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이 논쟁에는 낄 생각이 없었지만, 레디앙에 올라온 홍기표 레디앙 기획위원이 쓴
"주대환, 뉴라이트 마당에 폭탄 던지다"(레디앙, 2008년 9월 13일)라는 기사를 보고 마음을 바꿔먹었다. 이상한 주장을 옹호하기 위해 우스꽝스러운 논변이 따라붙는 형국이다. 한 마디 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대한민국을 긍정하라!"라는 주대환의 테제를 놓고, 홍기표는 주대환이 '조봉암의 토지개혁'을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대한 논리적 근거로 끌어오고 있으며, 이것은 대한민국을 긍정하고 싶어하는 이른바 '뉴라이트'들의 뒤통수를 치는 화끈한 반격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홍기표는 "담장 너머로 수류탄을 던졌다"라는 비유를 통해 주대환의 테제에 대한 자신의 해설을 함축하고 있다.
조봉암의 토지개혁이 얼마나 위대했는지를 논하는 것은 이 글의 논지와, 심지어는 그것을 통해 '대한민국을 긍정하라!'라는 테제를 옹호하고자 하는 홍기표의 논지와도 큰 상관이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긍정'이, 구조적으로 대단히 취약할 수밖에 없는 긍정이라는 데 있다. 대한민국을 긍정하는 건 좋다. 하지만 그 긍정을 토대로 홍기표는, 혹은 홍기표가 옹호하는 주대환은 어떤 가치를 추구할 것인가?
잠시 설명을 애둘러 가보자. 늦깎이로 서강대학교 철학과 대학원에 들어간 나는, 인문관 화장실에서 소변을 볼 때마다 눈 앞에 써붙여져 있는 '서강 교육은...' 이라는 형식의 모토를 읽는다. '서강 교육은 사회의 발전을 돕는다', '서강 교육은 학생의 전인적 발전을 도모한다', '서강 교육은 세계를 긍정한다' 뭐 이런 것들이다.
혹자는 이런 모든 문구들을 그저 '총론'으로 치부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상의 문제는 그렇게, 이건 총론이니까 아무 말이나 해도 '옳은 말'이면 큰 상관 없고, 각론에서 내용을 보충하면 되는 그런 게 아니다. 여기서 나는 논지 전개를 위해 '서강 교육은 세계를 긍정한다'라는 표어를 검토할 생각인데, 내 생각에 그것은 가톨릭의 사상적 토대를 명료하게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가톨릭은 세계를 긍정한다. 비록 메시아가 재림하고 나면 아침이슬처럼 사라져버릴 이 세상이지만(기독교적 관점에서 보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긍정하며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염세주의 등에 빠지는 것을 옳지 않다고 평가한다. 왜냐하면 이 세계 자체가 신의 사랑을 존재의 근거로 삼고 있는 하나의 거대한 선물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 속에서, 역시 천부적으로 내려받은 자유의지를 행사하며 서로 행복하게 살아가야 할 의무가 있다.
가톨릭이 세계를 긍정하므로, 예수회의 부설기관인 서강대학교 또한 세계를 긍정하는 교육을 실시하게 되는 것이다. '세계를 긍정한다'라는, 어디다 갖다 붙여도 될 것 같은 이런 '총론'도 결코 그냥 나오는 게 아니다. 가령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세계를 긍정한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들은 현세를 부정하며 내세를 긍정하지만, 가톨릭은 현세와 내세를 모두 긍정한다. 이런 차이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하지만 '세계 긍정'을 사상적 토대로 삼고 있다고 해서, 현실 속에 존재하는 모든 잘못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가치 판단을 위한 기준이 필요하고, 동시에 현실이 지향해야 할 어떤 거대한 이상이 필요해진다. 지옥에 대한 공포보다 중요한 것은 천국에 대한 희망과 상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앞서도 말했듯 가톨릭은 현세와 내세를 모두 긍정한다. 그것은 현실 속에서 힘을 잃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요구되는 논리필연적 요구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다시 주대환으로 돌아와보자. '대한민국을 긍정한다'라는 말은 거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 지금 있는 그대로의 대한민국을 긍정하고 그 이후의 무언가를 또 긍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대한민국의 상위 0.01%에 속하는 사람들에게나 '긍정적'일 수밖에 없는 지배자의 논리에 불과하다. 우리에게 우리가 절대 만족할 수 없는 이 대한민국을 긍정하라는 말을 하고 싶다면, 우리가 더욱 맹렬하게 사랑하고 긍정할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대한민국을 그려내어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주의자의 본질적 책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시대정신'에 기고된 그의 글은 대한민국에 대한 긍정을 넘어서는 또 하나의 거대한 긍정을 그려내기는 커녕, NL과 PD라는 불확실한 실체에 대한 부정으로 가득차 있는 듯하다. 그가 이런 식으로 기존의 운동을 모두 부정하면서 제시하는 대안이라는 것도, '국회의원 많이 배출해서 세금 많이 걷은 다음 복지정책으로 뿌리자' 정도에 불과하다. 물론 그것은 그 자체만으로 아름다운 꿈이다. 하지만 과연 그 꿈이 현실을 뒤흔드는 동력이 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것일까?
주대환의 논의를 옹호하는 홍기표의 논지는, 마치 주대환이 '좌파' 전체를 대변하는 사상가인 양 여기고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오류에 빠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한민국을 긍정합니다'라는 좌파 이론가 한 명이 나왔다고 해서, 좌파들에게 붙은 '체제를 부정하는 자들'이라는 딱지가 절로 떨어져나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일종의 분할 통치를 위한 미끼가 될 뿐이다. '주대환은 대한민국을 긍정한다는데, 너희들은 왜 그러니?'라는 질문만 돌아올 것이 뻔하다는 말이다.
이건 안 그래도 좁은 한국 좌파의 입지를 더욱 좁힐 뿐이다. 주대환이 민주노동당 분당을 논할 때 사용했던 논법을 이 지점에 고스란히 적용해도 큰 무리가 없다. 역사 이래로 이런 '모범생 되기 전략'이 담론의 전쟁터에서 유용하게 사용되었던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실은 머리 속에 입력되어있는 사례가 많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정치적인 판단에 그리 능숙하지 않은 내가 보기에도, 주대환의 '대한민국 긍정합니다' 사건은 정치적 패착 같다.
지금 좌파 진영에 필요한 것은, 작고 다양하면서도 구체적인 상상력들이다. 강북구의회 의원 세비 삭감 같은 작은 승리들이 축적되어야 다음번 지방 선거를 노릴 수 있게 된다. 동시에 대한민국을 전체적으로 어떤 나라로 만들어가야 할지에 대한, 더 크고 더 또렷한 상상력이 요구된다. 대한민국에 대한 평면적인 '긍정'은 지배계급의 무기일 수밖에 없다. 그것을 정녕 좌파의 것으로 만들고 싶다면, 대한민국에 대한 긍정은 결국 '이중 긍정'이 되어야만 한다.
가톨릭과 대조하며 어렵게 설명하였는데, 내가 말하는 '이중 긍정'은 더 좌파적으로 말하자면, "사회민주주의자는 깊고 넓은 개혁을 위해, 개혁이 성공하면 더 큰 개혁으로 나아가고 개혁이 실패하면 최후의 수단을 꺼내기 위해, 급진주의를 늘 배후에 두어야 한다"(
"더 붉고 더 푸른 사민주의를 향하여", (가칭)좌파집권연구회, 2008년 2월 21일)는 문장과 같은 맥락을 공유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주대환과 그 주변에서 '미국식 양당제도'에 한다리 끼어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급진성이 거세되어 있다. 어제 써먹은 비유이긴 한데, 결국 그 사민주의자들은 '국회에서 의석 두 번째로 많이 먹기 vs. 고자되기'에서 '고자되기'를 택하며 스스로 용자라고 으스대고 인증샷을 찍고 있는 것이다. 북극의 빙산이 다 녹고 있는 이 시국에, 이 논쟁은 너무도 무가치하고 또 우습지만, 결국 한 마디 보태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