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2-23

싸움을 멈추고 열린 마음으로

그 누군들 이런 소모적인 논쟁이 지겹지 않겠는가. 지난 며칠 동안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과연 진보정당의 지지자들이 상대편의 주장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진보정당의 지지자라고 두루뭉실하게 말하지 말고 나 스스로의 모습을 돌이켜보자. 과연 나는 내가 싫어하는 사람의 말도 경청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살아왔던가? 무조건 귀를 막고 반대되는 논리를 세우기 위해 매진해온 것은 아닐까? 앞으로는 내가 싫어하는 사람의 말이라고 해서 덮어놓고 외면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삶을 살아야겠다.

"우리 당은 의석이 둘 뿐인 작은 정당입니다. 독자적으로 총선을 치를 경우 잃을 것은 없습니다. 의석도 늘어날 것이요 당의 존재도 널리 알릴 수 있습니다. 반면 현재 백여 개의 의석을 보유한 민주당은 '파멸적 타격'을 입을 것입니다. 수도권 선거는 보통 2천표 안팎의 차이로 승패가 갈립니다. 약 10만 명이 투표하는 선거구라면 유효투표의 2% 안팎의 차이가 승부를 결정합니다. 우리당 후보들은 지역구의 성격과 후보의 경쟁력에 따라 다르겠지만 수도권에서 그보다는 훨씬 높은 득표율을 기록할 것이며, 한나라당보다는 잠재적 민주당 지지표를 훨씬 많이 빼앗을 것입니다. 그래서 한나라당에게 어부지리를 안겨준다는 비난이 일겠지만 상관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민주당이 리모델링 신당으로 한나라당을 이길 수 없음을 분명하게 경고했고 민주당 의원들이 정당개혁의 흐름에 합류할 것을 끈질기게 요청했지만 그들은 그것을 거부했습니다."


와, 정말 구구절절 옳은 말이구남.

2009-12-10

오바마 노벨상 수상 연설

* 우리는 새로운 아메리카나로 들어갔음. 제 머리에 왕관을 얹은 나폴레옹처럼, 오바마의 입을 빌어 미국은 이제 대놓고 세계 경찰이 되는 듯.

* 부시가 시작한 'war on terror'가 오바마에 의해 추인된 것도 기록 포인트.

* '제국의 몰락'을 말하는 분들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이 '제국의 몰락'으로 바뀌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제국의 시대가 본격화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전후 관계를 거꾸로 보면 안 됨.

* 연설 졸라 잘 함. 우크라이나 총리 율리아 티모센코의 얼굴에 밀려오는 감동의 쓰나미. 애는 자는데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윌 스미스. 기타등등.

여성의 몸은 여성의 것이다

소유권의 핵심은 처분권이다. 내가 내 연필을 소유하고 있다면, 나는 그것을 남에게 팔 수 있다. 아무 의미 없이 그것을 부러뜨리거나, 크로마티 고교에 나온 것처럼 괜히 씹어먹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내 자유다. 반면 가을이가 내 연필을 빌려서 공책에 낙서를 하고 있다면, 내가 허락한 범위 내에서 그 연필을 사용해야 한다. 주인인 나의 허락 없이 그것을 남에게 양도하거나 매매하거나 처분해버리는 일은 용납되지 않는다.

이오공감의 44 사이즈 논란을 보고 있노라면, 여성이 자신의 몸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턱없이 많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확인할 수 있다. 프랑소와즈 사강의 유명한 말처럼,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그것이 소유권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피오줌을 싸건 말건 당신들이 상관할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역사적으로 여성의 신체는 그러나, 여성의 소유로 인식되지 않았다. 그것은 대체로 '자손'을 생산하기 위한 도구, 즉 가부장 혹은 혈족의 소유물로 인식되어 온 것이다. 여성들이 자녀를 낳고 키울 수 없다고 주체적으로 판단하여 출산율이 떨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알량한 캠페인으로 현재의 출산율 저하 경향에 대응하고자 하는 정부의 안일한 태도의 기저에는 바로 이런 전근대적 여성관이 깔려 있다고 말하는 것도 큰 무리가 아닐 것이다.

평소에 그토록 이명박 정부의 여성정책, 혹은 인구정책에 대해 가볍게 비아냥거리던 이글루스의 여론 또한 거의 비슷한 프레임에서 작동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자신의 판단에 따라 혈뇨가 나오도록 밥을 굶는 사람이 왜 '건강하라'는 명령을 들어야 하는가? 그 사람의 몸은 그 사람의 것이라는 기초적인 자유주의적 명제에 동의한다면 애초에 그런 값산 '충고'를 함부로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것이 '상식'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실로 놀랍다.

극심한 다이어트를 통해 스스로의 건강을 해치는 행위는 성매매나 장기매매와 같지 않다. 성매매나 장기매매의 경우 그것을 합법화하면 대부분의 경우 경제적으로 궁박한 상황에 몰린 사람이 어쩔 수 없이 '자의적으로' 그러한 선택을 하게 되는 경우마저도 법으로 보호해야 하는 상황이 도래한다(암스테르담의 합법적 성매매로 인해 그 지역에 얼마나 많은 동구권 여성들이 몰려들었는지를 떠올려보면 그 '자발성'의 허구성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다이어트를 통한 건강의 저하는 그런 외부효과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남성들이 근육을 키우기 위해 호르몬 성분이 함유된 약물을 주사하고 먹으며 인공적으로 추출된 단백질을 과다 섭취하는 경우와 비교해보자. 문제의 여성은 혈뇨를 누었지만 단백질 보충제를 과다하게 섭취할 경우 소변에 단백질 성분이 섞여 나오고 그 과정에서 신장에 무리가 온다. 그러나 그 누구도 보디빌더 앞에서 '지금, 스스로를 사랑하고 계십니까'라고 느끼한 충고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남성'의 몸은 남성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 소유권 행사에 대해 함부로 왈가왈부할 권리가 스스로에게 없다는 것을 역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적 가치가 지닌 몇몇 미덕을 옹호하면서 동시에 자유주의의 폐단에 항거하는 것은 사회주의적 입장을 가진 이들이 태초부터 겪어야 했던 딜레마이다. 이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사회가 여성들에게 특정한 미의 형태를 강요하고 있다는 비판은 타당하지만, 과도한 다이어트를 하는 여성에게 '너는 네 몸을 건강하게 유지해야만 한다'고 외치는 전근대적 함성에 대해서는 반대의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다. 여성의 몸은 여성의 것이다. 제발 기초적인 것들부터 지키면서 살자.

2009-12-04

[노정태의 우물 밖 개구리]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어떻게 비판할 것인가?

오바마의 대답은 병력 증파였다. 3만명 이상의 미군을 아프가니스탄에 추가로 투입하고, 나토(NATO)와 그 외 동맹국에서도 추가 병력을 보냄으로써, 2011년 이전까지 ‘이 일을 끝내려 한다’고 그는 말했다. 예상치 못한 결정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 비난은 비난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반미주의’라고 통칭되는 단순한 관념의 틀을 벗어나 이 파병 문제를 생각해보도록 하자. 9/11테러에서 아프가니스탄 공습, 이라크 전쟁, 그리고 다시 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이어지는 21세기 미국의 국제 정치를 비판하고자 한다면, 과연 그 비판의 주체가 되는 ‘우리’는 어떤 입장과 논거에 기반하여 그것을 평가할 것인가? 무턱대고 ‘미국이 하는 행동이니까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던 시간과 장소가 존재했을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무조건적인 친미주의만큼이나 위험하고 무익한 발상에 불과하다.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미국을 비판하고자 한다면, 우리에게도 그만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왜 미국을 비판하는가?

   
  ▲ 지난 19일 이명박 대통령과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만나고 있다.ⓒ 청와대제공  
 

끝없이 언론 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적어도 한 해에 한 권 이상 책을 쓰는 왕성한 필력의 소유자, 라캉을 영미권에 유행시킨 장본인, 슬라보예 지젝은 이라크 전쟁에 대한 그의 비평서 <이라크: 빌려온 항아리>(도서출판 b)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구절은 미국의 대외정책이 지닌 애매성을 잘 포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소박한 질문을 던져보아야 한다. 세계경찰로서의 미국, 안 될 게 뭐 있는가? 탈냉전 상황은 실로 그 공백을 채울 어떤 세계적 권력을 요청했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신 로마제국으로서의 미국이라는 상식적 지각을 상기해 보라. 오늘날 미국에 대한 문제는, 그것이 새로운 세계 제국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지 않다는 것, 즉 그런 척하면서도 무자비하게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민족국가로서 계속 행동한다는 것이다. (위의책 32쪽, 강조는 저자)

지젝은 ICC(국제형사재판소)에 대한 미국의 비협조적 태도를 예로 들어가며, 세계 제국으로서 활동하고 있으며 그럴 힘을 지니고 있는 미국이 일개 민족국가처럼 행동하는 경향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그런데 지젝은 미국더러 세계 제국이 되라는 것인가, 되지 말라는 것인가? 만약 미국이 세계 제국이라면, 미국은 국제법에 있어서 ‘불법’을 저지를 수 없다. 국왕이 국법을 어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지젝은 미국이 세계 제국으로 활동하려면 ICC의 규칙에 종속되어야만 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전후가 뒤바뀐 발상이다. ICC는 조약에 가입한 국가들만을 기속할 뿐, 그 조약이 실질적으로 유효한 것이 되게끔 하는 ‘권력’에게까지 힘을 발휘할 수 없다. 만약 미국이 일개 민족국가의 지위를 벗어나 정말 세계 제국이 된다면, 이라크 전쟁도 ‘합법적’인 것으로 봐야만 한다는 뜻이다.

현재 추진중인 아프가니스탄 증파에 대해 회의적인 목소리가 드높은 이유도 같은 논의의 연장선상에서 확인 가능하다. 미국이 유라시아 대륙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하나의 국가로만 자신의 역할을 한정하고 있다면, 구태여 아프가니스탄 정부를 안정시키고 알카에다를 뿌리뽑기 위해 3만 명의 병력을 더 보내야 할 필요는 없다. 지금처럼 국경을 잘 틀어막고 신분 조회를 강화하는 것만으로도 치명적인 테러의 가능성을 대폭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카에다와 같은 테러 조직은 미국 뿐 아니라 전 세계의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이다. 약 1년 전 발생한 인도 뭄바이의 테러도 그렇거니와, 며칠 전에는 러시아에서 열차 폭탄 테러가 발생하여 100여명의 사상자가 출현하였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21세기는 테러의 시대이며 그것은 인류가 처한 보편적 위협 중 하나로 이해된다. 그래서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 뿐 아니라 서구 세계와 사이가 좋지 않은 파키스탄 정부도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지는 테러와의 전쟁에 동참하는 모양새를 내고 있다. 테러 발생으로 인한 인명 손실과 위협을 ‘미국의 문제’가 아닌 ‘세계의 문제’로 놓고 본다면, ‘왜 미국이 이런 전쟁을 해야 하는가’라고 말하는 것은 그다지 적절한 비판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알카에다 100명을 잡기 위해 10만 명이 투입되는 것이 말이 되는 일이냐’고 따져 묻는 마이클 무어의 일갈은 바로 그러한 ‘상식적인 국민’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스스로의 역할을 일개 국민국가로 한정하고 있다면,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지속해야 할 이유가 없다. 미 행정부도 바보가 아니다. 이라크 전쟁을 두고 혹자는 ‘그곳에서 나오는 석유’를 전쟁의 이유로 거론하였지만, 그렇다면 미국이 왜 아프가니스탄에서 지지부진한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지를 설명하기가 어려워진다. 아프가니스탄은 이렇다할 천연자원도 없고, 국토의 대부분이 고산지대로 이루어진 척박한 나라이다. 게다가 전쟁을 해야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부시와 달리, 오바마는 전쟁을 하면 할수록 자신의 핵심적인 지지층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런데 왜 미국은 전쟁을 하는가? 가능한 설명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미국이 실제로 세계의 경찰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경찰의 폭력적인 법 집행이 타당하냐 부당하냐에 대한 판단을 잠시 접어두고 사실만을 놓고 본다면, 미국은 분명 세계의 경찰 노릇을 하고 있다. 미국이 아니라면 그 어떤 나라가 자국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거대 테러 조직에게 값비싼 폭탄을 퍼붓고 수만 명의 병력을 보내 잔당을 소탕하려 들겠는가?

‘반미주의’라는 단순한 틀거리로 이 문제를 바라볼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분명 탈레반은 문제적인 집단이며, 해체되어야 한다. 그들이 지배하기 시작한 이후 아프가니스탄은 여성의 지옥이 되었다. 현장법사가 보고 눈물을 흘렸을 거대한 바미안 석굴은 다이너마이트로 파괴되었으며 탈레반을 등에 업고 그 지역에서 세력을 키운 알카에다는 민간인들이 탑승한 항공기를 이용하여 사상 초유의 테러를 저질렀다. 이런 극단적인 폭력 행위마저도 ‘문화적 다양성’ 같은 이름 하에 보호받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테러 조직이 발생하게 되는 사회의 열악한 여건에 공감하고 도움을 주고자 하는 것과, 그 테러 행위 자체를 비난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미군의 바그다드 점령 이후 폭탄 테러로 인해 수많은 ‘이라크 민간인’들이 부상당하고 목숨을 잃었다. 그 부조리한 폭력 앞에서 단순한 ‘반미주의’는 할 말이 없다.

마이클 무어가 말하는 대로 ‘이 전쟁은 미국 국민들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고 무의미한 것이니, 우리는 손을 떼자’는 식의 비판은 일견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 단 하나의 결정적인 문제를 제외하면 그렇다. 그 비판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오직 미국 시민들이 자국의 대외정책을 비판하며 대내정책에 더 많은 자원이 투입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때에나 가능한 화법이다. 세계 경찰로서의 미국, 오지랖 넓은 미국이 존재하는 것은 적어도 대한민국에게는 군사적으로 이익이 되는 일이다. 미국이 진정 일개 국민국가로 자신의 역할을 한정하려 든다면, 우리는 더 높아진 군사비와 더 불안해진 국경을 놓고 고심하며 살아야 한다. 물론 마이클 무어는 흡족해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우리’의 처지는 그 쿨한 미국인의 이해관계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그렇다고 지젝이 엉성하게 지적한 것처럼, 미국이 하나의 국가가 아닌 세계 제국으로 스스로를 확립하고 활동하기를 바라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일개 국가 자격으로도 이미 충분히 미국은 국제법을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전쟁을 개시하여 한 나라를 거꾸러뜨렸다. 그런 미국에게 제국의 왕관을 씌우는 일이 과연 현명한 것일까? 게다가 그 제국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미국의 국방비에서 나오고, 그것은 결국 미국 시민들이 낸 세금이다. 왜 한 나라의 시민들이 세계 제국의 역할을 모두 떠맡아야 하는가? 우리가 그들에게 그런 고된 일을 요구하면서 ‘도덕적’일 것까지 바랄 수 있는 근거가 어디 있단 말인가?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까지 한국인들, 특히 이른바 ‘진보진영’에서 미국과 관련된 국제 문제를 바라보는 방식의 허술함을 지적하기 위해 이 글을 썼다. 미국이 벌이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대한 평가는 하나의 큰 딜레마이며, 우리는 그 어떤 경우에도 완벽한 해답에 도달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완벽한 답을 찾는 게 아니라, 그 딜레마에 마주설 수 있는 ‘주체’를 확립하는 것이다. 북한 문제, 국제 문제에서 진보진영이 ‘수구꼴통’에 비해 말빨이 딸릴 수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그 지점에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노정태/칼럼니스트  mediaus@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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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03

철도파업과 한국식 공감법

철도파업이 실패로 끝났다. 투쟁대오를 가다듬어 다시 싸우자고 발표했지만, 파업을 푸는 순간 구속 행렬이 이어질 것이고, 실제로 파업을 이끌어갈 수 있는 주축들은 모두 막대한 민사소송을 당한 채 감옥으로 향할 것이다. 공정한 재판을 기대할 수는 없다. 용산 참사 1심을 보고도 그런 기대를 하는 사람이 남아있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드물게도 이번 철도파업에서는 인터넷의 여론이 파업에 동정적인 편이었는데,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노회찬의 표현대로 법치주의가 아닌 '박치주의'가 지배하는 대한민국에서 그 네티즌들의 알량한 손가락 놀림은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하고 허공에서 사라져버렸다.

그 여론 속에서 어떤 사람들은 '나는 저들에게 공감할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내가 볼 때 가장 의아한 것중 하나가 바로 저 '공감'이라는 단어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단어가 쓰이는 화법이 놀랍다. 그들은 마치 무언가에 공감한다는 것이 누군가의 블로그에 '잘 읽었습니다^^'라는 리플을 다는 것과도 같은 것처럼, 즉 자신의 의사에 의해 이렇게 할 수도 있고 저렇게 할 수도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학 혹은 윤리학에서 인간의 도덕적 행위의 원천으로 생각하는 '공감'은 그런 것이 아니다. 공감은 재채기처럼 조건반사적인 것이지, 내 마음대로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호주 출신의 윤리철학자 피터 싱어의 최근작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에 등장하는 논증들은 대부분 이 공감의 무조건성에 기대고 있다. 몇 가지만 예를 들어보자.

가령 지금 당신의 앞에 어떤 아이가 물에 빠져서 죽어간다고 해보자. 당신의 주머니에는 십만 원이 들어있고, 어떤 수영선수가 '나는 누군가 내게 십만 원을 준다면 저 아이의 목숨을 구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해보자. 당신은 그 수영선수에게 십만 원을 줄 것인가, 주지 않을 것인가?

이런 경우도 있을 수 있다. Y자로 갈라지는 철로가 있고, 당신이 가장 아끼는 자동차가 철로의 왼쪽 가지 위에 놓여 있다. 엔진이 고장나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다. 오른쪽 가지에는 당신이 모르는 누군가가 선로 위에 꽁꽁 묶여 있고, 당신은 그를 풀어줄 수 없다. 밑에서부터 열차가 올라오고, 당신은 분기점에서 그 기차를 왼쪽으로 보낼지 오른쪽으로 보낼지 결정해야 한다. 당신은 당신의 승용차를 건지기 위해 그 기차를 오른쪽으로 보낼 수 있는가?

경찰과 검찰, 대통령과 사측은 손에 박달나무 몽둥이를 움켜쥐고 노동조합을 탄압하겠다는 의지를 매일같이 표명하고 있다. 파업을 하다가 손해배상 소송을 당하면 천문학적인 액수의 '빚'을 지게 된다. 파업 노동자들이 시민을 볼모로 잡고 있다고 말하지만, 본질적으로 말하자면 그들 자신이 위험에 빠짐으로써 사람들의 동정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파업 노동자들은 물에 빠졌고 철로에 묶였다. 그러한 사고 실험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손해를 무릅쓰고 위험에 처한 이를 구하겠다고 대답한다. 적어도 피터 싱어가 물어본 사람들은 그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빌어먹을 대한민국에서는 '공감'이라는 단어가 쓰이는 방식 자체가 다르다. 위험에 빠진 누군가를 보고 무턱대고, 주체할 수 없이 드는 동정심 따위는 사람들에게 존재하지도 않는 것만 같다. 내 연봉보다 많이 받는지, 한글날에 쉬는지 안 쉬는지 따위가 그렇게 중요한 문제라는 말인가? 물에 빠진 어린이의 앞에서 '너 강남 살아 강북 살아? 강남 살면 안 구해줘'라고 말하는 것과 대체 뭐가 다른 행동인지 나는 도저히 알지 못하겠다.

이쯤 되면 '파업은 시민들에게 불편을 끼치는 거고...' 운운하겠지만, 두 번째 예를 상기할 것. 당신은 그렇다면 당신의 승용차를 지키기 위해 다른 누군가의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인가? 나의 작은 불편과 타인의 엄청난 고통 사이에서 당신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나도 약 5년간 1호선을 타고 부천에서 신도림 혹은 신길까지 갔다. 안암역 혹은 고대역까지 총 1시간 40분씩 시달려본 사람이다. 철도 파업을 하면 정말 죽을 맛이다. 하지만 나의 그 고통을 덜기 위해, 내가 아닌 누군가가 구속당하고 감옥에 처박히고 손해배상 폭탄을 맞아가며 가정이 파탄나고 절규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타인의 체취가 진동하는 국철에서 덜컹거리는 게 재미있고 흥겹고 신나서가 아니라, 내가 이 고통을 묵묵히 참지 않으면 다른 이들이 엄청난 시련을 당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놀랍게도 '선택적 공감'을 하는 기술을 익혀버렸다. 예전에 '팩트골룸'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이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삶의 디테일이 뭐가 그렇게 중요한가? 지금 문제는 그들이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 아닌가? '공감이 안 가네요'라고 한 마디 찍 내뱉는 그들을 보면, 내가 인간의 도덕심에 대해 잘못 알고 있거나, 혹은 그들이 신인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이 파업은 패배로 돌아갔고, 공공부문의 가장 크고 강력한 노동조합이 패배한 만큼, 이제 한국의 노동운동은 걷잡을 수 없이 분쇄되기 시작할 것이다. 귀족노조가 사라지면 모두 부자가 되려나? 모두 노예가 되지 않으면 다행이겠다. 정부의 악랄한 선전질과 국민들의 '한국식 공감법'이 맞물려, 우리는 아주 비참하게 일하고 쥐꼬리만한 봉급을 받으며 덜컥 잘려도 불만 한마디 표하지 못하는, 그런 21세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책상에서 일하는 당신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