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17

[북리뷰] 기후변화, 이제는 '회의'할 시간이 없다

6도의 멸종
마크 라이너스, 세종서적, 1만6천원


2010년대에 들어서 멸종된 종(種)은 한둘이 아니겠지만, 그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온난화 회의론자'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그들의 세력은 건재한 것처럼 보였다. 대기 중 탄소 농도와 지구의 평균 기온이 거의 확실한 상관관계를 보여준다는 것에 거의 모든 진지한 과학자들의 의견이 일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극소수 온난화 회의론자들은 태양 흑점이나 통계의 오류 등을 운운하며 언론의 과도한 관심을 받아왔던 것이다.

지난 12월 12일 파리에서 막을 내린 제21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자총회(COP21)를 보더라도 그렇다. 전 세계 195개국의 대표단이 모였다. 그 모든 나라의 과학자와 정치인들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주장할 게 아니라면, 이제는 더 이상 온난화 회의론자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 인간이 배출하는 이산화탄소 및 온실가스의 위험성에 대해, 늦게나마 전 세계가 눈을 떴다. 이제는 '왜'가 아니라 '어떻게'에 초점을 맞춰야 할 시점이다.

국내의 여론 동향은 그런데 좀 이상하다. 기후 변화에 대해 올바른 정보를 전달하는 책보다 <회의적 환경주의자>라던가 <쿨 잇> 같은 온난화 회의론자의 책이 더 잘 팔리는 그런 나라였다는 것을 염두에 두더라도 그렇다. 우리는 우리가 겪게 될 위기가 무엇인지 아직도 실감을 못 하고 있다. 과학 저널리스트 마크 라이너스가 쓴 <6>을 펼쳐보자.

이 책을 대중에게 설명하면서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구기온이 2˚C, 4˚C, 6˚C씩 올라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밤과 낮의 기온차가 15˚C씩 나는 것을 생각하면 그 정도의 변화는 대수롭지 않게 여겨질 수 있다. 목요일의 기온이 수요일보다 6˚C 높다는 것은 외투를 집에 두고 나오면 된다는 의미일 뿐이다. 하지만 지구의 평균 기온이 6˚C 상승한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이다.(23쪽)

지금보다 지구기온이 6도 낮았던 그 시절을 우리는 빙하기라고 부른다. 지금보다 5도 이상 높았던 시절도 지질학적으로 발굴되어 있다. '팔레오세-에오세 최고온기(PETM)'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데, "PETM은 지질학적 기록 중에서 지금처럼 화석연료를 태워댄 탓에 대기의 이산화탄소 농도가 높아지는 현상과 가장 가까운, 자연의 실제 사례"(247쪽)라고 저자는 그가 참고한 수많은 과학 논문 중 하나를 인용하고 있다.

그 시절 지구는 우리가 아는 지구가 아니었다. 바다는 뜨겁고 끈적한 산성 액체였고, 해수면의 온도가 높은 탓에 엄청난 토네이도가 얼마 남지 않은 육지를 후려쳤다. 뉴욕, 런던, 상하이 등 중요 항구 도시들이 있어야 할 곳은 진작에 물에 잠긴 상태다. 물론 인류에게는 지능과 기술이 있으므로 모든 호모 사피엔스가 멸종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문명'을 결코 유지할 수 없다. 우리가 아는 수많은 동식물들과 함께, '인간'으로서의 인간은 사라지고, 대신 수렵과 채집 및 작은 규모의 농업으로 목숨을 이어가는 '동물'로서의 인간만 남게 되는 것이다.

지구기온이 평균 3도 이상 올라가면 그때부터는 탄소 배출량을 아무리 줄인다 한들 소용이 없다. 이미 배출된 탄소가 지구 기온을 높이고, 그로 인해 시베리아의 얼어붙은 땅을 포함해 많은 곳에 묻혀있는 탄소가 더욱 배출되는, 이른바 '양의 되먹임'(positive feedback)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는 허리케인 카타리나, 2010년 러시아의 산불, 미국 서부의 극심한 가뭄 등으로 지구기온 평균 1도 상승의 쓴맛을 톡톡히 보고 있다. 온난화 회의론자들에 의해 낭비된 세월이 안타까울 뿐이다. 올바른 정보가 유통되고 여론이 형성되기를 희망한다.


2015.12.29ㅣ주간경향 1157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5-12-03

[북리뷰] 그 가스등을 보라

가스등 이펙트
로빈 스턴, 랜덤하우스코리아, 1만4천800원


'데이트폭력'의 핵심은 '데이트'가 아니라 '폭력'에 있다. 하지만 그 폭력이 적용되고 발현되는 양태는 다른 폭력과 다른 측면을 가지고 있다.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사적으로 친밀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 속에 함부로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양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로빈 스턴은 미국에서 20여년간 심리상담가, 교사, 우드헐리더십연구원 등으로 일하며 수많은 상담을 진행해온 리더십 강사 및 컨설턴트다. 그는 데이트나 결혼 등 사적으로 친밀한 관계 속에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정신적으로 황폐화하고 지배력을 행사하며 결국 파국으로 몰아가는 '가스라이팅'을 발견하고 이론화했다. 그것은 우리가 모두 다 알지만, 이름을 붙이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시하지 못하고 있었던, 또 다른 폭력이다.

'가스라이팅'에 대해 알아보자. 고전 영화 <가스등>에서 잉그리드 버드먼이 연기하는 젊은 가수 폴라는 나이 많은 남자 그레고리와 결혼한 후 자신감을 잃고 회의에 빠진다. 그레고리와 같이 살기 시작한 이후 집안의 물건이 없어지고, 위치가 바뀌고, 자신이 알지 못하는 일이 생기는데, 그럴 때마다 그레고리의 비난이 쏟아지기 때문이다.

폴라는 점점 자신이 보고 듣는 것이 사실인지조차 의심하게 된다. 히스테리에 빠진다. 그레고리가 서랍을 뒤지기 위해 가스등을 켤 때, 가스의 압력 때문에 자기 방에 켜둔 가스등은 불빛이 약해지는데, 그 현상이 실제로 벌어지는 것인지 아닌지조차 의심하게 된다. 결국 창밖에서 그 가스등이 흐릿해지는 현상을 목격한 형사의 증언을 통해 폴라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심을 접고 그레고리의 마수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괴롭힘은 성별과 무관하게 현실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일이다. 가령 군에 사병으로 입대한 남자들은 이른바 '신병'으로 부대에 갓 배치될 무렵 비슷한 일을 겪는다. 뻔히 다 아는 것을 일부러 틀리게 물어본다거나, 반대로 절대 모를 수밖에 없는 것을 물어본 후 상대가 당황하면 윽박지르는 식으로, '갈구는' 것 말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가스라이팅'은 남녀 사이에서 발생한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나는 수많은 상담 사례를 통해 가해자는 남성인 경우가 많고 피해자는 여성인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22쪽) 그 남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여자들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고 쥐락펴락한다. 갑자기 연락을 끊었다가 로맨틱한 이벤트를 연출하는 남자? 그 남자는 상대방 여자에게 억지 감동을 뽑아냄으로써 상대방을 흔들고 있는 것이다. 여자가 죄책감을 느끼게 만들어서 원치 않는 일을 하게 하는 남자 역시, 상대방의 가스등을 흔들리게 하고 있다. 하물며 그 여자를 때리는 남자라면 더욱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가스등 이펙트>는 '가스라이팅'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는 것만으로도 높이 평가받아 마땅한 책이다. 데이트폭력이 나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그러나 친밀한 관계 속에서, 가령 남자친구가 여자친구에게 입버릇처럼 '뚱뚱하다'고 놀리는 게 어떠한 종류의 폭력인지 우리는 아직 정확한 이름을 붙이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짓궂은 애정도 관계의 미숙함도 관심의 표현도 아니다. 상대방의 자아를 흔들리게 만들어서 자신의 영향력을 증폭시키려는 폭력적 영향력 확장, 즉 가스라이팅이다.

이 책은 너무 피해자와 가해자의 입장에서만 문제를 바라본다. 책의 대부분이 피해자의 심리 분석과 이루어져 있는데, 이 책의 논지만 반복한다면 그것은 '피해자 탓하기'로 향할 우려가 있다. 그러한 비판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일단 이 책을 읽어야 한다. 저 흔들리는 수많은 가스등을 보라. 그것은 피해자의 탓이 아니다. 이 명백한 폭력들을 우리는 지적하고 바꿔나가야 한다.


2015.12.15ㅣ주간경향 1155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5-11-29

[별별시선]청와대로 가지 말자

요즘 자기반성을 많이 하게 된다. 2008년의 나는 촛불시위에 열심히 참여했는데, 그럴 때마다 큰 아쉬움을 느꼈다. 왜 우리는 저 버스를 당장 넘어서 청와대로 돌격하지 못할까. 왜 우리는 이렇게 평화적인 투쟁에만 집착하고 합법적인 경계선을 넘지 않았다고 변명을 늘어놓을까.

반성이 시작된 것은 비슷한 시기 태국에서 벌어진 사태 때문이었다. 노란 셔츠를 입은 시위대가 나서서 정권이 뒤집히면, 이번에는 빨간 셔츠를 입은 시위대가 정부를 끌어내린다. 그렇게 엎치락뒤치락하던 중 군부는 점점 더 영향력을 키워갔고 태국의 민주주의는 돌이킬 수 없는 수준까지 내려앉은 상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에서 벗어나 독립국이 된 수많은 나라에서 민주화는 비슷한 방식으로 좌초하는 경향을 보인다. 대규모 시위가 폭동으로 이어지고 정권이 뒤집히면서 민주적 권위가 쇠약해지면, 군부가 총칼로 안정을 제공한다. 당장 경제 성장을 원하는 중산층은 일단 군부를 지지한다. 하지만 중산층은 서서히 더 많은 자유를 찾아 군부가 아닌 민주 세력의 편을 들게 되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바로 그 시점, 다시 말해 1987년에, 성공했다. 물론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아픔이 있었다. 하지만 민주화 세력의 두 축이 견고하게 버텨냄으로써, 그중 한쪽이 군부와 살림살이를 합치는 역사적 퇴행이 벌어졌을 때에도 민주적 가치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민주화 세력과 군부 독재가 1 대 1로 맞붙는 경우, 민주화 세력은 정권을 잡은 후 급속하게 보수화되는 경향이 있다. 선거로 뽑혔지만 군부와 다를 바 없는 방식으로 반대파를 탄압하고 압살한다.

이런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는 이유는 12월5일로 예정된 제2차 민중총궐기에 2008년 촛불시위의 기억이 어른거리기 때문이다. 그때 이후로 우리는 ‘뜨거운 무기력증’에 빠진 상태다. 큰 집회가 있을 때마다 광화문에 나가서 소리를 지르고 경찰과 맞서지만 세상은 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그렇게 오늘에 이르렀다.

물론 대규모 집회를 통해 ‘세력 과시’를 하는 일은 필요하고 또 중요하다. 하지만 매번 집회가 열릴 때마다 마치 정해진 식순처럼 경찰버스를 훼손하고 캡사이신 섞인 최루액을 맞으며 고통스러워하다가 적당히 늦은 시간이 되면 집에 간다. 그 과정에서 부상자가 나오고 경찰의 폭력이 벌어지지만 여론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7년째다.

설령 어쩌다가 경찰 버스를 뛰어넘고 청와대로 가는 길을 개척하더라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청와대로 가서 대체 뭘 어쩔 것인가? 대통령이나 그 외 중요 인사들에게 위해를 가하는 순간 시위대는 경찰의 주장대로 ‘폭도’가 되어버린다. 우리는 청와대에 대해 폭력을 행사할 수도 없고, 반면 그들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이쪽의 말을 들어줄 생각이 없다.

대규모 집회를 조직해 세력을 과시하지 않으면 단 한 번의 눈길조차 받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집회가 커지고 폭력적인 장면이 연출되면 모든 언론은 일제히 ‘폭력’에만 초점을 맞춘다. 결국 지금의 방법을 고집하고 있는 한 그 어떤 경우에도 ‘우리의 목소리’는 온전히 전달되지 않는다. 이 딜레마를 해결하는 방법은 상대가 짜놓은 외통수 속으로 걸어들어가지 않는 것뿐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생각을 그 누구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은 이제 외신 기자들을 포함한 전 세계인이 다 아는 공공연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단 우리 스스로의 생각부터 바꾸어야 한다. 더 많은 국민들에게 시위의 쟁점들을 알리고 지지를 끌어내어, 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한 타격을 입힐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할 때다.

‘청와대로 가지 말자. 대신 방향을 돌려, 국민의 삶 속으로 들어가자.’ 2008년 촛불시위 당시 정의구현사제단의 김인국 신부가 시위대의 방향을 불타버린 남대문으로 돌리면서 한 연설의 내용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 단 한 명의 권력자 대신, 수많은 이들에게 생각을 전하고 행동을 이끌어낼 해법을, 우리는 찾아내야 한다.


입력 : 2015.11.29 20:56:16 수정 : 2015.11.29 21:02:19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90100&artid=201511292056165#csidxdce0acec71fddcda0123b58627a3766

2015-11-19

[북리뷰] 미셸 우엘벡이 말하지 않은 것들

복종
미셸 우엘벡, 문학동네, 1만4500원

지난 1월 7일, 파리에 위치한 풍자 신문 샤를리 에브도의 편집실이 공격당했다. 그 상처가 아물어가나 싶었던 11월 13일 다시금 대형 총기 난사 및 폭탄 테러가 발생했다. 11월의 파리 테러에서는 총 132명의 무고한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 프랑스는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가장 큰 규모의 공격을 당했다.

샤를리 에브도 습격 사건이 벌어지던 날, 미셸 우엘벡의 <복종>이 현지에서 출간되었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우엘벡의 친구 한 사람이 당일 IS의 괴한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고 한다. 샤를리 에브도 습격은 세계사의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사건이다. 혹은, 더 큰 분기점이 될 이번 파리 테러의 전주곡과도 같다. 그 충격 속에서 우리는 일단 이 책을 읽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2022년의 프랑스. 소설 속에 실명으로 등장하는 장 마리 르펜이 이끄는 국민전선과, 힘을 잃고 표류하는 사회당, 그리고 모하메드 벤 아베스라는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가 이끄는 이슬람박애당이 대선을 앞두고 3파전을 벌인다. 1차 투표 결과는 가히 충격적이다. 국민전선이 1위, 그리고 이슬람박애당이 2위를 기록한 것이다. 사회당은 정권을 얻기 위해 이슬람박애당과 손을 잡아야 할 처지에 몰렸다. 그들은 장관 자리의 절반, 알짜배기인 재정부와 내무부 등을 넘겨받는 댓가로, 이슬람박애당에게 교육과 결혼에 대한 권한을 넘겨준다.

교육과 결혼. 어찌 보면 비교적 사소한 것 같지만 그 함의는 실로 깊고 중대하다. 주인공인 프랑수아를 만나 대화중인 프랑스의 정보 요원은 그 전략을 이렇게 설명한다. "경제니 지정학이니 하는 것들은 신기루일 뿐이에요. 아이들을 장악하는 자가 미래를 장악한다, 그것으로 얘기 끝이죠."(100쪽) 이슬람박애당은 대체 어떤 사회적 변화를 불러오려는 것일까?

"우선 이슬람은 어느 경우에도 남녀공학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여자들에게는 몇몇 전문과정만이 개방될 뿐이죠. 그들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대부분의 여자들이 초등교육을 마친 뒤 가사교육 학교를 거쳐 가능한 한 빨리 결혼하는 겁니다. 그리고 극소수의 여자들만이 결혼 전에 문학이나 예술 공부를 이어가고요. 이것이 그들이 바라는 이상적 사회의 표본이죠."(101쪽)

대기업이 아니라 가족기업 중심으로 경제 체제를 바꾸고, 여성들을 일자리에서 쫓아낸 후 가사수당을 지급하는 등, 우리가 알던 현대 사회의 모습을 이슬람박애당은 서서히 뒤흔든다. 실업률에 시달리는 가난한 남자들에게는 자영업자의 꿈을 불어넣어주고, 사회의 의사결정권을 쥐고 있는 부유한 남자들에게는 일부다처제 도입을 통해 문자 그대로 '성 로비'를 벌인다. 모든 교육 기관이 이슬람 교육 기관이 된 탓에, 개종을 하지 않으면 교수직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 프랑수아는 개종하고, 젊은 부인을 맺어주겠다는 약속도 받은 채, 다짐한다. "조금은 이런 식으로 몇 년 전에 내 아버지가 혜택을 입었듯, 내게도 새로운 기회가 찾아올 것이었다. 그것은 이전의 삶과는 그다지 상관없는 두번째 삶의 기회가 되리라."(363쪽)

우엘벡은 의도적으로 그러한 변화 속에서 여성들이 겪는 고통을 도외시한다. 중년 남자 지식인을 화자로 삼고 있으면서, 중년 남자 지식인이 어떻게 종교화, 보수화 속에서 '태평천하'를 누리는지 신랄하게 풍자하기 위한 기법이다.

<복종>은 이슬람포비아를 느끼는 프랑스 사회를 바라보는 한 위선적인 중년 남성 지식인을 바라보는 우엘벡의 시각을 서사화해 담아낸 작품이다. 바로 그렇게 이 책은 남자 대학 교수의 눈을 통해 이슬람교를 둘러싼 프랑스 사회의 갈등 지점을 절묘하게 (비)가시화한다.  그것이 얼마나 성공적으로 수행되고 있는지는 독자가 판단할 몫으로 남겨둔다.


2015-11-11

리누스 토발즈는 왜 리눅스를 GPL로 풀었는가?



잊을 만하면 RT되는 이 트윗의 출처는 다음과 같다.

1991년 9월 17일, 나는 그날을 정확히 기억한다.

내가 올린 운영체계를 겨우 몇 명만이 체크하리라 생각했다. 그 운영체계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특정 컴파일러를 설치하고, 새로 부팅하여 기존의 파티션을 제거하고, 나의 커널을 컴파일한 다음 셸을 작동해야 하는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셸 작동이 나의 운영체제를 이용함으로써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내가 만든 운영체제의 소스 코드를 프린트해 보면, 그것은 1만 줄을 넘지 못했다. 글자 크기를 작게 하면, 100페이지도 안 되는 분량이었다. 물론 지금의 리눅스 코드는 1000만 라인을 넘고 있다.

운영체제를 배포했던 주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내가 실질적으로 무엇인가 만들었다는 것, 단지 허풍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인터넷상에서는 입소문이 순식간에 번진다. 섹스든 운영체제든 아니면 다른 그 무엇이든, 사이버상에서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많은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전해지며 날조되게 마련이다. 나의 운영체제 구축에 대한 입소문이 무성해졌을 때,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자, 보시오. 내가 실질적으로 거둔 성과요. 나는 당신들을 속이지 않았소. 여기 내가 이룬 성과들이 있소……."
리누스 토발즈, 데이비드 다이아몬드, 안진환 옮김, 『리눅스 그냥 재미로 』(서울: 한겨레출판, 2001), 140-141쪽. 강조는 인용자.

좋은 책인데 현재 절판이니 도서관 등을 통해 읽어보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