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진보 정당의 고집불통 지지자였다. 진보 정당 지지자들은 대체로 총선에서 자신이 속한 지역구에 진보 정당의 후보가 없으면 민주당 계열에 투표를 하는 경향이 있다. 대선은 중요한 무대니까 잠시 내 정치적 의지를 접어두고 ‘비판적 지지’를 하는 것 역시 흔한 패턴이다. 나는 그런 식으로 투표를 하지 않았다. 내가 진정 옳다고 생각하는 정책, 정당, 후보에게만 표를 주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백지 투표를 했다.
그러나 이번 총선에서는 그러한 신념을 지키기 어려워졌다. 새삼 ‘전략적 유연성’을 추구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진보 정당들이 보여주는 ‘이념’ 중 그 무엇에도 전적인 동의를 표하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순서에 따라 기호 4번 정의당부터 짚어보자. 지난 7일, 경찰은 네덜란드와의 국제 공조수사를 통해 ‘소라넷’의 핵심 해외 서버를 폐쇄했다고 발표했다. 소라넷은 몰래카메라, 도촬, 사적인 모습을 상대방의 동의 없이 공개하는 이른바 ‘리벤지 포르노’가 올라오는 성인 사이트다. 속칭 ‘골뱅이’라는, 심신상실 상태에 빠진 여성에 대한 강간 모의와 실행 ‘인증’이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했다.
“나랑 사귈 때에 너는 저런 체위 한 적 없는데 화면으로 보니까 내 꼬추가 더 크다”고, 정의당과 총선 홍보 영상 및 공식 테마송 협약을 맺은 ‘중식이 밴드’는 노래했다. ‘야동을 보다가’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 노래는, 위에서 우리가 말한 이른바 ‘리벤지 포르노’를 보던 남자가 자신의 옛 여자친구를 발견하고 신세 한탄을 하는 내용이다.
논란이 커지자 정의당은 여성위원회를 앞세워 사과의 말을 전했으나 어떤 후속 조치도 없다. 공개된 당원게시판에서 당원들이 목청 높여 반여성주의적, 심지어 성폭력에 가까운 언사를 내뱉는데도 적극적으로 제지하지 않고 있다. 정의당의 공식 홍보 밴드는 ‘소라넷 보는 남자’의 입장에서 쓰인 노래를 부른다. 소라넷에 대한, 여성 인권에 대한 정의당의 입장은 무엇인가?
투표용지를 한참 훑어내려가면 기호 14번 노동당이 나온다. 노동당은 정의당처럼 여성 인권 논란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오히려 마포을 선거구에 출마한 하윤정 후보의 경우 대단히 적극적으로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나의 선거구는 마포을이 아니다. 정당으로서의 노동당을 평가하기 위해 선거 공보물을 펼쳐든다. 한숨이 나온다.
노동당은 “재벌증세 기본소득”을 핵심 구호로 내세우고 있다. 증세는 복지 확대를 위해 필수적이므로 원론적으로 그 필요성을 부정할 수 없다. 문제는 ‘기본소득’이다. 기본소득은 본질적으로 ‘작은 정부 옹호론’이다. 진보 진영에서 불과 10년 전만 해도 절대악으로 상정하던 ‘신자유주의’와도 어느 정도 일맥상통하는 이야기이다. 국가 기구를 축소하고 보다 효율적인 시장을 통해 복지를 실현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비판을 하면 기존의 복지는 그대로 두고 재벌에만 세금을 거둬서 나눠주면 된다는 답변이 돌아온다. ‘재벌증세 기본소득’이 그런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데 5000만 국민에게 월 30만원씩 기본소득을 지급한다면 연간 180조원이 필요하다. 2015년에 정부가 고용, 보건, 복지에 지급한 총예산이 115조7000억원이다. 나는 노동당이 무슨 ‘계획’을 가지고 이런 공약을 내거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기호 15번 녹색당도 마찬가지다. 녹색당은 ‘탈핵’과 ‘탈성장’을 정책의 근간으로 삼는다. 원론 차원에서 재생가능한 에너지로의 전환 그 자체에 대해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탈성장’이다. 안타깝게도,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행복하기 어렵다. 녹색당은 실업률을 끌어내리고 경제의 활력을 회복하기 위해 어떤 방안을 제시하고 있는가?
20대 총선의 풍경이다. 진보 정당들이 여성 인권 문제를 회피하고, 구체성 없는 ‘대안’을 주워섬기며, 대중적 분위기만 좇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세계의 문제를 올바로 파악, 구현가능한 대안을 제시하는 진보 정치 운동을 희망한다.
입력 : 2016.04.10 20:52:00 수정 : 2016.04.11 10:21:10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4102052005&code=990100#csidxebeb33135be7959895cfac39f001e60
덧붙임: 2016년 7월 현재, 여성혐오에 대한 정의당의 입장은 한층 더 우스꽝스러워지고 있다. 메갈리아4 소송 지원을 위한 후원 티셔츠를 구입했던 김자연 성우가 그 사실을 인증하였고, 넥슨은 다음날 김자연 성우가 녹음한 캐릭터 음성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넥슨측에서는 '계약금을 모두 지불했다'며 정당성이 있다는 듯 항변했지만 이것은 말이 안 되는 소리다. 프리랜서가 생산물을 제공할 때에는, 그 창작물이 계약 기간동안 사용된다는 것 역시 계약의 일부로 포함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것은 부당한 계약해지이며, 진보 정당으로서의 정의당은 당연히 김자연 성우의 편을 드는 것이 옳았다.
문제는 정의당 문화예술위원회에서 그렇게 온당한 내용을 담은 성명을 발표한 다음 벌어졌다. 중식이밴드가 뭐가 문제냐고 난리를 치던 바로 그 정의당의 여성혐오적 남자 당원들이, 우르르 몰려가 온라인 몰매를 때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결국 노회찬 원내대표는 그 성명을 공식적으로 철회시켰고, 오늘 심상정 대표는 "당의 하부단위에서 부적절한 논평이 나가고, 또 논평으로 야기된 당 안팎의 파장에 대해 중앙당이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는 당원들과 지지자들의 질책을 겸허히 수용"한다는 페이스북 게시물을 올렸다. 결국 여성혐오적 당내 목소리에 그 당을 대표하는 두 거물이 굴복했거나, 애초부터 적극적으로 여성혐오와 맞설 생각이 없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이 칼럼에서 표명한 바와 같이 나는 '이념적'으로 현재의 진보 정당들과 함께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제는 보다 본질적으로, '당 내의 옳지 못한 집단적 항의를 통제하지 못한다'는 점에서도, 적어도 정의당과는 함께할 수 없음을 밝혀둔다. 내부의 여성혐오에 굴북하는 정당이 무슨 국가적 악과 부조리에 저항할 수 있다는 말인가? 지난 칼럼들을 갈무리하는 도중에 적어둔다. (2016/07/29)
2016-04-11
2016-04-09
[북리뷰] 웃음과 냉소의 경계, 혁명의 길을 묻는다
독재자를 무너뜨리는 법
스르자 포포비치, 문학동네, 1만5천원.
<독재자를 무너뜨리는 법>의 저자 스르자 포포비치는 한국어판 출간을 앞두고 특별히 서문을 추가했다. 그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미국의 에이전시로부터 한국의 한 저명한 출판사가 이 책을 출간하고 싶어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을 때, 맨 처음엔 한국의 북쪽에 있는 이웃--2,500만 명의 인구가 세계 최악의 독재 아래 고통 받고 있는 곳--때문이겠거니 했습니다."
물론 농담인 것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남북간의 격차가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다' 같은 소리는 한국인끼리 주고받는 '인사이더 조크'가 아닐까 싶었다. 어쨌건 대한민국은 1987년 6월 항쟁으로 군사정권의 무릎을 꿇리고 대통령 직선제를 얻어냈으며, 이후 수평적 정권교체를 통해 오늘에 이르고 있는 동아시아 최고의 민주주의 국가니 말이다.
이런 소리를 하는 사람이 누굴까 해서 책날개를 보니 옛 기억이 났다. 2000년대 중후반, 미국의 국제 정치 전문지 〈Foreign Policy〉의 한국어판을 만들 때 나는 이미 스르자 포포비치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세르비아의 독재자를 '유쾌한' 방식으로 몰아낸 대중운동의 지도자. 나는 그가 쓴 글의 한국어 번역본을 편집했거나, 그것이 단신이었다면 내가 손수 한국어로 옮기기도 했을 것이다.
한동안 잊혀져 있던 스르자 포포비치는 단행본으로 내 책상 위에 돌아왔다. 미국의 리버럴 독자들의 눈높이에 맞춰 '혁명'과 '저항'을 포장해주는 장사꾼이 아닐까 하던 의혹은 접어둔지 오래였다. 그는 실제로 독재 권력과 맞서 세르비아를 넘어 동유럽 전체의 정치적 변화를 견인해낸 중요 인사 중 한 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독재자를 무너뜨리는 법>의 표지와, 짐짓 유쾌한 척 하는 그의 말투에 지나치게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SNS에 '웃기는 짤방' 몇 개 올린다고 세상이 알아서 바뀔 것처럼 떠드는 그런 종류의 책이 절대 아니다. 오히려 정 반대로, 이 책은 사회 변화를 꿈꾸는 이들이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 내용으로 가득차 있다.
독재자를 그럼 대체 어떻게 무너뜨려야 하는가? "뭔가 사소한 것, 적절한 것, 그러면서도 성공적일 수 있는 것, 그것 때문에 죽거나 심한 폭력을 당하지 않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핵심이다."(34쪽) 엘리베이터에 스티커를 붙이는 것 같은 아주 사소한 일이어도 괜찮다. '작은 성공'을 쌓아나갈 수 있다면, 그래서 독재자의 권위에 작은 균열을 낼 수 있다면 말이다.
그러한 작은 도전이 가장 큰 변화를 낳은 사례로, 저자는 간디의 '소금 행진'을 꼽는다. 간디는 인도의 독립을 꿈꾸었지만, '인도를 독립시키라'며 영국에 총부리를 겨누지 않았다. "단순하고 논란의 여지없는 대의를 위해 모든 인도인이, 그들의 정치적 성향이나 신분과 상관없이, 그의 곁으로 모여들어 싸울 필요가 있었다. 1930년, 간디는 결국 답을 찾았다. 소금이었다."(55쪽) 영국에 세금을 내는 대신 바닷가까지 걸어가 소금을 만들겠다는 간디의 행진은, 처음에는 77명의 추종자로 시작했으나, 결국 수만 명이 동참하는 대규모 시위가 되고 말았다.
웃음을 잃지 말라, 독재자에게 겁을 먹지 말라. 모두 맞는 말이고, 좋은 말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핵심은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할 수 있도록, 작은 비폭력 투쟁을 하나씩 승리로 이끌어가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임계점을 넘겨버리는 것이다. 풍자에 힘을 쏟는다며 냉소만 퍼뜨리고, 모든 투쟁을 '이번 투표를 위한 것'으로 만든다면, 오히려 변화는 멀어진다.
쫄지 마? 그건 기본이다. 더 중요한 건 웃음을 터뜨리되 냉소하지 않는 것이다. 간디의 소금 행진 이후 인도의 독립까지는 17년이 걸렸다
스르자 포포비치, 문학동네, 1만5천원.
<독재자를 무너뜨리는 법>의 저자 스르자 포포비치는 한국어판 출간을 앞두고 특별히 서문을 추가했다. 그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미국의 에이전시로부터 한국의 한 저명한 출판사가 이 책을 출간하고 싶어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을 때, 맨 처음엔 한국의 북쪽에 있는 이웃--2,500만 명의 인구가 세계 최악의 독재 아래 고통 받고 있는 곳--때문이겠거니 했습니다."
물론 농담인 것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남북간의 격차가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다' 같은 소리는 한국인끼리 주고받는 '인사이더 조크'가 아닐까 싶었다. 어쨌건 대한민국은 1987년 6월 항쟁으로 군사정권의 무릎을 꿇리고 대통령 직선제를 얻어냈으며, 이후 수평적 정권교체를 통해 오늘에 이르고 있는 동아시아 최고의 민주주의 국가니 말이다.
이런 소리를 하는 사람이 누굴까 해서 책날개를 보니 옛 기억이 났다. 2000년대 중후반, 미국의 국제 정치 전문지 〈Foreign Policy〉의 한국어판을 만들 때 나는 이미 스르자 포포비치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세르비아의 독재자를 '유쾌한' 방식으로 몰아낸 대중운동의 지도자. 나는 그가 쓴 글의 한국어 번역본을 편집했거나, 그것이 단신이었다면 내가 손수 한국어로 옮기기도 했을 것이다.
한동안 잊혀져 있던 스르자 포포비치는 단행본으로 내 책상 위에 돌아왔다. 미국의 리버럴 독자들의 눈높이에 맞춰 '혁명'과 '저항'을 포장해주는 장사꾼이 아닐까 하던 의혹은 접어둔지 오래였다. 그는 실제로 독재 권력과 맞서 세르비아를 넘어 동유럽 전체의 정치적 변화를 견인해낸 중요 인사 중 한 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독재자를 무너뜨리는 법>의 표지와, 짐짓 유쾌한 척 하는 그의 말투에 지나치게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SNS에 '웃기는 짤방' 몇 개 올린다고 세상이 알아서 바뀔 것처럼 떠드는 그런 종류의 책이 절대 아니다. 오히려 정 반대로, 이 책은 사회 변화를 꿈꾸는 이들이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 내용으로 가득차 있다.
독재자를 그럼 대체 어떻게 무너뜨려야 하는가? "뭔가 사소한 것, 적절한 것, 그러면서도 성공적일 수 있는 것, 그것 때문에 죽거나 심한 폭력을 당하지 않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핵심이다."(34쪽) 엘리베이터에 스티커를 붙이는 것 같은 아주 사소한 일이어도 괜찮다. '작은 성공'을 쌓아나갈 수 있다면, 그래서 독재자의 권위에 작은 균열을 낼 수 있다면 말이다.
그러한 작은 도전이 가장 큰 변화를 낳은 사례로, 저자는 간디의 '소금 행진'을 꼽는다. 간디는 인도의 독립을 꿈꾸었지만, '인도를 독립시키라'며 영국에 총부리를 겨누지 않았다. "단순하고 논란의 여지없는 대의를 위해 모든 인도인이, 그들의 정치적 성향이나 신분과 상관없이, 그의 곁으로 모여들어 싸울 필요가 있었다. 1930년, 간디는 결국 답을 찾았다. 소금이었다."(55쪽) 영국에 세금을 내는 대신 바닷가까지 걸어가 소금을 만들겠다는 간디의 행진은, 처음에는 77명의 추종자로 시작했으나, 결국 수만 명이 동참하는 대규모 시위가 되고 말았다.
웃음을 잃지 말라, 독재자에게 겁을 먹지 말라. 모두 맞는 말이고, 좋은 말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핵심은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할 수 있도록, 작은 비폭력 투쟁을 하나씩 승리로 이끌어가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임계점을 넘겨버리는 것이다. 풍자에 힘을 쏟는다며 냉소만 퍼뜨리고, 모든 투쟁을 '이번 투표를 위한 것'으로 만든다면, 오히려 변화는 멀어진다.
쫄지 마? 그건 기본이다. 더 중요한 건 웃음을 터뜨리되 냉소하지 않는 것이다. 간디의 소금 행진 이후 인도의 독립까지는 17년이 걸렸다
2016.04.12ㅣ주간경향 1171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6-04-07
마광수, "사도마조히스틱한 사회", 『한겨레21』, 1997년 3월 6일, 제147호.
사도마조히스틱한 사회
마광수/ 연세대 강사
세계 여러 민족 가운데 머리 좋기로 이름 난 독일 국민들은, 어째서 히틀러를 자기네 지도자로 떠받들었던 것일까? 그리고 히틀러의 카리스마적 독재에 왜 그토록 열광했던 것일까? 히틀러는 군사쿠데타나 폭력혁명을 일으켜 권력을 잡은 인물이 아니다. 여론조작을 통했든 감언이설에 의했든, 어쨌든 그는 대다수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선거를 통해 정권을 장악했다.
히틀러에 그토록 열광했던 이유는
많은 학자들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접근한다. 우선 1차대전 뒤 패배감과 무력감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독일 국민들에게 히틀러가 민족적 긍지를 심어주고, 또 경제발전을 위한 긍정적 대안을 제시했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영웅적 카리스마로 백성 위에 군림하는 독재자는 언제나 난세에 출현하게 마련이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았던 때가 바로 그 ‘난세’의 정점이었던 것이다. 나폴레옹이 프랑스혁명 뒤의 혼란기를 틈타 황제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도 같은 경우다. 히틀러는 1차대전 뒤의 만성적 인플레이션과 민주정부의 무력한 통치에 대한 민중들의 반감을 등에 업고 ‘강력한 지도자’로 부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혼란기라고 해서 무조건 카리스마적 독재자가 출현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독재정치를 은근히 그리워하는 국민들의 집단적 정서가 있어야만 비로소 독재자가 힘을 행사할 수 있다. 심리학자들은 이 점에 착안하여 히틀러의 집권 이유를 설명하려 한다. 그 가운데 가장 설득력있는 이론으로 정평을 받는 것이 바로 에리히 프롬의 ‘권위주의적 성격’ 이론이다. 히틀러의 집권이 가능했던 것은 히틀러가 ‘권위’를 가진 인물이라서 그랬던 게 아니라, 당시의 독일 국민들이 대체로 권위주의적 성격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권위주의적 성격이란 한마디로 말해 사도마조히스틱한 성격을 말한다. 자기보다 강한 자에게는 절대 복종함으로써 마조히즘적 피학의 쾌감을 얻고, 자기보다 약한 자에게는 가혹한 잔인성을 발휘함으로써 사디스틱한 가학의 쾌감을 얻는 심리가 사도마조히즘의 심리다.
권위주의적 성격을 가진 인간은 스스로 자유를 누리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홀로서기’를 도모해 보지 못하고 언제나 독재적 보호자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마치 평생 동안 아버지의 품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자식과도 같다. 종교적 가부장제도가 확립돼 있는 나라의 국민들이나 성적 억압이 심하고 관념 우월주의가 강한 나라의 국민들은 권위주의적 성격을 갖게 되기 쉽다. 나치즘 출현 당시의 독일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히틀러가 집권 뒤 에로틱한 내용의 서적들을 몽땅 불태워 버렸다는 것이 한 증거다. 관념 우월주의는 또한 극기주의나 금욕주의와 통하는데, 히틀러가 철저한 채식주의자였다는 것도 그 역시 지독한 권위주의적 성격의 인간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히틀러는 ‘국가와 민족’을 섬기며 마조히스틱한 쾌감을 맛보았고 국민들 위에 군림하여 그들을 부림으로써 사디스틱한 쾌감을 맛봤다. 독일 국민들은 히틀러를 섬기며 마조히스틱한 쾌감을 맛보았고, 유태인들을 학대하면서 사디스틱한 쾌감을 맛봤다.
권위주의적 성격은 곧바로 관료주의적 성격과 통한다. 윗사람에겐 약하고 아랫사람에 강한 것이 바로 관료주의적 성격인데 이는 개성없고 야심만 많은 출세주의자들이 흔히 갖고 있는 성격이다. 그들은 주체적 자아가 없기 때문에 지위에 의해서만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인받으려 한다. 그리고 높은 지위에 올라가는 가장 효과빠른 수단이 ‘보스에 대한 아첨과 절대 충성’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강력한 아버지’에 의지하는 봉건윤리
우리나라처럼 권위주의가 만연한 나라도 달리 없을 것이다. 수구적 봉건 윤리가 여전히 판치고 있기 때문에 ‘민주화’나 ‘자유화’를 아무리 소리높이 외쳐도 권위주의는 사라질 줄을 모른다. 예전에는 단순히 군사독재가 권위주의적 사회분위기를 만드는 원흉이라고 생각하여 그 해결책의 제시도 쉬웠다. 그러나 외형상 군사독재 문화가 사라진 지금, 권위주의 문화를 없앨 수 있는 뾰족한 처방은 나오지 않고 있다. 그저 ‘도덕성 회복’이니 ‘의식 개혁’이니 하는 투의 막연한 처방만 제시되고 있을 뿐 이다.
이럴 경우 우리는 다시 한번 금욕주의적 봉건윤리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강력한 아버지’의 관념에만 의지하려고 하는 정신편향의 봉건윤리는 자아상실을 가져오고, 성적 억압에 따른 ‘화풀이 문화’를 가져온다. 국민 각자각자가 권위주의적 성격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인으로서의 주체성을 가질 수 있을 때, 그때 비로소 권위주의 문화에 따른 상명하복과 복지부동의 풍조가 사라져 우리나라는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마광수, "사도마조히스틱한 사회", 『한겨레21』, 1997년 3월 6일, 제147호.
2016-03-16
[북리뷰] '알파고 쇼크', 인류의 미래를 묻는다
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김영사, 2만2천원.
'인공지능'(AI). 최근 우리 사회를 새삼스레 달구고 있는 화두다. 알파고 대 이세돌의 바둑 대국에서 알파고가 첫 승을 거두기 시작한 후 사람들은 AI와 제4차 산업혁명과 그로 인해 사라질 일자리 등에 대해 분분하게 의견을 나누고 있다. 구 소련이 미국보다 앞서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을 쏘아올렸던 '스푸트니크 쇼크'처럼, '알파고 쇼크'가 우리 사회를 강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내용을 찬찬히 뜯어보면 대체로 공허하기 짝이 없다. '인간'에 대해, 혹은 '지능'이 무엇이며 어떻게 작동하는지 등에 대해 축적되어 있는 선행 논의가 없다보니, 단순한 흥미 위주의 보도 혹은 '인문학적 통찰'만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모습이다.
인공지능이 인간과의 바둑 대결에서 승리한 지금, 우리는 오히려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질문을 던져볼 수 있지 않을까. 대체 왜 인간은 다른 모든 동물과 다른가? 무엇이 우리를 유인원의 한 갈래에서 '인공지능의 창조주'까지 도달하게 한 것일까?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대담한 질문과 그에 답하는 서술로 인류 역사를 관통한다.
유발 하라리는 모든 논의에 앞서 '인간'이라는 범주를 탈신비화한다. 그 어떤 '인문적' 관점도 배제한 채, 오직 '호모 사피엔스'라는 유인원의 한 종으로만 바라보는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또 다른 유인원인 네안데르탈인과 경쟁 관계였다. 그러나 '우리', 호모 사피엔스는 인지 혁명을 통해 복잡하고 추상적인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고, 더욱 효율적이며 날카로운 무기와 발달된 사냥 체계를 얻었다. 결국 네안데르탈인은 멸종하고 호모 사피엔스가 '인류'로 자리매김한다.
농업혁명은 잉여생산물을 낳았고, 잉여생산물은 그 생산물을 독점하는 계급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호모 사피엔스의 인지 혁명이 이 시점에서 빛을 발한다. 자연적 부족의 최대 규모인 150여 명을 넘어서는 사회를 구성하려면 윤리, 도덕, 법, 계급 등 자연 상태에 존재하지 않는 추상적 원리가 필요하다. "사회를 지탱하는 질서는 위대한 신이나 자연법에 의해 창조된 객관적 질서라고 늘 주장해야"(169쪽) 하는 것이다.
그렇게 수천년이 넘는 시간동안 진행되어 오던 인간의 역사는 과학혁명을 통해 새로운 차원에 접어들었다. "과학혁명은 지식혁명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무지의 혁명이었다. 과학혁명을 출범시킨 위대한 발견은 인류는 가장 중요한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모른다는 발견이었다."(357쪽) 과학혁명은 신, 과거의 현자, 기타 전승되는 문헌의 저자들이 세상의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을 알고 있을 것이라는 수천년 동안의 가정을 폐기했다. 그 결과 인류는 달에 사람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이제 호모 사피엔스는 생명의 영역에까지 과학 기술의 힘으로 침범해 들어가고 있다. 애초에 농업혁명 그 자체가 장기간에 걸친 유전자 조작이었다. 알파고 등 다양한 인공지능 시스템을 구축하여 인간의 사고를 모방하는 것 또한 그러한 경향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알파고 쇼크' 속에서, "우리는 무엇이 되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호모 사피엔스는 스스로를 만들어왔고,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2016.03.29ㅣ주간경향 1169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유발 하라리, 김영사, 2만2천원.
'인공지능'(AI). 최근 우리 사회를 새삼스레 달구고 있는 화두다. 알파고 대 이세돌의 바둑 대국에서 알파고가 첫 승을 거두기 시작한 후 사람들은 AI와 제4차 산업혁명과 그로 인해 사라질 일자리 등에 대해 분분하게 의견을 나누고 있다. 구 소련이 미국보다 앞서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을 쏘아올렸던 '스푸트니크 쇼크'처럼, '알파고 쇼크'가 우리 사회를 강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내용을 찬찬히 뜯어보면 대체로 공허하기 짝이 없다. '인간'에 대해, 혹은 '지능'이 무엇이며 어떻게 작동하는지 등에 대해 축적되어 있는 선행 논의가 없다보니, 단순한 흥미 위주의 보도 혹은 '인문학적 통찰'만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모습이다.
인공지능이 인간과의 바둑 대결에서 승리한 지금, 우리는 오히려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질문을 던져볼 수 있지 않을까. 대체 왜 인간은 다른 모든 동물과 다른가? 무엇이 우리를 유인원의 한 갈래에서 '인공지능의 창조주'까지 도달하게 한 것일까?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대담한 질문과 그에 답하는 서술로 인류 역사를 관통한다.
역사의 진로를 형성한 것은 세 개의 혁명이었다. 약 7만 년 전 일어난 인지혁명은 역사의 시작을 알렸다. 약 12,000년 전 발생한 농업혁명은 역사의 진전 속도를 빠르게 했다. 과학혁명이 시작한 것은 불과 5백 년 전이다. 이 혁명은 역사의 종말을 불러올지도 모르고 뭔가 완전히 다른 것을 새로이 시작하게 할지도 모른다. 이들 세 혁명은 인간과 그 이웃 생명체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그것이 이 책의 주제다.(19쪽)
유발 하라리는 모든 논의에 앞서 '인간'이라는 범주를 탈신비화한다. 그 어떤 '인문적' 관점도 배제한 채, 오직 '호모 사피엔스'라는 유인원의 한 종으로만 바라보는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또 다른 유인원인 네안데르탈인과 경쟁 관계였다. 그러나 '우리', 호모 사피엔스는 인지 혁명을 통해 복잡하고 추상적인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고, 더욱 효율적이며 날카로운 무기와 발달된 사냥 체계를 얻었다. 결국 네안데르탈인은 멸종하고 호모 사피엔스가 '인류'로 자리매김한다.
농업혁명은 잉여생산물을 낳았고, 잉여생산물은 그 생산물을 독점하는 계급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호모 사피엔스의 인지 혁명이 이 시점에서 빛을 발한다. 자연적 부족의 최대 규모인 150여 명을 넘어서는 사회를 구성하려면 윤리, 도덕, 법, 계급 등 자연 상태에 존재하지 않는 추상적 원리가 필요하다. "사회를 지탱하는 질서는 위대한 신이나 자연법에 의해 창조된 객관적 질서라고 늘 주장해야"(169쪽) 하는 것이다.
그렇게 수천년이 넘는 시간동안 진행되어 오던 인간의 역사는 과학혁명을 통해 새로운 차원에 접어들었다. "과학혁명은 지식혁명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무지의 혁명이었다. 과학혁명을 출범시킨 위대한 발견은 인류는 가장 중요한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모른다는 발견이었다."(357쪽) 과학혁명은 신, 과거의 현자, 기타 전승되는 문헌의 저자들이 세상의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을 알고 있을 것이라는 수천년 동안의 가정을 폐기했다. 그 결과 인류는 달에 사람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이제 호모 사피엔스는 생명의 영역에까지 과학 기술의 힘으로 침범해 들어가고 있다. 애초에 농업혁명 그 자체가 장기간에 걸친 유전자 조작이었다. 알파고 등 다양한 인공지능 시스템을 구축하여 인간의 사고를 모방하는 것 또한 그러한 경향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알파고 쇼크' 속에서, "우리는 무엇이 되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호모 사피엔스는 스스로를 만들어왔고,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2016.03.29ㅣ주간경향 1169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6-03-13
[별별시선]박근혜 vs 알파고
가상 대결을 펼쳐보자. 인공지능 알파고와 박근혜 대통령이 바둑 대결을 한다면? 당연히 알파고가 승리를 거둘 것이다. 이세돌 9단을 상대로도 압도적인 실력을 뽐내는 알파고인 만큼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는다.
판을 키운다. 가로 19줄 세로 19줄의 바둑판이 아니라, 이 대한민국 전체를 무대로 삼아보는 것이다. 박근혜 대신 알파고가 대한민국의 대통령 노릇을 한다면 과연 누가 이 나라를 더 잘 이끌어 나갈 것인가.
알파고가 화제라고 별소리를 다 하는구나 싶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나 혼자만의 망상이 아니다. 이세돌 9단이 첫 고배를 마셨던 그 날부터 인터넷을 후끈 달군 주제다. 인공지능이 인간을 이겼다! 이제 컴퓨터의 지배를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삶이 지금보다 나빠질 것인가?
여기서 잠시 알파고의 작동 원리를 설명한 논문의 해설을 참고해 볼 필요가 있다. 알파고는 기존의 게임용 AI와 마찬가지로 ‘몬테카를로 트리 탐색’에 의존한다. 혁신적인 자기학습 프로세스를 통해 기존의 바둑 기보를 연구하고, 그 결과에 따라 ‘선례를 놓고 볼 때 좋은 수’를 추려낸다. 그리고 남은 선택지를 두고 계산해 최선의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바둑을 두는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창의와 직관을 뛰어넘은 게 아니다. 반대로, 우리의 ‘인간적’인 창의와 직관이 어떠한 종류의 계산 과정이다. 다만 사람은 그 계산을 “승부수, 감, 두터움” 같은 식으로 표현할 따름이다. 그에 대해 서봉수 9단은 이렇게 말한다. “수 자체를 모르니까 그냥 감각에 의존해서 이런 정도면 무난하지 않으냐, 이런 식의 표현을 하죠.”
이번 대국에서 확인된 것은 바둑 역시 하나의 게임이라는 당연한 사실이다. 포커, 화투, 체커, 체스, 오델로, 지뢰 찾기까지, 모든 게임은 규칙을 지닌 계산 과정에 의해 진행되므로, 컴퓨터에 의해 수행될 수 있다. 알파고는 바둑이라는 게임의 룰 속에서 최선의 판단을 내리는 컴퓨터인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청년층과 ‘여론 주도 세력’인 중장년층의 반응이 갈라진다. 컴퓨터가 인간의 고유 영역인 창의와 직관을 뛰어넘었다고 주류 언론은 연일 호들갑이다. ‘알파고 쇼크’에 우울증에 빠졌다는 시민의 목소리, 앞으로 인공지능이 수많은 이들의 일자리를 빼앗을 것이라는 전문가의 우려 등이 이어진다.
반면 청년들은 비교적 덤덤하다. 바둑은 게임이고, 언젠가는 컴퓨터가 최고의 프로 기사를 이길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공지능이 인간을 지배한다’는 호들갑스러운 우려에 대해서도 반응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인공지능이 뭐가 어때서? 오히려 ‘천연지능’보다는 우리를 합리적으로 대하지 않을까? 우리 사장도 알파고로 바뀌면 좋겠는데?
자, 그러므로 가상 대결을 펼쳐보자. 박근혜 대 알파고. 과연 누가 더 대한민국을 잘 다스릴 것인가? 지금까지 우리가 이세돌과의 대국을 통해 확인한바, 알파고는 기존의 선례를 충실히 검토하고, 그중 바람직한 결과를 낳았던 사례를 따른다. 그 속에서 최선의 미시적 판단을 내린다. 그렇다. 이것은 우리가 기대하는 훌륭한 의사결정권자의 모습이다.
인공지능이 합리적이지만 비인간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과, 사람이 ‘인간적’인 횡포를 부리는 것, 둘 중에 뭐가 더 무서운가? 만약 당신이 의사결정권자에 가깝다면 인공지능이 두려울 것이다. 반대로 남의 의지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입장이라면, 오히려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는 ‘기계’가 나을지도 모른다.
충분한 시간과 데이터가 제공된다면, 알파고가 박근혜보다 더 나은 대통령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경제가 심각하다며 기업들이 신입사원 초임을 삭감하도록 한다거나, ‘증세 없는 복지’를 운운하는 것 등은, 알파고의 눈으로 볼 때 바둑판에서 알까기를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난센스다. 남은 임기 동안이라도 최소한의 합리성을 갖춘 국정 운영을 기대한다.
입력 : 2016.03.13 21:01:11 수정 : 2016.03.13 21:12:05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3132101115&code=990100#csidxb0730909049cf82913583dcda5ddbf8
판을 키운다. 가로 19줄 세로 19줄의 바둑판이 아니라, 이 대한민국 전체를 무대로 삼아보는 것이다. 박근혜 대신 알파고가 대한민국의 대통령 노릇을 한다면 과연 누가 이 나라를 더 잘 이끌어 나갈 것인가.
알파고가 화제라고 별소리를 다 하는구나 싶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나 혼자만의 망상이 아니다. 이세돌 9단이 첫 고배를 마셨던 그 날부터 인터넷을 후끈 달군 주제다. 인공지능이 인간을 이겼다! 이제 컴퓨터의 지배를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삶이 지금보다 나빠질 것인가?
여기서 잠시 알파고의 작동 원리를 설명한 논문의 해설을 참고해 볼 필요가 있다. 알파고는 기존의 게임용 AI와 마찬가지로 ‘몬테카를로 트리 탐색’에 의존한다. 혁신적인 자기학습 프로세스를 통해 기존의 바둑 기보를 연구하고, 그 결과에 따라 ‘선례를 놓고 볼 때 좋은 수’를 추려낸다. 그리고 남은 선택지를 두고 계산해 최선의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바둑을 두는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창의와 직관을 뛰어넘은 게 아니다. 반대로, 우리의 ‘인간적’인 창의와 직관이 어떠한 종류의 계산 과정이다. 다만 사람은 그 계산을 “승부수, 감, 두터움” 같은 식으로 표현할 따름이다. 그에 대해 서봉수 9단은 이렇게 말한다. “수 자체를 모르니까 그냥 감각에 의존해서 이런 정도면 무난하지 않으냐, 이런 식의 표현을 하죠.”
이번 대국에서 확인된 것은 바둑 역시 하나의 게임이라는 당연한 사실이다. 포커, 화투, 체커, 체스, 오델로, 지뢰 찾기까지, 모든 게임은 규칙을 지닌 계산 과정에 의해 진행되므로, 컴퓨터에 의해 수행될 수 있다. 알파고는 바둑이라는 게임의 룰 속에서 최선의 판단을 내리는 컴퓨터인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청년층과 ‘여론 주도 세력’인 중장년층의 반응이 갈라진다. 컴퓨터가 인간의 고유 영역인 창의와 직관을 뛰어넘었다고 주류 언론은 연일 호들갑이다. ‘알파고 쇼크’에 우울증에 빠졌다는 시민의 목소리, 앞으로 인공지능이 수많은 이들의 일자리를 빼앗을 것이라는 전문가의 우려 등이 이어진다.
반면 청년들은 비교적 덤덤하다. 바둑은 게임이고, 언젠가는 컴퓨터가 최고의 프로 기사를 이길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공지능이 인간을 지배한다’는 호들갑스러운 우려에 대해서도 반응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인공지능이 뭐가 어때서? 오히려 ‘천연지능’보다는 우리를 합리적으로 대하지 않을까? 우리 사장도 알파고로 바뀌면 좋겠는데?
자, 그러므로 가상 대결을 펼쳐보자. 박근혜 대 알파고. 과연 누가 더 대한민국을 잘 다스릴 것인가? 지금까지 우리가 이세돌과의 대국을 통해 확인한바, 알파고는 기존의 선례를 충실히 검토하고, 그중 바람직한 결과를 낳았던 사례를 따른다. 그 속에서 최선의 미시적 판단을 내린다. 그렇다. 이것은 우리가 기대하는 훌륭한 의사결정권자의 모습이다.
인공지능이 합리적이지만 비인간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과, 사람이 ‘인간적’인 횡포를 부리는 것, 둘 중에 뭐가 더 무서운가? 만약 당신이 의사결정권자에 가깝다면 인공지능이 두려울 것이다. 반대로 남의 의지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입장이라면, 오히려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는 ‘기계’가 나을지도 모른다.
충분한 시간과 데이터가 제공된다면, 알파고가 박근혜보다 더 나은 대통령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경제가 심각하다며 기업들이 신입사원 초임을 삭감하도록 한다거나, ‘증세 없는 복지’를 운운하는 것 등은, 알파고의 눈으로 볼 때 바둑판에서 알까기를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난센스다. 남은 임기 동안이라도 최소한의 합리성을 갖춘 국정 운영을 기대한다.
입력 : 2016.03.13 21:01:11 수정 : 2016.03.13 21:12:05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3132101115&code=990100#csidxb0730909049cf82913583dcda5ddbf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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