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8-14

[북리뷰] 그들의 눈으로 침략을 되짚어본다

그들이 본 임진왜란
김시덕, 학고재, 1만5천원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여 대형 빌딩을 뒤덮은 거대한 태극기들을 바라보며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명확히 알 수 있다. 대한민국은 일본으로부터 독립했다는 것을 그 정체성의 근간으로 삼는 나라다. 그리고 일본에 의한 한반도 침략의 근원적 경험은 결국 임진왜란으로 수렴한다.

임진왜란은 한국인들의 정신세계를 좌우하는 가장 근본적인 서사 중 하나다. 춘원 이광수의 <이순신전>은 우리가 아는 '그 임진왜란' 이야기의 원형과도 같다. 최종 결정권자인 왕은 무능하고 의심만 많으며 자기 살 궁리나 한다. 역시 무능하기 짝이 없는 신하들은 당파싸움에 정신이 팔려 일본이 쳐들어온다는 사실을 예상하면서도 대비를 게을리했다. 그 와중에 고군분투하는 단 한 사람의 장군, 이순신은, 끝까지 이용당하다가 결국 죽음으로 내몰린다.

이러한 임진왜란 서사의 가장 큰 문제점은 너무도 조선 중심적이라는 것이다. 임진년에 왜가 쳐들어와 난리가 났다는 그 명칭에서 이미 시각의 폭이 결정되어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왜란'이었던 그 사건은, 일본인들의 눈으로 볼 때, 전국시대의 막바지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 세력의 몰락을 불러온 거대한 패착이었다. 명나라는 만력제가 조선에서의 전쟁에 뛰어드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결국 멸망의 길로 접어든다. 조선과 명나라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 만주에서는 누르하치 세력이 힘을 얻고 결국 청나라를 일으킨다. 임진왜란은 국제전이었고, 동아시아의 역사의 큰 결절점이었던 것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소 교수인 김시덕은 <그들이 본 임진왜란>에서, 우리에게 너무도 친숙한 '그 임진왜란'을 벗어나기 위해 시도한다. 본디 고문서학자인 그가 택한 방법은 일본에서 출간된 대중적 출판물들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은 에도 막부 시대가 열리면서 경제적으로 발전했고, 수많은 대중 출판물이 범람하였는데, 그 중 임진왜란은 인기 있는 이야기거리였기 때문이다.

출판문화가 꽃을 피운 에도 시대에는 출판물이 당대인의 세계관·역사관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므로 에도 시대 일본인들의 정신에 자리한 임진왜란관 및 한국·중국관에 결정적 영향을 준 것은 고문서가 아니라 이들 대중적 문헌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필자가 에도 시대의 베스트셀러 출판물을 주목해 임진왜란을 이해하고자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43쪽)

<그들이 본 임진왜란>은 단지 에도 시대 베스트셀러들의 내용을 중점적으로 소개할 뿐 아니라, 임진왜란의 발발 및 전반적인 진행 과정을, 역시 외부인의 눈으로 조망하는 책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에도 시대의 일본인들이 임진왜란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고, 그들의 관점이 어떤 경로로 형성되었는지, 명백한 문헌적 증거를 통해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일본인들이 임진왜란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 <징비록>의 일본판인 <조선징비록>이 출간되면서 '그들이 본 임진왜란'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등의 자세한 내용은 책을 통해 확인해보도록 하자. 중요한 건, 그 무엇보다 먼저, 임진왜란이 '우리들만의 역사'가 아님을 명확히 이해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그 전쟁을 겪었고 곱씹었다. 그것은 물론 침략자로서의 시각이긴 하지만, 침략자였던 그들이 임진왜란을 이해했던 방식을 조선인들은 훗날까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현대 한국인들 역시 마찬가지다.

임진왜란은 '해양 세력'인 일본이 '대륙 세력'인 중국을 집어삼키기 위해 그 첫 단계로 조선을 침공하면서 벌어진 전쟁이다. 그러나 우리는 임진왜란을 그저 '무능한 왕 - 분열된 조정 - 고독한 장군'의 삼각 구도를 통해서만 이해해온 것이 사실이다. 이제 우리의 역사적 관점을 한 단계 업데이트해보자.


2015.08.25ㅣ주간경향 1140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5-08-12

'딱 중학생 수준에 맞춰서'라는 표현에 대하여

내가 저널리즘의 세계에 들어와 내딛은 첫걸음은 주간지 기자가 된 것이었다. 그때 선배기자로부터 엄하게 가르침을 받았는데 그 내용은 '문장의 구석구석까지, 과연 중졸짜리도 알 수 있을까 자문하면서 알기 쉬운 문장을 쓰라'는 것이었다. 같은 얘기를 지금의 신입기자들에게 했다면 오해를 초래할 것이다. 당시와 지금은 학력구성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그 시점(1964년)에서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그해 취직한 사람만을 생각해도 중졸자가 틀림없이 30퍼센트 정도는 있었다. 이미 성인이 되어 사회인이 되어 있는 사람들 전체의 학력을 생각해보면 당시는 중졸자가 다수파였던 것이다. 지금은 고졸자가, 곧 대졸자가 사회의 다수파가 된다. 그렇다고 해서 평균적 고졸자가 가진 지식을 공유지식이라 전제하고 글을 쓰려 해도, 과학이나 기술이 관련되는 문제라면 어느 시대의 고졸자를 전제로 해야 하는지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질 것은 앞서 이야기한 대로다.(202쪽, 강조는 인용자)

다치바나 다카시, 박성관 옮김, 『지식의 단련법』(서울: 청어람미디어, 2009)

한국에서도, 특히 방송계에서 많이 쓰는 표현이다. '딱 중학생 수준에 맞춰서 컨텐츠를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 말이다. 그런데 한국의 많은 업계에서 사용되는 은어, 작업 관행, 표준 등이 일본에서 왔음을 전제로 해보면, '중학생에게 눈높이를 맞춰라'라는 표현 역시 일본에서 수입된 것이 아닐까 추측해볼 수 있다.

그 경우 현재 한국의 대중매체 종사자들이 아무 비판적 고찰 없이 저 표현을 되뇌이며 '중학생의 눈높이'에 맞춰 글을 쓰고 방송을 만드는 것은, 대중의 지적 수준을 오히려 끌어내리는 역할을 한다는 비판이 가능해진다. 과거의 중학생 수준이라면, 지금은 대학교 신입생 정도에 비교할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즉 '대학 신입생 교양 교재로 쓸 수 있을만한 무언가를 만들라'고 해야 올바르지 않을까. 그렇게 눈높이를 설정하는 것은 사회 전체의 이익에도 부합한다. 물론 시청률이나 구독률 등에는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말이다.

2015-08-09

[별별시선]조선왕조 대 대한민국

광복 70주년을 앞두고 있는 이 시점에 질문을 하나 던져보자. 과연 세상의 모든 나쁜 것들은 다 ‘일제 잔재’이며, ‘우리 고유의 것’들은 모두 옳았는가? 역사학자 도면회 교수는 바로 그러한 통념에 도전했다. <한국 근대 형사재판제도사>를 인용해본다. “예를 들어 기존 연구 성과에서는 식민지 무단통치의 상징적 사례로 조선인에게만 태형을 실시했다는 사실을 지적해왔다. 심지어는 태형이 갑오개혁기에 폐지되었다가 일제 통치하에서 부활했다고 서술한 개설서나 교과서도 많다.”

‘일제시대’에 대한 이미지가 대체로 이런 식이다. 악은 일본에서 왔고, 설령 일제가 ‘우리’에게 뭔가 좋은 것을 선사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더 많은 수탈을 하기 위한 투자였으므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는 식의 사고방식 말이다. 하지만 조선과 대한제국은, 망국으로 치닫고 있던 그 시점, 문제가 많은 나라였다. “태형은 갑오개혁기에 폐지되기는커녕 중앙과 지방에서 법적 한도를 넘어 인명 살상에 이를 만큼 남용”되었으며, 그에 따라 일본은 “한국인들이 오랫동안 학정에 시달려 왔으므로 국정을 개선하면 한국인의 민심도 쉽게 수렴할 수 있고, 이를 통해 한국인들의 일본에 대한 저항을 잠재울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 것이다.

애석하게도 그들의 예상은 옳았다. 관군이 무너지고 있을 때 의병이 일어나 전세를 역전시켰던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은 이미 아득한 옛일이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대한제국의 황제와 고위 관료, 한때 2만여명에 달했던 한국군은 어찌하여 총 한 방 제대로 쏘지도 못한 채 권력을 빼앗기거나 무장해제를 당했단 말인가? 국가의 멸망을 앞에 두고 어찌하여 양반 유생층 일부만이 의병 투쟁에 나섰을까? 전국적 항쟁은 왜 일어나지 않았을까?” 조선의 뒤를 이은 대한제국의 백성들에게, 그 나라는 목숨을 걸고 지킬 가치가 없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조선왕조는 그렇게 몰락했다.

그리고 대한민국이 태어났다. 대한민국은 출발부터 조선왕조와는 단호히 선을 그었다. 헌법 전문을 펼쳐보자.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는 나라다. 물론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는 고조선부터 대한제국까지의 모든 과거가 포함되겠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이 민주공화국은 조선왕조가 아니라 그 지배층이 지켜주지 못한 망국의 백성들의 저항에서 시작한 나라인 것이다.

광복을 맞이한 지 벌써 70년이 다 되어서 그런지, 대한민국을 부수고 조선왕조를 건설하려는 이상한 움직임이 눈에 띈다. 종로도서관과 서울시립어린이도서관을 철거하고 사직단을 ‘복원’하겠다는 발상만큼이나, 태릉선수촌을 헐고 태릉과 의릉을 ‘복원’한다는 계획은, 조선왕조가 아닌 대한민국의 국민인 내게 모욕적으로 느껴진다. 망한 왕조의 귀신 모시는 자리가 민주공화국의 시민들이 이용하는 도서관이나 그 시민들을 대신해 국제무대에 서기 위해 훈련했던 운동선수들의 피땀 어린 공간을 밀어낼 수 있다는 발상이 과연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이러한 퇴행적인 문화재 ‘복원’ 시도는 오늘날 대한민국이 처해 있는 정체성의 위기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듯하다. 대한민국의 가치라 믿었던 것들이 부정당하고, 대신 조선왕조 시대에나 통용되었을 법한 사고방식이 복귀하고 있는 것이다. 헌법 제11조는 법 앞에서의 평등을 선포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는 대대적인 8·15 특사가 이루어질 것이며 ‘경제인’에 대한 사면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고한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이 말이 이토록 공허하게 들릴 수가 없다.

“황제의 전제권이 확립된 이후에는 사면 조칙이 더욱 빈번하게 반포되어 재판기관의 존재를 무색하게 할 정도가 되었다.” 대한제국이 그랬다. 대한민국은 망국의 역사를 되풀이하려는 듯하다. 경제적 격차는 신분제의 부활처럼 무겁다. 젊은이들은 ‘헬조센’에서 탈출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기 시작했다. 지옥을 뜻하는 ‘헬’과 조선의 일본식 발음 ‘조센’을 합친 말이다. 해방 70년, 조선왕조를 이겨내지 못하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다.


입력 : 2015.08.09 21:26:38 수정 : 2015.08.09 21:28:05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8092126385&code=990100#csidx647113877f821889e0a27d5af591661

2015-07-31

[북리뷰] 한국이 싫어서 떠나는 우리들에게

한국이 싫어서
장강명, 민음사, 1만3천원.


문득 떠올려보면, 장강명 이전에 황지우가, '한국을 뜨고 싶다'는 욕망을 문학으로 포착해냈다. 영화 시작 전 애국가가 울려퍼지는 극장에서 "우리도 우리들끼리 / 낄낄대면서 / 깔쭉대면서 /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 한 세상 떼어 메고 /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싶지만, 행만 바뀐 채 곧장 이어지는 문장으로 현실이 엄습한다. "하는데 대한 사람 / 길이 보전하세로 /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 주저앉는다" 황지우의 절창 '새들도 새상을 뜨는구나'의 뒷부분이다.

기자 출신의 젊은 소설가 장강명의 <한국이 싫어서>도 비슷한 정서의 화자를 주인공으로 삼는다. 하지만 이제는 극장에서 애국가가 나오는 세상이 아니기에,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당하는 나라가 아니기에, "주저앉는다" 외의 다른 선택지가 가능해졌다. 한국이 싫어서, 한국을 떠나고자 마음먹고 실행에 옮기는 '계나'라는 이름의 여성이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왜 한국을 떠났느냐. 두 마디로 요약하면 '한국이 싫어서'지. 세 마디로 줄이면 '여기서는 못 살겠어서.' 무턱대고 욕하진 말아 줘. 내가 태어난 나라라도 싫어할 수는 있는 거잖아. 그게 뭐 그렇게 잘못됐어? 내가 지금 "한국 사람들을 죽이자. 대사관에 불을 지르자."고 선동하는 게 아니잖아? 무슨 불매운동을 벌이자는 것도 아니고, 하다못해 태극기 한 장 태우지 않아. 미국이 싫다는 미국 사람이나 일본이 부끄럽다는 일본 사람에게는 '개념 있다'며 고개 끄덕일 사람 꽤 되지 않나?(11쪽)

모든 사람들이 한번쯤은 입에 담아봤을 바로 그 말, '에이, 이놈의 나라에서 더는 못 살아'를 적나라하게 제목에 담아냈다는 것만으로 이 책은 발간 즉시 화제작이 되었다. '한국이 싫어서' 떠나고 싶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어쩔 수 없이 뭉개고 살고 있다는 것, 그것은 대한민국의 공공연한 비밀이었던 것이다. <한국이 싫어서>는 계나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 화자의 입을 통해, 한국이 싫어서 이민을 꿈꿨지만, 정말 한국이 싫어서라기보다는 삶에서의 작은 행복을 찾고 싶어서 한국을 떠나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직선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한국이 싫어서>는 2015년 최고의 문제작이다.

하지만 박수를 몇 번 치고 책장을 덮기엔 아쉬움과 의문점을 남기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떨치지 못한 질문은 이것이다. 작가는 남자인데, 왜 '한국이 싫어서' 이 나라를 떠나는 1인칭 화자는 여성으로 설정되어 있는가? 한국을 굳이 떠나야만 하느냐고 묻는 남자친구에게 계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어차피 난 여기서도 2등 시민이야. 강남 출신이고 집도 잘 살고 남자인 너는 결코 이해 못해."

그렇다. 한국은 한국인들이 사는 나라지만, 그 표준적인 '한국인'은 어디까지나 부모 모두 한국인인 남성일 뿐이다. 실제로 많은 여성들이 해외 여행을 통해, 한국 사회로부터 벗어나는 해방감을 느낀다. 똑같은 일을 해도 남성 대 여성의 평균 임금은 100대 62다. 여성의 노동은 남자의 그것에 비해 절반을 겨우 넘기는 평가를 받는다는 뜻이다. 세계 그 어디에도 완벽한 성평등이 구현된 나라는 없지만, 한국은 유독 심하게 여성에게 가혹하다.

여기서 작중 화자를 여성으로 설정하고 1인칭 서술을 한 장강명의 선택은 양면적 효과를 낳는다. 일단 그는 '드러나지 않았던 목소리'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해냈고, 그 자체만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여성형 1인칭 화자의 내면을 서술되어 있는 탓에, 작가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주인공 계나의 판단과 선택은 사회 통념적 비난을 돌파해낼 수 없다. 이 책은 '요즘 젊은이들'을 손쉽게 비난하는 사람들의 의식 세계를 뒤엎지 못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젊은 여자'의 목소리에 애초부터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은 해외 여행을 가기도 하고 이민을 떠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으로부터, 한국 사람으로부터,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한국이 싫어서> 이후, 더 많은 문학적 도전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해본다.


2015-07-16

[북리뷰] 요리하는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

날것의 인생 매혹의 요리사
후안 모레노, 미라크 탈리에르초, 반비, 2만원.

바야흐로 쉐프 전성시대다. TV만 틀면 칼 든 남자들이 흰 옷을 입고 요리를 하고 있다. 누구는 유학파라는 둥, 누구는 국내에서 공부했지만 그에 못지 않은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둥, 심심찮게 그들의 배경까지도 엿들을 수 있는 세상이다. 하지만 요리라는 것이 과연 쉐프만의 전유물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지금도 수많은 이들이 다양한 장소와 맥락 속에서 요리를 한다. 우리가 요리를 하고 음식을 먹는 것은 숨을 쉬는 것만큼이나 생존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리사들 가운데에는 독특한, 어쩌면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한 사연을 겪은 이들이 있을 것이다. <슈피겔>의 기자 후안 모레노가 사진작가 미르코 탈리에르초와 수다를 떨던 중 떠올린 아이디어도 바로 그것이었다.

"미르코와 나는 독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가장 흥미로운 요리사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우리가 내건 단 하나의 조건은 독자들이 따라 할 수 있는 각자의 최고 요리와 함께 각자의 사연을 들려달라는 것이었다. 음식의 질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이야기의 질이다.(12쪽)"

그렇게 수집된 17명의 요리사들이 보여주는 사연들은 하나같이 비범하고, 때로는 충격적이며, 어떤 경우에는 슬픔을 안겨준다. 삼촌의 식당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삼촌이 마피아의 거물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오히려 인기를 끌었고, 지금은 빌 클린턴이나 마돈나도 예약을 하지 못할만큼 잘나가는 뉴욕의 이탈리안 레스토랑 '라오스'의 쉐프인 프랭크 펠레그리노의 경우는 그저 재미있고 유쾌하다.

하지만 우간다의 독재자 이디 아민의 전속 요리사였던 오돈테 오데라의 이야기는, 그저 인터뷰를 통해 전해듣고 있을 뿐인데도 다소 섬뜩한 인상을 남긴다. 그 반대편에는 시위 현장마다 찾아다니며 '배가 고프면 투쟁도 없다'고 사람들을 독려하고 음식을 만들어 제공하는 밤 카트 같은 사람도 있고, 사라예보 내전에서 군인으로서 싸우다가 탈출하여 요리사의 길을 걷고 있는 니하드 마멜레지야의 사연도 존재한다. 요컨대, '요리사'라는 단 하나의 범주를 제외하고 나면,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이 더 많을 사람들의 이야기가 한 권의 책에 묶여 있는 것이다.

저자의 말은 단호하다. "레시피가 들어 있지만 이 책은 요리책이 아니다. 스타 요리사의 이야기가 있지만 스타에 대한 책도 아니다. 음식 이야기가 계속 나오지만 음식에 관한 책도 아니다. 이것은 오직 요리사에 관한 책이다."(13쪽) 그 요리사의 범주는 대단히 탄력적이며, 그만큼 많은 삶의 모습이 포착된다. 나이로비의 쓰레기 집하장에서 살아가면서 그 속에서 살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상대로 식당을 운영하는 여성이라던가, 텍사스 교도소에서 그 자신도 죄수의 신분으로 200명이 넘는 사형수에게 최후의 만찬을 차려주었던 남성 등,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뛰어넘는 모습이 <날것의 인생 매혹의 요리사>에 담겨 있다.

이 책을 직접 읽어보는 것은 독자의 몫으로 남기기로 하고, 여기서 우리의 현실을 돌이켜보자. 그렇게 TV만 틀면 누군가가 요리를 하거나 그것을 먹는 모습이 등장하고 있건만, 그 모든 요리사들은 '쉐프' 아니면 '엄마'로 양분되는 듯하다. 폼나는 흰 옷을 입고 멋진 태도로 고급스러운 요리를 만들어주는 남자들이 '쉐프'로 불리고 있는 동안, 일상을 지탱시켜주는, 시지프스의 바위 굴리기처럼 끝나지 않는 노동으로서의 '집밥' 차리기는 그저 엄마라는 이름의 여성의 몫일 뿐인 것처럼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요리가 인간의 삶에서 필수불가결한 본질적 요소라면, 그 요리의 양태 역시 다양할 수밖에 없고, 요리를 하는 사람인 요리사 역시 그저 두 가지 범주로만 쪼개질 수는 없다. 후안 모레노와 미르코 탈리에르초가 '다른 그 무엇도 아닌 요리사'에 집중하여 포착해낸 17개의 삶은, 도무지 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우리의 식문화와 그 식문화를 바라보는 비평적 시각을, 문득 부끄럽게 만든다. 먹방의 시대, 천편일률적인 '쉐프'들의 모습을 보는 게 지겨워진 이들에게, <날것의 인생 매혹의 요리사>를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