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개입은 그야말로 '칼같은 타이밍'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만약 하루나 이틀 늦었더라면 시위대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고립되고 있다는 시민들의 불안감은, 내가 "고립과 연대"를 통해 드러낸 바와 같이, 거의 정점으로 치닫고 있었다. 지난 주 토요일, 그 피의 밤이 지난 후 사람들은 '이대로 해봐야 달라질 것이 없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일부 극렬 분자들이 외치는 '비폭력'의 허망함을 모든 시민들이 학습하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수업료 치고는 너무도 비싼 값을 치르고 있었던 것이다.
사제단의 미사 이후 많은 것이 달라졌다. 경향, 프레시안, 한겨레 등에서 적절하게 지적하는 바와 같이, 수많은 시민들이 사제단과 함께 자신감을 되찾았다. 모든 과격 행위자가 궁지에 몰린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궁지에 몰린 이들은 필연적으로 과격해진다. "우리는 촛불시위대가 아니다! 우리는 생존권을 위해 이 자리에 섰다!"라고 외치던, 6월 10일 버스를 부수고 있던 몇 명의 사람들을 내가 탓할 수 없던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그리고 6월 29일까지, 시민들은 조중동을 비웃으면서도 조중동의 프레임에 갇히고 있었다. 나는 그 고립을 해소하기 위해 오직 '연대'를 제안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사제단은 다르다. 한 사람의 가톨릭 신자로서 말하자면, 적어도 교회라는 제도 하에서 나는 한 마리의 양이고 그들은 선한 목자를 대신하는 목동들이다. 너무도 적절한 시점에,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긴 적은 없다'는 요한복음의 구절과 함께 나타나준 그분들께는 그 어떤 말로 감사를 드려도 모자랄 지경이다. 나는 시위대가 점점 더 고립되고, 경찰의 진압 강도는 그에 제곱하여 강해지며, 따라서 큰 인명 사고가 날 수밖에 없는 시나리오로 흘러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될 때마다 두려웠다. 누군가가 죽거나 크게 다칠 수 있고, 그게 나일 수도 있다는 것보다 더욱 두려운 것은, 수많은 한국인들이 마치 고 김선일 씨 사건 당시 그러하였듯이 무리에서 낙오되어 쓸쓸하게 희생당한 이에게 아무 공감을 하지 못하는 모습을 살아서 또 보게 되지나 않을까, 그런 것이었다.
사제단은 시위대에게 다시 한 번 '비폭력'을 요구했다. 그것은 (현재 아고라의 네티즌들은 '전경 가족, 여자친구'로 간주하고 있는) '비폭력주의자'들의 그것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다.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비폭력을 요구하는 목자들은, 스스로 단식투쟁에 나서고 있다. 비폭력 불복종에 동참하자는 목소리는 무리와 함께하고 있을 때 비로소 힘을 얻게 된다. 심지어 예수조차 자신이 제자들로부터 떠나야 하던 그 운명의 밤, 제자들에게 칼을 차라고 명령한 바 있다.
35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내가 너희를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없이 보냈을 때, 너희에게 부족한 것이 있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3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러나 이제는 돈주머니가 있는 사람은 그것을 챙기고 여행 보따리도 그렇게 하여라. 그리고 칼이 없는 이는 겉옷을 팔아서 칼을 사라. 37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경에 기록된 것이 나에게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는 무법자들 가운데 하나로 헤아려졌다.’는 말씀이다. 과연 나에 관하여 기록된 일이 이루어지려고 한다.” 38 그들이 “주님, 보십시오. 여기에 칼 두 자루가 있습니다.” 하자, 그분께서 그들에게 “그것이면 넉넉하다.” 하고 말씀하셨다. (루카 22, 35-38)
물론 아고라에는 천지 분간하지 못하고 까불거리는 인간들이 더 많다. 하지만 사수대를 조직해야 한다는 식의 목소리가 현장에서도 적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실로 우리는 무법자로 헤아려지고 있었고, 칼 두 자루를 차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제단이 촛불을 들었다. 그들이 촛불에게 요구하는 바는 바로 다음과 같다. 이것은 아직 예수가 적극적으로 활동하던 시절, 이스라엘의 곳곳에 사도들을 파견하며 했던 말이다.
3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4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5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루카 10, 3-5)
수많은 사람들이 엄청난 안도감을 느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이제 우리는 고립에서 풀려났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연대의식을 회복하고, 내일부터 벌어질 민주노총의 총파업에 적극 연대함은 물론이거니와, 여타 비정규직 노동자들과도 어깨를 나란히 할 각오를 다져야 한다. 부산항에서 미국산 쇠고기 컨테이너 박스의 반출을 막던 민주노총 조합원 10여명이 연행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사람들이 너무 적다. 비록 대대적이고 즉각적인 총파업이 이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노동계는 분명 촛불과 연대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2. 정교분리에 관하여
여기서 나는 한 가지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보니 '사제단의 정치행위는 헌법상의 정교분리 원칙에 어긋난다'는 둥, '개신교 단체들의 시위에는 혀를 차던 사람들이 사제단을 보면서는 환호하고 있다'는 둥, 자신이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하는 모습이 다소 눈에 띈다. 방금 말한 것처럼 이건 전부 헌법상의 정교분리 원칙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하는 소리에 불과하다. 일단 조문부터 살펴보자.
대한민국 헌법 제20조
1.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
2.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
제20조의 구조를 일별해보면 알 수 있다시피, 헌법상의 정교분리 원칙은 어디까지나 종교의 자유라는 대원칙하에서 성립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라는 원칙이 우선 있고, 그것을 위해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 이러한 헌법상의 조문만으로 '그러므로 정의구현사제단의 정치행위는 위헌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헌법의 본래 취지와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종교집단이 현실 문제에 전혀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라는 구절을 해석한다면, 교회가 사회 정의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음을 천명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은 세계 대부분의 국가에서 배척당해야 마땅하다. 혹은 그 반대로, 대한민국 헌법이 정교분리의 원칙을 내세우고 있지만 기독교 관련 정당들이 난립하고 있는 현재의 상황은 헌법적 원리가 지켜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에 대해 살펴보자. 그런 식이라면 독일 또한 정교분리의 원칙이 땅에 떨어진 나라가 될 것이다. 헬무트 콜이 수상 노릇을 하면서 독일 통일을 이끌어낸 정당의 이름이 '기독민주당'이라는 점을 상기해본다면 분명히 그렇다.
정교분리의 원칙은 종교 집단이 절대 정치의 문제에 개입할 수 없다는 뜻도 아니고, 그 반대로 정치 단체가 종교적인 원리를 스스로의 행동 강령으로 삼을 수 없다는 뜻도 아니다. 다만 그것은 제도화된 거대 종교가 국가의 통치에 직접적으로 개입함으로써 개인이 종교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특히 '국교'라는 제도를 통해 억압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소극적인 원칙에 불과하다. 물론 극단적인 경우, 라기보다는 대부분의 이슬람 국가에서처럼 '종교 위원회'가 국사를 좌지우지하는 상황 또한 상상해볼 수 있지만, 그것은 애초부터 우리가 헌법을 만들 때 고려할만한 대상이 아니었으므로 여기서는 논할 필요가 없다.
시위에 참석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한 줄기 단비와도 같은 사제단의 참여를, '정교분리'라는 단어까지 꺼내가며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사람들을 보면 참으로 만감이 교차한다. 그렇게까지 '쿨'하고 싶을까. 우리가 일부 개신교 목사들의 정치적 발언을 문제삼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기 때문이지, 그들이 종교인이기 때문이어서가 아니다. 장로가 아니라 아예 목사가 대통령이 된다 해도, 그가 국민들에게 국교를 강요하지 않는 한(대한민국을 신에게 봉헌하는 따위의 문제는 따로 고려해봐야 하겠지만) 그것은 정교분리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다.
3.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 생각이
기왕 루카 복음서를 펼쳐들었으니,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 중 하나를 인용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짓는 편이 낫겠다. 아기 예수를 본 시메온이라는 의인은, 이스라엘을 구원할 그리스도인 예수를 찬미한 후 아기 어머니 마리아를 바라보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던진다.
34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35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루카 2, 34-35)
할 일도 많고, 먹고 싶은 것도 많고, 놀고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집회에 나가지만, 이명박 정권이 뒤집힐 가능성이 점점 줄어드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도리어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 고립되고 있다는 불안감만이 엄습해오던 것이 최근의 풍경이었다. 더욱 피곤한 것은 앞서 비판한 것과 같은 '쿨게이'들이다. 그들은 그저 자신의 '특별함'을 과시하기 위해 사려깊지 못한 말을 툭툭 던지지만, 막상 그것을 듣고 있는 사람들은 몇 배의 정신적 피로를 느낄 수밖에 없다.
내가 무슨 짓을 하건, 무슨 말을 하건 세상은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회의주의가 나를 유혹할 때마다, 루카 복음서의 저 구절을 생각하곤 한다. 부러 과격한 어조로 자칭 마초들을 논박하던 때부터 지금까지 늘 그랬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토론을 통해 상대방을 설득할 수 없다. 시위를 통해 이명박을 광장으로 끌어내고, 그가 국민들의 뜻을 받아들이게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심지어는 시민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나뉘고, 다투고, 결국은 너덜너덜한 가슴을 안고 집에 돌아가게 된다.
하지만 그 모든 일들을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성 루카라고 불리는 복음서의 기자(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 속에서 도리어 한 줄기의 희망을 보았다. 2008년 7월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손에 남아있는 것도, 결국 그 한 가닥의 빛이다. 물론 어둠이 빛을 이긴 적은 단 한 번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