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정확히 말하자면 오늘 금융통화위원회가 은행채 매입을 골자로 하는 종합대책을 발표할 예정이다. 나는 지금까지도, 기준금리 인하가 대출금리 인하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전제 하에 금리 인하에 찬성한다. 예전에 우리모두에서 활동하던, 다음 아고라의 SDE 같은 경우 금리 인하는 M2의 통제 포기이므로, 결국 원화는 더욱 폭락하고 그에 따라 하이퍼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가능성을 경고하고 있다.
하지만 기준금리 인하와 은행에 대한 정부의 직접 자본 투여 등, 이미 전 세계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대책의 손을 들어주는 이도 없지 않다. 은행에 유동성이 말라붙은 것을 위기의 본질로 파악하는 이들은, 이번 한국은행의 은행채 매입을 긍정적으로 판단하고 있다. 이 주제에 대해 더 논하는 것은 내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다. 지난번 포스트에서와는 달리, 나는 오늘밤에는 판단을 유보한다.
하지만 정부가 내놓고 있는 '감세와 재정확대 동시 추진'은 누가 봐도 미친짓이다. 감세를 하면서 재정확대를 하겠다는 건 국채를 더 찍겠다는 말과 똑같다. 하지만 한국 국채를 대체 누가 산단 말인가? 안 팔리는 국채는 금리가 높아질 수밖에 없고, 그것은 결국 시중금리의 폭등에 기름을 끼얹는 일밖에 되지 않는다.
국가는 국민으로부터 세금을 걷을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양도세를 더 낮추면, 버블이 꺼질 기미가 보이는 지역에서 이탈하기 위한 매물이 더 나온다. 가격은 더 떨어진다. 게다가 그렇게 아파트가 팔릴 때마다 정부에 들어오는 '실탄'의 양도 줄어든다. 앞서 말했지만 나는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하에 대해, 이제는 더 뭐라고 말을 하지 않겠다. 하지만 이 말만은 확실히 할 수 있다. '감세'만을 외치는 이명박의 경제팀은 다 제정신이 아니다.
미국 은행들이 부도 위험에 직면했을 때는 밤에 잠이 안 오거나 하지 않았다. 내게 파장이 미친다면 여기서 터지나 저기서 터지나 마찬가지겠지만, 적어도 그쪽에서는 최소한의 시스템이 작동하리라는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그게 없다. 이명박이라는 비-정치인이 집권하고 있는 대한민국은 정책적 유연성을 완전히 상실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글로벌 스탠다드'에 입각해볼 때, 시장 근본주의는 분명히 퇴조하고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만은 예외다. 나는 이게 정말이지 두렵다.
(모든 '근본주의'는 몇 가지의 테제만을 주워섬길 뿐 그것이 이념화하고 있는 대상 자체에 대한 충실한 추구를 결코 뜻하지 않는다. 시장 근본주의자는 그러므로 시장을 마비시킨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이슬람의 정신을 결국 배신한다. 기독교 근본주의자들 또한 마찬가지다.)
말하자면 대한민국은 경제적으로는 '유동성의 함정'에, 정치적으로는 '일관성의 함정'에 빠져있다. 이명박은 자신이 '경제 꼭 살리겠습니다'라는 표어를 내걸고, 건설경기 진작시키고 주가지수 띄우고 원-달러 환율 낮추겠다고 약속한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모든 것을 불구덩이로 밀어넣고 있다. 그 말대로 안 되는 것을 보고 일부 네티즌, 혹은 노빠들이 '노무현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라고 시시덕거리고 있는데, '이명박:노무현=불황:호황'같은 공식을 만들어서 유포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정치가 걸려버린 '일관성의 함정'을 극복하는데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만약 이명박이 지금이라도 종부세와 양도세율, 그리고 소득세 누진률을 파격적으로 높이고, 정부 지원을 받은 은행들에게 부실건설사 구조조정을 명령하고, 근로소득자에 대한 환급 외의 다른 방법을 동원하여, 가능한 한 직접적으로 저소득층에게 경제적 지원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나는,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그동안의 모든 원한을 잊고, 또 이명박과 그 주변 인물들에 대한 엄청난 혐오감을 억누르며, 이명박의 그 종합대책을 지지하고 그것을 '대통령에 대한 지지'로 전환할 용의가 충분히 있다.
이명박 대 반 이명박이라는 구도를 놓고 본다면, 어차피 이명박 입장에서는 임기 5년이 확보되어 있기도 하거니와 국회의원 선거도 없고, 또 지지율이 더 떨어질 리도 없으므로 자신의 '일관성'을 지키는 편이 더 나은 선택이다. '일관성의 함정'은 바로 이렇게 작동하고 있다. 만약 한국의 정치가 정상화되기를 바란다면, 이명박에게 일관성의 철회를 요구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이쪽에서도 일관성을 어느 정도는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이명박<->반 이명박(결국 노무현 ㅋㅋㅋ)' 같은 구도를 유포하고 있는 노빠들이 갖는 또 하나의 '일관성의 함정'으로부터도 벗어날 수 없다.
'이명박이나 노무현이나 그게 그거'라는 말만 반복하고 있거나, '무슨 일이 있어도 이명박은 용납이 안 된다'라는 소박한 정치의식을 고수하고 있거나, 결국 이명박에게 현재 추진하고 있는 경제 정책을 포기할만한 유인동기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매한가지다. 내가 어제, 즉 토요일 청계광장에 나갔던 것은 단지 이명박에 대한 반감을 표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는 이명박을 정치적으로 압박하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었기에 촛불집회에, 기회가 되는대로 계속 나간다.
그런데 지금은, 다들 쉬쉬하고 있다는 것을 다들 알고 있을 정도로 심각한 경제적 난국이다. 이런 상황에서마저 행정부가 올바른 판단을 하건 그른 판단을 하건 절대 지지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것은 이명박에게 그 어떤 유인동기도 제공하지 못한다(비록 나는 앞서 이명박을 '비-정치인'이라 칭했지만, 그것은 발생론적으로 그렇다는 거고, 지금은 조금이나마 '정치인'이 되어있기를 기대하는 마음에서 하는 말이다).
이게 무슨 '본격 이명박 사랑하자는 글'도 아니고, 노빠가 싫다고 명빠가 되는 그런 내용을 담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현재 벌어지고 있는 경제적 위기 속에서, 그것을 부채질하고 있는 '정치 마비 현상'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대중들 또한 정치적 선택의 정상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진보정당을 지지하는 것은 현 시점에서 정치적 선택을 넘어 윤리적 당위로까지 보일 수 있지만, 오직 그 윤리적 당위만을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국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없거니와 진보정당도 정당으로서의 긴장감을 유지할 수 없다.
계급투표는 철저히 계산적이고, 반 정서적이다. 그러므로 '반 이명박 정서'에 기대어 계급투표를 이끌어내겠다는 발상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국민들이 정치적 계산을 통해 투표한다는 신뢰가 없다면, 정치가 올바로 기능하기를 기대할 수 없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명박을 싫어하는 거라면 나도 남들 부럽지 않지만, 이명박을 싫어하는 것만으로 내 정치성의 모든 것이 드러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렇게 놓고 볼 때 '부정성의 정치'란 존재하지 않는다. 문제는 지금 이 시점에서 어떤 '긍정'을 해낼 수 있는가이며, 그 어떤 정당과 정치인도 그것을 제대로 해내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일관성의 함정'에 빠진 한국 정치를 묶는 키워드는 결국 '이명박'과 '노무현'으로 귀착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신자유주의 때문이다'라고 바이트 낭비를 하고 있는 노무현은, 결국 부정성의 정치를 회귀하게 하며 이명박 정부를 더욱 '일관성의 함정'으로 몰아넣고 있는 중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상적인 정치적 선택의 과정을 되살려내야 한다. 지금은 모든 국가의 경제가 '글로벌 스탠다드'로 움직이는 그런 격동기이므로, 만약 지금 이 신용경색과 실물경제 압박을 제대로 이겨낼 수 있다면 그것은 이명박 정부의 '실력'에 대한 인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노무현 때에는 주가가 많이 올랐고 부동산 가격도 폭등했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건설사 부실로 인한 신용경색은 이미 참여정부 당시부터 씨앗이 뿌려진 것이다. 규제지역 한 두개 더 만들었다고 둘러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명박은 노무현과 말로는 대립각을 세우면서 바로 그 경제정책을 계속 이어가겠다는 '사인'을 보냈고, 서울에 거주하는 유권자들이 그 '사인'을 이해하고 몰표를 준 것이 바로 이명박 당선의 이유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명박은 주가지수, 부동산 가격, 환율 등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그 '숫자'에만 목을 매달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한국 경제가 가지고 있던 본질적인 결함이 드러나고 있는 시점이며, 여기서 그 숫자들만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만약 이명박이 지금의 경제 위기를 올바로 극복할 수 있다면, 그는 거듭난 것이다.
그 '거듭난 이명박'을 받아들여줄 용기가 우리에게 없다면, 다시 말해 '일관성의 함정'에서 벗어난 이명박에게, 국민들 또한 '일관성의 함정'에서 벗어나 정당한 평가를 해줄 용기가 없다면, 대한민국이 처한 정치적 불능 상태는 해결될 수 없다. 또한 계급정치의 도래를 기대할 수도 없다. 부정성의 정치는 '일관성의 함정'을 자양분으로 삼고 있으며, 동시에 '비판적 지지'라는 이름으로 계급투표의 목을 오래도록 졸라온 바로 그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기독교 신자이며, 이 위기의 시대를 맞아 두손 꼭 잡고 기도를 한다고 쳐보자. ". . .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이 구절의 의미를 곱씹게 되는 새벽이 아닐 수 없다. '일용할 양식'을 만들어내는 그 시스템에 위기가 닥쳐오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혹은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우리를 때리고 물대포도 뿌린 그 새끼마저도 용서하겠다는 각오가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 대통령님께 힘을 실어 드리자는 말이 아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경제를 올바로 살려낸다면, 청와대의 그 인간도 '대통령'으로 인정할 각오를 하자는 말이다. '이명박 즐, (노무현 짱)'을 퍼뜨리고 다니는 자들의 농간에 놀아날만큼 그렇게 한가하지 않다. 그런 종류의 '일관성의 함정'이야말로, 이름만 꺼내도 지긋지긋한 '비판적 지지론'이 기대고 있던 '부정성의 정치'의 본질을 이루는 것이다.
물론 나는 이명박 정부가 그 일을 해낼 수 없으리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솔직히 기대도 안한다. 하지만 나 자신의 태도만큼은, 약간의 일관성을 포기하고서라도 정치적 선을 위해 변경할 준비가 되어 있다. 자려고 누웠다가 잠이 안 와서, 하이데거가 쓴 「칸트의 존재 테제」를 읽다가 이 글을 썼다. 잠들기 전에 기도를 한 번 더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