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4-08

사마천. 이한우 옮김. 『이한우의 사기』(경기도 파주; 21세기북스, 2026), 총10권.



나는 이한우라는 이름을 번역가로 처음 알았다. 길버트 라일이 쓴 『마음의 개념』은 내가 처음 읽은, 한국어로 이해할 수 있는 분석철학서였다. 그 책을 번역한 사람이 바로 이한우, 당시 조선일보 기자. 안티조선 운동에 끼어들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악의 제국의 행동대장, 다스베이더 같은 존재였다.

안티조선 운동은 사라졌다. 망했다. 변질했다. 어떻게 말해도 좋겠다. 하지만 번역가 이한우의 역량은 조금도 줄어들거나 망가지지 않았다. 오히려 날이 갈수록 더욱 강해지고 있다. 조선일보의 품에서 나와 논어등반학교 교장이 된 후로도 마찬가지다. 서양철학에서 동양철학으로, 서양 고전에서 동양 고전으로의 지적 도약을 감행한 후, 그는 더욱 훨훨 날아가는 중이다.

 

이한우 논어등반학교 교장님께서 보내주신 『이한우의 사기』 총10권이 지난 주말 도착했다. 책을 받자마자 나는, 사기에 대해 어설프게 아는 대부분의 한국 식자층이 그럴 테지만, '열전'의 백이숙제 편부터 펼쳤다. 왜? 가장 유명하니까. 우리가 '사기' 하면 떠올리는 바로 그 이야기가 담겨 있으니까.

역시 잘 읽혔다. 내가 지금까지 읽어온 사기열전은 반쪽짜리, 아니 1/3쪽짜리도 안 되는 것이었다. 『사기』 삼가주, 즉 '사기집해', '사기색은', '사기정의'까지 모두 번역해서 붙인 뜻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시대별로 쌓인 주석들이 만들어내는 시층과 사유의 궤적이 아름다웠다.

그 위에 붙어 있는 역자 본인의 주는 또 어떠한가. 이미 『논어』 와 『문장정종』을 완역해낸 철학자 이한우는 사마천의 텍스트를 다시 한 번, (그가 주장하는) 정통 유교의 눈으로 꼼꼼히 읽어낸다.

첨부된 이미지 속 내용을 여러분도 한번 읽어보시기 바란다. 『이한우의 논어』는 "삼가주 완역 해설판"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지만 그것은 겸양의 표현일 뿐이다. 이 새 번역본은 사실상 '사기 사가주(四家注)'라 불러야 마땅하다.

『이한우의 논어』가 이렇게 탁월한 업적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옮긴이가 지니고 있는 역사철학의 확고함 때문일 수 있다. 백이열전을 읽고 감명을 받은 나는 책의 1권을 펼쳤다. 역자 서문이 눈에 들어왔다. 그 첫 세 문단을 옮겨 적는다.

1. 역사를 쓴다는 것은 어떤 행위인가?

이 질문은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이면서도 공허한 질문을 피하기 위해 치밀하게 준비된 물음이다. 사실 이 질문은 하이데거의 말대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만큼이나 조준이 잘못된 질문이다. 인간에게 '무엇(What)'을 물어서 나올 대답은 뻔하다. 정신과 육체의 결합체이다. 이를 향해 역사적 질문을 던질 수 없다. 고대 그리스의 인간이나 고대 중국의 인간이나 21세기 현대의 인간이나 똑같이 정신과 육체의 결합체일 뿐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어떻게(How)', 즉 존재 방식을 물어야 한다고 했다. 그것이야말로 본질적으로 '역사적인' 질문이다. 즉 같은 정신과 육체를 가진 인간이 어느 시간에 어떤 방식으로 존재했고 어느 공간에 어떤 방식으로 존재했는지를 묻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 또한 마찬가지이다. '어떻게'를 물어야 한다. 그것은 두 가지로 나뉜다. '어떻게 쓸 것인가'와 '어떻게 읽을 것인가'이다. 적어도 역사를 쓰는 사람은 일급 지성과 열린 시야를 가져야 한다. 아무나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6쪽, 역자 서]

역사를 '어떻게' 쓸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이 질문은 유교 경전의 전체 체계를 제왕학의 구조 속에서 읽어내는 이한우 동양 고전 해석학의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어쩌면 우리는 동양철학을 드디어 우리의 눈으로 읽어내는 시대의 개막을 목격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최대한 많은 독자분들이 이 여정에 함께해주시길 간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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