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까운 일이지만 현재 집회에 참가하는 사람들 중 적지 않은 수는 이명박 정부가 최소한의 정치적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면 광장에 서지도 않았을 사람들이다. 미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후, 여론의 동향을 관찰하다가 미국산 수입육이 냉동되어 있는 창고에 가서 육회 한 접시 비벼먹으면서 기자회견을 했다면 이 문제가 이렇게까지 커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정주영이 되고 싶었던 남자 이명박은, 정주영의 쇼맨쉽도 못 배웠고 그가 가지고 있던 선천적인 능력과 사람 다루는 기술 또한 전수받지 못했다. 나는 그가 조금만 더 능력이 있었더라면 지금의 비극은 발생하지 않았으리라고 짐작한다. 그는 소원대로 현대가의 일원이 되었어야 한다. 하지만 그럴 능력이 없었다.
이명박이 쫓겨날 위기에 처해 있다는 예측이 적지 않다. 우석훈 박사는 6월 10일에 100만 명이 모이면 한나라당이 돌아설 것이고 이명박은 하야할 수밖에 없으리라고 예측한다. 그 수준까지는 아니어도 이명박의 정치 생명이 거의 끝났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며, 그에 따라 인터넷 공간에서는 이후 발생할 정치 권력이 어떻게 분점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서서히 일어나고 있다. 혹자는 이것을 이합집산, 혹은 이권다툼, 좀 더 심하게는 이전투구 등으로 묘사하지만 그것은 정치 행위 자체를 더러운 것으로 간주하는 속편한 사고방식의 발로일 뿐이다. 정치에서 눈을 돌리는 것은 당신의 자유지만, 정치는 아무리 눈을 감아도 우리 앞에 있다.
돌아가는 판세를 보자. 이명박이 하야를 강요당한 이후 그 자리를 이어받을 수 있는 가장 유력한 후보자가 바로 복당 박근혜 여사라는 것을 부인하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이것은 죽 쒀서 개 주는 것보다 더 나쁘다. 복당 박근혜 여사의 당내 장악력은 이명박과 비교할 수 없이 강력하고, 친박연대를 포함한 범 한나라당 의석수는 전체 의석의 3분의 2에 육박한다. 늑대를 쫓아내고 범에게 물리는 상황이 도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명박 정권이 현재 이토록 허무하게 무너지고 있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원내 장악에 실패했다는 것인데, 박근혜는 다르다. 나는 박근혜가 대통령으로 앉아있는 상태에서, 한나라당의 주도로 이루어지는 개헌 따위 절대 살아서 보고 싶지 않다.
너무 비관적인 예측인 것 같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아니, 있을 수 없다. '시민'들의 정서는 아직 노회찬이나 심상정을 대통령 자리에 올려놓을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하지 않았다. 거의 매일 밤마다 시위 현장을 지키며 호민관 역할을 자처하는 그들이다. 노회찬과 조승수는 지난주 목요일 밤 광화문 사거리 교보문고 앞에서, 전경들에게 포위되어 있었던 십수명의 시민들을 구출해냈다. 구출이라는 단어가 전혀 아깝지 않다. 그들은 연좌 시위를 통해 전경의 포위망을 뚫었고, 갇혀있던 시민들은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특히 오마이뉴스를 비롯한 '중도' 매체들은 오직 시민들의 역동성과 자발성만을 찬양하기에 바쁘다. 진작에 노회찬 심상정이 촛불시위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나쁜 소식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한미 FTA를 무리하게 체결해서 결국 일을 이모양 이꼴로 몰아가는 기본 세팅은 참여정부 당시 이미 다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명박에 대한 반감을 노무현에 대한 호감으로 전환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쇠고기 수입 재개는 한미 FTA의 '4대 선결 조건'중 하나이며, 따라서 쇠고기 수입에는 반대하지만 FTA에는 찬성한다는 말은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다. 그리고 바로 그 한미 FTA를 추진한 장본인이 바로 노무현이다. 임종인 전 의원이 말하는 바와 같이, 그 과정에서 열린우리당의 당내 민주주의는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충분히 의사가 반영될 수 있는 민주적 논의 과정이 있었다면 정당인으로서 양보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어요. 그런데 민주적이지 않았습니다. 예컨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반대해서 헌법재판소에 제소한 국회의원 13명에 대해 우리 당에서 경고라는 징계를 했어요. 당에서 충분한 논의도 안했는데. 이라크 파병·대연정·비정규직법 때도 그랬습니다. 미리 의원들에게 이야기를 했어야죠. 국가보안법 폐지, 사학법 문제 등은 나로선 양보하기 어려운 것이었어요. 지금 생각해도 그 부분은 양보하기 어려워요.”
“쇠고기정국은 개발독재식 정치 심판 과정”(경향신문, 2008년 6월 5일), 강조는 인용자
그 장본인인 노무현의 영상을 보며 일군의 네티즌, 혹은 '시민'들은 집단 자위를 하고 있고, 견인합성체 유시민과 이해찬은 신당을 만들기 위한 포석을 깔고 있는데, 손학규를 중심으로 하는 통합민주당 당권파들은 이들의 움직임을 흡수하거나 저지할만한 정치력을 전혀 갖추고 있지 못하다. 박근혜가 어찌어찌 보궐대선의 승자가 되고, 왕년의 '개혁세력'들이 돌아와 야당을 하네 어쩌네 하면서 다시 정치적인 입지를 찾는다고 쳐보자. 이것은 말 그대로 'Again 1987'이다. 87년 혁명의 열기 뿐 아니라, 야당 세력이 분열하면서 기껏 직선제 개헌을 한 후 다시 노태우에게 정권을 내어준 민망한 역사마저도 다시 한 번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역사가 희극으로 반복되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는 촛불시위의 목표를 재설정해야 한다.
물론 그것은 이번 시위가 촉발된 기본적인 이유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사실 이번 사건이 터지게 된 동기는, 외신 기자의 시각에서 보자면 황당할 정도로 어처구니 없는 것이다. BBC의 최근 보도에 따르면 미국에서 식용으로 도축되는 소의 18%가 30개월령 이상이며, 따라서 미국인들이 먹지 않는 30개월령 이상의 소와 그 부산물을 수출하기 위해 미국 축산업계가 눈에 불을 켜고 있다는 주장은 근거 없는 것이라고 한다. 광우병의 위험을 아직까지도 집회의 주된 동기로 삼고 있는 사람들은 '미국 축산업계가 통계를 조작하고 있다'고 주장하겠지만, 그런 식의 논의는 한국 사회의 담론 수준을 진전시키는데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현 사태의 본질은 외교부가 농림부의 입장마저 도외시한 채 한미 FTA의 타결을 위해 '퍼주기 협상'을 했다는 혐의가 있다는 것이다. 경향신문의 자매 주간지인 뉴스메이커는 "쇠고기 협상 주무부서는 외교부였다"(뉴스메이커, 2008년 6월 5일)고 폭로했다. 기사를 살펴보자.
외교통상부는 1월 4일 인수위 보고자료 10쪽에서 '가. 한·미 FTA 비준/ 쇠고기 문제'라는 항목으로 '향후 조치 계획'을 보고했다. 여기에서 '쇠고기 문제는 한·미 FTA가 아니더라도 국제 기준에 따라 반드시 해결하여야 할 문제'라고 전제한 뒤 '미측의 한·미 FTA 비준을 촉진하기 위해 쇠고기 문제를 조기에 해결하되, 이를 한·미 FTA 이행 법안의 미 의회 제출과 연계되도록 추진'이라고 보고했다. . .
농림부가 사료 금지 조치와 FTA 비준의 시기를 연관시켜 언급했다면, 외교부는 단지 쇠고기 문제와 FTA 비준의 관계를 보고했다. 농림부의 인수위 보고서에서는 향후 추진계획에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 위생 조건 개정은 한·미 FTA와 연계시키지 않고 국민의 식품 안전 확보 차원에서 검토'라고 나타나 있다. 여기에 괄호 표시를 한 후 '그동안의 일관된 한국 측 입장'이라 명시해 놓았다. 농림부의 보고서가 쇠고기 협상이 FTA 비준뿐 아니라 국민건강과 연계돼 있다는 주장을 펼치는 것과 달리, 외교부 보고서에서는 국민 건강이라는 선결 조건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 .
쇠고기 협상은 결국 국민 건강에 대한 고려 없이 대부분 미국 측의 요구 사항 그대로 이뤄졌다. 어느 부처의 주장이 협상과정에서 받아들여졌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한·미 FTA 청문회 위원이었던 김종률 의원(통합민주당)은 "이 문건이 아니더라도, 외교부가 실질적으로 협상을 주도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았을 뿐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노무현 지지자들은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서울대 음대생이 전경의 군화발에 짓밟힌 사건의 근원적인 책임은 노무현에게 있다. 그것은 노무현 대통령님께서 단행하신 정부 구조 개편으로 인해 외교부에 지나친 권한이 부여되었다는 것, 더군다나 청와대 정책비서관이었던 정태인도 모를 정도로 극비리에 한미 FTA가 추진되고 있었다는 것, 그 모든 일이 외교부 내의 극소수 'FTA 마피아'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다는 것 등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임기를 마치고 봉하마을에서 카트라이더 놀음에 빠져있는 지금도, 그가 저질러놓은 일들의 영향은 살아있고 그에 따라 지금 시위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현실을 직시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줄곧 '광우병 무서워'만 외치는데, 논의의 수준이 그 모양이니까 (내가 지난 포스트에서 논한 바와 같이) 외신은 우리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건 국제적으로 보면 한 편의 거대한 헛소동이다. 한국의 정치적 분위기를 밀접하게 감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분명히 그렇다.
한국인인 우리의 입장에서는 이번 시위가 단지 고기 타령으로 멈춰서는 안 된다. 68혁명도 시작은 교육 문제에 대한 지엽적인 시위에 불과했다. 우리는 이명박 탄핵보다 더욱 근본적인 문제까지 파고들어야만 한다.
현 정국의 승리조건을 기존 정당정치의 구조 내에서만 찾으려고 하면 답이 나오지 않는다. 다들 잊고 있을까봐 다시 한 번 강조하는데, 범 한나라당계 의석이 전체 국회의 3분의 2를 장악하고 있고, 현재 가장 유력한 보궐대선 주자는 바로 그 정당의 배후 보스이다. 이명박을 권좌에서 몰아낼 수 있느냐 없느냐가 핵심이 아니다. 문제는 한국 사회 내에서 노동이 차지하는 비중을 얼마나 높일 수 있느냐, 실질적 민주화의 진전을 위하여 자본과 노동의 균형을 어느 정도까지 회복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전체 노동자의 70%에 육박하는 비정규직이 노동 3권을 보장받을 수 있고, 시간당 2500원밖에 못 받는 청소년 노동자들이 제 값의 임금을 받을 수 있으며, 최종적으로 삼성전자에 노동조합이 생길 수 있다면, 이명박을 쫓아내지 못한다고 해도 우리는 이긴 것이다. 87년 투쟁을 통해 제도적 민주주의가 달성되었다면, 2008년 투쟁에서는 경제적 민주주의가 달성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번 시위를 통해 87년 이후 최초의 '정치 파업'을 기획하고 있는 민주노총의 결단을 지지한다. 그것은 그들이 조합주의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을 동시에 뜻하기 때문이다. 프레시안에서 보도하는 바와 같이, "이번 총파업의 요구 사항은 쇠고기 저지 외에도 대운하 반대, 물가 인하, 한미 FTA 반대, 공기업 민영화 저지 등의 전사회적 이슈"인 것이다. 이것은 "아이들이 무슨죄냐, 우리들이 지켜주자!"를 외치는 어머니들의 그것과 다른 층위를 구성한다. 비록 지금은 한미 쇠고기 협상 무효화를 핵심 요구로 내세우고 있지만, 나는 민주노총이 그것을 슬그머니 뒤로 미루어두고 범 사회적인 이슈에 집중할 것을 기대한다. 동시에 이랜드 노동조합, 그 외 다양한 노동조합의 목소리가 더욱 커져야 하며, 저소득에 시달리고 있는 젊은이들 또한 쇠고기를 넘어 비정규직 고용 안정화 등을 외치기 시작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김이태 박사의 희생을 헛되이해서는 안된다. 대운하 건설에 대한 그의 양심선언은 이 촛불시위가 비단 미국산 쇠고기의 문제에 멈춰서는 안된다는 강렬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하지만 기존 정치의 틀만 놓고 본다면 현 정국의 전망은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다. 시위에 참가하는 시민들이 바라는 바도 결코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시각을 넓혀야 한다. 최장집이 오래 전부터 지적해오는 '한국 사회의 실질적 민주화'가 무엇인지 숙고해보자. 답은 간단하다.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해야 하고, 양극화를 완화하며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착취의 고리를 깨야 한다. 광장으로 뛰쳐나가 이명박을 몰아내고 노무현을 재옹립하는 것은 이 시점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차피 노무현도 삼성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일개 정치인일 뿐이다.
특검의 수사 결과를 보며 가슴을 쳤던 당신이라면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삼성을 잡을 수 있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삼성 노동조합 뿐이다.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권력을 시장에 넘긴 그분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번 시위에서 연이어 외쳐지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구호가 진정으로 향해야 할 방향이 어디인지도 명확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명박을 몰아내고 쥐새끼를 때려잡고 어청수를 쫓아내고 다 좋다. 하지만 그것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승리 조건이라고 보기 어렵다. 우리는 군사 독재와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위해 광장에 서고 촛불을 켜고 물대포를 맞고 있다. 2008 촛불시위, 승리의 조건은 삼성 노동조합이다. 승리의 조건은 최저임금 인상이다. 승리의 조건은 민영화 저지이며, 승리의 조건은 졸속 체결된 한미 FTA 협상 전면 재검토이다. 그 모든 것들을 위해, 나는 광화문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