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택광 선배의 블로그에 방문했다가, 숭례문 화재에서 9/11 테러의 심정을 느낀다는 내용을 보고 화들짝 놀라 이 글을 쓴다. 아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 숭례문 화재는 9/11 테러여서는 안 된다. 바로 그러한 시선들이 모여 이 사건을 한국판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으로 몰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떠도는 심상찮은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가. '남대문에 불 싸지르겠다고 노숙자가 궁시렁' 같은 언어들이, 바로 방금 전까지 이 사이트 저 사이트에 악플을 싸지르고 다니던, 하지만 남대문이 불길에 휩싸임과 동시에 졸지에 선량한 '시민'이 되어버린 네티즌 님들의 주둥이에서 쏟아져 나오는 모습에서 공포를 느끼는 사람이 나밖에 없단 말인가?
물론 사태가 일대일로 대응되지는 않는다.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한나라당이 200석 이상의 득표를 할 가능성보다는, 이회창이 몰고 올 신당과 국회를 분점할 가능성이 더 크다. 하지만 노숙자들에 대한 명료하지 않은 공분은 결국 전반적인 사회적 약자들에게 쏟아질 것이다. 그리하여 이회창의 신당은, 대선 당시 내걸었던 '따뜻한 보수' 같은 구호 대신, '질서를 바로잡자'는 식으로 한 술 더 뜨는 극우파적 행보를 시작할 것이고, 한나라당 또한 서울을 깨끗하게 '청소'하자는 식으로 여론을 몰아갈 것임에 분명하다. 인수위의 '꼴통스러움'을 욕하던 '네티즌 시민'들이, 서울역에서 노숙자를 '청소'해내는 일에 과연 찬성할까, 반대할까? 이렇게 미쳐 돌아가는 판국 속에서 좌파 신당은, 설령 총선 전에 완벽하게 창당된다 하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서세영은 한 때 술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예수쟁이와 빨갱이가 없으면 노숙자들 밥은 누가 주니?' 자, 이제 예수쟁이들은 속세의 권세로 넘어갔고, 빨갱이들은 사분오열하여 바지에 똥을 싸고 주저 앉았다. 그리고 서울의 노숙자들은 죽거나 혹은 죽는 것보다 나쁘거나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다. 숭례문 방화 사건을 보며 9/11을 연상하는 사람들 중 많은 수가, 잠재적인 범인으로 지목될 것임에 분명한 서울역의 속죄양들을 쓸어내는 인수위 혹은 이명박 정부의 행보를 못 이기는 척 찬성할 것 또한 자명한 일이다. 과연 '네티즌 시민'들의 알량한 반MB 감정이 한국의 민주주의와 상식을,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도리를 지켜내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속죄양을 잡으면 이제부터 진짜 카니발이 시작된다.
나도 제발 내 생각이 틀렸으면 좋겠다...
2008-02-12
2008-02-11
그들은 지젝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지젝을 추종하는 사람도, 그 추종하는 이들을 논박하는 사람도, 그들과는 거리를 두고 '포스트모던'에 휩쓸리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사람도, 그 누구도 지젝이 정말 하고 있는 그 무언가를 하고 있지는 못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지젝은 영화를 비평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현란하게 풀어내지만, 그 모든 지적 활동에 앞서서 순수하게 영화를 즐길 줄 아는 영화광이다. 영화 《300》에 대한 지젝의 평을 우선 읽어보도록 하자. 지젝을 열심히 읽는 사람들, 혹은 그에게 반박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뒷부분의 이론적인 해설에 관심을 갖겠지만, 내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낄낄낄'로 일관되어 있는 두 번째 문단이다. 일반적인 비평가들과는 달리 그는 페르시아에서 미 제국의 모습을 발견하고, 스파르타의 결사대를 탈레반으로 간주한다. CG의 발전에 대한 언급도 흥미롭다. 현실의 배경 속에 가상의 인물이나 캐릭터를 삽입하는 대신, 실제의 인물을 찍어 가상의 배경 속에 배치하는 기법을 보여주었다며, 그것을 매우 흥미로운 것으로 지적하고 있다.
여기서 나는 지젝의 '통찰'이 아니라 '안목'을 존중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오랜 세월동안 즐기며 영화를 봐 온 사람만이 발견해낼 수 있는 요소들이 이 짧은 글의 구석구석에 포진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이론적인 논의에 동의하고 말고는 그 다음이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지젝의 이론들이 '옳은 이야기를 괜히 빙빙 돌려서 하는 것' 정도라고 생각한다(그의 정치적인 감각이 탁월하다는 말에 반만 동의하는 것도 그래서이다. 지젝에 반대하는 '좌파'들은 대부분 완전히 틀린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들과 대립하는 한 '정치적으로 올바른 이야기'를 하는 것은 땅 짚고 헤엄치는 것 만큼이나 간단하다). 하지만 《300》에 대한 그의 지적은 흥미롭다. 그것이 어떤 인식론적인 통찰을 담고 있어서가 아니라, 지적으로 탁월한 성취를 이룬 영화광이 내놓을 수 있는 신선한 시각을 한껏 머금고 있기 때문이다. 이론적인 내용은 그 다음이다.
또한 지젝은 소설광이기도 하다. '하다'라는 표현은 너무도 단정적일 수 있겠다. 내 주변 사람들이 말하는 바에 따르면 그렇다고 한다. 페트리샤 하이스미스에 대한 그의 논의에는 무언가 매우 탁월한 지점이 있다고도 한다. 자꾸 소문의 벽 너머로 후퇴하게 되는 것 같으니, 다소 비슷한 뉘앙스에서 내가 조금이나마 읽어본 에코를 예로 들어보자. 에코는 자타가 공인하는 문학 노년이다. 본인이 소설을 쓰기 전부터 그랬다. 수 개 국어를 동시에 할 줄 아는 그는 자신이 할 줄 아는 언어로 소설을 읽는 즐거움에 대해 잘난 척을 하기도 했다. 루카치 같은 철학자는 애초에 문학평론가니까 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미국의 법경제학자 리차드 포스너도, 출판사의 청탁을 받고 어떤 소설의 발문을 써주기 위해 그 작품을 읽다가 필을 받고 《성과 이성》이라는 두텁고 무게감 있는 이론서를 써냈다. 이런 사례들을 아무리 들어봐야 '지젝은 소설광이다'라는 명제를 입증할 수 없다는 거 잘 아는데, 아무튼 지젝은 소설광이다.
지젝이 영화와 소설 등의 문학 작품을 설명하면서 보여주는 빛나는 성취의 많은 부분은, 이렇듯 그가 실제로 그것들을 즐기며 살아가는 데 기인하고 있다고 나는 추측한다. '나는 이걸로 논문을 써야지'라고 작심하고 붙잡고 본 영화에 대해 그토록 발랄한 표현을 쓸 수 있다면 그는 도착증 환자일 것이다. 지젝은 문화연구가이기에 앞서 대중문화를 즐기는 한 사람이고, 바로 그 점이 지젝의 대중적 인기의 기반이 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논어에서도 머리 좋은 놈이 열심히 하는 놈 못 이기고, 열심히 하는 놈이 즐기는 놈 못 이긴다고 하였듯이, 대중들은 즐기면서 글을 쓰는 지젝의 진가를 본능적으로 간파하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한국어 화자인 우리의 현실을 돌이켜보게 된다. 지젝을 섬기는 사람도 많고, 그러한 '지젝빠'들을 까는 사람도 적잖게 있다. 하지만 그런 부류의 '인문돌이'들이 차려놓은 블로그나, 혹은 그들이 흔적을 남기는 게시판 등을 들여다보면, 과연 지젝만큼 자연스럽게 대중문화의 맥락을 향유하고 있는 이가 존재하기나 하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나는 소설 따위 읽지 않습니다'라고 써붙여 놓고 자랑스레 떠벌이는 자들이 왜 이리 많은지, '영화 볼 돈이 없는 가난한 학생'이라고 완장을 차고 좋아라 하는 이들은 또 왜 이리 많은지. 특히나 '소설 볼 시간이 없다'는 말을 들으면 기도 차지 않는다. 적어도 지젝에게는 인터넷 할 시간이 없으면 없지 소설 볼 시간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놓치고 싶지 않은 영화가 있다면 시사회에 참석하거나 개봉관을 서둘러 찾는 일도 잊지 않을 것이다. 문화비평을 하기에 앞서서, 우리에게는 순수한 의미에서의 문화 향유가 필요하다.
한국에서 문화 컨텐츠를 논하는 대부분의 필자들이 그렇다. 그들은 너무도 손쉽게 자신이 비평의 대상으로 삼는 '그것'에 대한 평가를 마무리짓고, '대중'이나 '광기', '문화적 흐름'이나 '도치', '향락', '재발견' 같은 추상적인 개념으로 도피한다. 하지만 지젝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글에서 다루는 부분은 전체 분량에서 극히 일부에 불과할지라도, 그는 자신이 다루는 작품의 핵심을 짚어내어 결정적인 한 지점을 콕 하고 찔러내고 있다. 그것은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통찰이 아니라 안목에 의해 좌우되는 문제이며, 그렇기에 그의 이론만큼이나 성취하기 어려운 문화적 소양의 축적을 요하는 것이기도 하다. 《디 워》를, 《칼의 노래》를, 혹은 2002 월드컵을 논할 때 과연 우리는 그 대상에게 얼마나 가까이 다가가 있었을까.
이러한 문화적 소양의 결여가 과연 어디에서 비롯하였는지 짐작하기란 쉽지 않다. 혹자의 말처럼 사람들이 매일 야근을 하는 통에 '즐길 시간'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인구가 1억 명이 되지 못해서인지, 그도 아니면 소설책 한 권을 사서 볼 돈도 없는 이들이 너무 많아서인지, 그 모든 것들이 복합적으로 종합되어 있는지 감을 잡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인문학을 한다고 하는, 혹은 비평의 언어를 생산한다고 하는 이들 사이에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일종의 엄숙주의가 퍼져 있다는 것이다. 소설을 읽을 시간이 없다는 사람들이, 혹은 한 번 읽고 더 안 볼 책 사보기는 아깝다는 사람들이 왜 이리 많은지 모르겠다. 그들에게는 책을 읽으면서 단순히 '즐기는' 것이 '금지된 쾌락'에 속하는 것일까? 흠, 이런 가설은 한 번쯤 세워봄직하다. 그런 의미에서 《민족, 한국 문화의 숭고 대상》의 9페이지에 실린 한 어구의 내용을 적절하게 차용해보는 시간을 잠시 갖도록 하자.
말을 하고 보니 말이 되는 것도 같다. 지젝을 즐기기 위해 지젝이 즐기는 것들을 즐기는 것은 지젝의 광신도들에게, 심지어는 그들을 논박하는 이들에게도 '금지된 쾌락'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지젝이 봤다는 영화를 보기 위해 씨네마테크를 향하거나 DVD를 구입하거나, 페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을 장바구니에 담는 대신, 지젝이라는 숭고한 대상의 진실을 놓고 하염 없는 격렬한 투쟁을 벌이는 것이다... 오, 그들은 지젝이 하는 일을 정녕 알지 못하나이다.
여기서 나는 지젝의 '통찰'이 아니라 '안목'을 존중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오랜 세월동안 즐기며 영화를 봐 온 사람만이 발견해낼 수 있는 요소들이 이 짧은 글의 구석구석에 포진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이론적인 논의에 동의하고 말고는 그 다음이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지젝의 이론들이 '옳은 이야기를 괜히 빙빙 돌려서 하는 것' 정도라고 생각한다(그의 정치적인 감각이 탁월하다는 말에 반만 동의하는 것도 그래서이다. 지젝에 반대하는 '좌파'들은 대부분 완전히 틀린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들과 대립하는 한 '정치적으로 올바른 이야기'를 하는 것은 땅 짚고 헤엄치는 것 만큼이나 간단하다). 하지만 《300》에 대한 그의 지적은 흥미롭다. 그것이 어떤 인식론적인 통찰을 담고 있어서가 아니라, 지적으로 탁월한 성취를 이룬 영화광이 내놓을 수 있는 신선한 시각을 한껏 머금고 있기 때문이다. 이론적인 내용은 그 다음이다.
또한 지젝은 소설광이기도 하다. '하다'라는 표현은 너무도 단정적일 수 있겠다. 내 주변 사람들이 말하는 바에 따르면 그렇다고 한다. 페트리샤 하이스미스에 대한 그의 논의에는 무언가 매우 탁월한 지점이 있다고도 한다. 자꾸 소문의 벽 너머로 후퇴하게 되는 것 같으니, 다소 비슷한 뉘앙스에서 내가 조금이나마 읽어본 에코를 예로 들어보자. 에코는 자타가 공인하는 문학 노년이다. 본인이 소설을 쓰기 전부터 그랬다. 수 개 국어를 동시에 할 줄 아는 그는 자신이 할 줄 아는 언어로 소설을 읽는 즐거움에 대해 잘난 척을 하기도 했다. 루카치 같은 철학자는 애초에 문학평론가니까 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미국의 법경제학자 리차드 포스너도, 출판사의 청탁을 받고 어떤 소설의 발문을 써주기 위해 그 작품을 읽다가 필을 받고 《성과 이성》이라는 두텁고 무게감 있는 이론서를 써냈다. 이런 사례들을 아무리 들어봐야 '지젝은 소설광이다'라는 명제를 입증할 수 없다는 거 잘 아는데, 아무튼 지젝은 소설광이다.
지젝이 영화와 소설 등의 문학 작품을 설명하면서 보여주는 빛나는 성취의 많은 부분은, 이렇듯 그가 실제로 그것들을 즐기며 살아가는 데 기인하고 있다고 나는 추측한다. '나는 이걸로 논문을 써야지'라고 작심하고 붙잡고 본 영화에 대해 그토록 발랄한 표현을 쓸 수 있다면 그는 도착증 환자일 것이다. 지젝은 문화연구가이기에 앞서 대중문화를 즐기는 한 사람이고, 바로 그 점이 지젝의 대중적 인기의 기반이 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논어에서도 머리 좋은 놈이 열심히 하는 놈 못 이기고, 열심히 하는 놈이 즐기는 놈 못 이긴다고 하였듯이, 대중들은 즐기면서 글을 쓰는 지젝의 진가를 본능적으로 간파하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한국어 화자인 우리의 현실을 돌이켜보게 된다. 지젝을 섬기는 사람도 많고, 그러한 '지젝빠'들을 까는 사람도 적잖게 있다. 하지만 그런 부류의 '인문돌이'들이 차려놓은 블로그나, 혹은 그들이 흔적을 남기는 게시판 등을 들여다보면, 과연 지젝만큼 자연스럽게 대중문화의 맥락을 향유하고 있는 이가 존재하기나 하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나는 소설 따위 읽지 않습니다'라고 써붙여 놓고 자랑스레 떠벌이는 자들이 왜 이리 많은지, '영화 볼 돈이 없는 가난한 학생'이라고 완장을 차고 좋아라 하는 이들은 또 왜 이리 많은지. 특히나 '소설 볼 시간이 없다'는 말을 들으면 기도 차지 않는다. 적어도 지젝에게는 인터넷 할 시간이 없으면 없지 소설 볼 시간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놓치고 싶지 않은 영화가 있다면 시사회에 참석하거나 개봉관을 서둘러 찾는 일도 잊지 않을 것이다. 문화비평을 하기에 앞서서, 우리에게는 순수한 의미에서의 문화 향유가 필요하다.
한국에서 문화 컨텐츠를 논하는 대부분의 필자들이 그렇다. 그들은 너무도 손쉽게 자신이 비평의 대상으로 삼는 '그것'에 대한 평가를 마무리짓고, '대중'이나 '광기', '문화적 흐름'이나 '도치', '향락', '재발견' 같은 추상적인 개념으로 도피한다. 하지만 지젝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글에서 다루는 부분은 전체 분량에서 극히 일부에 불과할지라도, 그는 자신이 다루는 작품의 핵심을 짚어내어 결정적인 한 지점을 콕 하고 찔러내고 있다. 그것은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통찰이 아니라 안목에 의해 좌우되는 문제이며, 그렇기에 그의 이론만큼이나 성취하기 어려운 문화적 소양의 축적을 요하는 것이기도 하다. 《디 워》를, 《칼의 노래》를, 혹은 2002 월드컵을 논할 때 과연 우리는 그 대상에게 얼마나 가까이 다가가 있었을까.
이러한 문화적 소양의 결여가 과연 어디에서 비롯하였는지 짐작하기란 쉽지 않다. 혹자의 말처럼 사람들이 매일 야근을 하는 통에 '즐길 시간'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인구가 1억 명이 되지 못해서인지, 그도 아니면 소설책 한 권을 사서 볼 돈도 없는 이들이 너무 많아서인지, 그 모든 것들이 복합적으로 종합되어 있는지 감을 잡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인문학을 한다고 하는, 혹은 비평의 언어를 생산한다고 하는 이들 사이에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일종의 엄숙주의가 퍼져 있다는 것이다. 소설을 읽을 시간이 없다는 사람들이, 혹은 한 번 읽고 더 안 볼 책 사보기는 아깝다는 사람들이 왜 이리 많은지 모르겠다. 그들에게는 책을 읽으면서 단순히 '즐기는' 것이 '금지된 쾌락'에 속하는 것일까? 흠, 이런 가설은 한 번쯤 세워봄직하다. 그런 의미에서 《민족, 한국 문화의 숭고 대상》의 9페이지에 실린 한 어구의 내용을 적절하게 차용해보는 시간을 잠시 갖도록 하자.
한국에서 지적 엔터테인먼트는 오랫동안 금지된 쾌락에 속했다. 한국인에게 이 금지된 쾌락은 '슬라보예 지젝'이라는 대상으로 현신한다. 불가능한 대상, '슬라보예 지젝'에 대한 열망은 쾌락은 쾌락이되 고통스러운 향락을 반복하게 만든다. 이 대상이 채우고 있는 빈자리, 그 결여의 지점에 완전무결한 지젝은 숭고 대상으로 존재한다.
말을 하고 보니 말이 되는 것도 같다. 지젝을 즐기기 위해 지젝이 즐기는 것들을 즐기는 것은 지젝의 광신도들에게, 심지어는 그들을 논박하는 이들에게도 '금지된 쾌락'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지젝이 봤다는 영화를 보기 위해 씨네마테크를 향하거나 DVD를 구입하거나, 페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을 장바구니에 담는 대신, 지젝이라는 숭고한 대상의 진실을 놓고 하염 없는 격렬한 투쟁을 벌이는 것이다... 오, 그들은 지젝이 하는 일을 정녕 알지 못하나이다.
2008-02-08
지구를 뒤덮은 슬럼에서 퀴즈쇼에 참여하다
알라딘 서재에 《Q & A》에 대한 리뷰를 올렸다.
리뷰 전문을 읽으실 분은 여기로.
. . . 《Q & A》는 현대 인도 사회에 대한 일종의 파노라마를 제공한다. 그것이 주마간산이라고 해서 우리가 이 책의 가치를 폄하할 필요는 없다. 한국에 사는 독자인 우리는 그저, 점점 평평해지면서 작아지는 세계의 가장자리 바깥으로 떨어지고 있는 이들이 너무도 많다는 사실 정도를 기억하면 된다. 나 자신도 아차하는 순간 그런 처지가 될 수 있다는 것까지 굳이 떠올리지는 말기로 하자. 그런 '통찰'을 위해서라면 우리는 《퀴즈쇼》를 펼쳐보는 편이 더 나을 테니 말이다.
리뷰 전문을 읽으실 분은 여기로.
2008-02-05
왕도정치의 실용성과 그 방법론
도를 이룬 자에게는 도와주는 이가 많고 도를 잃은 자에게는 도와주는 이가 적다. 도와주는 이가 극단적으로 적은 경우에는 친척조차 배반하고, 도와주는 이가 지극히 많은 경우에는 천하 사람들이 따른다. 그러면 천하 사람들이 따르는 나라를 가지고 친척이 배반하는 나라를 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싸우지 않지만 싸우게 되면 반드시 승리하는 것이다.73쪽, 《맹자》 (서울: 책세상 2002)
. . . 필자들은 연구 대상을 확대해, 1816년 이래 벌어진 전쟁 80개를 추가해 조사해 보았다. 해당 국가의 사회 계층화 정도는 당시 문헌을 조사해 판단했다. 분석 결과, 전쟁 당사국 중에서 사회적으로 더 평등한 구조를 가진 국가가 전쟁을 이긴 경우는 80%인 것으로 나타났다.13쪽, "평등한 나라가 이긴다", 《Foreign Policy》 한국어판, 2007년 11/12월호, 통권 163호
용감무쌍한 전투력과 사회 평등 사이에 무슨 상관이 있기에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둘 사이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작용할 수 있다. 국민개병제 체제로 구성된 군대의 내부 결집 정도가 다양할 수 있다는 점, 불평등한 사회의 군대는 종종 국내 반대 세력을 진압하는 데 동원된다는 점, 이런 사회에서는 적에게 심정적으로 이끌리는 가난한 병사들이 존재한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문제는 맹자가 말하는 "왕도정치론"이 일종의 프로파간다를 통한 '사회 통합'일 가능성 또한 적지 않다는 데 있다. 가령 그 유명한 양혜왕 상권의 1장을 살펴보자.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이익을 다툰다면 국가가 위태로워질 것"(15쪽, 같은 책)이라는 이유로 맹자는 이익을 말하는 양혜왕을 꾸짖는다. 임금이 인仁을 보여주면 신하와 백성들도 그것을 따라할 것이므로 임금은 이익 대신 인의만을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사회 구상이기는 하지만, 너무도 단순한 행동 모형에 입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국민국가의 구성원이 충실한 애국심을 느끼고 있을수록 전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굳이 위에 인용한 FP의 기사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모든 이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바와 같다. 문제는 그러한 '사회적 통합'을 이루는 방식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지도자가 먼저 본을 보여야'처럼 한국어 화자들의 입에서 너무도 쉽게 나오는 표현들은, 이렇듯 의외로 단단한 사상적 연혁을 갖추고 있고, 따라서 좀 더 정밀한 분석 및 역사적 고찰을 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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