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9-22

두 지도자에 대한 평가

《Foreign Policy》가 자랑하는 코너 중 하나가 바로 ‘Think Again’입니다. 한국어로는 ‘…를 다시 생각한다’라고 번역되는 그 코너는, 현재 논의되고 있는 이슈의 반대편에서 독자들의 시야를 넓혀줍니다. 이번호 한국어판의 표제 기사를 무엇으로 할 것인가를 놓고 편집부는 잠시 토론을 거쳤습니다. 한국의 실정을 놓고 볼 때, “김정일과의 마지막 수업을 위하여”가 더욱 적합할 수 있다는 주장은 나름 합리적입니다. 하지만 한국어판 편집부는 《Foreign Policy》의 취지에 부합하도록, “부시는 재평가될 것이다”를 이번호의 표제 기사로 선정했습니다.

‘악의 축’이라는 표현을 만들어낸 것으로 유명한 데이비드 프럼은, 그 누가 차기 대통령이 된다 하더라도 부시 행정부에서 다져놓은 길을 전적으로 뒤집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그는 부시가 민주주의를 밀어붙이며 국제 질서를 혼란에 빠뜨렸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반대하고 있습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북한과 미국과의 대화를 놓고 보면, 그 말에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로 그 대화의 상대방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김정일에게 러시아어를 가르쳤던 김현식에 따르면, 자신이 ‘평범한 학생’에 불과했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는 이들을 일부러 고위직에서 배제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가 김일성으로부터 인정받아 ‘장군’이 된 것은 1993년 북핵 위기 당시 가장 큰 목소리로 강경 대응을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아웅산 테러 사건의 ‘보도 기사’를 북한의 언론인들은 미리 써 놓고 있었습니다. “김정일과의 마지막 수업을 위하여”는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흥미진진한 비화(秘話)로 가득 차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께 일독을 권합니다.

이렇듯 두 명의 지도자에 대한 평가와 재평가, 회고와 전망이 담겨 있는 기사 외에도, 이번호 《Foreign Policy》는 허약한 정치, 부실한 경제 윤리가 사회적 약자들에게 끼치는 영향에 대해 심각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Prime Numbers의 “쓰레기 지구”와 “죽음을 만드는 사람들 - 가짜 약의 세계”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기사입니다. 중국과 인도처럼 급성장하는 나라에서는, 쓰레기가 쏟아져 나오는 동시에 가짜 약품들도 마구 생산됩니다. 쓰레기를 수거하고 의약품을 단속해야 할 정부가 부패와 무능으로 인해 국민의 안전을 지켜주지 못할뿐더러 타국 국민들에게도 악영향을 미칩니다. FP Index의 테러리즘 지수 수치가 예년에 비해 낮아졌다고 해도 세계가 안전해졌다고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그 때문입니다. 나쁜 치세는 호랑이보다, 테러리스트보다 더 무섭습니다.

《Foreign Policy》는 질문과 답을 한 권에 담는 매체입니다. 레이먼드 피스먼과 에드워드 미구엘은 “상식만 알아도 ‘부패’가 보인다”에서, 경제학적 기지를 발휘해 부패를 추적하고 그것을 해소할 수 있는 몇 가지 아이디어를 제시합니다. 그 내용은 독자 여러분이 직접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필자들은 마치 ‘지식과 정보를 통해 나쁜 정치를 극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만 같습니다.

임기 말을 향해 달려가는 문제적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와, 철권통치를 이어가고 있는 독재자에 대한 폭로가 동시에 담겨 있는 매체를 만드는 과정에서, 《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부는 우리의 현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친인척 비리와 간첩 사건이 연이어 터지는 정국입니다. 과거가 되어 있을 현재를, 훗날 긍정적인 시각에서 재평가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이번호 《Foreign Policy》는 평가와 반성, 회고와 성찰을 모두 담고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을 그 지성의 토론장으로 초대합니다.

-한국어판 편집부


포린폴리시 한국어판 9/10월호 편집자의 말입니다. 책은 지난주에 나왔는데, 개인적인 사정으로 늦게 올리게 되었습니다. 이번 호에 대해서도 블로그 방문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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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20

공포 정치와 중산층의 붕괴

. . . 양씨는 "세 아이 엄마인 내가 촛불집회에 나선 것은 깨끗한 먹을거리와 바른교육, 안정된 삶을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다는 것이었는데 이렇게 큰 대가를 치러야할지 몰랐다"며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촛불을 든 엄마가 경찰차를 부수고, 쇠파이프를 휘둘렀겠느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또 "더욱 분노를 느끼는 것은 가정에 대한 조금의 배려도 없는 경찰의 막무가내식 수사"라며 "어제 아무런 사전 연락도 없이 집을 찾아왔다는 사실도 믿기지 않았지만 전화로 다짜고짜 `출두할지 안 할지만 말하라', `출두하지 않으면 아무 때나 체포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에 기가 막혔다"고 말했다.

경찰은 이에 대해 "양씨의 소재가 파악되지 않아 주거지에 갔었고 임의동행에 응하지 않을 경우 강제조사가 이뤄질 수 있다는 이야기를 전했지만 수사 진행 과정은 일반적인 경우보다 훨씬 정중했다"고 반박했다. . .


"물대포 가로막은 '유모차 부대' 주부 입건(종합), 연합뉴스, 2008년 9월 19일


경찰의 지금 행동은 말 그대로 '알아서 기는' 것인데, 문제는 그것을 제어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데 있다. 이 사건은 정말이지 징후적이다. 촛불시위가 불타오르는 과정이 아니라, 촛불시위가 꺼지는 과정에서 더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이제 '핫'하지 않은 이 주제에 대해 그 누구도 열정적으로 입을 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현재 이명박 정부는 경제적, 사회적으로 중산층 혹은 중산계급을 양 방향에서 압박해 들어가고 있다. 혹자는 그것을 '쌤통'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기들끼리의 건전한 '상식'이나마 간직하고 있는 중간계급이 없다면, 대의민주주의도 직접민주주의도 모두 불가능하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라고 보지 않는다. 그 반대로, 너무도 적은 사람들이 중산층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양심'을 갖지 않고 있는 게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중간계급이 경제적으로 무너지고, 또한 자신들이 법 안에 살고 있는 건전한 시민이라는 자의식의 균열을 체험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중산층은 이중적인 존재이지만, 그 이중적인 존재가 없다면 현대 사회에서 민주주의란 존립할 수도 없다.

비정규직과 노동운동을 수호해야 하는 만큼이나, 중산층을 지켜내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지금 이명박 정부는 대단히 혁명적으로, 1987년 이후 한국의 민주주의의 버팀목이 되어온 바로 그 계층을 분쇄하고 있다. 이건 정말이지 징후적이다.

2008-09-15

갈수록 태산

구좌파와 단절 전쟁 각오, 내책임 커
'대한민국 좌파'하자, 야권재편 필연
[인터뷰-주대환] "뉴레프트가 뭡니까"…"운동권 이념은 난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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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수 | 이 자리에 어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궁금해서 하는 질문이다. 지난 대선 민주노동당 후보 경선에서 왜 오랜 동지 노회찬을 지지하지 않고 권영길을 지지했나?

주대환 | 노회찬은 정말 훌륭한 동지이고, 유능한 대중 정치인이고 스타다. 그런데 아무리 훌륭한 선수에게도 코치가 필요하다. 그라운드 바깥에서 보는 풍경은 좀 다르기 때문이다. 굳이 말하자면 영국노동당을 만든 케어 하디는 노회찬처럼 하지 않았다. 더 많이 인내하고 양보했다.

누구에게? 무엇을? 노동조합 간부들의 부족함과 근시안과 보수성을 인내하고, 그들의 별로 맞지 않는 의견과 권력욕에 양보했다. 민주노총의 간부들은 100년 전 영국의 노동조합의 간부들보다 훨씬 훌륭하다.

그런데 그들의 뜻이 권영길 후보에게 있었다. 그건 아마 그들이 정치세력화에 소극적인 민주노총 조합원들에게 돈과 표를 모으자고 호소하는 명분을 “민주노총 초대 위원장을 우리가 책임지자”는 데서 찾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여하튼 나의 권영길 지지는 1992년부터 내가 걸어온 ‘노동당’ 노선에 따른 것이었다.


엄청난 착각. 100년이나 후대에 활동하는 사람과 그 전 시대의 사람을 같은 층위에서 비교하고 있다. 100년 전 영국에는 여성참정권도 없었다. 비정규직도 없었다. 지금의 기준에서 보자면, 지금의 노동조합 구성원들이 그때의 노조 간부들보다 훌륭한 건 당연한 것 아닌가? 100년 전 노조 간부들과 똑같거나 더 낮은 수준이라면, 그건 연대의 대상이 될 수도 없을 것이다.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의 안팎을 시끄럽게 하고 있는 이 논쟁은, 결국 '헐 나 삐져뜸'이라고 외치고 있는 주대환에게 모두가 말려들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논쟁을 하지 않고 무시하는 것은 현 시점에서 더욱 옳지 않은 행동일 수도 있다.

이 논쟁에서 가장 나쁜 것은 주대환이 아무렇지도 않게 사회 속에 만연한 '반 운동권' 정서, 혹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반 정치인' 정서에 기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반인'들의 시선에서 보면 주대환이 운동권이 아닐 리가 없다. 운동권을 아무리 씹어봐야 한 번 운동권은 영원한 운동권일 뿐이다. 운동권과 대중의 정서가 괴리되고 있는 것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 필요하긴 하지만, 이건 아니다.

인터뷰의 대미를 장식하고 있는 문답.

장태수 | 가장 인상 깊었던 영화는? 요즘 본 영화 중에서 권하고 싶은 영화는?

주대환 | 〈미션〉이다. 배경 음악도 좋아서 CD를 구해 차에서 듣고 다니기도 했다. 그리고 요즘 본 영화 중에서는 〈크로싱〉이 좋았다. 많이 울었다.


아, 나도 많이 울고 싶다.

명절 독서

1. 칸트의 "On the Common Saying: This May Be True in Theory, But It Does Not Hold in Practice"(Immanuel Kant, Toward Perpetual Peace and Other Writings on Politics, Peace, and History (Yale University Press, 2006))를 읽었다. 홉스와 멘델스존(음악가 멘델스존의 할아버지인 모세 멘델스존)에 대한 반박이 담긴 2장과 3장만 발췌되어 있었는데, 어제 새벽 12시 30분경 2장까지 다 읽었고, 새벽 3시쯤 잘까 하다가 그냥 3장을 봐버려서 결국 4시에 잠들었다.

제목만 보고 좋아라 했던 책인데, 일부나마 직접 읽어보니 너무 재미있고 짜릿했다. 흥분이 쉽사리 가시지 않아, 제목에 담긴 사상을 표현하는 문단을 일부 인용해본다.

Thus, when one considers the well-being of the people, nothing at all depends on any theory but rather everything depends on a practice derived from experience.
If there is, however, something in reason that is expressed by the word constitutional right, and if the concept of it has a binding force and thus objective (practical) reality for human beings who stand in an an antagonistic relation to one another due to their freedon, without regard for the good or ill that this may produce for them (for knowledge of this rests on experience), then it is grounded in a priori principles (for experience cannot teach us what is right), and there is a theory of constitutional right, to which any practice that is to be held vaild must comform. (59p)


전문을 확인하기 위해 Kant's Political Writings(Cambridge Univ., 1991, 2nd ed.)을 알라딘 장바구니에 넣어 놨다. 일단 연휴가 끝나고 학교에 가면 도서관에서 확인해볼 생각이다. 도서관에서 잠시 확인한 후, 통장 잔고를 확인해가며 구매 버튼을 눌러야겠지.


2. 먼 거리를 오갈 일이 많았기 때문에, 지하철 안에서 《서울은 깊다》(전우용 저, 돌베게, 2008)를 다 읽었다. 저자가 오래도록 쌓아왔던 내용을 제대로 풀어낸 역작이라고 생각한다. 풍부한 도판과 다양한 이야기거리가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짧은 꼭지 20여개가 연달아 나오기 때문에 자칫하면 식상하다는 느낌을 줄 수 있었을 테지만, 편집자가 주제별로 배열을 잘 한 것 같고, 제목도 아주 훌륭하게 뽑았다. 휴일에 보기 적당한 책이었다.

2008-09-14

대한민국을 긍정하라?

원래 이 논쟁에는 낄 생각이 없었지만, 레디앙에 올라온 홍기표 레디앙 기획위원이 쓴 "주대환, 뉴라이트 마당에 폭탄 던지다"(레디앙, 2008년 9월 13일)라는 기사를 보고 마음을 바꿔먹었다. 이상한 주장을 옹호하기 위해 우스꽝스러운 논변이 따라붙는 형국이다. 한 마디 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대한민국을 긍정하라!"라는 주대환의 테제를 놓고, 홍기표는 주대환이 '조봉암의 토지개혁'을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대한 논리적 근거로 끌어오고 있으며, 이것은 대한민국을 긍정하고 싶어하는 이른바 '뉴라이트'들의 뒤통수를 치는 화끈한 반격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홍기표는 "담장 너머로 수류탄을 던졌다"라는 비유를 통해 주대환의 테제에 대한 자신의 해설을 함축하고 있다.

조봉암의 토지개혁이 얼마나 위대했는지를 논하는 것은 이 글의 논지와, 심지어는 그것을 통해 '대한민국을 긍정하라!'라는 테제를 옹호하고자 하는 홍기표의 논지와도 큰 상관이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긍정'이, 구조적으로 대단히 취약할 수밖에 없는 긍정이라는 데 있다. 대한민국을 긍정하는 건 좋다. 하지만 그 긍정을 토대로 홍기표는, 혹은 홍기표가 옹호하는 주대환은 어떤 가치를 추구할 것인가?

잠시 설명을 애둘러 가보자. 늦깎이로 서강대학교 철학과 대학원에 들어간 나는, 인문관 화장실에서 소변을 볼 때마다 눈 앞에 써붙여져 있는 '서강 교육은...' 이라는 형식의 모토를 읽는다. '서강 교육은 사회의 발전을 돕는다', '서강 교육은 학생의 전인적 발전을 도모한다', '서강 교육은 세계를 긍정한다' 뭐 이런 것들이다.

혹자는 이런 모든 문구들을 그저 '총론'으로 치부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상의 문제는 그렇게, 이건 총론이니까 아무 말이나 해도 '옳은 말'이면 큰 상관 없고, 각론에서 내용을 보충하면 되는 그런 게 아니다. 여기서 나는 논지 전개를 위해 '서강 교육은 세계를 긍정한다'라는 표어를 검토할 생각인데, 내 생각에 그것은 가톨릭의 사상적 토대를 명료하게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가톨릭은 세계를 긍정한다. 비록 메시아가 재림하고 나면 아침이슬처럼 사라져버릴 이 세상이지만(기독교적 관점에서 보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긍정하며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염세주의 등에 빠지는 것을 옳지 않다고 평가한다. 왜냐하면 이 세계 자체가 신의 사랑을 존재의 근거로 삼고 있는 하나의 거대한 선물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 속에서, 역시 천부적으로 내려받은 자유의지를 행사하며 서로 행복하게 살아가야 할 의무가 있다.

가톨릭이 세계를 긍정하므로, 예수회의 부설기관인 서강대학교 또한 세계를 긍정하는 교육을 실시하게 되는 것이다. '세계를 긍정한다'라는, 어디다 갖다 붙여도 될 것 같은 이런 '총론'도 결코 그냥 나오는 게 아니다. 가령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세계를 긍정한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들은 현세를 부정하며 내세를 긍정하지만, 가톨릭은 현세와 내세를 모두 긍정한다. 이런 차이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하지만 '세계 긍정'을 사상적 토대로 삼고 있다고 해서, 현실 속에 존재하는 모든 잘못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가치 판단을 위한 기준이 필요하고, 동시에 현실이 지향해야 할 어떤 거대한 이상이 필요해진다. 지옥에 대한 공포보다 중요한 것은 천국에 대한 희망과 상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앞서도 말했듯 가톨릭은 현세와 내세를 모두 긍정한다. 그것은 현실 속에서 힘을 잃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요구되는 논리필연적 요구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다시 주대환으로 돌아와보자. '대한민국을 긍정한다'라는 말은 거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 지금 있는 그대로의 대한민국을 긍정하고 그 이후의 무언가를 또 긍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대한민국의 상위 0.01%에 속하는 사람들에게나 '긍정적'일 수밖에 없는 지배자의 논리에 불과하다. 우리에게 우리가 절대 만족할 수 없는 이 대한민국을 긍정하라는 말을 하고 싶다면, 우리가 더욱 맹렬하게 사랑하고 긍정할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대한민국을 그려내어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주의자의 본질적 책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시대정신'에 기고된 그의 글은 대한민국에 대한 긍정을 넘어서는 또 하나의 거대한 긍정을 그려내기는 커녕, NL과 PD라는 불확실한 실체에 대한 부정으로 가득차 있는 듯하다. 그가 이런 식으로 기존의 운동을 모두 부정하면서 제시하는 대안이라는 것도, '국회의원 많이 배출해서 세금 많이 걷은 다음 복지정책으로 뿌리자' 정도에 불과하다. 물론 그것은 그 자체만으로 아름다운 꿈이다. 하지만 과연 그 꿈이 현실을 뒤흔드는 동력이 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것일까?

주대환의 논의를 옹호하는 홍기표의 논지는, 마치 주대환이 '좌파' 전체를 대변하는 사상가인 양 여기고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오류에 빠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한민국을 긍정합니다'라는 좌파 이론가 한 명이 나왔다고 해서, 좌파들에게 붙은 '체제를 부정하는 자들'이라는 딱지가 절로 떨어져나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일종의 분할 통치를 위한 미끼가 될 뿐이다. '주대환은 대한민국을 긍정한다는데, 너희들은 왜 그러니?'라는 질문만 돌아올 것이 뻔하다는 말이다.

이건 안 그래도 좁은 한국 좌파의 입지를 더욱 좁힐 뿐이다. 주대환이 민주노동당 분당을 논할 때 사용했던 논법을 이 지점에 고스란히 적용해도 큰 무리가 없다. 역사 이래로 이런 '모범생 되기 전략'이 담론의 전쟁터에서 유용하게 사용되었던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실은 머리 속에 입력되어있는 사례가 많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정치적인 판단에 그리 능숙하지 않은 내가 보기에도, 주대환의 '대한민국 긍정합니다' 사건은 정치적 패착 같다.

지금 좌파 진영에 필요한 것은, 작고 다양하면서도 구체적인 상상력들이다. 강북구의회 의원 세비 삭감 같은 작은 승리들이 축적되어야 다음번 지방 선거를 노릴 수 있게 된다. 동시에 대한민국을 전체적으로 어떤 나라로 만들어가야 할지에 대한, 더 크고 더 또렷한 상상력이 요구된다. 대한민국에 대한 평면적인 '긍정'은 지배계급의 무기일 수밖에 없다. 그것을 정녕 좌파의 것으로 만들고 싶다면, 대한민국에 대한 긍정은 결국 '이중 긍정'이 되어야만 한다.

가톨릭과 대조하며 어렵게 설명하였는데, 내가 말하는 '이중 긍정'은 더 좌파적으로 말하자면, "사회민주주의자는 깊고 넓은 개혁을 위해, 개혁이 성공하면 더 큰 개혁으로 나아가고 개혁이 실패하면 최후의 수단을 꺼내기 위해, 급진주의를 늘 배후에 두어야 한다"("더 붉고 더 푸른 사민주의를 향하여", (가칭)좌파집권연구회, 2008년 2월 21일)는 문장과 같은 맥락을 공유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주대환과 그 주변에서 '미국식 양당제도'에 한다리 끼어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급진성이 거세되어 있다. 어제 써먹은 비유이긴 한데, 결국 그 사민주의자들은 '국회에서 의석 두 번째로 많이 먹기 vs. 고자되기'에서 '고자되기'를 택하며 스스로 용자라고 으스대고 인증샷을 찍고 있는 것이다. 북극의 빙산이 다 녹고 있는 이 시국에, 이 논쟁은 너무도 무가치하고 또 우습지만, 결국 한 마디 보태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