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다른 사람에게 모순된 요구를 할 경우, 우리는 그 요구를 하는 사람이야말로 뭔가 문제가 있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가령 '100원 줄테니까 곰보빵이랑 우유 사오고 500원 거슬러와' 같은 소리를 학생 A가 학생 B에게
하고 있다고 해보자. A는 B에게 정당한 요구를 하는 게 아니다. 그는 삥을 뜯고 있다.
진보정당의 '정치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사태가 관찰된다. 인터넷에서 진보정당과 그 지지자들을 대상으로 이래라 저래라 시리즈를 연재하는 사람들은 곧잘
'너희들은 너무 유연하지 못해, 너희들은 정치적인 행동을 할 줄 몰라'라고 훈수를 두곤 한다. 그들이 말하는 유연성이란 한미
FTA를 토론다운 토론 없이 통과시키거나, 이라크에 파병을 하거나 하는 그런 것이다. 지난 정부의 그러한 행동들, 말하자면 왼쪽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하는 행동을 놓고 진보정당의 지지자들이 비판할 때, 지난 정부의 옹호자들은 말한다. '너희들은 정치를 몰라.
유연함을 배워야 해.'
그리고 노회찬이 조선일보 90주년 행사에 참석했다. 아예 안 갔다면 모르겠으되, 초청받아서 갔다면 덕담 한 마디 안 해주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는 '정치적 유연함'을 요구하던 자들이, 갑자기 노회찬에게 안티조선의 불굴의 투사가 되라고 요구한다.
노회찬이 조선일보 행사에 참석하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에 대해서 나는 판단을 내리지 못하겠다. (물론
심정적으로는 매우 반대한다.) 다만 그의 '정치적 행동'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자들의 모순된 태도에 대해서는 지적해야 할 것이
분명히 있다.
직접적으로 물어보자. 대체 그들은 왜 노무현과 참여정부의 실책에 대해서만 '유연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인가?
한 사람의 정치인이 있고, 그가 진정 정치적인 (혹은 현실정치인으로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행동을 하고자 한다면, 죽은
노무현의 과오를 억지로 옹호해주는 것보다는 차라리 조선일보 90주년 행사에 참석해서 덕담 한 마디를 해주는 편이 낫다. 앞서
말했듯 나는 노회찬의 저 결정에 찬성할 수 없다. 하지만 그에게 '정치적'으로 행동할 것을 요구하며 노무현 정부의 과오를 문제삼지
말라고 말해왔던 자들이, 진짜 '정치적'인 행동 앞에서 비아냥거리는 것은 대단히 우스꽝스러운 일이라고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신들의 판단의 기준은 대체 무엇인가?
조중동과 말로 다투던 노무현은 결국 조중동이 바라던 한미 FTA와 이라크
파병을 일사천리로 밀어붙였다. 노회찬은 참여정부 머리 꼭대기 위에 앉아 있던 삼성과 전면전을 펼쳤고, 그 싸움은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정치인이 겉으로는 웃되 속으로는 싸우는 것이 나는 더 옳다고 생각한다. 말로만 대립각을 펼치고 안티조선하면서, 결국
조중동이 바라던 세상을 만들어버린 것보다는 그게 훨씬 낫지 않을까? 남에게 일관성이 없다고 욕하지 말고, 그 말을 하는 스스로가
과연 일관된 기준을 견지하고 있는지에 대해 돌아볼 것을 요구하고 싶다.
2010-03-06
2010-03-03
위악적 솔직함 - 김훈의 경우
엮인글: "위악(僞惡)에 관해"(a quarantine station, 2010년 3월 2일)
sonnet 님은 '위악적'이라는 단어가 쓰이는 용법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 위악은 사전적으로 볼 때 '짐짓 악한 척 하는 행위'로 정의되므로, 그 경우 '왜 짐짓 악한 척 하는가'라는 질문이 가능하다. 하지만 sonnet님은 그 질문의 선후관계가 바뀌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말을 인용해보자.
이렇게 질문을 바꾼 후 그는, 누군가를 위악적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사실은 "자신과 다른 기준의 존재를 인정하기 싫"어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던진다. 누군가에게 '위악적'이라는 딱지를 붙임으로써 그가 진정으로 믿고 있는 기준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 질문은 때에 따라서 정당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분명히 '위악적'이라는 말에는 어떤 암묵적인 선의 기준이 내포되어 있지만, 그 선의 기준에 모든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다고 전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문제는 그러한 선의 기준이 어디에 어떻게 설정되어 있는가이다.
'위악적 포즈'를 유행시킨 장본인 중 하나인 김훈의 인터뷰를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시사저널』 편집장으로 일하던 당시, 경쟁지인 『한겨레21』의 인터뷰 요청에 응해 '여자들은 화초와 같다', '조선일보가 최고다', '내가 전두환 찬양 기사 다 썼다'는 등의 '소신 발언'을 날린 후 며칠 지나지 않아 사직서를 내고 지금 우리가 아는 전업 소설가 김훈이 되었다. 이후 김훈은 지금까지 산문과 소설 등에서 줄곧 비슷한 입장을 취한다. 무엇이 선하다, 무엇이 악하다고 외치는 거대담론은 무의미하며, 인종 간의 혐오감이란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등.
이 경우 김훈의 행동을 '짐짓 악한 척 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고, 그것이 '위악'의 사전적 정의에 더욱 부합하는 것이겠지만, 여기서 김훈은 분명히 자신의 소신을 이야기하고 있다. 게다가 그는 양성간의 평등 문제나 인종간의 혐오 등 현대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대체로 수긍하리라고 기대되는 미덕에 대해 단호한 반대의 입장을 표한다. 이 경우에 '짐짓 그런 척' 한다고 말하는 것은 sonnet님이 주장하는 것처럼 '상대방의 입장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 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하지만 이 사례에서 드러나는 김훈의 발화 행위는 단순한 개인적 취향의 표현을 넘어선다. 그는 이러한 '위악적' 표현을 통해 대략 두 가지를 목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 '진보적 언론'이라는 것들이 거대담론에 매몰되어 헛소리만 하는 얼간이들이라고 선언하고 폭로한다. 둘째, 마찬가지 맥락에서, 상대방을 일종의 '위선자'나 '지사(지사정신 할 때의 그 지사)'로 몰아간다. 이 본문에 인용된 것 외의 다른 부분을 읽어보면 그 부분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특히 두 번째 기능이 중요하다. 김훈의 거침없는 '취존중 요구'로 인해, 한겨레나 시사저널 같은 당시의 진보적 매체들은 졸지에 남의 취향도 존중할 줄 모르고, 인종 사이의 자연스러운 혐오도 무시하며, 남자가 여자보다 월등하다는 명백한 사실을 부인하는 청맹과니가 되어버린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그는 '현실'이라는 거대담론을 끌어들임으로써 '이상 대 현실', '거대담론 대 인간의 삶' 같은 공허한 이분법을 도입하고 있다는 비판이 충분히 가능하지만, 이 방향으로 논의를 끌고 갈 경우, 앞서 인용한 바와 같이 "난 정돈된 생각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는 식의 답변이 돌아올 것이다.
이렇듯 '본질적'인 문제, '가치'와 관련된 문제에서 어느 정도 옳다고 잠정적인 합의가 이루어져 있지만 사실 그에 대한 불만이 팽배한 가치를 둘러싸고 '위악적'인 제스처는 힘을 발휘한다. 짐짓 악한 척까지 할 필요도 없다. 다들 당장은 불편하지만 옳기 때문에 참는 가치들에 대해 '솔직한 내 생각'을 말해버리면 그만이 기 때문이다. 가령 장애인을 위한 대중교통의 비효율 감수라던가(솔직히 다리가 안 좋으면 집에 있으면 되잖아, 안 그래?), 시각장애인을 위해 웹사이트에 플래시 도배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 같은 경우(보기도 좋고, 개발 현실이라는 게 있지...), 등등. 우리는 비슷한 예를 수없이 만들어낼 수 있다.
상식적으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 같지만 아직 공고한 상식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는 못한 도덕적 명제들을 개인적 취향을 명목삼아 부정하는 것, 그것이 가장 대표적인 '위악'의 행태이다. 일부러 싸가지 없는 척하는 신해철 같은 연예인, 저 소녀가 나를 좋아할까봐 괜히 가래침 뱉는 대학교 2학년 오빠 같은 경우도 있겠지만, '위악'이라는 단어가 사회적으로 쓰이는 방식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간과되고 있는 것 같아 한 마디 덧붙여 보았다.
sonnet 님은 '위악적'이라는 단어가 쓰이는 용법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 위악은 사전적으로 볼 때 '짐짓 악한 척 하는 행위'로 정의되므로, 그 경우 '왜 짐짓 악한 척 하는가'라는 질문이 가능하다. 하지만 sonnet님은 그 질문의 선후관계가 바뀌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말을 인용해보자.
내가 볼 때 그 질문은 출발점이 잘못된 것 같다. 지금까지 내가 관찰하기로는 위악이라고 지칭되는 사람 중 상당수는 그게 위악이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같지 않다. 그건 그냥 부르는 쪽이 임의로 딱지를 붙여서 발생하는 것 같다. 그러니 이렇게 물을 수 있겠다.
왜 누군가를 짐짓 악한 체 한다고 부르는 것일까?
이렇게 질문을 바꾼 후 그는, 누군가를 위악적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사실은 "자신과 다른 기준의 존재를 인정하기 싫"어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던진다. 누군가에게 '위악적'이라는 딱지를 붙임으로써 그가 진정으로 믿고 있는 기준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 질문은 때에 따라서 정당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분명히 '위악적'이라는 말에는 어떤 암묵적인 선의 기준이 내포되어 있지만, 그 선의 기준에 모든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다고 전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문제는 그러한 선의 기준이 어디에 어떻게 설정되어 있는가이다.
'위악적 포즈'를 유행시킨 장본인 중 하나인 김훈의 인터뷰를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시사저널』 편집장으로 일하던 당시, 경쟁지인 『한겨레21』의 인터뷰 요청에 응해 '여자들은 화초와 같다', '조선일보가 최고다', '내가 전두환 찬양 기사 다 썼다'는 등의 '소신 발언'을 날린 후 며칠 지나지 않아 사직서를 내고 지금 우리가 아는 전업 소설가 김훈이 되었다. 이후 김훈은 지금까지 산문과 소설 등에서 줄곧 비슷한 입장을 취한다. 무엇이 선하다, 무엇이 악하다고 외치는 거대담론은 무의미하며, 인종 간의 혐오감이란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등.
최보은: 대학원 졸업한 딸을 두신 걸로 아는데 페미니즘 기질은 없나요?
김훈: 우리 딸? 그런 못된 사조에 물들지 않았어요.
최보은: 어쩌다 김훈 선배는 그런 못된 사조에 물드셨어요. 마초…. <시사저널>엔 여기자들도 많은데 그렇게 말하세요? 페미니즘 같은 것에 물들지 말라?
김훈: 걔들은 가부장적인 리더십을 그리워하는 것 같더라고.
최보은: 네? (웃음) 이런 말 기사화해도 상관없으세요?
김훈: 괜찮아. 아무 상관없어. (웃음)
김규항: 근데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김훈: 여자들한테는 가부장적인 것이 가장 편안한 거야. 여자를 사랑하고 편하게 해주고. (웃음) 어려운 일이 벌어지면 남자가 다 책임지고. 그게 가부장의 자존심이거든.
김규항: 최 선배 열받네.
최보은: 지금 반어법이에요? 진심이에요?
김훈: 난 남녀가 평등하다고 생각 안 해. 남성이 절대적으로 우월하고, 압도적으로 유능하다고 보는 거지. 그래서 여자를 위하고 보호하고 예뻐하고 그러지.
최보은: 그런 이야기하면 <시사저널> 부수 떨어져요.
김훈: 괜찮아. 이제 떨어질 것도 없어. (웃음)
김규항: 후천적인 노력이 아닌 선천적인 요인으로 사람을 나누는 건 대단히 위험합니다. 남성이 여성보다 선천적으로 우월하다는 얘기는 백인이 흑인보다, 독일인이 유대인보다 우월하다고 보는 인종차별하고 다를 게 없죠.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보는 게 근대적 사고방식의 기본 아닌가요?
김훈: 인종 사이의 혐오감이란 어쩔 수가 없는 거지.
김규항: 혐오는 단지 서로간에 다르다는 건데. 이건 “어떤 피부색을 가진 사람이 근본적으로 열등하다”는 말과 같습니다. 나치가 아리안족이 가장 우수하다고 말하는… 근데 선생님께서 여성에 대해 말씀하는 건 그거와 결국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김훈: 난 정돈된 생각을 가진 사람이 아니거든.
김규항: 선생님 말씀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더라도 경우에 따라 다르지 않겠습니까. 전체적으로 봤을 때 평균적으로 남자가 여자보다 낫다는 얘기가 가능하더라도 남자보다 훨씬 더 뛰어난 여자도 있을 수 있고, 여자보다 못한 남자도 많고….
김훈: 그건 그렇지.
참고: http://blog.aladdin.co.kr/tomek/tag/%EA%B9%80%EA%B7%9C%ED%95%AD (원문을 찾지 못해 기사가 인용된 블로그를 링크함)
이 경우 김훈의 행동을 '짐짓 악한 척 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고, 그것이 '위악'의 사전적 정의에 더욱 부합하는 것이겠지만, 여기서 김훈은 분명히 자신의 소신을 이야기하고 있다. 게다가 그는 양성간의 평등 문제나 인종간의 혐오 등 현대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대체로 수긍하리라고 기대되는 미덕에 대해 단호한 반대의 입장을 표한다. 이 경우에 '짐짓 그런 척' 한다고 말하는 것은 sonnet님이 주장하는 것처럼 '상대방의 입장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 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하지만 이 사례에서 드러나는 김훈의 발화 행위는 단순한 개인적 취향의 표현을 넘어선다. 그는 이러한 '위악적' 표현을 통해 대략 두 가지를 목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 '진보적 언론'이라는 것들이 거대담론에 매몰되어 헛소리만 하는 얼간이들이라고 선언하고 폭로한다. 둘째, 마찬가지 맥락에서, 상대방을 일종의 '위선자'나 '지사(지사정신 할 때의 그 지사)'로 몰아간다. 이 본문에 인용된 것 외의 다른 부분을 읽어보면 그 부분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특히 두 번째 기능이 중요하다. 김훈의 거침없는 '취존중 요구'로 인해, 한겨레나 시사저널 같은 당시의 진보적 매체들은 졸지에 남의 취향도 존중할 줄 모르고, 인종 사이의 자연스러운 혐오도 무시하며, 남자가 여자보다 월등하다는 명백한 사실을 부인하는 청맹과니가 되어버린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그는 '현실'이라는 거대담론을 끌어들임으로써 '이상 대 현실', '거대담론 대 인간의 삶' 같은 공허한 이분법을 도입하고 있다는 비판이 충분히 가능하지만, 이 방향으로 논의를 끌고 갈 경우, 앞서 인용한 바와 같이 "난 정돈된 생각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는 식의 답변이 돌아올 것이다.
이렇듯 '본질적'인 문제, '가치'와 관련된 문제에서 어느 정도 옳다고 잠정적인 합의가 이루어져 있지만 사실 그에 대한 불만이 팽배한 가치를 둘러싸고 '위악적'인 제스처는 힘을 발휘한다. 짐짓 악한 척까지 할 필요도 없다. 다들 당장은 불편하지만 옳기 때문에 참는 가치들에 대해 '솔직한 내 생각'을 말해버리면 그만이 기 때문이다. 가령 장애인을 위한 대중교통의 비효율 감수라던가(솔직히 다리가 안 좋으면 집에 있으면 되잖아, 안 그래?), 시각장애인을 위해 웹사이트에 플래시 도배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 같은 경우(보기도 좋고, 개발 현실이라는 게 있지...), 등등. 우리는 비슷한 예를 수없이 만들어낼 수 있다.
상식적으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 같지만 아직 공고한 상식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는 못한 도덕적 명제들을 개인적 취향을 명목삼아 부정하는 것, 그것이 가장 대표적인 '위악'의 행태이다. 일부러 싸가지 없는 척하는 신해철 같은 연예인, 저 소녀가 나를 좋아할까봐 괜히 가래침 뱉는 대학교 2학년 오빠 같은 경우도 있겠지만, '위악'이라는 단어가 사회적으로 쓰이는 방식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간과되고 있는 것 같아 한 마디 덧붙여 보았다.
2010-02-25
사형제 위헌 판결 실패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형제가 폐지되었으면 광화문 광장에서 만세삼창을 하려 했지만 다음으로 미뤄야 하겠다.
잠시 이글루스를 돌아다녀보니 위헌심판을 청구한 사람이 연쇄살인을 저지른 70대 어부라는 것을 보고 새삼스럽게 분개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바로 그런 반응을 우려하여 사형제 폐지 운동에 나선 단체들은 이 문제를 이슈화하지 않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던 것이다. '가장 최악의 인간이 받는 대우가 바로 우리 사회의 인권 수준'이라는 상식이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얼마나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할까.
작년 가을 무렵, 이 재판의 공판이 시작되기 전 나는 앰네스티 한국지부의 부탁을 받아 변호인에게 참고자료로 제공될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사형제 폐지 판결문 중 일부를 번역하였다. Ackermann이라는 이름의 판사는 사형제가 잔인하고 비인간적이며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필연적으로 자의적인 판결의 가능성을 회피할 수 없기 때문에 위헌으로 판결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폈다.
남아공은 영미 보통법(Common Law) 계열의 국가이므로 그는 미국의 판결을 줄곧 인용한다. 거기서 제기되는 문제점은 이런 것이다. 어떤 연쇄살인범이 있다고 하자. 그는 어떤 주에서 체포되었을 때에는 사형당할 확률이 높지만 (가령 텍사스), 어떤 주에서 체포되면 사형당해도 계속 살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 (예컨대 메사추세츠). 이 경우 법의 집행은 자의적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왜 동일한 처벌이 동일하지 않은 결과를 낳는다는 말인가? 이것이 법적 평등성에 부합하는가?
Ackermann 판사는 Callins v. Collins, cert. denied, 114 S. Ct. 1127, 127 L.Ed 435 (1994) 판결에서 Blackmun 판사가 제기한 소수의견을 인용한다. 여기서 재인용해보기로 한다.
정권 바뀔 때 무렵 사형수를 '일괄처리' 해버리는 한국의 기존 법 집행 관습 역시 '비일관적'이고 '비이성적'이긴 마찬가지이다. 중한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를 처벌하는 것과 정권이 바뀌고 다음 정권에 부담을 주지 말아야 하는 정치적 고려와는 아무 연관이 없기 때문이다. 사형은 사람이 권리를 가지고 있을 권리를 빼앗기 때문에 잔인하기도 하거니와, 누군가를 죽음 앞에 노출시킨 채 오랜 시간을 강제로 살아가게 한다는 점에서도 비인도적이다. (현재 언론에 의해, 자살을 기도하는 사형수들의 이야기가 적잖이 등장하고 있다. 다른 처벌에 비해 자살 기도자들의 숫자가 훨씬 높다는 것은 사형제도가 가진 '대기 기간'의 비인도적 속성을 잘 보여준다.) 인도주의적, 상식적 관점을 견지하는 한, 사형제도를 폐지해야 한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이렇게 물어볼 수 있겠다. 당신은 수십 명, 수백 명의 사람을 '정치적 이유'로 한꺼번에 사형 집행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하는가? 그 과정에서 어떤 사람은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살아남지 못하기도 하고 (인혁당 사건, 민족일보 조용수 등), 어떤 사람은 죽고 싶을 만큼 오래도록 국가에 의한 살해 위협에 시달리며 수 년, 혹은 수십 년을 보낸다. 설령 그가 뱃놀이 하러 온 청춘 남녀를 살해 강간한 흉악범이라 해도, 당신은 그에게 이런 비인간적인 고통을 요구할 권리가 없다. 사형제는 폐지되어야 한다.
잠시 이글루스를 돌아다녀보니 위헌심판을 청구한 사람이 연쇄살인을 저지른 70대 어부라는 것을 보고 새삼스럽게 분개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바로 그런 반응을 우려하여 사형제 폐지 운동에 나선 단체들은 이 문제를 이슈화하지 않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던 것이다. '가장 최악의 인간이 받는 대우가 바로 우리 사회의 인권 수준'이라는 상식이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얼마나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할까.
작년 가을 무렵, 이 재판의 공판이 시작되기 전 나는 앰네스티 한국지부의 부탁을 받아 변호인에게 참고자료로 제공될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사형제 폐지 판결문 중 일부를 번역하였다. Ackermann이라는 이름의 판사는 사형제가 잔인하고 비인간적이며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필연적으로 자의적인 판결의 가능성을 회피할 수 없기 때문에 위헌으로 판결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폈다.
남아공은 영미 보통법(Common Law) 계열의 국가이므로 그는 미국의 판결을 줄곧 인용한다. 거기서 제기되는 문제점은 이런 것이다. 어떤 연쇄살인범이 있다고 하자. 그는 어떤 주에서 체포되었을 때에는 사형당할 확률이 높지만 (가령 텍사스), 어떤 주에서 체포되면 사형당해도 계속 살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 (예컨대 메사추세츠). 이 경우 법의 집행은 자의적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왜 동일한 처벌이 동일하지 않은 결과를 낳는다는 말인가? 이것이 법적 평등성에 부합하는가?
Ackermann 판사는 Callins v. Collins, cert. denied, 114 S. Ct. 1127, 127 L.Ed 435 (1994) 판결에서 Blackmun 판사가 제기한 소수의견을 인용한다. 여기서 재인용해보기로 한다.
“경험에 따라 우리는, Furman V. Georgia 사건에서 보았듯이, 사형 행정에서 자의성과 불평등성을 없애고자 하는 헌법적 노력이, 근본적인 평등의 필수적 구성 요소의 함축으로 인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집행의 개별성이 그것이다. Lockett v. Ohio, 438 U.S. 586 (1978)판결을 보라.”
“형사소송법과 실질적 규제의 조합으로는 사형 처벌을 헌법적 결핍으로부터 지켜낼 수 없다는 것이 내게는 자명한 것으로 여겨진다. ‘사회 체제가 정확하고 신뢰할만하게 어떤 피고가 ‘죽을만 하다’고 결정할 수 있는가?’라는 기초적 질문에 대한 대답은 긍정적이기 어렵다.”
“공공 여론의 대부분이 원하고 있는 것처럼, 또한 헌법이 허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처벌로서의 사형은 당연히 사형제 자체가 일관되게 이성적으로 집행될 수 없는 한, 그것은 전체적으로 집행되지 말아야 한다. (강조는 저자)”
정권 바뀔 때 무렵 사형수를 '일괄처리' 해버리는 한국의 기존 법 집행 관습 역시 '비일관적'이고 '비이성적'이긴 마찬가지이다. 중한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를 처벌하는 것과 정권이 바뀌고 다음 정권에 부담을 주지 말아야 하는 정치적 고려와는 아무 연관이 없기 때문이다. 사형은 사람이 권리를 가지고 있을 권리를 빼앗기 때문에 잔인하기도 하거니와, 누군가를 죽음 앞에 노출시킨 채 오랜 시간을 강제로 살아가게 한다는 점에서도 비인도적이다. (현재 언론에 의해, 자살을 기도하는 사형수들의 이야기가 적잖이 등장하고 있다. 다른 처벌에 비해 자살 기도자들의 숫자가 훨씬 높다는 것은 사형제도가 가진 '대기 기간'의 비인도적 속성을 잘 보여준다.) 인도주의적, 상식적 관점을 견지하는 한, 사형제도를 폐지해야 한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이렇게 물어볼 수 있겠다. 당신은 수십 명, 수백 명의 사람을 '정치적 이유'로 한꺼번에 사형 집행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하는가? 그 과정에서 어떤 사람은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살아남지 못하기도 하고 (인혁당 사건, 민족일보 조용수 등), 어떤 사람은 죽고 싶을 만큼 오래도록 국가에 의한 살해 위협에 시달리며 수 년, 혹은 수십 년을 보낸다. 설령 그가 뱃놀이 하러 온 청춘 남녀를 살해 강간한 흉악범이라 해도, 당신은 그에게 이런 비인간적인 고통을 요구할 권리가 없다. 사형제는 폐지되어야 한다.
2010-02-21
단상
한국의 중산층들은 양심을 놓고 벌이는 가학-피학 놀이에 아직 익숙하지 못하다. '강남 3구에 도시 빈민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강남좌파'라는 기표를 다른 것으로 대체하자'는 당연한 결론이 도출되는 것만으로도 반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만 봐도 그렇다. 대신 그들은 국개론에 빠져들고, 노무현이라는 숭고한 대상을 향해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자신들의 팽창한
'올바른 정치 의식'을 위무하는 듯하다. 요컨대 아직까지는 지식인이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이 성립해 있지 않은 것이다. 아방가르드
예술 역시 그렇다. 이른바 '교양'이 아닌, 내면의 부재가 문제다.
2010-02-13
강남, 간지, 패션
강남좌파, 간지좌파, 패션좌파 따위의 어휘들은 명료한 개념적 정의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것들이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대상이 무엇인지는 확실하다. 대중들이 '좌파'라는 단어에 대해 가지고 있는, 만약 가지고 있다면, 통상적인 이미지와 상반되는
것들이다.
사유재산에 반대하고 계급차별 철폐만을 부르짖는 기존의 좌파와 달리, '강남좌파'는 경제적으로 윤택한 삶이 주는 풍요로움 자체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는다. 운동권들은 옷도 거지같이 입고 다니는 주제에 맨날 술이나 처마시면서 여자 후배들한테 '너는 세상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아니?' 같은 소리 하다가 빈축이나 사고 있으니, 그러지 말고 여자 후배들이 졸졸 따라다니는 '간지가이'로 좌파가 거듭나야 한다는 주장 역시 가능할 것이다. 그 간지라는 것이 패션으로 소화된다면 더 바랄 나위 없을 것이니, 패션좌파라는 논의까지 고구마 줄기, 혹은 리좀처럼 따라나온다.
'진보'라고 통칭될 수 있거나 그렇게 불리는 것을 꺼리지 않는 세력들이 현재 처한 교착상태를 해소하겠다는 시도는 언제나 바람직하고 옳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① 현재 실재로 존재하는 진보운동의 모습을 왜곡하는데 일조하거나, ② 대체 왜 좌파 어쩌구 하는 논의가 필요한지조차 혼란스럽게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면 그런 시도들은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나는 강남좌파건, 간지좌파건, 패션좌파건, 모두 잘못된 인식 하에서 출발한 헛된 노력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판단한다.
우선 간지좌파에 대해 살펴보자. 현재의 진보운동이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간지좌파론을 주장하는 이들의 주된 논거이다. 하지만 그 '매력'을 어떻게 얻을 것인가? 그것을 철저하게 개인적인 차원으로만 이해할 때 '패션좌파'라는, '운동권도 옷을 잘 입고 다니자'라는 식의 단선적인 주장이 나올 수밖에 없다. 칼럼니스트 허지웅은 '패션좌파'론을 비난하였지만, 논리의 흐름상 '간지좌파'론은 '패션좌파'론을 낳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 정치인 혹은 정치적 결사체가 내뿜는 '매력'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차원에서의 매력 내지 간지와 매우 다르다. 예컨대 노무현을 보자. 지금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를 '노간지'라고 부른다. 하지만 노무현의 '간지'가 과연 옷을 잘 입는 것에서 나오는가? 실제 벌어지는 일은 그와 정 반대 아닌가? 노무현은 딱 동네 아저씨같이 보이는 모습을 적극적으로 인터넷에 유포함으로써 자신의 '간지'를 획득하였다.
통상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노무현은 바바리 코트 휘날리며 헬리콥터를 타고 다니는 정몽준의 간지를 따라올 수 없다. 하지만 정치의 영역에서는 문제가 다르다. '멋지다', '잘생겼다', '외모가 끌린다'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정치인으로서의 매력의 영역이 따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게르만족의 건강한 육체를 운운하는 히틀러의 펑퍼짐한 엉덩이와 2:8 가르마를 떠올려보면, 정치의 영역 내에서 '매력' 혹은 '카리스마'라는 것이 얼마나 예측 불가능한 것인지 깨닫기란 어렵지 않을 것이다(막스 베버의 논의를 참조해도 좋다).
'간지좌파'론이 과연 이런 차원에서의 '정치적 간지'를 획득하자는 것인가? 지금까지 논의된 뉘앙스는 그런 고차원적인 논의와는 큰 관련이 없었고, 그저 '여태까지 좌파들은 너무 후졌다'는 식의 성토에서 나오는 안티테제에 머무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그렇다, 정치적 간지를 획득하자'라고 말해도 그것은 올바른 답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앞서 말했다시피, 정치적 영역에서 사람들의 실천을 이끌어내는 그런 '매력'은 누군가 혹은 특정 집단의 노력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의 운동권들은 왜 매력적이었는가? 그들의 패션 때문이 아니라 그들을 바라보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억압적인 체제 속에서 억압을 느끼는 대신 편안함을 느끼며 별 일 없이 산다. 하지만 당시에는 '군사독재'라는 명백한 악이 존재했기 때문에, 그 악에 저항하는 이들에게는 도덕적인 아우라가 덧씌워질 수 있었고 그것이 바로 당시 운동권들의 '간지'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운동권들의 말투가 갑자기 후져져서도 아니고, 그들의 패션 감각이 언제는 좋았다가 망가져서도 아니다. 운동권을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이 달라졌기 때문에, 이제 운동권은 후져보이는 것이다.
'간지좌파'가 되자는 말은 그래서 어처구니 없는 표현이다. 혼자만의 패션은 성립할 수 있다. 하지만 혼자만의 간지는 성립할 수 없다. 매력은 누군가가 나를 평가할 때 쓰는 용어지, 내가 나 스스로에게 부여할 수 있는 술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매력적인 남자'라고 말하고 다녀보라. 미친놈 소리 듣기 딱 좋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건 집단이건 매력적이라는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이 그를 그렇게 바라봐야만 한다. 지금 좌파가, 운동권이 매력을 상실한 것은 사람들의 욕망의 구조가 변화했기 때문이다.
이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탈각한 채 그저 '대중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는, 따라가고 싶은 진보운동'을 말하는 것은 공허한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 그 결과 '패션좌파' 같은 기형적 변태를 도출하게 되는데, 앞서 말했듯 두 논의는 모두 지나칠 정도로 피상적이다. 문제는 한국 사회 구성원들의 '욕망의 구조'가 변화했다는 것이다. 바로 그 욕망의 구조를 긍정하자는 것이 '강남좌파'론의 대전제이기 때문에, '간지좌파'론과 '강남좌파'론의 거리 역시 그리 멀지 않을 수밖에 없다.
소설가 백영옥은 『스타일』의 출간 후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패션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명품만 입고, 속물처럼 보이지만 그들에게도 진정성은 있다"며 "좋은 집안에서 혜택 받고 자란 소위 '강남 좌파'의 상반된 욕망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고재열 기자의 설명에 따르면 강남좌파란 "'파리지앵'이나 '뉴요커'처럼 진보 성향의, 보보스적인 부유층"이라고 한다. 애초에 동아일보에 의해 '강남좌파'라는 단어가 만들어질 때에는 '좌파'라는 단어가 으르렁말로, 즉 '강남에 살면서 골프에 미친 빨갱이 이해찬'이라는 뜻으로 쓰였다고 하나, 현재 인터넷에서 논의되는 것은 그와 정 반대로, 강북스러운 촌티를 내지 않고도 진보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것을 뜻하는 쪽으로 더 많이 이해되고 있다.
진보적인 삶의 방식을 택하는 것이 어떤 금욕주의나 반세속주의를 택하는 것으로 직결되지는 않는다. 좌파는 태초부터 반종교적이었고 세속적이었기 때문에, 세속적인 가치와 쾌락을 긍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를 움직이고 있는 욕망의 구조를 긍정하는 것, 그 칠층탑의 꼭대기에 위치하는 '강남'이라는 기표를 굳이 차용함으로써 진보진영과 '세상'과의 거리를 굳이 강조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미심쩍은 기동이 될 수밖에 없다. '강남'에 대한 욕망은 결국 '집값 상승'에 대한 욕망이며, 그것이 대한민국의 정치 구조를 좌우하고 있다는 것이 꾸준히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강남좌파처럼 우아해지자고? 차라리 '양심적인 지방토호'가 되자고 하는 건 어떨까?
본인의 출신지가 어디인지, 거주지가 어디인지 따위가 문제가 아니다. '강남좌파'라는 기표를 긍정하는 것은, '강남'이라는 단어가 한국어 내에서 차지하고 있는 특정한 고압적 지위를 받아들인다는 것이며, 결국 선거일에도 투표하지 못하는 50%의 무주택자를 도외시한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진정으로 세상이 바뀌기를 바란다면 그 세상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욕망이 바뀌기를 희망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바꾼다는 말은 적절하지 않다.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 표현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선거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늘림으로써 단지 '여당이냐 야당이냐'를 떠나서 더 폭넓은 정치적 선택 앞에 사람들을 마주서게 하는 것, 노동조합의 폭과 교섭력을 늘림으로써 파편화된 개인이 아닌 조직된 생산의 주체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 기본적인 정보 통신 접근권을 보장함으로써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사람이 없게끔 하는 것 등이 모두 그에 해당될 것이다. 손낙구의 책 『대한민국 정치사회 지도』가 말하는 바도 그것이다. 우리는 절반의 국민들만이 정치적 의사 표현을 하는 나라에 살고 있다. '강남좌파'라는 기표를 택할 때, 우리는 이미 나머지 절반에게 발언권을 줄 수 있는 길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정치적 담론의 영역은 전적으로 경험주의적 접근에 의해 다루어질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하지만 최소한의 드러난 진실만큼은 제대로 바라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강남에 사는 부유한, 우아하게 살지만 세상 문제를 걱정하는 대학생과 교수들은 한 줌도 안 된다. 그런 이들을 머리 속에 하나의 이상으로 놓고 '강남좌파'를 운운할 때, 정작 그곳에 사는 도시빈민들은 정치적 담론의 영역으로부터 배제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진보정당을 '내 집값 떨어뜨리겠다는 놈들'로 바라보는 그런 '강남스러운' 시선을 긍정한 채 '세상으로부터 사랑받고 사람들이 알아서 쫓아오는 진보운동'을 하겠다는 것은 공허하고 유치한 발상일 뿐이다. 좌파가 간지나지 않는 것은 그들의 외모 때문이 아니라, 세상이 현재 진보 계열의 담론을 긍정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해법은 무엇인가? 옷을 잘 입겠다고 고민할 시간에,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에서 출발한 힘있는 담론을 생성해내는 것이다. 손낙구의 책은 바로 그런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강남타령, 간지놀음, 패션쇼, 모두 이제 그만두고, 현실로 돌아가자.
사유재산에 반대하고 계급차별 철폐만을 부르짖는 기존의 좌파와 달리, '강남좌파'는 경제적으로 윤택한 삶이 주는 풍요로움 자체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는다. 운동권들은 옷도 거지같이 입고 다니는 주제에 맨날 술이나 처마시면서 여자 후배들한테 '너는 세상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아니?' 같은 소리 하다가 빈축이나 사고 있으니, 그러지 말고 여자 후배들이 졸졸 따라다니는 '간지가이'로 좌파가 거듭나야 한다는 주장 역시 가능할 것이다. 그 간지라는 것이 패션으로 소화된다면 더 바랄 나위 없을 것이니, 패션좌파라는 논의까지 고구마 줄기, 혹은 리좀처럼 따라나온다.
'진보'라고 통칭될 수 있거나 그렇게 불리는 것을 꺼리지 않는 세력들이 현재 처한 교착상태를 해소하겠다는 시도는 언제나 바람직하고 옳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① 현재 실재로 존재하는 진보운동의 모습을 왜곡하는데 일조하거나, ② 대체 왜 좌파 어쩌구 하는 논의가 필요한지조차 혼란스럽게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면 그런 시도들은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나는 강남좌파건, 간지좌파건, 패션좌파건, 모두 잘못된 인식 하에서 출발한 헛된 노력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판단한다.
우선 간지좌파에 대해 살펴보자. 현재의 진보운동이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간지좌파론을 주장하는 이들의 주된 논거이다. 하지만 그 '매력'을 어떻게 얻을 것인가? 그것을 철저하게 개인적인 차원으로만 이해할 때 '패션좌파'라는, '운동권도 옷을 잘 입고 다니자'라는 식의 단선적인 주장이 나올 수밖에 없다. 칼럼니스트 허지웅은 '패션좌파'론을 비난하였지만, 논리의 흐름상 '간지좌파'론은 '패션좌파'론을 낳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 정치인 혹은 정치적 결사체가 내뿜는 '매력'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차원에서의 매력 내지 간지와 매우 다르다. 예컨대 노무현을 보자. 지금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를 '노간지'라고 부른다. 하지만 노무현의 '간지'가 과연 옷을 잘 입는 것에서 나오는가? 실제 벌어지는 일은 그와 정 반대 아닌가? 노무현은 딱 동네 아저씨같이 보이는 모습을 적극적으로 인터넷에 유포함으로써 자신의 '간지'를 획득하였다.
통상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노무현은 바바리 코트 휘날리며 헬리콥터를 타고 다니는 정몽준의 간지를 따라올 수 없다. 하지만 정치의 영역에서는 문제가 다르다. '멋지다', '잘생겼다', '외모가 끌린다'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정치인으로서의 매력의 영역이 따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게르만족의 건강한 육체를 운운하는 히틀러의 펑퍼짐한 엉덩이와 2:8 가르마를 떠올려보면, 정치의 영역 내에서 '매력' 혹은 '카리스마'라는 것이 얼마나 예측 불가능한 것인지 깨닫기란 어렵지 않을 것이다(막스 베버의 논의를 참조해도 좋다).
'간지좌파'론이 과연 이런 차원에서의 '정치적 간지'를 획득하자는 것인가? 지금까지 논의된 뉘앙스는 그런 고차원적인 논의와는 큰 관련이 없었고, 그저 '여태까지 좌파들은 너무 후졌다'는 식의 성토에서 나오는 안티테제에 머무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그렇다, 정치적 간지를 획득하자'라고 말해도 그것은 올바른 답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앞서 말했다시피, 정치적 영역에서 사람들의 실천을 이끌어내는 그런 '매력'은 누군가 혹은 특정 집단의 노력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의 운동권들은 왜 매력적이었는가? 그들의 패션 때문이 아니라 그들을 바라보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억압적인 체제 속에서 억압을 느끼는 대신 편안함을 느끼며 별 일 없이 산다. 하지만 당시에는 '군사독재'라는 명백한 악이 존재했기 때문에, 그 악에 저항하는 이들에게는 도덕적인 아우라가 덧씌워질 수 있었고 그것이 바로 당시 운동권들의 '간지'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운동권들의 말투가 갑자기 후져져서도 아니고, 그들의 패션 감각이 언제는 좋았다가 망가져서도 아니다. 운동권을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이 달라졌기 때문에, 이제 운동권은 후져보이는 것이다.
'간지좌파'가 되자는 말은 그래서 어처구니 없는 표현이다. 혼자만의 패션은 성립할 수 있다. 하지만 혼자만의 간지는 성립할 수 없다. 매력은 누군가가 나를 평가할 때 쓰는 용어지, 내가 나 스스로에게 부여할 수 있는 술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매력적인 남자'라고 말하고 다녀보라. 미친놈 소리 듣기 딱 좋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건 집단이건 매력적이라는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이 그를 그렇게 바라봐야만 한다. 지금 좌파가, 운동권이 매력을 상실한 것은 사람들의 욕망의 구조가 변화했기 때문이다.
이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탈각한 채 그저 '대중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는, 따라가고 싶은 진보운동'을 말하는 것은 공허한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 그 결과 '패션좌파' 같은 기형적 변태를 도출하게 되는데, 앞서 말했듯 두 논의는 모두 지나칠 정도로 피상적이다. 문제는 한국 사회 구성원들의 '욕망의 구조'가 변화했다는 것이다. 바로 그 욕망의 구조를 긍정하자는 것이 '강남좌파'론의 대전제이기 때문에, '간지좌파'론과 '강남좌파'론의 거리 역시 그리 멀지 않을 수밖에 없다.
소설가 백영옥은 『스타일』의 출간 후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패션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명품만 입고, 속물처럼 보이지만 그들에게도 진정성은 있다"며 "좋은 집안에서 혜택 받고 자란 소위 '강남 좌파'의 상반된 욕망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고재열 기자의 설명에 따르면 강남좌파란 "'파리지앵'이나 '뉴요커'처럼 진보 성향의, 보보스적인 부유층"이라고 한다. 애초에 동아일보에 의해 '강남좌파'라는 단어가 만들어질 때에는 '좌파'라는 단어가 으르렁말로, 즉 '강남에 살면서 골프에 미친 빨갱이 이해찬'이라는 뜻으로 쓰였다고 하나, 현재 인터넷에서 논의되는 것은 그와 정 반대로, 강북스러운 촌티를 내지 않고도 진보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것을 뜻하는 쪽으로 더 많이 이해되고 있다.
진보적인 삶의 방식을 택하는 것이 어떤 금욕주의나 반세속주의를 택하는 것으로 직결되지는 않는다. 좌파는 태초부터 반종교적이었고 세속적이었기 때문에, 세속적인 가치와 쾌락을 긍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를 움직이고 있는 욕망의 구조를 긍정하는 것, 그 칠층탑의 꼭대기에 위치하는 '강남'이라는 기표를 굳이 차용함으로써 진보진영과 '세상'과의 거리를 굳이 강조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미심쩍은 기동이 될 수밖에 없다. '강남'에 대한 욕망은 결국 '집값 상승'에 대한 욕망이며, 그것이 대한민국의 정치 구조를 좌우하고 있다는 것이 꾸준히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강남좌파처럼 우아해지자고? 차라리 '양심적인 지방토호'가 되자고 하는 건 어떨까?
본인의 출신지가 어디인지, 거주지가 어디인지 따위가 문제가 아니다. '강남좌파'라는 기표를 긍정하는 것은, '강남'이라는 단어가 한국어 내에서 차지하고 있는 특정한 고압적 지위를 받아들인다는 것이며, 결국 선거일에도 투표하지 못하는 50%의 무주택자를 도외시한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진정으로 세상이 바뀌기를 바란다면 그 세상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욕망이 바뀌기를 희망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바꾼다는 말은 적절하지 않다. 지금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 표현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선거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늘림으로써 단지 '여당이냐 야당이냐'를 떠나서 더 폭넓은 정치적 선택 앞에 사람들을 마주서게 하는 것, 노동조합의 폭과 교섭력을 늘림으로써 파편화된 개인이 아닌 조직된 생산의 주체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 기본적인 정보 통신 접근권을 보장함으로써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사람이 없게끔 하는 것 등이 모두 그에 해당될 것이다. 손낙구의 책 『대한민국 정치사회 지도』가 말하는 바도 그것이다. 우리는 절반의 국민들만이 정치적 의사 표현을 하는 나라에 살고 있다. '강남좌파'라는 기표를 택할 때, 우리는 이미 나머지 절반에게 발언권을 줄 수 있는 길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정치적 담론의 영역은 전적으로 경험주의적 접근에 의해 다루어질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하지만 최소한의 드러난 진실만큼은 제대로 바라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강남에 사는 부유한, 우아하게 살지만 세상 문제를 걱정하는 대학생과 교수들은 한 줌도 안 된다. 그런 이들을 머리 속에 하나의 이상으로 놓고 '강남좌파'를 운운할 때, 정작 그곳에 사는 도시빈민들은 정치적 담론의 영역으로부터 배제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진보정당을 '내 집값 떨어뜨리겠다는 놈들'로 바라보는 그런 '강남스러운' 시선을 긍정한 채 '세상으로부터 사랑받고 사람들이 알아서 쫓아오는 진보운동'을 하겠다는 것은 공허하고 유치한 발상일 뿐이다. 좌파가 간지나지 않는 것은 그들의 외모 때문이 아니라, 세상이 현재 진보 계열의 담론을 긍정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해법은 무엇인가? 옷을 잘 입겠다고 고민할 시간에,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에서 출발한 힘있는 담론을 생성해내는 것이다. 손낙구의 책은 바로 그런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강남타령, 간지놀음, 패션쇼, 모두 이제 그만두고, 현실로 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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