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리베카 솔닛 지음·김명남 옮김·창비·1만4000원
‘맨스플레인(mansplain)’이라는 말, 이미 들어보셨을지도 모르겠다. 남자를 뜻하는 영어 단어 man과 설명이라는 뜻의 explain을 합친 신조어다. <뉴욕타임스> 선정 2010년 ‘올해의 단어’였다. 그리고 2015년에는 우연한 계기로 한국어권에서도 작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칼럼니스트 김태훈이 패션지 <그라치아>에 기고한, ‘IS(이슬람국가)보다 무뇌아적 페미니즘이 더 위험해요’라는 제목의 칼럼이 가장 먼저 트위터에서 여성들의 분노에 불을 붙였다. 여성을 공개적으로 차별하고 학대하는 이슬람국가보다 ‘무뇌아적 페미니즘’이 더 위험하다는 말에, 트위터 사용자들은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라고 해쉬태그를 달며 항의했다.
한때 페미니즘은 지성인의 상식으로 여겨졌지만, 2010년대에 접어들어 그 불꽃은 예전 같지 않게 되었다. 남자들은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여성을 노골적으로 경시하며, 남성 위주 사회가 요구하는 가치관을 체화한 여성들을 향해 ‘개념녀’라는 훈장을 달았다. 반대로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여성들에게는 ‘김치녀’, ‘된장녀’ 같은 딱지를 붙여 비하하기 바빴다.
문제는 그러한 분위기에 적극적으로 목청을 높여 맞서는 여성 지식인들의 숫자와 기세가 이전보다 훨씬 줄어들었다는 데 있다. 왕년에 자타공인 페미니스트라고 불렸던 이들 중 오늘날까지도 같은 입장을 고수하며, 하루가 다르게 여성혐오를 드러내는 데 거리낌이 없어지는 한국 사회와 맞서는 이는 거의 없었다. 새로운 페미니즘, 혹은 똑같은 페미니즘이라 하더라도 오늘날의 분위기에 맞게 경신된 무언가를 원하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그들에게 가이드라인 노릇을 할 ‘바로 그 책’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미국의 저자이며 환경운동가이기도 한 리베카 솔닛의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는 바로 그런 현실 속에서 가뭄의 단비 같은 책이다. 모두 아홉 편의 에세이로 이루어진 이 책 중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표제작인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다. 리베카 솔닛은 한 파티에서 바로 그 자신이 썼던 어떤 책에 대해, 처음 만나는 남자가 달랑 그 책에 대한 서평만을 읽은 채로 함부로 가르치려 들었던 기억을 떠올린다. 바로 그렇게, 남자들이 상대방의 지식 수준을 함부로 얕잡아본 채 여자를 가르치려 드는 행동, 그것이 바로 맨스플레인이다.
맨스플레인 그 자체는 우스꽝스러운 해프닝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여성이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말할 수 있는 주체가 아닌 것처럼 취급하는 남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문제적이다. 어떤 남자들은 바로 같은 사고방식에 기반해 여자들을 ‘가르친다’고 생각하며 폭력을 휘두르거나, 심지어 살해하기도 한다. “이런 현상은 길거리 성희롱과 마찬가지로 젊은 여자들에게 이 세상은 당신들의 것이 아님을 넌지시 암시함으로써 여자들을 침묵으로 몰아넣는다. 이런 현상 때문에 여자들은 자기불신과 자기절제를 익히는 데 비해 남자들은 근거 없는 과잉 확신을 키운다.”(15쪽)
맨스플레인은 남자들이 여자의 말을 끊고 잘난 척을 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아직도 세상이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고 있다는, 엄연한 현실을 드러내주는 사회적 현상이다.
이 책에 실린 아홉 편의 에세이는 오늘날의 젠더 이슈를 골고루 일주한다. 21세기의 페미니즘 교과서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
<노정태 ‘논객시대’ 저자/번역가>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505261647401&code=116
2015-06-02
메르스 '괴담', 정보 공개로 맞서라
1.
이것이 어제까지의 뉴스였다. 오늘, 2015년 6월 2일, 대한민국에서 3차 감염자가 나왔다. 명백히 '세계 최초'로 메르스 3차 감염자를 배출한 것이지만, 모든 언론들은 그저 '최초 발생'이라고만 보도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 메르스 3차 감염자를 그냥 '최초'라고만 보도하는 모든 언론은, 오보를 내고 있는 것이다.
메르스 사태가 점입가경으로 흘러가고 있다. 언론들은 미필적 고의에 의한 오보를 뿌린다. 정부는 '유언비어 유포'에 대해 엄중 대처하겠다고 벼르지만, 정작 어제 오전 청와대는 정확한 감염자 숫자마저 정확히 파악하고 있지 못했다. SNS에는 어떤 병원에서 메르스가 퍼지고 있는지 다양한 '정보'가 떠돌아다닌다. 한마디로, 난장판이다.
2.
진정으로 '메르스 괴담'을 줄여나가고 싶다면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명백하다. 최초 감염자, 중국으로 빠져나간 환자, 그 외 본인이 감염된 상태에서 그 사실을 모르고 움직였던 사람들의 동선을 세세하게 포착하여 공개하고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하는 것이다.
지금 정부가 그 일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괴담'이 더욱 퍼지고 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메르스에 감염될지 모른다는 공포가, 메르스 그 자체보다 수천배 더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다. 하지만 메르스 그 자체는 잘 옮지 않는 질병이다.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환자와 2미터 이내로 접근하지 않는 한 메르스의 공기 감염은 발생하지 않는다.
모든 확진 환자들이 격리되기 전까지 움직였던 동선이 명확하게 파악되고 또 공개되어야 하는 것은 그래서이다. 그 효과를 생각해보자.
이것보다 더 빠르고 효과적으로 메르스 위기에 맞설 수 있는 방법이 또 있는가? 대한민국은 거의 모든 국민이 글을 읽을 줄 알고, 미디어에 노출되어 있으며, 전국에 의료기관이 배치되어 있는 나라다. 메르스 위기와 관련하여 부족한 것이 딱 하나 있다면, 정확한 정보일 뿐이다. 바로 그게 없기 때문에 국민들은, 정부가 볼 때는 '괴담'의 형식으로, 정보를 생산하고 유통하는 것이다.
3.
작년 말 에볼라 위기가 서아프리카를 강타했고, 그곳에서 의료 봉사활동을 했던 의사 한 명이 기니에서 출발해 미국으로 들어왔다. 그는 본인이 에볼라에 안 걸린 줄 알고 여기저기 돌아다녔지만, 오한과 발열 증상이 나자 스스로를 격리시킨 후 병원에 입원했다.
사실 에볼라는 증상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옮지 않는다. 따라서 그가 어디에서 뭘 했건, 실제로 에볼라를 전파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뉴욕타임즈>는 그가 입국한 이후 어떤 경로로 어떻게 움직였는지,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 등에 대해 세세한 사항을 전부 입수하여 공개했다.
"What the New York City Ebola Patient Was Doing Before He Was Hospitalized"(링크: http://www.nytimes.com/interactive/2014/10/23/nyregion/new-york-city-ebola-patient-timeline-map.html?_r=0)를 보자. 과연 이런 정보 공개가 '환자에 대한 조리돌림'을 위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 환자를 악마화하거나 타자화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그가 어디에서 뭘 했는지 정확히 알고 나면, 해당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은 본인의 건강 상태를 한번 더 유심히 체크하게 된다. 반대로 그가 있었던 곳과 동선이 겹치지 않는 사람들은 안심하고 평정을 유지할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러한 태도다. 평택을 넘어 대전까지 갔다더라, 무슨 병원이 초토화되었더다더라, 같은 '괴담'이 떠도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그 '괴담'을 종식시킬만한 정보를 체계화하여 국민들에게 공개하면 된다. 그래야 국민들도 자신의 상황을 파악하고 안심하며, 본인이 감염되었다는 의심이 들 경우 적절한 시점에 신고하고 치료를 받을 수 있다.
만약 미 정부나 <뉴욕타임즈>가 '괴담'을 두려워해서 모든 정보를 틀어막는 한국식 대처법을 취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4.
지금 정부는 국민들을 믿지 않는다. 동시에 국민들 역시 정부를 신뢰하지 않는다. 이 시점에서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정부다. 왜냐하면 정부는 올바른 데이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보를 공개하는 것은 신뢰를 얻기 위한 첫 단계다. 가지고 있는 정보를 다 까지도 않으면서, 국민들이 퍼즐을 맞춰서 유통시키는 것을 '괴담'이라고 지칭하고 처벌의 의지만 드높이는 것은, 문제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한국 정부의 비밀주의는 바야흐로 전 세계적인 골칫거리가 될 태세다. 오늘자 뉴스를 하나 살펴보자.
정부의 이유 없고 실익 없는 비밀주의 때문에, 홍콩으로 향하는 모든 감기 환자들이 메르스 의심자로 분류되어, 아마도 격리 검사를 당하게 생겼다. 대체 왜 정부는 메르스 관련 정보를 공개하지 않고 있는가? 홍콩 보건당국 역시 나와 같은 논리를 편다. "한국의 어느 병원에서 메르스 환자가 발생했는지 공개되면 한국을 여행하는 홍콩 시민들에게 해당 병원을 피하라고 알릴 수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한국 정부에 지속적으로 정보 공개를 요청하고 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어서, 부득이하게 한국발 입국자들에 대한 전반적인 방역 및 관리 수준을 강화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 이어진다. 요컨대 모든 한국인을 잠재적 메르스 환자로 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런 수준의 질병 관리 대책을 내놓으면서 '요우커'들이 한국에 와서 돈을 펑펑 써주기를 기대한다? 다 틀렸다. 이제 한국은, 중국인들에게, 더 이상 '선진국'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정부의 멍청한 권위적 비밀주의가 심지어 경제에도 치명타를 입힐 우려가 크다.
5.
한국 사회는 '확률'에 대처하는 방법을 모른다. 모든 문제가 거기서 시작한다. 병에 걸린 것은, 물론 개인적인 위생의 문제도 있겠으나, 결국은 운이 안 좋은 것이다. 본인에게 유리하지 않은 확률이 실현된 것이다. 불운 앞에 우리는 개인적으로, 또 사회적 차원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나쁜 확률에 걸린 자'를 곧장 '더럽혀진 자'로 인식하고 쫓아내려는 사고방식. 대단히 전근대적이고 봉건적인 이 사고방식이 한국 사회에 퍼져 있다. 일단 그 사실을 사실로 인정하자. 그래서 개인들은, 본인이 운 나쁘게 뭔가에 걸렸을 경우, 그 사실을 감추려고 든다. 본인이 메르스에 걸렸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확신할 수 있었음에도 중국행 비행기에 올라 현재 중국에서 격리되어 있는 A씨가 바로 그러한 행동 양태를 보여준다.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보면 A씨를 두둔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회사 생활' 하다보면 눈치 보여서 병가도 제대로 못 쓰는데 어떡하냐, 메르스는 치사율 40%지만 병가는 치사율 100%다, 같은 이야기가 적잖이 돌아다녔다.
이러한 시각은 한국 사회가 '나쁜 확률에 걸린 자'에게 결코 관대하지 않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그러므로 그 '나쁜 확률에 걸린 자'는 현실을 부정할 수밖에 없고, 그러한 행동을 비난할 수 없다는 뜻으로 풀이될 수 있다. 한국 사회는 원래 그런 곳이고, 거기서 살아남으려면 알아서 눈치 보고 피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 저 와중에 직장인한테 출장 가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너희들은 사회 생활의 고통을 알긴 하느냐는 비난이 돌아온다.
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러한 시각에 동참하거나 편승하는 게 '진보적'인 시각이라고 바라보는 사람들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왜 힘 없는 약자에게 손가락질을 하느냐, 잘못한 것은 위기 대처를 엉망으로 하고 있는 정부가 아니냐, 이런 입장이다. 물론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만 떠넘기는 것은 부당한 일일 수밖에 없겠지만, 나는 그러한 태도야말로 현재의 메르스 위기를 악화시키는 주요 원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환자에게 딱지를 붙여 쫓아내자는 식의 대중적 감정은 당연히 극복 대상이지만, 개인에게 일말의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이 온당하다는 태도 역시 잘못된 것이다. '나쁜 확률'에 걸린 사람을 쫓아내자는 식의 사고방식이 비과학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그 '나쁜 확률'에 걸렸을 때 자신의 문제를 쉬쉬하고 덮어버리려고 하는 태도 역시, 비과학적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우리는 두 개의 비과학적 태도를 동시에 극복해야 한다.
6.
일단 국가가 먼저 국민을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국가가 더 많은 정보를 쥐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들에게 메르스 감염자들의 동선에 대한 세부적 정보를 제공하라. 그러면 괴담은 알아서 사라질 것이다.
동시에 지금부터라도 모든 신문과 방송을 동원해, 손을 잘 씻고, 눈 코 입을 함부로 만지지 말고, 기침과 재채기를 할 때는 휴지나 손수건으로 가려야 한다고 홍보하라. 손으로 가리지 말고 팔꿈치나 어깨에 기침을 해야 한다고, 엘리베이터 버튼처럼 손이 많이 닿는 곳은 직접 만지지 않기 위해 유의하라고 대대적으로 홍보해야 할 시점이다.
이러한 '계몽'이 국민들을 우습게 보는 것인가? 국민들을 대상화하고, 무시하고, 무식하고 더러운 하층민 취급하는 것인가? 그런 식으로 지레짐작하고 반발하는 사람들을 나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 오히려 국민들이 질병 전파자가 될 수 있으면서, 동시에 스스로 노력하여 위생적으로 대처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존중하기 때문에, '계몽'하는 것이다. 계몽은 무시가 아니라 존중이다.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으며, 잘 해나갈 수 있다는 가능성에의 전폭적 긍정이 바로 국민 계몽이다.
인간은 자유 의지를 가진 존재다.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며 자신의 행위를 반추할 수 있는 사고력을 지니고 있다. 전염병에 걸린 사람에게 그 위험성을 인식하고 올바로 대처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대체 왜 '보수적 도덕주의'라고 비난받는지 나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의지와 판단 하에 올바로 행동하지 않는 한 문명은 유지되지 않는다. 문명을 유지하고 위생과 청결을 지키자는 기본적인 요구가 '보수주의'라면, 나는 위생 관념 없는 비과학적 진보와 단호하게 선을 긋겠다. 그런 '더러운' 진보는 필요 없다.
7.
정부는 지금 당장이라도 메르스 감염자들의 동선을 파악하여 공개해야 한다. 그래야 모든 국민들이 안심할 수 있다. 그래야 '괴담'이 잦아들 여지가 생긴다. 그래야 국민들이 스스로 위험한 전염병을 통제할 수 있게 된다. 그래야 중화권과 전 세계적으로 실추된 대한민국의 위상을 회복할 수 있는 여지도, 조금이나마 열린다.
문제는 정부의 권위주의와, 그 권위주의를 당연한 전제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일부 진보 진영의 삐뚤어진 세계관이다. 언론은 정부의 권위주의를 이겨내고, 정보 공개를 요구하며, 동시에 국민들 역시 '나약한 피해자'가 아니라 '무서운 질병 매개자'가 될 수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적극적인 계몽에 나서야 한다.
과학을 존중하는, 인권을 보호하는, 권위주의를 극복하는, 위생과 청결을 지켜내는, 그런 대한민국을 만들어보자. 이 위기를 기회로 삼아보자는 말이다. 정부의 전향적인 판단과 세밀한 정보 공개를 다시 한 번 요구한다.
중동에서 최초로 메르스에 걸려온 사람을 1차 감염자라 하고, 접촉을 통해 그 사람에게 옮은 사람을 2차 감염자, 이런 2차 감염자에게 옮은 사람을 3차 감염자라고 합니다. 전 세계에 1천여 명의 메르스 확진 환자가 있었지만 이 중 3차 감염자는 아직 없습니다. http://news.jtbc.joins.com/html/284/NB10909284.html
이것이 어제까지의 뉴스였다. 오늘, 2015년 6월 2일, 대한민국에서 3차 감염자가 나왔다. 명백히 '세계 최초'로 메르스 3차 감염자를 배출한 것이지만, 모든 언론들은 그저 '최초 발생'이라고만 보도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 메르스 3차 감염자를 그냥 '최초'라고만 보도하는 모든 언론은, 오보를 내고 있는 것이다.
메르스 사태가 점입가경으로 흘러가고 있다. 언론들은 미필적 고의에 의한 오보를 뿌린다. 정부는 '유언비어 유포'에 대해 엄중 대처하겠다고 벼르지만, 정작 어제 오전 청와대는 정확한 감염자 숫자마저 정확히 파악하고 있지 못했다. SNS에는 어떤 병원에서 메르스가 퍼지고 있는지 다양한 '정보'가 떠돌아다닌다. 한마디로, 난장판이다.
2.
진정으로 '메르스 괴담'을 줄여나가고 싶다면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명백하다. 최초 감염자, 중국으로 빠져나간 환자, 그 외 본인이 감염된 상태에서 그 사실을 모르고 움직였던 사람들의 동선을 세세하게 포착하여 공개하고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하는 것이다.
지금 정부가 그 일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괴담'이 더욱 퍼지고 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메르스에 감염될지 모른다는 공포가, 메르스 그 자체보다 수천배 더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다. 하지만 메르스 그 자체는 잘 옮지 않는 질병이다.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환자와 2미터 이내로 접근하지 않는 한 메르스의 공기 감염은 발생하지 않는다.
모든 확진 환자들이 격리되기 전까지 움직였던 동선이 명확하게 파악되고 또 공개되어야 하는 것은 그래서이다. 그 효과를 생각해보자.
- 본인이 메르스 환자와 동선이 겹친다는 사실을 확인한 사람들은 최대한 빨리 의료기관을 통해 필요한 처치를 받을 수 있다.
- 본인이 메르스 환자와 동선이 어렵풋이 겹친다는 것을 알았지만, 2미터 이내에서 직접 접촉한 적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사람들은, 경계심을 늦추지 않으면서도 안심할 수 있다.
- 그 외 국민들은 불필요하게 '괴담'에 휩쓸리지 않게 된다.
이것보다 더 빠르고 효과적으로 메르스 위기에 맞설 수 있는 방법이 또 있는가? 대한민국은 거의 모든 국민이 글을 읽을 줄 알고, 미디어에 노출되어 있으며, 전국에 의료기관이 배치되어 있는 나라다. 메르스 위기와 관련하여 부족한 것이 딱 하나 있다면, 정확한 정보일 뿐이다. 바로 그게 없기 때문에 국민들은, 정부가 볼 때는 '괴담'의 형식으로, 정보를 생산하고 유통하는 것이다.
3.
작년 말 에볼라 위기가 서아프리카를 강타했고, 그곳에서 의료 봉사활동을 했던 의사 한 명이 기니에서 출발해 미국으로 들어왔다. 그는 본인이 에볼라에 안 걸린 줄 알고 여기저기 돌아다녔지만, 오한과 발열 증상이 나자 스스로를 격리시킨 후 병원에 입원했다.
사실 에볼라는 증상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옮지 않는다. 따라서 그가 어디에서 뭘 했건, 실제로 에볼라를 전파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뉴욕타임즈>는 그가 입국한 이후 어떤 경로로 어떻게 움직였는지,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 등에 대해 세세한 사항을 전부 입수하여 공개했다.
"What the New York City Ebola Patient Was Doing Before He Was Hospitalized"(링크: http://www.nytimes.com/interactive/2014/10/23/nyregion/new-york-city-ebola-patient-timeline-map.html?_r=0)를 보자. 과연 이런 정보 공개가 '환자에 대한 조리돌림'을 위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 환자를 악마화하거나 타자화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그가 어디에서 뭘 했는지 정확히 알고 나면, 해당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은 본인의 건강 상태를 한번 더 유심히 체크하게 된다. 반대로 그가 있었던 곳과 동선이 겹치지 않는 사람들은 안심하고 평정을 유지할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러한 태도다. 평택을 넘어 대전까지 갔다더라, 무슨 병원이 초토화되었더다더라, 같은 '괴담'이 떠도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그 '괴담'을 종식시킬만한 정보를 체계화하여 국민들에게 공개하면 된다. 그래야 국민들도 자신의 상황을 파악하고 안심하며, 본인이 감염되었다는 의심이 들 경우 적절한 시점에 신고하고 치료를 받을 수 있다.
만약 미 정부나 <뉴욕타임즈>가 '괴담'을 두려워해서 모든 정보를 틀어막는 한국식 대처법을 취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4.
지금 정부는 국민들을 믿지 않는다. 동시에 국민들 역시 정부를 신뢰하지 않는다. 이 시점에서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정부다. 왜냐하면 정부는 올바른 데이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보를 공개하는 것은 신뢰를 얻기 위한 첫 단계다. 가지고 있는 정보를 다 까지도 않으면서, 국민들이 퍼즐을 맞춰서 유통시키는 것을 '괴담'이라고 지칭하고 처벌의 의지만 드높이는 것은, 문제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한국 정부의 비밀주의는 바야흐로 전 세계적인 골칫거리가 될 태세다. 오늘자 뉴스를 하나 살펴보자.
1일(현지시간) 홍콩 보건당국은 한국인 J(44)씨의 메르스 확진 판정 이후 메르스 확산을 막기 위해 여행객들에 대한 방역과 검진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발열과 감기 증세 등 메르스와 관련된 어떤 증상이라도 보일 때에는 즉각 메르스 의심자로 분류해 정밀 검진한다는 방침이다. http://www.nocutnews.co.kr/news/4421582
정부의 이유 없고 실익 없는 비밀주의 때문에, 홍콩으로 향하는 모든 감기 환자들이 메르스 의심자로 분류되어, 아마도 격리 검사를 당하게 생겼다. 대체 왜 정부는 메르스 관련 정보를 공개하지 않고 있는가? 홍콩 보건당국 역시 나와 같은 논리를 편다. "한국의 어느 병원에서 메르스 환자가 발생했는지 공개되면 한국을 여행하는 홍콩 시민들에게 해당 병원을 피하라고 알릴 수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한국 정부에 지속적으로 정보 공개를 요청하고 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어서, 부득이하게 한국발 입국자들에 대한 전반적인 방역 및 관리 수준을 강화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 이어진다. 요컨대 모든 한국인을 잠재적 메르스 환자로 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런 수준의 질병 관리 대책을 내놓으면서 '요우커'들이 한국에 와서 돈을 펑펑 써주기를 기대한다? 다 틀렸다. 이제 한국은, 중국인들에게, 더 이상 '선진국'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정부의 멍청한 권위적 비밀주의가 심지어 경제에도 치명타를 입힐 우려가 크다.
5.
한국 사회는 '확률'에 대처하는 방법을 모른다. 모든 문제가 거기서 시작한다. 병에 걸린 것은, 물론 개인적인 위생의 문제도 있겠으나, 결국은 운이 안 좋은 것이다. 본인에게 유리하지 않은 확률이 실현된 것이다. 불운 앞에 우리는 개인적으로, 또 사회적 차원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나쁜 확률에 걸린 자'를 곧장 '더럽혀진 자'로 인식하고 쫓아내려는 사고방식. 대단히 전근대적이고 봉건적인 이 사고방식이 한국 사회에 퍼져 있다. 일단 그 사실을 사실로 인정하자. 그래서 개인들은, 본인이 운 나쁘게 뭔가에 걸렸을 경우, 그 사실을 감추려고 든다. 본인이 메르스에 걸렸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확신할 수 있었음에도 중국행 비행기에 올라 현재 중국에서 격리되어 있는 A씨가 바로 그러한 행동 양태를 보여준다.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보면 A씨를 두둔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회사 생활' 하다보면 눈치 보여서 병가도 제대로 못 쓰는데 어떡하냐, 메르스는 치사율 40%지만 병가는 치사율 100%다, 같은 이야기가 적잖이 돌아다녔다.
이러한 시각은 한국 사회가 '나쁜 확률에 걸린 자'에게 결코 관대하지 않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그러므로 그 '나쁜 확률에 걸린 자'는 현실을 부정할 수밖에 없고, 그러한 행동을 비난할 수 없다는 뜻으로 풀이될 수 있다. 한국 사회는 원래 그런 곳이고, 거기서 살아남으려면 알아서 눈치 보고 피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 저 와중에 직장인한테 출장 가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너희들은 사회 생활의 고통을 알긴 하느냐는 비난이 돌아온다.
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러한 시각에 동참하거나 편승하는 게 '진보적'인 시각이라고 바라보는 사람들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왜 힘 없는 약자에게 손가락질을 하느냐, 잘못한 것은 위기 대처를 엉망으로 하고 있는 정부가 아니냐, 이런 입장이다. 물론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만 떠넘기는 것은 부당한 일일 수밖에 없겠지만, 나는 그러한 태도야말로 현재의 메르스 위기를 악화시키는 주요 원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환자에게 딱지를 붙여 쫓아내자는 식의 대중적 감정은 당연히 극복 대상이지만, 개인에게 일말의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이 온당하다는 태도 역시 잘못된 것이다. '나쁜 확률'에 걸린 사람을 쫓아내자는 식의 사고방식이 비과학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그 '나쁜 확률'에 걸렸을 때 자신의 문제를 쉬쉬하고 덮어버리려고 하는 태도 역시, 비과학적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우리는 두 개의 비과학적 태도를 동시에 극복해야 한다.
6.
일단 국가가 먼저 국민을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국가가 더 많은 정보를 쥐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들에게 메르스 감염자들의 동선에 대한 세부적 정보를 제공하라. 그러면 괴담은 알아서 사라질 것이다.
동시에 지금부터라도 모든 신문과 방송을 동원해, 손을 잘 씻고, 눈 코 입을 함부로 만지지 말고, 기침과 재채기를 할 때는 휴지나 손수건으로 가려야 한다고 홍보하라. 손으로 가리지 말고 팔꿈치나 어깨에 기침을 해야 한다고, 엘리베이터 버튼처럼 손이 많이 닿는 곳은 직접 만지지 않기 위해 유의하라고 대대적으로 홍보해야 할 시점이다.
이러한 '계몽'이 국민들을 우습게 보는 것인가? 국민들을 대상화하고, 무시하고, 무식하고 더러운 하층민 취급하는 것인가? 그런 식으로 지레짐작하고 반발하는 사람들을 나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 오히려 국민들이 질병 전파자가 될 수 있으면서, 동시에 스스로 노력하여 위생적으로 대처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존중하기 때문에, '계몽'하는 것이다. 계몽은 무시가 아니라 존중이다.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으며, 잘 해나갈 수 있다는 가능성에의 전폭적 긍정이 바로 국민 계몽이다.
인간은 자유 의지를 가진 존재다.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며 자신의 행위를 반추할 수 있는 사고력을 지니고 있다. 전염병에 걸린 사람에게 그 위험성을 인식하고 올바로 대처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대체 왜 '보수적 도덕주의'라고 비난받는지 나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의지와 판단 하에 올바로 행동하지 않는 한 문명은 유지되지 않는다. 문명을 유지하고 위생과 청결을 지키자는 기본적인 요구가 '보수주의'라면, 나는 위생 관념 없는 비과학적 진보와 단호하게 선을 긋겠다. 그런 '더러운' 진보는 필요 없다.
7.
정부는 지금 당장이라도 메르스 감염자들의 동선을 파악하여 공개해야 한다. 그래야 모든 국민들이 안심할 수 있다. 그래야 '괴담'이 잦아들 여지가 생긴다. 그래야 국민들이 스스로 위험한 전염병을 통제할 수 있게 된다. 그래야 중화권과 전 세계적으로 실추된 대한민국의 위상을 회복할 수 있는 여지도, 조금이나마 열린다.
문제는 정부의 권위주의와, 그 권위주의를 당연한 전제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일부 진보 진영의 삐뚤어진 세계관이다. 언론은 정부의 권위주의를 이겨내고, 정보 공개를 요구하며, 동시에 국민들 역시 '나약한 피해자'가 아니라 '무서운 질병 매개자'가 될 수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적극적인 계몽에 나서야 한다.
과학을 존중하는, 인권을 보호하는, 권위주의를 극복하는, 위생과 청결을 지켜내는, 그런 대한민국을 만들어보자. 이 위기를 기회로 삼아보자는 말이다. 정부의 전향적인 판단과 세밀한 정보 공개를 다시 한 번 요구한다.
2015-05-19
[북리뷰]근대 일본의 서구 따라잡기
도련님의 시대 1~5
세키가와 나쓰오 지음·다니구치 지로 그림 세미콜론·각권 1만1000원
일본은 전쟁에서 이겼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공허함을 느꼈다. 러일전쟁에서 러시아를 꺾으며 일본은 일약 신흥 강대국으로 발돋움하는 듯했지만, 일본인들은 러시아로부터의 배상금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전쟁을 앞두고 억눌러져 있던 국민들의 불만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비어져나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영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나쓰메 소세키가 <도련님>을 구상하고 집필하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고독한 미식가>를 통해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등산 만화인 <신들의 봉우리> 등으로도 탄탄한 열성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는 만화가 다니구치 지로. 그가 다방면에서 활동하는 작가인 세키카와 나쓰오와 손을 잡았다. 전후 고도성장기를 제외하면, 일본인들이 가장 ‘좋은 시절’로 떠올린다는 메이지 천황 시대를, 나쓰메 소세키 및 그와 같은 시대를 살아간 수많은 문인들을 주인공 삼아 다섯 편의 만화 속에 담아낸 것이다.
당시 일본인들은 ‘서양’이라는, 불쑥 등장해버린 타자에 대해 양가적인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서양은 우선 배우고 따라잡아야 할 대상이었다. 나쓰메 소세키가 영국 유학을 갈 수 있었던 것도 그래서였다. 그러나 나쓰메 소세키에게 ‘안’과 ‘밖’이 철저히 나누어진, ‘프라이버시’가 존재하기에 역설적으로 그것을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에 공포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서구식 생활 공간은, 신경증을 안겨주었다. 근대화 이전의 전통사회에서 태어나고 자란 일본인 나쓰메 소세키는 영문학을 공부할 수 있었을지언정 ‘영국인’이 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나쓰메 소세키뿐 아니라, 서구를 따라잡기 위해 발버둥치던 모든 메이지 시대 사람들이 겪었던 공통의 딜레마였다. 산업화를 통해 경제가 급성장하고 있었지만, 당연히 그 성장의 과실은 고루 분배되지 않았다. 가난한 국민들을 바라보며 의식화된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을 의식화하기 시작했고, 메이지 정부는 앞뒤 가리지 않고 ‘주의자’들을 단속하고 나선다. 급기야 간노 스가코 등 무정부주의자들이 천황을 살해하려 모의했다는 혐의로 처벌되면서, 일본은 엄격한 군국주의적 통제를 향해 나아가게 된다. “민간 개혁, 혁명세력에는 철권과 쇠사슬 그리고 죽음으로 대답하겠다고 결의한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마침내 메이지 천황에게 그 뜻을 아뢰기 위해서 온 것이다. 메이지 42년(1909년) 5월 중순의 맑은 아침, 일본은 조용히 회전했다. 그리고 고토쿠 슈스이 등 28명이 죽을 운명도 이때 결정되었다.”(4권 208쪽)
한국인인 우리는 일본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일본에 대해 무엇을 아는지 따져 묻기 시작하면, 그 답변의 목록은 실로 빈곤하기 짝이 없다. 고대의 일본, 중세의 일본, 근대와 현대의 일본이 각각 어떻게 다르고 구분되었는지, 어떤 시대가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왜 종지부를 찍게 되었는지 등에 대해서도, 명확한 답을 하기 어렵다. <도련님의 시대>는 바로 그 점에서 훌륭한 교과서가 되어주는 책이다. 물론 여성들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에 의존한 묘사라든지, 안중근 의사를 등장시키고 다루는 방식 등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그러나 근대 일본의 사춘기가 끝나갈 무렵을, 그 사춘기를 빼곡히 적어낸 작가들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국내에서 보기 드문 텍스트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메이지 시대를 이해하려면 이 책부터 시작해야 한다.
<노정태 ‘논객시대’저자/번역가>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505111756351&code=116
세키가와 나쓰오 지음·다니구치 지로 그림 세미콜론·각권 1만1000원
일본은 전쟁에서 이겼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공허함을 느꼈다. 러일전쟁에서 러시아를 꺾으며 일본은 일약 신흥 강대국으로 발돋움하는 듯했지만, 일본인들은 러시아로부터의 배상금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전쟁을 앞두고 억눌러져 있던 국민들의 불만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비어져나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영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나쓰메 소세키가 <도련님>을 구상하고 집필하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고독한 미식가>를 통해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등산 만화인 <신들의 봉우리> 등으로도 탄탄한 열성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는 만화가 다니구치 지로. 그가 다방면에서 활동하는 작가인 세키카와 나쓰오와 손을 잡았다. 전후 고도성장기를 제외하면, 일본인들이 가장 ‘좋은 시절’로 떠올린다는 메이지 천황 시대를, 나쓰메 소세키 및 그와 같은 시대를 살아간 수많은 문인들을 주인공 삼아 다섯 편의 만화 속에 담아낸 것이다.
당시 일본인들은 ‘서양’이라는, 불쑥 등장해버린 타자에 대해 양가적인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서양은 우선 배우고 따라잡아야 할 대상이었다. 나쓰메 소세키가 영국 유학을 갈 수 있었던 것도 그래서였다. 그러나 나쓰메 소세키에게 ‘안’과 ‘밖’이 철저히 나누어진, ‘프라이버시’가 존재하기에 역설적으로 그것을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에 공포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서구식 생활 공간은, 신경증을 안겨주었다. 근대화 이전의 전통사회에서 태어나고 자란 일본인 나쓰메 소세키는 영문학을 공부할 수 있었을지언정 ‘영국인’이 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나쓰메 소세키뿐 아니라, 서구를 따라잡기 위해 발버둥치던 모든 메이지 시대 사람들이 겪었던 공통의 딜레마였다. 산업화를 통해 경제가 급성장하고 있었지만, 당연히 그 성장의 과실은 고루 분배되지 않았다. 가난한 국민들을 바라보며 의식화된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을 의식화하기 시작했고, 메이지 정부는 앞뒤 가리지 않고 ‘주의자’들을 단속하고 나선다. 급기야 간노 스가코 등 무정부주의자들이 천황을 살해하려 모의했다는 혐의로 처벌되면서, 일본은 엄격한 군국주의적 통제를 향해 나아가게 된다. “민간 개혁, 혁명세력에는 철권과 쇠사슬 그리고 죽음으로 대답하겠다고 결의한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마침내 메이지 천황에게 그 뜻을 아뢰기 위해서 온 것이다. 메이지 42년(1909년) 5월 중순의 맑은 아침, 일본은 조용히 회전했다. 그리고 고토쿠 슈스이 등 28명이 죽을 운명도 이때 결정되었다.”(4권 208쪽)
한국인인 우리는 일본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일본에 대해 무엇을 아는지 따져 묻기 시작하면, 그 답변의 목록은 실로 빈곤하기 짝이 없다. 고대의 일본, 중세의 일본, 근대와 현대의 일본이 각각 어떻게 다르고 구분되었는지, 어떤 시대가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왜 종지부를 찍게 되었는지 등에 대해서도, 명확한 답을 하기 어렵다. <도련님의 시대>는 바로 그 점에서 훌륭한 교과서가 되어주는 책이다. 물론 여성들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에 의존한 묘사라든지, 안중근 의사를 등장시키고 다루는 방식 등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그러나 근대 일본의 사춘기가 끝나갈 무렵을, 그 사춘기를 빼곡히 적어낸 작가들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국내에서 보기 드문 텍스트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메이지 시대를 이해하려면 이 책부터 시작해야 한다.
<노정태 ‘논객시대’저자/번역가>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505111756351&code=116
2015-05-17
[별별시선]청년들의 미래를 위한 투쟁
▲ “법적으로는 미성년자 벗어났지만
경제적으로 미성년자 취급당하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대한민국의 청년이다”
2008년부터 2015년까지, 인생의 약 4분의 1에 해당하는 긴 시간 동안, 나는 ‘20대 논객’ ‘청년 논객’으로 살아왔다. 2010년에는 뒤늦은 입대를 했는데, 제대할 무렵이 되면 더 이상 20대가 아니므로 ‘20대 논객’ 꼬리표를 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착각이었다. ‘20대’를 위한 지면은 ‘2030’을 위한 것으로, 혹은 청년세대 전체의 것으로 탈바꿈했다. 이등병이 예비역 병장 되듯 나는 20대 논객에서 청년 논객으로 진급했다.
이러한 제자리걸음은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었다. 청년고용촉진특별법에서 청년을 29세까지로 한정하자 30세를 넘긴 미취업자들의 반발이 쏟아진 사례를 생각해보자. 결국 대상 연령을 34세까지 늘리면서 불만은 어느 정도 진정되었지만, 대체 몇 살까지가 ‘청년’인가.
질문을 다른 각도에서 던져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청년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최근 국민연금 개혁안을 놓고 벌어진 논란을 지켜보며 나는 하나의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몸은 다 컸고 법적으로도 미성년자에서 벗어났지만, 경제적으로는 여전히 미성년자 취급을 당하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청년이다.
여기서 ‘미성년자 취급’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지닌다. 청년들은 취업준비생이거나 갓 취업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취약한 상태다. 그러므로 그들을 보호하고 육성해야 한다는 주장은 언제나 옳은 것으로 인정된다. 청년들을 ‘위한’ 정책들은 지금도 수없이 연구되고 또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하지만 청년들은 어디까지나, 특히 경제적 영역에서 미성년자에 불과하기에, 청년들을 ‘위한’ 정책은 있을지언정 그들에 ‘의한’ 대안은 환영받지 못한다. 특히 청년들 스스로의 이해관계가 그들을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는 기성세대와 대립하는 경우가 문제다. ‘착한 타자’의 자리에서 벗어나면 곧장 의심의 눈초리가 날아든다. 젊은이들의 반발은 공포와 괴담에 휩쓸린 비이성적 여론으로 치부되기 일쑤다.
국민연금 개혁안에서, 지금부터 보험료율을 어디까지 끌어올려야 할지에 대한 구체적 논의 없이, 일단 소득대체율부터 50%로 못박아야 한다고 야권은 요구했다. 적잖은 청년들은 반발했다. 야권 성향의 언론과 지식인들은 그러한 청년들의 목소리를 ‘보수 언론의 선동에 놀아난다’는 식으로 매도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소득대체율을 40%에서 50%로 올린다 해도 당장의 노인 빈곤 문제와는 무관하다. 빈곤 노인들은 국민연금 사각지대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개혁 진보 세력은 세대 간 연대니 공동체의 의무니 하는 원론적인 정답만 되풀이할 뿐이다.
한국은 복지예산 비중이 너무 낮은 나라다. 또한 지나치게 많이 쌓인 연기금이 주식시장에서 주가 방어에 쓰임으로써, 결국 저소득층의 돈으로 자산시장을 지탱하는 결과를 낳는 것은 정의롭지 못한 일이다. 하지만 지금 야권은 ‘2060년쯤 되면 적립금이 사라지는 게 당연하다’며, 쟁여둔 곶감은 자신들이 다 빼먹는다는 전제하에, ‘그때까지는 보험료율을 1%포인트만 올려도 충분하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과연 청년들이 그들을 신뢰할 수 있을까.
2008년 이후 언론 지면에 등장한 젊은 논객들에게는 나름의 자체적 가이드라인이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청년들의 문제를 가시화하되 기존의 진보적 가치, 조직, 여론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것은 단지 논객들뿐 아니라 청년층 전반의 지배적 기조이기도 했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그토록 ‘20대 개새끼론’이 횡행했음에도, 지난 대선에서 야당에 표를 몰아주었다. 당장은 보답을 기대하기 어렵더라도, 진보 개혁 세력에게 좋은 것이 청년에게도 좋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칸트는 “미성년 상태란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는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라고 했다. 청년들 또한 진보 개혁 세력의 그늘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지성을 사용해야 할 때다. 늙은 진보의 편에서 동원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대신, 비난받는 한이 있더라도, 독자적 이해관계를 더 명확히 드러내고 필요하다면 기꺼이 대립할 필요가 있다. 청년들 스스로 감히 생각하는 것, 그것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투쟁이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5172109495&code=990100&s_code=ao122
경제적으로 미성년자 취급당하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대한민국의 청년이다”
2008년부터 2015년까지, 인생의 약 4분의 1에 해당하는 긴 시간 동안, 나는 ‘20대 논객’ ‘청년 논객’으로 살아왔다. 2010년에는 뒤늦은 입대를 했는데, 제대할 무렵이 되면 더 이상 20대가 아니므로 ‘20대 논객’ 꼬리표를 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착각이었다. ‘20대’를 위한 지면은 ‘2030’을 위한 것으로, 혹은 청년세대 전체의 것으로 탈바꿈했다. 이등병이 예비역 병장 되듯 나는 20대 논객에서 청년 논객으로 진급했다.
이러한 제자리걸음은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었다. 청년고용촉진특별법에서 청년을 29세까지로 한정하자 30세를 넘긴 미취업자들의 반발이 쏟아진 사례를 생각해보자. 결국 대상 연령을 34세까지 늘리면서 불만은 어느 정도 진정되었지만, 대체 몇 살까지가 ‘청년’인가.
질문을 다른 각도에서 던져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청년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최근 국민연금 개혁안을 놓고 벌어진 논란을 지켜보며 나는 하나의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몸은 다 컸고 법적으로도 미성년자에서 벗어났지만, 경제적으로는 여전히 미성년자 취급을 당하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청년이다.
여기서 ‘미성년자 취급’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지닌다. 청년들은 취업준비생이거나 갓 취업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취약한 상태다. 그러므로 그들을 보호하고 육성해야 한다는 주장은 언제나 옳은 것으로 인정된다. 청년들을 ‘위한’ 정책들은 지금도 수없이 연구되고 또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하지만 청년들은 어디까지나, 특히 경제적 영역에서 미성년자에 불과하기에, 청년들을 ‘위한’ 정책은 있을지언정 그들에 ‘의한’ 대안은 환영받지 못한다. 특히 청년들 스스로의 이해관계가 그들을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는 기성세대와 대립하는 경우가 문제다. ‘착한 타자’의 자리에서 벗어나면 곧장 의심의 눈초리가 날아든다. 젊은이들의 반발은 공포와 괴담에 휩쓸린 비이성적 여론으로 치부되기 일쑤다.
국민연금 개혁안에서, 지금부터 보험료율을 어디까지 끌어올려야 할지에 대한 구체적 논의 없이, 일단 소득대체율부터 50%로 못박아야 한다고 야권은 요구했다. 적잖은 청년들은 반발했다. 야권 성향의 언론과 지식인들은 그러한 청년들의 목소리를 ‘보수 언론의 선동에 놀아난다’는 식으로 매도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소득대체율을 40%에서 50%로 올린다 해도 당장의 노인 빈곤 문제와는 무관하다. 빈곤 노인들은 국민연금 사각지대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개혁 진보 세력은 세대 간 연대니 공동체의 의무니 하는 원론적인 정답만 되풀이할 뿐이다.
한국은 복지예산 비중이 너무 낮은 나라다. 또한 지나치게 많이 쌓인 연기금이 주식시장에서 주가 방어에 쓰임으로써, 결국 저소득층의 돈으로 자산시장을 지탱하는 결과를 낳는 것은 정의롭지 못한 일이다. 하지만 지금 야권은 ‘2060년쯤 되면 적립금이 사라지는 게 당연하다’며, 쟁여둔 곶감은 자신들이 다 빼먹는다는 전제하에, ‘그때까지는 보험료율을 1%포인트만 올려도 충분하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과연 청년들이 그들을 신뢰할 수 있을까.
2008년 이후 언론 지면에 등장한 젊은 논객들에게는 나름의 자체적 가이드라인이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청년들의 문제를 가시화하되 기존의 진보적 가치, 조직, 여론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것은 단지 논객들뿐 아니라 청년층 전반의 지배적 기조이기도 했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그토록 ‘20대 개새끼론’이 횡행했음에도, 지난 대선에서 야당에 표를 몰아주었다. 당장은 보답을 기대하기 어렵더라도, 진보 개혁 세력에게 좋은 것이 청년에게도 좋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칸트는 “미성년 상태란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는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라고 했다. 청년들 또한 진보 개혁 세력의 그늘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지성을 사용해야 할 때다. 늙은 진보의 편에서 동원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대신, 비난받는 한이 있더라도, 독자적 이해관계를 더 명확히 드러내고 필요하다면 기꺼이 대립할 필요가 있다. 청년들 스스로 감히 생각하는 것, 그것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투쟁이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5172109495&code=990100&s_code=ao122
2015-05-14
팩트체크를 체크해본다
JTBC 뉴스룸의 인기 코너(라고 팟캐스트로 '5시 정치부회의'를 들으면 광고가 나오는) '팩트체크'를 진행하는 김필규 기자는, 트위터에서 "[팩트체크] 한국 남녀평등 지수 117위…정말 최하위국?"(2014년 10월 방송분)에 대한 논란이 커지자 직접 해명의 말을 남겼다. 자신의 해명이 일부 편집되어 돌아다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해당 내용이 담긴 이미지 파일을 첨부하여 트윗을 올렸던 것이다.
자신이 지난 150회 동안 팩트체크를 어떻게 진행해왔는지, 그 속에서 성평등과 관련된 내용들을 언제 어떻게 다루었는지 해명한 앞의 두 문단을 넘어서면, 본격적으로 문제가 된 회차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다시 한 번 인용해보자.
제도권 언론에서 활동하는 언론인 중 적잖은 이들은 여성들이 성평등과 관련해 보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때 그냥 무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반면 김필규 기자는 이 문제제기가 큰 논란으로 번지거나 하지 않은 상황에서, 자신이 해당 꼭지를 만드는 취지와 비판에 대한 소회를 정직하게 밝혔다. 이것은 매우 상식적인 대응이지만 최근 언론과 방송계의 소수자 인권 감수성이 비상식적 수준을 노출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점과 대조했을 때,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김필규 기자는 자신이 WEF의 통계를 지적한 방식이 왜 잘못되었는지 명확하게 파악을 하고 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문제 제기를 한 많은 사람들은 팩트체크의 해당 꼭지를 방송으로, 혹은 재방송으로 전부 본 사람들이다. 일부 화면만 짤방으로 돌아다니는 걸 보고 트집을 잡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겠지만, "부분적인 내용만 발췌된 것은 아닌지" 아쉬워하기 전에, WEF의 통계에 대한 자신의 분석 방법을 검토해주셨으면 하는 마음에 블로그에 글을 하나 쓴다.
그에 대해서는 나 자신의 지식이 부족할 뿐 아니라, 트위터 사용자 코르기에르고숨(https://twitter.com/corgit_corgit)님이 정확한 지적을 해주셨으므로, 그 트윗들을 길게 인용하는 것으로 갈음하기로 하자.
학교에서의 시험에 비교해보자. GGI는 각 과목별로 개별 석차를 구한 후, 그 석차를 모두 더한 후 과목 수로 나눠서 전체 석차를 내는 방식이다. 국어, 영어, 수학, 기술, 가정 이라는 다섯 과목이 있다고 한다면, 국영수는 단기간에 성적을 내기 힘든 중요 과목이지만, 기술과 가정은 시험 전날 교과서를 잘 외우기만 해도 괜찮은 점수가 나오는 단순 암기 과목이다.
여기서 김필규 기자는 '국영수 못하는 애들이 기술과 가정 달달 외워서 높은 순위 받아서 전체 석차 높이는 경우도 있는데, GGI는 그런 맹점을 가진 통계'라는 논점을 제기한 셈이다. 물론 그것은 사실이며, WEF에서도 그러한 문제점을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긴 하다. 하지만 위에 인용된 코르기에르고숨님의 트윗 중 5번과 6번에서 잘 설명된 것처럼, 말하자면 기술과 가정에 해당하는 교육 및 건강 부문은 원래 그렇게 남들도 다 잘 보는 과목이다. 그건 우리가 어쩔 수가 없다.
결국 높은 점수를 받고 성적 상위권에 오르기 위해서는 국영수에서 고루 높은 점수를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은 나름 우등생 그룹에 속하는 나라고, 국영수 포기한 채 기술과 가정에 올인하는 학생들과 스스로를 비교하는 것은 그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다.
더구나 '기준이 잘못되어 있다'고 지적된 교육 및 건강 부문을 제외하고 봐도, 한국의 순위는 말하자면 '심해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한국은 기술과 가정에서 특별히 이익을 보지 못했지만, 국영수에 속한다 할 수 있는 경제활동참가율에서 124위, 정치 참여에서 93위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교육은 103위, 건강은 74위다. 오히려 국영수에서 깎아먹는 점수를 미약하게나마 암기과목으로 땜빵하고 있는 그런 나라인 셈이다.
다이아몬드 그래프에서 파란 선이 한국의 점수, 검은 선이 전체 평균이다. 한국의 순위가 떨어진 건 경제와 정치에서 깎아먹은 탓이지, 건강과 교육이 '잘못 채점된' 탓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레소토의 예를 들어 '우리가 억울하게 비교당하고 있다'는 김필규 기자의 말은, 본인의 의사야 어찌됐건 '한국은 남녀평등이 이미 실현되었다'거나 '이미 여성상위 사회인데 왜 여성가족부 해체 안 하냐'고 볼멘소리를 하는 남자들에게 악용될 수밖에 없다. 많은 이들이 트위터에서 지적하고 우려를 표한 것도 바로 그 대목이다.
유튜브에 올라온 해당 회차 팩트체크의 리플을 살펴보자. 인터넷 공간에서 남자들의 여성혐오가 과대표현 혹은 과다대표된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하나같이 일관되게 해당 방송 회차의 결론과는 거리가 먼 소리만 하고 있다. 여자들은 별로 억울할 일이 없고, 당한 것도 없는데 남자들의 몫을 과도하게 빼앗아가려 한다는 식의 볼멘소리만 가득하다. 이것이 기본적인 여론 지형이다. 그다지 좋아하는 표현은 아니지만, '기울어진 운동장'인 셈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통계의 오류를 지적할 때에는 '후진국이 우리보다 순위가 높다'는 식의, 어떤 면에서는 다소 '아프리카 후진국'에 대한 편견에 기대고 있다고 의심받을 수 있는 논의를 지양해야 했다. 또한, 그 통계의 오류를 바로잡더라도 한국의 성 격차는 여전히 심해권이고 노답 수준이라는 것을 보다 명확하고 강렬하게 표현했어야 한다. KBS 9시 뉴스를 보다가 종종 리모콘을 돌려 팩트체크 코너를 확인하는 한 사람의 시청자로서, 앞으로도 보도 방향과 개별적 사항에 대한 검증 방식을 관심있게 지켜볼 예정이다.
@FeFeFe2015 @moonformee @resist8765 따가운 지적 직접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의 글이 답변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지적해 주신 부분은 잘 염두에 두겠습니다.
https://twitter.com/jtbcfc/status/598350930543706112
자신이 지난 150회 동안 팩트체크를 어떻게 진행해왔는지, 그 속에서 성평등과 관련된 내용들을 언제 어떻게 다루었는지 해명한 앞의 두 문단을 넘어서면, 본격적으로 문제가 된 회차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다시 한 번 인용해보자.
마음에 안드셨던 해당 방송의 경우 WEF 발표가 막 나온터라 궁금증을 풀어준다는 차원에서 지수산정방식을 분석한 것이며, 역시 결론에서는 기업임원의 남녀 비율, 사회진출비율 등으로 볼 때 양성평등의 길이 멀다는 것을 지적했습니다.
부분적인 내용만 발췌된 것은 아닌지 아쉬운 마음도 있지만, 시청자분들께 그런 오해의 소지를 만들고 서운함을 드린점은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특히 성평등 문제에 있어선 어떤 바이어스도 없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란 점을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제도권 언론에서 활동하는 언론인 중 적잖은 이들은 여성들이 성평등과 관련해 보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때 그냥 무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반면 김필규 기자는 이 문제제기가 큰 논란으로 번지거나 하지 않은 상황에서, 자신이 해당 꼭지를 만드는 취지와 비판에 대한 소회를 정직하게 밝혔다. 이것은 매우 상식적인 대응이지만 최근 언론과 방송계의 소수자 인권 감수성이 비상식적 수준을 노출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점과 대조했을 때,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김필규 기자는 자신이 WEF의 통계를 지적한 방식이 왜 잘못되었는지 명확하게 파악을 하고 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문제 제기를 한 많은 사람들은 팩트체크의 해당 꼭지를 방송으로, 혹은 재방송으로 전부 본 사람들이다. 일부 화면만 짤방으로 돌아다니는 걸 보고 트집을 잡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겠지만, "부분적인 내용만 발췌된 것은 아닌지" 아쉬워하기 전에, WEF의 통계에 대한 자신의 분석 방법을 검토해주셨으면 하는 마음에 블로그에 글을 하나 쓴다.
그에 대해서는 나 자신의 지식이 부족할 뿐 아니라, 트위터 사용자 코르기에르고숨(https://twitter.com/corgit_corgit)님이 정확한 지적을 해주셨으므로, 그 트윗들을 길게 인용하는 것으로 갈음하기로 하자.
1. GGI는 실제로 여성이 누리는 사회적 자원과 기회의 "수준"을 반영하지 못한다. 예컨대 프랑스(16위)의 여성은 필리핀(9위)의 여성보다 더 높은 수준의 교육, 의료복지를 누리지만 그런 국가별 수준이 반영되지 않는다. 단지 "격차"만을 반영한다.
https://twitter.com/corgit_corgit/status/597812370333765632
2. 또한 국가별 고유한 정책이나 문화, 관습 예컨대 시어머니의 시집살이나 여성 성기절제 등은 고려되지 않는다. 그러한 한계가 있음은 인정하지만 jtbc 김필규 기자의 지적은 문제가 있다.
/https://youtu.be/zrpxhvz8Jj0
https://twitter.com/corgit_corgit/status/597812422796128256
3. 먼저 WEF는 4개 부문(경제, 교육, 건강, 정치), 14개 항목을 바탕으로 GGI를 산출한다. 각 항목별 가중치는 존재하고 부문별 가중치는 없다. 예컨대 건강부문에서 남성대비 기대수명(0.307)보다 낙태되지 않을 확률(0.693)이 두 배
https://twitter.com/corgit_corgit/status/597812499186978816
4. 넘는 가중치를 가진다. 하지만 "각 부문별 지수는 가중치가 없이" 더해서 4로 나눈다. 그럼 국가별 GGI가 나온다.
https://twitter.com/corgit_corgit/status/597812558418939904
5. 김기자가 지적한 대학진학률을 포함하는 교육부문은 26개 국가가 만점인 1점을 받고 100위 국가가 0.9693점을 받는다. 즉 다른 부문에 비해 격차가 매우 좁다.
https://twitter.com/corgit_corgit/status/597812637871710208
6. 한편 건강부문 역시 격차가 좁은데 35개 국가가 0.9796점으로 공동 1위이고 100위인 국가가 0.9694점을 받는다.
https://twitter.com/corgit_corgit/status/597812723401887744
7. 이에 반해 정치부문은 국가별 격차가 심하고 이 부문 상위8개 국가가 순서만 바뀌면서 종합 8위를 모두 차지한다.
https://twitter.com/corgit_corgit/status/597812808667897856
8. 경제부문은 가장 고르게 분포하는 편이다. 즉 "정치, 경제부문"에서 종합순위가 판가름 난다.
https://twitter.com/corgit_corgit/status/597812908899176448
9. 결론: 한국의 교육부문 순위를 핑계로 WEF의 신뢰도를 문제 삼는 것은 문제가 있다. 한국의 GGI 순위가 매우 낮은 것은 교육부문의 평가방식이 아니라 "정치, 경제부문"의 순위가 매우 낮기 때문이다.
https://twitter.com/corgit_corgit/status/597815552405471232
10. 웃픈 점은 정치부문에서 가장 가중치가 높은 '50년간 여성 국가원수 재임기간'항목에서 39위를 했음. 박근혜에게 모든 영광을~
https://twitter.com/corgit_corgit/status/597815608701423616
학교에서의 시험에 비교해보자. GGI는 각 과목별로 개별 석차를 구한 후, 그 석차를 모두 더한 후 과목 수로 나눠서 전체 석차를 내는 방식이다. 국어, 영어, 수학, 기술, 가정 이라는 다섯 과목이 있다고 한다면, 국영수는 단기간에 성적을 내기 힘든 중요 과목이지만, 기술과 가정은 시험 전날 교과서를 잘 외우기만 해도 괜찮은 점수가 나오는 단순 암기 과목이다.
여기서 김필규 기자는 '국영수 못하는 애들이 기술과 가정 달달 외워서 높은 순위 받아서 전체 석차 높이는 경우도 있는데, GGI는 그런 맹점을 가진 통계'라는 논점을 제기한 셈이다. 물론 그것은 사실이며, WEF에서도 그러한 문제점을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긴 하다. 하지만 위에 인용된 코르기에르고숨님의 트윗 중 5번과 6번에서 잘 설명된 것처럼, 말하자면 기술과 가정에 해당하는 교육 및 건강 부문은 원래 그렇게 남들도 다 잘 보는 과목이다. 그건 우리가 어쩔 수가 없다.
결국 높은 점수를 받고 성적 상위권에 오르기 위해서는 국영수에서 고루 높은 점수를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은 나름 우등생 그룹에 속하는 나라고, 국영수 포기한 채 기술과 가정에 올인하는 학생들과 스스로를 비교하는 것은 그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다.
더구나 '기준이 잘못되어 있다'고 지적된 교육 및 건강 부문을 제외하고 봐도, 한국의 순위는 말하자면 '심해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한국은 기술과 가정에서 특별히 이익을 보지 못했지만, 국영수에 속한다 할 수 있는 경제활동참가율에서 124위, 정치 참여에서 93위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교육은 103위, 건강은 74위다. 오히려 국영수에서 깎아먹는 점수를 미약하게나마 암기과목으로 땜빵하고 있는 그런 나라인 셈이다.
출처: Gender Gap Index 2014, Rep. Korea |
다이아몬드 그래프에서 파란 선이 한국의 점수, 검은 선이 전체 평균이다. 한국의 순위가 떨어진 건 경제와 정치에서 깎아먹은 탓이지, 건강과 교육이 '잘못 채점된' 탓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레소토의 예를 들어 '우리가 억울하게 비교당하고 있다'는 김필규 기자의 말은, 본인의 의사야 어찌됐건 '한국은 남녀평등이 이미 실현되었다'거나 '이미 여성상위 사회인데 왜 여성가족부 해체 안 하냐'고 볼멘소리를 하는 남자들에게 악용될 수밖에 없다. 많은 이들이 트위터에서 지적하고 우려를 표한 것도 바로 그 대목이다.
유튜브에 올라온 해당 회차 팩트체크의 리플을 살펴보자. 인터넷 공간에서 남자들의 여성혐오가 과대표현 혹은 과다대표된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하나같이 일관되게 해당 방송 회차의 결론과는 거리가 먼 소리만 하고 있다. 여자들은 별로 억울할 일이 없고, 당한 것도 없는데 남자들의 몫을 과도하게 빼앗아가려 한다는 식의 볼멘소리만 가득하다. 이것이 기본적인 여론 지형이다. 그다지 좋아하는 표현은 아니지만, '기울어진 운동장'인 셈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통계의 오류를 지적할 때에는 '후진국이 우리보다 순위가 높다'는 식의, 어떤 면에서는 다소 '아프리카 후진국'에 대한 편견에 기대고 있다고 의심받을 수 있는 논의를 지양해야 했다. 또한, 그 통계의 오류를 바로잡더라도 한국의 성 격차는 여전히 심해권이고 노답 수준이라는 것을 보다 명확하고 강렬하게 표현했어야 한다. KBS 9시 뉴스를 보다가 종종 리모콘을 돌려 팩트체크 코너를 확인하는 한 사람의 시청자로서, 앞으로도 보도 방향과 개별적 사항에 대한 검증 방식을 관심있게 지켜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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