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레시안 [촛불의 소리]에 기고한 글입니다. 몇 개의 글이 업데이트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기고문이 올라오고 있지 않네요. 어조와 노선이 프레시안과 맞지 않아 선택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글은 가급적 6월 10일 이전에 공표되어야 하므로, 원칙을 잠시 접어두고 먼저 블로그에 올립니다.
* 프레시안에 기사 업데이트 되었습니다.
"확성기를 끄자! 구호를 되찾자!"(프레시안, 2008년 6월 9일 오후 12시 04분)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 현재 촛불시위대는 6월 1일까지 가지고 있던 자발적인 역능을 많이 잃어버린 상태이다. 안국동의 좁은 골목에서 목이 터져라 '연행자를 석방하라'고 외치며, 모두가 모두의 동료였던 그런 촛불시위는 현재 광화문에 없다. 경찰은 6월 2일을 기점으로, 서울 시내의 치안을 전부 포기한 채 오직 청와대만 방어하는 것을 골조로 하는 무대응 전략을 꺼내들었다. 동시에 광우병국민대책회의는 6월 5일 밤부터 8일 저녁까지 이어지는 '72시간 시위'를 기획했다. 전자에 의해 여태까지 마법처럼 먹혀 들어가던 '막히면 돌아가는 전략'은 소용없게 되었다. 한편 후자에 의해, 시민들은 스스로 자기 목소리로 구호를 외치고 의사를 표현하는 역량을 잃어버린 채, 한낱 구경꾼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 두 가지 현상이 맞물려 우리는 '폭력시위로 변질된 촛불시위'라는 착시현상을 경험하고 있다.
경찰의 전략에 대해 먼저 말해보자. 경찰은 현재 대한민국의 치안을 거의 포기한 상태이다. 국군 통수권자가 거주하는 특정한 건물 하나를 지키는 것이, 서울 시내에 집결한 150여개 전경 중대의 유일한 목표인 것이다. 심지어 교통경찰도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6월 8일, 급기야 경찰은 종로 일대의 교통 통제도 해주지 않음으로써 촛불시위대에 대한 시민들의 반감을 증대시키는 전략까지 택하고 있다. 이것은 복잡하게 해석할 필요도 없이, 이렇게 버티고 넘어가겠다는 전략이다. 이명박 대통령 본인의 말마따나 '소나기를 피하고 보자'는 속셈인 것이다. 독립문에서 인사동까지, 청와대로 통할 수 있는 모든 길을 전경들이 봉쇄하고 있다. 전경들은 버스 안에 가득 탄 채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힘겹게 봉쇄망이 약한 곳을 '뚫어'보면, 그 뒤에는 더 많은 수의 전경들이 새카맣게 진열해 있다. 시민들이 청와대를 포위하고 있는 형국이지만, 사실상 청와대가 경찰을 앞세워 시민들의 정당한 의사 표현을 포위하고 있는 것이다.
대책회의의 72시간 집회 진행에 대해서도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자발적인 구호가 울려퍼지던 거리에 고출력 확성차를 끌고 나왔다. 예전에 거리시위를 지휘하려다가 시민들의 반발을 사고 철수했던 봉고차 수준이 아니다. 대형 트럭에 무지막지한 방송 장비를 때려박아 나왔고, 그 스피커를 통해 '광야에서', '님을 위한 행진곡' 등의 민중가요를 틀어댔다. 특히 '대한민국 헌법 제1조'가 인상적이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파는 테이프에나 어울릴법한 쿵작쿵작 박자에 어린이들의 목소리가 얹혀진 그런 노래가 울려퍼졌다. 사회자는 자꾸 사람들에게 뭔가를 설명하려 들고, '... 입니다 그렇지않습니까여러분~!' 같은 말투로 동의를 구하는 데 급급했다. 자유발언이 있긴 했지만 내용은 늘 듣던 그것들의 반복일 뿐이었다. '미친소 너나먹어', '이명박은 물러가라', 등등 두 주가 넘도록 질리도록 외쳐온 그 말들이 늘어난 테이프처럼 반복되고 있었다. 더욱 나쁜 것은 광화문 광장에 모인 그 수많은 사람들이 구호를 외치기는 커녕, 확성차의 엄청난 출력에 짓눌려 '무대'를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6월 5일의 밤은 그렇게 지나갔다.
청와대로 가는 길이 철저히 봉쇄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시위대는 애가 타기 시작했다. 자동차가 다니는 대로 뿐 아니라, 종로의 복잡한 뒷골목에도 전경들이 배치되어 있었지만, 그 중 가장 약한 부분을 찾아서 돌파하고자 하는 시도가 현충일 밤에 수 차례 있었다. 새문안교회 뒷골목에서 벌어진 충돌이 가장 격렬했다. 경찰과 시민들 사이에 직접적인 폭력이 발생하지는 않았다.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도리어 위험한 행동을 자행하고 있던 것은 경찰 측이었다. 그들은 지하 주차장 옆 좁은 진입로에 백여 명 이상의 전경들을 무리하게 배치함으로써, 새벽 2시경 십여 명의 전경들이 0.5미터 정도 추락하도록 방치하기까지 했다. 시민들은 지휘관에게 안전을 위해 전경들을 일부 철수할 것을 요구했지만 경찰측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전경들이 대규모 항명을 한다 해도 나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정부는 국민들만을 포기한 것이 아니다. 이명박 정권은 자신들을 에워싸고 있는 전경들의 기본권마저도 내팽개치고 있다.
현충일의 밤, 소수의 사람들이 새문안교회 등의 루트를 통해 청와대로 가는 길을 내고자 고분분투하고 있을 때, 대다수의 시민들은 광화문 광장에 앉아 야식을 먹으며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나 또한 지금까지의 집회 문화가 지나치게 투쟁적이었고 엄숙했다는 비판에 대해 동의한다. 하지만 서울을 통째로 내주고 청와대만 지키면서 시간을 보내겠다고 작정한 이명박이, 광화문 광장에서 '소풍'중인 국민들을 과연 두려워하긴 할까? 청와대에 불을 지르겠다는 것도 아니고, 이명박에게 돌을 던지겠다는 것도 아니다. 그저 그 앞에서, 가장 잘 들릴 수 있는 곳에서 구호를 외치겠다는 것인데 전경들은 차벽을 쌓고 시위대를 막아서고 있다. 더욱 기가 차는 것은 언제부턴가 그저 구경꾼으로 변해버린 '일반 시민'들이, 한 발자국이라도 더 나아가보겠다는 사람들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다는 것이다. '민주 투사'의 판타지에 젖어있는 시민들은 제발 꿈을 깨기 바란다. 5월 31일에는 이렇지 않았다.
그 문제적인 시각, 모든 사람들은 하나가 되어 구호를 외쳤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고 누가 누구의 명령을 듣는 것도 없었다. 닭장차 위에 올라가 물대포를 맞던 청년이 전경에게 끌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물병이 하늘을 갈랐다. 연행자가 발생하는 즉시 골목 안의 모든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외쳤다. 연행자를 석방하라! 연행자를 석방하라! 시민들도 분노했다. 5월 31일, 우리가 비폭력이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닭장차를 흔들고 밧줄을 걸어 당기고 이쪽 진영으로 떨어진 전경을 향해 험상궂은 표정으로 막말을 내뱉었다. 유리창을 깨고 철창을 뜯어내지 않은 것은, 이 정도만 해도 이명박이 시민들의 분노를 알아줄 것이라는 최소한의 희망과 기대가 있었기 때문 아닌가?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우석훈 박사의 표현처럼 이명박은 "귓구멍에 공구리를 쳤"고, 청와대의 문을 꽁꽁 닫아놓은 채 그 안에서 공기업에 투하할 낙하산 인사의 명단이나 고르고 앉아있다. 이 상황에서 절망을 느끼지 않는 '시민'들을 보며 나는 절망을 느낀다.
'일반 시민'들의 참여도가 이렇게 저조하게 된 데에는 대책회의의 확성차량이 큰 역할을 했다. 대책회의는 청계천의 '촛불문화제'에서 진행하던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방식으로 노래를 틀고 구호를 '발사'하며 광화문에 자리잡았다. 문제는 그곳이 바로 전경과 대치하는 현장이었다는 것이다. 동화면세점 앞에 모여 전경들에게 완벽하게 포위당한 채 표현의 자유를 물리적으로 차단당하던, 하지만 한 사람씩 해산하여 포위망에서 빠져나간 후 가두 행진을 시작한 최초의 '촛불 시위대'는, 자발적인 구호를 통해 의사소통을 하고 서로 결속을 다져나갔다. 의료진이 필요한 상황이 닥치면 '의료진!' '의료진!'을 연호했고, 동시에 다른 사람들이 '비폭력'을 외치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6월 7일 밤, 이순신 장군 동상 앞에서 전경들이 소화기를 뿌리기 시작했을 때, 누군가가 눈에 분말이 들어가 의료진이 필요한 상황이 닥쳐왔다. 시위대는 늘 하던 방식대로 '의료진'을 연호했다. 하지만 그 구호는 후방으로 전혀 전달되지 않았다. 대책회의의 확성차량에서는 쿵짝쿵짝 신나는 박자와 함께 어린이들이 부르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가 낭랑하게 울려퍼졌다. 나는 순간 어지러웠고, 구토를 하고 싶었다. 부조리극의 한가운데 떨어진 듯한 기분이었다.
그나마 확성차량이 있던 장소는 전방에 가까웠는데, 갑자기 해설자가 마이크를 집더니 다음과 같은 내용의 멘트를 날렸다. '현재 분말로 인해 방송 장비에 손상이 올 수 있습니다. 차량을 후진시켜야 하니 시민 여러분은 비켜주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잠시 전진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다가 이내 후진 기어를 넣고 맹렬하게 후방을 향해 달려갔다.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님을 위한 행진곡'이 광화문을 더욱 부조리한 공간으로 만들어갔다. 확성차량 주변의 사람들은 그 노래를 따라부르며 바로 앞에서 벌어지는 현장을 관람하고 있었다. 전방에서도 사정은 비슷했다. 구호를 외치는 사람이 없다. 촛불시위의 초기, 진중권 교수는 '카메라들의 전쟁입니다'라는 말로 시민들과 경찰들의 상호 채증 전쟁을 묘사했다. 두어 주가 흐른 지금, 거리에는 시위대가 없고 오직 카메라만이 있다. 삶의 문제를 구호로 외치는 사람들 대신, 누군가가 두들겨 맞는 장면을 카메라에 담고 싶어서 그 자리에 온 것만 같은 '일반 시민'들이, 맥주에 닭꼬치를 먹다가 달려나와 핸드폰 카메라를 들이밀고 있는 것이다.
절망과 피로에서 한 발 벗어나기 위해 소화기 분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청으로 향하는 세종로 큰길 위에 오마이뉴스에서 대절해온 방송 중계 차량이 주차되어 있었다. 고작 100미터 앞에서 벌어지는 실제 상황을, '일반 시민'들은 마치 월드컵 중계라도 되는 양 길거리에 앉아서, 역시 관람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촛불집회에 참여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분말을 뒤집어 쓰고 있는 이들에게, '일반 시민'들은 역시 또 하나의 구경꾼들에 불과하다. 저 멀리 기타 반주에 맞춰 '광야에서'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해 뜨는 동해에서 해 지는 서해까지, 뜨거운 남도에서 광활한 만주벌판'. 고작 100미터도 전진하지 않는 이들이 이런 노래를 부르고 있는 광경을 보며 나는 속이 부대꼈다. 시위대 속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아무런 구호도 외치지 않던 이들이, 누군가가 전경을 향해 물병을 던지거나 깃대를 휘두를 때에만 '비폭력'을 연호한다. 어쩌면 그들이야말로 폭력 사태를 바라고 있는 게 아닐까 나는 궁금해졌다. 동행한 친구가 내 손을 꼭 잡았다. 간신히 시청 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더 버틸 힘이 없었다.
닭장차의 유리를 깨고 창틀을 뜯어내는 사람들이 대체 누구냐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블로그를 차리고 있거나, 포털 사이트에서 글을 쓰는 네티즌들은 그 광경 속에서 프락치를 보고 일반 시민이 아닌 '과격 운동권'을 보는 듯하다. 하지만 나는 6월 7일 안국동 진입 차도 앞에서, 과격한 시위를 주도하는 이들과 그들을 말리는 사람들 사이의 논쟁을 들었다. "이건 그저 광장에 모여서,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집단으로 자위하는 것밖에 더 돼요?" "그래도 경찰 차량을 파손하면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없잖아요." "지금 우리가 정당성 따지게 생겼어요?" 잔뜩 격양되어 있던 그 여성은, 동료로 보이는 사람과 함께 박자가 잘 맞지 않는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촛불시위대가 아니다. 우리는 생존권을 위해 이 자리에 섰다!"
경찰차를 뜯어내는 이들이 프락치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더욱 그들을, 음지에서 매도하기보다는 양지로 끌어내야 한다. 나는 짐작한다. 과격한 시위를 벌이는 이들은, 뒤에 앉아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보다는 더욱 할 말이 많은 사람들일 것이라고. 나는 주장한다. 그러므로 과격한 행위를 하는 사람들에게 대책회의는 마이크를 빌려줘야 한다고. 당장 청와대로 진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조급한 마음에 과격해지는 이들을 달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그들의 발언을 다른 이들이 들어주는 것이다. 하지만 6월 7일 그날 밤, 음악은 쉴새없이 흘러나왔고, 사회자는 전경들을 향해 '5초간 함성'을 '발사'하자고 외쳐댔다. 확성기 차량으로 달려갔다. 지금 구호가 전달이 안 되고 있지 않냐고, 음악을 꺼야 한다고 발을 동동 구르며 난리를 쳤다. 하지만 이미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구호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다. 광화문 광장에는 깊은 정적이 찾아왔다. 전경 버스를 때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려퍼졌다. 폭력 시위가 탄생하던 밤의 풍경이다.
6월 7일 이후 인터넷 여론이 흔들리는 듯하다. 심지어 광장에 나오지도 않는 인터넷 룸펜들이 '내 그럴 줄 알았다'며 시시덕거리기에 바쁘고, 네티즌 수사대는 버스 위에서 전경을 때리던 사람의 신원을 밝혀내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 모든 반응은 이명박과 경찰이 바라던 바로 그것이다. 시민들끼리 서로 불화하고, 네가 폭력이네 내가 비폭력이네 옥신각신하며 최초의 목표를 상실하는 것. 만약 여기서 이명박 정권의 '틀어박히기' 전략이 성공을 거두게 된다면, 순수한 한나라당 의석만 해도 과반에서 딱 한 석이 모자라는 18대 국회와 맞물려, 그는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할 온갖 '국책사업'을 벌이고 다닐 것이다. 대운하? 당연히 시행된다. 0교시 수업? 폐지될 리가 없다. 미국산 쇠고기? 과연 값싸게 먹을 수나 있게 될까. 광장에 모였던 시민들에게 호소한다. 이 시위가 이렇게 분열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나는 대책회의에 세 가지를 요구하고 싶다.
첫째. 노래 틀지 말자. 민중가요는 민중이 함께 부를 때 그 의미가 살아나는 노래이다. 지금처럼 확성기를 통해 찌렁찌렁 울려퍼지는 민중가요는, 참여하는 능동적인 시민이 아닌, 그저 구경하는 '일반 시민'만을 양산할 뿐이다.
둘째. 발언대를 개방하자.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다양한 주제에 대한 자유 발언의 기회를 주자. 특히 촛불시위의 초기부터 꾸준히 자리를 지켜온 보건의료노조, 금속노조, 다종다양한 청소년 모임과 대학생 단체 등을 무대로 불러서, '미국산 쇠고기 싫어!'를 넘어서는 그들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대학생들은 살인적인 등록금을 논하고, 비정규직은 파견근로자로서의 설움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광화문 광장이 진짜 광장이 된다.
셋째. 폭력 시위를 벌이는 이들을 연단에 세워보자. 만약 그들이 프락치라면 그들은 그 무대에 서지도 못할 것이다. 반면 그들이 정말 절박한 사람들이라면, 광장에 모인 이들은 바로 그런 목소리를 들어줘야 한다. 그것이 바로 시민으로서의 연대의식일 것이다.
또한 시민 여러분께 간곡하게 호소한다. 이미 카메라는 충분하다. 함께 구호를 외쳐달라. 숫자는 예전의 두 배가 넘는데, 목소리는 그 절반도 안 된다. 이대로 가면 이길 수가 없다. 구호를 외치자.
5월 31일, 아니 6월 1일 새벽 4시, 옷을 다 말린 나는 친구와 함께 안국동에서 종로로 발길을 옮겼다. 우리는 내려오고 있었고 전경들은 올라가고 있었다. 진압이 시작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 어느 때보다 가혹한 진압이 진행되는 모습을 나는 집에서 아프리카를 통해 생중계로 지켜봐야만 했다. 함께 구호를 외치며 싸우지 못하는 스스로가 미웠기 때문에 계속 광장에 섰다. 그리고 며칠이 흘렀다. 이제는 시민들이 다른 시민을 믿지 않는다. 다른 시민이 외치는 구호를 받아 함께 목소리를 드높이는 대신, 그저 핸드폰을 꺼내어 문자를 보내고 사진을 찍고만 있다. 그 절망으로 인해 이 글을 쓴다. 하지만 나는, 누군가가 사온 비옷이 안국동 돌담길 옆에서 제비처럼 날아다니던 그 순간을 함께 기억하고 있다. 그런 기억에 희망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감상주의가 아닐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많은 시민들도, 아직 그렇게 믿고 있을 것이다. /노정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