어가고 있는 인문 출판계의 목줄을 이런 식으로 조르는 필자가 더는 없어야 할 것이다. 다른 노동자의 피와 땀으로 '가오'를 잡는 이러한 행태가 더 이상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2008-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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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강해 | 김용옥 | 2007.03.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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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론 | Hobsbawm, Eric J. | 2007.11.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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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차 | 미야베 미유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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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자와 학자 | 테리 이글턴 | |
슬럼, 지구를 뒤덮다 | 마이크 데이비스 | |
슬픔의 냄새 | 이충걸 | |
정상적인 바보가 되지 마라 | 크리스토퍼 시 | |
경성기담 | 전봉관 | |
스나크 사냥 | 미야베 미유키 | |
니체, 프로이트, 맑스 이후 | 김상환 | |
샌드위치 위기론은 허구다 | 우석훈 | |
성스러운 테러 | 테리 이글턴 | |
우리 까페나 할까? | 김영혁, 김의식, 임태병, 장민호 | |
5대에 이어진 철 이야기 | 토마스 로터 | |
진단명: 사이코패스 - 우리 주변에 숨어 있는 이상인격자 | 로버트 D. 헤어 | |
한국의 연쇄살인: 희대의 살인마에 대한 범죄수사와 심리분석 | 표창원 | |
화차 | 미야베 미유키 | |
날짜가 적혀 있는 것은 작년과 같이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것들은 구입하여 읽은 책들이다. 독서 목록이므로 순수한 도서만을 범주에 포함시켰고, 따라서 잡지나 신문 기사, 성서 등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사서 읽은 책이 전부 포함되어 있는지 다소 의심스럽지만, 아무튼 총 72권이며 두 번 읽은 책은 목록에서 제외하였는데, 그러한 원칙에 대해서는 나중에 좀 더 설명하겠다.
확실히 작년에 비해 목록의 길이가 짧아졌다. 그 이유는 대략 4월 무렵부터 페이퍼하우스에 출근하며 이런저런 업무를 전전하였기 때문이다. 학교와 회사를 오가다보니 책을 빌리고 읽을 시간적 여유가 많이 줄어들었다. 그렇다면 그만큼 버는 돈을 책 사는 일에 더욱 할당했어야 하지만, 나는 스스로에게 허락한 자료구입비의 상당 부분을, 작년 말까지 대체로 잡지 구입을 위해 썼다. 매주 토요일마다 교보문고로 달려가 《The Economist》를 구입한 후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읽는 것이, 외무고시 수험생으로서 확고한 자각을 지니고 있던 시절 내가 누리던 허영이며 호사였다.
하지만 잡지는, 내가 잡지 만드는 회사에서 일하고 있긴 하지만, 시간의 흐름과 함께 발생하는 정보값의 손실이 상당히 큰 매체이다. 평범한 언어로 말하자면 철 지난 잡지는 사료로서의 가치를 지닐 뿐 그걸 다시 꼼꼼하게 읽고 어쩌고 하는 건 그리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차라리 한 주에 책 한 권을 사는 습관을 들였어야 한다. 이건 지금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겠다. 말 꺼내놓고 보니 대단히 그럴싸하게 느껴지는데, 현재 예산 구조를 확인해본 후 새해 목표에 넣을지 여부를 결정하면 될 것이다(대뜸 '하겠다'고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사서 얻는 할인 효과가 은근히 크기 때문이다. 특히 가격이 2만원을 넘는 물건이라면 더더욱).
책을 사지 않았다는 것은 그것들을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었다는 말과도 같다. 지금까지는 그러한 방식으로 살아왔지만 앞으로는 그러지 말아야겠다. 학부를 졸업하게 된다는 것을 실감하면서 깨달은 사실이 있다. 비록 지금 당장이야 대학원에 진학함으로써 '대학 도서관'을 또 하나 옆구리에 끼고 있을 수 있게 되었지만, 그마저도 졸업하고 나면 내가 읽은 책의 내용을 전부 적어놓지 않는 한 내 머리 속에는 그저 '책에 대한 추억'만이 남아있게 된다. 대학교 저학년 시절 읽었던 책들이 다 그런 식이다. 흥미롭게 바라보았던, 강렬한 인상을 남긴 팩트들은 대체로 기억에 남았지만, 그 책에서 정말 곱씹어야 할 부분들은 내 머리 속에서 지워진지 오래다. '나 그거 읽었소'라고 자랑할 때가 아니면 쓸모가 없다. 올해 도서구입비의 절반은 한 번도 안 읽은 책에, 나머지 절반은 이미 읽었지만 가지고 있지 않은 책을 구입하는 데에 쓰겠다.
표의 끄트머리에 달려있는, 날짜가 적혀있지 않은 책들이 바로 사서 읽은 것들이다. 아니, 다른 사람에게 빌려 읽은 것들이 적지 않으니, 도서관에서 대출받지 않은 것들이라고 하는 편이 정확하겠다. 저것들 중 일부는 언제 읽었는지 그 날짜를 정확하게 추적할 수 있지만, 나는 그 일을 사적인 차원에서 하고 싶으므로 여기서는 그냥 떠오르는 대로 적은 그것을 그대로 첨부한다.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알 수 있겠지만, 가령 《샌드위치 위기론은 허구다》와 《88만원 세대》는 우석훈의 다른 책을 뭉터기로 보던 시절에 읽은 것이다. 그 밖에도 이것저것이 있지만 그건 개별적인 맥락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2007년의 책은 누가 뭐라고 해도 《88만원 세대》였다. 그 책은 지금껏 문제작이었으며 앞으로 적어도 5년간은 문제작일 수밖에 없다. 목록을 다시 확인하다보니 도서관에서 빌려읽기도 했다는 사실이, 즉 중복기재되어있다는 것이 확인되었지만 그것을 굳이 정정하지는 않기로 한다. 이미 읽은 책을 번역하는데 예산의 반을 할당하겠다는 말에서 드러나듯이, 올해부터는 두 번 이상 반복해서 읽은 경우라도 독서 리스트에 포함시킬 계획이기 때문이다(그러고보니 가지고 있는 책의 목록과 책을 읽은 기록 자체는 별도로 관리해야 하는군). 영화를 사랑하는 세 단계에 대한 트뤼포의 말은 무엇보다 책에 대해 적용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아무튼, 매우 늦었지만, 이렇게 2007년의 독서 목록을 결산한다.
추가) 누락된 책 세 권을 목록에 추가한다. 특히 이글턴의 《성스러운 테러》를 아주 인상적으로 읽었다. 이택광 선배에 따르면 이글턴은 퇴임한 후 한 달에 한 권 꼴로 책을 내고 있다고 한다. 노동의 의무로부터 해방된 마르크스주의자가 이루어낼 지적 성취를 기대하게 된다.
추가2) 또 누락된 책 세 권이 있었다. 《진단명: 사이코패스》를 다시 꺼내서 만져봤는데, '윤리적 절대 자유'가 낳는 귀결은 결국 사이코패스가 아닐까 한다. 그들은 모든 규율로부터 '탈주'한다. 소유하기 위해 훔치는 도둑은 바로 그 훔치는 행위를 통해 다이아몬드에 경외심을 표하는 것이라고 체스터튼이 말했다. 사이코패스들에게는 그러한, 존재 그 자체에 대한 최소한의 존경이 없다.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천성적으로, 니체가 말하는 '약탈하는 군인들'처럼 살아갈 뿐이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자세한 이야기를 더 할 수도 있다.
《화차》의 결말은 말 그대로 '쩐다'. 영화 판권이 팔린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그 소설의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일본 대중문학에서 애용하는 '한 줄로 평가하기'가 싫어서 몸서리를 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토리텔링에 빠져들어 끝까지 읽게 되었다. 하층민인 주인공이 아버지의 이름을 사망자 명단에서 찾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있는 모습을 보자, 그대까지 사랑으로 버텨오던 부잣집 도련님은 이별을 통보하고 만다. 잠시 딴소리를 하자면, 일본을 중산층만으로 이루어진 사회라고 말하는 것은, 이런 것들을 종합하여 볼 때 부당한 일인 것 같다. 아무튼 나는 2007년에 두 권의 미야베 미유키 소설을 읽었는데, 인물에 대한 화자의 '한 줄 평가'가 드물거나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는 《스나크 사냥》이 좋았지만, 스토리텔링과 주제의 흡입력 등에서는 아무래도 《화차》의 손을 들어주게 된다. 두 권 모두 한 번쯤 읽어볼만한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