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왜 지금에서야 폴란스키를 체포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 <피아노>, <차이나 타운>등으로 유명한 세계적인 거장 로만 폴란스키 감독은, 13세 소녀에게 약물과 술을 먹인 후 피해자가 원치 않는다는 뜻을 밝혔음에도 항문성교를 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1977년의 일이다. 46일간 정신과 의사의 상담을 받은 끝에 ‘사회에 무해하다’는 판정을 받고 잠시 가석방된 틈을 타, 그를 다시 구치소에 구금한 후 재판을 진행하려 했던 판사의 결정에 불복하고 미국에서 빠져나간 것은 1978년 2월 1일. 아직 미국으로 송환되지는 않았지만, 31년만에 미 사법 당국은 폴란스키를 다시 붙잡았다.
▲ 로만 폴란스키 감독 | ||
불행인지 다행인지 국내의 언론 및 예술인들은 이 사건에 대해 그리 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 무관심이 다행스러운 이유는 안그래도 ‘공인’들에게 관대하지 않은 국내의 여론이, 폴란스키를 지지한다고 말하는 예술가에게 비난의 화살을 메다꽂을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이 무관심은 불행한 일이다. 아동 성범죄에 대한 사회 전반적인 관심을 한층 더 끌어올릴 수 있는 논쟁의 씨앗을 머금고 있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법 현실과 성범죄
연예인들의 싸이월드 미니홈피, 마이스페이스, 기타 등등 사적인 공간을 뒤져 몇 장의 사진이나 ‘발언’을 얻어낸 후 ‘어떻게 공인으로서 이럴 수 있는가’라고 호통을 치는 인터넷의 여론과 달리, 한국의 사법 현실은 (폴란스키의 체포 및 압류를 끝까지 요구하는) 미국보다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프랑스에 더 가깝다. 몇몇 유명한 뺑소니 사건이나 도박 사건 등을 놓고 일반적인 경우와 형량을 비교해본다면 분명 그렇다. 그 대상이 연예인이 아닌 정치인, 혹은 기업가라면 솜방망이 처벌의 사례를 찾는 것은 너무도 쉽고, 통상적인 형량이 선고되거나 집행된 경우를 찾는 게 어려워질 지경이다.
반대로 인터넷의 열화와 같은 분노가 곧장 처벌로 이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한 50대 남성이 안산에서 9세 여아를 성폭행하고 평생 회복될 수 없는 상해를 입힌 사건, 이른바 ‘조두순 사건’의 경우를 보면 확실히 그렇다. 경애하는 지도자 이명박 대통령께서는 천인공노할 사건에 크게 진노하시어 ‘그가 받은 형기를 모두 살게 하라’고 엄명을 내리셨다. 성범죄에 대한 공포에 떠는 민중들의 마음을 크게 헤아리신 것이다. 그 뜻을 이어받아 법무부와 정치권은 성범죄에 대한 형량을 높이고 공소시효를 연장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요컨대 한국의 법 시스템은 대중들의 분노가 ‘사회적 약자’를 향하고 있으면 즉각 반응하지만, ‘사회적 강자’를 향하고 있으면 귀를 막는다.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를 ‘사회적 약자’라고 칭하는 것에 반감을 느끼는 분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나 또한 그 다섯 글자를 타자로 치는 것이 참으로 메스꺼운 일이다. 하지만 그는 변변한 소득도 직업도 없었고, 성범죄를 포함한 온갖 범죄를 저질러 전과 10범이 넘는 사회 부적응자였다. 그가 저지른 죄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그는 사회 시스템에서 가장 밑바닥에 놓인 존재인 것이다.
사람들의 분노가 오직 ‘조두순’이라는 한 개인에게로, 혹은 언제 다가와서 내 아이에게 혹은 나에게 성폭행을 가할지 모르는 ‘잠재적 범죄자’들에게만 향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안타까운 일이다. 나는 지금 조두순을 동정하는 게 아니다. 조두순이 아닌 사람들, 안정된 지위와 명예를 누리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성범죄에 대해 우리 사회는 과연 얼마나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지에 대해 묻고 있을 따름이다.
과연 한국 사회가 성범죄자에 대한 ‘화학적 거세’를 요구할 수 있을만큼 성범죄에 대해 경각심을 지니고 있는가? ‘설령 상대가 동의했다 하더라도 미성년자를 성적으로 착취해서는 안 된다’, ‘설령 외교 문제로 비화될 수 있다 하더라도, 그 가해자가 누가 되었건 성범죄만큼은 확실히 처벌해야 한다’는 인식이 우리 사회에 상식으로 통용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 서울신문 10월5일자 1면 | ||
‘성범죄’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인식
이런 논의를 할 때 가장 곤란한 것 중 하나는 ‘성범죄’에 대한 사회 전반의 인식이 너무도 부족하다는 것이다. 대체 ‘성범죄’가 무엇일까? ‘조두순 사건’에 대해 핏대를 올리는 수많은 남성들은 자신이 성범죄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염두에 두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이미 성범죄의 가해자가 되어 있다. 왜냐하면 한국 남성들 중 상당수는 성매매를 경험한 바 있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성매매는 성범죄에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조두순이 저지른 범죄에 진노하신 그 분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이른바 ‘못생긴 마사지걸 발언’이 터졌을 때 이명박 대통령은 스포츠 마사지에 대한 것이라고 황급히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중요한 것은 국가의 공식석상에서조차 성매매에 대한 언급으로 이해될 수 있는 발언이 등장했으나 그것이 이미 ‘성범죄’임을 지적하는 목소리를 찾기가 어려웠다는 것이다.
‘남자의 자연스러운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돈이 있는 남자가 성을 제공할 수 있는 여자에게 돈을 주고 섹스 서비스를 받는 성매매가 대체 왜 성폭력이냐고 되물을 사람들이 매우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게리 베커와 리처드 포스너를 필두로 한 법경제학자들이라면 ‘성이라는 재화를 자유롭게 매매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냐’고 따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성매매는 엄연히 법으로 금지하고 있는 성폭력이다. ‘성매매알선 등 행위의 처벌에 관한 법률’은 성매매를 강요한 자, 성매매를 한 자 모두 처벌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포주도 나쁘지만 그 포주에게 돈을 주고 성을 구매하는 ‘평범한 남자’도 그 범죄의 일부분이라는 것이다. 다만 강압에 의해 성매매를 하도록 강요당한 사람은 ‘성매매피해자’로 규정하여 처벌의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다.
이미 이 지점에서부터 뭔가 크게 어긋나기 시작한다. 성매매는 누구나 다 하는 거고, 그냥 쉬쉬하고 넘어갈 일이지 그것을 괜히 단속하겠다고 하면 ‘풍선효과’가 발생해서 성매매가 음성화되고, 그래서 차라리 공창제를 시행하는 게 나을 것이고, 등등 운운하는 이들을 상대로 성범죄에 대한 전반적인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법에서 ‘성범죄’로 규정하고 있는 사항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정작 ‘남이 저지른 성범죄’에 대해서는 목소리를 드높이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폴란스키 사건이 한국에서 발생했다면
‘조두순 사건’에 대한 여론과 함께 폴란스키의 체포를 바라봐야 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조두순이 저지른 끔찍한 범죄를 곱씹으며 ‘미국처럼 200년, 300년씩 콩밥 먹여야 한다’고 이를 갈았다. 그렇게 외치는 남성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성매매를 한 경험이 있을 것이며, 설령 그것이 범죄로 규정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죄’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요컨대 성범죄에 대한 ‘죄의식’이 사회적으로 널리 공유되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미국의 경우는 차원이 다르다. 프랑스 대통령이 헛기침을 해도 사법 당국은 꿈쩍하지 않는다. 성범죄는 성범죄일 뿐이며, 누가 저질렀더라도 처벌을 받아야 하고, 아무리 오래 된 것일지라도 법의 심판대에 서야만 하는 것이다. 독일의 『슈피겔』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LA 주 검사 사무실에서 일하는 한 직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지금 다루는 사건이 무엇인지 아는가? 한 신부가 20년전 어떤 소년을 성적으로 학대한 사건이다. 왜 이런 경우는 박수갈채를 받아야 하고, 폴란스키를 체포한 것은 비난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폴란스키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논리는 ‘법 앞에서의 평등’이라는 절대적인 원칙 앞에서 한없이 무력해진다. 혹자는 폴란스키를 고발한 소녀가 그를 유혹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공식적인 조사 결과 피해자는 폴란스키와 단 둘이 남아있을 때 성관계를 거절했다. ‘무섭다, 집에 가겠다’는 의사를 수 차례에 걸쳐 분명히 표현했다. 이미 가해자가 먹인 술과 약물로 인해 행동이 자유롭지 않은 상태였다.
피해자는 두려웠기 때문에 적극적인 저항을 할 수 없었다. 국내에서 이 사건이 발생했다면 ‘적극적인 저항이 없었다’는 것을 빌미삼아 ‘화간’이라고 몰아붙이는 여론이 들끓었을 것이고, 가해자는 어렵잖게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거나 가벼운 형량을 선고받은 후 집행유예로 빠져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고 장자연씨 사건’을 떠올려보면 된다. 성접대를 받은 사람들이 과연 법에 규정된 처벌을 받았던가? 아니, 애초에 제대로 된 조사가 이루어지기나 했던가? 한국 검찰은 미국 검찰이 그러하듯이 성범죄에 대한 강력한 처벌 의지를 보여주고 있기는 한 것인가?
‘그 XX를 죽여라’, ‘거세하라’고 외치는 사람들은 십중팔구 미국의 제도와 형량을 염두에 두고 있다. 하지만 미국이 그런 엄격한 처벌을 할 수 있는 것은 성범죄 자체에 대한 단호한 윤리적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폴란스키 사건을 보라. 지금도 그렇겠지만 당시 연예계에는 감독과 배우들간의 은밀한 성적 거래가 적지 않게 벌어지고 있었다. 폴란스키 감독은 홀로코스트 생존자이며 사건 발생 이전에 부인이 연쇄살인범에 의해 참혹하게 살해되는 충격을 겪었다.
그러나 미국의 법 체계는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가 13세 소녀에게 약을 먹이고 술을 먹인 후, 원치 않는다는 의사를 표명했음에도 힘과 협박으로 제압하고 피해자의 항문에 성기를 삽입하여 수 개월의 치료를 요하는 상해를 입혔다는 것만이 관건일 뿐이다. 성폭력은 성폭력일 뿐이다. 다른 변명은 필요 없다. 사건이 벌어진지 31년이 지났지만 검찰은 끝까지 처벌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공소시효를 연장하는 것은 바로 이럴 때에나 의미가 있는 것이다.
미국식으로 하자고? 그 엄격한 잣대가 모두에게 평등하게 적용되리라고 보장할 수 있다면, 나는 찬성한다. 하지만 이미 한국 사회는 고 장자연씨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서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한 그런 사회이다. 형량을 높이고 전자발찌를 평생 채우자고 주장하는 정치인과 법무부 관계자들 중, ‘미국식 윤리 기준’을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누가 있을까? 적어도 ‘각하’께서는 통과하기 어려울 것이다.
노정태/칼럼니스트 mediaus@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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