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9-14

대한민국을 긍정하라?

원래 이 논쟁에는 낄 생각이 없었지만, 레디앙에 올라온 홍기표 레디앙 기획위원이 쓴 "주대환, 뉴라이트 마당에 폭탄 던지다"(레디앙, 2008년 9월 13일)라는 기사를 보고 마음을 바꿔먹었다. 이상한 주장을 옹호하기 위해 우스꽝스러운 논변이 따라붙는 형국이다. 한 마디 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대한민국을 긍정하라!"라는 주대환의 테제를 놓고, 홍기표는 주대환이 '조봉암의 토지개혁'을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대한 논리적 근거로 끌어오고 있으며, 이것은 대한민국을 긍정하고 싶어하는 이른바 '뉴라이트'들의 뒤통수를 치는 화끈한 반격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홍기표는 "담장 너머로 수류탄을 던졌다"라는 비유를 통해 주대환의 테제에 대한 자신의 해설을 함축하고 있다.

조봉암의 토지개혁이 얼마나 위대했는지를 논하는 것은 이 글의 논지와, 심지어는 그것을 통해 '대한민국을 긍정하라!'라는 테제를 옹호하고자 하는 홍기표의 논지와도 큰 상관이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긍정'이, 구조적으로 대단히 취약할 수밖에 없는 긍정이라는 데 있다. 대한민국을 긍정하는 건 좋다. 하지만 그 긍정을 토대로 홍기표는, 혹은 홍기표가 옹호하는 주대환은 어떤 가치를 추구할 것인가?

잠시 설명을 애둘러 가보자. 늦깎이로 서강대학교 철학과 대학원에 들어간 나는, 인문관 화장실에서 소변을 볼 때마다 눈 앞에 써붙여져 있는 '서강 교육은...' 이라는 형식의 모토를 읽는다. '서강 교육은 사회의 발전을 돕는다', '서강 교육은 학생의 전인적 발전을 도모한다', '서강 교육은 세계를 긍정한다' 뭐 이런 것들이다.

혹자는 이런 모든 문구들을 그저 '총론'으로 치부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상의 문제는 그렇게, 이건 총론이니까 아무 말이나 해도 '옳은 말'이면 큰 상관 없고, 각론에서 내용을 보충하면 되는 그런 게 아니다. 여기서 나는 논지 전개를 위해 '서강 교육은 세계를 긍정한다'라는 표어를 검토할 생각인데, 내 생각에 그것은 가톨릭의 사상적 토대를 명료하게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가톨릭은 세계를 긍정한다. 비록 메시아가 재림하고 나면 아침이슬처럼 사라져버릴 이 세상이지만(기독교적 관점에서 보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긍정하며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염세주의 등에 빠지는 것을 옳지 않다고 평가한다. 왜냐하면 이 세계 자체가 신의 사랑을 존재의 근거로 삼고 있는 하나의 거대한 선물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 속에서, 역시 천부적으로 내려받은 자유의지를 행사하며 서로 행복하게 살아가야 할 의무가 있다.

가톨릭이 세계를 긍정하므로, 예수회의 부설기관인 서강대학교 또한 세계를 긍정하는 교육을 실시하게 되는 것이다. '세계를 긍정한다'라는, 어디다 갖다 붙여도 될 것 같은 이런 '총론'도 결코 그냥 나오는 게 아니다. 가령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세계를 긍정한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들은 현세를 부정하며 내세를 긍정하지만, 가톨릭은 현세와 내세를 모두 긍정한다. 이런 차이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하지만 '세계 긍정'을 사상적 토대로 삼고 있다고 해서, 현실 속에 존재하는 모든 잘못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가치 판단을 위한 기준이 필요하고, 동시에 현실이 지향해야 할 어떤 거대한 이상이 필요해진다. 지옥에 대한 공포보다 중요한 것은 천국에 대한 희망과 상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앞서도 말했듯 가톨릭은 현세와 내세를 모두 긍정한다. 그것은 현실 속에서 힘을 잃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요구되는 논리필연적 요구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다시 주대환으로 돌아와보자. '대한민국을 긍정한다'라는 말은 거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 지금 있는 그대로의 대한민국을 긍정하고 그 이후의 무언가를 또 긍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대한민국의 상위 0.01%에 속하는 사람들에게나 '긍정적'일 수밖에 없는 지배자의 논리에 불과하다. 우리에게 우리가 절대 만족할 수 없는 이 대한민국을 긍정하라는 말을 하고 싶다면, 우리가 더욱 맹렬하게 사랑하고 긍정할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대한민국을 그려내어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주의자의 본질적 책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시대정신'에 기고된 그의 글은 대한민국에 대한 긍정을 넘어서는 또 하나의 거대한 긍정을 그려내기는 커녕, NL과 PD라는 불확실한 실체에 대한 부정으로 가득차 있는 듯하다. 그가 이런 식으로 기존의 운동을 모두 부정하면서 제시하는 대안이라는 것도, '국회의원 많이 배출해서 세금 많이 걷은 다음 복지정책으로 뿌리자' 정도에 불과하다. 물론 그것은 그 자체만으로 아름다운 꿈이다. 하지만 과연 그 꿈이 현실을 뒤흔드는 동력이 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것일까?

주대환의 논의를 옹호하는 홍기표의 논지는, 마치 주대환이 '좌파' 전체를 대변하는 사상가인 양 여기고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오류에 빠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한민국을 긍정합니다'라는 좌파 이론가 한 명이 나왔다고 해서, 좌파들에게 붙은 '체제를 부정하는 자들'이라는 딱지가 절로 떨어져나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일종의 분할 통치를 위한 미끼가 될 뿐이다. '주대환은 대한민국을 긍정한다는데, 너희들은 왜 그러니?'라는 질문만 돌아올 것이 뻔하다는 말이다.

이건 안 그래도 좁은 한국 좌파의 입지를 더욱 좁힐 뿐이다. 주대환이 민주노동당 분당을 논할 때 사용했던 논법을 이 지점에 고스란히 적용해도 큰 무리가 없다. 역사 이래로 이런 '모범생 되기 전략'이 담론의 전쟁터에서 유용하게 사용되었던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실은 머리 속에 입력되어있는 사례가 많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정치적인 판단에 그리 능숙하지 않은 내가 보기에도, 주대환의 '대한민국 긍정합니다' 사건은 정치적 패착 같다.

지금 좌파 진영에 필요한 것은, 작고 다양하면서도 구체적인 상상력들이다. 강북구의회 의원 세비 삭감 같은 작은 승리들이 축적되어야 다음번 지방 선거를 노릴 수 있게 된다. 동시에 대한민국을 전체적으로 어떤 나라로 만들어가야 할지에 대한, 더 크고 더 또렷한 상상력이 요구된다. 대한민국에 대한 평면적인 '긍정'은 지배계급의 무기일 수밖에 없다. 그것을 정녕 좌파의 것으로 만들고 싶다면, 대한민국에 대한 긍정은 결국 '이중 긍정'이 되어야만 한다.

가톨릭과 대조하며 어렵게 설명하였는데, 내가 말하는 '이중 긍정'은 더 좌파적으로 말하자면, "사회민주주의자는 깊고 넓은 개혁을 위해, 개혁이 성공하면 더 큰 개혁으로 나아가고 개혁이 실패하면 최후의 수단을 꺼내기 위해, 급진주의를 늘 배후에 두어야 한다"("더 붉고 더 푸른 사민주의를 향하여", (가칭)좌파집권연구회, 2008년 2월 21일)는 문장과 같은 맥락을 공유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주대환과 그 주변에서 '미국식 양당제도'에 한다리 끼어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급진성이 거세되어 있다. 어제 써먹은 비유이긴 한데, 결국 그 사민주의자들은 '국회에서 의석 두 번째로 많이 먹기 vs. 고자되기'에서 '고자되기'를 택하며 스스로 용자라고 으스대고 인증샷을 찍고 있는 것이다. 북극의 빙산이 다 녹고 있는 이 시국에, 이 논쟁은 너무도 무가치하고 또 우습지만, 결국 한 마디 보태지 않을 수 없었다.

2008-09-11

정치의 철학화, 철학의 정치화 - 최장집 '고별 강연' 비판 및 실천적 방향에 대하여

최장집의 '대의민주주의 대 직접민주주의'라는 논의 프레임은, 결과적으로 볼 때 여러 사람 바보 만들고 정작 촛불시위에 대한 지적인 담론도 활성화시키지 못한, 거대한 패착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최장집의 그간 논의 구도에서 볼 때 그런 말이 당연히 나올 수밖에 없다는 말은 물론 정당하다. 하지만 "한국의 정치 상황 내"에서 자신의 정치학이 출발하고 있다고 말하는1), 즉 학문적 발언과 그것의 정치적 해석을 동시에 염두에 두고 있는 원로 학자로서, '이상주의 대 현실주의'라는 유사 형이상학적 틀거리에 갇혀버릴 수밖에 없는 담론을 내밀었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안타까운 일이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최장집이 '고별 강연'을 통해 천명한, 학자 최장집 본인의 사상적 전향이 깔려 있다.

아무도 이 문제를 지적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에 대해 글쓰기를 주저해왔던 이유는, 더 시간을 두고 생각해서 길게 쓰면 잘 쓸 수 있으리라는 그런 기대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난 월요일 모종의 기회가 있어서 이 이야기를 꺼내놓고 보니, 사람들을 이해시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어려우며, 그게 된다면 만족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최대한 단순하고 간략하게 오래 품어온 논지를 꺼내놓고자 한다.

'신은 존재하는가', '영혼은 불멸하는가', '자유의지에 의해 인과론을 벗어날 수 있는가'라는 세 가지 형이상학적 질문에 사로잡혀있는 사람들을 보며 칸트는, 이러한 '형이상학적 논쟁'들을 우리의 지성이 우리가 알 수 있는 범주 바깥의 것을 알려고 하기 때문에 맞닥뜨리게 되는 것으로 간주했다. 물론 그 각각에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답이 안 나오는 것에서 굳이 답을 구하려 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그는 생각한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도 비슷하다.

한국어에는 이상주의와 현실주의의 대립이라는, 대단히 부정확하지만 그 덕에 어디에나 갖다 써먹게 되는 '형이상학적' 대결 구도가 존재한다.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나는 현실주의자이고, 너는 이상주의자이다'라는 식의 개인적 매도에 활용되게 마련이다. 따라서 당신이 논쟁을 할 때, 상대방을 이상주의자로 몰아갈 수 있다면 반 넘게 이겼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나는, 최장집의 대의민주주의 논쟁이 자신은 현실주의자이며 남들은 이상주의자라고 주장했다는 그런 소리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굳이 이상주의와 현실주의를 대립시키고자 한다면, 최장집은 자신이 말하는 대의민주주의가 상당히 이상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문제는 그 대립 구도가 언어의 형태로 던져졌을 때, 그것을 수용한 사람들의 태도이다. 촛불의 정치학을 '직접민주주의'에 고스란히 투영함으로써, 기존의 정치와는 다른 그 무언가를 바라고 있었던 이들은 졸지에 나쁜 의미에서 '이상주의자'가 되어버렸다. 예전같았다면 그 누구도 촛불의 흐름에 거슬러 '나는 대의민주주의의 가치를 더욱 선호한다'라고 용감하게 말하지 않았겠지만, 최장집은 본인이 늘 해오던 말이므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총대를 맸다. 최장집은 자신의 고별 강연에서 "낭만주의적/이상주의적 정치학(관점)"이 대체로 "진보파의 관점을 대변"하며, 이는 "대의제 민주주의를 우회하거나 넘어서는 "직접 민주주의"적 요소의 확대를 통한 어떤 이상적인 민주주의에 대한 선망(羨望)"을 담고 있다고 주장했다.2)

여기서 여러 사람 바보 됐다. 우선 촛불시위에 직접 참여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피해를 보게 되었다. '나는 직접민주주의자요'라고 말하면 그는 현실을 도외시하는 순진한 이상주의자가 되어버린다. 반면 '나는 직접민주주의자가 아니오'라고 베드로처럼 부인하면, '그럼 촛불을 끄고 국회의 개원을 촉구합시다'라는 온건한 자들에게 대꾸하기가 매우 난망해진다. '지금 이 논의는 다 잘못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이 정답일 수 있는데, 그 정답을 그 타이밍에 말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나는 기억하고 있다. 이미 프레임에서부터 말려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불행은 최장집 본인에게도 닥쳐왔다. 그가 말하는 대의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의 대립 구도는, 굳이 이상주의와 현실주의를 다시 갖다 붙여본다면, 현실적인 맥락에서 볼 때 직접민주주의보다 대의민주주의가 더 이상적이라는 뜻이고, 그렇기에 대의민주주의를 정상화하는 방향으로 더 많은 역량이 소비되어야 한다는 실천적 결론을 포함하고 있다. 만약 그가 진보신당의 이론가였다면 "시민들의 일상적 정치생활의 형태가 운동이 아니라 정당이 되는 것이 중요"3)하다는 말을 하면서 슬쩍 입당 원서를 돌릴 수 있었겠지만, 정치적 지향이 다를 뿐더러 학자로서 그럴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그 결과 그는 '촛불의 발목을 잡는다'며 괜히 욕을 먹게 되었다.

게다가 한국의 지식 사회에서도, 별 쓰잘데기 없는 이상한 논쟁이 촉발되어 버린 탓에, 촛불시위를 제대로 해석해내지 못했다는 지적을 충분히 할 수 있다. 이후에 등장한 무슨 웹 2.0이니 뭐니 하는 소리들도 결국 최장집이 깔아놓은 논의 틀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는 것이 내가 받은 인상이다. 가령 웹 2.0의 가치를 목놓아 외치는 이들은, 대부분 인터넷을 통해 결집된 이들이 광장에 모여 자신들의 목소리를 직접 외친다는 점에 높은 점수를 주고 있는데, 이건 직접민주주의에 더 가깝다. 대의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의 이분법은, 담론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더더욱, 등장하지 말았어야 할 이분법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나는 최장집을 적극적으로 탓할 생각이 그다지 없다. 최장집을 옹호하고자 하는 이들이 늘 하는 말마따나, 그는 자신이 늘 하던 말을 했을 뿐이다. 대의민주주의의 가치를 소홀히해서는 안된다는 말을, 이상주의 대신 현실주의를 추구해야 한다고 이해하고, 촛불시위를 이상주의자들의 모임으로, 현실에서는 절대 성립할 수 없는 직접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어린이들로 몰아간 당시의 담론적 분위기에 더 큰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장집이 내놓은 발언으로 인해 이른바 '정치의 철학화'가 다시금 이 땅에서 시연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강한 불만을 느낀다.

정치적으로, 또한 사회적으로 다루어졌어야 할 문제가, 어쩌면 그 자체로서 한국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지탱하는 언어적 축으로 기능하고 있는 '형이상학적 클리셰'에 묶여버렸다는 것은 너무도 뼈아픈 손실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예컨대 당신이 누군가에게 기륭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 얘기했다고 쳐보자. 그가 당신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면, 아마도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사는 게 다 어려운 거 아냐?' 혹은 '결국 그 사람의 성공은 개인적인 노력에 달려 있지', 등등. 여기서 답이랍시고 나오는 이게 바로 한국 사회에 만연해있는 사이비 형이상학이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존재하는가?' 대신 '사는 건 다 똑같다?'가 들어왔지만, 그것이 작동하는 구도는 칸트가 비판한 그것과 다를 바 없다. 사람 사는 게 다 똑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우리의 지성으로는 알 수 없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에 대해 적절한 답을 내놓을 수 없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바로 저런 '형이상학'들이 논쟁을 좌우하고, 타인의 고통에 무감한 자신을 위로하는 용도로 악용되고 있다. 내가 말하는 '정치의 철학화'란 바로 그런 것이다. 그리고 최장집의 대의민주주의 대 직접민주주의론은 담론적으로 같은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상주의자, 철부지, 직접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사회 경험 없는 룸펜들, 이렇게 촛불은 담론의 전쟁터에서 패배를 향해 걸어가게 되었다.

최장집의 '고별 강연'을 꼼꼼히 잘 짚어보면, 그러나 안타깝게도, 최장집의 정치적 패착이 '그냥 하던 것만 하다가 나온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최장집을 옹호하겠다는 사람들조차도 이 점을 지목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도 참 게으르다는 것을 지적해둔다. 아무튼 결론을 말하자면, 최장집이 자신의 지적 원천을 마르크스에서 베버로 옮겨가고 있다고 말할 때4), 지금의 정치 담론적 실패는 이미 그 속에서 예견되고 있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정치의 철학화'에 맞서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고, 그 중 하나는 마르크시즘적으로 하부 구조를 연구하여 상부 구조의 허위성을 폭로하는 것이다. 최장집이 촉망받던 학자이던 시절, 아니 그렇게 멀리 갈 것도 없고 최근까지 진행하고 있던 작업들이 바로 그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노동운동의 조직화 실패를 통해 한국 대의민주주의의 헐거움을 논했고, 안토니오 그람시를 끌어들여 한국 사회의 헤게모니가 움직이는 방향을 관찰했다. 스스로 인정하는 바와 같이 그는 "권위주의시기에 노동을, 민주화 이후 제도와 정당을 고민"5)해왔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커다란 문제가 발생했다. 범 한나라당 계열 의석이 개헌선을 넘기거나 그에 육박하는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만 것이다. 대체 왜 대선에서 한나라당에게 대권을 내주고도, 한국의 시민들은 다시 한나라당에게 몰표를 안겨주었는가? "정당정치의 복원 내지는 활성화를 중심으로 한 대의제 민주주의의 제도 강화"6)가 최장집의 정치학이 지향하는 바라면, 대체 왜 한나라당이 대선과 총선 모두를 압승하는지에 대한 납득할만한 해석을 내놓을 수 있어야 했다. 그것이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정치학자' 최장집에게 바라던 바일 것이다.

하지만 총선 과정에서 나온 최장집과 최장집 학파의 분석은, 너무도 급박한 나머지 기존에 그들이 하던 것과 같은 충분한 깊이를 갖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그들은 한나라당으로 가득 차있는 국회를 놓고도 '대의민주주의'의 당위성을 강변해야 하는 변같은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민주당은 마치 '여당되기 vs. 고자되기'에서 용감하게 '고자되기'를 선택한 것처럼 보인다(당연히 여당도 못 되었다). 한나라당의 내분은 '복당'이 테마였던만큼, 정치적인 이슈였지만 동시에 너무도 코믹했고, 실질적으로 대단히 가벼운 사건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대의제 민주주의의 제도 강화"라는 자신의 테마를 유지하는 것은 학자로서 존경받을만한 대단한 뚝심임에는 분명하지만, 원내 정당정치가 거의 마비될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운동의 역할 축소"를 동시에 강조하고 있는 것은 지나친 외고집이다. 지금은 정당의 외연이 운동으로 넓어져야 하고, 동시에 정당이 운동의 역량을 흡수하여야 할 시점이다. 촛불시위의 동력이, 오래 갔다면 오래 간 거지만, 재생산되지 못하고 광화문 네거리에서 흩어지고 만 것은 정당정치에 있어서도 큰 손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돌아오는 것은, 앞서 말한 '정치의 철학화'일 뿐이다. 그것은 최장집이 정당정치의 복원을 위해 "좋은 정당의 출현과 카리스마적 리더십의 출현을 기대"7)한다고 말하면서 확고해졌다. '카리스마적 리더십'은 그가 스스로 인정하는 바와 같이 베버가 정식화한 개념이다. 그렇거나 말거나 그 단어는 한국 사회의 현재를 이해하는데 아무런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최장집이 이후 '정치적 카리스마란 무엇인가'라며, 베버 자신도 단순한 관찰에 머물고 만 정치인의 카리스마에 대해 추가적인 연구를 계속하고 있기를 기대하게 되는 것도 그래서이다. 설마 덜렁 내던져진 '카리스마'라는 단어 하나, 그게 우리가 "한국사례, 하나에 초점을 맞추어 정치학을 탐구"하는 "지방(local) 그것도 변방의 정치학도"8)에게 기대할 수 있는 전부란 말인가? 나의 장집짱은 이렇지 않아!

나는 여기서 최장집이 베버의 '카리스마'라는 개념을 한국 정치에 적용하고 있다고 해서 그를 비판하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개념을 도입하면서 일언반구 설명도 없이, 한국 정치에 새로운 언어를 주입해야 할 자신의 책무를 방기하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의혹을 던지고 있을 뿐이다. 현재 경제는 위기에 처했고, 지도자의 카리스마는 니미 뿡이고, 외교는 수렁에 빠졌다. 하긴 지금은 DJ 계열의 정치인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도 알 수 없을 상황이지만, 나는 최장집의 내용 없는 '카리스마' 언급이 결국 김대중에 대한 향수에서 기인하는 건 아닌지, 조심스레 묻고 싶다. 반대로 말하자면 최장집의 '카리스마'론은 바로 그렇게 정치적으로 악용될 소지가 다분하다.

이 모든 내용 없는 싸움은 결국 '정치의 철학화'를 가속화할 뿐이다.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다.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소득 차이가 더 벌어진다는 뜻이다. 하지만 '정치의 철학화'는, '스스로 노력하지 않는 사람을 국가가 왜 구제해줘야 하나요?'라는 식의 '철학적' 논의로 담론을 이끌어감으로써 운동의 동력을 약화시키고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다. 최장집이 베버의 어깨 위에서 추가적인 논의를 진행하지 않는 한, '카리스마' 또한 마찬가지 기능만을 수행할 뿐이다. '지도자 한 사람의 카리스마가 아니라, 집단 지성이 중요하다'고 어떤 '민주주의자'가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다. 이러면 최장집은 졸지에 엘리트주의자가 될 것이고, '엘리트주의 대 민중주의'라는 가짜 논쟁의 틀 속으로 또 빨려들어갈 것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심지어 그를 옹호하겠다고 떠벌이는 자들조차도 최장집의 '카리스마'론에는 일말의 관심이 없다.

그의 '카리스마'론은 사실 사회적 논쟁의 주제가 될 수 있었고 또 그랬어야 한다. 하지만 한국의 담론적 현실상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 등, 이념적 색체가 뚜렷하고 당내 민주주의가 비교적 활성화되어있는 정당에 소속되어 있거나 그 내부 정치를 목격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지도자의 카리스마'가 중요하다는 강조가 가질 수 있는 무궁무진한 정치적 함의에 몸서리를 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신문 읽고 정치평론하는 것이 정치 활동의 전부인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최장집의 카리스마론은 신영복의 '사람이 희망이다'와 크게 다를 바 없는, 그저 '좋은 소리'일 따름이다. *

내가 최장집을 비판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새삼스레 최장집에게 '실천적 이론' 을 내놓으라고 주문할 수는 없고 그럴 생각도 없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의 그는 내게 '이론적 실천'의 모범을 보여주었고, 바로 그것이야말로 최장집을 한국의 지성계에서 빛나게 만든 근본적인 이유였다고 생각한다. 나는 최장집이, 한국의 현실에서부터 출발하여 '카리스마'라는 단어의 속을 꽉 채워주기를 지금도 바라고 있다. **

정리해보자. 한 시대의 담론을 이끌어오던 정치학자의 고별 강연을 비판하면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결국 하나다. 우리는 정치의 철학화가 아니라 철학의 정치화를 이룩해야 한다. 한국어 속에 횡횡하고 있는 사이비 철학들을 붙잡아내어 정교한 언어로 해체하고, 담론에 기생하는 이데올로기를 발라내야 한다. 그것은 소크라테스부터 비트겐슈타인까지, 철학자들이 맡아오던 가장 유익한 과업 중 하나이다.

동시에 우리는 '수입상 컴플렉스'를 떨쳐버리고 한국의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국내에 수입된 수많은 이론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이데올로기를 몰아낸 자리에 철학을 심어야 하는 것이다. 가령 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가 수입되었다면, 스스로의 생명을 내던져 단식하고 오체투지하는 우리의 '투쟁'을 통해 그 책을 이해해볼 수 있을지 모른다. 그 반대도 물론 가능하다. 앞서 말했듯이 이것은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한국 사회가 너무도 특수하다느니, 이론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느니, 비동시적인 것들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느니 투덜거리는 대신, 자신이 아는 그 무엇을, 그러므로 아주 넓은 의미에서의 철학을, 정치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최소한의 시도라도 해보느냐 마느냐이다.

정치의 철학화가 횡횡하는 이유는 한국 사회에 반지성주의가 만연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지성주의가 만연해 있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말 그대로 지식 자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한국 사회의 무의식을 분석하는 것보다, 한국 사회의 무식을 타파하는 것이 더욱 급선무라고 생각한다(정신분석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는 것은 그러므로 분명히 다른 문제일 것이다).

한국 사회의 지적 수준을 끌어올리는 것과, 철학을 정치화하는 것은 결국 같은 행동의 다른 이름이다. 성신여대에서 들려온 작은 승전보 하나에 기뻐해야만 하는 패배의 가을이다. 결국 우리는 지고 또 지면서도 꾸준히 배워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공부하고 싸우고, 싸우면서 공부해야 한다. 그게 바로 철학의 정치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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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두 문단은 9월 12일 오전 2시 18분에 추가되었습니다.

1) "한국의 정치와 나의 정치학", 1쪽, 두 번째 테제. 특히 "정치학은 현실로부터 떨어질 수 없는 정치 현상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갈등적, 파당적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워"라는 10번째 문장에 주목할 것.

2) 같은 팜플렛, 2쪽, 12번째 테제.

3) 같은 팜플렛, 9쪽, 6번째 테제.

4) 같은 팜플렛, 12쪽, 10번째 테제.

5) 같은 팜플렛, 2쪽, 16번재 테제.

6) 같은 팜플렛, 2쪽, 14번째 테제.

7) 같은 팜플렛, 12쪽, 10번째 테제.

8) 같은 팜플렛, 3쪽, 7번째 테제.

2008-09-10

기륭전자의 '88만원 세대'들

[판]기륭전자의 '88만원 세대'들 (경향신문, 2008년 9월 11일자)

. . . 그렇게 시작된 파업이 3년을 넘겼다. 그 유명한 ‘기륭전자 파업’의 전개 과정이 이렇다. 100일에 가까운 기간 동안 단식을 했던 두 명의 여성 노동자들이 효소까지 끊고 버티다가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지금도 싸움은 계속되고 있다. 광화문에서 시작된 촛불이 구로공단으로까지 향해, 내가 한 줌의 죄책감을 덜어보기 위해 현장에 들렀던 날, 사람들은 문화제를 마친 후 영화 '안녕? 허 대짜 수짜님!'을 보고 있었다.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간부 허대수는 처남에게 묻는다. "비정규직 내가 만들었냐?"

'88만원 세대' 문제에 대해서도 결국은 같은 대답이 돌아온다. '누가 그러게 공무원 시험 보랬냐?' 혹은, '중소기업 가서 열심히 일하면 되잖아!' 하지만 이곳은 가내수공업 중소기업의 제품이 우주왕복선 부품으로 팔리는 나라 일본이 아니다. 여기는 공채의 왕국 대한민국이다. 당신의 첫 직장이 당신의 인생 전부를 좌우한다. . .


지면 관계상 누락된 문장을 이곳에 올려놓는다. 한결 이해가 쉬워질 것이다. 한 달 넘도록 생각하고 있던 주제를, 원고지 10여매 안에 박아넣는다는 것은 정말이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기서 못다한 이야기들을 풀어놓을 기회가 또 있으리라 믿는다.

노파심에 강조하자면, 나는 지금 '20대가 세상에서 제일 불쌍해'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그따위 소리를 하기 위해 꼴랑 한 번 가보고 기륭전자를 팔아먹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잔인한 세상 속에서, '어린이' 취급당하며 근 30여년을 살아가는 이들이 비굴해지지 않는다면, 또 그만큼 서로에게 잔인해지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 아니겠냐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나 자신과 내 또래에 대해 그리 큰 기대를 걸지는 못한다. 하지만 절망을 가장한 매도를 하는 이들을 더욱 참아낼 수 없다. 그정도 이야기만이라도 꼭 하고 싶었다.

2008-09-04

구글 크롬

구글 크롬을 사용해 보았다. 확실히 빠르긴 빠르다. 별도의 탭이 움직이는 방식도 마음에 든다. 하지만 구글 특유의 미니멀리즘이 지나치게 밀어붙여져 있다는 인상도 강하다. 가령 트리 형식의 즐겨찾기 관리가 대단히 불편한 것은, 적지 않은 수의 인터넷 사용자에게 장점이 아닌 단점으로 보일 가능성이 더 크다.

하지만 파이어폭스를 처음 사용하던 시점부터 가지고 있던, 탭이 브라우저 창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느껴지던 답답함은 많이 해소된 듯하다. 일각에서 지적하는 바와 같이 크롬은 브라우저에 탭이 종속된 형식이 아니라, 탭의 뭉터기로 브라우저를 제시하고 있다. 그 결과 별도의 탭을 '바로가기' 형식으로 바탕화면이나 시작버튼 등에 배치할 수 있는데, 이건 그야말로 구글 닥스 바로가기 만들라는 뜻이고 너무 속이 뻔히 보이지만 창의력 대장이긴 하다.

하지만 나는 당장 구글 크롬으로 갈아탈 수 없는데 그 이유는 딱 두 가지이다. 파이어폭스의 마우스 제스처 기능이야 포기하라면 포기할 수 있다. 그러나 Sage-Too와 조테로만큼은 버릴 수 없다. 세이지를 써온 사람은 다른 리더기로 갈아탈 수가 없다. 특히 블로그를 볼 때 유용하다. 별도의 RSS 창에서 리더로 읽어온 내용만 조금 보여주는 여타 RSS 리더기와는 달리, 세이지를 쓰면 바로 그 웹 화면을 불러와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블로그를 걸어놓고 보면 본문 뿐 아니라 리플까지 한번에 다 보인다.

그러나 조테로만큼은 절대 안 된다. 대부분의 뉴스를 웹을 통해 접하는 처지에서, 뉴스 클리핑할 때 조테로만큼 좋은 툴을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했다. 특히 이코노미스트나 뉴욕타임즈 등은 조테로에 저장할 수 있는 형식을 따로 제공해주기 때문에, 클릭 한 번이면 저자 이름과 게시 날짜 등 주석 달때 필요한 정보가 모두 브라우저 안에 저장된다. 이게 없으면 두 달 전에 힐끗 훑어본 기사를 인용해서 외고에 써먹거나 하는 일이 몇 배는 힘들어질 것이다.

아직까지는 진지하게 논문을 쓴 적이 없기 때문에 본연의 학술 도구로 조테로를 사용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기사를 쓰는 차원에서도 조테로는 매우 유용하다. 맥의 데본씽크같이 진짜 헤비한 툴을 고려하지 않는 한, 조테로를 대체할 그 무언가를 찾을 수는 없다. 특히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웹을 통해 꾸준히 기사를 읽고 그걸 정리하는 것이 일과의 큰 부분인 나로서는 말이다.

브라우저 자체만 놓고 보면, 당연한 말이지만 더 늦게 나왔고 더 많은 기술과 자본이 투여된 크롬이 낫다. 하지만 파이어폭스의 수많은 확장 기능 중, 특히 조테로가 너무도 유용하다. 이건 가급적 더 많은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을 정도다.

가령 나는 지난 8월 26일 이코노미스트 온라인 에디션에서 이런 내용을 알게 되었다. 1912년까지는 권총 결투가 올림픽 종목이었다. 줄다리기도 올림픽 종목이었는데, 1920년 폐지되었다.1) 이따위 정보를 따로 적어두고 보관하는 일은 대단히 대단히 어렵다. 하지만 나는 서핑을 하다가 낄낄 웃은 다음, 주소창 옆에 뜬 아이콘 하나를 클릭했다. 그 결과 내 브라우저에 해당 기사의 서지 정보와 내용이 저장되었고, 나는 지금 그걸 보면서 이 내용을 쳤다. 각주 1에 해당하는 서지 정보는 드래그 앤 드롭으로 자동 입력된 것이다.

1. “Olympic sports: Shoot the pigeon,” The Economist, August 2008, http://www.economist.com/daily/chartgallery/displaystory.cfm?story_id=11991176&fsrc=rss.

갑자기 무슨 구글 안티가 되고자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아니다. 정보를 효과적으로 다루기 위한 더 좋은 툴이 나와있기 때문에, 무작정 대세에 시승하여 크롬으로 갈아타는 대신, 자신에게 꼭 필요한 기능이 어디에 어떻게 있는지 알아보는 시간을 갖자는 거다. 우석훈 박사의 블로그에서 마이니치 신문 영어판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낼름 내 즐겨찾기에 넣은 일이 최근 있었는데, 바로 그렇게, 서로 알고 있는 좋은 것을 조금씩이나마 나눠 갖는 자세가 필요하다고도 생각한다. 구글 크롬 사용기로 시작해서 조테로 홍보로 끝난 리뷰는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