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 영국. 그나마 개혁적이고 온건하며 사회변화를 추구한다는 자유당이 여당이었고, 자유당의 가장 큰 맞상대는 보수당이었다. 노동당과 아일랜드 자치파 등은 그 틈바구니 속에서 자신들의 지분을 최대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그와 비슷한 사회적 신분 및 교양 수준을 가진 이들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자유당을 지지했다. 수많은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처럼 말이다.
자유당은 그러한 기대를 저버리고 여성들의 권리를 한없이 유보시켰다. 그럼에도 자유당은 자신들이 ‘차악’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에멀린 팽크허스트의 자서전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를 인용해보자. “자유당은 여성이 투표권을 혹시 얻게 된다 해도 자유당을 통해야만 하는데, 자유당을 공공연히 적으로 돌리는 여성들에게 투표권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냐며 비난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친숙한 이른바 ‘잠재적 아군’들의 논리다. 너희들이 지금 뭘 요구하는지 모르지 않지만, 당장 그것보다 시급한 일이 산적해 있다. 그러니 일단 너희들의 요구사항을 접어두고 ‘대의’에 복무하라. 우리 ‘잠재적 아군’들을 적으로 돌리지 말고 ‘조곤조곤’, ‘사근사근’하게 설득하는 태도를 보여라.
이런 주장에 혹하는 사람들 역시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여성 자유당원이나 합법적 참정권론자들 역시 이런 현명한 체하는 논의를 펼쳤다. 그들은 정당을 위해 일하는 것만이 제대로 된 방식이라고 충고했다.” 서프라제트(선거권을 쟁취하려는 여성들)는 콧방귀를 뀌며 자유당을 상대로 한 낙선 운동을 벌였다. 그 결과를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이렇게 회고한다. “우리가 진지하게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자유당 후보를 낙선시키는 데 처음으로 성공한 후라고 생각된다.”
여기서 잠시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보자. 한반도 역사상 단 한 번도 여성들은 인간으로서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사회적 차별은 말할 것도 없다. 인터넷이 전국 방방곡곡에 깔리면서 상스러운 여성혐오적 표현이 전국을 누볐다. 짧은 치마를 입은 여성의 뒷모습, 약물에 정신을 잃고 나체가 된 사진, 원치 않게 촬영된 성관계 장면 등을 남자들은 돌려보고 시시덕거리며 자기들끼리 품평회를 즐겨왔다.
이 도저한 차별과 폭력과 혐오와 멸시의 역사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몇몇 용감한 여성들이 바로 그 공격적인 언어를 되돌려주는, 이른바 ‘미러링’을 시작하면서부터다. ‘김치녀’라고 10년 넘게 멸시당해오던 여성들은 이제 더 이상 ‘하지 마세요’라고 설득하려 들지 않는다. 대신 남자들을 향해 ‘김치남’이라고 맞받아친다. 놀랍게도, 그러자 비로소 남자들이 ‘온라인 언어폭력’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자기들도 맞아보고 이제서야 아프다는 걸 깨닫는 중이다.
“나는 이 시위를 지휘할 것이고, 돌멩이야말로 내가 사용하려는 논쟁 방식입니다. 돌멩이야말로 가장 쉽고 직접적으로 이해시킬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서프라제트는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고, 우체통에 불을 지르면서 여성 투표권을 외쳤다. 우리가 오늘날 당연하게 여기는 여성의 투표권은 바로 그렇게 쟁취된 것이다.
‘미러링’이 불편한가? ‘증오의 총량’이 늘어날까 우려되는가? 20세기 초의 서프라제트와 달리, 21세기 초 대한민국에서 여성혐오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유리창 하나도 깬 적 없다. 한없이 온건하게 포스트잇을 붙이고, 슬픔을 나누고, 지금까지 너무도 속 편하게 기득권으로 살아온 ‘한국 남자’들의 행태를 거울에 비춘 듯 되돌려 보여줬을 뿐이다. 혹자는 여성혐오를 둘러싼 현재의 논란이 ‘남녀 대결 구도’로 향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아니다. ‘남녀 대결 구도’가 맞다. 그리고 여자들이 이겨야 옳다. 여성혐오와 맞서는 여성들을 한 사람의 남성으로서 전적으로 지지한다.
입력 : 2016.06.05 20:35:01 수정 : 2016.06.05 20:38:25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6052035015&code=990100&s_code=ao122#csidx61e949ec133181684245e6a55eeafc2
2016-06-05
2016-05-26
[북리뷰] 생의 말년에 돌아보는 근현대사
손정목이 쓴 한국 근대화 100년
손정목, 한울, 2만3천원
지난 5월 9일, 이 책의 저자인 손정목 명예교수가 별세하셨다는 소식을 접했다. 1928년생, 만 88년의 세월을 거치며 살아왔던 그는 일제시대와 한국전쟁, 이승만 정권과 4.19 혁명, 군사독재와 민주화를 모두 겪었다. 저자 스스로가 이렇게 말한다. "나는 1928년생이다. 일제 강점기를 살았고 미군정기를 관통한 삶이었다."(5쪽) 이 책은 그 역사의 증인이 생의 말년에서 한국 근대사의 다양한 국면과 자신의 삶을 반추한 것이다.
손정목의 인생은 한국의 근현대사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1928년 경북 경주에서 태어나 영남대학교를 거쳐 고려대학교 법학과에 편입하였는데, 직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피난했다. 전란이 끝난 후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하여 공직 생활을 시작하고 군수가 되기도 하였으나 그것이 독이 되고 말았다. 자유당 정권의 3.15 부정선거에 협력하게 된 것이다.
그로 인한 3년간의 휴직을 겪은 후 행정서기관으로 복직하고, 1970년부터는 서울특별시의 기획관리관, 도시계획국장, 내무국장 등을 역임했다. 그 후 1977년부터 1994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서울시립대에 교수로서 몸을 담았다. 일제강점기와 미군정기를 지나 대한민국의 정치적 격동을 모두 겪어내면서, 동시에 정치, 행정, 도시계획 및 개발, 학문적 연구라는 다양한 분야를 두루 경유해냈던 것이다.
그런 그가 "이 책을 쓴 이유는 나의 집사람 때문이다. 54년간 삶을 같이해온 사람과 사별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내게 어떤 변화를 가져다주는 것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5쪽) 부인과 사별한 후 그는 서울시립대에서 도서관 한켠에 마련해준 전용 연구실에 매일 출근하며 자기 자신을 추스르기 위한 원고를 써내려갔다. 그렇게 나온 첫 번째 원고가 정비석의 <자유부인>에 대한 당시 사회의 반응을 다룬 "불륜 앞에 자유로운 자, 돌을 던져라"이고, 두 번째 원고가 "나는 어떻게 부정선거를 치렀나: 3·15 부정선거 이야기"라고 한다. 선거 직후부터 쓰고 싶었던 부정선거 체험기를, 생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써냈다.
저자는 그 부끄러운 역사를, 철저한 자료 조사와 비상한 기억력을 통해 복원해냈다. 본인이 직접 개입한 바 있는 3.15 부정선거 뿐만이 아니다. 미군정시대에 대해 이전에 썼던 글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핵심 인물 이묘묵의 존재를 알아내고 그를 중심으로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3년간의 역사를 그려냈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담배를 피웠던 자신의 경험과 일제강점기 막바지의 사회적 분위기의 접점을 찾아내기도 한다.
"1944년 당시 나는 중학교 3학년이었다. 나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같은 반 학생 거의 모두가 담배를 피웠다. 왜 그랬을까? 이는 일본의 징병제 실시에 대한 항거이고 거부였다."(28쪽) 이 책은 개인적 회고이면서 동시에 역사적 고찰이지만 둘 중 어느 영역에도 완전히 포섭되지 않는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표현을 빌자면 '말년의 양식'이 책 전체를 감싼다.
그가 남긴 저서들의 목록을 훑어보며, 다시 한 번 고인의 명복을 빈다. 덕분에 우리는 어떻게 우리가 지금의 모습으로 살아가게 된 것인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2016.06.07ㅣ주간경향 1179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손정목, 한울, 2만3천원
지난 5월 9일, 이 책의 저자인 손정목 명예교수가 별세하셨다는 소식을 접했다. 1928년생, 만 88년의 세월을 거치며 살아왔던 그는 일제시대와 한국전쟁, 이승만 정권과 4.19 혁명, 군사독재와 민주화를 모두 겪었다. 저자 스스로가 이렇게 말한다. "나는 1928년생이다. 일제 강점기를 살았고 미군정기를 관통한 삶이었다."(5쪽) 이 책은 그 역사의 증인이 생의 말년에서 한국 근대사의 다양한 국면과 자신의 삶을 반추한 것이다.
손정목의 인생은 한국의 근현대사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1928년 경북 경주에서 태어나 영남대학교를 거쳐 고려대학교 법학과에 편입하였는데, 직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피난했다. 전란이 끝난 후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하여 공직 생활을 시작하고 군수가 되기도 하였으나 그것이 독이 되고 말았다. 자유당 정권의 3.15 부정선거에 협력하게 된 것이다.
그로 인한 3년간의 휴직을 겪은 후 행정서기관으로 복직하고, 1970년부터는 서울특별시의 기획관리관, 도시계획국장, 내무국장 등을 역임했다. 그 후 1977년부터 1994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서울시립대에 교수로서 몸을 담았다. 일제강점기와 미군정기를 지나 대한민국의 정치적 격동을 모두 겪어내면서, 동시에 정치, 행정, 도시계획 및 개발, 학문적 연구라는 다양한 분야를 두루 경유해냈던 것이다.
그런 그가 "이 책을 쓴 이유는 나의 집사람 때문이다. 54년간 삶을 같이해온 사람과 사별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내게 어떤 변화를 가져다주는 것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5쪽) 부인과 사별한 후 그는 서울시립대에서 도서관 한켠에 마련해준 전용 연구실에 매일 출근하며 자기 자신을 추스르기 위한 원고를 써내려갔다. 그렇게 나온 첫 번째 원고가 정비석의 <자유부인>에 대한 당시 사회의 반응을 다룬 "불륜 앞에 자유로운 자, 돌을 던져라"이고, 두 번째 원고가 "나는 어떻게 부정선거를 치렀나: 3·15 부정선거 이야기"라고 한다. 선거 직후부터 쓰고 싶었던 부정선거 체험기를, 생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써냈다.
어떤 경우라도 그날의 부정선거를 정당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단 한 번도 그때 자신이 한 일을 정당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다만, 이 점을 밝혀두고 싶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선거는 제1대 국회의원 선거인 1948년 5·10 선거부터 이미 부정선거였다. 정말 슬픈 유산을 물려받았고 나 역시 그 유산을 이어 원흉의 자리에 있어야만 했다. 위에서 내려진 명령에 충실했다고 말하기에는 내 자신이 너무나 부끄럽다.(178쪽)
저자는 그 부끄러운 역사를, 철저한 자료 조사와 비상한 기억력을 통해 복원해냈다. 본인이 직접 개입한 바 있는 3.15 부정선거 뿐만이 아니다. 미군정시대에 대해 이전에 썼던 글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핵심 인물 이묘묵의 존재를 알아내고 그를 중심으로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3년간의 역사를 그려냈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담배를 피웠던 자신의 경험과 일제강점기 막바지의 사회적 분위기의 접점을 찾아내기도 한다.
"1944년 당시 나는 중학교 3학년이었다. 나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같은 반 학생 거의 모두가 담배를 피웠다. 왜 그랬을까? 이는 일본의 징병제 실시에 대한 항거이고 거부였다."(28쪽) 이 책은 개인적 회고이면서 동시에 역사적 고찰이지만 둘 중 어느 영역에도 완전히 포섭되지 않는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표현을 빌자면 '말년의 양식'이 책 전체를 감싼다.
그가 남긴 저서들의 목록을 훑어보며, 다시 한 번 고인의 명복을 빈다. 덕분에 우리는 어떻게 우리가 지금의 모습으로 살아가게 된 것인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2016.06.07ㅣ주간경향 1179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6-05-22
여성혐오에 반대하는 남자들의 항복선언문
웹서핑을 하다 이런 글이 캡쳐되어 돌아다니는 것을 보았다. 검색을 하여 원문을 찾아냈다. 디씨인사이드의 주식 갤러리에 올라와, 2016년 5월 22일 새벽 1시 25분 현재 12731회 조회된 글이다.
강남역 모 노래방 화장실에서 벌어진 여성혐오 살인사건과, 그에 대한 사회적 추모 분위기를 보고 많은 남자들이 못마땅해하고 있다. 단지 한 사람의 '정신이상자'가 벌인 행동일 뿐인데 왜 남자들 전부를 '잠재적 범죄자'로 몰아가냐며, 너희가 그렇게 나온다면 남자인 나도 '항복'하고 남자로서의 책무를 다하지 않겠다는 나름의 분노가 이 선언문에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내용을 꼼꼼히 살펴보면, 물론 전체적으로 볼 때에는 핀트가 잘못된 글이지만, 건질 구석이 있다. 이 "항복선언문"은 그동안 남성들이 (실제로는 그 의무와 책임을 제대로 이행하지도 않으면서) 여성들을 향해 떠세를 부리고 생색을 내던 것이 무슨 요소인지 잘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너희들은 열등하므로 우월한 우리들이 지켜줘야 한다'는 시각을 '시혜적 성차별'이라고 한다. 이 또한 성차별이다. 여성에게 낮은 임금을 강요하는 것만큼이나, 그러한 상황을 당연하다는 듯 전제하고 '너희 여자들은 가난하니까 남자인 내가 먹여살려야 하며, 너는 그런 나를 진심으로 모시고 섬겨야 한다'고 나오는 것 역시 마찬가지로 성차별인 것이다.
후자는 전자와 달리 특정 집단에게 불리하도록 왜곡되어 있는 체제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이해할지라도, 그 체제를 극복하기보다 그 체제 속에서 본인이 '보호자' 노릇을 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구 체제의 존속을 더욱 강화한다.
아무튼 이 "항복선언문"은 본질을 짚었다. 지금의 '여성혐오' 논란을 만약 우리가 '여혐 대 남혐'으로, 혹은 '남자 대 여자의 대립구도'로 본다면, 여자가 이겨야 한다. 남자들이 항복하고 항복선언문을 작성해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무슨 내용을?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할 남자들을 위해 내가 원문을 첨삭해 주겠다.
항복선언문
우리 남성들은 여남 성대결에서 패배하였음을 인정하며 남성성을 모두 포기하고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하나. 절대로 여성을 보호하지 않는다
여성은 남성의 보호의 대상을 받아야만 하는 객체가 아닌 스스로의 주체성을 가진 남성보다도 우월한 존재이다. 때문에 남성들은 여성이 그 어떠한 위험에 처했음을 인지하더라도 자신보다도 우월한 여성에게 절대로 보호행위 또는 도움을 주는 일은 없을 것임을 맹세한다.
하나. 절대로 여성에게 경제력으로 과시하지 않는다
여성은 남성보다 우월하기 때문에 감히 남성이 여성에게 경제력을 과시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한다. 모든 종류의 상품의 구매는 여성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며 남성은 이에 대해 일체의 반대의 하지 않을 것을 맹세한다.
하나. 절대로 여자에게 육체적 도움을 주지 않는다
여성은 결코 남성에 비해 뒤떨어지지 않으며 남성이 할 수 있는 일이면 우월한 여성도 모두 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앞으로 여성의 일을 '여자는 힘들까봐' 남성이 대신 해주거나 여성은 제외하는 행위는 영구히 금지한다.
이상의 내용을 무시하고 위험에 처한 여성을 구조하는 행위, 여성을 위하여 혹은 여남공용의 목적으로 물건을 구매 하는 행위, 여성의 일을 대신 해주는 행위 등을 하는 남성은 남성우월주의자로 간주하고 응징할 것을 맹세한다.
2016년 5월 21일
대한민국 남성 일동
강남역 모 노래방 화장실에서 벌어진 여성혐오 살인사건과, 그에 대한 사회적 추모 분위기를 보고 많은 남자들이 못마땅해하고 있다. 단지 한 사람의 '정신이상자'가 벌인 행동일 뿐인데 왜 남자들 전부를 '잠재적 범죄자'로 몰아가냐며, 너희가 그렇게 나온다면 남자인 나도 '항복'하고 남자로서의 책무를 다하지 않겠다는 나름의 분노가 이 선언문에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내용을 꼼꼼히 살펴보면, 물론 전체적으로 볼 때에는 핀트가 잘못된 글이지만, 건질 구석이 있다. 이 "항복선언문"은 그동안 남성들이 (실제로는 그 의무와 책임을 제대로 이행하지도 않으면서) 여성들을 향해 떠세를 부리고 생색을 내던 것이 무슨 요소인지 잘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너희들은 열등하므로 우월한 우리들이 지켜줘야 한다'는 시각을 '시혜적 성차별'이라고 한다. 이 또한 성차별이다. 여성에게 낮은 임금을 강요하는 것만큼이나, 그러한 상황을 당연하다는 듯 전제하고 '너희 여자들은 가난하니까 남자인 내가 먹여살려야 하며, 너는 그런 나를 진심으로 모시고 섬겨야 한다'고 나오는 것 역시 마찬가지로 성차별인 것이다.
후자는 전자와 달리 특정 집단에게 불리하도록 왜곡되어 있는 체제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이해할지라도, 그 체제를 극복하기보다 그 체제 속에서 본인이 '보호자' 노릇을 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구 체제의 존속을 더욱 강화한다.
아무튼 이 "항복선언문"은 본질을 짚었다. 지금의 '여성혐오' 논란을 만약 우리가 '여혐 대 남혐'으로, 혹은 '남자 대 여자의 대립구도'로 본다면, 여자가 이겨야 한다. 남자들이 항복하고 항복선언문을 작성해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무슨 내용을?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할 남자들을 위해 내가 원문을 첨삭해 주겠다.
항복선언문
-> 여성혐오에 반대하는 남자들의 항복선언문
우리 남성들은 여남 성대결에서 패배하였음을 인정하며 남성성을 모두 포기하고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 잘썼다 ㅇㅇ
하나. 절대로 여성을 보호하지 않는다
-> 하나. 절대로 여성을 보호한다고 깝치지 않는다.
여성은 남성의 보호의 대상을 받아야만 하는 객체가 아닌 스스로의 주체성을 가진 남성보다도 우월한 존재이다. 때문에 남성들은 여성이 그 어떠한 위험에 처했음을 인지하더라도 자신보다도 우월한 여성에게 절대로 보호행위 또는 도움을 주는 일은 없을 것임을 맹세한다.
-> 여성은 남성의 보호를 받아야만 하는 객체가 아닌 스스로의 주체성을 지닌 존재이다. 때문에 남성들은 여성이 어떠한 위험에 처했음을 인지할 경우, 인류의 구성원으로서 최선을 다해 상대방을 돕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그 당연한 일을 해놓고 본인이 굉장한 기사도를 발휘한 양 깝치는 일은 없을 것임을 맹세한다.
하나. 절대로 여성에게 경제력으로 과시하지 않는다
-> 하나. 절대로 여성에게 경제력으로 생색내지 않는다.
여성은 남성보다 우월하기 때문에 감히 남성이 여성에게 경제력을 과시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한다. 모든 종류의 상품의 구매는 여성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며 남성은 이에 대해 일체의 반대의 하지 않을 것을 맹세한다.
-> 여성은 남성과 동등하지만 사회가 여성에게 경제적으로 불평등하게 짜여져 있음을 인지하고, 본인이 돈을 더 번다면 그것은 자신이 가진 남성으로서의 기득권에 힘입고 있음에 동의한다. 가정, 기업, 그 외 조직의 경제적 운영에 있어서 여성의 의견을 상대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경시하지 않을 것임을 맹세한다.
하나. 절대로 여자에게 육체적 도움을 주지 않는다
-> 하나. 절대로 여자에게 육체적 우위를 과시하지 않는다.
여성은 결코 남성에 비해 뒤떨어지지 않으며 남성이 할 수 있는 일이면 우월한 여성도 모두 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앞으로 여성의 일을 '여자는 힘들까봐' 남성이 대신 해주거나 여성은 제외하는 행위는 영구히 금지한다.
-> 여성은 결코 남성에게 뒤떨어지지 않으며 남성이 할 수 있는 일이면 여성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동시에, 남성 호르몬의 분비 여부에 의해 근력 등 육체적 조건의 차이가 발생함을 확인한다. 힘이 필요한 일이 있다면 힘을 쓰되, 생수통 갈아끼우기 같은 별것도 아닌 일을 하면서 자신이 무슨 상남자라도 되는 양 헛폼을 잡는 일을 영구히 금지한다.
이상의 내용을 무시하고 위험에 처한 여성을 구조하는 행위, 여성을 위하여 혹은 여남공용의 목적으로 물건을 구매 하는 행위, 여성의 일을 대신 해주는 행위 등을 하는 남성은 남성우월주의자로 간주하고 응징할 것을 맹세한다.
-> 이상의 내용을 무시하고 위험에 처한 여성을 구조하지 않는 행위, 여성을 위하여 돈을 쓰지도 않고 여성들의 임금 및 소득 격차를 없애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행위, 여성들에게 힘자랑하고 은근히 폭력의 사용 가능성을 드러내는 등의 행위를 하는 남성을 여성혐오자로 간주하고 응징할 것을 맹세한다.
2016년 5월 21일
-> 2016년 5월 22일
대한민국 남성 일동
-> 여성혐오에 반대하는 대한민국 남성 일동
2016-05-12
[북리뷰] '어버이'는 과연 2만원 때문에 '애국'하는가
자유로부터의 도피
에리히 프롬, 홍신문화사, 1만2천원.
그들은 본디 놀림감이었다. 구체적인 액수가 등장하자 더욱 심한 놀림감이 되어버렸다. 어버이연합이 단돈 2만원에 보수 집회에 동원되고 있었다는 언론 보도 이후 우리 사회의 분위기가 그렇다. 애초부터 그 '어버이'들은 존경 혹은 존중의 대상이 되지 못했으나, 이제는 '불쌍하되 동정할 가치가 없는' 무언가로 취급되고 있는 모습이다.
아직 의혹이 다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보도된 바에 따르면, 어버이연합에는 국정원의 입김이 닿아 있는 듯하다. 그들은 2010년대의 중요한 사회적 논란의 현장마다 등장하여 시위를 했다. 그리고 보도에 따르면 국정원은 '일당 2만원'을 주었다.
그러나 이 사태를 바라보는 우리의 고찰은 '일당 2만원'에 멈추지 말아야 한다. 물론 변변한 소득이 없는 노령층에게 그 돈은 소중했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를 가정해보자. 진보·개혁 진영에서 같은 방식으로 그들을 '동원'하고자 했다면, 일당을 두 배로 쳐준다 한들, 그들이 과연 그렇게 적극적으로 달려들었을까? 그 '어버이'들은 돈벌이 뿐 아니라 어떤 정신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연합'의 일부가 되어 집회 현장으로 향했던 것은 아닐까?
1934년, 반유대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유럽을 떠나 미국으로 향한 에리히 프롬은 바로 그런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했다. 왜 독일 국민들은, 혹은 그들 중 일부는, 스스로 자유를 포기하고 히틀러를 지지하였는가? 물론 바이마르 공화국의 시민들은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경기 침체로 인해 고통받고 있었다. 무기력한 사회당, 공산당과 달리 나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경기를 부양하고 경제를 되살리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런 '경제적'인 이유가 전부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렇게 이성적인 이유를 들이대기에는 나치가 내세운 반유대주의, 인종주의, 여성을 포함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혐오가 너무도 노골적이었기 때문이다. 히틀러의 책 <나의 투쟁>은 진작부터 독일 내에서 널리 읽히고 있었다. 나치는 단 한 번도 자신들의 공격성과 약자 혐오를 감춘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거의 절반에 가까운 독일 국민들은, 그런 정당에게 표를 던졌는가?
이미 우리에게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프롬은 저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사회심리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냈다. 사회 현상의 원동력이 되는 심리적 요인을 파해치고, 또한 그 심리적 요인을 낳는 사회적 변화를 짚어내는, 대범한 지적 기획이 바로 <자유로부터의 도피>인 것이다.
인간은 자유를 갈망한다. 하지만 동시에, 특히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지배해줄 절대적인 권위를 희구하며, 자신 또한 누군가에게 그런 절대적인 존재가 되고자 욕망하기도 한다. 전자와 구분짓기 위해 후자를 '권위주의적 성격'이라 이름붙인 프롬은 나치의 집권 당시 독일 국민들이 바로 그 '권위주의적 성격'을 보였음을 분석해냈다.
'어버이'들을 욕하기란 쉽다. 그들에게 값싼 동정의 시선을 보내는 것도, 사실은 그리 어렵지 않다. 정말 힘든 것은 그들이 '왜', '어떻게', 무슨 선택을 통해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는지 이해하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은 나치 독일을 읽어냈다. 1940년, 아직 나치가 전쟁에서 패배하지도 않았고, 그들이 다카우의 강제수용소에서 벌인 만행이 백일하에 드러나지도 않았던 시점에, 이 책이 출간되었다. 반면 우리는, '어버이'들을 이해하고 있는가.
2016.05.24ㅣ주간경향 1177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에리히 프롬, 홍신문화사, 1만2천원.
그들은 본디 놀림감이었다. 구체적인 액수가 등장하자 더욱 심한 놀림감이 되어버렸다. 어버이연합이 단돈 2만원에 보수 집회에 동원되고 있었다는 언론 보도 이후 우리 사회의 분위기가 그렇다. 애초부터 그 '어버이'들은 존경 혹은 존중의 대상이 되지 못했으나, 이제는 '불쌍하되 동정할 가치가 없는' 무언가로 취급되고 있는 모습이다.
아직 의혹이 다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보도된 바에 따르면, 어버이연합에는 국정원의 입김이 닿아 있는 듯하다. 그들은 2010년대의 중요한 사회적 논란의 현장마다 등장하여 시위를 했다. 그리고 보도에 따르면 국정원은 '일당 2만원'을 주었다.
그러나 이 사태를 바라보는 우리의 고찰은 '일당 2만원'에 멈추지 말아야 한다. 물론 변변한 소득이 없는 노령층에게 그 돈은 소중했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를 가정해보자. 진보·개혁 진영에서 같은 방식으로 그들을 '동원'하고자 했다면, 일당을 두 배로 쳐준다 한들, 그들이 과연 그렇게 적극적으로 달려들었을까? 그 '어버이'들은 돈벌이 뿐 아니라 어떤 정신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연합'의 일부가 되어 집회 현장으로 향했던 것은 아닐까?
1934년, 반유대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유럽을 떠나 미국으로 향한 에리히 프롬은 바로 그런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했다. 왜 독일 국민들은, 혹은 그들 중 일부는, 스스로 자유를 포기하고 히틀러를 지지하였는가? 물론 바이마르 공화국의 시민들은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경기 침체로 인해 고통받고 있었다. 무기력한 사회당, 공산당과 달리 나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경기를 부양하고 경제를 되살리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런 '경제적'인 이유가 전부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렇게 이성적인 이유를 들이대기에는 나치가 내세운 반유대주의, 인종주의, 여성을 포함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혐오가 너무도 노골적이었기 때문이다. 히틀러의 책 <나의 투쟁>은 진작부터 독일 내에서 널리 읽히고 있었다. 나치는 단 한 번도 자신들의 공격성과 약자 혐오를 감춘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거의 절반에 가까운 독일 국민들은, 그런 정당에게 표를 던졌는가?
어쩌면 인간에게는 자유에 대한 본유적(本有的)인 욕망 이외에 다른 사람에게 복종하려는 본능적인 욕구가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런 욕구가 없다면, 오늘날 어떤 지도자에 대한 복종이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11쪽)
이미 우리에게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프롬은 저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사회심리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냈다. 사회 현상의 원동력이 되는 심리적 요인을 파해치고, 또한 그 심리적 요인을 낳는 사회적 변화를 짚어내는, 대범한 지적 기획이 바로 <자유로부터의 도피>인 것이다.
인간은 자유를 갈망한다. 하지만 동시에, 특히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지배해줄 절대적인 권위를 희구하며, 자신 또한 누군가에게 그런 절대적인 존재가 되고자 욕망하기도 한다. 전자와 구분짓기 위해 후자를 '권위주의적 성격'이라 이름붙인 프롬은 나치의 집권 당시 독일 국민들이 바로 그 '권위주의적 성격'을 보였음을 분석해냈다.
'어버이'들을 욕하기란 쉽다. 그들에게 값싼 동정의 시선을 보내는 것도, 사실은 그리 어렵지 않다. 정말 힘든 것은 그들이 '왜', '어떻게', 무슨 선택을 통해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는지 이해하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은 나치 독일을 읽어냈다. 1940년, 아직 나치가 전쟁에서 패배하지도 않았고, 그들이 다카우의 강제수용소에서 벌인 만행이 백일하에 드러나지도 않았던 시점에, 이 책이 출간되었다. 반면 우리는, '어버이'들을 이해하고 있는가.
2016.05.24ㅣ주간경향 1177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16-05-08
[별별시선]트럼프, 샌더스, 대한민국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로 사실상 확정됐다. 버나드 샌더스 상원의원이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을 이길 가능성은 없다. 이번 미국 대선은 힐러리 대 트럼프 구도로 전개될 예정이다.
그런데 미국 대선 경선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현상이 발견됐다. 도널드 트럼프, 혹은 트럼프를 지지하는 미국인들을 비웃거나 비판하는 한국의 일부 지식인들이, 동시에 ‘버니’ 샌더스를 열렬히 옹호하는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트럼프는 극우적인 목소리를 공개적으로 표명하며 인기몰이를 하는 포퓰리스트이고, 반대로 샌더스는 진정성 있게 진보적인 입장을 고수해온 사람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한쪽을 비판하고 한쪽을 옹호하는 것이 왜 ‘흥미로운’ 현상일까? 왜냐하면 트럼프와 샌더스는 모두 미국인들의 어떠한 정서를 좌우 양쪽에서 대변하는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두 사람의 인기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문제는 그들이 대변하는 정서가 과연 무엇이냐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것은 ‘억울함’이다. 1945년 역사학자 이안 브루마의 표현을 빌리자면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 “0년”부터 최근까지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미국인들은 억울해하고 있다. 트럼프 열풍, 샌더스 열풍은 동일한 대중적 에너지가 발현된 두 개의 양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트럼프는 이민자와 여성 등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앞세운다. 샌더스는 무슨 질문을 받더라도 ‘그것은 월스트리트가 부를 독점하고 그 밖의 99%를 가난하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표면적으로 두 사람은 전혀 만나는 지점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구체적인 내용을 뜯어보면 그들이 의존하는 대중적 분위기는 크게 다르지 않다. 트럼프는 일본이나 한국 같은 동아시아의 동맹국들이 미국의 방위력에 무임승차한다고 분통을 터뜨린다. 샌더스는 미국이 일본과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체결해 대기업의 배만 불리려 한다고 목청을 높인다. 안보건 경제건, 바깥 세계와 담을 쌓자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미국이 ‘세계의 경찰’ 노릇을 하는 것을 일종의 자연 현상처럼 여긴다. 전 세계의 기업들이 미국 시장 진출을 궁극적 목표로 삼는 것도 마찬가지로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미국은 자국 영토 외의 문제에 대해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잠자는 거인’이었던 것이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통해 그 거인은 깨어났고, 이른바 ‘팍스 아메리카나’가 시작됐으며, 대한민국은 미국이 제공해주는 안보와 그 안보를 바탕으로 한 세계 무역 체계 속에서 성장해 나갔다.
주한미군을 철수하거나 방위분담금을 전부 대한민국이 지불해야 한다는 트럼프의 발언을 보며 한국인들은 우려의 목소리를 높인다. 하지만 ‘미국은 국내에서 소비되는 공산품을 중국이나 그 밖의 저임금 국가가 아닌 미국 내에서 생산해야 한다’는 샌더스의 말은 어떠한가. 전자만큼이나 후자 역시 위험천만한 발언이다. 영국과 프랑스 등 주요 열강들은 샌더스의 말처럼 자국 경제 보호를 위해 식민지를 중심으로 ‘블록 경제’를 구축해 침체의 늪에 빠져들었다. 세계 경제의 파이 자체가 줄어들고 있었기에 열강들 역시 불황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고, 결국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고작 한 세기 전의 일이다.
트럼프를 비난하고 샌더스를 응원하는 것은 마치 ‘미국의 좌파’가 된 것 같은 기분을 우리에게 안겨준다. 하지만 우리는 거의 대부분이 대한민국에 사는 한국인들이다. 샌더스가 ‘나는 사회주의자’라고 선언하며 월스트리트를 비판하는 모습을 보면 속이 후련한가? 그는 트럼프와 마찬가지로, 억울해하는 미국인들의 고립주의를 부추기고 있다. 우리가 마땅히 느껴야 할 감정은 공포다.
입력 : 2016.05.08 20:56:03 수정 : 2016.05.08 21:02:06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5082056035#csidx263ec9d886a4932b31dfcbfe1965d83
그런데 미국 대선 경선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현상이 발견됐다. 도널드 트럼프, 혹은 트럼프를 지지하는 미국인들을 비웃거나 비판하는 한국의 일부 지식인들이, 동시에 ‘버니’ 샌더스를 열렬히 옹호하는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트럼프는 극우적인 목소리를 공개적으로 표명하며 인기몰이를 하는 포퓰리스트이고, 반대로 샌더스는 진정성 있게 진보적인 입장을 고수해온 사람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한쪽을 비판하고 한쪽을 옹호하는 것이 왜 ‘흥미로운’ 현상일까? 왜냐하면 트럼프와 샌더스는 모두 미국인들의 어떠한 정서를 좌우 양쪽에서 대변하는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두 사람의 인기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문제는 그들이 대변하는 정서가 과연 무엇이냐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것은 ‘억울함’이다. 1945년 역사학자 이안 브루마의 표현을 빌리자면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 “0년”부터 최근까지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미국인들은 억울해하고 있다. 트럼프 열풍, 샌더스 열풍은 동일한 대중적 에너지가 발현된 두 개의 양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트럼프는 이민자와 여성 등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앞세운다. 샌더스는 무슨 질문을 받더라도 ‘그것은 월스트리트가 부를 독점하고 그 밖의 99%를 가난하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표면적으로 두 사람은 전혀 만나는 지점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구체적인 내용을 뜯어보면 그들이 의존하는 대중적 분위기는 크게 다르지 않다. 트럼프는 일본이나 한국 같은 동아시아의 동맹국들이 미국의 방위력에 무임승차한다고 분통을 터뜨린다. 샌더스는 미국이 일본과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체결해 대기업의 배만 불리려 한다고 목청을 높인다. 안보건 경제건, 바깥 세계와 담을 쌓자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미국이 ‘세계의 경찰’ 노릇을 하는 것을 일종의 자연 현상처럼 여긴다. 전 세계의 기업들이 미국 시장 진출을 궁극적 목표로 삼는 것도 마찬가지로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미국은 자국 영토 외의 문제에 대해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잠자는 거인’이었던 것이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통해 그 거인은 깨어났고, 이른바 ‘팍스 아메리카나’가 시작됐으며, 대한민국은 미국이 제공해주는 안보와 그 안보를 바탕으로 한 세계 무역 체계 속에서 성장해 나갔다.
주한미군을 철수하거나 방위분담금을 전부 대한민국이 지불해야 한다는 트럼프의 발언을 보며 한국인들은 우려의 목소리를 높인다. 하지만 ‘미국은 국내에서 소비되는 공산품을 중국이나 그 밖의 저임금 국가가 아닌 미국 내에서 생산해야 한다’는 샌더스의 말은 어떠한가. 전자만큼이나 후자 역시 위험천만한 발언이다. 영국과 프랑스 등 주요 열강들은 샌더스의 말처럼 자국 경제 보호를 위해 식민지를 중심으로 ‘블록 경제’를 구축해 침체의 늪에 빠져들었다. 세계 경제의 파이 자체가 줄어들고 있었기에 열강들 역시 불황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고, 결국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고작 한 세기 전의 일이다.
트럼프를 비난하고 샌더스를 응원하는 것은 마치 ‘미국의 좌파’가 된 것 같은 기분을 우리에게 안겨준다. 하지만 우리는 거의 대부분이 대한민국에 사는 한국인들이다. 샌더스가 ‘나는 사회주의자’라고 선언하며 월스트리트를 비판하는 모습을 보면 속이 후련한가? 그는 트럼프와 마찬가지로, 억울해하는 미국인들의 고립주의를 부추기고 있다. 우리가 마땅히 느껴야 할 감정은 공포다.
입력 : 2016.05.08 20:56:03 수정 : 2016.05.08 21:02:06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5082056035#csidx263ec9d886a4932b31dfcbfe1965d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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