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군중들 속에서 진짜 '집회'를 하고 싶어했던 사람들은 KBS 앞으로 슬그머니 빠져나갔고, 그 광경을 목격한 몇몇 우익 단체들은 항의 집회를 연답시고 엉뚱하게 MBC에 찾아가 별 짓을 다 했는데, 그러자 대책회의의 차량과 집회 행렬이 길고 긴 행진을 하게 된 것이 13일의 금요일 밤에 벌어진 일의 전말이다.
이 현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우선 그 수많은 사람들이 광화문에서 여의도까지 이어지는 길고 긴 행진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내 추산으로 1만여명 이상의 대오를 유지한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이명박이 물러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게임은 끝나지 않았다. 그에 따라 사람들도 탈진하지 않고 있다. 기나긴 고난의 행군은 시위가 지나치게 지리멸렬해질 가능성을 다소 독특한 방식으로 차단하고 있는 것이다.
광화문에서 편하게 투덜거리던 사람들은 중간에 집에 간다. 여의도에 도착하고 나니 '구호빨'이 예전에 비해 훨씬 잘 먹힌다는 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축제를 즐기고자 모인 사람들은 반면, 끈덕지게 광화문을 사수하며 적은 인원으로 효율성 있게 놀고 있다. 역시 13일의 금요일 밤에 관찰한 바에 따르면 그렇다. 남아있는 깃발은 오직 10대 연합에서 가져온 것 뿐이었는데, 내가 학부 다닐 때 '문선'이라 부르던 그것을 하며 신나게 춤추고 있었다. 이 분열은 매우 긍정적이다.
화물연대의 파업으로 인해 부산항이 마비될 지경이다. 화물연대가 부산항을 봉쇄하고 있지 않다 뿐이지 사실상 그 기능은 멈췄다고 봐야 한다. '생계형 파업'이라는 말은 참으로 오래간만에 '먹고 사는 문제'라는 말이 정치적인 긍정성을 띌 수 있게 해준다. 동시에 화물연대는 이명박 정권의 핵심 정책에 대한 정치적인 반대를 내걸고 있기 때문에, '일반 시민'들로부터도 예전에 비해 턱없이 높은 지지를 받고 있다.
트럭 운전자들이 파업을 벌이는 것은 한국만의 일이 아니다. 몇 개 국가가 있는데 그 이름이 다 기억나지는 않고, 사진을 저장해 둔 스페인의 경우를 보자. 물류가 멈춰버린 결과 슈퍼마켓의 진열장들이 아래 사진처럼 되어버리고 말있다.
과연 한국의 '일반 시민'들도, 이명박이 순순히 말을 들을리는 거의 없으므로 물류대란의 여파가 자신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기 시작하는 시점까지 지속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데, 그런 파업을 긍정적으로 지지할 수 있을까? 현재 벌어지고 있는 경제 위기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고유가 파고 속에서 꽁치가 풍작인 터라 어민들이 울상이라는 기사가 현재 네이버 메인화면에 떠있다. 이건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유럽의 어부들은 EU를 상대로 가투를 벌이고 있다고 한다. 세부적인 차원으로 내려가면 차이가 있지만, 유가 상승으로 인한 현상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요컨대 경제 위기는 닥쳐오고 있고, 한국의 정치 세력은 그에 대한 문제의식을 제대로 가지고 있지 못하다. 명박산성을 재축조할 가능성은 그다지 높지 않지만, 경찰이 광화문의 봉쇄를 터줄 가능성은 그야말로 0이다. 이명박이 시민들의 말을 곱게 들어줄 턱이 없다. 집회가 끝난 후 다음날 아침 곱게 회사에 출근하는 '일반 시민'들은 이명박 정부에게 결코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자신의 지지율이 10%대로 떨어졌다는 사실로부터 큰 충격을 받겠지만, 우리가 상대하고 있는 인간에게는 상식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
집회가 다양한 방면으로 분열되는 것과 동시에, '일반 시민'과는 다른 사람들이 자꾸 끼어드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목소리가 종종 눈에 띈다. 어느 '진보 매체'에서 촛불시위의 초창기에 참여자를 묘사하던 방식은 다음과 같다. '청바지에 티셔츠, 굽 높은 구두에 하늘거리는 치마를 입고 크로스백을 매고 있는 사람들'. '일반 시민'에 대한 이러한 규정은 철저히 계급적이다. 이는 "교양 있는 서울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이라는 표준어 규정을 연상시킨다. 이러한 규정은 '서울말'이라는 단어를 통해 지역 토착어를 소외시키킨다는 지적을 받곤 한다. 하지만 우리는 '교양'이라는 말 뒤에 숨어있는 계급성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일반 시민'이라는 단어가 마찬가지 논리 위에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글을 쓰는 사람들은 차마 그런 말까지 하지 못하지만, 익명으로 찌질거리는 일에 익숙한 일련의 '네티즌'들은, 평화로웠던 촛불집회가 폭력시위로 변질되게 된 원인을 노숙자와 노가다꾼들의 가세에서 찾곤 한다. 농담이 아니다. 이 기사에 달린 썩어나는 리플들을 보라. 물론 나도 술냄새 펄펄 풍기는 아저씨들이 꽥꽥 소리지르는 것이 아주 못마땅하다. 하지만 여기서 드러나는 반응은 그런 즉각적인 쾌와 불쾌의 표현을 넘어서는 것이다. '알바'를 성토하는 것들을 일단 빼보자. 그러면 의견의 8할은 '사진을 봐라, 20대가 주범이다'이고, 나머지 2할이 노숙자 욕인데, 후자가 직설적으로 노숙자를 '시민'의 범주에서 몰아내고 있다면 전자는 다소 교묘한 방식으로 같은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후자가 사회 하층민에 대한 정치적 배제에서 멈추는데 반해, 전자는 그들의 존재를 아예 인식론적으로 차단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 시민'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 이들에 대한 인식론적 차단이 적용되는 범위는 생각보다 훨씬 넓다. 조선일보 등에 광고가 안 실리고 있다는 사실은 그렇게 기뻐하면서, 화물연대의 파업으로 인해 이명박이 화주들에게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다. 그들 또한 "교양 있는 서울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 팽팽하게 고조되어 있는 반 정부 시위대의 분노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경찰은 노동조합에 대해서도 별다른 제제를 가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것은 '일반 시민'들이 의도했다기보다는 어쩌다보니까 그렇게 되고 있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특히 칸트의 도덕철학적 입장에서 볼 때 그다지 칭찬받을만한 일이 못 된다.
그러므로 촛불시위대는 '일반 시민'의 벽을 넘어 노동조합과 적극적인 연대를 표명할 필요가 있다. 그 벽을 넘어서는 일은, 촛불시위의 물결 속에 참여하고 있는 개인들이 단순히 여러 단체에서 나누어주는 피켓을 수동적으로 받아드는 데에서 멈추지 않고, 대체 어떤 사람들이 무슨 주장을 하고 있나 읽어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사실 연대의 손길을 먼저 내밀고 있는 쪽은 그 잘나신 '일반 시민'들이 아니다. 6월 7일 신촌 로터리에서 연세대로 향하는 길 위에서 나와 내 친구는 다음과 같은 장면을 목격하였다.
서울서부지역 노점상 연합은 6월 7일부터 10일까지, 밤 8시에서 9시에 걸쳐 전등을 소등하고 대신 촛불을 켜놓는 것으로 촛불시위에 대한 연대의 뜻을 밝혔다. 물론 이런 사실을 '일반 시민'들은 거의 모를 뿐 아니라, 염두에 두지도 않고 있다. 이것은 폭력과 비폭력 이전의 문제이다. 인간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염치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안정된 직장을 다니며, 혹은 대학생으로서의 신분을 유지하며, 일상을 파괴하지 않는 선에서 촛불시위에 참여하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일반 시민'이라는 단어에 이 촛불시위를 그토록 가둬놓아야 할 이유가 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노동조합의 파업에 대해, 이 촛불시위에 승리하기 위해, 예전보다 훨씬 더 너그러워져야 할 필요가 있다. 계급적 교양을 갖추지 못한 이들과 기꺼이 연대할 수 있는, 시민적 교양의 토대를 단단하게 다져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연대를 사회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론을 나는 아직 마련하고 있지 못하다. 노동조합의 홍보물을 함께 나누어주는 것 정도가 지금 제시할 수 있는 최선이다. 중요한 것은 연대하겠다는 의사를 가지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이다. 나는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기를 바란다. 우리는 소비자인 동시에 생산자이며, 따라서 노동자이다. 더 많은 '일반 시민'들이 벽을 넘어 노동자가 되는 날, 승리는 한 걸음 더욱 가까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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