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8-28

멍청하면 안전하다

멍청하면 안전하다


걱정 마라
당신은 위험하지 않다
당신은 매우 안전하다
멍청하니까

이것은 만고의 진리다
멍청하면 안전하다
그들에게 당신은
놓아 기르는 호주산 청정육이다
안심하고 축제나 즐겨라

멍청하지 않으면 위험하다
위험한 물건을 소지하고 있지 않아도
위험한 행동을 하고 있지 않아도
그들에겐 당신이 위험하고
당신에게도 그들이 위험하다

하지만 안심하시라
멍청하면 안전하니까
모래톱에 머리를 처박은
타조새끼마냥
당신은 안전할 수밖에 없으니까.


(08. 08. 28)

2008-08-26

판타지를 부수는 판타지 - '강남 불패'와 교육감 선거

* 판타스틱 9월호 원고입니다. 편집부의 승인을 받아 올립니다.

* 소설 《다이디타운》3부의 결말에 대한 언급이 들어있긴 하지만, 그 결말을 알고 소설을 봐도 큰 상관이 없습니다. 3부작으로 구성된 《다이디타운》은 2부까지가 정말 재미있고, 3부는 일종의 보너스 스테이지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으니까요.

* 판타스틱 구독을 권합니다. 제 원고가 종종 실리는 좋은 매체입니다, 가 아니라, '서사'를 충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매달 엄선된 소설과 만화가 실립니다. 장르물의 다양한 지점들을 짚어주는 특집들도 좋고요. 이번호 특집은 FBI 입니다. 창작에 관심 있으신 분들이라면 자료집 삼아 한 권쯤 구입해도 괜찮을 겁니다.

* 판타스틱 구독 문의처는 다음과 같습니다. 담당자 김신영(02-713-0143) 홈페이지 http://www.fantastique.co.kr



POLITIQUE

판타지를 부수는 판타지 - ‘강남 불패’와 교육감 선거

지난 7월 30일 열렸던 서울시 교육감 선거를 둘러싼 두 가지 판타지가 있었다. 직접 민주주의의 힘, 그리고 잘못된 현재를 교정하려는 과거의 힘을 떠올리게 하는 그 희망찬 판타지는 ‘강남불패’의 또다른 판타지에 의해 산산조각나버렸다. 먼 길을 돌아 또다시 출발선상에 서게 된 셈이다.


‘강남 불패’를 가장 흔하게 수식하는 단어는 다름아닌 ‘신화’다. 강남의 땅값은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는 명제는, 건조한 사회적 현상을 넘어 대중들의 머릿속에서 그 자체로서 생명력을 갖는 무언가가 되어 있다. 한국어 화자들, 특히 언론계에 종사하는 이들이 걸핏하면 ‘신화’라는 단어를 갖다 붙이는 습성이 있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가령 ‘붕대 투혼’이라거나, ‘라면 먹고 금메달 신화’라거나 등등) ‘강남 불패’만큼은 확실히 신화적이다. 7월 30일 교육감 선거를 통해 그 신화성은 다시 한 번 화려하게 입증되었다. 강남은 지지 않는다. 강남은 져도 결코 혼자 지지 않는다.

서울시 교육감 선거를 둘러싼 판타지

7월 30일 서울시 교육감 선거는 대결 구도와 심판 구도에 의해 지배된 하나의 정치적 싸움이었다. 이명박 현 대통령에 대한 심판을 전면에 내세운 주경복 후보와, 반 전교조라는 기치를 걸고 교육 정책을 유지하려는 공정택 후보가 대결 구도를 세우고 있었다. 서울시 교육감 선거에 대한 기대감은 특히 촛불시위에 참여해온 시민들 사이에서 하루가 다르게 고조되고 있었다. 최초의 직선제 교육감 투표에서 승리한다면, 국민들이 이명박의 교육 정책을 반기지 않고 있다는 것을 뚜렷하게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매일같이 경찰에 밀리고 전경에 쫓긴 촛불 시민들에게는 단 하나의 승리가 고프기도 했다.

여론 조사 결과만 놓고 보면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전국적으로 팽배한 반 이명박 정서를 대변하듯, 교육감 선거 후보 지지율은 서울 시내 대부분 지역에서 주경복 후보가 앞섰다. 종합해보면 3~5% 차이로 승리한다는 결과가 나온 상태였다. 이렇게까지 낙관적인 여론 조사 결과를 등에 업고 선거를 하는 일은, 이른바 ‘진보진영’에서 매우 드문 일이다. 투표율이 비록 15%대에서 머물렀지만 뚜껑을 열어 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일이라고 다들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거기서 ‘강남’이라는 괴물이 튀어나왔다.

강남구에서는 전체 투표자 중 61.14퍼센트가, 서초구에서는 59.02퍼센트가 공정택 후보에게 몰표를 안겨주었다. 이것이 결정적이었다. 워낙 인구가 많은 두 지역에서, 기타 범 보수진영 후보들에게는 일절 투표하지 않고 오직 공정택 후보만을 향해 표를 던진 이것이 바로 선거의 승패를 가르는 결정타였다. 이 차이는 주경복 후보가 최대 득표 퍼센트를 기록한 관악구의 성적을 보면 알 수 있다. 거기서 주경복 후보는 47.80퍼센트, 공정택 후보는 30.81퍼센트를 득표했다. 반면 강남구는 공정택 후보에게 61.14퍼센트를 몰아주었으며, 동시에 주경복 후보의 득표율은 고작 22.62퍼센트에 머물고 있다. 잘라 말하자면, 강남구와 서초구에는 흔히 말하는 ‘이탈표’가 없었다. 군소 후보자에게 고루 표가 갈린 다른 구와 달리, 강남구와 서초구의 유권자들은 마치 ‘보수 단일화’가 이미 진행된 것처럼 투표했다. 그것이 이번 선거의 희비를 가르는 결정적 요인이었다.

이 시대가 제 아무리 탈정치적인 포스트모던 시대라 한들, 사교육 열풍을 이어나가 아파트 값을 더 올리고 싶어하는 ‘강남 아줌마’들의 집단 행동을 해체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진보는 갈라졌지만 보수는 그대로 있다. 대한민국은 사분오열되었지만 강남의 성채는 공고하다. 혹자들은 이 난국을 타개할 수 있는 새로운 동력을 5월 이후 촛불시위에서 찾았지만, 7월 30일의 선거는 말한다. 촛불은 강남에 졌다. 적어도 지금은.

이른바 ‘직접 민주주의’와 ‘간접 민주주의’의 대립구도를 설정한 후, 전자가 후자보다 낫네 그르네 벌어지던 수많은 논의들을 돌이켜보자. 그런 종류의 논의가 벌어지던 당시, 많은 사람들은 촛불이 통제되지 않는 거대한 민중의 에너지이며, 그것을 거스르는 자는 세상에 감히 존재할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지식인들은 그 막대한 에너지를 어떻게 통제할 수 있을 것인가를 논의해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순진한 발상이다. 요컨대 모든 이들이 ‘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광장의 목소리가 세상을 바꾸는 것에 대한 판타지를 잃지 않은 상황이었던 것이다.

‘업둥이’(부모로부터 버려져 시민권을 획득하지 못한 아이)들의 엄마 노릇을 하고 있던 웬디가 피라미드에 감금되어 있자, ‘업둥이’들은 드디어 햇살 아래 나와 항의를 시작한다. 그 업둥이들을 보고 양심의 가책을 느낀 수많은 ‘진민’(자연 수정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시위대에 합류하여 수백만의 물결을 이룬다. 그 모습을 보고 고민하던 다이디타운의 수뇌부는 웬디와 함께 ‘업둥이’들을 지구 밖 외행성계의 농장으로 파견하는 정치적 결단을 통해 문제를 해결한다. 《판타스틱》에도 연재된 바 있는 《다이디타운》 3부의 마지막 장면이다. ‘직접 민주주의’를 주장하던 자들은 업둥이들의 함성이 더 커져야 한다는 쪽에 방점을 찍고 있었다. 반면 ‘간접 민주주의’의 안정성을 외치던 자들은 정치가 브로드와 저널리스트 럼이 막후 협상을 통해 ‘업둥이’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하는 그런 기능에 주목했다. 문제는 이 두 가지 착상 모두가 하나의 판타지에 기반하고 있었고, ‘강남 불패’의 신화는 바로 그 판타지를 박살내버렸다는 것이다. 민중의 함성은 헌법일 수도 있다. 하지만 경찰은 헌법보다 도로교통법의 준수를 요구한다.

‘민중의 함성’이라는,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거대한 판타지가 깨어지고 있는 가운데 이른바 ‘과거의 그림자’가 다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1990년대 초반에 사라졌던 전국대학생협의회, 즉 전대협 깃발이 거리에 나부끼기 시작한 것이다. 시간 속에 묻혀졌던 과거의 힘이 살아 돌아와 현재의 질서를 재구성한다는 것 또한 일종의 판타지이다. 특히 《반지의 제왕》에서 고대의 힘인 엔트들이 긴 회의 끝에 떨쳐 일어나는 장면은 3부작 중 제2부의 절정을 이룬다. 자연의 섭리를 파괴하고 마구 토목공사를 벌이던 사루만의 야욕이 파괴되고, 두 개의 탑 동맹이 깨어지며, 댐은 무너지고 숲은 생명을 되찾는다. 전대협 깃발이 뜨고, 시청 앞 광장에서 세 대의 살수차를 점령하고 부순 6월 28일만 해도 그 판타지는 실현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시위대는 이후 오히려 시청 앞 광장을 빼앗겼고, 8월 5일에는 명동성당 앞까지 밀려났다. 올바른 과거가 잘못된 현재를 이기는 판타지는 오늘날 실현되고 있지 못하다.

산 위를 날아가는 독수리를 쫓듯이

강남 신화는 계속된다. 강남은 불패다. 져도 혼자 지지 않는다. 맹목적인 자기 복제를 통해 생명체의 건강을 해치고 목숨을 빼앗아가는 암 세포처럼, 강남은 대한민국을 잡아먹고 있다. 이 욕망의 변증법은 흡사 괴물의 눈과도 같아서, 들여다보면 들여다볼수록 빨려들어가는 마력을 지니고 있기까지 하다. D&D 계열 판타지에서 드래곤은 마법이 통하지 않는 존재다. 강남 불패의 신화가 다른 판타지를 부수는 것과도 비슷하다. 대체 우리는 이 괴물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 걸까? 어쩌면 ‘강남’만을 바라보느라 긍정적인 가치로서의 ‘공공성’의 추구를 잃어버린, 막강한 적을 상대하느라 스스로를 잃어버린 모습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하는 건 아닐까? G. K. 체스터튼의 문장을 인용하며 글을 마무리짓도록 하자. “우리는 산 위를 날아가는 독수리를 쫓듯이 신을 사냥해야 한다. 그 추적 중에 우리는 모든 괴물들을 죽였다.”

2008-08-23

안녕? 허 대짜 수짜님

8월 21일 목요일, 저녁에 있었던 약속이 끝난 후 한성대입구역에서 출발해 서울역에서 1호선으로 갈아타고, 가산디지털단지역에서 내렸다. 금천03 마을버스를 타고 잠깐 달리니 충남슈퍼 정거장이 나왔다. 몇몇 젊은 사람들이 이미 그곳에서 내리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기륭전자 가는 길이 그렇다.

기륭전자에 대해 한 마디 언급을 하고 싶을 때마다 꾹 참았다. 모든 사람이 자신이 직접 본 것, 직접 겪어본 것에 대해서만 말해야 한다고 강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제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 어떤 '의미'를 찾아내고 발견하는 것은 분명 월권이다. 나는 종종 '이유를 알 수 없는 일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고 나 자신에게 말하곤 한다. 도착한 시각은 9시 30분 경이었고, 기륭전자 정문으로 향하는 골목에는 전경들과 교통경찰들이 두어 소대 정도 있었다.

뭔가 문화제 비슷한 걸 했는데 이미 끝난 것 같았다. 근처 슈퍼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서 입에 물고 상황을 주시하고 있는데, 갑자기 영화 '안녕? 허 대짜 수짜님'이 상영되기 시작했다. 다들 철푸덕 앉아서 영화를 보기 시작하길래, 나도 그냥 은박 돗자리 조각을 깔고 앉았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영화 상영이 끝나면 행사가 마무리될 듯했다.

'안녕? 허 대짜 수짜님', 제목 참 길군, 아무튼 이 영화의 강점은 이른바 '대기업 노조' 사람들이 대체 어떤 식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대강이라도 잘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가 한 다리 건너면 다 친구고, 선배 후배고, 혈연과 친분으로 얽혀 있다. 허대수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는 조연은 허대수의 처남으로 설정되어 있고, 그것은 전혀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다.

현대자동차 공장으로 먹고 사는 울산이라는 도시의 풍경마저도 다소 손에 잡힐 듯하다. 현대차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아파트에 살고, 현대차에서 일하지 않거나 비정규직인 사람들은 시 외곽 허름한 주택가에 산다. 이것을 명시적으로 드러내고 있지는 않지만, 영화를 통해 충분히 감지할 수는 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이 영화를 봐야 할 진정한 이유가 된다. 울산 노동자들이 만든 울산 영화라서 그런지, 일부러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울산이 보인다.

하지만 본의 아니게 성취된 이러한 리얼리즘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갈등을 해소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작위적인 줄거리 전개로 인한 단점을 다 가려주지는 못한다. 아빠의 꾀병 -> 딸이 알아채고 분노 -> 아빠가 진짜 병으로 쓰러짐 -> 병원에서 비정규직 사윗감이 정규직 아빠에게 감명을 줌 -> 비정규직 해고자 20명을 위해 정규직이 으쌰으쌰 -> 투쟁! 승리! 로 이어지는 후반부의 스토리라인은 아무리 생각해도 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그럼 대체 어떻게 해야 하냐, 네가 한 번 써보지 않겠느냐'라고 말한다면 나도 딱히 할 말은 없다. 이것은 한국어권에서 개발된 서사 양식 자체가 지나치게 협소하기 때문에, 바꿔 말하자면 인프라가 부족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일 가능성이 더 크다.

그 어떤 문제도 제대로 해결되지는 않은 채로, 하지만 뭔가 결말이 나는 그런 이야기를 우리는 쉽사리 떠올릴 수가 없다(켄 로치의 '아름다운 세계'가 이런 종류에 속하지만, 켄 로치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우리의 현실이 얼마나 빈곤한지를 보여주는 것이니 더 서술하지는 않기로 하자). 따라서 한국의 수용자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작위적이고 실은 아무 것도 해결된 바 없다고 할지라도(이 영화 속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 문제는 전혀 해결된 게 아니니까), 일단 '좋은 결말'을 내야 하고 그것도 가급적이면 갓 태어난 아기의 입을 통해 읊어져야 한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마무리되고 있는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도리어 희망은 저 먼 곳으로 사라져만 간다.

엔드 크레딧이 올라간 후 사람들은 이곳 저곳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영화가 상영되고 있는 동안 진보신당 칼라TV가 와서 몇 명을 인터뷰했고, 촛불다방에서는 누룽지를 나눠줬고(먹다가 입 천장을 살짝 데였지만 맛있었다), 저 구석에 있는 컨테이너 안에서는 누군가 계속 굶고 있었을 것이다. 기륭전자에 정규직 노조가 있을까? 있다고 해도 과연 그들이 이 영화처럼 '연대'하여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까? 설령 그렇다고 해도 지금 이 사태가 해결될 수 있는 걸까?

'노동문제가 중요하다'라고 강조하던 나 같은 사람이 아니라, '대한국민 안중근' 같은 국가주의의 기표를 티셔츠로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기륭전자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그들은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말 한 마디에 목숨을 걸 것이고, 일본은 악이며 일제시대의 조선은 선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견지하고 있을 터이지만, 정작 기륭의 옆에 서 있는 건 그런 사람들이다.

날씨가 갑자기 쌀쌀해졌고, 집까지 가는 길은 멀었다. 나는 충남슈퍼 앞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구로디지털단지역으로 향했다. 공단 지역의 유흥을 책임지는 역전가의 불야성을 헤치고, 내가 탄 2호선 열차가 출발했다. 시위하러 갔다가 영화만 보고 돌아왔다. 해답을 바란 건 아니었지만, 더 많은 질문들과 함께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2008-08-18

떡볶이 민주주의

8월 15일 경찰은 역시나 무차별 연행을 감행했다. 그 과정에서 종로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떡볶이를 먹고 있던 사람도 잡아갔다는 기사가 경향신문에 게재되었다. 프레시안은 경찰이 촛불 연행자 여성에게 브레지어를 벗어서 내놓으라고 강요했다는 기사를 터뜨렸는데, 놀랍게도 사실을 부인하고 있지도 않다. 다만 자살 방지를 위해 '본인에게 요구'했다는 변명을 내놓았다.

대체 왜 경찰은 무자비한 연행과 지독한 인권 탄압을 자행하고 있는 것일까? '혁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경찰이 강경하게 나오면 강경하게 나올수록 이른바 '전민항쟁'의 가능성이 커진다고 좋아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상은 그것과 정 반대이다. 현재 경찰이 펴고 있는 무차별 연행 전략은, 버마 군부가 8888 혁명 당시 자국민들을 무차별 학살하던 그것과 같은 행동 유형이다.

1988년 8월 8일 터졌던 버마의 인민 봉기, 즉 '8888'의 20주년을 기념하는 기사가 이코노미스트 온라인 에디션에 8월 12일 게재되었다. 이 기사에서 이코노미스트는 '인민의 힘'이 갖는 명백한 한계를 탐색한다.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8888이 실패한 원인은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의 부재도, 국제 사회의 지지 결여도, 일반적인 대중들의 지지 부족도, 저항하고자 하는 의지의 결핍도 아니었다. 아웅산 수지와 그의 정당은 80%에 가까운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었다.

문제는 군부가 저항하는 사람들을 죽일 수 있을 만큼 죽이겠다고 작정하고 있었다는 데 있다. 당시 사망자 숫자는 공식적으로 3000여 명이지만 그것을 믿는 이는 아무도 없다. 중화기로 무장한 군인들이 거리에 뛰쳐나온 시민들에게 닥치는대로 발포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간 후, '전민항쟁'은 진압되었다. 아웅산 수지는 가택 연금되었고 버마는 아직까지도 군부 독재에 시달리고 있다. 1989년 천안문 사태도 같은 경로로 실패한 민주화 투쟁이다. 탱크가 출동했고, 시위는 진압되었다.

국제 사회의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권력을 내놓을 의향 따위 전혀 없으며, 폭력적인 진압의 도구가 되는 관료 조직(즉 경찰 혹은 군대)을 단단히 틀어쥐고 있는 독재 권력 앞에서, 사실 '국민의 힘'이란 미약하기 짝이 없다. 인간에게는 생존을 향한 본능이 있기 때문에, 죽이겠다고, 잡아 가두겠다고 협박하며 그 의지를 매일같이 실천으로 보여주고 있는 한, 겁을 먹고 움추려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청수의 목줄을 움켜쥔 채 숨을 식식거리며 광화문과 종로 일대를 헤매고 다니는 이명박의 '미친놈 되기 전략'은, 불행하게도 성공적이다.

버마의 민주화에 대한 가능성을 이코노미스트는 대단히 낮게 평가한다. 버마의 국민들이, 군부가 무슨 짓이건 하고야 말리라는 것을 늘 인식하고 있는 한 군부 독재는 유지될 수밖에 없다. 뜨겁게 몰아치는 민중의 함성보다는, 군부 내에서 이탈 세력이 발생하는 쪽에 기대를 거는 것이 낫다는 것이 이코노미스트의 평가다. 이건 이 매체를 보는 사람들이 서구 사회의 정책 결정자들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보면 다소 섬뜩할 수도 있는 내용이지만 여기서는 더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이 기사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현실 또한 객관적으로 되짚어볼 수 있다. 앞서도 말했듯이, 브레지어를 빼앗는 경찰에게 무차별 연행될 우려가 있다면, 촛불시위의 가장 큰 동력 중 하나였던 '일반 대중들의 참여'는 낮아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는 정치권, 특히 한나라당 내에서 강력한 이탈 세력이 발생하고, 그들이 이명박의 독주를 견제하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고 결론을 낼 수가 없다. 그 집단의 수장이 다름아닌 복당 박근혜 여사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한 어떤 해법을, 적어도 이 짧은 글에서 도출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기동성을 앞세운 촛불시위를 넘어선 또 다른 대안을 찾아야 할 시점이다. 촛불을 계속 들되, 다음 아고라에서 분통을 터뜨리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다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문제는 정치다. 하지만 진보신당을 포함한 대안 정치세력들이 과연 현재의 움직임을 자신의 것으로 흡수할 수 있을까를 묻는다면, 그 답 또한 불투명하다. 떡볶이 먹던 사람도 체포해가는, 그런 민주주의의 위기다. 하지만 그 절망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희망을 발견할 수도 없을 것이다.

2008-08-14

마감과 납기

《판타스틱》 9월호에 실릴 원고 두 편을 모두 털어냈다. 그 외에도 이번 달에는 흔히 말하는 '외고'를 많이 맡아서 정신이 없었다. 그 와중에 떠오른 생각 하나를, 집에 가기 전에 후딱 적어놓는다.

사람들은 흔히 '마감'이라는 단어에 대해 모종의 환상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실제로 마감이 존재하지 않는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 혹은 아직 사회생활을 해보지 않은 20대 초중반의 경우가 특히 그렇다. 간혹가다 정말 컨텐츠를 생산하면서도 '마감'이라는 단어를 말랑하게 사용하는 경우를 목격할 수 있긴 한데, 그것도 결국 후자에 포함되는 것이므로 이쯤에서 논의를 진전시켜 보도록 하자.

특히 만화가의 마감에 대해 여러 가지 판타지가 존재한다. 만화가가 마감을 맞추기 위해 며칠 밤을 새고, 편집자에게 오는 전화를 이런 저런 방식으로 교묘하게 회피하고, 그래도 결국에는 어찌 어찌 일자를 맞춰서 원고를 보낸 후 '하얗게 불타버리는' 그런 장면들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연상할 수 있다. 만화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자란 젊은 세대들의 경우, 앞서 말한 것처럼 본격적인 사회 생활을 해보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에, '마감'에 대한 판타지에 더 쉽게 휩쓸리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마감은 만화가들이 편집후기에 그려놓는 것처럼, 남에게 쉽사리 징징거리면서 자기 일을 한 없이 미루고, 창조적인 생각이 안 떠오른다는 핑계를 대며 술이나 퍼마시고, '빈 문서 1' 앞에서 한없이 한숨을 내쉬는 그런 것이 아니다. 마감일은 그저 그때까지 원고가 넘어가야 다음 공정 진행에 차질이 없음을 나타내는 최후의 데드라인일 뿐이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음 공정'이다. 글쓰는 이가, 혹은 만화를 그리는 이가 원고를 생산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출판 산업의 큰 맥락에서 원 재료를 생산하는 것에 불과하다. 물론 그 원고 안에 세계를 벌벌 떨게 할 놀라운 무언가가 담겨있을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만들어지는 순간에 그것은 다른 수십억의 원고와 전혀 다를 바 없는 '1차 재료'일 뿐이다. 그것을 받아서 편집, 즉 가공하고, 디자인 과정을 거쳐 필름 출력, 인쇄하는 모든 공정을 거쳐야 비로소 책이 나온다.

자본가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려 하지 말고, 자본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자. 출판 산업의 차원에서 보면, 내가 쓰고 있는 글은 이 광대한 산업을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일 뿐이다. 그것은 당연히 재가공되고, 편집되며, 디자인 과정에서 눈 베리는 무언가로 전락할 수도 있고, 제책 과정의 실수로 앞뒤 순서가 뒤바뀔 수도 있다. 광부가 광산에서 캐낸 원광석이 장신구가 될 수도 있고 자동차가 될 수도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글은 인간 정신의 산물이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유통되는 글은 모듬살이하는 인간들의 사회적 산물이다.

마감의 고통을 토로하는 천편일률적인 말은 이제 그만 나와야 한다. 글 쓰는 이는 그저 납기에 맞춰 1차 생산물을 뽑아내는 것일 뿐이다. 편집자가 바라는 대로 투덕투덕 아무렇게나 써서 줘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글에 담기는 극도로 내면적이고 사밀한 그 무언가를 구태여 '마감의 고통'으로 치환시키지 말자는 뜻이다. 글은 정신의 산물이지만 원고는 산업의 일부분이다. '마감'이라는 닳고 닳은 단어 대신 '납기'라는 단어를 넣어보면 그 차이가 피부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20대 문제에 대해 사고하면서 가장 절실하게 느껴지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나'를 한가운데 놓고 생각하지 말고, 내가 어떤 산업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짚어보는 그런 종류의 객관화가 필요하다. 보름 넘게 품고 있던 원고를 털어낸 후 잠시 든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