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1-05

10월의 여행

경제 위기가 닥쳐오고, 마감이 덤벼들고, 개인적으로 맡은 일도 처리하다보니 10월에 다녀온 여행 사진을 11월에 올리는 만행을 저지르게 되었다. 나는 동행인과 함께 10월 3일 개천절에는 10번째 쌈지사운드페스티벌에 다녀왔고, 이후 10월 4일과 5일에 걸쳐 부산에 내려가 영화는 한 편도 안 보고 국제시장과 깡통시장을 쏘다니며 이것 저것 쇼핑을 하고 돌아왔다.

긴 글을 쓰긴 좀 피곤해서, 사진과 간단한 설명만 덧붙인다.




김창완 밴드. '기타로 오토바이를 타자'부터 세 곡을 내달렸다. 쌈싸페의 키치 분위기가 김창완 밴드에 압도당하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그 전까지는 '슈퍼키드'라는 명랑한 친구들이 나와서, 치킨집 앞에 놓는 흐느적거리는 풍선 인형을 틀어놓고 김덕수 사물놀이패와 함께 얼쑤절쑤 덩실덩실 신나게 랩을 하는 분위기였는데, 김창완 밴드가 락으로 정리했다.




유앤미블루의 이승열. 한국의 보노라는 별명이 아깝지 않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노래를 들어본 적이 없어서 백 퍼센트 즐기지는 못했다.

사실 이번 쌈싸페의 최고 이벤트는 심수봉의 등장이었는데, 그 광경을 사진으로 못 찍은게 아쉽다. 목소리의 힘은 많이 죽었지만 타고난 분위기만큼은 정말 매혹적이었다.




10월 부산여행의 목적지가 바로 여기였다. 국제시장. 토요일 밤에 지리를 파악하고 일요일에 쏘다녔는데, 걸으면 걸을수록 '암굴'이라는 생각이 드는 그런 곳. 낮에 찍어서 그런지 그 느낌까지 살아있지는 않다.




부산에서는 포장마차에서 오뎅과 곤약을 같이 팔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굳이 시식해보고 있는 대중문화비평계의 큰 별 노정태 선생.




해 떨어진 자갈치 시장에서, 회가 나오기 전까지.





부산 국제시장의 '개미집'에서 먹은 낚지볶음.





개미집 간판. 낙지가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개미집 간판을 자세히 보면 글씨 안에 정말 개미가 들어있다. 둘 다 은근히 귀엽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말처럼 달리고 싶은 사람은 클릭해서 크게 보시길.




친구가 구입한, 노먼 록웰의 일러스트가 그려져 있는 우산을 쓰고 찍은 사진. 노먼 록웰의 일러스트를 나는 사실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몽롱하고 포근하지만, 나와는 너무 이질적인 문화적 코드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그의 일러스트를 보고 있노라면, 내 것이 아닌 그리움에 휩싸이게 되고, 그로 인해 굳이 느낄 필요가 없는 소외감에 젖어드는 자신을 발견하곤 하기 때문이다. 이건 어렸을 때, 양과자 깡통에 그려진, 풍성한 핑크색 치마를 입고 양산을 쓴 아가씨의 파스텔 그림을 볼 때의 기분과도 비슷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일러스트가 우산에 그려져 있으니, 감정적인 동요를 미적인 즐거움이 압도했다. 어쩌면 예전 그때와 감성의 구조가 조금 달라진 것일 수도 있겠다.




깡통시장을 쏘다니다가 먹은 '할매 유부오뎅'. 당면이 들어있는 유부를 삶아서 오뎅과 함께 내준다. 다소 느끼하긴 하지만, 북적거리는 시장을 누비고 다니다가 HP를 충전할 때에는 이런 걸 먹어줘야 하지 싶다.




국제시장에 있는 가야밀면에서 저녁. 작년에 다른 곳에서 먹어본 밀면은 실망스러웠는데, 여기는 마음에 들었다. 밀면 맛이라는 게 특별한 건 아니지만, 맛있는 것과 맛없는 건 확실히 다르다.




여행의 소득. 골동품 상인에게서 덥썩 산 손목시계. 메이커도 없고, 방수 기능도 없고, 바늘 세 개와 유리판만 있는데, 은근히 그럴싸해보여서 샀다. 지금도 내 손목에 차고 있음.

마감을 끝내고, 맡은 일들을 잘 처리하고, 언젠가 또 여행을 가게 될 날이 오기를 기대하고 있다. 요즘 이래저래 사는 게 팍팍하다. 고작 한 달 전인데, 이 사진들을 보고 있자니 터무니없을 정도로 멀게만 느껴진다. 그래도 다시 봐도 흡족하다.

2008-11-03

토론다운 토론

지난 포스트에서 내가 다소 생뚱맞게도 '금리인하 논쟁'의 필요성을 주장한 것은, 그것이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첫째, 지금 금리를 인하하는 것은 환율 및 기타 경제지표보다 내년도 성장률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동시에 그것은 '이명박의 경제정책'을 좀 더 세부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준다. 의사가 제대로 전달된 것 같지 않으므로, 그 각각을 설명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기준금리 인하로 인한 경기부양효과는 즉각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한은 이성태 총재는 '내년도 성장률을 유지하기 위해' 기준금리를 인하한다는 점을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미국 연준이 금리를 1%까지 내리고, 일본이 0.5%를 0.3%로 낮춘 것도 전부 2008년도 4/4분기가 아니라 2009년도를 우려하기 때문이다.

만약 여기서 기준금리 인상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한국은행이 원화의 기준금리를 인상한다면 그 신호를 다른 나라에서는 어떻게 이해할까. 내년도에 어떤 혹독한 경기 후퇴를 겪건, 지금 당장 꺼야만 하는 큰 불이 있다, 이런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상식적인 판단 아닐까.

가령 유럽의 '금융 허브'로 잠깐 떴다가 가장 큰 서리를 맞은 아이슬란드는, 최근 기준금리를 12%에서 18%로 대폭 인상했다. 한국 경제에 대해 아무리 비관하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2008년 11월 3일 현재의 대한민국과 아이슬란드를 같은 사례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내년도 경기 후퇴에 대비한 정책을 펼쳐야 한다.

문제는 그것이 '어떤 경기'에 대한 것인가, 즉 새로운 성장동력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로 집중된다. 비정규직 비율을 줄이고 고용을 안정화하며 사회복지를 확충하는 것은, 모두 국내 소비 진작에 도움이 된다. 미국의 소비심리가 대후퇴하고 있는 지금, 아무리 '환율주권'을 사수한다 한들 수출 주도형 경제로는 안정성 확보에 분명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내가 지난 글에서 우석훈 박사의 '환율주권' 언급을 비판적으로 다루었던 이유도 그것 때문이다. 현행 경제구조를 유지하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는 한 환율주권론은 의미가 없다. 그런데 우석훈이 특히 《촌놈들의 제국주의》에서 주장한 '전쟁산업'에서 '평화산업'으로의 이행은, 지금과 같은 중공업 중심의 수출경제 구조에 대한 근본적 비판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환율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금리인하에 반대한다는 말은 그의 전체적인 논지에 비추어볼 때, 성립이 불가능하지야 않지만 상당히 어색하다.)

금리인하 논쟁이 중요해지는 이유가 여기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현재 한국 경제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중공업 시대, 건설업 시대를 이어 어떤 곳에서 성장동력을 얻을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가 전부 사장된 채, 이렇게 해도 한국 경제 망한다 저렇게 해도 한국 경제 망한다, 이런 목소리만 드높았던 것이 최근 두어 주일간 벌어진 담론적 소극 아닌가. 금리를 인상해야 한다면, 그로 인해 유발될 더 극심한 디플레이션 속에서 어떻게 한국 경제를 재구성할 수 있을지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있다.

지금은 그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담론이 흘러가고 있다. 한국은행의 결정 이후 환율과 주가가 안정세를 찾자, 한나라당과 청와대는 '미네르바를 잡아라' 따위 마녀사냥질을 시작하고 있지 않은가. 환율이 높아지고 주가가 낮아진다는 이유만으로 이명박 정권 하에서 벌어지는 모든 경제 정책을 싸잡아서 비판하다가, 결국 논의다운 논의도 해보지 못한 채 촛불시위때와 같은 패턴으로 닭몰이를 당하고 있다. 이건 저들이 똑똑해서가 아니라 이쪽이 저들보다 멍청해서 벌어지는 일이다.

'주가 올라가면 미네 버로우? ㅋㅋㅋ' 같은 소리 하던 아고라의 삐딱한 인간들이, 지난주 월요일부터 반짝 기승을 부린 것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이명박 욕하기 판소리 대회에 나온 게 아니지 않나. 잘못되고 있는 모든 일 때문에 이명박을 비판하기 시작하면, 그 모든 잘못된 일들 중 하나만 제대로 되어도 이명박을 비판하기 어려워진다. 사람들이 왜 이리 답답한지 모르겠다.

이 상황에서 경제를 살리기 위한 성장동력을 제시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논의다운 논의가 될 것이다. 그 이야기는 조만간 좀 더 자세하게 하고자 한다. 아무튼 요즘, 참 답답하다. 이명박 당선이 '국민이 개새끼'라서 그런 걸까? 그 이명박을 막아낼만한 '지성계'라는게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 토론다운 토론이 절실한 시점이다.

2008-10-30

금리인하 논쟁이 필요하다

나는 기본적으로 이명박 정부가 내놓은 '종합대책' 중, 부동산 버블을 지속하기 위한 목적이 너무도 뚜렷하게 보이는 것들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가령 양도세 완화라거나, 종부세 완화, 다주택소유자에 대한 중과세 완화, 투기지역 해제, 분양가 상한제 폐지, 기타등등. 이 모든 것들은 안그래도 포화상태인 현재의 건설경기에 기름을 끼얹는 것인데, 이미 버블이 꺼지는 조짐이 너무도 뚜렷하게 보이는 상황이라 시장은 결코 반응하고 있지 않다.

문제는 한국은행이 단행한 기준금리 인하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들이다. 최근 2~3일간 도드라진 그러한 견해들은, 내가 보기에는, 중앙은행과 행정부의 역할을 분리해서 사고하지 않는 결과 발생하는 오류처럼 보인다. 이성태 한국은행장이 기자회견을 통해 밝힌 바와 같이, 한국은행은 현재 요동하는 환율이 국내 시장보다 외재적 변수에 의해 움직인다고 판단하고 있고, 한국은행의 금리 인하 또한 환율에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지난 8월 금리를 올렸는데도 환율이 폭등한 사례를 놓고 볼 때, 금리와 환율의 상관관계가 발생하기에는 지금 국제적인 사건이 너무도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으며, 따라서 그것은 단기간의 외환/통화정책으로 이해될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앞서 말한 인터뷰에서 계속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기준금리를 인하하는 가장 큰 이유는 내년도 경제성장률이 침체 국면에 접어드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이것은 중앙은행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업무 내용 중 하나일 것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여기서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한국은행과 정부가 건설경기 부양 OK? OK! 사인을 주고 받은 후 기준금리를 내리고 온갖 감세안과 규제완화책을 내놓고 있다고 생각하는 데 있다. 물론 '경기를 부양해야 한다'는 대의에 동참하도록 강만수가 이성태를 설득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한국은행은 정부가 '어떤 경기를 되살릴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다. 정상적인 정부라면 이 침체 국면에서, 최대한 국민들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아나서야 마땅하다. 하지만 이명박과 강만수는 파던 삽질 마저 파는 것 말고 아무 생각도 하고 있지 않다. 이것마저 한국은행이 책임져야 할 일처럼 논의가 흘러가는 것이 나는 매우 의아하다.

우석훈 박사가 프레시안에 기고한 글을 보더라도, 많은 이들이 시중금리와 기준금리가 따로 노는 것을 지적하며 기준금리 인하 정책이 무의미하다고 주장한다. 앞서 나는, 어차피 현재 상황에서 환율은 외재적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고 전제하고 있으므로, 기준금리를 인상하면 환율이 내려갈 것이라고, 따라서 '주권'인 환율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납득하기 어렵다.

(여담이지만 '환율주권론'은 원래 강만수의 트레이드 마크 아니었나. 우석훈 박사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는 것을 보게 되다니, 그 분의 책을 거의 다 읽은 나도 뭘 잘못 알고 있었나보다.)

중앙은행이 장래의 경기 부양을 위해 기준금리를 인하하면, 정부는 그에 맞춰 낙후된 산업을 정리하고 새로운 성장 동력을 일으켜야 한다. 국내 경제만 놓고 보자면 이것이 정답이다. 문제는 한 쪽에서는 제대로 정답을 말하고 있는데, 다른 한 쪽과 손발이 안 맞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금리인하는 건설경기 부양책'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이 둘을 전혀 구분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말하자면 금리인하는 □□경기 부양책이다. 저 안을 무엇으로 채워넣을지는 정부의 몫이지, 중앙은행의 결정사항이 아니다. 여기까지 내가 말한 바에 동의할 수 있다면, 금리인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 내가 느끼는 의아함에 대해서도 충분히 공감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본다.

나는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이, 국가의 운영 방식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 그리고 그 외 독립기관들은 각자 자신들이 추구하는 '올바른 국가상'을 향해 나아가게 되어있고, 그 과정에서 서로를 견제하며 권력의 남용을 막는다. 한국은행이 생각하는 '올바른 나라'는 '내년에 경기침체를 덜 겪는 나라'다. 그런데 이명박과 강만수가 생각하는 '올바른 나라'는 '아파트 가격이 계속 올라가는 나라'다. 이 두 가지를 싸잡아서 이야기할 수는 없다.

이 시점에서 뇌사상태에 빠진 한국 지성계에 '기준금리 논쟁'이 붙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준금리를 인하하는 것이 환율에 도움이 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은 거의 이구동성으로 한국은행과 정부의 대책 전부에 대해 반발의 목소리가 커지는 시점인데, 여기서 두 가지 경제 주체를 나눠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자칫하면 '실컷 이명박 욕만 하다가 어영부영 위기가 해소되었는데, 정작 제 역할을 한 중앙은행은 조용히 묻히고 강만수만 연임하고 이명박은 으스대는 상황'을 연출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기준금리 논쟁'이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현재 국내외에서 한국 경제에 대해 코멘트하고 있는 수많은 경제학자들이 한국의 경제 상황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 명확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경제 문제마저 '이명박 대 반 이명박'으로 단순하게 나누어지는 담론적 구성을 타개하고, 그 과정에서 한국 경제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건설적인 논의도 비로소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하 방침에 찬성한다.

2008-10-27

일관성의 함정

내일, 정확히 말하자면 오늘 금융통화위원회가 은행채 매입을 골자로 하는 종합대책을 발표할 예정이다. 나는 지금까지도, 기준금리 인하가 대출금리 인하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전제 하에 금리 인하에 찬성한다. 예전에 우리모두에서 활동하던, 다음 아고라의 SDE 같은 경우 금리 인하는 M2의 통제 포기이므로, 결국 원화는 더욱 폭락하고 그에 따라 하이퍼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가능성을 경고하고 있다.

하지만 기준금리 인하와 은행에 대한 정부의 직접 자본 투여 등, 이미 전 세계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대책의 손을 들어주는 이도 없지 않다. 은행에 유동성이 말라붙은 것을 위기의 본질로 파악하는 이들은, 이번 한국은행의 은행채 매입을 긍정적으로 판단하고 있다. 이 주제에 대해 더 논하는 것은 내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다. 지난번 포스트에서와는 달리, 나는 오늘밤에는 판단을 유보한다.

하지만 정부가 내놓고 있는 '감세와 재정확대 동시 추진'은 누가 봐도 미친짓이다. 감세를 하면서 재정확대를 하겠다는 건 국채를 더 찍겠다는 말과 똑같다. 하지만 한국 국채를 대체 누가 산단 말인가? 안 팔리는 국채는 금리가 높아질 수밖에 없고, 그것은 결국 시중금리의 폭등에 기름을 끼얹는 일밖에 되지 않는다.

국가는 국민으로부터 세금을 걷을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양도세를 더 낮추면, 버블이 꺼질 기미가 보이는 지역에서 이탈하기 위한 매물이 더 나온다. 가격은 더 떨어진다. 게다가 그렇게 아파트가 팔릴 때마다 정부에 들어오는 '실탄'의 양도 줄어든다. 앞서 말했지만 나는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하에 대해, 이제는 더 뭐라고 말을 하지 않겠다. 하지만 이 말만은 확실히 할 수 있다. '감세'만을 외치는 이명박의 경제팀은 다 제정신이 아니다.

미국 은행들이 부도 위험에 직면했을 때는 밤에 잠이 안 오거나 하지 않았다. 내게 파장이 미친다면 여기서 터지나 저기서 터지나 마찬가지겠지만, 적어도 그쪽에서는 최소한의 시스템이 작동하리라는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그게 없다. 이명박이라는 비-정치인이 집권하고 있는 대한민국은 정책적 유연성을 완전히 상실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글로벌 스탠다드'에 입각해볼 때, 시장 근본주의는 분명히 퇴조하고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만은 예외다. 나는 이게 정말이지 두렵다.

(모든 '근본주의'는 몇 가지의 테제만을 주워섬길 뿐 그것이 이념화하고 있는 대상 자체에 대한 충실한 추구를 결코 뜻하지 않는다. 시장 근본주의자는 그러므로 시장을 마비시킨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이슬람의 정신을 결국 배신한다. 기독교 근본주의자들 또한 마찬가지다.)

말하자면 대한민국은 경제적으로는 '유동성의 함정'에, 정치적으로는 '일관성의 함정'에 빠져있다. 이명박은 자신이 '경제 꼭 살리겠습니다'라는 표어를 내걸고, 건설경기 진작시키고 주가지수 띄우고 원-달러 환율 낮추겠다고 약속한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모든 것을 불구덩이로 밀어넣고 있다. 그 말대로 안 되는 것을 보고 일부 네티즌, 혹은 노빠들이 '노무현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라고 시시덕거리고 있는데, '이명박:노무현=불황:호황'같은 공식을 만들어서 유포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정치가 걸려버린 '일관성의 함정'을 극복하는데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만약 이명박이 지금이라도 종부세와 양도세율, 그리고 소득세 누진률을 파격적으로 높이고, 정부 지원을 받은 은행들에게 부실건설사 구조조정을 명령하고, 근로소득자에 대한 환급 외의 다른 방법을 동원하여, 가능한 한 직접적으로 저소득층에게 경제적 지원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나는,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그동안의 모든 원한을 잊고, 또 이명박과 그 주변 인물들에 대한 엄청난 혐오감을 억누르며, 이명박의 그 종합대책을 지지하고 그것을 '대통령에 대한 지지'로 전환할 용의가 충분히 있다.

이명박 대 반 이명박이라는 구도를 놓고 본다면, 어차피 이명박 입장에서는 임기 5년이 확보되어 있기도 하거니와 국회의원 선거도 없고, 또 지지율이 더 떨어질 리도 없으므로 자신의 '일관성'을 지키는 편이 더 나은 선택이다. '일관성의 함정'은 바로 이렇게 작동하고 있다. 만약 한국의 정치가 정상화되기를 바란다면, 이명박에게 일관성의 철회를 요구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이쪽에서도 일관성을 어느 정도는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이명박<->반 이명박(결국 노무현 ㅋㅋㅋ)' 같은 구도를 유포하고 있는 노빠들이 갖는 또 하나의 '일관성의 함정'으로부터도 벗어날 수 없다.

'이명박이나 노무현이나 그게 그거'라는 말만 반복하고 있거나, '무슨 일이 있어도 이명박은 용납이 안 된다'라는 소박한 정치의식을 고수하고 있거나, 결국 이명박에게 현재 추진하고 있는 경제 정책을 포기할만한 유인동기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매한가지다. 내가 어제, 즉 토요일 청계광장에 나갔던 것은 단지 이명박에 대한 반감을 표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는 이명박을 정치적으로 압박하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었기에 촛불집회에, 기회가 되는대로 계속 나간다.

그런데 지금은, 다들 쉬쉬하고 있다는 것을 다들 알고 있을 정도로 심각한 경제적 난국이다. 이런 상황에서마저 행정부가 올바른 판단을 하건 그른 판단을 하건 절대 지지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것은 이명박에게 그 어떤 유인동기도 제공하지 못한다(비록 나는 앞서 이명박을 '비-정치인'이라 칭했지만, 그것은 발생론적으로 그렇다는 거고, 지금은 조금이나마 '정치인'이 되어있기를 기대하는 마음에서 하는 말이다).

이게 무슨 '본격 이명박 사랑하자는 글'도 아니고, 노빠가 싫다고 명빠가 되는 그런 내용을 담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현재 벌어지고 있는 경제적 위기 속에서, 그것을 부채질하고 있는 '정치 마비 현상'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대중들 또한 정치적 선택의 정상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진보정당을 지지하는 것은 현 시점에서 정치적 선택을 넘어 윤리적 당위로까지 보일 수 있지만, 오직 그 윤리적 당위만을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국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없거니와 진보정당도 정당으로서의 긴장감을 유지할 수 없다.

계급투표는 철저히 계산적이고, 반 정서적이다. 그러므로 '반 이명박 정서'에 기대어 계급투표를 이끌어내겠다는 발상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국민들이 정치적 계산을 통해 투표한다는 신뢰가 없다면, 정치가 올바로 기능하기를 기대할 수 없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명박을 싫어하는 거라면 나도 남들 부럽지 않지만, 이명박을 싫어하는 것만으로 내 정치성의 모든 것이 드러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렇게 놓고 볼 때 '부정성의 정치'란 존재하지 않는다. 문제는 지금 이 시점에서 어떤 '긍정'을 해낼 수 있는가이며, 그 어떤 정당과 정치인도 그것을 제대로 해내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일관성의 함정'에 빠진 한국 정치를 묶는 키워드는 결국 '이명박'과 '노무현'으로 귀착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신자유주의 때문이다'라고 바이트 낭비를 하고 있는 노무현은, 결국 부정성의 정치를 회귀하게 하며 이명박 정부를 더욱 '일관성의 함정'으로 몰아넣고 있는 중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상적인 정치적 선택의 과정을 되살려내야 한다. 지금은 모든 국가의 경제가 '글로벌 스탠다드'로 움직이는 그런 격동기이므로, 만약 지금 이 신용경색과 실물경제 압박을 제대로 이겨낼 수 있다면 그것은 이명박 정부의 '실력'에 대한 인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노무현 때에는 주가가 많이 올랐고 부동산 가격도 폭등했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건설사 부실로 인한 신용경색은 이미 참여정부 당시부터 씨앗이 뿌려진 것이다. 규제지역 한 두개 더 만들었다고 둘러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명박은 노무현과 말로는 대립각을 세우면서 바로 그 경제정책을 계속 이어가겠다는 '사인'을 보냈고, 서울에 거주하는 유권자들이 그 '사인'을 이해하고 몰표를 준 것이 바로 이명박 당선의 이유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명박은 주가지수, 부동산 가격, 환율 등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그 '숫자'에만 목을 매달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한국 경제가 가지고 있던 본질적인 결함이 드러나고 있는 시점이며, 여기서 그 숫자들만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만약 이명박이 지금의 경제 위기를 올바로 극복할 수 있다면, 그는 거듭난 것이다.

그 '거듭난 이명박'을 받아들여줄 용기가 우리에게 없다면, 다시 말해 '일관성의 함정'에서 벗어난 이명박에게, 국민들 또한 '일관성의 함정'에서 벗어나 정당한 평가를 해줄 용기가 없다면, 대한민국이 처한 정치적 불능 상태는 해결될 수 없다. 또한 계급정치의 도래를 기대할 수도 없다. 부정성의 정치는 '일관성의 함정'을 자양분으로 삼고 있으며, 동시에 '비판적 지지'라는 이름으로 계급투표의 목을 오래도록 졸라온 바로 그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기독교 신자이며, 이 위기의 시대를 맞아 두손 꼭 잡고 기도를 한다고 쳐보자. ". . .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이 구절의 의미를 곱씹게 되는 새벽이 아닐 수 없다. '일용할 양식'을 만들어내는 그 시스템에 위기가 닥쳐오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혹은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우리를 때리고 물대포도 뿌린 그 새끼마저도 용서하겠다는 각오가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 대통령님께 힘을 실어 드리자는 말이 아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경제를 올바로 살려낸다면, 청와대의 그 인간도 '대통령'으로 인정할 각오를 하자는 말이다. '이명박 즐, (노무현 짱)'을 퍼뜨리고 다니는 자들의 농간에 놀아날만큼 그렇게 한가하지 않다. 그런 종류의 '일관성의 함정'이야말로, 이름만 꺼내도 지긋지긋한 '비판적 지지론'이 기대고 있던 '부정성의 정치'의 본질을 이루는 것이다.

물론 나는 이명박 정부가 그 일을 해낼 수 없으리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솔직히 기대도 안한다. 하지만 나 자신의 태도만큼은, 약간의 일관성을 포기하고서라도 정치적 선을 위해 변경할 준비가 되어 있다. 자려고 누웠다가 잠이 안 와서, 하이데거가 쓴 「칸트의 존재 테제」를 읽다가 이 글을 썼다. 잠들기 전에 기도를 한 번 더 해야겠다.

2008-10-16

천막이었던 것들

내가 충남슈퍼 정류장에 내린 시각은 오후 8시 30분. 저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내가 도착하면 그 시간에 맞춰서 문화제가 끝나는 징크스가 있다. '이쯤 서 있으면 되겠지' 했는데 다들 '비정규직 투쟁가'를 부르기 시작해 적잖이 당황했다. 사람들이 적지 않았지만, 적어도 100여명은 되는 것 같았지만, 곧 절반 이상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게 문화제 중심으로 운영되는 집회라서 그런가, 정말 익숙한 풍경이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어떤 아저씨가 쓱 하고 나타나 '다들 밥 먹으러 갔어'라고 말해줬다. 아홉시 반 넘게까지 거기 있었는데, '밥 먹으러 갔다'는 사람들이 돌아오는 것을 보지는 못했다. 그래도 남아있는 사람들의 수가 적지 않았다. 50명이 좀 안 되는 숫자였다고 기억한다.

행사가 끝나자 사람들은 '천막이었던 것'에서 '천막이 될 수 있을만한 것'들을 추려내기 시작했다. 남자들 나와서 도와달라고 하길래 아무 생각 없이 갔다. 그 큰 천막이 그렇게 쳐지는 것이라는 걸 이번에 보고 처음 알았다.

철골과 지붕 역할을 하는 비닐을 펴 세우고, 바닥에 까는 나무, 플라스틱 구조물을 들고 왔다. 실제로 손을 더럽혀가며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어차피 건질 만한 것들도 별로 없었기 때문에 시간이 그리 많이 걸리지는 않았다.


'천막이었던 것들', 기륭전자 앞. 2008년 10월 15일.


몇 번 왔다갔다 하면서 책상이나 의자, 화이트보드 등을 건져내고 있었다. 대학생들로 보이는 서너 명이 그 속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어 자기들끼리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며 작업에 속도를 붙였다. '이런 말 하기 뭐 하지만, 또 침탈당하면 말짱 꽝이니까 너무 더러운 것까지 일일이 꺼내지는 마.' 맞는 말이지만 듣는 나도 서글펐다.

칼라TV의 이명선씨를 만났다. 고생하고 울고 그래서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내가 잘못한 건 없으니 미안해할 것도 없어야 하겠지만, 사람 마음이 그렇게 되지가 않았다. 25일까지 구사대와 용역들이 계속 덮칠 예정이라고 한다. 이 글을 쓰는 새벽 3시 현재,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길이 없어서 답답하다.

중요한 건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나서는 것보다, 조직적으로 자리를 지키고 물리적으로 맞설 수 있는, 말하자면 '노조 아저씨들'이 개입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일이 그렇게 되지 않고 있다. 말로만 비정규직 투쟁에 앞장서는, 등의 비난을 받아도 할 말이 없다.

왜 민주노총 산하 그 수많은 지부 중 어디도, 조직 차원에서 나서서 도와주지 않는 걸까. 연대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비참하면 비참할수록 그 연대의 가치는 도드라진다. 이 역설이 지금 기륭전자에서 극대화되고 있다. 정규직 노동조합의 조직적 개입이 절실한 시점이다.



촛불자동차연합 회원들이 면허 취소를 당하는 이 팍팍한 시국에도, 어떤 용자분이 나서서 삭막한 현장에 작은 웃음을 던져주었다. 촛불인지 횃불인지 애매한 전등을 달고 나타난 한 대의 승용차가, 퇴근하는 기륭전자 관계자들의 차가운 눈초리를 맞으며 다시 건설된 천막을 향했다. 다시 건설된 천막 아래 사람들이 앉기 시작했고, 나는 손을 비벼 먼지를 떨어낸 다음 충남슈퍼 앞에서 마을버스를 탔다.

기륭전자에 직접 방문하는 것이 최선이고, 또 밤을 함께 새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그게 어렵다면 잠깐이라도 들러서 더 많은 분들이 현장의 분위기를 체감해주셨으면 좋겠다. 좋은 글을 많이 퍼날라주시는 것도 바람직하고, 기륭 투쟁단과 칼라TV 등에 후원금을 많이 내 주셨으면 한다. 마음으로만 함께한다고 하지 말고, 통장으로도 함께합시다.

기륭전자 투쟁 후원금 계좌: 국민 362702-04-067271 (김소연)
칼라TV 후원금 계좌: 제일 403-20-446270 (박성훈칼라T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