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9-17

[북리뷰] 우리의 노동, 어디로 가고 있는가

노동여지도
박점규, 알마, 1만6800원.

일을 하고 돈을 버는 우리 모두는 사용자 아니면 피용자, 즉 노동자다. 하지만 '노동자'라는 단어는 2015년 현재, '대기업 노동조합에 소속되어 빨간색 조끼를 입고 파업을 하는 사람들' 정도의 의미로 한정되어 사용되는 듯하다. 게다가 대도시, 특히 서울에서 화이트칼라 사무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많은 경우 수도권 밖의 넓은 세상을 잘 인지하지도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노동여지도>는 바로 그 좁은 편견을 깨주는 책이다. 주간경향의 독자라면 다들 익숙할 바로 그 연재가 묶여서 책으로 나왔다. 저자 박점규는 1998년부터 민주노총에서 홍보와 투쟁을 담당해왔고, 이후 수많은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활동가이면서, 동시에 기록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수원, 울산, 인천, 서울 등 큼지막한 도시들 뿐 아니라, 군산, 구미, 화성, 광양, 동해, 삼척 등의 소도시에도 노동의 현장이 있다. 저자는 "2013년 3월 수원을 출발해 바다 건너 제주까지, 1년 2개월 동안 전국 28개 지역을 돌았"(8쪽)다.

그가 바라보는 전국 노동 현장의 모습은 모두 다르면서도 비슷하다. 각자의 맥락과 상황이 있을테니 다를 수밖에 없지만,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뉘어 절망과 탄식 속에 제한된 희망의 사다리를 올라가기 위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현장에서 일하는 육체노동자들 뿐 아니라, 노동조합과 전혀 관련이 없을 것 같은 대전의 대덕연구개발특구의 연구원들 역시 마찬가지다. 전국공공연구노조 이광오 사무처장의 말이다. "연구원 10명 중 4명이 비정규직이에요. 스펙도 좋고 유학파도 많아요. 지금은 비정규직이지만 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있죠.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 때쯤이면 쫓겨납니다."(171쪽)

<노동여지도>는 뚜렷한 대립각과 입장을 세우는 책이 아니다. 노동자들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에는 깊은 동지애가 느껴지지만, 대체로 사측에 대해서는 깊게 언급하지 않는다. 제한된 지면에 연재된 원고여서일 수도 있지만, 그만큼 노동 현장의 분위기와 상황이 달라서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흔히 말하는 '대기업 정규직 노조'를 언급할 때만큼은 비판적인 뉘앙스를 굳이 숨기지 않는다. "그러나 1997년 IMF 외환위기와 1998년 현대자동차 정리해고에 맞선 36일간의 파업 이후, 울산의 노동운동은 비정규직을 외면한 부끄러운 역사를 지나왔다. 현대자동차 정규직노조는 생산현장에 16.9퍼센트의 비정규직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합의했고, 비정규직과의 노조 통합을 세 차례나 부결시켰다."(29쪽) 그렇게 시간이 흐른 후 "하나의 노동자계급이 일하던 공장은 연봉 9000만원의 A급 직영노동자, 연봉 4500만원의 B급 하청노동자, 초단기 알바로 일하는 C급 촉탁노동자로 나뉘었다."(36쪽)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책은 냉정한 비판적 시각이 아니라 따스한 동지애에 기반하여 쓰여진 책이다. 전국의 수많은 사업장, 그 중에서도 중소기업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화합하여 승리를 얻어낸 사례들을 기록할 때, 저자는 진심으로 기뻐한다. 타다대우상용차의 정규직 선배들이 매년 2천만원이 넘는 성과급을 포기하면서까지 비정규직 후배들을 정규직이 되도록 도와준 사례를 읽고 있노라면 독자의 입에도 절로 미소가 걸린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사례가 그리 흔치만은 않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 같은 대접을 받는 것. 그 당연한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세상이 십수년 째 지속되어왔고, 이제는 정리해고를 넘어 일반해고가 포함된 노사정 대타협안이 통과되었다. 다가올 미래가 그리 희망차 보이지 않는 지금, <노동여지도>를 읽으며 우리의 노동이 나아갈 길을 모색해본다.


2015.10.06ㅣ주간경향 1145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5-09-10

국민에게 정치를 돌려주지 마라

여아를 막론하고 정치권에서는 '국민들에게 정치를 돌려주겠다'는 논의가 한창이다. 물론 그 말을 문자 그대로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결국은 공천권을 둘러싼 갈등이 표현되는 한 양상이며, 총선 후보를 선출하기 위한 선거인단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를 놓고 벌어지고 있는 싸움이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다. 여당에서도 야당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좀 더 원론적인 차원으로 논의를 끌어가보자. 과연 정치권은 국민들에게 정치를 돌려줘야 하는가?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치권이 국민들에게 돌려줘야 할 것은 '정치'의 고유 권한, 말하자면 공천권 같은 게 아니다. 정치권이 국민에게 제공해야 할 것은 올바른 정치의 '결과'다.

정치공학적인 고려를 완전히 배제하고 말해보자. 오픈프라이머리가 됐건 국민공천단이 됐건 그것은 모두 원칙적으로 당원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다. 애초에 당원들에게만 공천투표권을 준다면 역선택을 우려할 필요도 없고 안심번호 같은 기술적 해법을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그러한 방향의 의사 결정이 정당정치의 기본 원리에도 잘 부합한다.

그러나 여당 야당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국민에게 정치를 돌려준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각 계파마다 원하는 결과에 제도를 뜯어 맞추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바라볼 때에만 현재의 논란이 제대로 보인다. 정당은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물적, 제도적, 금전적 지원을 하되, 정작 그 후보는 일부 당원을 포함한 '국민'들의 공천투표를 통해 결정된다면, 대체 누가 무슨 이유로 당비 내는 진성당원 같은 걸 하겠는가 말이다.

앞서도 말했듯 이것은 서로 정치적 계산이 뻔히 서 있는 상황에서, 말하자면 '명분'을 끌어들이기 위한 싸움에 지나지 않지만, 문제는 빌미로 제공된 명분 그 자체다. 다시 원래의 문제 제기로 돌아가보자. '국민에게 정치를 돌려준다'는, 얼핏 들으면 그럴싸한 저 말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세 가지 측면에서 고찰해볼 수 있다.

1) '국민에게 정치를 돌려준다'고 할 때, 그 '국민'은 누구인가?
2) '국민에게 정치를 돌려준다'고 할 때, 그 '정치'란 무엇인가?
3) '국민에게 정치를 돌려준다'고 할 때, '돌려준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첫째, 지금처럼 공천권 싸움을 하면서 '국민'을 운운하는 것은 기만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국민들은 공천받을 일이 없는 인생을 살고 있으며, 정치에 대해 특별히 관심이 있거나 동원되지 않는 한 공천투표권을 행사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국민에게 정치를 돌려준다'고 할 때, 그 '국민'은 재벌 총수부터 서울역 앞 노숙인까지 포함하는 넓은 개념이 아니다. 내년 총선 출마 지망생, 정치적 변화에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 정치 고 관심층 등이 포함되는 협의의 개념일 뿐이다.

둘째, 국민에게 '정치'를 돌려준다는 말은 허위다. 왜냐하면 지금 논의되고 있는 것은 기껏해야 공천권일 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정당정치에서 아주, 사실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는 공천권의 배분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치권 내부에 속한 사람들 사이에서 중요한 문제다. 대부분의 국민들에게 정치가 중요한 것은 그들이 각자의 삶을 최선을 다해 꾸려나갈 수 있게끔 도와주는 공정한 룰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총선 결과, 대선 결과에 따라 삶의 이해관계가 180도 달라지는 그런 삶을 사는 '국민'은 그리 많지 않다. 정치권 동향에 민감한 대기업에 다니거나, 공기업 사원이거나, 공무원이거나, 대선 테마주를 매입했거나, 언론사 직원이거나, 여러 사례를 떠올릴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사람들은 전체 인구 비중을 놓고 볼 때 10퍼센트도 채 넘지 않을 것이다. 나머지 90퍼센트의 국민들이 정치권에 원하는 것은 공천권이라던가, 공천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 따위가 아니라는 뜻과 크게 다르지 않다.

셋째, 그렇기에 국민에게 정치를 '돌려준다'는 말은 거대한 사기극으로 귀결된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공천권으로 표상되는 '정치권 내부의 정치'와 직접적 이해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 따라서 정치권이 뭔가를 '돌려준다'고 해도 받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돌려주긴 뭘 돌려준단 말인가. 그런 복잡하고 세세한 정치권 내부의 역학관계에서의 이득은 국민이 받을 수도 없는데 말이다.

정치권이 국민들에게 해야 할 일은 딱 하나다. 정치의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다. 대통령을 바꿨더니 나라가 더 좋아진다는 결과, 우리 동네 국회의원을 잘 뽑아서 내가 원하는 정책이 실현된다는 그런 결과만이, 정치가 국민에게 약속할 수 있으며 또 제공할 수 있는 무언가이다. 그런 약속을 흔히 공약이라고 하며, 그 공약을 지키지 못했을 때 정치인은 응당한 책임을 져야 한다.

현재 한국에서의 정치에 대한 논의는 완전히 거꾸로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정치인이 자기들끼리 어떻게 공천을 받아서 나오는지 그런 것에 대하여, 국민들 일부의 관심만이 불타오르고 있다. 그 결과, 정작 정치의 결과에 따라 국민 전반의 이해관계가 어떻게 달라지는지에 대해서는 본격적인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지도 못하다. 더욱 큰 문제는 정치인이 자신이 실현하겠다는 결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을 때, 그에 대해 엄중하게 책임을 묻는 문화가 전무하다는 것이다.

국민에게 정치를 '돌려주는' 대신, 정치권이 정치 내부의 일을 알아서 잘 해결하면서, 대신 국민들에게 정확한 결과를 약속하고 그것을 실현하는 문화가 정착되어 있다고 가정해보자. 대신 국민들은 정치가 약속한 결과를 내놓지 못하면 다음번 선거를 통해 책임을 묻는다고 말이다. 그렇다.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민주적 대의정치의 작동 방식이다.

대한민국은 완전히 거꾸로 가고 있다. 소수의 이해관계자 및 정치 고 관심층을 상대로는 무책임한 직접민주주의 비슷한 무언가가 시행되고 있으며, 대부분의 국민들은 정치 그 자체로부터 유리된 채 스스로의 이해관계를 대변해줄 세력을 얻지도 못하고 있다. 이 모든 파행의 결과는 결국 대한민국 전체가 짊어지게 되는데, 그 고통의 배분조차도 불공평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국민에게 정치를 돌려주지 마라. 대신 국민들에게 올바른 정치의 결과만을 안져주길 바란다. 그 결과가 마음에 들면 국민들은 해당 정치 세력을 계속 지지할 것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내팽개칠 것이다.

너무 원론적인 이야기 같지만 원론이야말로 시간과 역사 속에서 검증된 유일한 정답일 때가 많다. 나는 새누리당이나 새정치민주연합의 공천이 아니라 양당이 경쟁하는 총선에서 내 투표권을 행사하여, 내가 원하는 후보와 정당에 투표함으로써, 나의 이익을 지키고 싶다. 그 밖의 논의는, 적어도 내게는, 그저 '지들끼리 치고 박는 잡음'에 지나지 않는다.

아마 다른 수많은 국민들도 비슷하게 느끼고 있을 것이다. 국민에게 필요한 것은 공천권이 아니라, 올바른 후보를 찍어서 발생하게 될 정치의 결과 뿐이다. 그래야 국민도 정치에 올바로 책임을 물을 수 있게 된다. 이 본질적 내용을 도외시하는 정치 개혁 논의는 모두 공허한 말잔치에 지나지 않는다.

[북리뷰] 우리에게도 와 있는 그들, 난민

내 이름은 욤비
욤비 토나, 박진숙, 이후, 1만6500원.


욤비 토나. 1967년 콩고에서 태어나 현재 대한민국에 거주하고 있는 난민이다. 그의 안타까운 사연은 여러 차례 방송으로 소개되었고, 이 책 <내 이름은 욤비> 역시 널리 알려지고 읽힌 편에 속한다. 콩고에서 작은 부족의 왕손으로 태어난 저자는 제2차 콩고 내전과 관련된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려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왔고, 2002년에 망명 신청서를 제출한 후 최종적으로는 법무부를 상대로 한 소송을 거쳐 2008년부터 난민 자격을 인정받은 상태다.

책에 따르면 "2012년 5월 말 기준으로 한국에서 난민 인정을 받은 사람은 294명, 난민 신청을 한 사람은 4515명"(333쪽)이다. 난민 인정률은 13퍼센트 가량으로, 전 세계 평균 난민 인정률이 약 30퍼센트인 것과 비교해볼 때 대단히 낮은 수준이라고 한다. 욤비 토나는 그 13퍼센트의 확률을 이겨내고, 약간 높이는 데 기여한, 드문 사례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일러두기에 따르면 "이 책은 욤비 토나가 구술한 내용을 박진숙이 기록한 것이다." 책의 내용은 욤비 토나의 궤적을 순서대로 추적하고 있다. 그가 13세에 처음 기숙학교로 떠나던 순간부터, 어떻게 본인이 지망하지 않았던 경제학과에 진학하여 비밀정보국 요원이 되었는지, 왜 중국을 통해 한국에 도착한 난민이 되어야 했는지에 대해 충실한 설명을 제공한다.

각 장이 끝날 때마다 부연 설명이 추가되어 있는데, 그 각각은 욤비 토나라는 한 사람의 삶으로부터 난민 문제 전체를 바라볼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해준다. 가령 욤비 토나의 어린 시절이 담긴 1장의 끝에는 콩고민주공화국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이 따라붙고, 그가 대학에 들어가고 사회에 발을 내딛는 2장이 마무리되면서 32년간 장기집권한 독재자 모부투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 식이다. 한 사람의 일생을 통해 주변 맥락을 파악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짜여진 책이다.

이 책의 핵심적인 주제에 동의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난민도 사람이며, 대한민국의 수많은 난민들은 누군가의 호의에 기대어 살았고 지금도 살아가고 있다. 프랑스에서 정치적 난민으로 살았던 홍세화의 경우를 떠올려보자. 우리가 욤비 토나에게 일말의 동정심과 인류애적 연대감을 가지지 못할 이유는 전혀 없다. 난민협약에서 정의하는 바, "인종, 종교, 국적, 또는 특정의 사회적 집단의 구성원이거나 정치적 의견을 이유로 박해를 받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는 위험 때문에 그 국적국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자, 또는 받을 것을 희망하지 않는 자로서 국적국 바깥에 있는 자"들을, 우리는 인류의 일원으로서 보호해야 한다.

그런데 이 책은 한 가지 더 깊게 생각해볼만한 문제를 안겨준다. 욤비 토나의 자녀들은 대한민국에서 성장했고, 박지성을 '우리나라 축구선수'로 생각하며 유관순을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로 인지할만큼 문화적으로 동화되어 있다. 콩고로 돌아가 콩고의 발전에 이바지하고 싶어하는 저자와 달리, 자녀들은 하루가 다르게 콩고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상태다.

인류애적 당위와 공공선 차원에서 벗어나, 지금 토나 집안에서 발생하고 있는 난민 1세대와 2세대의 문화적 갈등을 사회적으로 확장해보면, <내 이름은 욤비>가 놓치거나 간과하는 지점이 눈에 들어온다. 이 책은 오직 아버지의 눈으로 한국 문화에 동화되어가는 자녀들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을 뿐, 아들과 딸의 시각에서 망명자의 자녀로 살아가는 경험을 논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바로 그 세대간의 갈등이야말로 이민 문제의 핵심임에도 말이다.

난민에 대한 논의를 동정심 너머로 끌어올리기 위해, 우리의 고민은 더욱 확장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좋은 출발점이 되어준다.


2015.09.22ㅣ주간경향 1144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5-09-06

[별별시선] '반미'는 더 이상 진보가 아니다

각주구검(刻舟求劒)이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배를 타고 가다 물에 칼을 빠뜨린 사람이, 그 자리를 표시한답시고 뱃전에 칼집을 낸 데서 유래한 말이다. 배가 움직이는데 배에 표시를 해둔다 한들 물에 빠뜨린 칼을 찾을 수 있을 턱이 없다.

2015년 대한민국 진보 진영의 오늘을 묘사하면서 이 고사성어를 들이대고 싶지는 않았지만, 너무 잘 맞아떨어지기에 어쩔 수가 없다. 한국의 진보, 좀 더 넓게 잡아 범야권은, NL과 PD를 막론하고 넓은 의미에서 ‘반미주의’라는 큰 배에 탑승해 있다. 그들이 눈과 귀를 막고 상황을 업데이트하고 있지 않은 사이, 반미주의와 더불어 한국의 진보는 끝없이 표류하는 중이다.

굉장한 고급 정보를 가지고 있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인터넷과 TV를 통해 주요 외신을 검토해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 지난 3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자신을 지지하는 상원의원 34명을 확보했다. 의회에서 절차를 밟아 지난 7월14일 최종 타결된 이란 핵 협상을 엎어버리려던 공화당의 의도는 실현 불가능하게 됐다.

미국의 중동정책이 큰 반환점을 돌고 있는 것이다. 단단하게 굳은 혈암(shale)에 갇힌 석유를 ‘프래킹’으로 뽑아낼 수 있게 되면서 미국은 1970년대 오일쇼크 이래 40년 만에 원유를 수출하는 나라로 탈바꿈했다. 그 말은 세계 최대의 원유 수출국 사우디아라비아와, 그 밖에 중동 산유국들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전략적 가치가 급락한다는 이야기다.

그러한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칼럼이 지난 2일 <뉴욕타임스>에 실렸다. 유명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우리의 이슬람 극단주의자 절친, 사우디아라비아”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수많은 사우디아라비아 사람들이 이슬람국가 혹은 다양한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세력에 참여하거나 기부를 해왔음에도 미국은 그 사실을 올바로 지적해오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들의 석유에 중독돼 있었고 중독자들은 마약판매상에게 절대 진실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미주의자들이 미국을 비난하던 바로 그 논리다. 미국은 중동에서 나오는 석유 때문에, 인권과 평화를 위해 개입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그 속에서 벌어지는 모순에 눈을 감고 있다고 말이다. 그런데 이제 그 중독을 끊을 수 있다. 미국에서 석유가 펑펑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제 미국이 중동에 개입할 이유가 없어졌으므로 진정한 평화가 찾아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유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난민들의 생각은 다르다. 그 많은 전쟁 난민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해당 지역의 정치적 안정이 필요하다. 정치적 안정은 군사적 기반 없이 성립하기 어렵다. 결국 서구의, 특히 미국의 군사적 개입이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석유 중독에서 갓 벗어난 미국이 왜 중동의 문제에 끼어들어야 하는가?

지금까지 반미주의자들은 미국의 개입을, 마치 틀면 나오는 수돗물처럼 여겨왔다. 중동뿐 아니라 한반도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다. 주한미군이 발생시키는 문제를 지적하기 위해 섬세한 맥락을 고려해 정책을 제시하고 레토릭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주한미군 철수하라’고 외치면 주한미군과 한국 정부가 해답을 제시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세상은 아직은 끝나지 않았지만, 저물어 가고 있다. 지난 3월 반미주의자 김기종은 한·미연합군사훈련인 키 리졸브를 반대한다며 마크 리퍼트 주한 미대사에게 칼을 휘둘렀다. 그런데 지금 공화당에서 지지율 1위를 달리는 대선 주자 도널드 트럼프는 주한미군 철수를 공공연히 주장하고 있다. 물론 그를 진지한 후보로 생각하는 사람은 극소수이지만, 그만큼 미국 국민들이 ‘세계의 경찰’ 노릇에 염증을 내고 있다는 방증인 것이다.

세상이 바뀌고 있다. 미국도 바뀌고 있다. 그런데 진보진영의 반미주의만큼은 변화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80년대에 하던 방식대로 미국에 손가락질을 하지만 이미 미국은 거기에 없다. 낡은 반미주의로는 오늘날의 세계가 설명되지 않고, 대안을 제시할 수도 없다. 스스로 변해야 할 때다.


입력 : 2015.09.06 20:52:10 수정 : 2015.09.06 20:56:04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9062052105

2015-08-27

[북리뷰] 함성이 포성으로 바뀔 때

8월의 포성
바바라 터크먼, 평민사, 2만9천원.


긴 평화의 시기가 이어졌다. 물론 유럽 내에 국한된 평화였기는 하지만, 식민지의 고통에 힘입어 유럽은 1870년 보불전쟁 이후 50여년간의 '벨 에포크'를 맞이했다. "1914년 당시 변두리에서 벌어졌던 발칸전쟁을 제외하면 유럽대륙에서는 한 세대 이상 전쟁이 없었"(492쪽)다. 그런데 놀랍게도, 혹은 당연하게도, 유럽에는 호전적 분위기가 넘실거렸다.

당시에는 평균 수명이 오늘날보다 훨씬 짧았음을 상기해보자. 1914년쯤 되면 보불전쟁을 직접 경험한 사람은 거의 다 죽었거나, 전쟁 당시 어린이였을 것이다. 게다가 당시는 과학이 폭발적으로 발전하던 시기였다. 자고 일어나면 정말이지 세상에 없던 새로운 물건, 가령 자동차라던가 비행기라던가 전화 같은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유럽인들의 가슴을 꽉 채우고 있었다. 그 '무엇이든' 속에는, 당연하게도 전쟁이 포함되어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의 촉발 원인은 이른바 '사라예보의 총성'이지만, 그 암살 사건은 쌓여있는 화약에 불꽃을 튀겼을 뿐이다. 프랑스는 1870년 발발했던 보불전쟁에서의 패배를 잊지 않고 있었다. 반면 "1870년부터 독일인들은 군대와 전쟁만이 독일의 위대함을 뒷받침하는 유일한 원천이라는 사상에 세뇌되어 있었다."(79쪽) 유럽 각국은 평화와 안정을 위해 거미줄처럼 동맹을 맺었지만, 오히려 그 수많은 동맹 관계 때문에 전쟁은 점점 커져만 갔고, 사라예보의 총성은 유럽 뿐 아니라 세계사를 뒤흔든 '8월의 포성'으로 이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미국의 역사 저술가 바바라 터크먼은 1962년 <8>을 출간했다. 그는 전문적인 역사학자가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얽매이지 않은 시각으로 역사적 사건들을 되짚고, 그 속의 등장인물들에게 생명력을 불어넣는 글쓰기를 할 수 있었다. 이전에도 어느 정도 알려진 작가였지만 <8>은 그를 일약 스타로 만들어주었다. 그의 애독자 중에는 존 F. 케네디가 포함되어 있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영국의 맥밀란 수상에게 이 책을 증정하면서 오늘날의 정치인들은 어떻게 해서든 1914년 8월과 같은 함정은 피해야 한다고 말했다."(6쪽)

그는 역사의 전문가가 아니었지만 본인의 한계를 잘 알고 있는 탁월한 저자였다. 1차 세계대전 전체를 조망하는 대신, 개전 이후 30일까지의 상황에만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독일군은 이미 세상을 떠난 슐리펜 장군이 세워놓은 작전 계획을 현실에 구현하고자 굳이 벨기에를 침공한 후 프랑스로 향했다. 프랑스의 자신감의 충만했지만 전쟁 대비는 형편없었다. 독일군은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오지만, 마른 전투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에게 저지당하고, 1차 세계대전은 길고 지루한 참호전으로 고착되고 만다. "교전국들은 처음 30일 동안 전세를 결정짓는데 실패한 전투로부터 만들어진 덫, 그때도 또 그 이후로도 출구가 없는 그러한 덫에 걸려들었던 것이다."(680쪽)

전쟁 이후 세계는 완전히 다른 곳이 되었다. "전쟁을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라고 기대되던 사회주의자들의 형제애 그리고 재정, 상업, 그 이외의 다른 경제적인 요인들 사이의 상호 의존성과 같은 전쟁 억지력은 막상 때가 되자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국가주의가 난폭한 돌풍처럼 일어나면서 그것들을 모두 날려버렸다."(491쪽) 막상 한 번 시작되자 전쟁은 뜻대로 쉽게 풀리지도 않았고, 마음대로 끝낼 수도 없었던 것이다.

이 땅에서 울려퍼졌던 '8월의 포성'은 멈췄다. 그러나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함성은 쉽게 잦아들고 있지 않다. 애석하게도 우리는 아직 <8>으로부터, 우리 스스로의 역사로부터, 충분한 교훈을 얻지 못한 듯하다.


2015.09.08ㅣ주간경향 1142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