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1-05

[2030콘서트] ‘박근혜 탄핵’은 없지만

문재인의 대선 패배는 선거 부정 때문이 아니다. 그의 열렬한 지지자라 할지라도, 국정원과 기타 조직의 선거 개입이 없었다면 문재인이 이겼을 것이라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17대 대선에 비해 무려 12%나 솟구친 75%의 투표율을 보며 야권 지지자들은 환호성을 내질렀지만, 그들 중 거의 대부분은 개표방송이 시작되기 전까지, 그것이 ‘잠자던 대학생들의 야권 표’가 아닌 ‘정치에 소외되어 있던 50대 이상의 여당 표’임을 눈치채지도 못하고 있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는 기업이라는 단 하나의 조직만을 남겨둔 채 그 나머지를 급속히 파괴했다. 우리는 기업 속에서 사장님과 직원이 되고, 기업 밖에서 소비자와 유권자가 될 뿐이다. 이렇게 불안에 빠진 파편화된 개인이 늘어난다는 것은 곧 사회가 우경화된다는 말과 같다.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그리고 실용정부까지 한국의 집권 세력은 새로운 경제적 질서에 부합할 만한 새로운 사회적 구성 원리를 제시하지 않은 채, 그저 경제성장률을 높이고 유지하는 일에만 골몰해왔던 것이다. 18대 대선의 결과는 바로 그 일관된 정책 방향이 낳은 당연한 업보에 가깝다.

그럼에도 날이 갈수록 속속들이 밝혀지고 있는 권력기관들의 선거개입은 박근혜 정부의 정통성을 심각하게 망가뜨리고 있다. 경찰과 검찰의 수사가 진행되자 국정원 직원들은 수백여개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아이디와 게시물을 삭제하는 식으로 증거를 은폐했다. 그들이 조직적으로 온라인상에서 여론을 ‘형성’하려 했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지만, 당사자들은 최대한 꼬리를 자르고 말을 바꾸고 증거를 없애가며, 국민들의 관심이 멀어지기만을 기다리는 듯하다. 게다가 이 모든 난국이 진행되는 가운데 박근혜 대통령은 끝없는 해외 순방길에서 돌아올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현재 야권은, 2004년의 야당이던 한나라당이 그랬듯이, 현직 대통령인 박근혜를 탄핵소추할 수 있을까? 안타깝지만 대답은 부정적이다. 민주당은 박근혜를 탄핵해 그 권한을 정지시키고, 현재의 대선개입 문제를 검찰과 법원이 아니라 헌법재판소가 판단하도록 사태를 이끌어갈 수 없다. 이것은 비단 그들이 무능해서뿐만이 아니라, 대통령을 탄핵소추할 수 있는 요건이 충족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2004년의 상황으로 돌아가보자. 당시 대통령 노무현은 그해 있을 총선을 앞두고 “개헌저지선까지 무너지면 그 뒤에 어떤 일이 생길지는 나도 정말 말씀드릴 수가 없다”거나, “국민들이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을 압도적으로 지지해줄 것을 기대한다”는 등, 선거법 위반의 혐의가 있는 발언들을 본인의 입으로 직접 내놓았다. 바로 그 발언들을 두고 선거관리위원회는 노무현이 선거법을 위반했다는 판정을 내놓았고, 그로 인해 대통령 탄핵소추가 가능해졌다.

반면 지금은 그와 많이 다르다. 마치 전두환이 광주 시민들을 향한 발포 명령을 직접 내렸는지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박근혜가 국정원 및 기타 조직을 이용해 선거에 개입하라는 명령을 직접 내렸는지 여부를 알 수는 없다. 국가기관의 조직적 개입이 있었기 때문에, 가장 높은 자리에서 혜택을 받을 사람이 직접 그 과정에 참여했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일은 묘연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누군가 박근혜 캠프를 불법적으로 도청하고 있었다면 모를까, 박근혜 본인이 그런 식으로 선거법을 어겼다고 증명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박근혜를 탄핵할 수 없다. 그가 직접적으로 선거에 불법 개입했음을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민사회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아직도 진행 중인 국정원 여론 개입 사건에 대한 확실한 입장 표명을 요구하고, 또 책임을 물을 필요가 있다. 문제는 앞서 말했듯이 바로 그 ‘시민사회’ 자체가 거의 형해화되었다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마땅한 정치적 책임을 묻고자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공권력을 행사하는 조직과 ‘실세’들이 알아서 충성하고 있는 가운데, 해외 순방이나 다니는 대통령을 어떻게 다시 정치의 현장으로 불러낼 것인가. 당장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형해화되어 가는 ‘시민사회’를 재구성해, 정치가 단지 이권 다툼이 아닌 민주적 절차와 사회적 당위의 문제로 돌아오게 하지 못한다면, 장기적으로도 그 답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입력 : 2013.11.05 22:2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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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15

[2030콘서트]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


미국 연방정부가 이른바 ‘셧다운’에 돌입한 것은 지난 1일의 일이다. 이미 충분히 국내에도 보도되고 또 소개된 사건이지만 다시 한번 그 전모를 살펴보자. 오바마 대통령이 도입한 미국 건강보험 개혁안인 이른바 ‘오바마케어’(ACA)를 두고 공화당 강경파가 하원에서 반발했다. 상원은 민주당, 하원은 공화당이 우세한 탓에 하원에서 요구하는 법안 수정을 상원은 계속 거절했고, 대통령 또한 ‘오바마케어’를 무위로 돌리기 위한 공화당의 요구를 받아주지 않았다. 공화당 강경파는 버티기 끝에 연방정부의 예산안을 10월1일까지도 통과시키지 않았고, 그리하여 미 연방정부 소속 공무원들은 본의 아닌 무급휴가에 돌입하게 된 것이다.

의회와 정부가 첨예하게 대립한 결과 정부가 제 기능을 못하게 된 이 사건을 두고 ‘민주주의의 실패’ 등을 운운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이는 사태를 완전히 반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미 연방정부가 개점휴업 상태에 돌입하게 된 것은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망가져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너무 잘 작동해 벌어지고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벤저민 프랭클린이 영국 의회에서 웅변했던 원칙을 떠올려보자. ‘대표 없는 곳에 세금 또한 없다.’ 정답이다. 국민의 대표가 모여서 합의하에 세금을 걷고, 그것을 행정부에 넘기는 역할을 하는 곳이 바로 입법부다. 국회는 단지 정부가 하는 일에 반대하거나 토를 잡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집단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야말로 정부를 향해 돈자루를 쥐고, 자신들이 만든 법에 따라 이 나라를 통치할 것을 행정부에 요구할 수 있는 국민의 대표다. 대표 없는 곳에는 세금도 없고, 세금 없는 곳에는 예산도 없는 것이다.

나는 지금 미 공화당 강경파를 두둔하거나 옹호하고 있지 않다. 다만, 정부가 문을 닫고 국립공원부터 백신 개발까지 온갖 중요한 연방정부의 사업들이 멈춰버렸음에도 삼권분립과 민주주의, 궁극적으로는 법치주의의 원리를 곧이곧대로 행하고 있는 미국식 정치에 어떤 의미에서 감탄하고 있을 따름이다. 예산안이 통과되지 못하면 연방정부는 그들이 고용한 사람들에게 월급을 줄 수 없다. 월급을 줄 수 없으니 당연히 연방정부는 피고용인들을 일터로 억지로 불러내지도 못한다.

행정부와 입법부의 구분이 희미하고 그저 ‘나랏일’로 뭉뚱그리는 한국식 정서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당장 국정이 마비되게 생겼는데 월급 좀 밀리는 게 대수인가? 하지만 법치주의의 원리를 놓고 보면, 월급을 주지 못하는 정부는 공무원들에게 일을 시키지 않는 것이 옳다. 공무원들 역시 월급 받는 만큼 일하기로 계약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공화당 강경파는 무모한 정치적 도박을 저질러가며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있지만, 그로 인해 우리는 이곳과 저곳의 문화적, 정서적, 정치적 차이를 생생하게 목격하고 있다.

그렇다.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 이것은 로마인들이 자신들의 제국을 운영하면서 만든 그 옛날의 법전에도 명시되어 있는, 인간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원칙이다. 팍타 순트 세르반다(Pacta Sunt Servanda).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근본적인 약속이 없다면, 법치주의와 민주주의는 모두 공허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게 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의 경우를 살펴보자. 지금도 정부는 법치주의를 내세워 힘 없는 사람들에게 법과 질서를 지키라고 강요하지만, 과연 자신들 스스로는 약속을 지키는가? 힘 없는 서민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행정부와 관료들은 국민의 대표인 국회와의 약속마저도 헌신짝처럼 여기기 일쑤다. 이번 국정감사에 대해 기대감을 품지 못하는 것은 그것 때문이다.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원칙이 충분히 공유되지 않는 사회이므로, ‘높으신 분’들은 기억이 안 난다고, 아니면 그땐 어쩔 수 없었다는 식으로 둘러대면 그만인 것이다.

한국의 법치주의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하향식 법치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국민들은 정부나 국회의원, 혹은 대통령의 공약 뒤집기에 그저 손가락질이나 할 수밖에 없지만, 국가는 국민들이 ‘폴리스라인’ 같은 사소한 약속을 어기면 가혹한 응징을 한다. 우리 스스로가 법치주의와 민주주의의 원리에 대해 꾸준히 성찰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법치주의와 민주주의의 근간인 ‘팍타 순트 세르반다’가 모두의 상식이 되어야만, 우리도 그들을 ‘셧다운’시킬 수 있다.


입력 : 2013.10.15 21:2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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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24

[2030콘서트] 정치를 돌려달라

오랜만에 모여 앉은 가족과 친척들은 종종 싸우기 마련이었다. 예전에는 명절날 만난 친척들끼리 정치 얘기로 목청을 높이다 경찰서 신세를 지거나 심지어 강력사건을 저지르기도 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언론들은 선동적인 기사와 헤드라인으로 불을 붙였다.

가령 2000년 추석, 이제는 전설처럼 입에 오르내리는 1면 헤드라인을 다시 떠올려보자. “추석 분위기가 썰렁하다. 전국 어디를 둘러봐도 마찬가지다”라는 저 유명한 문구로 시작되는, ‘대구, 부산엔 추석이 없다’(동아일보, 2000년 9월9일)가 바로 그것이다.

저렇게 선전과 선동이 담긴 신문을 읽고 고향집에 돌아가면 자신에게 동의하지 않는 ‘가족’이 앉아 있다. 싸우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특히 인터넷이 기존 언론의 역할을 넘겨받기 시작한 2000년대 초부터는 사정이 더욱 복잡해졌다. ‘아버지, 이걸 좀 보시라고요!’라며 신문을 집어던지듯이, 당시에는 크고 무거웠던 컴퓨터와 모니터를 내던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우리의 명절은 그런 것이었다. ‘민심’이 모이는 날, 서로 얼굴을 붉히기도 하는 날.

필자는 지역색이 강하지 않은 집안 출신으로, 사실 이렇게 화끈한 명절 풍경은 건너 들은 이야기를 조합한 것이지 직접 겪은 일이 아니다. 그러니 만약 내가 이런 ‘정치적 명절’을 무슨 미풍양속처럼 회상한다면, 그것은 마치 영남 출신의 남성인 작가 이문열씨가 시집살이하다 죽은 여성의 입을 빌려 페미니즘을 비판한 소설 <선택>을 쓴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는 행동일 터이다. 하지만 이 정도의 말은 할 수 있고,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명절이 조용해지면서 한국 정치도 그 역동성을 상실했다고.

정치가 ‘시끄러웠던’ 시절로 돌아가보자. 당시에는 이른바 ‘지역감정’을 디디고 있긴 했지만 아무튼 개인의 정체성과 맞닿아 있으며 그 실체를 유지하고 있는 정당이 있었다. 그리고 그 정당을 대표할 만한 인물들이 존재했고, 사회적 현안에 대한 그들 각자의 의견과 입장의 차이가 존재했다. 물론 ‘반김대중’ ‘반노무현’ ‘반이회창’ ‘반한나라당’ 등 온갖 ‘정서’가 그 밑바탕에 깔려 있긴 했지만, 이 정당이 아닌 저 정당에 투표하는 것은 어떤 식으로건 실질적인 의미를 갖는 행동이었다.

오늘날의 모습은 그와 사뭇 다르다. 모든 정당이 입을 모아 중산층과 서민의 세 부담은 늘리지 않으면서 보편적 복지를 하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지난 10년간의 ‘민주 정권’이 자기 명의의 아파트를 서울과 수도권 일대에 갖고 있지 않은 모든 이에게 뼈저리게 가르쳐준 바, 특히 ‘서민’들이라면 거대 여당 대신 거대 야당을 찍어야 할 뾰족한 이유가 없다. 그때나 지금이나 전교조는 마녀사냥을 당하고 있고, 대기업 노동자들에게는 귀족노조라는 야유가 쏟아지지만 늘어가는 비정규직 비율을 줄이기 위한 근본적 대책은 그 누구도 제시하지 않는다. ‘경제’가 일종의 숙명론처럼 여겨지고 있는 판에 ‘정치’의 목소리는 작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치는 조용할 수가 없다. 정치는 시끄러울 때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회 구성원의 이해관계를 조율하고 공동의 목표를 합의해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10여년간, 특히 당시의 여권이며 오늘날의 야권을 구성하는 그들은 정반대의 길을 걸어왔다. 선거에서 질까봐 허둥지둥 단일화를 하고, 토론과 합의가 아닌 여론조사에 따라 후보를 정하고, 그나마도 부정 경선 및 결과에 대한 불복으로 얼룩져온 것이 최근의 정치다.

오늘날의 야권은 손님들이 짜장면과 짬뽕을 두고 싸운다고, 모든 메뉴를 짬짜면으로 통일시켜 버린 중국집처럼 보인다. 정치는 선택이며 갈등이고, 그 끝에 얻어지는 화해와 평화다.

그러나 여당과 야당의 간극보다 야당 내 세력들의 차이가 오히려 도드라져 보이는 지금, 그 복잡한 내부 사정과 갈등으로 인해 정치는 국민들이 아닌 직업 정치인들만의 것이 되어 버렸다. 국정원의 대선 개입 의혹부터 조선일보의 검찰총장 몰아내기까지, 이 수많은 정치적 의제가 야권 내의 갈등으로 인해 제대로 다루어지지 못했고 그리하여 추석 차례상을 시끌벅적하게 만들지 못했다면, 차라리 시끄러운 파열음을 내며 갈라서는 편이 낫다. 이제, 국민들에게 정치를 돌려달라는 말이다.


입력 : 2013.09.24 21:20:33 수정 : 2013.09.24 23: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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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20

[2030콘서트] 촛불시위는 왜 취미생활이 되었나

문화평론가 허지웅씨가 “국정원 이슈는 문제지만 시국선언은 오버라고 생각”한다고 트위터에 글을 쓴 것은 8월18일 오후 9시24분의 일이었다. 그는 “지금의 촛불도 취미활동 이상의 충분한 당위를 찾을 수 없다”고 따끔한 비판을 내놓았다. 이 발언은 사건을 보도하는 게 아니라 보도를 사건하는 언론들에 의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됐다.

여기서 우리는 저 발언 속에 몇 가지 전제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국정원 이슈가 큰 문제다. 둘째, 그러나 그것을 부각시키기 위해 시국선언이나 촛불시위 등을 하는 것은 전략적으로 타당하지 않다. 셋째, 촛불시위는 한낱 취미생활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며, 아니어야 한다. ‘촛불이 취미냐’라는 말이 유독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을 놓고 볼 때, 특히 세 번째 전제에 대해서는 허지웅씨와 그의 비판자들이 모두 확고한 동의를 하고 있는 듯하다.

일단 국정원 이슈가 큰 문제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대체 왜 국가 정보 기관이 일간베스트나 오늘의유머 같은 웹사이트에서 전직 대통령을 희화화하는 리플이나 달고 있어야 하는지, 그것이 대북 심리전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미 심각한 문제다. 우리가 낸 세금이 특정 웹 서버의 저장 용량을 낭비하는 일에 소진되고 있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그것이 대선 개입을 위한 정치공작이었다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왜 사태가 진척되지 않고 있을까? 대학생, 대학 교수, 기타 다양한 집단 및 개인들이 시국선언을 내놓고 있으며, 특히 최근의 폭염을 뚫고 촛불시위가 열리고 있다. 신영복 교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는 감방의 여름이 겨울보다 훨씬 힘들다는 일화가 등장한다. 겨울에는 추우니까 다닥다닥 붙어있어도 괜찮고 오히려 서로 의지가 되지만, 여름에는 더위 때문에 짜증을 내고 다투기 일쑤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촛불을 켠 사람들이 좁은 간격으로 모여 앉는 경우를 상상해보자. 지금 벌어지는 촛불시위는 바로 그런 극기훈련의 현장이다.

문제는 그것이 단지 취미생활일 리가 없으며, 그렇게 끝나서도 안 된다는 데 있다. 지금까지 밝혀진 것만 놓고 보더라도 국정원 사건은 국가적 스캔들이다. 그런데 왜, 선량한 시민들이 이 무더운 여름날 더불어 숲이 되어 촛불까지 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태가 전혀 진전되지 않는가?

생각해보자. 어차피 새누리당과 국정원은 촛불시위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 경찰 버스로 막아놓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민주당 또한, 실은 촛불시위에 나온 사람들의 목소리를 반영하기 위해 고군분투할 이유가 없다. 촛불들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민주당이 그들을 아무리 실망시킨다 한들, 이 더위를 뚫고 촛불시위를 하는 사람들은 결국 민주당을 찍을 것이다.

손 안에 들어온 새에게는 모이를 주지 않는다고 누가 말했던가. 몇 차례에 걸친 정치공학적 선거 놀음을 통해 체계적으로 진보정당이 압살된 지금, 현재의 정치적 교착 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민주당이, 적극적으로 내부 갈등을 정리하고, 대안적 행보를 보여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어차피 ‘촛불 시민’들은 ‘도로 민주당’ 할 텐데.

야당이 야성을 잃은 이유는 배가 부르기 때문이다. 그들이 배가 부른 것은 ‘밥그릇’을 뺏길 염려가 없기 때문이다. 촛불시위가 취미활동이냐는 말 자체에 분노하지 말고, 그것이 한낱 취미생활 이상의 효과를 거두지 못하게 하는 진짜 원인이 어디 있는지 살펴보시라. 원세훈은 국정조사 자체를 우롱하고, 국정원은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은 공개해도 직원 얼굴은 일급비밀이라고 우긴다. 이런 상황에서 어벙한 얼굴로 끌려다니며 ‘촛불 시민 여러분, 힘을 내주세요’라고 말하는 그들이야말로 촛불시위를 ‘취미생활’로 전락시키고 있다.


입력 : 2013.08.20 21:2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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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30

[2030콘서트] 젊은이들 정치가 시작되려면

이른바 ‘20대 담론’이 지난 몇 년간 유행했지만 수많은 논의들이 냉소와 한탄으로 끝난 이유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자. 2차 세계대전 이후 서방세계 및 동아시아의 경제가 급속도로 성장하면서, 급진적 무장투쟁을 통해 체제의 붕괴를 꾀하는 방법론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한국은 1987년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고 헌법 개정을 이루어내면서 이후 안정적으로 절차적 민주주의를 유지하고 있다. 젊은이들이 세상을 바꾸거나 적어도 유의미한 영향을 주려면 결국은 정치적으로 결집해야 한다.

군 입대 전 직장을 그만두고 현재 자유기고가 겸 번역가로 살아가고 있는 필자는 국민건강보험공단에 의해 지역가입자로 분류되어 있다. 혼자 살고 있으므로 부양가족은 없으며, 현재 월세로 살고 있는 집의 세대주이기도 하다. 물론 어찌어찌 생활은 하고 있으나, 알량한 자존심을 버리고 객관적으로 스스로를 바라본다면, 백수에 가까운 프리랜서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 유사 백수의 모습은, 이른바 ‘번듯한 직장’을 구하지 않거나 못한 상황에서, 자신의 부모와 떨어져 살며, 거주지에 제대로 주민등록을 해서 해당 지역의 투표권을 가진 젊은이의 한 표본이기도 하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은 바로 나와 같은 이런 인원들을 지역가입자로 분류하는데, 그러면 통상적으로 같은 월수입을 얻는 직장인보다 훨씬 많은 건강보험료가 부과된다.

젊은이가 스스로 세대주가 되고 해당 지역의 투표권을 가지고 나면, 어깨 위에 얹히는 짐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다. 방금 볼멘소리를 하긴 했지만 나는 그 책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편이다. 첫 주민세를 낼 때 매우 큰 뿌듯함을 느꼈다. 하지만 지자체 및 관공서에서 날아오는 몇 종의 고지서를 읽어보고 나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1인 가구를 염두에 두지 않고 설계되어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호주제는 폐지됐지만 아직도 우리나라는 ‘사람’이 아니라 ‘가구’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지역가입자 문제를 다시 살펴보자. 검색 사이트에서 ‘대학가 원룸 시세’를 입력하면 대체로 보증금 1000만원에 월세 50만원이 표준가로 나온다. 건강보험공단의 보험료 산출 방식에 따르면, 가령 보증금 1000만원에 월세 50만원짜리 원룸에 사는 사람이나, 구하기도 힘든 3000만원짜리 전세에 사는 사람이나, 같은 금액의 임대차계약을 맺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며 따라서 해당 항목에서 동급 판정을 받는다.

사회에 첫발을 들여놓은 젊은이의 입장에서 보지 않더라도, 전자와 후자는 하늘과 땅 차이다. 그리고 필자처럼 미혼인 데다 아직 만 35세가 되지 않은 사람은 정부에서 보증하는 전세자금대출을 받을 수도 없다. ‘사람’이 아니라 ‘가구’가 표준 단위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자신이 생활하는 지역의 유권자가 되는 것을 포기하고, 단지 소비자에 머물게 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들이 바로 ‘부재자’, 즉 있지만 없는 자들이다.

서울, 그 중에서도 특정 지역은 젊은이들의 비율이 다른 곳에 비해 훨씬 높은 편이다. 왜 그런 곳마저도 ‘88만원 세대’에서 말하는 ‘바리케이드’ 노릇을 하지 못할까. 그 젊은이들 중 상당수가 앞서 나열한 것과 대동소이한 이유로 인해 자신의 실제 거주지 및 활동 반경이 아닌 어딘가의 투표권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지역에 기반한 젊은 세대의 정치가 스스로 싹틀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진다.

대학가에는 젊은 주민이 아니라 ‘부재자’들이 모여 있을 뿐이다. 작은 단위의 지자체 선거는 그들에게 의미가 없다. 큰 선거에서는 그저 대의명분에 휘둘려 동원의 대상으로 전락할 뿐이다. 특정 지역을 자신의 표밭으로 삼아 가장 낮은 단위부터 한 단계씩 성장하는 정치인이 나올 수 있는 토양 자체가 ‘부재’하는 상황이다. 이 근본적이고도 제도적인 한계를 고민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미래를 책임질 젊은이들의 정치가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입력 : 2013.07.30 21:3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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