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리아 스타이넘, 현실문화연구, 8500원
'아직 우리의 수준은 근대에 도달하지도 못했는데 섯불리 탈근대를 논한다'고, 포스트모더니즘이 유행할 무렵 많은 이들이 비판해왔다. 여성주의가 뜨거운 화두로 떠올랐던 지난 해, 그리고 올해에 이르기까지, 일부 지식인 남성들이 페미니즘에 대해 논하는 광경을 보는 내 심정이 바로 그렇다. 여성들이 남성에 비해 다각도로 차별당하고 있다는 것을, 프라이버시부터 생명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층위에서 안전을 위협당하고 있다는 것을, 순순히 인정하려 들지 않는 사람들이 새해가 밝아온 후에도 똑같은 사고의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개탄을 넘어 계몽으로 나아가보자. 심사숙고 끝에 나는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고전 <남자가 월경을 한다면>을 꺼내들었다. 여성주의에 관심이 있는, 적어도 말 한 마디라도 덧붙이고 싶은 남자가 있다면, 가장 첫 번째로 읽어야 할 책이 바로 이것이다.
<남자가 월경을 한다면>은 미국에서 1985년 처음 출간되었다. 2001년 한국에 번역되어 나온 책은 1995년에 출간된 개정판이다. 10년이 지난 후 개정판이 나왔고, 그 후로도 꾸준히 읽히고 있다. 당연하게도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운동가로서의 나는 이 책이 아직도 읽히고 있다는 데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낀다. 독자들 대부분이 이 책의 내용이 아주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 느낀다면 더 큰 보람을 느낄 것이다."(15쪽)
여기서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아주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 말하는 바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이건 단순히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것만을 뜻하는 게 아닐 것이다. 그가 초판을 발행한 1985년과 달리, 1995년에는 여성 뿐 아니라 다양한 성소수자들의 문제가 페미니즘 혹은 성 정치의 논의 대상으로 확고히 자리를 굳히고 있었다. '여성'이라는 단일한 젠더 범주 그 자체에 의문 부호를 던지는 것이 당대의 지적 경향이었다는 것이다. "남자가 월경을 한다면?"이라는 도발적인 질문은, 1985년에는 남성들이 지배하던 지성계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지만, 1995년에는 다각화된 페미니즘 진영 내에서도 도전과 반발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2016년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남자에게는 <남자가 월경을 한다면>을 가장 먼저 권하게 된다. 이 책은 복잡한 이론적 논의를 경유하지 않고 곧장 여성차별의 쟁점들로 들어간다. 넓은 독자들을 염두에 둔 페미니즘 잡지 <미즈>에 실렸던 글을 모은 것이니 당연한 일이다. 여성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오늘날의 페미니즘 이론은 너무 어렵게 느껴진다는 이야기를 주변에서 종종 듣는다. <남자가 월경을 한다면>은 그와 정 반대다.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를 읽고 이해할 수 있다면 이 책도 이해할 수 있다.
여성주의 내의 다양한 입장과 갈등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이 책을 입구로 삼는 편이 낫다. 3세대 페미니즘이 극복하려 했던 2세대 페미니즘의 논의가 무엇인지 전반적인 그림을 그리고 나면, 여성주의 내부의 차이에 대해서 좀 더 맥락을 잘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여성주의 내에도 다양한 입장의 차이가 있다'는 문장을 달달 외우지 말고, 차라리 '화이트 페미니스트'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트랜스젠더들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트랜스젠더: 신발이 맞지 않으면 발을 바꿔라?"를 읽는 편이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여성주의는 실천이면서 동시에 이론이다. 실천을 위한 이론이고, 이론 그 자체가 실천이 되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이론의 언어에 친숙한 남자들이 책 한 권 달랑 읽고 여자들에게 페미니즘을 '가르치는' 웃지 못할 일이 종종 벌어지기도 한다. 남자들이여, 일단 구구단부터 떼고 나서 미적분을 논하기로 하자. <남자가 월경을 한다면>은 그 좋은 출발점이다.
2016.01.26ㅣ주간경향 1161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