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4-20

[별별시선]‘침몰 원인’과 ‘참사 원인’은 구분해야

[별별시선]‘침몰 원인’과 ‘참사 원인’은 구분해야


4월20일 새벽, 현재까지 밝혀진 사실관계들을 놓고 이야기해보자. 세월호 선장 이모씨를 포함해, 세월호 침몰이 시작된 직후 탈출한 선원들은, 탑승객 구조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의혹을 부정하기 어려워 보인다. 특히 비난의 화살은 선장에게 집중적으로 쏠리고 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법에 따라 엄정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구조 의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다면 세월호 선장 및 승무원들의 잘못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안내방송을 듣고 선실에서 구조를 기다리던 학생들을 생각하면 나 역시 분노가 치밀어오르고 눈물이 핑 돈다. 어쩌면 그들의 무책임한 행동으로 인해 적시에 구조 작업이 진행되지 못했고, 지금의 막대한 인명 피해가 빚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일부 언론 역시 세월호 선장 및 귀환 선원들의 책임과 처벌에 집중하는 듯하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사고 수습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현장을 떠난 선원들, 특히 선장의 책임은 그 어떤 수사학을 동원한다 해도 변론하기 어렵다. 하지만 세월호 선장에게 돌을 던지는 여론에 동참하기 전에 한 가지 사실을 먼저 떠올려보자.

세월호 선장과 선원들에게 구조 의무가 발생한 이유는 배가 침몰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직 세월호의 정확한 침몰 원인을 모른다. 이대로라면 제2, 제3의 세월호 침몰사건이 또 발생하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실종자, 사망자, 구조자, 그리고 우리 모두를 위해, 우리는 세월호가 침몰한 이유를 확인해야만 한다.

사회학자 찰스 페로는 <무엇이 재앙을 만드는가?>(원제: Normal Accident)에서, 일상적이고 사소하지만 평범하기 짝이 없는 실수와 오류가 몇 개 이상 중첩될 경우 대형사고가 발생한다고 분석한 바 있다. 이른바 ‘정상 사고’ 이론이다. 그에 따라 세월호 침몰을 검토해보자.

세월호는 일본에서 18년간 운항한 후 국내에 수입되었다. 한편 2009년 해운법 시행규칙이 변경되어 여객선 선령 제한이 20년에서 30년으로 늘어났고, 그래서 2014년에도 세월호는 퇴역하지 않고 인천-제주 간 승객 및 화물선 노릇을 할 수 있었다. 세월호는 일본에서 한국으로 넘어온 후 선실을 증축하였는데, 그로 인해 배의 무게중심이 높아졌다. JTBC의 보도에 따르면 세월호의 선원들은 배의 균형을 잡아주는 평형수 탱크에 문제가 있었음을 지적해왔다. 또한 대형 로로선이 균형을 잡는 데 도움을 주는 ‘스테빌라이저’ 역시 작년부터 고장난 상태였다는 증언이 있다.

세월호는 로로선이었다. 로로선이란 자동차들이 자가 동력으로 승·하선할 수 있도록 설계된 선박이다. 흘수선 가까운 곳에 출입구가 마련되며, 그에 따라 다른 여객선에 비해 침수 가능성이 더 높다. 배가 흔들릴 경우 차량이라는, 본래부터 이동을 목적으로 만든 대형 화물이 쏠릴 가능성 또한 커지는 것이다. 게다가 세월호 선원 중에는 탑재된 컨테이너가 쇠사슬이 아닌 밧줄로 묶여 있었음을 증언한 사람이 있고, 승객 가운데 일부는 컨테이너가 무너졌다는 사실을 밝히기도 했다.

사고 발생 전날, 짙은 안개 속에 예정보다 2시간 늦게 인천항에서 출항했다. 도착 시간을 맞추기 위해서였는지 평소에는 택하지 않는 다도해로 들어섰다. 그중에서도 물살이 빠른 맹골수로를 운항할 때에는 항해 순번에 따라 해당 해협에서 항해 경험이 없는 20대의 3등 항해사가 키를 잡았다. 세월호는, 취객처럼 비틀거렸고, 바다 위에 쓰러졌다.

세월호가 침몰하게 된 원인을 분석해보면, 이 선장의 잘못은, 컨테이너를 밧줄로 묶은 해운사 직원이나, 스테빌라이저 수리를 거부한 선박 회사의 그것과 같이, 그저 ‘사소한’ 것일지도 모른다. 일상화된 잘못이 쌓여 큰 재앙을 낳은 또 하나의 사례일지도 모른다. 그의 도주 행위에 대해 면죄부를 주자는 말이 아니다. ‘침몰 원인’과 ‘참사 원인’을 구분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은 선장에 대한 처벌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배가 침몰하게 된 ‘사소한’ 원인과 잘못을 냉정하게 조사하고 원인을 규명하며, 매뉴얼을 준수하는 위험 관리 체계를 갖추어야 한다. 그렇지 않는 한, 우리는 ‘사고’가 ‘정상’인 사회로부터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4202100295&code=990100&s_code=ao122

2014-04-08

[북리뷰]주변 사물들 요모조모 뜯어보기

[북리뷰]주변 사물들 요모조모 뜯어보기


사물 유람
현시원 지음·현실문화·1만6500원

<사물 유람>의 저자 현시원씨는 현직 독립 큐레이터다. 독립 큐레이터란 기존의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소속되지 않은 채 작가들을 만나고 작품을 선별하여 관객에게 제시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그는 뜻을 같이하는 동료를 모아, 작년 11월 인왕산 자락에 살짝 닿아 있는 종로구 자하문로에 ‘시청각’이라는 이름의 전시 공간을 열었다. 이 기사가 나가는 현재 두 번째 전시 ‘HOME/WORK’가 진행 중이기도 하다.

이 지면은 북리뷰이지 미술 전시 소개를 위한 공간이 아니다. 그런데 사실 <사물 유람>을 소개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책이라기보다는 어떤 전시로 독자들을 잡아 이끄는 것과도 같다. <사물 유람>이라는 책이 바로 그렇게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큐레이터를 자극한 사물들’이라는 부제를 보면 무슨 말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큐레이터의 눈으로 저자는 일상적인, 혹은 일상적이지 않더라도 친숙한, 아니면 생소하지만 적어도 우리 모두가 그것이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는 사물들을 요모조모 뜯어본다. 꼬마 눈사람·붕어빵·과일 행상 천막처럼 익숙한 사물, 국회 의사봉처럼 다소 생뚱맞게 보이는 물건, 헬륨이 들어 있어서 붕 떠오르지만 하룻밤만 지나도 금세 쭈글쭈글해지는 비둘기 풍선 같은 것들 말이다. <사물 유람>은 그러니까 총 32개의 사물이 배열되어 있는, 독립 큐레이터 현시원의 또 다른 전시인 셈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읽는 책’보다는 ‘보는 책’에 가까울 것이다. 눈에 힘을 팍 주고 저자가 사물들에서 캐어내는 의미가 얼마나 정확한지, 가끔 등장하는 미술평론가나 이론가 등의 말이 얼마나 잘 인용되고 있는지 등을 캐묻는 일은 가능하겠지만 그다지 부질없다. 개별적인 문단과 문장들은 신선한 시각과 순수한 경탄을 드러내곤 하지만, 각 문단들은 논리적이거나 서사적인 연결을 부러 추구하지 않는다. 저자는 사물들을 독자와 저자 사이에 존재할 어떤 몽상적 공간 속에 띄워놓은 채 이리 돌리고 저리 돌려가며 조잘거린다.

<사물 유람>의 태도는 미술관 입구에서 빌려주는 작품 해설 이어폰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물론 각 사물들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제시되고 있긴 하지만, 이 책은 작품의 연혁과 의미를 진지하게 설명해주는 도슨트가 아니라, 같은 그림을 보고 있으면서도 나와는 다른 생각을 떠올리고 속삭이는 친구 같은 인상을 준다. 이미 충분히 잘 알고 있기에 몰랐던 일상적인 사물들을, 도리어 잘 모르게 만들어 버림으로써 새롭게 알도록 해준다고 말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디자이너 홍은주와 김형재가 책의 만듦새를 다져 놓았고, 그 중에서 홍은주는 이 책에 등장하는 사물들의 일러스트를 직접 그렸다. 사진가 김경태가 찍은 독특한 질감의 사진들까지 더하고 나면 <사물 유람>은 더더욱 분류하기 애매한 책이 된다. 물론 이 책은 일러스트 모음집이나 사진첩이 아니다. 본문에는 분명 우리의 독서 행위를 요구하는 텍스트가 곱게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사물 유람>이라는 사물은 우리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야 마는 것이다. 책은 읽는 것인가, 아니면 보는 것인가? 아니, 그보다 앞서 책이란 무엇인가?

<사물 유람>이라는 책, 사물에 대한 책, 어떻게 분류해도 애매하지만 적절한 이 책을 읽으며 적어도 나는, 책이라는 사물이 무엇인지에 대해 잠시 고민하다가 나만 혼자 고민할 수는 없어서 리뷰를 쓰기 시작했다.

<노정태 ‘논객시대’ 저자 / 자유기고가 >

문화&과학
2014.04.08ㅣ주간경향 1070호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403311634081&code=116

2014-03-30

[별별시선] 탯줄을 끊어라

[별별시선] 탯줄을 끊어라

포유동물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어미의 자궁에서 태어난 새끼가 어미의 젖을 먹고 크는 동물이라고 말이다. 물론 오리너구리 같은 예외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포유류는 그렇다. 그리하여 포유류는 배꼽을 가지고 있다. 어미의 자궁 속에서 산소와 양분을 공급받으면서 성장하기 위한 생명줄이 탯줄이며, 탯줄이 떨어져나간 흔적이 배꼽이다.

포유동물의 아기들은 종종 태어나는 과정에서 탯줄이 목에 감겨 죽곤 한다. 여태까지는 생명선 노릇을 했던 탯줄 때문에 스스로 호흡할 수 있는 기회를 차단당하고 마는 것이다. 한 번 끊어진 탯줄은 다시는 복원될 수 없다. 태어나는 것은 곧 이별이다. 탯줄을 제때 끊지 못하면, 그것이 목에 감기기라도 하면, 새로운 생명은 탄생할 수 없다.
 

청년들과 학생들이 대화를 나눌 때, ‘걔는 탯줄을 잘 잡아서’ 같은 표현을 하는 광경을 종종 목격했다. 탯줄을 잘 잡았다니, 무슨 말일까.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 부모를 잘 만나서, 어려서부터 풍족하게 누리고 부족함 없는 기회를 제공받았다는 소리다.

궁지에 몰린 자신에게, 마치 동화 ‘햇님 달님’처럼,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오는 일 따위는 없다는 것을 청년 세대는 철저히 체감하고 있다. 모든 것은 태어날 때 결정된다. 탯줄을 잘못 잡으면 떨어지고, 탯줄을 잘 잡으면 올라간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탯줄 결정론’이라고 명명해보자. 그렇다면 그것은 요즘 젊은이들이 무기력하기 때문에 호응을 얻는, 최근 들어 퍼지기 시작한 삐뚤어진 사고방식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한반도의, 혹은 지구 전체의 인류 역사상 대부분의 시간을 지배해왔던 관념일 것이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양반과 상놈은 날 때부터 정해져 있다. 왕후장상의 씨는 따로 있다. 기타 등등.

탯줄 결정론을 극복하기 위해 박혁거세는 본인이 포유류라는 사실을 부정해야 했다. 포유동물이 아니라 난생동물이라고, 알에서 태어났다고 탄생 설화를 퍼뜨린 것은, 그의 부계 혈통이 그다지 자랑스러운 것은 아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똑같이 나라를 세웠어도 백제의 비류와 온조는 부여의 왕족임을 천명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탯줄을 잘 잡은 비류와 온조는 탯줄을 과시했지만, 탯줄을 잘못 잡았던 박혁거세는 스스로를 반인반신으로 포장해야 했을 터이다.

그 후로는 탯줄 달고 태어나는 포유동물의 역사였다. 비로소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중후반의 일이다. 한반도의 북쪽은 소련의 지원을 받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되었고, 남쪽은 미국을 등에 업은 대한민국으로 거듭났다.

미국은 동아시아 국가들에 핵우산을 포함한 군사적 안보를 제공하는 대신, 그들이 값싼 공산품을 생산하여 주기를 원했다. 북한과 맞서기 위해 경제와 군사력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박정희는 수출 드라이브 정책을 추진했다. 고도성장이 시작되었고, 노력하면 개천에서 용 날 수도 있는 그런 세상이 온 것만 같았다.

2014년은 단기로 4347년이다. 4347년에 걸친 한민족의 역사 가운데 대다수의 인구 구성원들이 탯줄 결정론을 부정할 수 있었던 시간이 과연 얼마나 될까.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고, 하루에 4시간씩 자면서 공부하면 ‘팔자’가 달라진다고 믿을 수 있었던 그 시절은, 극히 예외적이었다. 문제는 그 예외적 상황이야말로, 우리가 민주주의 국가의 국민으로서 요구해야 할, 당위에 가깝다는 것이다. 세상은 원래 불공평한 곳일 테지만, 세상이 원래 불공평한 곳이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그래, 너는 탯줄을 잘 잡았구나, 너희 집이 원래 부자라서 그런가보구나, 비아냥거리고 냉소하는 젊은 세대의 태도 자체를 두둔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청년들은 실로, 그들의 목에 감긴 탯줄로 인해 질식하고 있다.

그 반대편에는 튼튼하고 좋은 탯줄을 잡고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평생 승자의 자리에 머물도록 예정된 그런 포유동물들이 존재한다. 누군가가 탯줄에 목이 졸려 죽어갈 때, 다른 이는 좋은 탯줄을 잡고 그들만의 천국을 향해 올라가고 있는 것이다. 4000년의 부조리와 불공정한 질서가 돌아오고 있다. 대한민국이여, 탯줄을 끊어라.


2014-03-25

[북리뷰]인터넷 속 인공지능 갖춘 가상 존재

[북리뷰]인터넷 속 인공지능 갖춘 가상 존재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
테드 창 지음·김상훈 옮김·8800원·북스피어

과학 학술 전문지 <사이언스>에 나온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소설을 읽는 것은 우리의 공감 능력을 향상시키고 사회적 기술을 키우는 데 도움을 준다. 다른 사람이 어떤 감정 상태에 놓여 있는지 곧바로 파악하고, 그에 적절히 대응하는 그런 능력을 길러준다는 말이다.

앞서 말한 연구는 그 소설의 범위를 고전에 한정지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세계가 그 고전들이 쓰여졌던 19세기나 20세기 초와는 또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고려해 보면, 이 복잡한 세상을 이해하고 그 속에서 사람다운 삶을 살기 위한 능력을 키워주는 소설의 목록 역시 꾸준히 업데이트되어야 하지 않을까?

만약 우리가 리얼타임으로 ‘현대의 고전’ 목록을 새로고침하고 있다면, 테드 창의 작품들은 그 속에 반드시 포함되어야만 한다.

굳이 분류하자면 테드 창은 ‘수줍은’ 작가지만, 셀린저처럼 한 편의 히트작을 내놓은 후 영영 종적을 감추는 그런 식의 은둔자가 아니다. 몇 년의 간격을 두고 꾸준히 중편이나 단편을 발표하며, 그렇게 소설을 내놓을 때마다 SF(과학소설) 분야의 주요 문학상을 휩쓰는 사람이다.

조용히 그리고 꾸준히, 글로 먹고 살기 위해 원치 않는 글을 써야 하는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 자신의 생업을 유지하면서 소설을 쓰는 작가가 한 사람 있는 것이다.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는 바로 그 테드 창의 최신작이다. 그는 이른바 ‘하드 SF’적인 엄밀한 설정과 치밀한 자료 조사를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캐릭터의 선택과 감정을 한 겹씩 포개놓는다.

소설 속 세계의 인터넷은 현재 우리가 쓰는 것과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진화했다. 마치 2000년대 초 인기를 끌었던 사이버 스페이스 게임인 ‘세컨드 라이프’처럼, 자신의 아바타를 설정해 가상 공간에서 대화하는 ‘데이터어스’ 사용이 일반화되어 있는 세상이 설정되어 있다.

주인공 애니는 그 ‘데이터어스’ 속에서 작동하는 디지언트(digient), 즉 인공지능을 갖춘 가상 존재를 개발하는 일에 참여하게 된다. 원래 그는 동물원에서 근무하는 유인원 사육사였지만, 일하던 동물원은 폐쇄되었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기 위해 고심하던 차였다.

그런데 컴퓨터 인공지능, 가상현실 세계에서 작동하는 가상 존재의 인공지능이 마치 유인원의 그것처럼 감정적 교류와 정서적 교감을 통해 발전할 수 있게끔 해주는 게놈 엔진이 개발됐다.

애니는 이제 마치 자신의 아이처럼, 데이터어스에 접속하지 않으면 존재한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하지만 자신을 엄마처럼 믿고 따르며 아기처럼 말을 배우고 더듬거리며 애정을 요구하는 ‘소프트웨어 객체’를 길러야 한다.

엉뚱한 이야기처럼 들리는가? 하지만 오늘날 아이폰 사용자들은 ‘시리’와 대화를 나누고, 구글 검색창은 우리가 검색하고 싶어할 내용을 미리 파악해서 눈앞에 던져준다. 인공지능, 인간의 감정과 행동을 모사하는 컴퓨터, 그에 대한 우리의 관심과 애착 등은 결코 먼 미래의 일이 아닌 것이다.

한국은 수천만 건의 개인 정보가 유출된 후 USB를 돌려받았다는 이유로 ‘개인 정보를 회수했다’고 발표하는 기술맹(盲) 사회다. 소설의 범위, 인문학의 범위, 고전의 범위를 SF까지 확장하지 않는 한 한국 사회의 ‘업데이트’는 요원할 듯하다. 독자들께 일독을 권하는 책이다.

<노정태 ‘논객시대’ 저자 / 자유기고가>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403180950001&code=116

2014-03-10

[북리뷰]신의 이름으로 장부를 기록하다
2014 03/11ㅣ주간경향 1066호

<1494 베니스 회계>
루카 파치올리 지음·이원로 옮김·다산북스·2만3000원

루카 파치올리는 15세기에 활동한 수학자이며 프란치스코회 수도사였다.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지식인 계층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대단히 재산이 많아서 생업에 종사할 필요가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읽고 쓰고 공부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교회의 구성원이 되어야 했다.

세속으로부터 가장 먼 삶을 살아야 할 기독교 수도사가 가장 세속적인 주제라 할 수 있는 상인의 장부 기록법에 대한 책을 쓴 것은 아마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는 <Summa de Arithmetica, Geometirica, Proportioni et Proportionalita>라는 책을 토스카나어와 베네치아어로 써냈다. 제목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시피 <Summa>는 대수학, 기하학 등 수학의 각종 영역을 넓게 다루어 집대성한 책이다.

문제는 그 중 포함되어 있는 ‘Treatise de Computis et Scripturis’라는 부분이다. 번역하자면 ‘상업적 계산과 기록’이라는 뜻이며, 말 그대로 상인에게 필요한 계산 및 기록법이 적혀 있다.

그 ‘계산과 기록’이란 다름 아닌, 괴테가 “인간의 지혜가 낳은 가장 위대한 발명 중 하나”라고 극찬하기까지 한 복식부기법이다.

2011년 서울시장 재·보선을 앞두고 나경원 후보와 박원순 후보가 논쟁을 하면서 때아닌 화제가 되기도 했던 복식부기는 어떤 거래가 있을 경우 그것을 원인과 결과에 따라 나누어 동시에 기록하는 것이다.

가령 내가 신용카드로 7000원을 내고 국밥을 한 그릇 사먹었다고 해보자. 그것을 ‘-7000원 국밥’으로 적어둘 수도 있겠지만, 복식부기 방식대로라면 이런 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저녁식대 7000 // 미지급금(신용카드) 7000.’

이 차이는 명백하다. 단식부기가 아니라 복식부기를 택함으로써 내가 쓴 7000원이 어디서 나왔는지가 명확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단식부기식으로 적어두면 지금 사용한 7000원이 나중에 신용카드 결제일에 또 빠져나가는 장면을 보며 혼란을 겪게 되지만, 복식부기를 해놓으면 그럴 우려가 없다.

그래서 15세기의 수도사는 “누구라도 한눈에 거래내역을 이해할 수 있도록 차인(돈을 꾼 사람)과 대인(돈을 빌려준 사람)으로 정리·기록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이 책을 쓴 것이다.

그러나 <1494 베니스 회계>는 오늘날의 실용서들과는 퍽 다른 인상을 준다. 모든 재산을 기록하고 목록으로 만들며 그 경제적 가치를 파악하라는 내용은 극히 세속적이지만, “상인은 그의 모든 장부의 첫 머리에 하나님의 이름을 기록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하면서 사업을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내용은 영락없는 종교 서적이다.

세계 최초로 복식부기에 대해 설명하고 기록하는 <1494 베니스 회계>에는 이렇듯 종교적인 가르침과 경건한 태도가 한껏 스며들어 있다.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결코 없는 말을 지어낸 게 아닌 것이다. 신의 이름으로 장부를 적는 상인의 경건함과 정직함이 없다면, 서로의 신용을 걸고 거래하며 상호 이익을 도모하는 자본주의는 거대한 투전판으로 전락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차변과 대변으로 나누어 모든 사안을 이중으로 기록함으로써 기록자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손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것이 자본주의의 출발점인 셈이다. 회계 조작으로 경영 손실을 만들어내 노동자를 해고하는 일이 벌어지는 한국 사회가 공부해야 할 책이다.

<노정태 번역가/자유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