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1일 목요일, 저녁에 있었던 약속이 끝난 후 한성대입구역에서 출발해 서울역에서 1호선으로 갈아타고, 가산디지털단지역에서 내렸다. 금천03 마을버스를 타고 잠깐 달리니 충남슈퍼 정거장이 나왔다. 몇몇 젊은 사람들이 이미 그곳에서 내리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기륭전자 가는 길이 그렇다.
기륭전자에 대해 한 마디 언급을 하고 싶을 때마다 꾹 참았다. 모든 사람이 자신이 직접 본 것, 직접 겪어본 것에 대해서만 말해야 한다고 강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제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 어떤 '의미'를 찾아내고 발견하는 것은 분명 월권이다. 나는 종종 '이유를 알 수 없는 일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고 나 자신에게 말하곤 한다. 도착한 시각은 9시 30분 경이었고, 기륭전자 정문으로 향하는 골목에는 전경들과 교통경찰들이 두어 소대 정도 있었다.
뭔가 문화제 비슷한 걸 했는데 이미 끝난 것 같았다. 근처 슈퍼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서 입에 물고 상황을 주시하고 있는데, 갑자기 영화 '안녕? 허 대짜 수짜님'이 상영되기 시작했다. 다들 철푸덕 앉아서 영화를 보기 시작하길래, 나도 그냥 은박 돗자리 조각을 깔고 앉았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영화 상영이 끝나면 행사가 마무리될 듯했다.
'안녕? 허 대짜 수짜님', 제목 참 길군, 아무튼 이 영화의 강점은 이른바 '대기업 노조' 사람들이 대체 어떤 식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대강이라도 잘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가 한 다리 건너면 다 친구고, 선배 후배고, 혈연과 친분으로 얽혀 있다. 허대수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는 조연은 허대수의 처남으로 설정되어 있고, 그것은 전혀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다.
현대자동차 공장으로 먹고 사는 울산이라는 도시의 풍경마저도 다소 손에 잡힐 듯하다. 현대차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아파트에 살고, 현대차에서 일하지 않거나 비정규직인 사람들은 시 외곽 허름한 주택가에 산다. 이것을 명시적으로 드러내고 있지는 않지만, 영화를 통해 충분히 감지할 수는 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이 영화를 봐야 할 진정한 이유가 된다. 울산 노동자들이 만든 울산 영화라서 그런지, 일부러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울산이 보인다.
하지만 본의 아니게 성취된 이러한 리얼리즘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갈등을 해소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작위적인 줄거리 전개로 인한 단점을 다 가려주지는 못한다. 아빠의 꾀병 -> 딸이 알아채고 분노 -> 아빠가 진짜 병으로 쓰러짐 -> 병원에서 비정규직 사윗감이 정규직 아빠에게 감명을 줌 -> 비정규직 해고자 20명을 위해 정규직이 으쌰으쌰 -> 투쟁! 승리! 로 이어지는 후반부의 스토리라인은 아무리 생각해도 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그럼 대체 어떻게 해야 하냐, 네가 한 번 써보지 않겠느냐'라고 말한다면 나도 딱히 할 말은 없다. 이것은 한국어권에서 개발된 서사 양식 자체가 지나치게 협소하기 때문에, 바꿔 말하자면 인프라가 부족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일 가능성이 더 크다.
그 어떤 문제도 제대로 해결되지는 않은 채로, 하지만 뭔가 결말이 나는 그런 이야기를 우리는 쉽사리 떠올릴 수가 없다(켄 로치의 '아름다운 세계'가 이런 종류에 속하지만, 켄 로치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우리의 현실이 얼마나 빈곤한지를 보여주는 것이니 더 서술하지는 않기로 하자). 따라서 한국의 수용자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작위적이고 실은 아무 것도 해결된 바 없다고 할지라도(이 영화 속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 문제는 전혀 해결된 게 아니니까), 일단 '좋은 결말'을 내야 하고 그것도 가급적이면 갓 태어난 아기의 입을 통해 읊어져야 한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마무리되고 있는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도리어 희망은 저 먼 곳으로 사라져만 간다.
엔드 크레딧이 올라간 후 사람들은 이곳 저곳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영화가 상영되고 있는 동안 진보신당 칼라TV가 와서 몇 명을 인터뷰했고, 촛불다방에서는 누룽지를 나눠줬고(먹다가 입 천장을 살짝 데였지만 맛있었다), 저 구석에 있는 컨테이너 안에서는 누군가 계속 굶고 있었을 것이다. 기륭전자에 정규직 노조가 있을까? 있다고 해도 과연 그들이 이 영화처럼 '연대'하여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까? 설령 그렇다고 해도 지금 이 사태가 해결될 수 있는 걸까?
'노동문제가 중요하다'라고 강조하던 나 같은 사람이 아니라, '대한국민 안중근' 같은 국가주의의 기표를 티셔츠로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기륭전자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그들은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말 한 마디에 목숨을 걸 것이고, 일본은 악이며 일제시대의 조선은 선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견지하고 있을 터이지만, 정작 기륭의 옆에 서 있는 건 그런 사람들이다.
날씨가 갑자기 쌀쌀해졌고, 집까지 가는 길은 멀었다. 나는 충남슈퍼 앞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구로디지털단지역으로 향했다. 공단 지역의 유흥을 책임지는 역전가의 불야성을 헤치고, 내가 탄 2호선 열차가 출발했다. 시위하러 갔다가 영화만 보고 돌아왔다. 해답을 바란 건 아니었지만, 더 많은 질문들과 함께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노뉴단입니다. 좋은 글이네요.^^ 스크랩해갈께요.
답글삭제반갑습니다.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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